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장 초월 (50/51)

4장 초월

메마른 협곡을 가득 메우는 눈이 부실 만큼의 새하얀 빛.

라크온은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 깨달았다.

눈앞의 이강현이 종족의 한계를 뛰어넘을 자격을 갖춘 것이다.

라크온이 침음을 흘렸다.

“<초월>이라니……!”

<초월>이 어디 쉬운 일이던가?

새로운 <초월자>가 수천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다는 걸 고려한다면, 절대 그렇지 않았다.

그런데 그런 <초월자>의 탄생이 지금 자신의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도무지 믿기 힘든 일.

그러나 이내 라크온은 알게 되었다.

자신이 어떤 생각을 하건 간에, 이강현의 <초월>은 사실이라는 걸.

‘그렇다면…….’

라크온은 놀란 마음을 가라앉히고자 노력했다.

뭐가 어찌 된 것이든 간에, 이강현은 적안의 마왕의 손아귀에서 자신과 수하들을, 나레프를 구해주었다.

나레프를 이끄는 자신으로서는 너무나도 고마운 일이자, 후에 몇 번이고 회상할 만한 일들일 게 틀림없었다.

‘다행히 이 자리에서 조금이나마 갚을 수는 있겠군.’

운이 좋게도, 마침 이강현을 위해 그가 해줄 수 있는 일이 존재했다.

그 일들을 해주는 것이 몸소 나서준 이강현에 대한 마땅한 도리일 터였다.

“전원 주목. 모두 이강현을 엄호한다.”

생각을 정리한 라크온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강현에게 아주 중요한 시점이니, 이 빛이 완전히 사그라질 때까지 그 누구도 얼씬하지 못하도록 하라!”

“"알겠습니다!"”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걸 직감한 라크온의 수하들이 합창을 내질렀다.

“인원을 절반으로 나누어 반은 마기의 폭포가 멎어든 발로를 정리하고, 나머지 반은 이곳에서 주변을 엄중히 경계하도록!”

“"명을 받듭니다!"”

그렇게 적안의 마왕의 공포로부터 해방된 악마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물론 악마들의 분주한 움직임에도 불구하고 빛이 너무나도 밝았기에, 정작 그 중심에 자리한 강현은 그것들을 눈치채지 못했다.

* * *

[사용자의 종족을 확인합니다…… 1%…… 41%…… 75%…… 100%.]

[사용자의 종족은 ‘인간’입니다.]

[사용자의 ‘격’의 총량을 측정합니다…… 1%…… 12%…… 38%…… 54%…….]

[13단계를 모두 채웠음을 확인.]

…….

십수 개의 메시지가 온 시야를 뒤덮는다.

슈와아아아-

주변을 둘러보자, 온통 새하얀 빛밖에 보이질 않는다.

엔딜 펠란을 품은 수수께끼의 검도, 적안의 마왕과의 전투를 위해 잔뜩 꺼내두었던 아티팩트들도 모두 자취를 감춘 상태.

강현에게 보이는 것이라고는 온 사방의 뒤덮은 새하얀 빛무리 뿐이었다.

그리고 새하얀 공간에서 메시지의 향연을 보는 있던 것도 잠시.

[사용자의 심신 및 ‘격’을 파악합니다…… 1%…… 5%…… 9%…….]

처음 보는 메시지를 마지막으로, 강현은 자신의 정신이 아래로 꺼지듯 내려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현실과 가상, 현재와 과거를 구분할 수 없는 무의식의 경계를 향해.

스아아아…….

‘리얼’을 접하기 전까지의 평범했던 어린 시절부터, ‘리얼’에서 광검제라 불리던 시절들이 스쳐 지나간다.

-아, 광검제! 결국 암흑검제를 단신으로 쓰러뜨리는군요! 이렇게 또 한 번의 신화를 써내려갑니다!

-광검제, 새로이 발표된 세계랭킹에서 또다시 1위를 차지합니다! 벌써 몇 달 연속인지를 모르겠습니다! 경이로울 정도예요!

…….

자신을 찬양하던 뉴스와 기사들이 빠르게 나타났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다음으로 나타난 건 빌어먹을 대격변이었다.

-대격변 발호! 초인들의 등장?!

-빠르게 몰락하는 ‘리얼’! 대세는 ‘진짜’ 헌터들!

-광검제 이강현, 급작스러웠던 ‘리얼’의 서비스 종료 후 칩거에 들어갔다고 전해져.

절망과 좌절의 시간들이 흘러갔다.

아무리 발버둥쳐도 벗어날 수 없던, 끔찍하기 그지없던 시간들.

-이강현, 뜬금없는 입대?! 이강현의 지인, ‘상심을 이겨내려고 입대를 선택했다고 알고 있어.’

…….

과거의 일들임에도 보는 게 힘든 시절이었다.

허나 이 자리에서 그것들을 보지 않을 방법은 없었다.

강현은 어쩔 수 없이 그 모든 시절을 똑똑히 정면에서 마주했고, 정직하게 괴로워했다.

