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장 발푸르기스의 밤 (49/51)

3장 발푸르기스의 밤

푹-

“퀘에에엑…….”

광검에 목을 꿰뚫린, 나레프 남부의 거대 염소 마물이 쓰러진다.

쿵……!

집채만 한 염소 마물이 쓰러지면서 지면이 크게 흔들린다.

“……이걸로 이 근처도 끝인가.”

나레프 남부 근방을 위협하는 마지막 마물의 정리를 마친 강현이 손을 내밀었다.

[취할 수 있는 에테르가 감지되었습니다. 취하시겠습니까?]

스아아아-

마물에게서 흘러나온 에테르가 그의 손에 깃든다.

[현재 취한 에테르의 양(2,525/16,000)]

취한 에테르를 보는 그의 입가가 비스듬히 올라간다.

웃지 않는 게 더 이상할 것이었다.

‘드디어.’

습득해야할 에테르의 양이 8,000에서 16,000으로 늘어났다는 게 의미하는 건 하나밖에 없었으니까.

‘12단계.’

지난 한 달 동안 미친듯이 마물 사냥에만 매진한 끝에, 바로 지난주에 12단계를 달성할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12단계를 달성하기까지의 과정은 결코 쉽지 않았다.

해가 뜨기 한참 전부터 마물을 사냥하러 나가고, 하루 종일 마물을 사냥한 뒤 거의 자정 직전에야 돌아오는 일정을 반복했던 그였다.

자연히 하루종일 구르는 데에 따른 극도의 신체적 피로, 정신적 고통이 온몸을 휘감았었다.

그러나 인내는 쓰고 그 열매는 달다고 했던가.

갖은 고생을 해가면서 따낸 ‘12단계’라는 열매는, 단지 에테르 창을 보는 것만으로도 그의 기분을 좋게 만들었다.

‘13단계로 가기 위한 16,000이라는 숫자가 부담되기는 하다만…….’

그건, 하루 앞으로 다가올 발푸르기스의 밤에서 어떻게 해볼 여지가 있을 터였다.

슥, 슥.

강현은 형형색색의 피로 젖어있는 검을 대강 털어내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12단계에 이르면서 확장된 압도적인 기감이, 약 2㎞ 밖에서 도사리는 마물 무리를 포착해 낸다.

지금이야 근방에서 마물을 학살해 대던 자신이 있어서인지 눈치만 보고 있으나, 기회만 되면 언제든 고개를 내밀 놈들이다.

그걸 잘 알고 있기에, 만약 어제까지의 그였다면 저 마물들을 향해 지체 없이 달려들었을 것이다.

허나.

‘몸도 지쳤으니까…… 오늘은 여기까지 할까.’

그는 몸을 돌렸다.

방금의 염소 마물을 마지막으로 이곳 근방의 마물 무리는 대부분 정리했다.

2㎞ 밖에 마물이 있다고는 하다만, 어차피 이곳은 마계.

마물 무리가 득실거리는 건 지극히 정상이라 할 수 있었다.

‘어차피 숫자만 줄여도 나머지는 나레프 자체적으로 해결할 수 있을 거기도 하고…….’

내일 발푸르기스의 밤이 있다는 걸 감안한다면, 굳이 무리할 필요는 없겠지.

-언제 출발할 거지? 오늘은 이 몸도 푹 쉬고 싶군.

말해오는 엔딜 펠란의 목소리에도 짙은 피로가 묻어 있다.

강현이 마물들을 때려잡을 때마다 쉬지도 않고 마물 브리핑을 해주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강현은 라크온에게 말해 마정석이라도 구해다 줘야겠다고 생각하면서 훌쩍 날아올랐다.

[스킬, 천광의 날개[Lv.3]을 발동합니다.]

쿠오오오오-

찬란한 순백의 날개가 마계의 잿빛 하늘을 가로지른다.

그 목적지는 바로 뒤에 위치한 마계 도시 나레프.

나름 친숙해진 나레프의 성곽을 보며 강현은 지난 한 달을 되돌아보았다.

‘힘들었지만…… 쏠쏠하기도 했지.’

한 달 전 엔딜 펠란의 비밀 창고를 나오면서 품었던, 발푸르기스의 밤에서 활약할 수 있겠냐는 의문.

한 달 동안의 치열한 마물 사냥을 통해, 그는 그 의문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있었다.

정체되어 있던 11단계의 벽을 깨버렸고, 그간 얻었던 각종 아티팩트를 더욱 체화시켰다.

게다가 그가 지난 한 달 동안 개고생한 성과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이름 : 이강현

레벨 : 75

…….

상태창의 레벨을 본 그의 입꼬리가 다시 한번 올라갔다.

69레벨이었던 레벨을 무려 6이나 올릴 수 있었던 것이다…….

그때, 나레프가 가까워지면서, 이미 축제를 벌이고 있는 수많은 악마들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크르르르락-! 더! 술을 더 가져와라!”

“크케케케! 더 마셔라! 더 퍼부어라! 해가 지고 동이 틀 때까지!”

“으하하하! 하루만 기다려라! 위대한 ‘발로’의 감로수가 나를 기다리고 있으니!”

…….

탁하고, 찢고, 긁는 괴성과 비명의 향연.

자그마치 십만이 넘는 악마들이 한꺼번에 나레프로 모여들면서 벌어진 일이었다.

모인 악마들이 어찌나 난동을 피워대는지, 나레프 바깥에서조차 가지각색의 악마들이 뿜어내는 짙은 마기를 느낄 수 있을 지경이었다.

거기에 간간이 섞인 몇몇 악마들의 마기는 자신과 비교해도 전혀 꿀림이 없었지만.

강현은 걱정하지 않았다.

‘아무리 악마들이 드글거려도…….’

또 그들이 무의식적으로 뿜는 마기에서, 지금의 자신과 비견되는 수준의 악마가 있으리라 여겨진다고 해도.

크게 늘어난 ‘격’과 레벨이 주는 ‘답’은 명료하기 그지없었으니까.

‘지금의 나라면 무조건 통한다.’

직감에 가까운 확신.

하루 앞으로 다가온 악마와 마물들의 축제, 발푸르기스의 밤에서.

최상급의 마정석을 얻어, 엔딜 펠란이 남겨두었던 에테르를 취할 수 있으리라는 확신이었다.

턱.

난리를 피우는 악마들 사이로 내려앉은 강현은 곧장 처소로 이동해 휴식을 취했고.

그러는 동안 수백 마리의 악마들이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대는 것처럼 해가 지고 날이 밝았다.

그리고 밝아졌던 날이 다시 어두워질 때쯤, 나레프 근방의 발로에서부터 마기가 서서히 치솟았다.

수백 미터에 달하는 마공(魔孔)을 가득 채우며 뿜어져나오는 칠흑빛 마기의 폭포.

악마들의 축제, 발푸르기스의 밤의 시작됐음을 알리는 신호였다.

* * *

강현은 어두워진 바깥을 내다보았다.

쿵! 쿠쿵! 쿵!

창밖으로 그의 처소를 지나치는 악마들의 행진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

“---!”

…….

행진하는 악마들이 저들끼리 무어라 떠드는 소리들이 들려온다.

‘어제까지에 비하면 선녀군.’

다소 시끄럽기는 했으나, 소음 공해를 넘어 소음 공격이라고 칭하고 싶었던 어제까지에 비한다면 훨씬 덜했다.

-아무래도 잘못하다간 목이 날아간다는 걸 알고 있어서일 거다.

“떠드는 걸로 목이 날아갈 수도 있다고요? 그게 무슨 말입니까?”

뜬금없는 엔딜 펠란의 말에 강현은 눈을 깜빡였다.

떠드는 것과 목이 날아가는 것에 무슨 연관이 있단 말인가.

그러나 엔딜 펠란의 이어지는 말을 들은 그는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고위급 악마들 때문이지. 그들에게 하급 악마란, 수틀리면 죽여버리는 존재에 불과하니까.

“…….”

-어제까지는 다들 흥분해서 날뛰어댔지만, 지금은 이미 마기가 뿜어지고 있지. 고위급 악마들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가고 있을 거고, 그런 와중에 방해가 되는 하급 악마 따위를 죽이는 건 아무것도 아닐 거다. 마계는 강자존, 강자가 약자를 해치는 게 얼마든지 허용되는 곳이니 말이다.

‘강자존’이 또다시 언급되자, 강현은 안색을 굳혔다.

