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
26화 새로운 시작 (3)
“형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뭔가 방법이 떠오른 나는 피아노 의자에 다시 앉아 천상경에 울림을 보냈다.
‘혹시, 여러 명의 신을 한꺼번에 소환하는 것도 가능합니까?’
곧바로 사자의 대답이 공명하여 들려온다.
“가능합니다, 선인이여. 도움이 필요하십니까?”
‘네. 헤바 빌츠, 힙 센트, 이자벨 카셀 그리고 ‘체르니’를 직접 소환하고 싶습니다.’
“신들이 모두 허락합니다.”
천상경에서 허락의 울림이 전해진 뒤 나는 피아노 건반 위에 다시 손을 얹었다.
조금 전과는 다른 기분이다. 능력을 가져다 쓰는 것과 신을 직접 소환하는 것은 확실히 느낌부터 달랐다.
그런데 4명의 신을 소환했더니, 서로 의견 싸움을 벌이는 듯 머릿속이 너무 시끄럽다.
알고는 있었지만 6품 피아노의 신들을 소환해서 모아 놓으니 피아노 연주 스타일이 제각각인 탓에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할지 난감했다.
능력을 가져 와 쓸 때는 몰랐는데, 고집들이 세도 너무 세다.
이들은 소환한 직후부터 자기가 잘났다고 ‘내 연주 최고!’라며 싸우고 있다.
그래서 체르니를 소환한 것이지만.
베토벤의 제자 체르니는 유명한 피아니스트였지만, 편곡 실력도 아주 뛰어났다.
옛날 사람이라 현대 트렌드에 안 맞을까 봐 살짝 걱정했지만, 그의 능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곧 알 수 있었다.
잠시 후 상충하던 신들이 체르니를 통해서 정리되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내 두 번째 연주가 시작되었다.
* * *
드디어 대망의 생방송 의 촬영 날이 다가왔다.
내가 <슈퍼 K-POP 스타 챌린지> 프로그램을 통해 「DREAM OF」 센터로 처음 무대에 서는 날이기도 했고, 블랙 타이거와의 합동 무대로 또 한 번 나를 알릴 수 있는 중요한 날이다.
오늘은 아침 8시까지 상암동에 있는 K.net 방송국에 도착해야 했으므로 김남규 팀장이 데려다주었다. 생방송이 끝날 때까지 방송국에 기다리다가 집까지 데려다준다고 하여 함께 K.net 방송국 안으로 들어섰다.
“팀장님, 케이블 방송국인데도 규모가 매우 크네요?”
K.net 방송국에서는 「DREAM OF」 무대를 선보이려 참여한 슈스챌 연습생들을 위한 대규모의 대기실을 준비해 주었는데, 그곳에 도착하기 전까지 나는 계속 두리번거렸다.
“짜식. 지상파 방송국이 더 크지. 앞으로는 ABS, SAS, OBC 같은 데도 문이 닿도록 드나드실 우리 센터 님께서 웬 호들갑이람?”
김남규는 내가 정식으로 무대에 서는 것이 기분이 좋은지, 아침부터 싱글벙글하였다.
그리고 곧 대기실에 다다르자 내가 메고 있던 소지품이 담긴 가방을 직접 챙기며 들어가라고 고갯짓을 한다.
“이 옆방이 매니저 대기실이니까 내가 필요하면 언제든지 이리로 와. 알았지?”
항상 고마운 김남규 팀장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대기실 문을 열었다.
“형! 시후 형! 진짜 너무 보고 싶었어요.”
대기실 입구에 들어서자 기다렸다는 듯이 하상훈이 달려와 내게 팔짱을 끼고 정신없이 흔들었다.
그래, 그래. 여전히 귀여운 녀석.
“뭔 사내새끼가 애교를 그렇게 떠냐?”
내 쪽으로 다가온 여자 센터 김시영이 내게 팔짱을 끼고 있던 동갑내기 하상훈의 팔을 억지로 치워버리며 핀잔을 주더니 이내 눈이 반달 모양이 되었다.
“헤헤. 오빠, 보고 싶었어요. 잘 지냈죠?”
“아니, 이 녀석들아. 고작 하루 안 봤는데 왜들이래?”
이렇게 말하는 나도 입가에 웃음을 달았다.
막냇동생이 있다면 딱 이런 느낌일까?
배시시 웃으며 서로 애교를 경쟁하는 녀석들을 보니 지금이라도 엄마한테 ‘동생을 가지고 싶다고 얘기해 볼까?’ 하고 진지하게 고민하게 된다.
“어제 슈스챌 첫 방송 나간 거 봤어?”
“당연히 봤지. 1차 탈락자 발표하기 전에 딱 자르던데?”
“오늘 생방 타면 시후랑 시영이가 센터로 뽑힌 거 완전 스포 뿌리는 거네?”
