# 59
59화 섬마을 삼총사 (2)
전승원 PD의 말에 나와 문영호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파주 탄현에서도 헤이리는 훨씬 깊숙한 곳에 있어, 이동 거리가 만만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영호는 나와 다른 뜻으로 심경이 복잡한가 보다.
“제가 어려서부터 이것저것 운동을 많이 배웠는데도 워낙 몸치라서……. 죄송합니다. 열심히 배워 보겠습니다.”
문영호는 액션 그 자체가 부담이 되는 모양이다.
생각해보니 그럴 법도 했다.
연기자가 연기만 잘하면 된다지만 이 드라마에선 액션이 곧 연기이니까.
연습실에서 검술 같은 것을 연습하던 문영호의 몸짓은 망나니 역할에 더 잘 어울릴 법한 행위 예술이었다.
괜찮아, 형. 연습하면 늘겠지.
나는 문영호를 보고 이런 의미로 입을 꼭 앙다문 채 고개를 끄덕였다.
전승원 PD와의 만남은 짧았다.
서로 바쁜 것을 이해하여 대본 리딩 때 다시 만나기로 하고 청룡 스튜디오를 나섰다.
돌아온 B&M 엔터테인먼트 사옥.
매니지먼트 본부에 올라오자 김남규 팀장이 가방에서 뭔가를 꺼내 내게 내민다.
“이게 대본인가 봐요?”
“응. 4화까지 나왔다고 하더라고.”
‘왕의 신하’라고 적힌 노란색 겉표지가 둘린 두꺼운 대본.
나는 손에 이것을 들고 내려다보았다.
생전 처음 받아본 대본에 손끝이 미묘하게 떨린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긴장.
김남규 팀장은 컴퓨터 책상 앞 의자에 앉으며 내게 의자 하나를 밀어주었다.
“ABS 방송국에서 6월로 편성 받은 퓨전 사극이고, 20부작이야. 남주는 한동하, 조연석이고 여주는 강화영, 채설아. 이렇게 캐스팅 끝났고……4월에 아마 해외 로케를 다녀와야 할 것 같은데. 스케줄을 미리 다 빼놔야겠네.”
“로케이션이요? 어디로요?”
나는 궁금증이 일어 의자에 앉으며 김남규 팀장에게 물었다.
“몽골이나 중국 쪽으로 가겠지? 투자사가 중국 ‘PS 미디어’잖아. 아……. 승마도 배워야 하는구나. 이런! 시간이 너무 촉박한데?”
부팅된 컴퓨터 앞에서 내 스케줄을 체크하던 김남규 팀장이 한숨을 내쉰다.
“시후야.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 건데, 너 승마해 봤니?”
김남규 팀장의 갑작스런 질문에 나는 대답을 망설였다.
해 본 적은 없지만 탈 수 있을 테지.
아마도 잘 탈 것 같다.
고민 끝에 그냥 나는 말을 잘 타는 놈이 되기로 결정을 내렸다.
안 해봤다고 하면 바쁜 스케줄에 승마장까지 추가해야 하니까.
“말은 좀 탈 줄 알아요.”
내 대답에 김남규 팀장의 얼굴이 환해졌다.
“오! 다행이네. 그럼 승마는 빼고……. 오늘이 21일인가? 모레, 프로그램 촬영이 하나 있으니까, 그럼 액션 스쿨에는 그 후부터 나가기로 하자.”
“섬마을 삼총사요?”
“응. 전남 신안 비금도로 갈 거야. 좀 멀기는 하지만 1박 2일이니까 있는 동안 불편해도 좀 참아. 그럼 일단 이틀 동안은 대본 숙지하고 회사 나와서 연기 수업 좀 받자. 대사가 꽤 되던데? 일단 내려가서 대본 한번 읽어 봐.”
나도 빨리 대본을 펼쳐보고 싶긴 했다.
시놉시스를 읽으며 대충 어떤 캐릭터인지 감은 잡았지만 제대로 된 대본을 손에 든 것은 처음이었기에.