“……이제 본 게임이 시작됐다 이건가.”

개개인의 이익 앞에서 어느 때보다도 냉정해지는 강자존의 차원.

강자가 약자를 핍박하고, 괴롭히고, 심지어 죽여도 전혀 지탄받지 않는 곳.

그곳이 마계였다.

그리고 자신은 발푸르기스의 밤이라는, 강자존의 법칙이 어느 때보다도 강해지는 곳으로 들어가려 한다.

그때,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온다.

“벌써 준비를 끝낸 것 같군. 출발하기 전, 간단한 안내라도 해드리도록 하지.”

뒤를 돌아보자 라크온이 빙긋 웃어 보이고 있었다.

“바로 갈 필요는 없을까요? 지금쯤이면 선두에 있는 악마는 거의 도착했을 거 같은데.”

강현이 악마들의 행렬을 가리키며 물었다.

지난 한 달을 거치면서 라크온과 꽤나 가까워진 강현이었다.

굳이 엔딜 펠란을 통하지 않아도 이 정도 반문은 충분히 할 수 있었다.

“지금 악마들이 이동하는 게 보인다고 해서, 조급해할 필요는 조금도 없네.”

라크온이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지금 움직이고 있는 건 끽해야 하위 악마들, 그대와 비슷한 수준의 고위 악마들은 잠시 뒤에나 출발할 테니까.”

“아…… 그렇습니까.”

강현의 표정을 본 라크온이 덧붙였다.

“그래도 그대가 미리 가 있고 싶다면, 그렇게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라네. 그나저나, 물어볼 게 있네.”

“물어보십시오.”

“사나크 일당이 발푸르기스의 밤에 참가할 거라는 것, 기억하고 있겠지?”

“물론입니다.”

한 달 전, 라크온은 말했었다.

자신이 제의를 거절하자, 사나크가 발푸르기스의 밤에 참가하여 난리를 피우겠다고 해왔었다고.

“놈들이 그렇게 나온 건 엄밀히는 내가 그들의 제안을 거절함으로써 생긴 일. 그렇기에 마음 같아서는 나도 함께하고 싶지만, 알다시피 나는 나레프의 동향을 신경써야 하는 몸이기에 함께 갈 수는 없네.”

“어쩔 수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해합니다.”

발푸르기스의 밤은 나레프 근방의 ‘발로’라는 지역에서 벌어지는 축제.

다른 무엇보다도 나레프를 최우선으로 이끌어야 하는 수장인 라크온이 같이 갈 수 없는 게 당연했다.

하지만 라크온은 여전히 마음이 편치 않은 듯했다.

“단순히 변명만 하려는 게 아니네. 아무리 사정이 있다고 해도 왕과 그대를 아무 방비도 없이 적들의 아가리 사이로 밀어넣을 수는 없지 않나. 준비한 게 있으니 받아주게.”

그가 품에서 날이 새카만 단도를 꺼내어 건넨다.

“내가 여지껏 만났던 사나크 일당의 마기를 파악할 수 있는, 흑요석으로 만든 단도라네. 근처에 사나크 일당이 있다면 날의 색깔이 진해질걸세. 놈들이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르니, 이 아티팩트를 항상 예의주시하게나.”

“……!”

강현의 눈이 커졌다.

설명만 듣고도 눈앞의 단도가 매우 유용한 아티팩트라는 걸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곧장 단도를 받아 품에 넣으면 머리를 꾸벅 숙여보였다.

“감사합니다. 그럼, 이제 슬슬 출발하겠습니다. 미리 가서 지형을 익히고 싶어서요.”

“원한다면 그러도록 하게나.”

말을 마친 강현은 그대로 밖을 나서려다…… 가.

발을 멈추었다.

“아, 궁금한 게 있습니다.”

“얼마든지 물어보게나.”

“폭포에서 마기와 마석들이 쏟아져나올 텐데, 그것들의 분배는 어떤 식으로 되는 겁니까?”

발푸르기스의 밤이 어떻게 진행되는지에 대해 묻기 위함이었다.

“그걸 설명 안 했군…….”

한데.

“여기서 설명하는 것보다는, 가보면 알게 될걸세.”

라크온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보일 뿐, 제대로 대답을 안 해주는 게 아닌가.

“음…… 알겠습니다.”

잠깐 어리둥절한 강현이었으나, 어차피 곧 마주할 일이었다.

그는 더 묻지 않고는 처소를 빠져나갔고.

턱.

강현이 처소를 빠져나간 뒤.

“……왕이시여, 그리고 왕의 계약자여. 부디, 원하는 걸 얻게 되기를.”

처소에 정적이 감도는 가운데, 예를 취해 보인 라크온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 * *

문밖을 나선 강현은 즉각 날개를 펼쳐 ‘발로’로 출발했다.

슈와아아-

그의 시선이 ‘발로’를 향해 뛰어가는 수십 만의 악마들 너머에 위치한, ‘마기의 폭포’로 향한다.

‘저게 마공에서 뿜어진다는 마기인가.’

반경이 수십 미터는 될 법한, 역으로 솟구치는 폭포.

그걸 본 강현의 미간이 좁혀졌다.

‘마공이 얼마나 넓은 거야?’

저 멀리 있는 게 분명한데도 불구하고 시꺼먼 마기가 용솟음치는 게 훤히 보여서였다.

-괜히 제33 마계의 악마들이 모이는 현상이 아니다. 직접 보지 않는 이상 어림할 수도 없는 만큼의 마기와 마정석이 쏟아지지.

엔딜 펠란의 말처럼, 직접 보자 상상하던 규모 이상이었다.

“후우…….”

강현은 가까워지는 마기의 폭포를 보며 생각을 정리했다.

‘다른 것도 좋지만…… 일단은 최상급 마석이다.’

다른 등급의 마석들도 얻으면 좋겠다만, 그의 목표는 어디까지나 최상급 마석.

다른 마석들을 얻자고 굳이 무리할 필요는 없었다.

‘문제는 어떻게 얻느냔데-’

그때였다.

콰콰콰쾅-!

돌연, 정면의 폭포에서부터 거대한 폭발이 일어나는 게 아닌가.

동시에 폭발이 일어난 부분에서부터 무언가가 터져나오더니.

휘유우우우-

이내 무언가가 유성우처럼 사방으로 흩어진다.

턱.

그중 하나가 자신에게 날아왔기에, 강현은 무심코 흩어지는 무언가를 낚아챘다.

그러고는.

‘이건?’

눈을 부릅 떴다.

‘마석이잖아?’

방금 뿔뿔이 흩어진 건, 다름 아닌 마석이었던 것이다.

‘이게 이런 식으로 떨어지는 거였어?’

-그래. 폭포에서 간헐적으로 폭발이 일어나고, 그걸 악마들이 나눠가지는 거다.

엔딜 펠란의 말을 들은 강현은 발푸르기스의 밤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그제야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그의 머리는 재빨리 돌아가.

‘이거 잘하면…….’

금세 하나의 결론을 내렸다.

‘굳이 최상급 마정석만 노릴 필요가 없겠는데?’

강현의 눈이 반짝였다.

-또 뭘 생각하는 거냐.

강현의 눈을 본 엔딜 펠란이 물어온다.

“…….”

허나 강현은 마석을 품에 고이 넣을 뿐, 대답하지 않고서는 잠시 침묵을 유지했다.

떠올린 계획을 점검해야 했기 때문이다.

꼼꼼하게 계획을 검토한 그는 이윽고 결론을 내렸다.

‘일단은…… 보류해야겠네.’

떠올린 계획의 실현 가능성은 크지만, 당장 실행하기에는 위험이 따랐다.

어떤 요소들이 변수로 작용할지를 아직 알지 못해서였다.

그걸 감안한다면, 일단 발로에 도착해서 상황을 파악해야 할 듯싶었다.

‘그러려면 가급적 빨리 도착해야겠군.’

간단한 지침을 정한 강현은 속도를 더욱 높였고.

잠시 후, 발푸르기스의 밤이 벌어지고 있는 지역인 발로에 다다를 수 있었다.

“저긴가.”

저 앞에 보이는 발로의 지형을 본 강현이 중얼거렸다.

“지옥이라고 해도 믿겠네.”

그 말처럼, 드러난 발로는 흡사 한 점의 지옥도를 보는 듯했다.

