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길 가다 주운 SSS급 반지-53화 (53/170)

# 53

53화 조연 배우라도 (1)

드라마 <황금 들판>의 오디션은 공동 제작사인 청룡 스튜디오에서 제공한 역삼동 사옥에서 시행될 예정이었다.

스무 명 남짓한 인원이었기에 비공개로 진행하기로 하였다.

청룡 스튜디오의 회의실.

오후 2시에 시작될 오디션을 위해서 여러 명의 심사 위원이 이곳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김 선배님, 오셨어요? 식사는 하셨어요?”

“어! 전 PD. 와 있었네?”

회의실 테이블에 앉아 있던 청룡 스튜디오의 전승원 PD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인사를 건넨다.

“저야 뭐. 저희 회사니까요. 촬영 없으면 항상 출근이죠.”

“뭘 이렇게 준비했어? 점심도 못 먹고 왔는데 잘됐네.”

전승원 옆자리 의자를 빼더니 자연스럽게 털썩 앉은 ABS 방송국의 김기만 PD.

샌드위치를 하나 집어 들더니 손을 곧장 입으로 가지고 간다.

“요즘 어때? 방송국 나가니까 좋아?”

“수입은 조금 더 나아요. 또 요즘엔 메가폰을 많이 잡으니까 재미도 있고요. 현장에 많이 나가니까요.”

“그렇구만.”

“참. 이따가 작가님 오신다던데요?”

“박 작가님이 왜? 조연 캐스팅 오디션 같은 데 오시는 분 아니잖아?”

김기만의 질문에 관한 대답은 회의실 입구에서 들려왔다.

“그렇긴 하지만, 날짜가 급하니 오디션 보는 김에 쓸 만한 연기자들이 있으면 이 기회에 캐스팅을 끝냈으면 좋겠어서요.”

작가 박은숙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를 본 회의실 안의 사람들이 모두 자리에서 일어났다.

“작가님 오셨어요?”

“어서 오세요. 박 작가님.”

쓰는 드라마마다 줄줄이 히트한 스타 작가의 등장에 사람들은 예의를 갖추어 인사했다.

그리고 박은숙의 나이가 많기도 했고.

“식사들 안 하셨나보네요. 어서들 들어요. 오늘 오디션에는 몇 명이나 오는 거죠?”

“서른 네 명이에요. 기획사 추천서 받은 스무 명 정도만 보려고 했는데, 극단 쪽에서도 추천서가 들어와서요.”

박은숙 작가의 질문에 전승원 PD가 대답한다.

“음. 그쪽에도 연기 잘하는 친구들 많죠. 마음에 탁! 드는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네요.”

“작가님은 어떤 면을 중점적으로 보실 건가요? 호위 무사 비중이 거의 없던데요.”

김기만 PD가 화장을 고치는 박은숙 작가를 쳐다본다.

손거울을 들여다보던 박은숙 작가는 슬며시 거울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김기만 PD에게 답했다.

“그거야 배우의 연기에 따라 차후에 달라질 수도 있겠죠. 일단은 호위 무사의 대사가 많지 않으니 표정 연기를 좀 소화할 만한 친구였으면 좋겠네요.”

박은숙 작가의 대답에 전승원 PD도 본인의 생각을 보탠다.

“저는 실제로 액션을 좀 하는 연기자가 오면 좋겠어요. 진짜, 몸치들 데려다가 액션 찍을 때가 제일 힘든 것 같아요. 카메라 장난도 한두 번이지. 그런데 작가님. 왕 역할에 ‘한동하’ 괜찮겠죠?”

“왜요? 무슨 문제 있어요?”

“아니, 작가님이 한동하를 콕 집어서 말씀하시니 어쩔 수 없었지만, 사실 인성은 별로거든요. 물론 천하의 박 작가님에게는 그러지 않겠지만, 원래 대본 수정 요구도 많이 하는 편이고요. 스타 반열에 올라 있기는 하지만 연기도 이름값에 비해서 그닥…….”

전승원 PD의 말에 박은숙 작가가 입가에 미소를 그린다.

