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길 가다 주운 SSS급 반지-31화 (31/170)

# 31

31화 동창회 (1)

“뭐지? 그 눈빛은? 존경이냐?”

“너 정체가 뭐야? 그 정도로 기타 치는 놈 아니었잖아.”

“내가 못하는 게 뭐냐? 손대면 다 잘한다고.”

“지랄! 저 곡 내가 요즘 연습하는 곡인데, 3악장은 웬만큼 기타 잡아서는 엄두도 못 내는 곡이라고.”

“죽어라 연습했지. 이제 웬만한 곡은 다 쳐.”

응. 반지 하나 주워 껴서 그래.

속마음을 감춘 채 말도 안 되는 뻥을 늘어놓으며 내 손을 살며시 바지 주머니 안으로 찔러 넣어 감췄다.

죽어라 연습한 손가락이 아니기에.

“먼저들 와 있었네?”

말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리니 이광택과, 곽병준이 함께 입구로 들어서는 것이 보였다.

오랫만에 한강 버스킹 멤버 4명이 다 모였다.

* * *

7시가 가까워지자 손님들이 하나둘씩 들어선다.

고등학교 동창 놈들이라고 해 봤자 연락하고 지내는 친구는 10명 안팎.

그 외의 다른 손님들은 누군가가 예약했다는 다른 팀의 손님이었다.

대부분 꾀죄죄한 몰골로 들어섰는데 모자를 대충 눌러쓰거나 옆에 다가가기만 해도 쉰내가 날 것 같은 새까만 사내들이었다.

가끔 여자들도 섞여있긴 했지만, 몰골은 비슷했다.

대략 50명 정도 후줄근한 티셔츠에 가벼운 차림에 머리에는 모자를 쓴.

용역 회사에서 단체로 회식이라도 하는 건가?

내가 최정근의 어깨를 툭툭 치며 물었다.

“야, 예약한 저 사람들 누구야?”

“어? 내가 말 안했던가? 방송국 사람들 회식이래. 요즘 하는 주말 드라마 촬영 팀이라고 했나? 시청률 30%가 넘는다는데. 나는 드라마를 안 봐서 잘 모르겠지만.”

드라마 촬영 팀이라는데 알만한 배우는 한 명도 안보이고 노가다 뛰다가 온 것 같은 차림의 사람들만 빼곡하게 앉아 있다.

야외 촬영이라도 하고 온 것일까?

“잔 채워라. 오늘 먹고 죽게!”

어디서 가지고 왔는지 최정근이 양주 두 병을 가지고 와서는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이내 양주와 맥주를 섞어 술잔을 만들더니 동창들 앞으로 한 잔씩 밀어놓는다.

“다 잔 들어봐. 우리도 건배사 그거 하자.”

동창들 중 누군가가 말을 꺼내자, 모두 잔을 들어 앞으로 모았다.

“시후의 챌린지 우승을 위하여!”

곽병준의 선창에 모두가 목이 터져라 합창했다.

“위하여!”

나는 모인 친구 놈들을 한번 쭉 훑어보았다.

사실 동창회는 핑계로 필시 나를 응원해 주려고 모인 자리일 것이다.

고마운 자식들.

그래! 우승을 위하여!

나는 잔을 입으로 가지고 와서 단숨에 털어 넣었다.

* * *

조금 전부터 시작한 첫 번째 밴드의 연주와 함께 카페 안으로 몇 명의 배우가 입장했다.

TV에서 심심찮게 볼 수 있는 배우들.

임수진, 백종완, 강화령 등의 원로 배우와 함께 주연 배우로 보이는 남녀 한 쌍이 뒤따라 들어왔다.

미남 배우로 유명한 장동권과 요즘 뜨는 배우 강화영.

모든 인원이 다 모였는지 언뜻 보기에도 50명이 훌쩍 넘어 보이는 저쪽 팀은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 단체로 건배를 하고 있다.

명색이 라이브 카페인데 밴드의 라이브 연주가 잘 안 들릴 정도로 시끌벅적한 분위기였지만 핫한 여배우가 섞여 있어서인지 내 동창 놈들은 이 소란에 꽤 관대했다.

무대에서 연주 중인 밴드도 연주하며 눈길이 강화영을 향하고 있었으니 말 다 했다.

다행히 단체로 건배를 마친 촬영 팀은 그 이후로는 삼삼오오 짝을 지어 술을 마시며 조용해졌다.

갑자기 내 옆에 앉은 곽병준과 이광택이 내 옆구리를 툭 치더니 턱짓으로 강화영을 가리킨다.

“야. 진짜 예쁘지 않냐? 피부에서 꿀 떨어지겠다.”

“맥주 마시는 거 봐봐. 완전 CF네.”

“그래?”

내가 별 관심을 보이지 않자, 아예 내게 등을 돌리고는 둘이 여배우에 관해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는다.

