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
15화 축복 패키지 (1)
3년짜리 계약서.
계약은 처음이라 잘 모르겠지만, 수익 분배율이나 지원 내용을 보니 나쁘지 않아 보인다.
그리고 에오스의 말에 의하면 운명의 신이 엮어 놓았다는 이 B&M 엔터에서 나에게 해로운 짓을 할 리가 없다는 생각이 들어 수긍하였다.
내 계약에는 몇 가지의 조건이 있었다.
그중 가장 큰 조항은 다음 달에 있을 ‘슈퍼 K-POP 스타 챌린지’에 출연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슈스챌’ 출연은 기획사의 연습생만 참여할 수 있다는 조건이 붙으므로, 촬영이 끝날 때까지는 연습생의 신분을 유지할 것.
대신 챌린지가 끝나면 결과에 상관없이 데뷔를 약속한다는 항목도 있었다.
단, 챌린지 순위 10위권 안에 들었을 경우 바로 데뷔하거나 데뷔조 그룹에 합류하지만, 만일 10위권 밖의 성적이라면 트레이닝을 우선시한다.
가장 중요한 사항은 이정도인 듯했다.
계약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매일 나와서 연습실을 사용해도 좋아. 원한다면 보컬이나 댄스 부분에 트레이닝을 받게 해 주지. 물론 보컬 쪽으로는 배울 것이 없어 보이지만.”
계약서 마지막 페이지에 사인할 때 임준석 실장이 궁금증 가득한 얼굴로 나를 빤히 보았다.
“댄스 실력이 좀 어정쩡한데. 뭐, 사람이 완벽하게 다 잘할 수는 없으니까. 그 정도의 보컬과 외모면 발라드 쪽으로 솔로 음반을 내거나 듀엣 가수로 데뷔해도 괜찮을 거야. 그런데 그런 춤은 어디서 배웠나?”
허허 웃는 임 실장의 모습에 나는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런 내 등을 김남규 팀장이 쓸어내리며 위로해 주었다.
“괜찮아요. 그래도 리듬감은 너무 좋아서 트레이닝하면 좋아질 수도 있을 거라고 하던데.”
두고 봐라. 내가 한 달 안에, 아니 일주일 안에 춤을 마스터 할 테니.
“참, 진작부터 IN 컴퍼니를 통해서 행사 요청이 많이 들어오는 거로 아는데 우리 회사와 계약한 이상, 전부 거절할 생각이야.”
그랬나? 권철용이 일언반구 언급하지 않아서 전혀 모르고 있었다.
아마도 피아노 연주 이야기겠지.
“네. 알겠습니다. 그럼 저는 이제 챌린지 준비를 하면 되는 건가요?”
“그렇지. 세부적으로 여기 김남규 팀장이랑 아트 개발실에서 알아서 해 줄 거니까 잘 따라오기만 하면 되고. 참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만약 우승하게 되면 받는 상금은 회사에서 관여하지 않을 거니까 열심히 준비하라고.”
“상금이요?”
그렇지.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우승하면 상금이 주어진다는 사실을 깜박 잊고 있었다.
“우승 상금이 5억이지 아마?”
김남규 팀장이 그 액수가 맞다며 고개를 끄덕거리곤 내 등을 툭툭 치며 힘을 주었다.
“자. 앞으로 잘해 보자고. 수업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말해요. 트레이너 붙여줄 테니까.”
“그럼요. 상금이 5억인데 열심히 해야죠. 우승해야죠.”
내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의지를 전달하자 김남규가 환하게 웃어주었다.
나는 이제 소속사가 생겼다.
* * *
한 달이 흘렀다.
나는 갑작스레 대한민국 최고라는 B&M 엔터테인먼트와 계약하고는 매일매일 출근 도장을 찍고 있다.
그동안 나는 내 능력을, 아니 반지의 능력이 어디까지인지 시험하고 또 실험했다.