그가 괴로워하는 동안에도 시간은 흘러가, 마침내 좌절의 시간의 끝을 알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는 DBC에서 이번 경연을 맡게 된 연출 프로듀서, 로독이라고 합니다. ‘더 비욘드’에 참가하신 여러분들을 만나뵙게 되어 진심으로 영광입니다!

더 비욘드가 나타난 것이다.

이어서 비교적 가까운 과거의 기억들이 흘러갔다.

처음 소환되어 어리둥절했던 튜토리얼.

류트, 루드스와 함께했던 서브 미션.

처음으로 그의 진가를 드러냈던 첫 번째 예선…….

시간은 순식간에 흘러 두 번째 미션, 세 번째 미션을 비추었고, 그 기세를 이어 본선까지 비추었다.

그리고 적안의 마왕과의 일전을 끝으로. 그의 정신이 무의식의 경계에서부터 되돌아온다.

[사용자의 심신 및 ‘격’을 파악합니다…… 91%…… 96%…… 100%…… 파악 완료.]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그의 지난날들을 간단하게나마 훑어서일까?

강현은 머릿속이 말끔해졌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설명하기는 힘들지만, 어딘가 뻥 뚫린 것처럼 맑아진 느낌.

지금까지 ‘단계’가 증진하면서 온몸을 휘감던 상쾌함보다 수십 배는 더 기분 좋은 느낌이었다.

잠시 그 맑아짐을 만끽한 강현은 천천히 눈을 떴다.

여전히 자신의 주변을 둘러싼 하얀 빛이 눈에 들어왔다.

‘똑같네…… 응?’

정면을 응시한 강현이 눈을 크게 떴다.

빛은 그대로였으나, 시야를 가득 뒤덮던 메시지가 달라졌던 것이다.

[사용자의 심신을 재구성합니다…… 1%]

시야를 어지럽히던 메시지들은 다 사라진 채, 딱 하나의 메시지만이 남아있었다.

“심신을 재구성한다고?”

그 뜻을 알기 힘든 문구에 강현이 되뇌었을 때였다.

슈와아아-

새하얀 빛무리가 다시 한 번 터져나왔다.

“……!”

빛무리의 근원지를 본 강현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도 그럴 게 주변을 뒤덮던 여태까지의 빛무리와는 달리, 이번 빛무리는 그의 몸에서부터 터져나오고 있어서였다.

그와 더불어 처음 느껴보는 신묘한 감각들이 마구 몸을 휩쓴다.

“……!”

그가 알던 <초월>의 의미와 더불어 몸에서부터 새어나오는 빛무리를 본 강현은 감을 잡을 수 있었다.

‘심신을 재구성한다는 게…… 종족의 한계를 뛰어넘는다는 건가?’

그가 아는 <초월>이란 종족의 한계를 뛰어넘는 것.

그렇다면 지금 느껴지는 이 감각들은 본격적인 <초월>이 시작됐다는 뜻인 걸로 보였다.

‘그렇다면…….’

이 감각들이 <초월자>로서의 자신을 알게 해주는 변화인 만큼, 눈을 떼지 말아야 할 터였다.

강현은 내면에 기감을 최대한 집중한 채 자신의 안팎에서 일어나는 변화들을 관조했다.

[‘격’을 소모하여 신체를 재구성합니다…… 완료.]

[‘격’을 소모하여 마음을 재구성합니다…… 완료.]

[‘격’을 소모하여 에테르 적응력을 최대로 높입니다…… 완료.]

[‘격’을 소모하여 에테르 감응력을 최대로 높입니다…… 완료.]

…….

그렇게 수십 개의 메시지들이 흘러갔고.

[심신을 모두 재구성했습니다.]

[<초월>이 완료됩니다.]

마지막 메시지를 끝으로.

스아아아-

비로소 새하얀 빛이 일제히 시야에서 사라졌다.

* * *

눈을 뜬 강현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근방에서는 아무런 인기척도 느낄 수 없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난 거지?’

반가운 목소리가 들려온 건 그때였다.

-<초월>은 끝났나?

엔딜 펠란의 말이 들려온 것이다.

재빨리 주변을 훑은 그는 다소곳이 바닥에 놓여져있는 수수께끼의 검을 찾아냈다.

수수께끼의 검을 주운 그가 물었다.

“시간이 많이 지났습니까?”

-열흘 가까이 흐른 것 같군. 따분해 죽는 줄 알았다.

“열흘이요?”

열흘이라는 말에 강현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체감상으로는 길어야 하루일 줄 알았는데 열흘이라니.

강현의 의문을 눈치챈 엔딜 펠란이 부연 설명을 덧붙여주었다.

-이 몸도 느꼈던 거지만, <초월>을 할 때 겪는 심신의 재구성은 체감보다 훨씬 오래 걸린다. 으레 겪는 현상이니 당황할 필요는 없다.

“원래 그런 거라면 어쩔 수 없겠네요.”

-그래. 그러니 신경 끄고 잠깐 기다리도록. 네놈이 깨어나면서 에테르의 폭풍이 멎어들었을 테니 곧 라크온이 인원을 보내올 거다.

“에테르의 폭풍?”

-<초월자>가 탄생할 때 주변을 에테르가 휩쓰는 현상을 말하지. 하늘을 보면 무슨 말인지 알 거다.

