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
16화 축복 패키지 (2)
집에 돌아와서 샤워를 마친 나는 방문을 꼭 잠근 후, 침대에 걸터앉았다.
그리고는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눈을 꼭 감은 채 의지를 흘려보냈다.
‘아폴론님과 대화하고 싶어요.’
“무슨 얘기를 나누고 싶어서 날 찾은 것이냐?”
공명하는 소리가 아니라 오른쪽 귓가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서 눈을 떴다.
아폴론이 침대에 걸터앉아 나를 쳐다보고 있다.
지긋이 쳐다보고만 있을 뿐인데 큰 바위가 누르고 있는 듯한 위압감에, 역시 카리스마가 장난이 아니다.
나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정신을 똑바로 차렸다.
오늘은 이 거대한 신의 바짓가랑이를 붙들어서라도 꼭 사정 얘기를 해야 했다.
“아폴론 님, 저는 지금껏 선인의 자격을 갖추려 신계에서 하라시는 모든 것을 행했습니다. 팔자에도 없는 연예인이 되어 보겠다고 지금도 열심히 노력 중인 건 아실 테지요. 반지의 능력이 뛰어나 무리 없이 좋은 음악가가 될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만, 저를 널리 알릴 수 있는 인기를 가질 수 있을지는 요즘 의문이 듭니다.”
장황한 내 설명에도 아폴론은 미동도 없이 나를 응시하다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용건만 말하거라.”
흐음. 나는 침음을 삼켰다.
입에 발린 말은 안 통하는 캐릭터가 분명하다.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내 속내를 드러냈다.
보다 나은 외모를 가지고 싶은 것은 누구나 가지고 있는 욕심이니까.
축복? 해 주면 좋고, 사실 안 해 줘도 그만이었다.
그런 거 안 받아도 나를 충분히 유명한 가수가 만들어줄 반지가 있으니.
다만, 축복을 안 내려준다고 하면 선인을 핑계 삼아 땡깡 정도는 피워도 되겠지?
“제 외모가 사실 인간계에서 대중적으로 통할 만한 외모는 아니지 않습니까? 요즘 인간계가 참 그렇습니다. 실력이 뛰어나도 그와 함께 외모가 받쳐 줘야 더 유명해지는 법입니다. 요즘 뜬다 하는 운동선수나 음악가나 방송인들 좀 보십시오. 외형적인 호감이라는 것이, 매력이라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 법입니다.”
“그러니까 네 말인즉슨, 엑스트라 링의 능력만으로는 부족하다? 스스로는 선인의 자질을 갖추는 데 오래 걸릴 듯하여, 신계에서는 너를 지지해 줄 인간들을 붙여주었고, 그 인간들에겐 귀인을 만날 운명을 부여했으니, 그것은 곧 신이 너를 귀인의 운명으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거기에 네 능력을 펼칠 수 있게 가장 뛰어난 곳에 너를 보내주었으니 너는 그곳을 발판 삼아 위대해 질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신이 내린 축복이며 내게 붙여준 인연이니라. 그런데 모자라다?”
역시, 만만찮은 인간이다. 아니 신이다.
“능력이 모자라다는 것이 아니고요. 저는 다른 것은 욕심내지 않습니다. 그저 만인 앞에서 외모 때문에 어깨가 쪼그라들지 않도록 자그마한 축복을 받을 수 있게 도와주십사 하는 겁니다.”
아폴론이 편두통이 오는지 손으로 머리 한쪽을 지그시 눌렀다가 떼었다.
“원하는 것이 외형이라면, 휴우……. 네가 원하는 대로 해줄 것이다. 이정도의 뒤치다꺼리는 예상하고 있었으니.”
아폴론은 내 생각 보다는 훨씬 쉽게 승낙해 주었다.
안 들어주면 협박이라도 해 보려고 했는데.
그런데 생각보다 너무 쉽게 얻어 낸 승낙에 기쁨도 잠시였다.
갑자기 덜컥 겁이 나며, 두려움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이대로도 괜찮습니다.”
내 입에서 나온 의외의 말에 아폴론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빤히 본다.
“이렇게 인간이 신의 능력을 가져다 쓸 수 있는 것도 있을 수 없는 일인데, 신들의 축복까지 받는다면……. 흠. 문득 무서운 생각이 들어요.”
“무엇이 무서운 것이냐?”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습니까? 나중에 얼마나 큰 대가를 치러야 할지 두렵습니다. 혹시 죽어서 저 위로 올라가면 영생을 사는 동안 빚을 갚으라고 들들 볶이는 건 아닐는지.”
아폴론은 카리스마가 사라진 인자한 얼굴이 되어 입가에 미소를 걸었다.
“걱정하지 말거라. 뒤따른 대가는 없다. 이 모든 것이 신의 실수이지 않느냐. 신의 축복 또한 사양할 것 없다. 오히려 나는 이 모든 걸 감당해야 하는 너를 가엾게 본다.”
날 지그시 바라보는 아폴론의 눈빛이 애잔하다.
순간 머릿속에 얼마 전 인터넷에서 찾아본 아폴론의 설명이 떠올랐다.
[아폴론이 사랑한 사람은 여자만이 아니었다. 그는 히아킨토스라는 아름다운 소년을 사랑하였다.
