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
17화 능력 발휘 (1)
평일 오전 11시의 지하철 내부는 한적한 편이다.
길게 줄지어 놓인 의자에 드문드문 사람들이 앉거나 문가에 서서, 저마다 휴대전화를 들여다 본다거나 음악을 듣는다거나 잠을 자는 둥 남의 일에 관심 없는 사람들처럼 각자의 일을 본다.
2분마다 역에 정차할 때 흘러나오는 방송을 제외하고는 들리는 말소리도 거의 없다.
그 누구도 나에게 눈길을 주지 않고, 나도 다른 사람들에게 전혀 관심을 갖지 않았다.
어제까지는…….
‘아씨! 모자라도 쓰고 올 것 그랬나.’
평상시와 다름없이 지하철에 탑승한 나는 내릴 때까지 죄인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아침에 거울을 보며 나는 내 분위기가 바뀌었다는 건 느꼈지만, 이처럼 타인의 주목을 받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집에서 나왔을 때만 해도 지하철 역까지 걸어오며 행인들이 잘생겼다고 툭툭 던지는 말은 참 듣기 좋았다.
22년간 착하게 생겼네, 순하게 생겼네, 나름 볼수록 매력 있네, 이런 말만 들었으니 어깨가 쫙 펴지기도 했다.
반지의 능력 중에 7품 신수 ‘카이엘’의 능력을 빌어 굳이 멀리 있는 말까지 주워 들으려고 했으니, 태어나서 가장 신이 나는 순간 중에 하나가 아닐 수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최대한 얼굴을 가리려고 고개를 푹 숙인 채 땅만 보고 있다.
도저히 지하철 안의 사람들이 숙덕거리는 소리 때문에 민망해서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저 사람 봐봐. 얼굴이 빛나. 존잘!”
“여보세요? 야, 나 지금 지하철 탔는데 연예인 같이 탔어. 이름? 몰라. 연예인 맞을걸?”
“모델인가? 진짜 비율 작살.”
자기들끼리 하는 이야기가 왜 이렇게 크게 들리는 거야?
아! 신수 카이엘 능력이 발동 중이구나.
7품의 ‘카이엘’은 독수리의 눈, 돼지의 코, 박쥐의 귀를 달고 있는 신수였다.
요즘 내가 자주 사용하는 능력인데, 아주 멀리 보고 아주 멀리 있는 소리도 놓치지 않으며 후각도 뛰어나서, 엿듣고 몰래 보기에 딱 좋은 능력이다.
엑스트라 링에는 한 번 사용하면 다시 발동해야 하는 능력이 있는 반면, 발동 해제를 해야 능력이 사라지는 경우도 꽤 많았다.
때론 안 보고 못 듣는 게 심신에 좋을 때도 있는 법.
‘카이엘의 능력 해제’
하루아침에 풍기는 기운이 달라진 내 얼굴이 꼭 죄를 짓는 기분이었다.
원래 내가 가진 패가 아닌데, 뻥카를 치는 것 같은…. 뭔가 사기 치는 느낌.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보는 사람들마다 내 외모를 극찬 중이다.
아침에 입을 옷이 마땅치 않아 대충 청바지에 티셔츠를 걸치고 나왔음에도, ‘사람들은 프리하게 입었네’, ‘라인이 살아있네’, ‘모델 같네’라고 했다.
물론, 예전의 내 몸뚱어리 같았으면 들을 엄두도 내지 못하는 말이었겠지만…….
오늘 아침 내게 백옥 같은 피부와 더불어 신체에도 변화가 찾아왔다.
옷에 감추어져있어 남들은 잘 알지 못하는 변화지만.
비보잉을 해도 전혀 무리가 되지 않을 만한 탄탄한 근육들.
없던 복근이 생긴 것도 신기했다.
어깨 골격이 조금 넓어진 것도 있지만, 닭 가슴살만 1년 동안 먹으며 웨이트를 해도 이런 몸매가 나올 수 있나 싶을 정도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있던 군살이 모두 빠졌다.
그 덕분에 턱밑에서 접히던 이중 턱살도 사라지고 날카로운 턱선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어제보다 시야가 좀 더 높아진 것을 보니 키도 조금 더 커진 듯 하다.
원래 179cm였던 내 키도 작은 것은 아니었는데, 방송에서 어떤 개념 없는 여자가 ‘180cm 밑으로는 루저’라는 말을 한 뒤로는 남들에게 딱 180cm라고 말하고 다녔더랬다.
오늘 3, 4cm 정도 더 커진 키에 대해, 평상시 입던 바지가 짧아졌다는 단점은 크게 다가왔는데, 아직 장점은 깨닫지 못하고 있다.
앞으로 남들에게 키에 대해 거짓말을 안 해도 된다는 정도?
그때 한 여학생이 대담하게 같이 사진 찍어도 되냐고 물으며 내게 다가왔다.
네…. 뭐….
나를 아직 잘 안 알려진 연예인. 그쯤으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나는 어색한 웃음과 함께 손가락으로 브이를 그리고는 함께 사진을 찍으며 생각했다.