하늘을 본 강현은 에테르 폭풍이 어떤 현상인지 알게 되었다.

자신을 중심으로 온 하늘에 드리운 거대한 먹구름들에서부터, 웬 새하얀 벼락들이 쉴 새 없이 내리치고 있었던 것이다.

쿠르르릉- 콰쾅!

벼락이 한 번 내리칠 때마다 큼지막한 크레이터들이 생겨났는데, 그걸로 미루어보아 위력이 상당하다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네놈이 <초월>을 마쳤기에 잦아들었다만, 며칠 전까지만 해도 산성비도 같이 오는 바람에 난리가 아니었지. 라크온은 끝까지 경계를 서주겠다고 했다만, 내가 돌려보냈다.

“라크온이 제 경계를 서주고 있었습니까?”

-그래, 이틀 전까지 이곳에서 직접 버텼지. 네놈도 정신을 차렸으니, 에테르의 폭풍도 곧 잠잠해질 거다.”

“…….”

라크온 정도 되는 악마가 산성비에 새하얀 벼락을 견디면서까지 자리하고 있었다니.

사정을 모르던 강현으로서는 약간 미안해졌다.

-그래서, <초월>을 한 소감은 어떻지?

엔딜 펠란의 말에 강현은 상념에서 벗어나 기감을 끌어올려보았다.

그로부터 잠시 후, 그가 나직이 말했다.

“새로 태어난 것 같은데요.”

그 말은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마치 새로운 육감이 깨어난듯, 기감이 어마어마하게 확장되었던 것이다.

자그마치 수십 킬로미터 밖의 일까지 생생히 파악할 수가 있을 정도이니, 말 다 했다고 할 수 있으리라.

눈을 뜬 뒤 얼떨떨하기만 했었는데, 기감을 퍼뜨리고 나서야 약간 체감되는 기분이었다.

끝내, 그의 목표였던 <초월>에 이르렀다는 것을.

-흐흐, 그럴 줄 알았다.

예상했다는듯 클클대는 것으로 응수해오는 엔딜 펠란.

그러더니, 뜬금없는 말을 해온다.

-이 몸이 할 말이 몇 개 있긴 하다만…… 잠깐 미뤄야겠군.

“예? 무슨 말입니까?”

-네놈의 품을 봐라.

그의 말을 따라 시선을 내린 강현은 볼 수 있었다.

스아아아아-

그의 품이 찬란한 황금빛으로 빛나고 있는 것을.

“이건……!”

품에서 빛나는 게 무엇인지를 깨달은 강현은 즉각 품에 손을 집어넣었고, 꺼낼 수 있었다.

반짝-

끊임없이 반짝이는 [email protected]차원의 핵을.

그는 [email protected]차원의 핵에 대해 빙룡 아디스가 해주었던 말을 기억해냈다.

‘<초월>을 하면 안에 담긴 걸 볼 수 있다고 했었지.’

즉, 자신은 충분히 자격을 갖춘 셈이었다.

“할 말은…… 일단 이걸 다 보고 하도록 하죠.”

-바라던 바다.

엔딜 펠란의 동의를 구한 강현은 곧장 [email protected]차원의 핵을 손에 쥔 뒤, 에테르를 불어넣었다.

그러자 [email protected]차원의 핵이 두둥실 공중에 떠올랐고, 다음 순간.

슈와아아아-

영롱한 황금빛이 사방에 새어나감과 함께, [email protected]차원의 노인이 그를 위해 남긴 것들이 펼쳐졌다.

* * *

[흐음…….]

새하얀 공간 속의 어느 거대한 왕좌.

왕좌에 걸터앉은 ‘태고의 거인’은 가만히 턱을 괴었다.

여느 때처럼 수십 개에 달하는 차원과 차원 사이를 꿰뚫어보고 있는 것이었다.

[라크리셀 셀라토리온 참가자, 세 개 남은 핀 포인트 중 하나를 선점하면서 다시금 선두에 올라섭니다! 핀 포인트를 점령하는 그 표정이 밝습니다! 끝이 멀지 않았다는 걸 알아서겠죠!]

한쪽에서 더 비욘드 본선의 마지막 미션을 중계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한창 치열해지고 있는 듯했으니, 거기에 거인은 별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최상위 종족들이 서서히 상위권을 차지해나가고 있다는, 비교적 뻔한 전개 때문이었다.

[그게 아니면…… 이강현이 없어서일지도.]

거인은 얼마 전 이강현에 의해 뒤집어졌던 더 비욘드를 떠올렸다.

지난 균형의 탑에서 벌어진 일 이후, 이강현은 망설임없이 더 비욘드를 그만둬버렸다.

그 선택의 여파는 엄청났다.

비공식적으로 포기를 선언한 것이었기에 사전에 공지가 되지 않았었고, 그에 따라 미션이 시작하기 직전 그 사실을 알게 된 시청자들과 참가자들로부터 상당한 파장이 일어났던 것이다.

물론 지금은 다들 열심히 미션에 집중하고 있으니, 그것들은 다 지난 일이라고 봐도 무방할 터였다.