메마른 고원이 쭉 펼쳐진 가운데, 크고 작은 험준한 산봉우리 수십 개가 사방에 쫙 퍼져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봉우리에서는 풀 한 포기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이것만 해도 더할 나위 없이 삭막한 광경이었으나, 강현이 지옥을 보는 것 같다고 한 이유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쿠콰콰콰콰콰-

마공에서 솟아나오는 어마어마한 마기의 폭포.

그것이 이곳 발로를 지옥으로 만들고 있었다.

하늘 끝까지 솟아오른 마기의 폭포가 마계의 잿빛 하늘을 시꺼멓게 물들일 뿐만 아니라, 근방 전체에 사이한 기운을 끊임없이 퍼뜨리고 있었던 것이다.

거기에 메마른 고원과 삭막한 봉우리들이 더해짐으로써, 이 지옥과도 같은 광경의 완성되었다고 할 수 있으리라.

‘어디로 가야 되려나.’

강현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적당히 높은 봉우리 하나를 잡아서 착석해라.

“봉우리요?”

-저 마기의 폭포가 끝날 때까지 날아다닐 생각은 아니지 않나? 원래 봉우리 하나를 끼고 앉는 게 보통이다. 높은 봉우리 하나에 앉도록.

“……?”

‘높은 봉우리’를 두 번이나 강조하는 엔딜 펠란.

강현은 그 이유를 물어보려다가…….

‘나중에 물어봐도 되겠지.’

일단은 엔딜 펠란을 따르기로 했다.

엔딜 펠란이 강조하는 데에는 합당한 이유가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던 것이다.

지금도 뭔가 이유가 있으니 저런 말을 해오는 것일 터였다.

‘높은 봉우리면…… 저기가 좋겠네.’

슈우우우-

강현은 눈에 들어오는 십수 개의 높은 봉우리 중, 마기의 폭포와 아래의 전경이 잘 보이면서도 바닥이 평평한 봉우리 하나를 골라 주저앉았다.

털썩-

과연, 자리에 앉자마자 엔딜 펠란이 설명을 해온다.

-약한 악마일수록 저 밑의 봉우리나 평지에, 강한 악마일수록 드높은 봉우리에 자리를 잡는 게 발푸르기스의 밤의 암묵적인 규칙이다.

“……?”

-몰려드는 악마들이 수십만에 달하는 만큼, 낮은 지대에 있으면 귀찮아질 우려가 있기 때문이지.

“아, 그래서 처음부터 강자들과 약자들을 분류해 놓는다는 겁니까?”

대강의 이해가 된 강현은 손바닥을 탁 쳤다.

강한 악마들과 약한 악마들이 같은 공간에 있어봤자 서로 손해이니, 그럴 바에는 빨리 떨어지기로 한 거겠지.

-그래. 이러한 규칙은 강한 악마들은 쾌적한 환경에 있을 수 있고, 약한 악마들 입장에서도 나쁠 게 없다. 혹여 어느 약한 악마 하나가 낮은 봉우리에 있는 강한 악마를 잘못 건드리기라도 했다가는, 자신을 포함한 근처 수백 마리 악마의 목이 날아갈 수도 있으니까.

“음…… 대충 알겠네요. 나쁘지 않은데요.”

강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듣기에도 썩 나쁘지 않은 규칙으로 느껴졌다.

봉우리의 높고 낮음으로 악마들을 따로 구분해놓는다면 강한 악마들은 비교적 쾌적한 환경에서, 약한 악마들은 더욱 자유분방하게 행동할 수 있을 것이었기에.

“……물론, 수십 번의 발푸르기스의 밤을 거치면서 자리잡은 규칙이긴 하지만 말이다.”

이어서 엔딜 펠란이 끔찍한 의미가 내포된 말을 덧붙여오기는 했지만, 강현은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어디 보자…….”

그의 눈이 주변을 훑었다.

먼저, 그의 봉우리와 높이가 비슷한 다른 봉우리들부터.

‘아무도 없군.’

아직까지 근처에는 아무도 없었다.

기감을 최대한 끌어올려도 그와 비슷한 수준의 악마가 느껴지지 않는 건 마찬가지.

필시 강현이 다른 고위 악마들보다 일찍 출발한 영향이 없지 않을 터였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스윽.

강현은 출발하기 직전 라크온이 건네주었던 흑요석 단도를 꺼내들었다.

“…….”

주변에 그 어떤 고위 악마들도 없어서일까.

역시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흠…… 아마 라크온이 준 것일 만큼 범위도 꽤 넓을 거다. 발로가 꽤 넓다고는 해도, 딱히 반응이 나타나지 않으면 놈들이 아직 오지 않았다고 봐도 될 거다.

“그러면 뭐…….”

근처에 사나크 일당이 없다는 걸 확인한 강현의 시선이 아래로 이동했다.

-키야앗- 호오!

-으헤헤헤! 마기다! 마기가 나를 기다린다!

-다들 썩 꺼져라!

수천 마리에 달하는 악마들이 줄지어 발로로 들어서는 게 훤히 내려다보인다…….

그때, 용솟음치던 마기의 폭포에서 다시 한 번 폭발이 터져나온다.

휘유우우-!

이어서 아까와 같이, 수십 개의 마석들이 사방으로 흩어진다.

이번에는 강현 쪽으로 오지는 않았으나, 아래의 악마들이 있는 곳을 향해서는 두어 개의 마석이 떨어졌다.

크기로 보아서는 하급, 잘해야 중하급 정도 되는 마석으로 보였다.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어?”

아래의 악마들을 본 강현의 입에서 된소리가 새어나왔다.

-키야아악! 나와라, 나와! 저 마석들의 주인은 나다!

-크흐흐, 지랄하지 말도록! 저것들은 내가 가질 거니까!

-그럼…… 죽어라!

-키아악! 너나 뒈져라!

쾅! 콰쾅!

자신들에게 떨어지는 마석을 가로채기 위해, 악마들 사이에서 싸움이 벌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심지어는 한두 마리만 싸우는 게 아니었다.

-크아아악! 이 빌어먹을 놈이!

-키야야! 마석은 내가 차지해야 한다!

미리 와있던 수백, 수천 마리의 악마들에게서 일제히 싸움이 일어난 것이다.

서걱-

푸욱!

큼직한 도끼로 상대의 목을 뎅겅 자르고, 날카로운 손톱으로 적의 가슴팍을 찢어발기고, 마기를 분출해 상대방을 가루로 만들어버리고…….

고작 두 개의 중하급, 혹은 하급 마석을 얻기 위해 벌어지는 살육의 현장이라니.

보는 이들의 미간을 절로 찌푸리게 만드는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

-보기 흉해도 어쩔 수 없다. 저들에게는 저런 식으로 방해하는 놈들과 모조리 싸워서 이기는 것만이 마석을 얻는 방법이니까.

“……싸움이 많이 일어나긴 하네요.”

-마계의 특성상, 자신보다 조금이라도 약해보인다면 거리낌없이 들이박아버리니 그건 당연하다고 볼 수 있다. 저걸 보니 옛 생각이 나는군…….

엔딜 펠란의 회상이 이어진다.

-이 몸이 아직 이곳을 지배하던 시절, 발푸르기스의 밤에 참가하여 저런 모습들을 구경하곤 했었다. 참고로 이 몸이 원한다면 대부분의 마석을 가져갈 수 있었지만, 적당히 빠져주었었지. 이 몸이 다 가져버리면 다른 악마들이 손가락만 빨고 있어야 하기도 했고, 원성도 자자했을 테니까.

“…….”

-네놈 같은 인간종이 보기에는 역겨울 정도로 끔찍하겠다만, 나름 저놈들에게는 저게 일확천금의 기회나 다름없…… 응?

돌연, 무언가를 눈치챈 엔딜 펠란이 말을 멈춘다.

-네놈, 저걸 보고도 별 영향이 없군?

그 말처럼, 강현에게서는 별 영향을 찾아볼 수 없었다.

미간을 살짝 구기고 있기는 했어도, 차가운 눈초리로 아래를 천천히 훑고 있었다.

그가 아래에서 눈을 떼지 않으며 입을 열었다.

“아, 계획을 점검하느라요.”

-아까 혼자 세우던 걸 말하는 건가? 크흐, 역시는 역시군. 계획을 실현할 수는 있겠나?”

강현은 결국 마석 두 개를 모두 차지한 보랏빛 피부의 악마를 보며 말했다.

-크하하하하하! 결국 내가 차지했다!

“예, 충분히요.”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파악했겠다, 다음 폭발부터는 본격적인 행동에 나서도 될 것 같았다.

