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
8화 신을 만나다 (2)
친구들이 든든한 아군이 생긴 것처럼 휘파람을 불어 대고 난리다.
보는 사람도 몇 명 없는데, 자기들끼리 북 치고 장구 치는 것이 창피하다.
내버려 두면 춤판이라도 벌일 기세들이다.
신난 친구 놈들의 얼굴과는 상반되게 내 얼굴은 점점 흙빛으로 물들어갔다.
그걸 연주한 건 내가 아니었다고! 이놈들아!
그나마 학창 시절에 음악 한답시고 기타도 조금 치다 말았으나 코드를 잡는 법은 알고 있었다.
그것도 기타에 한해서였지, 피아노 코드는 완전 기초적인 것밖에 모른다.
그런데 어쩌라고…….
못하겠다고 그냥 일어설까? 왜 나를 끌어들이냐며 화를 내?
그 순간,
키보드 건반 위에 펼쳐진 악보가 눈에 들어온다.
이광택이 준비해 온 혼성 듀오 'Pie’ 「러브 레터」의 악보이다.
나도 모르게 손으로 악보를 넘기며 훑어보았다.
여태 22년을 악보 까막눈으로 살았는데 그 시절이 무색하게 악보가 한눈에 들어온다.
악보를 다 암보한 다음 숨을 한번 고르고는 건반 위에 손을 올렸다.
어제 고가의 그랜드 피아노를 칠 때와는 조금 다른 느낌이다.
먼저 살살 두드리듯 손가락으로 건반을 터치했다.
그리고 이끌리듯 설치된 마이크 앞에 얼굴을 가져다 댔다.
“너에게 보내는 사랑의 세레나데, 나에게 응답하는 너의 환한 미소.”
그것을 보고 있던 관객 중 한 명이 조용히 자신의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는 이내 동영상 버튼을 눌러 촬영을 시작했다.
* * *
꽤 많은 관객 몰이에 성공한 나는 그 뒤로도 두 곡이나 더 연주하고 나서야 키보드 앞을 떠날 수 있었다.
지금은 내 연주에 뒤를 이어 버스킹 하는 친구들을 보며 앉아서 음악을 감상 중이다.
정확히는 귀로 흘려들으며, 머릿속으로는 딴생각 중이다.
대체 왜 이런 일들이 벌어진 걸까.
내게 왜 이런 능력들이……. 아니, 내 능력이 맞기는 맞는 걸까?
“그래, 이제는 너의 능력이지.”
“네?”
옆을 돌아보니 웬 남자가 내 옆에 앉아, 나를 바라보고 있다.
갈색의 짧은 머리카락과 구레나룻, 날카로운 턱선이 인상 깊은 중년 사내가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네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그 능력들이 이제 온전히 네 것이 되었다고 말했다.”
데자뷰인가?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말투.
턱을 치켜든 자세와 카리스마 있는 표정에 왠지 모를 후광까지.
며칠 전 만났던 미친 여자의 눈길이 연상되는 남자의 눈길에 나도 모르게 반지를 낀 왼손을 뒤로 숨겼다.
중년 사내는 한숨을 내쉬더니 이내 미간을 잔뜩 찌푸린 표정이 되어 내게 시선을 고정한다.
수축된 검은 동공 아래로 위축된 내 모습이 보인다.
그가 느릿하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산처럼 거대해진 그가 나를 내려다본다.
“나는 음악의 신 ‘아폴론’이다.”
* * *
“넌 아까부터 뭘 혼자 그렇게 중얼거리냐?”
이광택이 와서 어깨를 툭 쳤다.
돌아보니 버스킹이 끝났는지 세팅했던 악기를 해체하고 있는 친구들이 눈에 들어온다.
“보니까 계속 혼잣말하고 앉아 있더만.”
“어?”
내 동공이 지진 나는 듯 흔들렸다.
아무래도 스스로 아폴론이라 밝힌 사내는 다른 사람들 눈에는 안 보이는 모양이다.
난 긴장을 풀며 피식 웃음을 흘렸다.
외계인인 줄 알았더니, 신이라고?
나는 조금 전 내 앞에 나타났던 신이 내게 해준 말들이 떠올랐다.
신의 존재는 아직도 믿기 어렵고 황당무계했지만, 찬찬히 생각해보니 며칠 동안 내게 벌어졌던 일이 적어도 납득은 되었다.
“장비나 싸자. 시원한 맥주가 땡긴다.”
나는 흘리듯 말을 하고 친구들 쪽으로 다가갔다.
그런데 친구들에게 다가오는 것은 비단 나 혼자는 아니었다.
악기를 정리하고 있는 우리 틈으로 댄디한 정장을 입은 처음 보는 사내가 비집고 들어섰다.
나이는 서른 살 정도 되었을까?
“저, 잠깐 얘기 좀 나눌 수 있을까요?”
경계심을 가지고 의아한 표정을 짓는 나와 친구들에게 사내는 가방에서 명함 한 장을 꺼내주었다.
그 명함을 광택이 놈이 받아들려고 했으나 사내는 방향을 바꾸어 굳이 내 손에 쥐여 주었다.
[B&M 엔터테인먼트 아트 개발실 팀장 김남규]
명함에 적혀있는 다른 것들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는데, B&M 엔터테인먼트라는 글씨는 아주 크게 보였다.
친구들도 내 손에 들린 명함을 보더니 같은 표정이다.
연예 기획사에서 도대체 왜?
“아, 저는 B&M 엔터에서 일하고 있어요. 주로 캐스팅과 인재 양성을 하는 부서에 근무하고 있죠. 아까 노래하신 여기 이분한테 명함을 꼭 드리고 싶은데, 혹시 연습생이세요? 아니면 어디 계약된 곳이라도 있으신지?”