[아, 바이토넬 참가자! 역시 핀 포인트를 점령함으로써 선두 경쟁에 합류합니다! 자, 마지막 남은 핀 포인트의 주인은…… 어엇! 그 뒤를 레이센 란과 세르반테 참가자가 뒤따릅니다! 미션이 종반을 향해 달려가는 지금, 가장 분전하고 있는 팀,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려는 의지를 전력으로 내보이는 팀이라고 봐도 무방…….]

거인은 더 비욘드에서 시선을 돌렸다.

사실 진작에 더 비욘드에서의 목적은 달성했기에, 더 볼 필요도 없었다.

스윽.

그의 눈이 제33 마계, 정확히는 에테르의 폭풍 한가운데에 오롯이 서있는 이강현에게로 향했다.

눈이 부실 만큼의 황금빛에 둘러싸여있었으나, 거인이 인식하는 데에는 조금의 문제도 없었다.

쿠오오오오-

아주 멀리서 보고 있었음에도 생생하게 전해져온다.

이강현에게서 느껴지는 아득한 ‘격’, <초월>의 ‘격’이.

비록 이제 막 <초월자>가 된 만큼 그 아득함의 정도는 미미했다.

그렇지만 <초월>의 ‘격’이라는 건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결국…… 해냈나…….]

거인은 균형의 탑에서 이강현에게 주어졌었던, 당사자인 이강현은 알지 못했던 두 개의 ‘선택지’를 떠올렸다.

더 비욘드의 진실을 못 본척 하고서는 더 비욘드를 계속해나갈 것인지.

혹은 깔끔하게 그만둔 뒤, 자신만의 길을 개척할 것인지.

이강현에게 말을 해주지는 않았지만, 만약 이강현이 더 비욘드를 계속했다면 결국 <초월>을 하지 못했을 공산이 컸다.

무력과 무력을 부딪치는 마지막 미션에서, 결국 용종과 악마종을 이기지는 못했을 테니까.

하지만 이강현은 더 비욘드를 그만둔다는 올바른 ‘선택’을 내렸고, 끝내 스스로 <초월>을 일구어냈다.

더 비욘드의 예선에서 처음 봤었던 이강현의 수준을 생각한다면 경이로울 정도의 속도가 아닐 수 없었다.

물론 수많은 기연들이 함께하긴 했어도, <초월>을 성취해낸 건 결국 이강현 스스로의 힘이었다.

[슬슬…… 때가 되었나…….]

거인은 이강현에게 ‘제안’을 가 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아주 오래전부터 준비해왔던 계획에 함께하지 않겠냐는 제안이었다.

그의 생각에 이강현 또한 자신의 제안을 반가워할 게 분명했다.

어차피 이강현이 하고자 하는 일의 연장선은, 자신의 목적과 상통했기에.

[조금만…… 기다려라…… 강현…….]

쿠콰콰콰-

나직이 중얼거린 거인이, 천천히 그 거구를 일으켰다.

* * *

슈와아아아-

강현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조금 전과 비슷한, 온통 빛에 휩싸인 주변이 눈에 들어온다.

그나마 아까와 다른 점을 꼽자면, 그 빛의 색깔이 순백이 아니라 황금빛이라는 점이랄까.

그것 외에는 별다를 게 없는 광경들이었다.

사방이 황금빛으로 뒤덮인 공간, 강현은 그곳에 있었다.

‘이번에는 또 뭐가 뜨려나.’

강현은 여지껏 [email protected]차원의 노인이 보여주었던 것들을 대강 기억해보았다.

평화롭게 번창해가던 [email protected]차원.

그리고 그런 [email protected]차원을 노리는, [email protected]차원의 전역에 암운처럼 드리우던 차원수.

마지막으로 본 영상에서는, 차원수에 맞서 노인이 처절하게 싸우는 장면이 나타났었다.

‘그 다음 영상을 보여주려는 건가…… 시작하네.’

지이이잉-

강현의 눈이 이채를 띠었다.

그의 정면에 영상이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쿠구구구-

삽시간에 사방이 어두워지고, 짙은 고동색의 고목의 뿌리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수백 킬로미터에 달하는 뿌리들.

‘차원수!’

이내 차원수와 더불어, 차원수를 막아내고 있는 노인의 나타난다.

황금빛이 서서히 옅어져가고 있음에도 차원수를 막고자 안간힘을 다하는 노인의 분투.

‘지난번에는 여기까지 보여줬었지.’

정확히는, 남은 전투는 생략한 채 몰락한 [email protected]차원으로 바로 넘어갔었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생략된 장면들도 보여주려는 것일까?

그 의문에 대한 답은 금세 나왔다.

-크윽……! 왜 하필 우리인지는 모른다. 대답해주지도 않겠지…….

-…….

-허나 상관없다. 반드시 지켜낼 거니까! 설령 나의 ‘격’이 이 자리에서 모두 소멸한다고 해도!

처절한 외침과 더불어, 노인의 몸에서 어마어마한 빛이 터져나온다.

노인이 방출한 빛을 본 강현은 눈을 부릅 떴다.

“미친…….”

찬란한 황금빛이, 끝도 없이 번져나가고 있었다.

슈와아아아아-

차원수와의 전장을 넘어, [email protected]차원 전체로.