“방송국에서 알아서 하겠지. 어? 시후 왔네?”
“야! 왜 이렇게 늦어? 아까부터 기다렸잖아.”
시계를 보니 딱 8시인데, 뭘 늦었다는 건지…….
나는 대기실 안으로 발을 옮기며 나를 기다렸다는 연습생들을 휘 둘러보았다.
모두들 환한 얼굴로 나를 반기고 있었는데 그들의 모습을 보며 갑자기 가슴 한편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심장이 두근거린다.
오늘은 또 어떤 일이 나를 기다릴까?
나는, 나도 모르게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기분 좋은 웃음을 입에 걸고 그들에게로 한 발짝씩 다가갔다.
* * *
“생방송 진짜 장난 없네. 리허설 하는데도 뭐 이렇게 긴장되냐?”
“그러게, 이렇게 힘들 줄 알았으면 아침밥이라도 먹고 올걸.”
“야! 밥이랑 긴장이랑 무슨 상관이라고?”
“무슨 소리! 배 속이 든든해야 뭐든 힘이 생기는 거라고.”
방금 리허설을 마치고 대기실에 돌아온 여자 센터 김시영과 하상훈이 티격태격한다.
둘은 19살 동갑내기 막내라 그런지 잘 어울려 다니며 대화하면서도 끝은 꼭 말다툼이었다.
그것마저도 귀엽게 보이기는 하지만…….
60명의 연습생이 연습할 때는 남녀 센터가 맨 앞에 서고 그 뒤로 A, B, C, D클래스의 연습생들이 연습한 대형으로 섰다. 다행히 두 차례에 걸쳐 리허설을 하는 동안 동선 실수는 없었다.
리허설을 마친 나도 대기실에 들어와 한쪽에 놓여있는 모니터링 화면 앞 의자에 앉았다.
자연스레 시선이 모니터링 화면으로 갔는데, 마침 옆을 지나치던 김자성이 모니터를 보더니 내 옆에 와서 앉았다.
“어? 시율이네? 완전 귀엽지 않냐? 유림이도 매력 있긴 한데, 나이 먹을수록 자꾸 귀여운 스타일이 좋아지더라고.”
화면에 잠깐 스쳐 지나가는 한 소녀를 보며 나이 타령을 하는 27살 김자성이 팔꿈치로 내 옆구리를 툭툭 건들며 뭐가 좋은지 헤벌쭉 웃는다.
“누구야? ‘스윗 레인’이네?”
지금 무대에는 걸 그룹 ‘스윗 레인’이 리허설 중이었는데, 연습생 몇 명이 내 옆쪽으로 더 합류하더니 요즘 핫한 아이돌이라고 알은척한다.
그렇구나.
그러고 보니 요 1, 2개월 사이에 정신없이 바빠서 TV를 틀어 본 적도 없었다.
무대 위의 저 4인조 걸 그룹은 소매가 나풀거리는 순백의 하얀 블라우스와 화려한 패턴의 빨간 계열의 스커트가 매우 인상적이었는데 긴 머리를 찰랑거리며 안무 동선을 맞춰보고 있었다.
카메라가 그녀들 중 시율의 모습을 클로즈업하자 김자성이 소녀 팬들처럼 꺅꺅거린다.
“아, 형! 왜 그래요. 진짜 웃겨.”
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김자성을 째려보았다.
그런데 방금 화면에 클로즈업된 시율은 어디서 본 적 있는 것 같은 얼굴이었다.
요즘 TV를 안 본 지 좀 되었지만, 걸 그룹이라니까 어디선가 봤겠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넘기려고 하는 찰나, 김자성이 호들갑을 떨었다.
“야야! 나온다. 시율이 트레이드 마크! 약속해 줘어~.”
화면에 가득 잡힌 시율이 새끼손가락을 들며 환하게 웃고 있다.
‘어디서 본 얼굴인데……. 뭐, 어디서 봤겠지. 예쁘긴 하네.’
스윗 레인이 리허설을 마치고 무대를 내려오자 다음 가수가 올라갔다가 내려오고, 또 다음 그룹이 계속해서 리허설을 이어나갔다.
끝없는 대기의 시간.
매니저들이나 회사 관계자들이 모여 있는 옆방, 다른 대기실에서 간식을 집어다 나르는 연습생들도 있었고, 의자를 붙여놓고 틈틈이 자는 녀석들도 있었다.
앞으로도 본 무대까지 남은 시간은 6시간.
점심 식사로 지급된 도시락을 까먹고 나니 다들 식곤증이 밀려오나 보다.
나는 마땅히 할 것이 없어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내 들었다.
메신저 톡 12개의 신규 메시지.