“데뷔한 지 2년 됐다네. 대종상에서 신인상을 받았대.”

“어? 다음 차기작도 결정됐대. 사극이라는데? 제목이 ‘황금 들판’이래. 궁녀로 나오는 건가? 아니면 중전마마?”

둘이서 휴대전화로 인터넷에 접속하더니 줄줄이 읽어 내려가는 것이 그녀의 프로필을 보고 있는 모양이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무대 위에서 공연하는 밴드 팀에게 시선을 돌렸다.

‘엑스 나인’이라고 했던가?

노래는 안 하나 보네. 보컬이 없나?

아까부터 연주만 계속하던 엑스 나인 밴드의 리더로 보이는 듯한 40대 중년 남성이 연주하던 곡을 마치고는 최정근을 불러서 뭐라 속닥인다.

그러고는 나를 계속 힐끗거린다.

나를 쳐다보는 속셈이 뭐지?

뭐 설마 노래 한 곡 하라는 그런 뻔한 레퍼토리는 아니겠지?

내게 터벅터벅 다가오는 최정근은 무대를 가리키며 말을 꺼냈다.

“보컬이 오늘 사정이 있어서 못 나왔는데, 형님이 너 알아보시고는 한 곡 부르려면 올라오라는데?”

왜 이런 예감은 틀린 적이 없나?

살짝 취기가 돌아 귀찮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이내 의자에서 몸을 일으켜 세웠다.

“콜!”

무대에 오른 나는 먼저 엑스 나인 밴드를 향해 인사하고 나서 마이크를 뽑아 들었다.

기타, 세컨드 기타, 베이스, 키보드, 드럼으로 구성되어있는 밴드.

보컬이 빠져 있었는데도 공백이 느껴지지 않는 감칠맛 나는 연주 실력.

자꾸 귀를 기울이게 되는 것을 보니, 확실히 동네 밴드 실력은 아니었다.

“센터 양반. 신청 곡이 있으면 어디 말해 봐요. 우리가 동네 건달들처럼 보여도 웬만한 곡은 한 번씩 다 해봐서 적당히 맞출 수 있거든.”

확실히 그랬다. 동네 건달.

저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기타라니. 예술적 충격이다.

바벨을 들고 다니면 딱일 것 같은 근육인데.

“그럼 혹시 이글스(Eagles)의 「데스페라도(Desperado)」 가능할까요?”

내가 조심스럽게 묻자 악기를 잡고 있던 모두의 얼굴이 환해진다.

“아니 젊은 사람이 그 노래를 알아?”

“그럼요. 이글스가 그냥 밴드인가요? 모르는 게 이상하죠.”

사실은요. 이름은 아는데 노래는 잘 몰라요.

그냥 웬만한 밴드들은 한 번씩들 거쳐 간다는 곡이라 말해 본 것뿐이다.

“악보는? 필요하면 한 부 줄까? 우리가 자주 공연하는 곡이거든.”

“네. 그러면 감사하죠.”

이내 내 손에 쥐어진 악보 한 부를 빠르게 휙휙 넘기며 훑어보았다.

금세 외워버리고는 준비가 되었다는 신호로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러면 바로 시작하지.”

건반을 맡고 있는 사내가 별다른 신호 없이 익숙한 듯 곧장 건반을 누른다.

따라라라, 따라라, 따라라라라.

곧 앰프를 타고 카페에 울려 퍼지는 피아노의 맑은 소리.

어, 이렇게 아무 말도 없이 바로 시작하는 건가?

화려한 인트로 부분이 순식간에 지나가고 마이크를 잡은 내 손을 입으로 가까이 가져갔다.

크게 숨을 한번 내뱉고 시작한 도입부.

“Desperado, why don't you come to your senses?

You been out ridin' fences for so long now.”

피아노 소리에 맞춰 담담하게 노래를 불러나가자 모두가 나에게 이목을 집중하는 것이 느껴진다.

이광택은 휴대전화로 동영상을 찍고 있고, 삼삼오오 모여 술을 마시는 드라마 촬영 팀과 배우들의 시선도 모두 무대를 향했다.

‘무법자여, 당신은 이제 더 젊지 않으니 정신 차리세요. 오랜 방황은 끝내고 진정한 사랑을 해 봐!’하고 충고하는.

뭐 그런 내용의 영어가 내 입에서 줄줄이 흘러나왔다.

“You better let somebody love you, before it's too late.”

한 호흡씩 담담하게 내뱉던 노래가 끝났다.

그리고 스피커를 통해 퍼져 나간 내 목소리가 카페 안에서 완전히 없어질 때까지 잠깐 여운을 즐긴 모든 사람들의 박수갈채가 이어졌다.