츠츠츠츠…….

황금빛에 닿은 차원수의 뿌리가 일시적으로나마 그 힘을 잃어간다.

수천 킬로미터에 달하는 뿌리들이 일제히 힘을 잃어가는 광경은 보는 이로 하여금 절로 경외감을 가지게 했다.

그러고도 황금빛은 기세를 잃지 않았고, 그대로 [email protected]차원 너머까지 밝혀나갔다.

“…….”

입을 떡 벌린 강현은 [email protected]차원을 벗어나는 황금빛을 놓치지 않고자 안력을 끌어올렸다.

황금빛의 종착지가 어디일지를 알고 싶어서였다.

슈와아아-

멀어져가는 황금빛을 무리없이 뒤따라가는 강현의 시각.

황금빛의 끝을 보는 데에 너무나도 집중해서일까.

사실 이 같은 행위는 원래였다면 불가능했다는 걸 강현은 눈치채지 못했다.

<초월자>가 되면서 볼 수 있게 된 것이지, 평범한 인간이라면 수천 킬로미터 밖의 빛을 따라갈 수는 없었다.

그러나 한창 집중하고 있는 강현에게 미처 그것까지 의식할 여유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계속해서 빛을 따라가던 강현의 시야가 어느 순간 멈칫했다.

“어……?”

차원과 차원 사이의 통로, 그곳들에 자리한 이질적인 것들이 보였기 때문이다.

“말도 안 돼…….”

강현이 침음을 흘렸다.

인근 십수 개의 차원을 밝힌 황금빛이 밝힌 광경에는.

쿠콰콰콰콰콰-

그 각각의 차원들을 향해 조금씩 전진해나가고 있는, 거대한 차원수의 뿌리다발이 넘실대고 있었으니까.

쿠구구구-

이어서 ‘격’의 파동이 밀려들어온다.

십수 개 차원에 걸쳐있는 차원수의 뿌리다발을 봄으로써 덮쳐오는 ‘격’의 파동이었다.

“큭…….”

강현은 이를 악물고는 전력으로 기세를 끌어올렸다.

막 올랐다고는 하나, 그래도 <초월>의 경지에 오른 강현으로서도 정면에게 견디기 버거울 정도였다.

‘이래서 <초월>을 해야 볼 수 있다는 제한을 걸었던 거군.’

지금도 온힘을 다해야 이 ‘격’에 저항할 수가 있는데, 만약 <초월>하지도 못한 상태에서 봤다면?

밀려드는 차원수의 ‘격’을 견디지 못하고서는 폐인이 되거나 죽었을 터였다.

‘빌어먹을 차원수…… 대체 몇 개나 되는 차원을 노린 거야?’

강현은 탐욕스럽게 일렁이는 차원수의 뿌리들을 노려보았다.

[email protected]차원의 노인이 자신에게 뭘 보여주려고 한 건지 깨달은 참이었다.

차원수가 한꺼번에 수많은 차원을 노리고 있다는 것.

그걸 알려주기 위한 것이리라.

때마침 영상의 노인도 그 사실을 알게 된 듯했다.

-그랬군…… 이곳만 노려진 게 아니었나…….

하늘을 보고서는 차원수의 뿌리다발을 확인하더니, 허탈한 웃음을 지어보인다.

꾸드드드득-

그리고 노인의 황금빛에 잠깐 밀렸던 차원수의 뿌리다발이 다시금 힘을 되찾아가면서, 영상이 끝난다.

번쩍-

황금빛과 푸른빛이 번갈아 터져나오더니, 정신이 현실로 돌아가는 감각이 느껴진다.

‘푸른빛?’

뜬금없는 색깔의 빛에 강현이 의아한 기색을 내보이는데, 귓가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대에게 필요한 걸 넣었으니, 요긴하게 잘 써주었으면 좋겠군.]

본선의 미션에서 만났던 빙룡 아디스의 목소리였다.

‘그러고 보니…….’

아디스를 만났을 때, 그 역시 [email protected]차원의 핵에 무언가를 넣어놨다고 했었다.

워낙 일이 많아 깜빡하고 있었는데, 지난번에 아디스가 남겼던 게 발동한 모양이었다.

‘뭘 남겼단 거지?’

서서히 자취를 감추어가는 황금빛 속.

강현은 아디스가 뭘 남긴 건지를 알아보려고 했으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그런 가운데, 이내 황금빛이 완전히 사라졌다.

* * *

정신을 차린 강현은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자신의 <초월>이 완료됨에 따라 천천히 걷혀가고는 있다지만, 주변에는 아직도 먹구름과 하얀 벼락들이 내리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중심에서, 강현은 가만히 얻어낸 정보들을 정리했다.

노인의 마지막 약진과, 차원수가 하나에 한 개의 차원만이 아닌, 십수 개, 어쩌면 수십 개에 달하는 차원들을 동시에 노리고 있다는 것…….

유각을 잃으면서 반드시 차원수에게 한 방 먹여주겠노라고 다짐했던 강현이었다.

다소 마음이 앞선 다짐이었는데, 이번 일로 차원수의 실체를 조금이나마 더 알게 된 기분이었다.

“후우.”