비록 마석을 가로챈다면 자신의 존재 역시 드러날 수밖에 없을 거긴 했다.

그러나 다른 것도 아니고 마석들을 얻는 일이다.

그 정도는 감수해야겠지.

‘이제 다음 폭발부터는…… 어?

그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다들 썩 물러서라! 어딜 하찮은 새끼들이 우리의 앞길을 가로막느냐!”

저 멀리서부터 한 무리의 악마들이 빠르게 접근해온다.

새로이 등장한 악마 무리를 본 강현의 눈매가 좁혀졌다.

멀리서 전해지는 ‘격’만 봐도, 상당히 강하다는 걸 알 수 있어서였다.

‘음…….’

이렇게 좋은 타이밍에 고위 악마 무리가 등장하다니, 수상하기 그지없었다.

그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단도를 꺼내보았고.

슈우우우…….

날의 색깔이 칠흑처럼 진해진 단도를 볼 수 있었다.

그게 뜻하는 바는 하나였다.

‘저놈들이…….’

라크온이 경고했던, 사나크 일당이라는 것.

그걸 알게 된 그는 자리를 잡으려는 사나크 일당을 주시했다.

놈들이 나타났다는 걸 확인한 이상, 어디에 자리를 잡는지를 알아야-

놈들이 멈춘 곳을 본 강현이 눈을 깜빡였다.

사나크 일당이 연신 주변 악마들에게 호통을 치더니, 윗쪽의 봉우리가 아닌 아랫쪽 봉우리에 자리를 잡은 것이다.

“아니, 고위 악마는 윗쪽에 자리잡는 게 암묵적인 규칙이라면서요?”

-……뭔가 믿는 구석이 있거느 자신들의 힘을 과신하는 거겠지.

“확실히 강하기는 한데…….”

놈들은 모두 네 마리였는데, 모두 자신과 크게 차이나지 않는 수준이었다.

일당 중 하나가 탐욕에 젖은 눈으로 소리친다.

“이제부터 뿜어지는 모든 마석은 우리가 차지할 테니까, 알아서 꺼져라!”

쿠오오오오!

그와 함께 뿜어지는 강력한 마기가 주변을 휩쓴다.

-크, 크아악!

-이, 이건 횡포다……!

놈들 주변의 악마들이 불만스러운 기색을 가득 드러낸다.

비록 목이 달아날까봐 우물쭈물하고 있기는 했어도, 이 상황을 결코 좋아하지 않는다는 건 자명했다.

그걸 본 강현의 눈이 번뜩였다.

‘이 상황을 잘만 써먹으면…… 저놈들한테 덮어씌울 수도 있겠는데?’

사나크 일당의 태도와 주위 악마들의 불만을 잘 이용해서 자신의 계획과 결합시킨다면.

그는 굳이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고도 만족할 만한 성과를 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한 번 실험해볼까.’

그렇게 생각한 그는 가볍게 꺼내들었다.

슥.

이번 계획의 핵심 아티팩트, ‘???의 나무토막’을.

[권역]

소환 : [권역]내의 물체를 소환할 수 있습니다.

…….

나무토막의 기능인, 주변에 [권역]을 ‘선포’하는 ‘선포’.

그럼으로써 쓸 수 있는 ‘소환’의 권능을 본 강현의 입가가 비스듬히 올라갔다.

* * *

무리의 대장, 사나크는 생각했다.

‘최대한 빠르게 마석을 모야가야 한다.’

가급적 빨리 마기의 폭포로부터 뿜어지는 마석들을 가져가야 한다고.

스윽.

사나크가 주변을 둘러보자, 자신들을 향해 눈을 부라리던 하급 악마들이 황급히 시선을 내리깐다.

필시 마석을 가져가겠다는 자신들에 대한 불만이 쌓인 거겠지.

사나크는 그들의 불만을 내심 이해했다.

그도 자신들의 행동이 암묵적인 규칙을 깨는 거라는 걸 잘 알고 있었기에 더욱 그랬다.

그는 천 년에 가까운 세월을 살아온 악마였고, 하급 악마였던 시절부터 여러 번 발푸르기스의 밤에 참가했던 여력이 있으니까.

다만 그들로서는 어쩔 수 없었다.

‘다소 무리를 해야 하더라도 어쩔 수 없다.’

지금도 이곳 제33 마계를 노리는 ‘적’은 시시각각 ‘통로’를 지나오고 있을 것이다.

<초월자>가 아닌 한 막을 수 없는, 아득한 ‘격’을 지닌 존재.

그 존재를 막으려면 한시라도 빨리 이 마계를 ‘위탁’하는 수밖에는 없었다.

다행히 사나크가 접촉한 근처 마계의 지배자, ‘적안의 마왕’은 제33 마계를 ‘위탁’해주겠냐는 제안을 기꺼이 수락해주었다.

사나크는 ‘적안의 마왕’과 나누었던 대화 내용을 떠올렸다.

-좋다, 기꺼이 나서주지. 그 대신 조건이 있다.

“조건이라 하시면……?”

-날 소환하는 건 너희들이 전담하도록.

“예?”

-너희들의 마기를 모으든, 마석을 모으든 간에 나를 소환할 마기를 마련하라는 말이다.

“……!”

-너희들도 알다시피 제33 마계에는 지배자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차원 방벽이 상당히 두꺼워져 있을 텐데, 설마 내 마기를 소모해가면서 그 방벽을 뚫으라는 건 아니겠지?

“하, 하지만 차원 방벽을 뚫으려면 어마어마한 마기가 필요한데…….”

-그건 내 도움이 필요한 너희들이 신경 쓸 일이지, 도움을 줄 뿐인 내 알 바가 아니지 않느냐? 아무튼, 이미 약조를 한 이상 반드시 차원 방벽을 약화시켜라. 내뺀다면 내 이름을 걸고 가만두지 않으리라.

“아, 알겠습니다…….”

이렇게 되어, 사나크와 그의 일당은 ‘적안의 마왕’을 위해 제33 마계의 차원 방벽을 약화시켜야만 했다.

‘빌어먹을…… 도움을 줄 뿐이라고? 잔뜩 수탈해갈 거면서.’

‘적안의 마왕’이 보였던 뻔뻔한 태도를 떠올린 사나크가 입술을 깨물었다.

분명 속으로는 이 제33 마계에 입성한 뒤 어떻게 빨아먹어야 잘 빨아먹었다고 소문이 날까 하고 머리를 굴리고 있을 게 뻔했다.

그럼에도 급한 건 자신들이다 보니 울며 겨자 먹기로 수락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적안의 마왕’이 제시한 두 가지 방법-사나크 일당의 마기를 친히 붓든가, 마석들을 모아 마기를 뽑아내든가-중 마석을 선택한 이유는 간단했다.

자신들의 일반적인 마기만으로는 차원 방벽을 약화시킬 수 없었던 것이다.

‘개 같은 차원 방벽.’

뿌득-

사나크가 이를 갈았다.

틀림없이 ‘격’에 내재된 마기인 ‘진신 마기’까지 써야 할 텐데, 진신 마기를 사용하면 그간 쌓아 올린 ‘격’의 소모가 동반된다.

천 년 가까이 쌓았던 ‘격’을 소모하는 것보다는, 마석을 얻는 게 백 배 나았다.

다만 그렇다고 아쉬운 게 없는 건 아니었다.

“고위 악마들이 협조만 제대로 해줬어도.”

중얼거리는 사나크의 시선이 저 멀리 있는 나레프로 향한다.

다른 고위 악마들에게서는 마석을 제공받을 수 있었고, 그 덕에 할당량의 대부분을 채우는 데에 성공했다.

그러나 몇몇 악마들은 끝까지 거절했다.

최근 급부상한 도시, 나레프를 이끄는 라크온이 대표적이었다.

‘만약 라크온까지만 마석을 주었더라면 발푸르기스의 밤에 참가할 필요도 없었을 텐데…….’

괜한 수고를 하게 된 셈이었으니, 사나크 일당으로서는 짜증이 안 날 수가 없었다.

“……라크온, 과거의 망령에만 사로잡힌 겁쟁이 같으니라고.”

싸늘한 얼굴을 보인 사나크가 내뱉었다.

라크온의 과거는 그도 잘 알고 있었다.

제33 마계의 마지막 지배자였던 엔딜 펠란을 보필하여 천마대전을 주름잡았던 대악마, 그게 라크온이었다.

