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
18화 능력 발휘 (2)
“안녕하세요. 저는 B&M 엔터테인먼트 소속 주시후라고 합니다. 김남규 팀장님과 함께 왔습니다.”
일단 인사는 하고 보자는 생각에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아무리 봐도 하고 있는 행색을 보니 저 남자가 대표인 것 같다.
세계적인 상을 여러 번 수상했다고 들어서 캐주얼한 자유형 인간을 생각했지만, 하긴 오너가 아니고서야 저렇게 옷 입고 출근하는 직원을 가만둘 리가 있나?
저 남자의 옷차림은 과해도 너무 과했다.
우리 누나가 입는 게 더 잘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하긴, 예술 하는 사람인데 그 속을 누가 알아?
겉모습으로 사람 판단하면 안 된다는 것을 벌써 여러 번 느낀 터였다.
“아아. 남규랑 왔다면 오늘 포토 찍기로 한 그 베이비구나? 잘 왔어요. 웰컴. 나는 J.R 대표 류준이예요.”
류준이 내게 성큼 다가와 허그를 하더니 떨어지질 않는다.
“대표님? 그만 떨어지시죠?”
내 뒤에서 김남규 팀장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이윽고 한걸음 뒤로 물러난 류준이 내 어깨너머로 보이는 김남규를 째려보았다.
“넌 대체 시간 개념이 있는 쉐끼니? 없는 쉐끼니? 내가 응?! 기다려야겠니이?!”
“응? 그게 무슨 소리야? 참내, 내가 몇 시까지 온다고 했는데?”
“4시?”
“그럼 지금 몇 신데?”
“3시 10분? 어머나! 어머나. 내가 시간을 잘못 봤네. 씅내서 미안, 미안.”
류준은 나를 쳐다보며 민망한지 흐트러진 자신의 단발머리를 귀 뒤로 넘기며 눈을 찡긋거렸다.
“자자, 서서 이럴 게 아니라 우리 좀 앉자. 이리와요, 시후 씨.”
류준을 따라서 스튜디오 한편에 있는 대표실로 발걸음을 옮기는데 뒤에서 따라오는 김남규가 설명해 주었다.
“내 이종사촌 형이야.”
아하. 이런 대형 스튜디오에 불쑥 연락하고 쳐들어올 수 있는 상황.
가족이라고 하니 이해되었다.
세계적인 포토 그래퍼가 사촌 형이라니. 김남규 팀장 알고 보니 능력 있네?
그래. 에오스가 한 말이 불현듯 떠올랐다.
“가진 능력은 있지만, 운이 지지리도 없는 인간.
성품은 너무 착하나 남에게 이용만 당하는 인간.
누구보다 신을 믿으며, 끝없이 신에게 기도하는 인간.
너와 모이라이의 인연의 실로 묶인 자들. 이들이 너를 도울 것이다.”
김남규는 분명 날 처음 발탁한 인간. 나랑 인연으로 엮였다고 해도 이상할 것 없는 인간이다.
그럼 김남규는 저 중 어떤 인간이지?
여긴 인맥이 능력이 되는 바닥이니까 운이 지지리도 없는 인간인가?
김남규 팀장이 내가 가까이 붙어서 팔꿈치로 나를 툭 치는 바람에 상념이 달아났다.
“그리고, 예쁘고 반짝이는 걸 되게 좋아해. 너처럼.”
김남규 팀장이 마지막 말은 내 귓가에 최대한 낮은 목소리로 했다.
흠칫 놀라는 내가 재밌는지 고개를 숙이고 큭큭거린다.
“그런 농담 재미없는데요.”
나는 김남규를 한번 째려보고는 대표실에 들어섰다.
화려한 걸 좋아하는 타입인 줄 알았는데, 의외로 대표실은 모던했다.
6층 건물 전체를 다 쓰는 포토 스튜디오의 대표실 치고, 비록 넓은 공간은 아니었지만, 전체적으로 깔끔한 화이트 톤으로 꾸며 놓아서인지 평수에 비해 넓고 깨끗해 보였다.
우리 셋은 원형 테이블에 둘러앉아 직원이 가져다 준 커피를 홀짝거렸다.
침묵 속에서 홀짝홀짝하는 소리만 듣기를 오래.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나는 시선을 허공에 둔 채 눈치만 보고 있고 김남규는 애꿎은 커피 잔만 만지작거렸다.
답답함을 이기지 못하고 김남규 팀장이 조심스레 먼저 말을 꺼냈다.
“형, 언제 시작해? 우리 시후가 저녁에 실장님이랑 면담이 잡혀있어서 빨리 시작했….”
“가만 있어봐, 시키야! 형이 지금 커피 마시잖니. 너 때문에 좀 전에 급하게 제주도에서 올라오느라 티타임을 놓쳤어.”
류준이 짜증이 묻어난 목소리로 김남규의 말을 자르고 째려보았다.
그리고 이내 나를 바라보며 싱긋 웃는다.
“이름이 시후라고? 참 좋은 이름이다. 내가 커피 금방 마시고 예쁘게 찍어 줄게요. 조금만 기다려요.”
“네. 천천히 드세요. 커피는 음미하는 맛이죠.”
“어머어머. 뭘 아네. 이 커피 맛있지 않아? 내 프렌드가 매번 직접 블렌딩 해서 가져다 주는데, 런치 후에 내가 이걸 꼭 마셔야 해요.”
“어쩐지 커피 맛이 예사롭지가 않다고 생각했어요. 향도 너무 좋고요.”
내가 말을 맞춰 주자 기분이 좋아졌는지 류준이 커피를 마저 홀짝거리며 콧노래를 흥얼거린다.