이윽고 정리를 끝낸 그가 한숨을 내쉬자, 엔딜 펠란이 칼 같이 물어온다.

-끝난 거냐?

“예, 이번에는 못 따라왔죠?”

-그래, 네놈의 의식만 가는 것 같더군.

“그러면…… 천천히 설명하겠습니다.”

그런데 그때였다.

쿠구구구…….

강현의 기감에, 어떤 감각이 미세하게 느껴진다.

뭔가가 천천히 이곳 제33 마계로 다가오는 듯한, 아까까지는 느끼지 못했던 감각이었다.

“설마……?”

강현은 다가오는 게 무엇인지 직감했다.

사나크가 그토록 경계하던 ‘적’.

‘적’이 다가오고 있는 걸로 보였다.

강현은 더욱 감각을 끌어올려보았다.

스아아아…….

그의 기감이 제33 차원의 차원 방벽으로 다가오는 ‘적’을 면밀히 훑는다.

일렁이는 것만 같은, 파멸적이고 압도적인 ‘격’…….

“……!”

강현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기감을 끌어올리자, ‘적’의 정체를 알 수 짐작할 수 있었던 것이다.

“차원…… 수…….”

지금 그의 기감에 잡힌느 건, 방금 [email protected]차원의 핵을 통해 봤던 차원수의 ‘격’이었다.

“왜 지금 느껴지는 거지? <초월>하고도 안 느껴졌었는데…… 아!”

강현은 차원수를 느낄 수 있게 된 이유를 깨달았다.

조금 전 노인의 영상이 끝나기 전 아디스가 넣어주었던 무언가.

그게 무언가 효력을 발휘한 게 틀림없었다.

‘차원수를 감지할 수 있게 된 건가?’

아까 <초월>을 하고서도 차원수를 느끼지 못한 데다가, 자신이 주는 걸 요긴하게 써달라는 아디스의 말을 종합해보면 대강 맞는 듯했다.

“그렇다면…….”

차원수를 감지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게 의미하는 바는 하나였다.

“……할 수 있겠네.”

강현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차원수에게 한 방 먹여주겠다는 다짐.

그 다짐을 예상보다 빠르게 실행할 수 있을 계획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시작은, 제33 마계에 드리운 차원수를 처리하는 게 될 것이었다.

-아까부터 혼자 뭘 궁시렁대는 거지?

엔딜 펠란이 물어온다.

강현은 그의 계획을 엔딜 펠란에게 설명해주었다.

“그게 노인이 준 영상 말미에…… 아니다. 그냥 처음부터 설명하겠습니다.”

차원수가 수십 개의 차원을 동시에 노리고 있을 수도 있다는 것과, 아디스가 자신에게 차원수를 감지할 수 있는 [권능]을 보내주었다는 것.

그리고 그 감각을 통해 실시간으로 제33 마계로 오고 있는 ‘적’, 차원수를 감지해냈다는 것까지.

“그래서 <초월>도 했겠다, 차원수의 뿌리를 찾은 김에 한 방 먹여주려고 했죠.”

-흠…… 잘 알아들었다. 확실히 보통 일이 아니군……

엔딜 펠란의 어조가 심히 진중해진다.

-다만, 경고할 게 있다.

“뭡니까?”

-네놈이 <초월>을 했다고 해도 그게 전지전능해졌다는 말은 아니라는 거다. 엄밀히 말해서는 아직은 <초월자> 중에서도 꼬꼬마라고 할 수 있지.

“꼬꼬마라니…… 그 정도입니까?”

강현이 질색하는 얼굴을 해보였다.

대충 <초월자>들 중에서도 급이 나뉜다는 건 짐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초월>을 이루었음에도 꼬꼬마라고 불릴 줄은 몰랐다.

-흥, 당연한 것 아니겠느냐?

엔딜 펠란이 코웃음을 친다.

-수천 년, 수만 년 살아온 <초월자>들끼리도 쌓아온 ‘격’에 따라 위아래가 갈린다. 상식적으로 방금 <초월>한 네놈의 힘이 그들과 같겠느냐?

“수천 년, 수만 년이면…… 나뉘기는 하겠네요.”

-대부분의 경우에서 극단적으로 밀리겠지. 아무튼 이 몸이 하고 싶은 말은 이거다. 확실히 <초월>을 하면서 네놈은 강해졌을 거다. ‘격’을 쌓아가는 것들에게는 절대적인 강함을 행사할 수도 있겠지…… 그러나.

잠깐 말을 끊은 엔딜 펠란이 말을 이어나갔다.

-네놈 이상의 ‘격’을 쌓은 존재들에게는 전혀 통하지 않을 거다. <초월자>도 그렇고……

“차원수도, 그럴 거라는 말이군요.”

-맞다. 차원수를 몰아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소리지. 그걸 고려해보면 차라리 이 차원에서 빠져나가는 게 더 나은 선택이 될 수도 있다. 게이트를 만드는 감각은 이미 네놈의 몸에 깃들었을 테니 빠져나가는 데에 문제도 없을 테고.

“게이트를 만드는 감각이요?”

-가만히 손을 내밀어봐라.

엔딜 펠란의 말대로였다.