하나 ‘적’이 코앞까지 닥쳐온 지금, 그 같은 과거의 위명은 아무짝에도 소용이 없다.

사나크가 보는 라크온은 더 이상 대악마가 아니었다.

그저 변화를 두려워하는 겁쟁이일 뿐.

라크온과 나레프의 처분에 대해서는 ‘적안의 마왕’에게 따로 부탁해야겠다고 다짐하며, 사나크는 호흡을 가라앉혔다.

“후우…….”

분노와 짜증에 사로잡혀있던 감정이 다소 진정된다.

진정된 감정 속, 나아갈 길이 명료하게 나타난다.

그 길은 말하고 있었다.

대부분의 마석을 모았으니, 지금의 발푸르기스의 밤을 통해 마지막 마석을 모으기만 하면 된다고.

“이제부터 터져 나오는 마석을 건드는 놈은 죽이겠다!”

사나크가 소리쳤다.

쿠구구구-

시꺼먼 로브를 뒤집어쓴 그에게서부터 위압적인 마기가 뿜어져 나온다.

“히이이익!”

“으, 으악!”

자연히 주변의 하급 악마들이 기겁했으나, 그는 기꺼이 감수하기로 했다.

‘적’에게서 제33 마계를 지키려면 이 방법을 써야만 했다.

설령 그 방법이 다소 과격하고, 강제적이며, 억압적일지라도.

콰콰콰쾅!

때마침, 끝을 모르고 치솟던 마기의 폭포에서부터 큼직한 폭발이 연이어 일어난다.

이내 마석이 튀어나올 것임을 명백하게 알리는 폭발들.

푸슈유우우우…….

잠시 후, 십수 개의 마석들이 사방에 퍼져나기 시작한다.

‘최소 중하급에…… 중급 마석도 세 개가량 섞여 있군.’

자신들의 할당량을 채우려면 최상급 마석 하나 이상이 필요하다는 걸 감안한다면, 빈말로라도 만족스럽지는 않은 수준의 마석들이다.

그렇다고 저것들을 챙기지 않을 이유는 전혀 없었다.

그는 고개를 까딱여 보였다.

“일단 다 챙기도록.”

“명을 받듭니다.”

“예!”

“알겠습니다!”

예를 취해 보인 수하들이 마석들을 향해 일제히 날아오른다.

휙- 휘휙-

손쉽게 중하급 마석들을 챙긴 수하들이 중급 마석들에게 다가간다.

중급 마석들과 수하들과의 거리가 가까워지면서, 순조롭게 이번 폭발의 모든 마석들을 챙기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슈슉-

돌연, 코앞까지 가까워졌던 중급 마석들이 홀연히 사라져버리는 게 아닌가.

휙-

수하들의 손이 허공을 가로지른다.

손을 거두어들이는 그들의 표정에는 어리둥절함이 가득했다.

사나크도 마찬가지였다.

“……?”

워낙 수하들과 마석들의 거리가 가까웠기에 자칫 수하들이 무난히 마석을 챙겼을 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지만.

그는 똑똑히 보았다.

수하들의 손이 닿기 직전, 마석들이 그대로 사라져 버렸다는 것을.

‘잘못 본 건가?’

그렇게 여길 정도였기에, 그 역시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돌아온 수하들에게 해줄 말이 없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건 그저 잘못 본 것이거나, 일시적인 이상현상이 나타난 것이라고 애써 납득하려는 것뿐.

하지만 그것도 잠시.

피유우우우-!

한 번.

“대장! 또 없어졌습니다!”

피유우우우!

다시 한번.

“크윽, 대장! 이번에도 입니다! 어떤 새끼냐! 가만두지 않겠다!”

이후로도 무려 두 번이나 바로 앞에서 마석들을 놓치는 일이 반복되자, 사나크는 이게 절대 좌시할 일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누군가 수작을 부리고 있다!’

그게 아니라면 수하들을 놀리듯이 코앞에서 마석들이 사라지는 게 말이 되질 않았다.

“개 같은…… 대체 누구냐!”

작금의 일이 누군가의 수작이라는 걸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외침은 공허할 따름이었다.

누가, 어떻게, 왜 마석을 가로채는지를 몰랐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크아아아아!”

미치고 팔짝 뛰어버릴 노릇에 분통을 터뜨린 사나크가 눈을 부라렸다.

“오냐, 계속 할 테면 해봐라! 우리는 우리가 만족할 수준의 마석을 얻을 때까지 이곳에 있을 테니까!”

수작을 부리고 있는 놈에게 보내는 강력한 경고.

다만 그들은 알지 못했다.

사나크의 말을 들은 주위 악마들의 시선이 점차 흉악해지고 있는 것을.

“뭐? 언제까지 있을 거라고?”

“염병…… 아무도 없는데 왜 지들끼리 저 지랄을 해대는 거야?”

“내 말이. 마석도 다 챙긴 거 같았는데.”

“썅, 이거 다 자작극일지도 몰라.”

“혼자 다 처먹기 그러니까 괜히 가상의 적을 만드는 거라는 거지? 이런 씨팔!”

주변 하급 악마들의 눈이 하나둘 횡포를 부리는 사나크 일당에게 향하기 시작했고, 향한 시선들은 금세 흥분과 분노로 이어졌다.

그 흥분과 분노가 폭발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 개새끼들! 언제까지 처먹을 셈이냐!”

“여기까지 와서 손가락만 빨고 있을 바에는 그냥 뒈지는 게 낫겠다, 새끼들아!”

…….

이 악마들은 대부분 중, 하급 악마인 반면 사나크 일당은 고위 악마들이었던 만큼, 본래라면 일이 이렇게까지 되는 일은 없었을 터였다.

그러나 사나크 일당이 자초한 상황의 특수성이 이 같은 폭동을 일으키게 만들었다.

가뜩이나 사나크 일당이 암묵적인 규칙을 어긴 데다가, 자작극을 벌이는 것만 같은 정황이 포착되기까지 하자 악마들이 들고 일어난 것이다.

“우와와아! 뒈져라!”

“우리 것까지 빼앗으려는 망할 새끼들! 죽여버리자!”

“머리를 잡아 뜯어버려! 팔다리는 몸통에서 떼어내!”

사나크는 자신에게 달려드는 하급 악마들을 보며 어처구니가 없었다.

‘이것들이 미쳤나?’

잠자코 있으면 목숨이라도 부지할 수 있을 것을, 어딜 한주먹도 안 되는 놈들이 개차반처럼 달려든단 말인가.

가뜩이나 짜증이 났었던 사나크의 심정이, 하급 악마들의 폭동으로 말미삼아 폭탄처럼 터져 버렸다.

“이 하찮은 새끼들이…… 다 죽여버려!”

“예!”

사나크 일당과 하급 악마들의 충돌이 시작되었다.

당연하게도, 사나크 일당의 일반적인 학살이 벌어졌다.

퍼퍼퍽!

서걱-

마기에 맞아, 칼에 베여 나가떨어지는 수십, 수백의 중, 하급 악마들.

허나 중, 하급 악마들의 유일한 무기는 숫자.

그런 만큼 그들은 죽어라 달려들었다.

콰콰쾅! 피유우우우!

싸움이 점차 치열해지는 가운데, 마기의 폭포로부터 여덟 개에 달하는 중급 마석들이 퍼져 나간다.

그러나 이미 싸우느라 여념이 없는 지상의 악마들은 신경 쓰지 못했고.

슈슈슉-

여덟 개의 마석들은, ‘소환’의 권능을 발동한 강현의 손아귀에 고이 빨려들어왔다.

“……잘 됐군.”

마석들을 갈무리한 강현이 씩 웃어보였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그가 계획한 대로 모든 게 맞아떨어져 주었다.

일부러 사나크 일당의 손에 닿기 직전에야 ‘소환’을 발동하여 마석들을 회수한 그였다.

만약 마석들이 퍼지자마자 곧장 ‘소환’시켰다면 주변 악마들이 의아함을 가질 뿐이었을 것이다.

여기서 그는 사나크 일당이 가져가는 듯한 연출을 더해주었는데, 다른 중하급 악마들의 분노가 사나크 일당에게 향할 것을 예측한 것이었다.

그의 예측은 아래에서 싸움이 벌어짐으로써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물론, 그가 노리는 건 마석들만이 아니었다.

스윽.

그의 시선이 아래로 이동한다.

학살극을 벌이는 사나크 일당들이 눈에 들어왔다.

