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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굴러 들어온 반지 (1)
신(神)계.
모든 신들이 머무는 곳.
그중에서도 ‘음악의 신’, 아폴론(Apollon)이 관장하는 음악의 성전.
아주 오래전,
여신 아프로디테의 저주에 빠져 ‘인간을 사랑해야 하는 운명’에 빠진 ‘새벽의 여신’ 에오스(Eos).
이번에도 사랑의 저주에서 헤어나지 못한 에오스는 성전 한쪽에 의자를 놓고 앉아 있다.
그녀의 시선이 맞닿아 있는 곳. 거기에는 지상을 내려다볼 수 있는 거울, 그중에서도 음악에 관한 모든 것을 볼 수 있는 ‘천상경(天上鏡)’이 있었다.
그녀는 천상경이 비추고 있는 한 청년을 보며 넋이 나가 있다.
화려한 무대에서 춤을 추며 노래를 부르고 있는 한 사내를 보며, 아까부터 손에 꼭 쥐고 있던 반지 하나를 만지작거리고 있다.
한 번은 그 청년에게 ‘황홀하며 수려한 외모’에 축복을 내리라며 조화의 여신을 협박해 기어이 성공하더니, 얼마 전엔 직접 콘서트를 보러 지상으로 내려가겠다고 해서 신들이 뜯어말리고 난리가 났었다.
어쨌든 그녀만 성전에 나타나면 조용할 날이 없었다.
그런데, 오늘은 어째 잠잠하다.
그녀는 꽤 오랜 시간 손에 든 반지를 만지작거리더니 의자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후유. 이제 가시려나 보다.’
천상경을 지키는 신의 사자가 ‘오늘은 조용히 지나가는 구나’ 하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에오스는 천상경 앞으로 한 발 한 발 천천히 다가갔다.
몇몇 신들이 하던 일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그녀를 주시했고, 그녀는 만지작거리던 반지를 손에 꽉 쥐었다.
망설이는 듯 움직이는 그녀를 보며,
“서, 설마…….”
“천상경에서 물러나십시오!”
“뭐해! 다들 말리세요!”
“안 됩니다! 에오스 님!”
신들과 사자들이 달려와 그녀의 팔을 붙들었다.
그럼에도 에오스는 반지를 천상경으로 대차게 던졌다.
== == == == ==
여의도의 한 방송국 공개홀 앞.
7월 초이건만, 밤에도 더위가 가시질 않고 후덥지근하다.
나는 손으로 부채를 만들어 휙휙 내저었다.
잠깐 바람이 만들어져 얼굴을 간질이기는 했지만, 잠깐이었다.
“아. 덥고 짜증.”
고개를 들었다. 눈앞에서 응원 피켓을 들고 있는 초등학생 조카들의 모습이 보인다.
잠시 후, 인기 그룹 ‘블랙타이거’를 태운 검은색 밴이 방송국 주차장 출구로 모습을 드러냈다.
조카들이 어떻게든 가까이서 보려고 아주 지랄 발광을 하고 난리가 났다.
쯧쯧쯧. 저런 한심한 놈들. 혀가 절로 차진다.
밤 10시가 조금 넘은 시간.
평소 같으면 친구 놈들과 클럽에 가 있을 시간이다.
무슨 옷을 그따위로 입느냐고, 아직 군인 티를 못 벗었다고, 구박하는 녀석들 때문에 슬랙스도 하나 샀는데. 제길.
고개를 돌려 보니 밴은 출구 앞 사거리에서 빨간색 신호에 걸려서 정차해 있고, 팬클럽 아이들도 우르르 몰려간다.
당장 이리 와라. 오지 않으면 버려 놓고 가겠다.
순간 눈이 마주친 조카들이 터덜터덜 걸어오는데, 어깨가 축 늘어진 것이 영 집에 가기 싫은 표정이다.
녀석들을 기다리는 시간이 지루해서 괜히 길바닥을 찼다.
신발 앞코에 애꿎은 돌멩이만 채여서 몇 개 날아가다가,
“어, 어?”
내 운동화 한 짝도 함께 날아갔다.
“일진 더럽네.”
미간을 찌푸리며 운동화 한 짝을 줍고 돌아서는 길.
반짝!
전화위복이었을까?
반지를 하나 주웠다.
* * *
다음 날.
나는 평상시와 같이 아침 운동을 하러 나왔다.
군 제대한 지 얼마 안 되어서인지 아직은 아침형 인간이다.
슬슬 걸어서 아침마다 조깅 하는 코스에 도착했다.
‘진짜 많이 좋아졌다.’
예전엔 황폐한 개천이었다.