손을 내밀자, 난생 처음 느껴보는 감각이 전해져온 것이다.

마치 에테르를 원격으로 컨트롤하여 문을 만들 수 있는 감각이랄까.

손을 내밀기만 했는데도 이런 감각이 느껴지는 게 신기했다.

“문을 만들 수 있을 것만 같은 이 감각으로 게이트를 만들 수 있다는 겁니까?”

-그래. 네놈이 사전에 가봤던 차원 중 원하는 차원을 강하게 떠올리면서 에테르를 흘려보내면 그곳으로 통하는 게이트가 만들어질 거다.

“……!”

그 말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였다.

적어도 위기의 순간에서 몸을 뺄 수단은 생겼다는 것.

‘창고에서 얻었던 텔레포트 스크롤이 있기는 해도…… 게이트를 직접 만드는 것만은 못하지.’

설마 게이트를 직접 만들 수 있게 되다니.

<초월자>에 어울리는 능력이 아닐 수 없었다.

게이트를 만들 수 있다는 걸 알게 된 강현은 엔딜 펠란이 한 말을 곰곰이 되짚어보았다.

‘상대가 안 될 가능성이 크니, 안 될 거 같으면 몸을 빼라는 건데…….’

확실히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차원수가 괜히 여러 개의 차원들을 집어삼킨 건 아니니까.’

[email protected]차원의 노인은 분전 끝에 쓰러지고 말았고, 빙룡 아디스 역시 차원수를 막아내는 데에 버거워했다.

명백히 자신 이상의 ‘격’을 쌓았을 그들조차 차원수를 물리치지 못했는데, 자신이 한 방 먹여주겠다는 건 지나친 자신감일 가능성이 크겠지.

허나 잠시 후.

강현의 입에서 나온 건 머릿속과는 다른 말이었다.

“……그래도 뭐, 시도는 해봐야죠.”

이곳 제33 마계에서 지난 세 달 동안 머물렀던 강현이다.

처음에는 적응이 잘 안 됐으나, 지금은 나름 정이 든 상태였다.

‘아무리 차원수가 오고 있다고 해도 바로 도망가고 싶지는 않아.’

심지어 이곳 제33 마계에 <초월자>라고는 현재 자신 뿐이다.

그나마 맞설 가능성이 있는 게 자신 하나밖에 없다는 뜻.

이런 절체절명의 상황 앞에서, 차원수가 잠식해온다고 나 몰라라 몸을 빼고 싶지는 싶지는 않았다.

‘겸사겸사, 차원수의 힘을 미리 파악해보고 싶기도 하고.’

-네놈의 뜻이라면 말리지는 않겠다만…… 괜찮겠나? 재수없다면 기껏 한 <초월>을 누려보지도 못하고 죽을 수도 있다.

“여차하면 게이트로 도망가면 되죠. 설마 게이트 만들 시간도 없겠습니까.”

상대가 정 안 되면 몸을 빼면 된다.

제33 마계의 악마들도 그 정도는 이해해줄 터였다.

“그건 그렇고 라크온은 언제쯤…… 아, 맞다.”

기감을 끌어올려 아직도 주변에 아무도 없다는 걸 파악한 강현이 돌연 소리를 냈다.

“아까 하려던 말이 뭡니까?”

조금 전 엔딜 펠란이 했던 말이 기억나서였다.

[email protected]차원의 핵이 보여준 영상을 보기 전, 엔딜 펠란이 무언가 말을 하려고 했었던 것이다.

-있긴 하다만…… 지금은 말해봤자 소용이 없는 일이다. 나중에 말해주도록 하지.

“그렇게 하시죠.”

무슨 말을 하려던 건지 궁금하긴 했지만, 강현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엔딜 펠란이 필요하면 말할 터였다.

그럼 라크온은 아직 안 오는 거 같으니까…… 그동안 점검이나 해볼까.’

강현은 나레프에서 인원이 올 때까지 잠시 내면을 관조하기로 했다.

심신이 재구성되면서 정확히 무엇이 바뀌었는지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어떻게 바뀌었을지 내심 기대하면서, 강현은 상태창을 불러내보았다.

“상태창.”

그런데.

“어?”

상태창을 본 강현의 입에서 된소리가 새어나왔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의 부름에 의해 나타난 상태창에는.

이름 : 이강현

레벨 : Ex

고유 특성 : -

보유 스킬 : -

능력치 : -

이름을 제외한 그 어떤 항목도 제대로 떠오르는 게 없었던 것이다.

“이게 무슨……?”

레벨에는 Ex가, 나머지 항목들에는 -가 적혀있다니?

‘리얼’에서도, 헌터들에게서도 이런 현상이 일어난다는 건 듣지도 보지도 못했다.

-당연한 것 아니냐.

놀란 강현과 달리, 엔딜 펠란은 심드렁하게 말해올 뿐이었다.

-<초월>을 한다는 의미가 뭐냐. 해당 종족의 한계, 즉 [종족 특성]의 한계를 뛰어넘었다는 말이지 않나? 그리고 이미 [종족 특성]을 뛰어넘은 이상 상태창이 제대로 나타날 리가 만무하지. 지극히 정상적인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

명쾌하게 설명을 마치는 엔딜 펠란.