“괜찮아요. 처음부터 한동하 생각하고 만든 캐릭터라. 멍청하고! 아둔하고! 찌질하고! 이런 연기 잘하잖아요. 그럼 됐죠 뭐. 그리고 어차피 포커스는 ‘조연석’ 배우인데요.”

고개를 끄덕이던 전승원 PD가 시계를 들여다보더니 의자에서 몸을 일으킨다.

오디션 시간이 다가왔음을 알리는 그의 행동을 보고 김기만 PD와 박은숙 작가도 의자에서 일어났다.

“안녕하세요!”

그때 회의실의 문이 열리며 한 사내가 들어선다.

“정 감독, 그냥 그대로 다시 나가. 오디션 시간 다 됐어.”

“이런! 들어오자마자 나가야 하네. 하하하! 그럼 가시죠.”

호탕하게 웃으며 다시 문을 열고 회의실을 나서는 사내.

국내 최고의 스턴트 양성 학원 ‘아트 액션 스쿨’의 대표 정두훈이다.

사실 아트 액션 스쿨은 드라마나 영화, CF 등에서 스턴트를 해 주던 액션 대역 배우들 몇 명이 모여 시작한 업체였다.

이후 정두훈이 영화, 드라마에 직접 얼굴을 드러내며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고, 아트 액션 스쿨은 액션 연기분야에 없어서는 안 될 수많은 인재를 양성하여 진출시켰다.

정두훈이 성큼성큼 앞장서서 금세 도착한 오디션 장.

심사 위원들은 기다란 테이블 위에 본인의 이름이 적힌 의자에 가서 앉았다.

“거! 쓸 만한 사람들 좀 많이 왔으면 좋겠네요.”

자신의 책상 위에 놓여 있는 지원자들의 프로필을 들춰 보며 정두훈이 입을 열었다.

그는 이번 드라마에서 무술 감독을 맡은, PD들이 가장 선호하는 무술 감독이다.

그에게 맡겼다 하면 배우들은 액션 스쿨에 제 발로 걸어가서 수업을 받았고, 격이 다른 액션 장면을 선보였으니 당연한 것이었다.

하루아침에 무술 실력이 ‘확!’ 느는 것은 아니지만.

액션을 할 때 카메라에 찍히는 각도라든가, 더욱 날카롭게 보이는 손날, 턱선이나 표정 등의 변화.

작은 차이가 명품을 만든다고, 정두훈의 지도 유무에 따라 사소한 곳에서부터 차이가 났다.

그것은 십수 년 동안 카메라 앞에서 액션을 선보인 정두훈의 노하우였다.

“하핫! 아까 나도 그 얘기 했는데……. 어쨌든 정 감독님 이번에도 잘 부탁드려요. 감독님이 잘 가르쳐야 내가 편해요.”

옆에 앉은 전승원 PD가 정두훈 감독을 쳐다보며 웃는 얼굴로 말했다.

“걱정 마세요. 제가 누굽니까! 액션 스쿨에 잡아다 놓고 아주 빡세게 굴릴게요.”

정두훈은 호탕하게 웃으며 답했다.

그리고 정말로 그럴 생각으로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준비되셨으면, 1번 지원자 들여보낼게요.”

진행자가 문을 열고 들어서서 시작을 알렸고.

잠시 후, 첫 번째 지원자가 오디션장 안으로 들어섰다.

고요한 분위기 속에서 지원자는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본인의 소개를 시작했다.

“안녕하십니까? 1번 지원자 김혁입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긴장한 것인지 표정은 얼어있는데 입가는 억지로 미소를 짓고 있다.

프로필과 대조하여 지원자를 위아래로 쭉 훑어본 심사 위원들은 손을 바쁘게 움직였다.

누구는 동그라미로, 누구는 가위표를 하며 각자 가진 심사 표를 채워 나간다.

“김혁님. 공통 연기 3번! 시작해 주세요.”

진행자의 주문에 김혁의 표정이 ‘확!’ 바뀌었다.

인상을 ‘팍!’ 쓰더니 땅바닥에 무릎을 꿇고 목청이 떠나가라 소리를 지른다.

“저하! 저하! 그만 슬픔을 거두시지요! …… 승정원일 것이고 그다음은 공조가 될 것이옵니다. …… 지켜 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저하!!”