이런 일들이 비일비재할 텐데, 마음 단단히 먹어야겠구나.
현실에 직면한 나는 좁혔던 어깨를 펴고 땅만 보고 있던 시선을 위로 들어올렸다.
* * *
“안녕하세요, 팀장님.”
“뭐야? 시후 너 뭐야? 메이크업 받고 왔니? 어? 아닌데? 화장기가 없는데? 희한하네……. 어제 본 얼굴 그대로이긴 한데, 뭔가 느낌이 많이 다르다? 아! 분위기가 달라진 건가? 왜 오늘 따라 잘생긴 것 같이 느껴지지?”
사옥 4층에 있는 아트 개발실에 올라와서 만난 김남규 팀장이 나를 보자마자 한 말이다.
나는 짐짓 모르는 척하며 말을 돌렸다.
“오늘 하실 말씀이 있다고 하셔서 올라왔는데요.”
“아! 그랬지. 시후야, 지금 나가야 되는데?”
B&M 엔터테인먼트와 계약한 뒤 ‘슈퍼 K-POP 스타 챌린지’ 방송을 시작하기 전까지 나를 담당하게 된 김남규는 내게 좀 더 친근하고 편안하게 다가와 주었다.
“저 어디 가요?”
“응? 오늘 슈스챌에 제출할 프로필 사진 찍으러 간다니까. 지금 출발하면 얼추 시간이 맞겠네.”
“아……. 네.”
연남동 ‘연트럴 파크’, 이태원 ‘경리단 길’ 이 생긴 이후, 신사동 ‘가로수 길’이 예전에 비해 많이 죽었다지만 여전히 밤낮으로 화려한 곳임은 아직 변함이 없다.
신사역 8번 출구 앞은 만남의 장소라고 불릴 정도로 유동 인구가 많으며 그 일대는 그만큼 높은 땅값을 자랑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화려한 노란색의 6층 건물.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최고 규모의 포토 스튜디오 ‘J.R’이 통째로 쓰는 건물이다.
이곳의 대표 류준은 스튜디오의 대표이기 전에 이미 그 이름만으로도 가치가 높은 셀럽이었다.
국제 사진 공모전인 ‘내셔널지오그래픽 풍경 사진 대회’에서 2번이나 입상한 경력이 있으며, ‘세계 에스페란토 사진 대회’에서 아시아인으로서 최초로 대상을 수상했다.
그 외에도 몇 차례 해외에서 큰 상을 수상했고, 최근엔 포토 에세이 ‘낭만의 시절’의 저자로 책도 출간하였다.
“얘! 미쳤니? 지금 몇 신데, 여태 안 오고 뭐 하는 짓거리야? 너어, 5분 안에 못 올 것 같으면 그냥 오지 마 얘! 난 가고 없을 거니까.”
40대 초반의 마른 체형의 남자가 전화를 끊더니 씩씩거리며 분을 삭인다.
그러다가 자신을 쳐다보는 시선들이 불편했던지, 성질을 부린다.
“아우! 신경질 나. 뭘 봐! 세팅 안 할 거야? 일 안 할거니이?!”
패턴이 화려한 유럽풍의 붉은 셔츠와 시원해 보이는 분홍색 실키 바지를 입고 뿔테 안경을 치켜 올리는 이남자는, 상당히 여성스런 말투를 사용하고 있지만 실력만큼은 뛰어난 류준이다.
그는 짜증이 몹시 난 상태이다.
여기가 어디인가? 대한민국 최고의 포토 스튜디오 J.R이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셀럽들이나, 당대의 내노라 하는 배우, 가수들도 이곳에서 사진 한 장 찍으려면 한참 전에 예약을 해야 했다.
웬만한 급이 되지 않으면 예약조차 받아주지도 않는다.
그런데, 불과 7시간 전에 통보하듯 예약해 놓은 당사자가 50분 째 나타나질 않고 있다.
그것도 류준 자신에게 사진을 부탁하면서 지각이라니!
대한민국 최고의 포토 그래퍼를 누가 기다리게 한단 말인가?
아니, 상황에 따라 기다릴 수도 있지. 하지만 상대는 급도 안 되는 데뷔도 안 한 완전 신인.
류준은 시계를 바라보고 있었다.
딱 2분 남았다.
* * *
나는 차에서 내려 엘리베이터를 탔다.
조금 전에 김남규 팀장을 따라 이곳 J.R 스튜디오에 도착한 참이었다.
김남규는 지하 주차장에 차를 세워놓고 올라온다며 먼저 6층으로 올라가라고 했다.
6층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십여 명의 사람들이 일제히 내 쪽을 바라본다.
그중 나풀거리는 분홍색 바지를 입은 남자가 뿔테 안경을 추켜세우며 내게 걸어왔다.
그는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로 다가오다가 나와 점점 가까워지면서 점차 표정이 누그러졌다.
심지어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있다.
그는 내 앞에 걸음을 멈추더니 두 손을 모아 가슴으로 가져가며 물었다.
“어머나, 이 예쁜 베이비는 누구야아? 여긴 어떻게 왔어요?”
뭐야? 저 남자 말투 왜 저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