다만 설명이 끝났음에도 강현은 쉬이 말을 잇지 못했다.

‘적응이 안 되는 기분인데.’

여지껏 수백 번 봐왔던 상태창을 더이상 보지 못하게 되어서인지도 몰랐다.

그때였다.

-……출발하도록 하겠다! 조심히 모셔오는 게 가장 중요한 목표다!

-……알겠습니다!

저 멀리서, 라크온이 보낸 걸로 추정되는 악마들의 기척이 전해져온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안 느껴졌던 생각해보면, 그가 이것저것을 하는 동안 접근해온 모양이었다.

강현은 소리가 난 방향으로 고개를 돌려보았다.

팟-

한참 멀리서부터 다소곳이 달려오고 있는 십여 마리의 악마들이 눈에 들어온다.

이제 막 나레프를 벗어난 듯했는데, 시력을 확장시킨 결과 이십 킬로 정도 떨어져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꽤나 걸릴 거 같은데…….”

이대로라면 한두 시간은 걸려야할 거로 보였다.

내가 먼저 갈까, 하는 생각이 들려던 찰나.

“……아.”

마침 좋은 생각이 떠오른다.

‘한 번 실험해볼까.’

될지 안 될지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한 번 해봐서 나쁠 건 없을 터였다.

스윽.

강현은 곧장 품에서 ???의 나무토막을 꺼내 들었고.

“소환.”

달려오는 악마들을 향해, ‘소환’을 발동했다.

그러자 다음 순간.

슈슈슉-

그의 눈앞에 일제히 악마들이 소환된다.

“어?”

“음?”

“이, 이게……?”

예상치 못한 상황에 악마들이 하나 같이 당황하는 가운데.

자신의 생각이 맞아떨어졌다는 사실에 강현은 씩 웃어보였다.

‘역시 이 정도는 거뜬하군.’

<초월>을 하면서 [권역]이 얼마나 늘어난지 궁금했었는데, 이십여 킬로미터는 문제없는 듯했다.

<초월> 위력을 체감한 그가 말을 꺼냈다.

“나눈 대화들은 대충 들었으니 따로 설명은 안 해줘도 됩니다.”

“아, 그, 그렇습니까? 그러면…….”

강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나레프로 돌아가죠.”

* * *

나레프로 돌아온 뒤.

강현에게 라크온은 비밀리에 대접을 해주었다.

강현에게 관저를 통째로 내어준 뒤, 그 안을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 성대한 연회를 연 것이다.

비밀리에 대접을 해준 이유는 단순했다.

<초월자>가 없는 제33 마계에 <초월자>의 탄생을, 그것도 다른 차원의 존재가 <초월>했다는 걸 함부로 알릴 수는 없어서였다.

자신으로 인해 괜한 혼란이 일어나는 걸 원하지 않던 강현으로서도 바라던 일이었다.

연회 역시 더없이 극진했기에 충분히 만족스럽기도 했고.

그렇게 벌어진 은밀하면서도 융숭한 연회는 밤이 되어서야 끝났다.

“시간이 늦었군. 슬슬 가봐야겠네.”

“예, 그러시죠.”

“내일 또 보도록 하지.”

수수께끼의 검에 고개를 꾸벅 숙여보인 라크온이 관저를 벗어난다.

강현은 라크온의 뒷모습을 보다가, 시선을 돌렸다.

그가 <초월>을 했다고 그와 라크온과의 관계가 변한 건 아니었다.

‘굳이 달라진 게 있다고 하면…….’

그가 이곳에 다가오고 있는 ‘적’, 차원수를 막아보겠다고 하자 라크온이 그에게 더욱 호의를 보이게 됐다는 점이랄까.

털썩.

강현은 침실로 이동해 침대에 드러누웠다.

그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는 관저에는 고요함만이 감돌았다.

“…….”

잠시 그 고요 속에 잠겨있던 강현은 연락구 두 개를 꺼내보았다.

하나는 세르반테, 레이센 란과 연결된 연락구.

다른 하나는 예선에서의 동료, 류트와 통하는 연락구였다.

그는 지체없이 두 개의 연락구에 에테르를 불어넣었다.

슈와아아아-

-……

양쪽 다 연결이 되질 않는 걸 본 강현이 얼굴을 구겼다.

“연락구를 안 가지고 다니는 건가…….”

<초월>이라는, 그들이 깜짝 놀랄 만한 소식을 알려주려 했는데 연락이 안 되다니.

아무래도 다음으로 미루어야 될 듯했다.

“나중에 말해야되나…….”

동료들이 이 소식을 접하게 되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증이 치솟았다.

“……빨리 만났으면 좋겠네.”

그런데 그가 중얼거렸을 때였다.

쿠구구구구구-

그의 앞에 느닷없이 게이트가 생기더니.

쿵.

영롱한 청록빛을 뿜는, 거구의 거인이 등장하는 게 아닌가.

[불렀…… 나…….]

그것도 뜬금없는 말을 하면서 말이다.

그런 거인의 말에 강현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눈을 깜빡이는 것뿐이었다.

“아니, 그쪽을 부른 건 아닌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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