주변 악마들이 얼마나 달려들건 간에, 사나크 일당들은 압도적으로 밀어붙이고 있다.

하지만 강현은 알고 있었다.

‘마기든 마력이든, 결코 무한하지 않지.’

언젠가 저들의 힘이 빠질 때가 올 거고, 시간이 지날수록 서서히 판도는 뒤바뀔 거라는 걸.

바로 그때야말로, 그가 나설 시간이 될 것이었다.

다만, 강현은 고개를 저었다.

‘아직은 아니야.’

아래의 싸움이 막 벌어진 만큼, 아직은 자신이 나서기까지는 한참 남았다고 볼 수 있었다.

즉, 충분한 시간이 주어진 상황.

강현이 그 시간을 보내는 방법은 간단했다.

“그럼…… 잠깐 편하게 쉬어볼까.”

강현은 다리를 쭉 뻗은 채 마기의 폭포를 관망했다.

마기의 폭포에서부터는 마석이, 사나크 일당의 입에서는 버거운 침음이 터져 나오기를 기다리면서.

* * *

“이 개 같은 놈! 죽어라!”

“뒈져버려!”

양옆에서 달려드는 악마들이, 그들에게 들이닥친 마기의 구체에 휩쓸려 사라진다.

“크아악!”

“커헉!”

단 한 번의 공격으로 악마들을 처리한 것은 시꺼먼 로브를 뒤집어쓴 악마, 사나크였다.

겉으로 보기에는 더없이 깔끔하게 악마들을 쓰러뜨린 사나크.

“큭!”

허나 호쾌하게 악마들을 처리한 것과는 달리, 그는 새어나오려던 신음을 집어삼켜야만 했다.

‘빌어먹을.’

손발의 힘이 천천히 빠져나가고 있는 데다가, 입에서는 단내가 풍겨오기 시작한다.

육신에서 보내오는 그가 지쳐가고 있다는, 아니, 지쳤다는 증거였다.

만약 이 사실을 그와 비슷한 수준의 악마들이 전해 들었다면 크게 놀랐을 것이다.

고위 악마인 사나크가 중, 하급 악마들 따위와 싸우다가 지친다는 건, 그만큼 통상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 일이었다.

하나 이번에는 달랐다.

명백한 이유가 존재했다.

‘너무 오래 싸웠다.’

도대체 시간이 얼마나 지난 건지도 알 수 없을 만큼 싸웠기 때문이었다.

평소와는 달리, 적당히 두들겨 맞으면 알아서 도망가던 중하급 악마들은 도망가지 않았다.

이번에는 뭐가 다른 건지, 눈이 뒤집힌 악마들은 죽자고 달려들었다.

“죽이자! 죽여버리자!”

“먼저 간 놈들의 원수를 갚자!”

“죽더라도 죽인다!”

이처럼, 하루살이처럼 몸을 아끼지 않으며 짓쳐 들어오는 것이다.

그것도 조금의 숨 돌릴 틈도 없이, 끝도 없이, 사방에서.

사나크 일당이 아무리 압도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고는 해도, 이 같은 상황에서조차 지치지 않을 수는 없었다.

‘처음에 힘을 더 아꼈어야 했나.’

퍼억!

자신에게 달려드는 네 마리의 악마를 처리한 사나크가 이를 악물었다.

손을 휘두르기만 하면 수십 마리의 악마들이 나가떨어지던 전투 초반.

그는 그때 힘을 미리 아껴두지 않았던 것을 후회했다.

사실, 초반에도 힘을 딱히 남발하거나 한 건 아니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힘을 더 아낄 수 있는 구석이 있었는데, 굳이 그러지 않은 것 정도랄까.

딱히 아끼려고 하지는 않았으나, 그렇다고 낭비한 것도 아니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 와서는 그렇게 날린 힘들조차 너무나도 아까웠다.

‘이렇게 전투가 길어질 줄이야.’

그는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지를 가늠해 보았다.

정확히는 몰라도, 적어도 하루가 넘는 시간이 흘러간 것만은 확실했다.

자신들이 죽인 악마들의 시체가 산을, 피는 강을 이루고 있다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나마 사흘 동안 벌어지는 축제인 발푸르기스의 밤이 아직까지 이어지는 것으로 말미암아, 사흘 이상이 지나지는 않았다는 걸 짐작할 따름이었다.

물론 그 사실이 사나크의 마음을 나아지게 하지는 못했다.

언제까지 싸워야 될지 알지 못한다는 게 사나크를 더더욱 지치게 만들었을뿐더러.

시간과 상관없이, 이 빌어처먹을 악마들과 싸우는 그의 몸이 한계에 다다르고 있다는 건 틀림없었으니까.

스윽.

사나크의 핏발 선 눈이 주위를 휙휙 둘러보았다.

“헉…… 헉…….”

“이 X팔 새끼들! 끝이 없어!”

“크윽!”

그와 마찬가지로, 슬슬 악마들을 상대하기 버거워하는 수하들이 눈에 들어왔다.

심지어 수하 두 명은 각각 팔과 다리에 깊은 상처까지 입었다.

수천 마리의 악마를 학살하던 와중, 눈먼 공격에 적중당해 생긴 부상이었다.

부상을 입어도 달리 할 수 있는 건 없다.

이곳에서는, 수십 만에 달하는 악마들에게 포위된 이 전쟁터에서는 그 어떤 치료와 휴식도 기대할 수 없다.

그저 적들에게 둘러싸여, 놈들과 기약 없는 싸움을 이어나갈 뿐.

휘유우우우-!

그들이 개고생을 비웃기라도 하듯, 마기의 폭포에서는 어김없이 마석들이 터져나온다.

악마들과의 싸움이 일어나기 전 봤던 중하급, 중급 마석들이 아니었다.

얼핏 봐도 중상급에서 상급의 마석들이었다.

“제기랄!”

사방에 퍼져 저 멀리 날아가는 마석들.

그걸 지상에서 지켜볼 수밖에 없는 사나크는 아까워 미칠 지경이었다.

원래의 계획대로라면 진작 자신들의 손에 들어왔어야 할 마석들이었으니까.

‘내 마석들이!’

그 사실이야말로 사나크가 이곳을 빠져나가지 않고 악마들과의 싸움을 이어나가고 있던 이유이기도 했다.

지금 이 악마들에 의해 발로에서 내쫓긴다면 발푸르기스의 밤에서 이탈한다는 것과 같은 소리다.

눈이 시뻘개진 중하급 악마들이 사나크 일당의 귀환을 허락할 리가 없었으므로.

즉, 그들이 최상급 마석을 구할 마지막 방법이 사라져 버린다는 말이었다.

그렇기에 사나크는 혹시나 하는 가능성.

최상급 마석이 나올 때쯤이면 중하급 악마들이 지쳐서 떨어져 나가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품고는 계속 싸움을 해온 것이었다…….

그때, 싸우면서도 마석들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사나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슈슈슈슉-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날아가던 마석들이 어느 순간 사라져버린 것이다.

처음 마석들이 사라졌을 때는 의아해했던 사나크였으나, 이제는 알고 있었다.

여태까지 보인 모든 마석들을 순간이동시킨 것과 자신들과 악마들의 싸움을 붙인 것.

그것들이 모두 누군가의 농간이라는 걸.

‘대체 어떤 새끼냐!’

물증은 없었지만, 심증은 확실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처절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아랫쪽에는 조금의 관심도 두지 않고 퍼져나가는 마석들만을 유유히 가져갈 리가 없었다.

그리고 누군가의 손아귀에서 놀아났다는 사실은, 달려드는 악마들 만큼이나 사나크를 분노하게 만들었다.

“크윽…….”

한계에 가까워진 육신의 상태에 분노가 더해져서일까.

참았던 사나크의 분노가 폭발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크아아! 가만두지 않겠다!”

그가 내지른 괴성에 십수 마리의 악마가 머리를 부여잡으며 쓰러진다.

이미 머리 끝까지 분노한 사나크는 이 정도로는 전혀 만족하지 않았다.

점차 중하급 악마들의 광기에 동화되어, 손을 악독하게 내질러 갔다.

“이대로 네놈의 간계에 당하고만 있을 것 같으냐! 언제까지고 싸워주마! 최상급 마석이 나올 때까지! 아니면 이 죽일 놈의 악마들을 모조리 죽여버릴 때까지!”

정체모를 마석 도둑을 향해 사나크가 있는 힘껏 내질렀다.