나는 빠른 걸음으로 개인 연습실에 도착해 문을 닫고 의자에 앉았다.
내 손에 총 4화까지 적힌 네 권의 대본이 들려 있었다.
막상 펼쳐보려 하니 심장이 쿵쾅거린다.
사실 어려서 음악을 시작하기 전에 ‘나도 연기가 하고 싶다.’라고 생각했던 때가 있었다.
드라마의 멋있는 주인공을 보면 누구나 한 번쯤 생각은 해 봤듯.
나 역시 그랬다.
그래서 거울을 보며 나름 멋진 표정도 지어보고 대사도 따라서 읊어봤었다.
심지어 휴대폰으로 연기하는 것을 녹화해서 혼자 모니터링도 해봤지만 눈뜨고 못 봐줄 지경.
딱 그랬다.
그 후로 시작한 것이 음악이었다.
물론 이것도 그리 뛰어나지는 않아서, 고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접었지만…….
어쨌든 지금 내 손에 있는 대본을 보니 왠지 모를 두근거림과 작은 열망이 샘솟는다.
마치 누군가 내 마음속 금역에 들어와 ‘팍!’ 하고 손을 댄 것 같은 느낌.
심호흡을 한 번 하고 나서 ‘<왕의 신하> 제1화’ 대본의 첫 장을 펼쳤다.
조선.
15살이 된 세자가 궁 밖으로 나가기 위해 내관 한 명과 같이 개구멍을 기어나가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학문에 소질 없고 나라 정사에는 더더욱 관심 없는 세자는 저잣거리에 몰래 나가는 것이 유일한 낙이다.
이 세자가 보위에 오르게 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들.
홍문관 대제학의 아들이자 최연소로 한성부 판윤이 된 허윤.
허윤의 이복동생이고 서자이지만 허윤이 아꼈던 왕의 호위무사 허인.
한성부의 다모인 소화.
정권을 장악한 영의정의 딸, 중전.
4화까지 파악된 주·조연들은 대충 이러했다.
내가 맡은 허인은 홍문관 대제학의 서자로 18살에 무과에 합격한 무사이다.
글 스승인 대제학을 따랐던 세자는 허인에게 처음부터 호감을 보였고 이에 세자의 호위를 맡게 된다.
궁 밖에서 우연히 한성부 다모인 소화를 보고 대번에 반한 왕은 허인을 시켜 소화를 몰래 돕는다.
그리고 자신의 형인 한성부 판윤 ‘허윤’ 또한 소화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어려운 처지에 웃음을 잃지 않고 씩씩한 소화를 보며 계속해서 호감을 느끼게 된다.
4화까지 대본을 단숨에 읽어버린 나는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한 자, 한 자 얼마나 꼼꼼하게 읽었는지 3시간이 흘러 버린 후였다.
얼마나 재미있게 읽었는지 시간가는 줄 몰랐다.
입에 착착 감기는 대사.
역시 박은숙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전작인 <도깨비의 심장>이나 <달의 후예>처럼 캐릭터의 특징을 잘 살리는 개성 넘치는 대사를 읽어 내려가며 나도 몇 번이나 따라 읽어 보았는지 모른다.
그리고 지문들.
연기 초보라고 해도 읽으면 무조건 잘 살릴 수 있도록 상황 제시가 뛰어났다.
내용 전개나 극의 흐름은 말할 것도 없고 캐릭터 간의 밸런스 또한 좋았다.
대본만 읽어 봐서는 누가 주연인지 조연인지 모를 정도였으니.
순전히 연기력에 따라서 캐릭터가 살고 죽고 할 판이었다.
내가 맡은 허인 역도 내면 연기를 잘 살려야 하는 캐릭터.
조금 걱정이 되기는 했다.
신 중에 연기의 신은 없을 테니, 신의 능력을 적재적소에 잘 가져다 써먹어야 할 것이다.
나는 손에 낀 반지를 들여다보며 헛된 희망을 품어보았다.