- 어제 슈스챌 본방 사수함. 생방 준비 잘되감? 우리 이따가 광택이네서 또 본방 사수 할거임.ㅋㅋㅋㅋ 근데 혹시 엔딩 포즈 때 뭐 할 거냐? 윙크하면 듸진다.
버스킹을 함께 했던 친구 놈들과 단체 메시지 톡 방을 만들었는데 윙크하면 죽인다는 살인의 의지를 보여주는 최정근의 메시지가 눈에 들어왔다.
나는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피식거리며 다른 새 메시지를 확인했다.
- 사랑해, 동생아. 오늘 잘하고 와. 이따가 엄마 아빠랑 같이 생방 지켜본다.
누나의 메시지.
우리 가족들, 갑자기 왜 저래? 요즘에 가족애가 지나치게 난무한다.
갑자기 돋는 닭살을 문지르며 급하게 다음 새 메시지 창을 띄우며 시간을 보내는 사이.
끝이 없을 것 같던 리허설 대기 중에 슈스챌 연습생들의 대기실이 갑자기 소란스러워졌다.
“블랙 타이거 지금 왔대.”
누군가가 대기실 문 앞에 서서 안쪽에 있는 연습생들에게 상황을 알렸다.
그리고 음원 순위 1등을 놓치지 않는 인기 그룹 블랙 타이거를 보려 연습생들이 문밖으로 뛰어나갔는데, 대부분이 여자 연습생들이었다.
“아니, 무슨 아이돌 보겠다고 저렇게 뛰냐?”
"블타 동혁 선배님이 실물이 장난이 아니래요. 진짜 눈부시다던데요?”
“야, 눈부신 거로 치면 시후가 지존 아니야? 동혁이 아무리 잘생겨 봤자 시후한테 안 될걸? 시후야 너는 블타 실제로 봤어? 같은 소속사잖아.”
진국과 하상훈이 궁금한 얼굴로 나를 응시한다.
나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대답했는데, 이 둘의 표정을 보니 블랙 타이거를 보러 뛰어나가는데 합류하고 싶어 하는 얼굴들이다.
“봤지.”
‘봤지. 어제도 봤지.’
괜히 자랑처럼 들릴까 싶어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말을 꾹 참았다.
“어때요, 형? 동혁 선배님 실물 진짜 눈부셔요?”
하상훈의 질문에 나는 지그시 진국을 바라보았다.
“응. 눈부시고, 누구와 다르게 아주 어려 보여. 고딩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야.”
“뭐, 뭐야! 왜 날 봐? 나도 어디 나가면 내 나이로 안 봐! 이씨!”
진국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앉아 있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고 그 모습을 보고 나와 하상훈은 키득거렸다.
문밖에서 떼로 인사하는 소리도 들리고 시끌시끌하더니 문밖에 버선발로 뛰어나갔던 연습생들이 들어오는 것이 블랙 타이거가 이제 대기실 안으로 들어갔나 보다.
모든 출연자가 같은 층에 있는 대기실을 썼는데, 연습생들은 다른 가수들을 대할 때와는 다르게 블랙 타이거에게 관심이 높았다.
그래서 아이돌의 아이돌이라는 말이 있나 보다.
그런데 약간의 시간이 흘렀는데, 또 문밖이 소란스럽다.
대기실 밖에서부터 들리는 환호성이 점점 커지더니 대기실 안까지 들썩거린다.
갑자기 무슨 일인데 저래?
나와 옆에 있던 진국, 하상훈은 소리의 근원지를 찾아 뒤를 돌아 대기실 입구를 바라보았다.
한껏 멋을 낸 블랙 타이거 멤버들.
이들이 대기실 문밖에 서서 안을 들여다보며 기웃거린다.
“블랙 타이거 선배님들이잖아?!”
옆에서 하상훈이 큰소리로 외친다.
‘안다, 알아. 나도 보여.’
대기실 안쪽을 두리번거리던 블랙 타이거 멤버들.
그중에서도 유독 귀여운 얼굴의 한 사내와 내 눈이 마주쳤다.
이내 대기실 안으로 들어와, 성큼성큼 내 쪽으로 다가오는 한 사내.
‘아니, 저 형이 여긴 뭐 하려고 들어와?’
나는 난감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후야!”
블랙 타이거의 막내 진우가 다가오더니 내 어깨 위에 한쪽 손을 ‘턱!’ 하고 올린다.
“아, 형. 여긴 어쩐 일로 오셨어요?”
“응. 우리 시후 떨지 말고 잘하라고 응원하러 왔어. 화이팅!”
진우는 환하게 웃으며 입구에 서 있는 블랙 타이거 멤버들을 바라보았다.
내가 따라서 시선을 옮기자, 동혁, 태곤, 성운이 씩 웃으며 기를 넣어 준답시고 장풍을 쏘는 포즈를 취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