그는 정체불명의 적을 죽이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설령 놈이 만약 자신들의 힘이 다 빠진 상태에서 나타난다한들 문제는 없었다.

‘진신 마기를 쓰는 한이 있어도 ‘적안의 마왕’을 부른다.’

진신 마기를 사용하여 모자란 마기를 보충해, ‘적안의 마왕’을 소환하는 것.

이것이 그가 가진 비장의 수단이었으니까.

물론 갑작스레 소환하는 만큼 ‘적안의 마왕’도 곧장 본신의 힘을 발휘할 수는 없을 테지만, 그것만으로도 이 자리를 정리하는 데에는 충분하리라.

“크아아아!”

다만, 그가 미처 간과하지 못한 점이 있었다.

이미 전쟁터 안에 있는 그는 결코 스스로를 객관적으로 판단하지 못했다.

사나크는 알지 못했으나, 그의 일당은 이미 한계에 부닥친 상태였다.

가랑비에 몸이 흠뻑 젖듯이, 떨어지는 한 방울의 물방울들이 언제고 바위를 뚫듯이.

“키야아-!”

“놈들이 밀리고 있다!”

“사나크를 뜯어먹어, ‘격’을 쌓자!”

서서히 구석에 몰리고 있는 것이 그 증거였다.

광기에 뒤덮인 사나크 일당들의 무력이 일순간 폭발하기는 했지만, 한계에 다다른 육체의 상태까지 뒤집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런 그들의 몸상태는 이내, 윗쪽 봉우리에서도 손쉽게 알아볼 수 있게 되었다.

“음…….”

주욱 그들을 지켜보던 강현이 자리에서 일어난 건 그때였다.

“슬슬 내려가면 되겠네.”

지난 이틀 동안 획득한, 수십 개의 마석들을 품에 고이 갈무리한 채였다.

* * *

-지독한 놈. 설마 여기까지 보고 있었을 줄이야…….

“…….”

엔딜 펠란의 탄식을 강현은 한 귀로 흘려버렸다.

아랫쪽의 상황을 관망하던 지난 이틀 간 수십 번도 넘게 들었던 탄식이었기 때문이다.

‘뭐,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지만.’

난데없이 사나크 일당과 중하급 악마들을 싸우게 만들어버렸으니 그렇게 여길 만도 했다.

다만, 그로서는 다소 억울한 측면이 있었다.

‘분명 나쁜 건 사나크 일당인데, 내가 더 나쁜 놈이 된 기분이야.’

사나크 일당이 하려는 건 타차원의 <초월자>를 소환하여 제33 마계를 맡기는 것.

엄밀히 말해 제33 마계를 팔아먹으려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헌데 엔딜 펠란의 반응을 보면, 왠지 모르게 자신이 잘못을 한 것만 같았다.

‘어차피 곧 끝날 일이지만.’

여지껏 관망만 하던 그가 일어난 이유는 단순했다.

한계를 넘은 지 한참 된 사나크 일당이 이제는 고꾸라지고 있어서였다.

오랜 싸움 끝에, 마침내 달려드는 악마들을 더이상 감당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막타는 쳐야지.’

고위 악마들로 이루어진 사나크 일당이다.

저놈들을 처리하는 과정을 한 손 거든다면 꽤 짭짤한 에테르를 취할 수 있을 터였다.

‘이후로 일이 어떻게 될 지는 모르겠다만…….’

사나크 일당이 모두 쓰러진 뒤, 광기에 물든 중하급 악마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는 그로서도 알 수 없었다.

원인이었던 사나크 일당이 처리됨으로써 잠잠해질 수도, 분노를 풀 대상을 찾지 못해 더 날뛸 수도 있겠지.

하나 그 불확실성이 강현의 행동에 영향을 주는 일은 없었다.

사나크 일당을 처리한 뒤의 일은 그때 가서 생각하면 될 일이었다.

‘일단은 사나크 일당을 모두 정리하고, 곧 나올 최상급 마석을 얻는 것에만 집중하자.’

마음을 먹은 그의 시선이 아래를 향했다.

끝내 밀려드는 악마들을 감당하지 못한 사나크의 수하 중 하나가 무참히 짓밟히고 있었다.

‘빨리 가야겠군.’

더 늦는다면 기껏 움직인 보람도 없이 늦어버릴지도 몰랐다.

[스킬, 천광의 날개[Lv.3]을 발동합니다.]

그런데 그가 날아올랐을 때였다.

퍼뜩-

사나크의 시선이 번개같이 자신을 향하더니.

“크흐흐…… 거기 있었구나! 드디어 찾았다!”

쿠구구구-

느닷없이 놈에게서부터 엄청난 양의 마기가 뿜어진다.

한참 떨어져있는 강현의 피부가 떨릴 만큼 막대한 양의 마기였다.

-이건…… 진신 마기……?

무언가를 눈치챈 엔딜 펠란이 흠칫 놀란다.

“진신 마기? 그게 뭡니까?”

-악마의 ‘격’에 딸린, 그 악마의 본질이나 다름없는 마기다. 다른 그 어떤 마기보다 진한 대신, 한 번 사용하면 다시는 회복되지 않지.

무협 소설에 나오는 선천진기 같은 개념인 듯했다.

강현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악마의 또다른 생명과도 같은 진신 마기를 저렇게 거리낌없이 쓰는 사나크를 보자,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위기감이 느껴졌다.

-당장 피해야 한다. 지금 저놈의 상태는 일종의 자폭기를 발동한 것이나 다름없다.

다급하게 말해오는 걸로 보아, 엔딜 펠란도 비슷한 생각으로 보였다.

-뭘 하려는지는 모르겠어도, 진신 마기를 사용하면서까지 하려는 게 보통 일은 아닐 거다. 그러니까 즉시…….

후우우웅-

난데없이 들리는 익숙한 소리에 엔딜 펠란의 말이 멈춘다.

“저건…….”

소리의 근원지를 본 강현의 안색이 굳어졌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크하하하! 어디 한번, 다 같이 끝장나 보자꾸나!”

광소를 터뜨리는 사나크의 옆에 생겨나는 현상은, 그가 익히 알던 것이었으니까.

“……게이트?”

보는 것만으로도 불쾌감을 일으키는 칠흑의 게이트가 빠르게 형상을 갖추어나가고 있었다.

“……!”

게이트를 본 강현은 깨달았다.

‘사나크의 목적은 다른 차원의 <초월자>를 부르는 거다. 그렇다면…….’

이런 상황에서 그가 불러내려는 대상은, 하나밖에 없었다.

“미친!”

강현은 그걸 깨달은 즉시 아래로 쇄도했으나, 이미 때는 늦어 있었다.

“커헉……!”

힘을 다한 사나크가 시꺼먼 피를 토하고서는 쓰러진 가운데.

꾸드드드드드득!

눈 깜짝할 사이에, ‘무언가’가 게이트를 넘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강현에게 익숙한 아득함이었다.

“……<초월자>.”

이미 늦었다는 걸 알게 된 강현이 할 수 있는 건 중얼거리는 것뿐이었고.

쿵!

이윽고, 제33 마계에 발을 디딘 <초월자>의 음성이 울려 퍼졌다.

[나쁘지 않은…… 차원이구나…….]

* * *

발로에서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마계 도시 나레프의 관저.

쿠구구구…….

발로 근처에서부터 폭발적으로 터져나온 마기에, 정무를 보던 라크온의 시선이 퍼뜩 창문으로 향했다.

“……!”

마기를 느낀 순간, 그는 뭔가 잘못됐다는 걸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지난 이틀 동안 발로에서 새어나오던 광기와 분노, 울분이 가득한 마기들도 확실히 위협적이기는 했다.

급히 알아본 끝에 발로에 모인 악마들이 미친듯이 싸우고 있다는 걸 알지 못했더라면 나레프에 비상사태를 선포했을 지도 몰랐다.

현재 발로에는 그의 왕과 왕의 계약자가 있기에 더욱 예민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의 본능을 자극하는 이 마기는 그것들과는 궤를 달리했다.

강자에 대한, 본능에 새겨진 무의식적인 공포.

지난 삼천 년 동안 <초월자>가 존재하지 않았던 제33 마계에서 느껴져서는 안 될 마기가 느껴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게 의미하는 바는 하나였다.

‘누군가가 넘어오고 있다!’

<초월자>의 부재로 두꺼워진 차원 방벽을, 기어코 뚫어낸 어느 <초월자>가 이 차원에 발을 들이밀고 있다는 것.

