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
12화 소속사가 생겼다 (1)
다행히 에오스는 화내지 않았다.
“그래. 사실 네 것은 아니었다. 이 반지는 내가 선택한 다른 인간에게 줄 것이었지.”
나도 알고 있는 인간이다.
블랙 타이거의 리더이자 에오스가 사랑하고 있는 인간 최동혁.
나는 깨우침으로 반지의 탄생, 분실한 이유 그리고 내게 오게 된 경위까지 모두 알게 되었다.
지상으로 내려올 수 없는 징계를 받는 에오스.
그녀는 최동혁에게 반지를 주어 그가 죽은 후에라도 신계에서 만나길 바랐을 것이다.
인간의 수명이야 백 세도 안 되니, 징계가 풀리기를 기다릴 바엔 인간이 죽는 걸 기다리는 게 더 빠르겠지.
‘얼마나 깊은 사랑이어야 저렇게까지 할 수 있을까?’ 하는 쓸데없는 궁금증도 일었다.
“반지의 특성도 모두 깨우쳤느냐?”
에오스의 울림이 이어졌다.
‘네. 엑스트라 링은 현재 하급 각성 단계라고 알고 있습니다. 만들어낸 신의 특성에 따라 능력이 달라지는데, 제가 가진 반지는 음악의 성전의 주신이신 아폴론 님의 의지로 만들어져 착용자의 음악 관련 세포 전반이 신급으로 진화합니다. 그 결과 다루지 못하는 악기가 없어지고 음역대의 제한이 없는 보컬을 가지게 된다고 했습니다. 추가로 음악에 관한 지식 또한 헤아릴 수 없을 정도가 된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래. 잘 알고 있는구나. 얼마 전, 신계 여덟 성전을 다스리는 주신들의 회의 결과에 따라 너는 선인으로 선발되었다. 해서 이제부터 그에 알맞은 재목이 되도록 노력하여, 사후 신계에 올라왔을 때 모자르지 않은 선인이 되어 있어야 한다. 선인의 덕목이 무엇인지는 알고 있겠지?”
에오스도 나도 알고 있는 것을 왜 자꾸 물어본단 말인가?
물어보니 주절주절 대답하고는 있지만, 저 여자와 하는 대화는 절대 편하지 않다.
첫 만남부터 삐걱거렸던 에오스의 첫인상이 좋지 않아서일까?
이래서 첫인상이 중요하다고 하는 것이다.
강렬한 첫 만남 때문에 억지로 누그러트린 듯 들리는 에오스의 목소리가 달갑지만은 않았다.
내 손가락을 절단하려다 미수에 그친 그녀가 아니던가.
해서 나는 에오스와 울림으로 대화하며 삐딱한 속마음이 걸러지지도 않고 튀어나올까 봐 긴장을 늦추지 못했다.
‘선인의 덕목이란 교만함을 누르는 겸손을 실천하고, 단죄보다는 관용을 베풀고, 소통과 포용을 하며…….’
“‘타 인간의 존경과 선망의 대상이 될 것!’ 네게 가장 필요한 덕목이지.”
에오스가 조금 신경질을 내며 내 말을 잘랐다.
“선인의 조건에 부합하려면 다른 인간들에게 너를 널리 알려야 할 것이다. 즉, 유명해져야 하다는 말이다. 운명의 신 모이라이가 여러 인간과 인연을 만들어 놓았으니, 너를 도우려는 자들을 최대한 이용하여 스타로서 최고의 자리에 오르거라.”
에오스의 말에 나는 생각이 많아졌다.
운명의 신이 나와 엮어 놓았다는 인간들.
원래 타고난 운명이 있음에도 나와 엮이어 달라졌다는 얘기가 된다.
그렇다면 내 운명이 원래 운명과 달라져 내 주변 인물들도 원래 살아갈 운명에서 점차 어긋나고 있는 건 아닐까?
그나저나 원래 내 운명은 무엇이었을까?