연기를 마친 김혁은 마지막까지 혼신의 힘으로 목청껏 소리를 질렀다.

“네. 잘 봤어요. 혹시 운동은 좀 하셨나요?”

“요즘 복근을 만들고 있습니다.”

무술 감독 정두훈의 질문에 김혁이 상의를 살짝 들어 올린다.

선명하게 자리 잡은 식스팩을 본 정두훈이 피식 웃었다.

“아니, 헬스 말고요. 합기도나 유도 같은 무술 배워 본 적 있냐고요.”

“아……. 없습니다.”

김혁이 머뭇머뭇 대답하자 이번엔 전승원 PD가 질문한다.

“더 보여 주실 것 있나요? 개인기 같은 거요.”

“네! 검술을 보여 드리겠습니다.”

“오? 그래요? 한번 볼게요.”

한쪽 테이블에 놓여있는 소품용 검 한 자루를 손에 든 김혁이 검집에서 검을 뽑아 들었다.

“휙! 휙휙!”

입으로 바람을 가르는 소리를 내며 칼을 휘두르는 김혁을 보고 정두훈 감독이 고개를 가로젓는다.

“네. 알겠습니다. 수고하셨어요.”

못내 아쉬워하는 김혁을 내보낸 후 박은숙 작가가 입을 연다.

“세자한테 저렇게 소리를 지르는 익위사는 신선한데요? 혹시 제가 저렇게 썼나요? 목청이 얼마나 큰지 깜짝 놀랐네요.”

박은숙 작가의 말을 들으며 정두훈 감독은 심사 표에 가위표를 그려 넣으며 미간에 주름을 잡았다.

“도대체 복근은 왜 보여 주는 거야?”

“노출 씬을 만들어야 하는 걸까?”

박은숙 작가가 혼잣말을 툭 던지는 사이에 두 번째 지원자가 오디션 장에 들어섰다.

* * *

나는 복도에 길게 늘어선 의자에 앉아 방금 오디션을 보고 나온 지원자를 바라보았다.

상태가 좋지 않다.

어깨는 축 늘어져 있고 천장만 올려다보는 지원자의 표정을 보니.

망쳤나보다.

비단 저 연기자뿐 아니라 오디션을 보고 나온 지원자들의 표정이 대부분 저러했다.

그러니 굳이 카이엘의 능력을 쓸 필요도, 안쪽 상황을 살펴볼 필요도 없었다.

안 좋은 소리를 들었거나 심사 위원들의 표정이 안 좋은 것을 보고 나온 거겠지.

“혹시……. 저번 달에 영화 오디션 본 적 있으시죠? <무적의 기사들>이요. 그때 뵌 것 같은데.”

“아. 안녕하세요. 그때 제 앞에서 보신 분이죠?”

나는 귓속말처럼 들리는 조용한 말소리를 따라 고개를 움직였다.

대기하던 지원자 한 명이 방금 오디션을 마치고 나온 지원자에게 다가가서 속삭이듯 묻는 소리였다.

공개 오디션이든 비공개 오디션이든 여기저기 따라 다니다 보면 아는 얼굴이 생길 만도 하겠지.

나는 관심을 끄고 다시 눈을 감았다.

그런데 이번에는 조금 더 흥미로운 대화가 들려온다.

“저……. 혹시 공통 연기는 어떤 거 하셨어요?”

“저는 2번이 걸렸어요.”

“아, 익위사에서 동료들이랑 말하는 씬이요? 잘하셨어요?”

“글쎄요. 잘 모르겠어요. 심사 위원들이 워낙 무표정이라.”

“분위기가 별로인가 보네요. 그때 영화 오디션 장은 분위기는 좋아서 마음이라도 편했는데.”

“일단 박은숙 작가님은 한마디도 안 하시고요.”

“네? 작가님이 직접 오셨어요? 그럼 심사 위원이 네 분이시네요? 원래 조연 오디션 장에 안 오시는 분이라고 하던대.”

“그러게요. ‘허인’ 역할이 아니더라도 다른 배역이라도 맡았으면 좋겠다는 심정이에요.”

박은숙 작가가 심사 위원으로 앉아 있다는 이야기는 처음 듣는 것이다.