보컬이야 뭐 상상을 초월하는 음역대라는 것을 확인했지만, 허접했던 댄스 실력 때문에 매일 안무 연습실에서 트레이닝을 받았는데, 이 또한 예상했듯 일취월장했다.
한 번 보는 춤은 다 외워 버렸고 똑같이 재생했다. 물론 반지의 능력이겠지만.
한 달 정도 되니 요즘 유행한다는 방송 댄스는 모조리 외워 버렸고, 심지어 트레이너가 혀를 내두르며 손을 뗄 정도로 배울 게 없었다.
사실 연습이랄 것도 없었다.
한 번 보면 다 해 버리니 습득이라 해야 하나?
해서 요즘은 아웃튜브에 나오는 댄스 영상을 보면서 안무를 습득 중이다.
이쯤 되니, 슬슬 욕심이 났다.
지금 보고 있는 이거. 똑같이 할 수 있을 거 같은데….
나는 호기롭게 양팔을 벌리고 리듬을 탔다.
몸이 앞으로 숙여지는 순간, 왼쪽 팔이 땅에 닿으며 한 팔로 물구나무를 서야 하는데, 왼팔이 나를 지탱하지 못하고 안으로 접히며 옆으로 굴렀다.
동시에 연습실 문이 콰당 하고 열렸다.
“괜찮아요? 시후 씨, 안 다쳤어요?”
너무 아파서 신음도 못 내고, 까진 팔꿈치와 벌겋게 달아오른 무릎을 부여잡은 나는 목소리가 들리는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 괜찮아요. 근데 여긴 어쩐 일로?”
블랙 타이거의 리더 동혁과 막내 진우가 연습실에 완전히 들어와서는 쪼그리고 앉아 있는 내 앞에 나란히 앉았다.
왜 오늘은 둘뿐이지? 성운과 태곤은 어디 갔나?
어쨌든 이들은 잘생겨서인지 오늘도 어김없이 빛이 난다.
“공연 기획 팀이랑 상의할 게 있어서 들렀다가 시후 씨 여기 있다고 하길래 와봤어요. 근데 문밖에서 살짝 봤는데 뭐 하다가 넘어진 거예요?”
동혁의 질문에 진우가 대답을 가로챘다.
“에이, 형도. 딱 보면 스타트가 ‘토마스’ 였잖아. 이거 하려고 했던 거죠?”
진우는 정곡을 딱 집어서 말하고는 얄밉게도 일어나서 시범을 보여준다며 양팔로 번갈아 가며 땅을 짚으며 발을 공중에 띄우고 돈다.
바로 저거였는데. 내가 하려던 거.
부러움의 시선으로 진우를 보는 내가 마음에 걸렸는지 동혁이 다독였다.
“진우는 초등학교 때부터 춤추던 녀석이에요. 데뷔 전까지 비보이 팀에 있었고요. 토마스 이런 거는 저도 못 해요.”
“맞아요. 팔뿐만 아니라 전체적으로 근력이 받쳐줘야 해요. 비보잉할 때 쓰는 근육이 따로 있으니까 웨이트 많이 해야 해요.”
진우도 위로의 말로 거든다.
그렇구나. 오늘부터 휘트니스 센터에서 헬스도 해야겠다.
“그런데 시후 씨. 혹시 악보 완성 됐어요?”
동혁이 조심스레 말을 꺼냈지만, 눈빛은 기대에 가득 차 있다.
어지간히 갖고 싶은가 보다.
이제 막 들어온 신참의 연습실로 찾아온 걸 보면.
“죄송한데 제가 정신이 없어서 잊고 있었어요. 선배님들 지금 시간 괜찮으시면 제가 30분 안에 그려서 가져다 드릴게요.”
“아, 그래줄 수 있어요? 그럼 8층에 작곡 작업실 있는데 같이 갈래요?”
굳이 같이 가지 않아도 되는데.
귀신에 빙의된 듯 미친 듯이 악보를 써 내려 갈 것은 아니지만, 내 능력을 눈앞에서 여과 없이 보여줘야 한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나는 사실상 거절의 의미로 돌려서 말했다.