옆 동네에 있는 논밭에 물을 대겠다며 아무렇게나 파놓은 개천들과 풀베기를 하지 않아서 세상 벌레가 다 모여 있는 듯 불쾌한 환경 때문에 일부러 피해 돌아가는 사람들도 많았었다.
지금은 구역 개발을 하면서 넓은 간선 수로가 생겨나고 각종 운동 기구들까지 갖춰 놔서 조깅 코스로 완벽했다.
오늘은 아침부터 태양이 작열해서인지 운동 나온 사람들이 거의 없다.
뛸까?
고개를 내저었다. 조금 걸었다고 벌써 겨드랑이에 땀이 찬다.
바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으며 산책하듯 걸으며 아침의 느긋함을 즐겼다.
그 여유로움에 콧노래가 절로 나온다.
주머니 속 손끝에 뭔가가 자꾸 거치적거린다.
어젯밤 방송국 앞에서 주운 반지.
주웠을 때는 주인을 찾아 주려고 몇 번이나 두리번거렸지만 찾을 수 없었다.
로즈 골드처럼 은은한 핑크빛이 도는 이 반지는 14k가 분명했다.
그렇다고 이걸 팔아 용돈 벌이라도 하려는 생각은 아니었다.
지갑 안에 들어있을 교통카드 한 장과 현금 2만 원.
이것이 전 재산이긴 하지만, 누군가가 잃어버렸을 귀금속을 냉큼 집어서 내다 팔 만큼 양심이 없지도 않다.
그냥 길거리에 다시 버리고 올 수 없어서 내 주머니에 챙겼을 뿐.
팔아먹을 생각이 없는데 내가 챙겼다는 것은 모순이라면 모순일 테지.
원래 주웠던 자리에 가져다 놓을까? 애초에 파출소에 맡길 것을 그랬나?
처음부터 일 처리를 잘못했구나. 내가 여기까지 들고 오는 게 아니었는데…….
그래! 근처에 있는 분실물 센터에 맡기면 될 것을…… 왜 어제는 이런 생각이 안 떠올랐는지 모르겠다.
아침밥을 먹고 가져가서 맡길까? 푹푹 찌는데 해가 질 때 쯤 가지고 갈까? 이런저런 고민하며 산책을 계속 했다.
머릿속에 복잡하게 엉켜 있던 상념들이 흩어지자, 햇볕에 눈 녹듯 고민도 사라진다.
* * *
그 시간 신계, 음악의 성전.
성전의 주인인 아폴론과 ‘행운의 여신’ 티케(Tyche)가 아주 심각한 표정으로 서 있다.
아폴론은 신계의 사고뭉치 안하무인인 에오스를 그나마 제일 이해하고 평소 가깝게 지내는 티케를 불러들였다.
“아직도 그렇게 철없는 행동을 할 수 있다니 대단한데? 대형 사고를 치고도 술이 넘어갈까 몰라.”
티케가 구석에 있는 의자에 앉아 술을 마시고 있는 에오스를 째려보며 혼잣말을 했다.
에오스는 그 말을 다 들었지만, 어깨만 으쓱해 보이고는 술잔을 채웠다.
그 행동이 거슬렸는지 티케는 인상을 구겼다.
아폴론도 짜증이 솟구쳤다.
자신보다 높은 선대의 신이라고는 하나 터져나오는 한숨을 참을 수 없었다.
에오스의 이번 행동은 신계의 법을 모르는 어린아이들도 하지 않을 짓이었다.
“반지를 왜 지상으로 내리셨습니까? 아폴론의 반지를요.”
아폴론은 전날 자신만이 출입할 수 있는 성역에 ‘엑스트라 링’을 두었다.
그 반지는 ‘음악의 성전’의 모든 신들이 투표로 정한 ‘선인’에게 돌아갈 참이었다.
선인으로 추대된 인간은 살아생전에 반지를 통해 신계의 모든 신들과 교류하다가 죽어서는 신계로 올라올 수 있었다.
이 중요한 반지를 에오스가 훔쳤다.
“그깟 반지! 아폴론 그대의 의지로 다시 만들어내면 그뿐! 왜 나를 나무라는 거지? 이 에오스가 직접 선출한 선인을 신계로 올리겠다는데, 무슨 불만 가득한 표정이야? 설마 그깟 장로들의 결정이 더 중요하다는 건가? 나는 위대한 티탄 신족인 히페리온(Hyperion)과 테이아(Theia)의 딸…… 우웁.”
신경질 가득한 얼굴로 아폴론에게 따지는 에오스는 끝까지를 말을 잇지 못했다.
여신 티케가 아폴론의 한껏 짜증 난 표정을 보고는 손으로 에오스의 입을 막아 버렸다.
그대로 뒀다가는 항상 오만한 저 입에서 아폴론의 화를 부채질할 만한 말들이 튀어나올 것이 뻔했다.