이 앞서 오디션을 본 지원자 중 그 누구도 그런 말을 꺼낸 적이 없기 때문이다.

ABS 방송국과 청룡 스튜디오의 공동 제작 드라마이므로, 두 명의 PD와 무술 감독 정두훈이 심사를 한다고 알려져 있었다.

나 또한 그렇게 알고 있었고.

박은숙 작가가 심사 위원으로 앉아 있다고 알린 말소리는 작았지만,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아직 오디션을 보지 못한 지원자들의 얼굴에 긴장이 서리기 시작한 것이다.

박은숙 작가가 심사 위원으로 나섰다는 것은 여러 가지의 의미를 담고 있다.

그중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남은 조연 캐스팅이 오늘의 오디션으로 한 방에 끝날 수도 있다는 것이다.

호위 무사 ‘허인’ 역을 뽑는 오디션이지만 박은숙 작가의 눈에만 든다면, 역량에 따라 얼마든지 남아 있는 배역으로 캐스팅이 된다는 뜻이었다.

교대하듯 오디션 장에 들어갔던 지원자 한 명이 금세 밖으로 걸어 나온다.

후유.

한숨을 내쉬며 천장을 올려다보는 모양이 어째 다들 그렇게 똑같을까?

지원자의 매니저로 보이는 사내가 들고 있던 겉옷과 가방을 그에게 내밀며 묻는다.

“잘 봤어?”

“후우……. 실수했어요. 창을 휘두르다가 떨어뜨렸는데, 정두훈 감독님이 한숨을 쉬시더라고요.”

한숨을 내쉬며 복도를 나가는 사내의 어깨가 축 처진 것이 남의 일 같지가 않은지, 남은 지원자들이 갑자기 손에 칼이라도 쥔 양 이리저리 팔을 휘두른다.

나도 다른 지원자들과 마찬가지로 오디션 때 검술을 보여 주려고 준비했다.

왕의 호위무사 역이기 때문에 긴 창보다는 휴대가 편한 검이 낫겠다 싶었다.

뭐. 캐스팅된 후에 창을 휘두르라 해도 상관은 없다.

나는 활까지 다 가능하니까.

미리 시뮬레이션도 끝냈다.

과묵하고 표정 변화도 많지 않은 무예가 출중한 ‘허인’

이 역할에 필요할 만한 신의 능력.

수많은 검법을 창시하여 인간계에 널리 전수한 ‘금소추’.

태생이 하급 신인 품계 5품의 검법의 신이다.

그저께쯤 나는 금소추를 직접 소환해 보기도 했었다.

무협지에서 보던 그 내공이라는 것이 정말로 존재하는지 궁금하기도 했고.

사실은 운기 조식이란 것도 해 보고 싶었는데,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다른 것이었다.

그냥 몸이 가벼워지고 마음이 평안해지더라는.

몇십 년 내공, 몇 갑자의 내공. 이런 것은 정말 세상에 없는 것인가?

그런데 회사 소품 인테리어 룸에서 빌린 칼 한 자루를 손에 쥐자 몸놀림이 달라졌다.

화려하게 긋고 휘두르는 검에 맞춰 현란하게 움직이는 내 발놀림.

아……. 이게 보법이라는 거구나.

신이 난 나는 연습실 안에서 종횡무진 검법을 펼쳐 보았다.

이리저리 뛰어다니다가 의자에 칼을 스쳤을 뿐인데, 의자가 두 동강이 나버리기도 했다.

매우 놀라 검을 떨어트린 건 당연했다.

이런 게 내공이라면 내공인 건가?

“아. 망했어. 아후…….”

어디선가 들려오는 말소리에 빠져 있었던 생각에서 벗어났다.

어설프게 액션을 보여 주려다가 혼쭐난 지원자의 한숨.

오디션을 망친 지원자들의 스토리가 계속해서 들려왔다.

한 명. 한 명.

복도에 대기하던 지원자들이 점점 줄어든다.

오디션 결과는 개별 통보한다고 했으니 당연하겠지.

기다림의 시간이 계속되고 내 뒤로 8명쯤 남았을 때 드디어 진행자가 내 앞으로 다가왔다.

“26번 지원자. 주시후 님, 안으로 들어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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