“바쁘실 텐데, 기획 팀에서 일 보고 계시면 제가 가져다….”
“아니요! 같이 가요. 혹시 우리가 불편해서 그런 거 아니죠? 우리 진짜 가식 없이 착한 선배인데.”
눈치 없는 진우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내 팔을 끌어당기며 뭐가 그리 신나는지 헤벌쭉 웃는다.
그 웃음을 보고 나는 못 이기는 척 끌려 일어났는데, 진우의 매력에 무장해제 된 듯한 느낌이었다.
나보다 형이긴 하지만, 확실히 순정 만화에서 튀어나온 듯한 귀여움과 사근사근한 캐릭터가 돋보였다.
저러니 누나 팬들이 그렇게 많지.
반면, 나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며 안에 있는 거울에 곁눈질했다.
뒤통수에 아우라를 펼친 동혁의 옆으로 귀여움으로 중무장한 진우가 서 있고, 그 옆에는 진우가 팔짱을 낀 오징어가 한 마리 붙어 있다.
회사와 계약할 때도 내 평범한 외모가 걸리긴 했는데, 이것은 반지의 능력으로는 어쩔 수가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동혁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방법이 떠오른다.
동혁이 받았다는 신의 축복!
거울 속 오징어 한 마리가 씨익 입꼬리를 올리며 웃는다.
* * *
“형! 형. 쟤 뭐야? 뭔데 저래? 천재야?”
내 이럴 줄 알았다.
이래서 반지의 능력을 쓸 때 보여주지 않으려고 했던 건데.
귀신 들린 듯, 아니 신들린 듯 손을 움직여 악보를 그려 나가는 내 등 뒤에서 진우가 호들갑을 떨고 있다.
소란에 내가 잠시 손을 멈추자, 머쓱해 졌는지 진우의 입이 꽉 다물어진다.
“아. 쟤라고 해서 미안요. 너무 깜짝 놀라서.”
호들갑에 민망해서 멈춘 손이었는데, 진우가 오해했는지 다른 쪽으로 사과한다.
“괜찮아요, 진우 선배님. 제가 동생이고 후배인 걸요. 말씀 편하게 하셔도 돼요.”
데뷔 5년 차인 한참 선배인데, 마주칠 때마다 거리낌 없이 말을 건네주는 그들이 사실 고맙기는 했다.
그간 한 달 동안, 남들은 몇 년씩 한다는 연습생을 건너뛰고 회사와 계약해서인지 이제 막 계약한 데뷔 조 애들이나 갓 데뷔한 신인들은 마주칠 때마다 눈을 흘겼고, 연습생들도 시기와 질투의 눈빛을 보냈다.
내가 낯을 가리는 편이라 먼저 다가가는 성격도 못 되고, 회사에 출근할 때마다 왕따 같은 느낌이 들어서 땅만 보고 지나다녔는데, 지금 순간만큼은 이들과 말을 섞고 있으니 나도 뭔가 된 것 같은 기분도 들고 살짝 자존감이 높아지는 느낌이었다.
특히 동혁은 나처럼 신계와 얽혀서인지, 볼 때마다 남 보는 것 같지가 않았다.
“그럼 우리 다 말 놓는다! 그래도 되지? 시후야?”
“네. 선배님. 당연하죠.”
“야아! 너도 형이라고 불러. 동혁이 형, 그러라고 해도 되지?”
진우가 동혁의 옷자락을 붙들고 미간에 주름을 잡으며 협박하는 듯 했으나, 동생 재롱이 재미있는지 동혁은 미소를 지었다.
“물론이지. 시후야. 형이라고 해.”
동혁이 나를 보며 환하게 웃자 칙칙한 작업실이, 아니 세상이 밝아진 느낌이 든다.
아, 안되겠다.
빨리 채보 끝내고 이들을 보낸 후에 아폴론 님이랑 담판을 지어야 겠다.
신의 축복이 시급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