상급 각성은 언제 할까?
* * *
“우웩!”
목포 북항 선착장에서 배를 타고 비금도로 들어가는 동안 김남규 팀장은 거의 화장실에서 살다시피 했다.
“으아……. 죽겠다. 너는 괜찮아?”
김남규 팀장이 세수하고 나와서 내게 묻는다.
나는 뭐.
멀미에 장사 없다고 해서 이미 멀미약을 먹은 상태이다.
김남규 팀장은 기껏해야 배 타는 시간이 두 시간도 안 된다며 거절해서 저 지경이고.
“괜찮고 말고요. 저는 약 먹었죠. 근데 팀장님은 진짜 멀미가 심하시네요.”
“어제 잠을 못 자서 그래. 오는 동안 훈이랑 번갈아 가면서 운전했잖아. 밤새 먹은 것도 없고.”
김남규 팀장의 말에 앞 좌석을 보니 운전석에 김훈이 널브러져 있다.
장거리 운전이 신체에 미치는 영향은 대단했다.
우리를 태운 배는 아침 5시 55분에 목포항에서 출발하였다.
스태프들의 차량과 나를 태운 차까지 모두 실은 채 신안 비금도로 순항 중이다.
<섬마을 삼총사>의 고정 출연자들이 도착하기 전에 먼저 들어가 숨어 있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고정 출연자로는 <스타 메이킹>에서 만난 적 있는 강화동, 국민 일꾼 이숭근, 드라마 <도깨비의 심장>으로 사랑받은 배우 윤인나였다.
나는 깜짝 게스트인 ‘달타냥’으로 출연한다.
5시간 후에 올 고정 출연자들이 도착 전에 섬에 숨어서 이들을 기다리는 것이 이제부터 내가 할 일이었다.
비금도에 도착한 나는 다시 차를 타고 이동해 제작진이 안내하는 마을에 다다랐다.
마을 회관 문을 열고 들어서니 이미 많은 어르신이 모여 계셨다.
“그려. 오느라 수고했어. 욕 봤네잉.”
“힘들었재? 언능 건너가서 쉬어야 할낀데.”
“아구 아구. 어디서 이쁘쟁한 아들이 왔대? 아야, 어디서 왔냐잉?”
“아따. 서울서 왔다 안 카요.”
내 인사에 답해 주시는 어르신들.
연예계에 입성하고 나서 이런 반응은 처음이었다.
충분히 환대를 받았지만 생각했던 것과는 조금 다른?
어르신들께는 천하장사 강화동 정도는 되어야 연예인인가 보다.
내가 누군지 전혀 모르는 어르신들은 그저 방학 때 시골에 온 손주를 보는 눈빛들이었다.
‘그래도 좋네. 따뜻하고…….’
인사를 마친 후 마을 회관에서 나와 1박 2일 동안 내가 머물 집으로 향했다.
겉보기엔 상한 곳이 많았지만, 전혀 지저분하지 않았다.
커다란 대문을 열고 들어서자 넓은 앞마당이 보인다.
앞마당의 오른쪽에 눈이 제법 쌓여 있는 장독대가 있고, 그 옆에는 커다란 수돗가도 있다.
한쪽에는 옛날 화장실이 자리 잡고 있었는데 굳이 구경하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
마당의 왼쪽으로는 닭장이 있었는데 지금은 마을 고양이 몇 마리가 상주하고 있나 보다.
안채를 마주 보고 사랑채도 있었는데 부엌도 따로 되어 있었고 방도 4개나 되었다.
그런데 지금은 사람의 흔적이 느껴지지 않았다.
“나 어렸을 적에는 여그가 하인들 살던 방이였재. 오래전에 다 나갔어. 몇 명은 아직 한마을에 사는 디 겁나게 잘 살어. 나보다도 부자여.”
뒤에서 들려오는 주인 할아버지의 말소리에 나는 뒤돌아보았다.
“안녕하세요. 할아버지. 제가 오늘 여기서 하루 자고 갈 손주예요. 시후라고 해요.”