……. 히아킨토스는 피를 흘리며 쓰러져 죽었으며…….]
갑자기 온몸에 소름이 돋는다.
나는 바로 옆에 앉아 있는 아폴론에게 거리를 두고 옆으로 물러나 앉았다.
“저를 가엽게만 보십시오. 사랑하시면 안 됩니다. 저는 남자는 싫습니다. 죽기도 싫습니다.”
어리둥절한 아폴론의 표정을 보니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었나 보다.
그는 앉아 있던 자리에서 일어나 마지막 말을 남겼다.
“반지의 능력을 최대한 많이 사용하도록! 빠른 시일 내에 중급 각성하여 더 높은 품계의 능력을 사용하길 원한다면 말이다.”
아폴론이 사라진 자리를 멍하니 쳐다보며 웅얼거렸다.
중급 각성이라…….
* * *
여느 때와 같은 아침. 일어나 물을 마시러 간 부엌에는 엄마가 설거지하고 계신다.
“일어났니? 어우, 메이크업한 거니? 화장은 지우고 자야지. 피부 다 상해. 그런데 화장해 놓으니까 우리 아들 너무 예쁘네? 너무 잘생겼다 야.”
눈이 마주친 엄마가 못 알아들을 소리만 한다.
그리고 나는 씻으러 화장실에 들어갔다.
그런데 거울을 보니 딴 사람이 떡 하니 서 있다.
멍하니 거울을 바라보던 나.
“아하하하! 하핫하하하! 하하!!”
한순간 ‘축복’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며 미친 듯이 웃었다.
신계에서 해냈구나! 내 외모가 변했구나!
아니다! 잘 뜯어보니 외모는 딱히 변한 것이 없는데, 느낌이 너무 달랐다.
짙어진 눈썹과 정말 빛이 뿜어져 나오는 듯한 총기 가득한 눈동자.
입술은 붉게 물들어 반질반질 윤기를 내고 있다.
그리고 백옥처럼 투명해진 피부.
학창 시절 얼굴에 났었던 여드름 자국 몇 개가 세월 따라 조금 착색되었는데 그 자국이 말끔하게 사라졌다.
지금 내 피부엔 소위 말하는 광채가 났다.
그냥 설명이 필요 없는 잘생김의 표본이라고 해야 하나?
이목구비의 배합과 비율이 엄청났다.
나는 대충 눈곱만 떼고, 내 방으로 와서 차분하게 내게 일어난 변화를 알고자 했다.
신의 의지로 내게 내려진 모든 축복이 영화 필름처럼 눈앞을 지나간다.
아폴론의 주관으로 바쁘게 돌아가는 신계.
미의 성전 주신인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는 에오스가 저질러 놓은 이번 일에 짜증이 났지만, 물의 여신 테티스의 당부도 있고, 아폴론의 부탁도 있으니 얼굴 가득 하기 싫은 표정을 담고 미소의 축복을 내렸다.
그 밑의 신단에서 ‘청춘의 여신’ 헤베(Hebe)는 길게 지속될 나의 청춘을 축복해 주었고,
옆에는 ‘우미의 여신’ 아글라이아(Aglaia)가 빛나는 아름다움을 축복해 주었다.
다른 성전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태초의 성전에서는 ‘빛의 신’ 헬리오스(Helios)가 밝은 눈빛을 축복했는데, 그 옆에서 지켜보던 에오스에게 신경질적인 눈빛을 보내는 것을 잊지 않았다.
권력의 성전에서는 군주의 카리스마를.
신수의 성전에서는 호랑이의 기세를.
마지막으로 아폴론이 직접 천상의 샘에서 샘물을 퍼다가 내게 축복을 내렸다.
이쯤 되니 축복 패키지 풀 세트가 따로 없다.
짝 하고 대만족의 박수가 절로 나왔다.
무심코 시계를 보니 김남규 팀장과 약속한 시각이 다가오고 있다.
이크, 늦겠네.
옷장 문을 열고 입고 갈 옷을 둘러보다가 나도 모르게 난색이 되었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말 ‘옷은 많은데, 입을 게 하나도 없다.‘
내 상황이 딱 그랬다.
이건 군대 가기 전에 샀던 티셔츠들이고, 이건 5년 전에 동대문에서 산 셔츠, 흐음 이건 고등학교 때 입던 거군.
최근에 구입한 것들이 몇 벌 있지만, 요즘 돌려 입는다고 모두 세탁기에 들어간 상황.
옷장 상황이 이러니 친구 놈들이 무슨 옷을 그 따위로 입느냐고…. 같이 다니기 창피하다고 하는 말을 얼마 전까지는 이해 못 했지만, B&M와 계약한 지금은 이해가 간다.
난다 긴다 하는 놈들 중에 가장 난놈들만 모인 B&M에서 튀지는 못할지언정, 흠은 잡히지 말아야지.
불현듯 언제 시간 날 때 옷 리폼을 해 봐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반지 능력 리스트 6품 천운자에 디자이너가 있던데.
나는 내 머릿속 리스트를 뒤지다가 이내 관두었다.
유명하고 실력이 너무 뛰어나지만, 나랑은 스타일이 너무 다른 디자이너.
그냥 사서 입지 뭐.
‘앙드레 김’은 나랑 좀 안 맞는 거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