회사원으로 돈을 벌다가 나름 좋은 여자 만나서 결혼도 하고 아이도 키우는 평범한 삶이었을까?
예전엔 그랬을지 몰라도, 반지를 가지게 되고 난 후의 내 운명은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그중 퍽 다행이라면 불지옥에 떨어질 일은 없을 거라는 것이고.
“인간의 수명은 짧지만, 신은 영원히 죽지 않는다. 신계에 올라와 선인이 된다면, 네가 살아생전 일구었던 업적과 능력을 영원히 짊어지고 가야 할 것이니……. 사후에 어떤 인간으로 기억되고 싶은지, 앞으로 어떤 능력자로 남고 싶은지, 차분히 생각해 보고 결정하거라.
에오스는 말을 마치고 울림을 끊어 버렸다.
물론 아직 천상경으로 지켜보고 있겠지만…….
사실 이러쿵저러쿵 푸념을 늘어놔 봤자 난 따를 수밖에 없긴 하다.
원래의 운명이나 지금의 운명이나.
어차피 내 동의 없이 신계에서 정한 것인데…….
그래. 선인은 한번 되어 보자.
유명해지거나 돈을 많이 벌게 되면 지금의 나로서는 이득이지, 손해는 아니니까.
방법은…….
나는 잠시 고민을 하다가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다.
신계에서 꽃길만 걸으라며 다 닦아 놓은 길을 굳이 돌아갈 필요는 없겠지.
또한, 인연의 실로 이어 놓았다면 언젠가는 분명 다시 만날 텐데.
미룰 이유도 피할 이유도 없다.
게다가 가수라면 내가 예전부터 꼭 이루고 싶던 꿈이었으니.
나는 명함 한 장을 쥐었다.
어쩐지 B&M 엔터테인먼트와 자꾸 엮이더라니…….
* * *
“왔어요! 연락이 왔어요!”
한 사내가 노크도 없이 매니지먼트 본부 총괄실장 방을 벌컥 열고 들어와 숨을 헐떡거리며 임준석 실장에게 휴대전화를 흔들어 보였다.
그 사내는 구내식당에서 밥을 먹다가 걸려 온 전화 한 통을 받고는 급하게 숟가락을 내려놓곤 쏜살같이 6층 매니지먼트 본부로 올라온 아트 개발실 캐스팅부의 김남규 팀장이었다.
“하아. 하아. 그 친구. 연락 왔어요. 오디션 보러 온대요.”
“그 친구라니? 이사님이랑 같이 점찍었던 그 친구? 이름도 연락처도 모르고 어디 사는지 뭐 해서 먹고 사는지도 모른다는 그 친구?”
임준석이 하던 일을 멈추고 김남규를 응시하며 재차 확인했다.
“네. 네. 그 친구요. 이름이 주시후래요. 하하하. 다행이죠?”
한숨 돌린 김남규는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손바닥으로 닦으며 해맑게 웃었다.
“그래. 다행이네. 그 전화 안 왔으면, 자네는 다음 회사 부서 조정 때 행사 지원 팀으로 갈 뻔했는데, 알고 있나 모르겠군. 주시후라고 했나? 그 친구가 살린 줄이나 알아.”
김남규 팀장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칼같이 엄격하기로 소문난 최재우 이사 앞에서 그 꼴을 보였으니 그냥 넘어가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은 했었지만, 행사 지원 팀이라니…….
거의 100%를 자랑하는 외근과 야근은 고사하더라도,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바람이 불든 땡볕이든 실외 행사가 많아 개고생하는 부서였다.
김남규는 안도의 한숨과 함께 가슴을 쓸어내리며 마음속으로 주시후에게 감사의 인사를 했다.
“그래서 오디션 날짜는?”