김남규 팀장은 통유리로 되어있는 대표실 벽 너머로 직원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것을 보고는 류준에게 물었다.
“근데 형, 어떻게 6층 스튜디오가 비어 있어? 항상 예약 풀이잖아. 우리 시후가 운이 좋은 건가?”
“으응? 여기는 거의 안 써. 6층은 내가 셔터 누를 때만 쓰잖아. 딴 스튜디오는 풀 부킹이지. 아마 3층에 영화배우 장동훈이 포스터 찍고 있을 걸? 4층에는 김건무가 새 앨범 낸다고 재킷 사진 찍고 있는 것 같던데.”
“아아. 형은 맨날 바빠서 거의 회사에 없지? 학회에 세미나에 강연에…. 그러고 보니 오늘 시후가 운이 좋은 게 맞네.”
“야아! 내가 여기 원래 있었던 게 아니라아, 네가 전화해서 제주도에 있는 나를 불러낸 거잖아.”
“에이. 형이 전화한다고 올 사람이야? 시후가 오늘 사진 찍을 운명이니까 찍게 된 거지.”
저 두 어른의 대화를 듣고 있자니,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특히 천재 포토 그래퍼니 뭐니 기업 수준의 회사를 가지고 있는 대표가, 말 끝머리의 억양을 한 옥타브씩 올리며 말하는 것이 귀엽기까지 했다.
꼭 초등학생이 무엇을 우길 때와 같은 모양이랄까?
“하긴. 시후 씨가 운이 좋기는 하네. 내가 어디 아무나, 아무거나 찍는 사람인가?”
류준은 스스로의 실력과 위치에 관한 자부심이 대단했다.
그럴 만했다.
찍기 싫은 건 목에 칼이 들어와도 안 찍고, 찍고 싶은 사진은 목숨 걸고 담아낸다고 스튜디오에 오는 차 안에서 이미 김남규 팀장에게 들은 바 있다.
그만한 집착과 고집이 있으니까 세계적인 사진 작가가 되었겠지.
사실 J.R 스튜디오는 나 같이 데뷔도 안한 초짜 신인이 올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언감생심 그 누가, 당일 아침에 전화해서 예약을 잡고 류준에게 직접 셔터를 부탁할까?
나는 류준과 김남규에게 각기 다른 이유로 존경의 눈빛을 보냈다.
눈이 마주친 류준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세팅이 다 되었나보네? 그럼 이제 가볼까아?”
* * *
“오케이! 이것도 오케이! 시후 씨, 고개를 살짝 숙여 봐요. 턱을 안으로 당기고. 오케이. 시선은 45도. 그렇지! 퍼펙트!”
등 뒤에 화이트 스크린을 두고 시키는 대로 포즈를 잡고 있는 나를 보며 류준이 감탄사를 내뿜는다.
“시후 씨, 의상 체인지 해요. 잠시 쉴까?”
류준의 말에 스태프 두 명이 바삐 움직인다.
김남규 팀장이 가지고 온 옷과 액세서리를 다음 콘셉트에 맞게 적절히 조합하고 있다.
원래 촬영할 때 교체할 의상은 담당 코디네이터가 챙기는 것이 보편적인데, J.R 스튜디오에 갈 때는 최소한의 인원으로 가는 것이 좋다며, 김남규 팀장이 직접 옷을 싸들고 왔었다.
그리고 콘셉트와 테마에 따라 메이크 업도 바뀌기 때문에, J.R 스튜디오에서는 전속 메이크업 디자이너를 배치해 중간 중간 류준이 요구하는 대로 메이크업을 바꾸어 주었다.
휴식 시간은 말 그대로 정말 잠시였고, 5분 후 다시 사진 촬영이 재개되었다.
“내가 잘생기고 예쁜 거 지겹게 보잖아? 근데 시후 씨는 특별한 느낌이야. 어머어머 저것 봐. 꼭 등 뒤에 아우라가 있는 것 같다니까.”
처음 찍어 보는 프로필 사진이라 약간 긴장하며 진지한 표정으로 촬영 중이던 나는 류준의 호들갑에 긴장이 풀어져 얼굴에 미소가 걸렸다.
“어쩜 웃는 것 봐. 너어무 예쁘다. 남규야, 이런 엔젤을 어디서 데리고 왔어?”
김남규 팀장은 류준의 뒤에 팔짱을 끼고 서서 이 모든 상황이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거리며 입을 귀에 걸었다.
“시후 씨, 이제 교복 콘셉트로 가 볼게요. 방송국에 내야 한다고 했지? 아 잠시만.”
류준은 자신 뒤에 서있는 스태프 중 한 명을 쳐다보며 지시했다.
“자기야, 뭐해? 콘셉트 바꾼다니까? 모델 메이크업 고쳐줘야지. 정신 안 차릴 거야?”
지목 당한 메이크 업 스태프는 넋이 나간 표정으로 서 있다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죄송합니다. 모델이 너무 예뻐서 정신을 놨나 봐요.”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쪼르르 달려와 아이라인을 더 길게 그려 전체적으로 반항아의 이미지를 연출해 주었다.
나는 순간 반지의 능력을 발동하고 싶은 욕구가 크게 일었다.
이런 순간에 써먹을 신의 능력을 미리 봐두었는데, ‘향락의 신’ 아카샤(Akasha) 정도면 매력 어필을 충분히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타락과 향락, 고통과 성적인 아름다움을 관장하는 어둠의 여신 능력.
6품 천운자는 인간이었던 선인이 신계에 올라가 품계를 받은 경우도 있지만, 원래 하급 신으로 탄생한 신들도 많았다.
아카샤도 원래 태생이 하급 신이다.
나는 아카샤의 능력을 발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