“그래그래. 손주라고 생각할 텐게 편안히 있다가 가드라고. 내가 이래 뵈도 반찬을 솔찬히 해. 이따가 밥도 차려 줄 텐게 안채 가서 쉬고 있어야.”
“네. 그럼 푹 쉬다가 갈게요. 감사합니다.”
괜찮다는 데도 굳이 내 가방을 손수 들고 안채의 작은방으로 안내해 준 할아버지는 쉬고 있으라는 말을 되풀이하시며 안방으로 들어가셨다.
방을 둘러보니 여기저기 붙여놓은 카메라들.
후우……. 쉬라는 건지 말라는 건지.
관찰 카메라에 익숙하지 않은 나는 방 한쪽 구석에 가방을 내려놓고 그 옆에 쭈그려 앉았다.
눈만 껌뻑거리기를 몇 분이 흘렀는지 잘 모르겠다.
고정 출연자들이 도착하려면 앞으로 4시간 정도 남았는데 계속 이러고 있어야 하나?
내 고민은 길지 않았다.
마당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꽤 컸기 때문이다.
“아야, 적적하면 거시기 갈래잉?”
나는 방문을 열어젖히며 대답했다.
“네! 갈래요!”
거시기가 어딘지도 모른 채 심심함에 할아버지를 따라나선 나는 묘한 기분이 들었다.
둘이 나란히 걷는 길이 봄 소풍을 가는 길처럼 따뜻하게 느껴졌다.
길에 눈이 녹지 않아 꽤 미끄러운 상태였는데 말이다.
조심하라며 내 팔을 부축해 주는 할아버지의 손길에 마음 한편이 훈훈해진다.
내가 할아버지가 없어서 그런가? 아니면 외딴 섬에 와서 감성에 젖은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따뜻했다.
잡은 손도. 마음도.
* * *
할아버지가 말한 거시기는 바닷가였다.
방파제에 도착하자 능숙한 손놀림으로 낚시채비를 하는 할아버지를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남쪽이라지만, 1월의 바닷바람은 살을 파고드는 수준이었다.
건물 한 채 없는 방파제에서 고스란히 바람에 노출이 되어 덜덜 떨려오는 이빨을 딱딱거리고 있자니 왜 따라왔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주머니에서 손을 꺼낼 용기도 들지 않았다.
훈훈한 마음이 몸까지 따뜻하게 해주는 것도 아니었고.
할아버지도 분명 추우실 텐데…….
“아! 제피로스!”
나는 차디찬 겨울 바닷바람을 봄기운의 미풍으로 바꿔 버릴 마음을 먹었다.
그리고 ‘제피로스(Zephyros)’를 소환하려다가 이내 마음을 바꾸고 능력만 발동했다.
봄바람을 관장하는 신, 제피로스를 소환해서 능력을 다 펼쳤다가는 개나리가 피고 개구리가 동면에서 깰지도 모르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저 손이나 시리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었으니.
할아버지를 힐끗 보니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채비에 전념하고 계신다.
지금이 좋겠지?
나는 양손을 펴들고 허공을 휘휘 저었다.
손짓에 따라 몸을 에던 칼바람이 점점 훈풍으로 바뀌어 간다.
할아버지의 잔뜩 움츠러들었던 어깨가 점점 펴지는 것을 보자 흡족한 내 얼굴에 절로 미소가 지어 진다.
몇 시간 정도는 이 일대에 따뜻한 바람이 불 것이다.
그제야 나는 할아버지의 곁으로 다가갔다.
“할아버지 채비하는 거 도와드릴까요?”
“아녀. 다했어. 근디 괴기가 있을랑가 모르겄네잉. 원래 이짝에 많았는데 엊그제 나와서 잡아 봉게, 겨울이라 그릉가 한 마리도 안 물더라고.”
“흐음…….”
물고기가 없다는 할아버지의 말에 나는 침음성을 흘렸다.
이번엔 어떤 신을 소환해야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