“내일로 잡았습니다. 철저히 준비해 놓을게요. 실장님. 아 참, 조금 전에 제가 기획 팀에 다녀왔는데요. 공연 기획 팀에서 영상을 하나 보고 있더라고요. 영상 속 남자가 피아노 연주를 하고 있는데, 들여다보니 주시후라는 그 친구인 거예요. 와……. 그렇게 피아노를 잘 치는 사람은 처음 봤어요.”
“으응? 그런 일이 있었어? 내가 기획 팀 가서 직접 보도록 하지.”
* * *
연예 엔터테인먼트에 소속된 모든 연습생을 및 가수 지망생은 앨범 한 장이라도 내는 것이 소원이라고 한다.
데뷔만 한다면 유명해지고, 무대에 원 없이 서고, 지금과 다른 인생을 살 것 같다는 생각을 하지만 실상은 다르다.
데뷔했는데도 무대 한 번 못 서 보고 해체하는 일이 비일비재하고, 무대에 설 기회가 몇 번 있더라도, 인기를 끌기는 더더욱 어렵다.
대한민국 음원 시장에선 신인 가수의 곡이 매일 쏟아져 나오고, 실력과 운이 받쳐주지 않는 이상, 반나절도 되지 않아 묻혀 버린다.
하지만,
때론 타이밍이 맞아떨어져 묻혀 있었던 곡이 빛을 발하거나, 유명무실하던 가수들이 다시 유명세를 타는 경우도 있다.
음원 순위 역주행.
요즘 ‘인생 역전은 한 방’이란 말을 몸소 체험하고 있는 블랙 타이거는 데뷔 5년 차의 아이돌 그룹이다.
5년간 총 2장의 앨범을 냈었지만, 인기를 끌지 못했다.
소속사인 B&M 엔터테인먼트에서도 해체하는 것이 좋겠다는 통보를 해 왔었다.
그런데 1년 전쯤, 말 그대로 자고 일어나니 스타가 되어 있었다.
본인들도 B&M 엔터테인먼트도 모두 어리둥절했지만, 운이 좋았다고 생각했다.
이들은 여느 때와 같이 온종일 빼곡한 스케줄을 소화해야 했지만, 오늘은 점심 나절에 해야 했을 화보 촬영이 미뤄져 오랜만에 차에서 대충 때우는 식사가 아닌, 제대로 된 밥을 먹을 시간이 아주 잠시 생겼다.
그래서 아까부터 밴 안은 갑자기 생긴 점심시간에 어떤 메뉴로 포식할 건지를 주제로 한 갑론을박 중이다.
서브 보컬인 진우는 커다란 철판에 깻잎과 양배추를 넣고 각종 사리와 함께 들들 볶고 밥까지 볶아먹자며 철판 닭갈비의 풍부한 식감과 자극적인 맛을 설명했고, 리드 보컬 성운은 어떻게든 동생을 이겨 보겠다며 바득바득 스테이크를 밀었다.
“…. 그래서 철판 닭갈비야? 스테이크야?”
블랙 타이거의 랩 파트를 담당하는 태곤이 가만히 듣다 결국 신경질을 냈다.
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든 진우는 리더이자 가장 맏형인 동혁을 향해 눈을 깜박거리며 SOS의 눈빛을 보낸다.
동혁은 막내의 그런 모습이 장화신은 고양이 같아 피식 웃음이 났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가로젓더니,
“오늘은 구내식당.”이라는 한마디로 차 안을 정리했다.
차 안이 원성으로 가득 찼다.
밴을 운전 중인 로드 매니저 또한 오랜만에 인스턴트 식품에서 벗어나나 싶었더니, 회사로 가자는 동혁의 말에 백미러로 원망의 눈빛을 쏘아 보냈다.
“에휴, 저 짠돌이 형. 이제 우리도 돈 버는데 이런 기회에 맛있는 것 좀 먹자니까. 근데 형 아까부터 뭘 그렇게 봐?”
입이 댓발 나온 진우가 물었고, 동혁은 말없이 들고 있던 스마트 폰을 보여줬다.
“아. 이거 그거네. 우리 노래 피아노 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