김남규라는 사내는 나를 콕 집어 지목하고는 물끄러미 쳐다본다.
“혹시 지금 연예 기획사 말씀하시는 건가요? 연습생이나 계약 뭐 이런 거요.”
내 질문에 김남규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내 대답을 기다렸다.
“없어요.”
안심했다는 듯이 가슴을 쓸어내리던 그는 명함을 건넨 이유를 설명하였다.
“저는 이번에 저희 기획사의 이름을 걸고 TV 프로그램에 출연할 인재를 찾고 있어요. 혹시 가수 쪽으로 생각 있으시면 언제든지 연락 주시겠어요? 노래를 너무 잘하시던데, 생각이 있으시다면 저희 회사에서 최고의 서포트를 해드릴 수 있을 것 같아서요."
“아……. 네.”
“그럼 꼭 연락 주셨으면 좋겠네요. 노래 잘 들었어요.”
김남규가 시야에서 점차 멀어지자 곽병준이 한껏 들떠서는 내 손에 있던 명함을 가로채 간다.
“야! 대박! 뭐야 지금? B&M이야, B&M 엔터. 뭘 생각하고 자시고 할 게 있냐? 무조건 내일 전화해. 와……. 진짜 말도 안 된다. 그런 대형 기획사에서 길거리 캐스팅도 하는구나. 자체 오디션만 보는 줄 알았더니.”
“그래. 남들은 가지 못해서 안달인 B&M인데. 한다고 해. 너 싫다면 내가 전화하고. 나를 데려가긴 하려나?”
기타를 만지작거리며 최정근이 말을 보탰다.
“너 고딩 때부터 가수 하고 싶다고 했었잖아. 이런 기회가 또 어디 있나 싶다. 그런데 설마 연습생으로 데려가려는 건 아니겠지? 왜 연습생만 잔뜩 데려다 놓고 데뷔 안 시키는 기획사들도 있잖아. 이를테면…….”
말을 마친 이광택이 곽병준을 힐끗 쳐다본다.
“야! 왜 나를 쳐다봐? 너 지금 내가 연습생 7년 차라고 무시하냐?”
티격태격하는 친구 놈들 사이에서 머리가 복잡해진 나는 명함을 주머니 속에 구겨 넣었다.
가뜩이나 조금 전에 아폴론이라는 신을 만나서 혼이 쏙 빠져있는 중이었다.
“야! 빨리 짐 싸서 가자. 맥주 마시고 싶다니까.”
오늘 하루 많은 일을 겪고 나자 시원한 맥주가 마시고 싶다는 생각밖에는 들지 않았다.
* * *
[올림포스 12신 중 한 명인 아폴론.
제우스와 티탄 신족인 레토의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태양, 음악, 시, 예언, 의술, 궁술을 관장하는 신이다……. 아폴론은 의술을 관장하는 신이기도 하며…….]
하암… 하품이 나온다.
나는 아까부터 인터넷 창에 ‘아폴론’을 검색 중이다.
시계를 보니 새벽 1시.
친구 놈들과 술도 한잔했고 잘 시간이긴 하지만 꼭 그래서 하품이 나오는 것만은 아니었다.
어느 사이트에서나 똑같이 서술해 놓은 ‘위대한 아폴론’에 대해 1시간째 보고 있으니 슬슬 지겨워져서였다.
어딜 뒤져 봐도 대단한 신으로 설명된 아폴론.
그런데 이런 위대한 신이 내 앞에 나타난 것을 지금 믿으라는 건가.
아니 믿을 수밖에 없었다.
내 왼쪽 검지에 끼워져서 빠지지 않는 반지가 이를 증명하는 듯 유독 반짝거린다.
나는 반지를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무슨 수를 써도 꿈적도 안 하던 반지는 아폴론이라는 신의 말대로 변화를 겪었다.
박혀있는 두 개의 보석 중 한 개가 빨간색에서 파란색으로 바뀌었던 것이다.
하급 각성 단계에 이른 반지라는 뜻이다.
그 신의 말이 사실이다.
엑스트라 링.
아폴론은 이 반지의 이름을 알려주었다.
이것이 내 손에 끼워지게 된 사연은 참으로 기니 자세한 것은 반지를 통해 알아보라는 말도 해주었다.
‘의지로 대화하라고 했던가? 반지를 통해 영적 울림이 신계에 닿을 거라고 했는데…….’
나는 알라딘이 램프를 다루듯 연신 반지를 문지르며 말했다.
“저, 혹시 들리세요?”
…….
“아무도 안 계세요? 누구 없어요?”
이렇게 하는 게 아닌가?
이 어이없는 상황에 피식 웃음이 터졌다.
내가 지금 뭐 하는 거지.
누가 대답하는 것이 더 이상한 일이 아닌가?
그때.
허공에 울리는 것인지……. 고막을 때린 것인지, 그것도 아니면 머릿속에 떠오른 것인지.
어디선가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이시죠?”
“네?”
“선인께서 저를 찾지 않으셨습니까?”
30, 40대 중년 남성의 목소리.
굉장한 중저음이다.
갑작스러운 울림에 화들짝 놀랐지만 이내 평정을 되찾았다.
나를 선인이라 일컫는 사내의 말을 들어보니 분명 신계와 관련된 인물일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니 어디선가 들려오는 목소리가 더는 무섭다거나 신기하지는 않았다.
신이 눈앞에 ‘짜잔!’ 하고 나타났었는데 그보다 더 황당무계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주인공이 죽어서 회귀한다거나, 특별한 능력이 생기는 소재의 소설을 읽었을 때는, 나에게 그런 일이 생긴다면 두려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지금은 갑자기 내게 생긴 비현실적인 상황이 현실적으로 받아들여진다.
인간은 적응하는 동물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