에오스의 입에서 슬그머니 손을 떼며 티케가 말했다.
“몰랐어? 여신 에오스가 요즘 지상 세계의 남자에게 또 반해 있다는 거. 아! 저번에 조화의 여신한테 협박해서, ‘외모에 축복을 내려라!’라고 했던. 그 사건 기억해? 동혁이라고 했나? 한국이라는 나라의 가수. 어쨌든 그 인간에게 주려고 했던 것인데 다른 인간이 줍게 된 거지.”
여신 티케 또한 에오스와 같은 항렬로 아폴론보다 선대의 신이었다.
아폴론에게 하대를 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신 중의 한 명.
잠자코 듣고 있던 아폴론이 물었다.
“티케 님, 반지를 주운 자는 본래 어떻게 살아갈 운명이었습니까?”
티케는 오른손 바닥을 펼치고 그 위에 아주 작은 그리고 찬란하게 빛나는 구름을 만들었다.
두둥실 오색찬란한 구름이 허공에 머물다 흩어진다.
그녀는 저 작은 구름으로 인간의 운명에 행운을 축복해 주기도, 지독한 불행을 선사하기도 했으며 행운의 크기를 점치기도 했다.
잠시 눈을 감은 티케가 이내 입을 열었다.
“본래는 평범하게 살 운명이야. 행운이 그리 많이 깃들어 있지도 않군. 그저 일한 만큼 대가를 받고 노력한 만큼 성장하는 평민의 삶을 살다가 죽을 운명이지.”
명부를 둘러본 그녀는 점차 심각한 표정이 되어 말을 이었다.
“저 인간이 반지를 끼게 된다면 그 반지는 죽어서도 안 빠질 거야. 반지와 상통한 자는 사후에도 하데스에게 가지 않지. 곧바로…….”
티케는 손가락으로 서 있는 바닥을 가리켰다.
“여기로 오겠지.”
말을 마친 티케는 아직도 술잔을 기울이고 있는 에오스를 바라보며 물었다.
“새벽의 여신 에오스여. 이 사태를 어떻게 해결할 건가?”
에오스의 미간이 좁아졌다.
“그냥 빼앗아 오면 되지 않겠어? 무력으로라도… ‘전쟁의 신’ 아테나(Athena)에게 신장 몇 명 보내라고 해”
에오스한테 해결 방안을 들은 티케가 크게 숨을 내쉬었다.
이어 한숨 섞인 목소리로 타이르듯 말한다.
“진짜 몰라서 이러는 거야? 알면서 일부러 그러는 거야? 반지를 가장 안전하게 보관할 수 있는 곳이 어딘지 몰라서 이래? 바로 손가락이라고! 무력으로 빼앗으려다가 인간이 손가락에 끼워버리는 날엔 더 큰 사달이 난다는 걸 모르냐? 그렇게 된다면 아무리 신이라고 한들 가져올 수 있을 것 같냐? 그 반지는 모든 음악의 신들의 염원을 담아 아폴론의 의지로 만들어낸 반지라고. 답답하군.”
긴 잔소리를 들은 에오스는 짜증을 뱉어냈다.
“그러게 왜들 막아선 거지? 잘 던질 수 있었는데, 모두들 내 팔을 잡아끌고 방해하는 바람에 이상한 곳으로 던졌잖아? 허! 이 에오스를 막아서다니 겁도 없는 자들이…….”
적반하장도 유분수다.
그녀의 막말이 더 이어지기 전에 티케가 저지했다.
“여신 에오스! 그 입 다물고 반지 가져와. 당장!”
술잔에 남은 한 모금의 술을 마저 마시고 에오스는 피식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난 지금 징계 중인걸? 아직 119년이나 남아 있고.”
1년 전쯤 성전의 한곳인 ‘천상의 샘’에서 사고를 친 건으로 에오스는 징계 중이다.
[향후 120년간 지상으로 내려가는 것을 금한다.]
샘물을 한 바가지 퍼다가 인간에게 선물한 일이었는데, 그 인간은 그때부터 한국을 대표하는 가수가 되고, ‘천상의 목소리’라는 타이틀을 얻게 되었다.
노래하며 평범하게 살다가 소질이 없어서 음악을 관두게 될 운명에 명성과 인기를 주었으니, 300년 정도는 처벌을 받아야 마땅했지만, 아폴론이 간청하여 그나마 형량이 줄어든 것이다.
“저의 신력으로 잠시 보내드리지요. 부디 무력보다는 현명한 회유를 하시길…….”
아폴론까지 합세하여 지상에 보내준다니 ‘졌다’는 표정으로 에오스가 두 손을 내저었다.
“알았어. 회수해 오도록 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