친구 놈들이 보내는 존경의 눈빛과 청중들이 보내는 감동의 눈빛을 온몸으로 받던 나는 뒤통수가 따가움을 느끼고 뒤를 돌아보았다.

밴드 멤버들의 눈빛에 온몸이 부끄러울 지경이었다.

청중들과는 다른 의미의 탐욕스러운 눈빛.

“자네……. 밴드 해 볼 생각 없나?”

* * *

“역시! 노래를 어떻게 이리도 잘할 수가 있지? 젊은 사람이 곡 해석하는 능력도 뛰어나고.”

“그러게 말이야. 한두 번 공연해 본 솜씨가 아닌데.”

“아, 제가 제일 좋아하는 곡이라서요.”

나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천연덕스럽게 대꾸했다.

거짓말, 이런 쪽으로는 영 재능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이쯤 되면 반지의 능력 중에 둘러대기 능력도 있는 건 아닌지 의심해 봐야 한다.

“주시후! 주시후!”

카페 안에 조그맣게 울려 퍼지던 내 이름이 어느새 합창이 되었다.

무대 밑에서는 종업원들까지 합세해 목이 터지라 ‘앙코르!’를 외쳐댔다.

“한 곡 더 불러 봐도 될까요?”

무대의 주인공은 이 타임에 공연하는 엑스 나인 밴드였기 때문에 나는 허락을 구했다.

흔쾌히 고개를 끄덕거리는 밴드원들에게 환하게 웃음을 짓고는 다시 마이크를 잡자 환호성이 멎으며 삽시간에 시선이 다시 집중된다.

첫 곡으로 인해 기대감이 배로 증폭되어있는 듯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무대를 올려다보는 사람들의 집중도가 꽤 좋았다.

나는 뒤에 있는 밴드원들을 돌아보며 다음 곡의 제목을 말해 주었다.

모두의 손가락이 오케이 사인을 만들자 마이크를 입으로 가까이 가져갔다.

“앙코르 곡으로 롤링 스톤스(Rolling Stones)의 「satisfaction」을 불러 볼까 합니다.”

띵띵-. 띵띵띵-.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일렉트로닉 기타와 드러머가 중독성 있는 인트로를 시전하며 엑스 나인의 연주가 시작되었다.

마이크를 잡은 나는 의자에서 일어서서 영국의 그 록 밴드처럼 감미로운 목소리로 노래를 시작하였다.

“I can't get no satisfaction (난 만족할 수 없어).

I can't get no satisfaction (난 만족할 수 없어).”

확실히 혼자 노래를 부르는 것과 밴드와의 합주 공연은 많은 차이가 있었다.

호흡을 맞추면 더 신이 난달까?

강한 비트와 리듬감 넘치는 보컬에 가만히 앉아 턱을 괴고 노래를 듣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머리 위로 손뼉 치는 관객들과 하나가 되는 느낌.

신나 하는 이들을 보니 묘한 희열감도 느껴진다.

앙코르 곡이 끝난 후 무대에서 내려온 내게 촬영 팀의 수컷들이 술병을 들고 다가온다.

“노래를 너무 잘하시네. 술 한 잔 드리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아, 네. 뭐……. 주세요.”

썩 달갑지는 않지만, 호의를 내비치며 다가오는 사람들에게 싫다고 할 수만은 없는 법.

그렇다고 내가 술을 못 마시는 놈도 아니고.

이 사람, 저 사람이 주는 대로 몇 잔을 받아 마셨더니 간신히 깼던 취기가 다시 올라오는 느낌이다.

나와 술을 나눈 드라마 촬영 팀 사람들은 나를 그저 놀러 온 손님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

촬영에 바빠서 TV 볼 시간이 없다는데, 날 못 알아본다고 화를 낼 수는 없지 않은가.

그저 빨리 유명세를 키워야겠다고 다짐을 하는 수밖에.

그나마 면을 세워준 것은 조연 배우 최덕수였다.

“그 친구 요즘 슈스챌에 나오는 친구예요. 저번 미션에 센터 했었죠?”

나는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기억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뭘요. 제가 대기 시간이 좀 긴 배우라 웬만한 프로그램은 다시보기 하거든요.”

“네. 저도 드라마에 나오시는 거 잘 보고 있습니다.”

물론 예의상 하는 소리다.

사실 저들이 찍는 시청률 30%가 넘는다는 그 드라마 제목이 뭔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배우 최덕수와 도란도란 나누던 이야기를 끝내자마자 또 한 사내가 대화에 말을 걸어왔다.

“저기, 혹시 시간 되면 잠깐 이야기 좀 할 수 있냐고 물어보는데요.”

“누가요?”

촬영 팀의 스텝으로 보이는 사내가 손가락으로 한쪽을 가리킨다.

방송국 팀 무리에서 따로 떨어져 앉아 나를 힐끗거리는 여자.

강화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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