<초월자>가 없는 차원에 발을 들이민다는 건, 아무리 <초월자>라 할지라도 결코 아무나 할 수 없었다.

일시적이나마 ‘격’의 손해를 감수하겠다는 마음을 먹거나, 내부자의 조력이 필요했다.

허나 어느 욕심 많은 <초월자>의 독단이라기는, ‘격’의 손해를 보면서까지 이 차원에 넘어올 이유가 없었다.

남은 경우의 수는…….

“내부의…… 도움.”

라크온이 짓씹듯 내뱉었다.

그의 머릿속에 이번 일을 벌였을 놈들이 바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사나크……!”

여지껏 그에게 협조를 종용하던 사나크 일당, 놈들이 분명했다.

결국, 타차원의 <초월자>를 불러내는 데에 성공한 것이다.

그 사실에 라크온의 안색이 굳어졌다.

<초월자>가 존재하지 않는 제33 마계다.

타차원의 <초월자>를 막을 수 있을 리가 없다.

<초월>에 근접한 이들이 있다고는 한들, 진짜 <초월>에 다다른 존재 앞에서는 아무런 위협도 주지 못할 것이기에.

쿠구구구구…….

라크온을 비웃듯, 또다시 마기가 전해져온다.

<초월자>만이 가지는 아득한 마기의 파동에, 라크온의 얼굴은 펴질 줄은 몰랐다.

쿠구…… 구구…….

그런데.

“……?”

마기에서부터 뭔가 이상한 점이 느껴지는 게 아닌가.

‘잠깐……’

일순간 피어오른 의문에 라크온은 발로로부터의 마기에 온 신경을 집중해보았고.

이내, 알게 되었다.

‘불안정하다……!’

비록 거리가 상당히 멀긴 했지만, 확실했다.

소환하는 도중 뭔가 잘못된 것인지, 나타난 <초월자>는 완전한 <초월>의 ‘격’을 품지 못한 듯했다.

그 순간 라크온의 눈이 빛났다.

‘아직 희망이 있다.’

<초월자>가 자신의 ‘격’을 모두 되찾기 전까지 사활을 걸고 놈을 밀어낼 수만 있다면.

사나크 일당의 야욕을 분쇄할 수 있으리라.

게다가 발로에는 그의 왕과 왕의 계약자도 있다.

‘그들의 도움까지 받는다면……’

건너온 <초월자>가 아직 본신의 힘을 되찾기 못했다는 가정하에, 할 만했다.

“서둘러야겠군.”

결론을 내린 라크온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병력을 소집해라! 지금 당장 발로로 향한다!”

“"옙!"”

나레프를 바닥에서부터 이끌어온, 마땅한 이 도시의 주인.

주인의 명령에 따라 나레프가 준동하기 시작했다.

* * *

강현은 모습을 드러낸 <초월자>를 가만히 응시했다.

“……”

게이트가 나타난 순간 발로의 모든 중하급 악마들은 쥐죽은 듯한 침묵을 유지하고 있었기에, 나타난 <초월자>를 관찰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오 미터가 넘는 시꺼먼 몸에는 위압적인 근육들이, 머리에는 하늘 높은 줄 모르는 두 개의 붉은 뿔이 날카롭게 솟아있었다.

거기에 넘실거리는 기다란 꼬리, 타는 듯이 새빨간 눈까지.

양손에 아무것도 들지 않았다는 걸 제외한다면, 마치 판타지 영화에서 접하던 발록을 보는 듯했다.

다만 어찌된 일인지 처음 소환한 이후로 꼼짝도 않고 있었는데, 당장 행동을 개시하지는 않을 거로 보였다.

그 덕분에 강현은 긴장을 다소 풀 수 있었다.

시선을 옆으로 돌리자, 이미 곤죽이 된 사나크 일당이 눈에 들어온다.

‘놈들은…… 죽었나.’

가뜩이나 몸상태가 한계에 부닥친 상황에서 진신 마기를 사용해서일까.

저 악마를 소환한 것으로 일당의 기력은 다한 것 같았다.

강현은 싸늘한 눈으로 사나크 일당의 시체를 내려다보았다.

‘아무리 그래도 다짜고짜 <초월자>를 부르다니…… 그냥 다 같이 죽자는 건가.’

이미 죽은 놈들이지만, 제정신이 아니었던 놈들이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놈들이 죽기 직전 던진 폭탄 때문에 다 같이 죽게 생겼다.

“후우……”

화가 치밀어올랐으나, 이 상황에서 분노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놈들의 시체에서 시선을 거둔 강현이 심호흡을 했다.

이미 지나간 일은 지나간 일, 이제는 눈앞의 일에 집중해야 했다.

‘저 악마, <초월자>겠죠?’

-그래보이는군.

‘아는 악마입니까?’

-모른다. 네놈은 <초월자>라면 다른 <초월자>들을 모두 알 거라고 생각하는 거냐?

퉁명스럽게 대꾸한 엔딜 펠란이 덧붙인다.

-단, 네놈이 지금까지 만났던 <초월자>들과 비슷하게 생각한다면 바로 죽을 거라는 것만은 알겠군.

“예?”

-느껴지지 않나? 저 악마에게서부터 뿜어져나오는 살벌한 ‘악의’가.

“……!”

악마에게 기감을 집중해본 강현의 안색이 굳어졌다.

엔딜 펠란의 말처럼, 저 악마에게서 어마어마한 악의가 느껴졌던 것이다.

온몸의 솜털이 곤두서고, 피부를 절로 짜릿하게 만드는 악의.

-협상이나 대화가 통하는 상대가 아닐 거다.

강현은 저 악마가 여지껏 그가 만났던 <초월자>들과는 다른 존재라는 걸 직감했다.

태고의 거인, 빙룡 아디스, 수룡왕 수란과는 달랐다.

그들은 이성적인 존재였고, 각각 그 정도는 달라도 나름의 호의를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저 악마에게서 전해지는 악의는, 저 악마를 그들과 비슷하게 생각하면 안 된다는 걸 말해오고 있었다.

거슬리는 모든 걸 짓밟고, 불태우고, 부숴버리겠다는.

오로지 <초월자>만이 가질 수 있을, 광오한 악의였다.

‘도망이라도 가야 되나……’

그런 생각을 했을 때였다.

엔딜 펠란이 놀라운 말을 해왔다.

-그나마 본선의 힘을 모두 가지고 오지 못했기에 망정이지…… 모든 힘을 가지고 왔다면 이미 모든 일이 끝났을 거다.

‘본신의 힘을 다 가지고 온 게 아니란 말입니까?’

말을 하며 강현은 악마를 가늠해보았다.

쿠구구구-

분명 마기에는 아득한 <초월>의 ‘격’이 담겨있다.

헌데 왜 엔딜 펠란은 본신의 힘을 모두 가져온 게 아니라는 걸까.

-흥, 네놈이 파악한 건 그저 미미하게 저 악마의 몸에 남은 ‘격’일 뿐이다. 그세 잊은 건가? 이 마계에서만큼은 이 몸의 기감이 네놈의 것보다 정확하다는 걸.

“그건 맞는 말인데……”

-잘 집중해봐라. 미세한 차이이기는 해도, 네놈 또한 느낄 수 있을 것이니.

강현은 눈을 감고 <초월자>에게만 기감을 집중시켰다.

슈우우-

그러자 서서히 <초월자>의 윤곽이 그려져갔고.

잠시 후, 강현은 볼 수 있었다.

쿠구구…… 구구…….

악마의 몸에서부터 새어나오는 마기가 뚝뚝 끊기고 있는 것을.

‘이건……’

악마의 몸에서 빠져나온 직후까지 <초월>의 ‘격’이 담겨있기는 했다.

다만 악마의 몸과의 거리가 멀어질수록 서서히 <초월>의 ‘격’이 옅어져간다.

주파수가 끊기는 것처럼 말이다.

‘뭔가 문제가 있는 것 같긴 하네요.’

-저 악마는 <초월>의 경지에 다다랐으나, 일시적으로 그 ‘격’을 잃은 듯하다. 아마 넘어모면서 무언가 문제가 있었던 거겠지.

‘하기야……’

위기에 몰린 사나크는 부랴부랴 저 악마를 소환했다.

급박하게 소환한 만큼, 그 과정에서 충분히 문제가 생겼을 만도 했다.

번쩍-

가만히 있던 악마의 눈이 번뜩인 건 그때였다.

[흐……]

주변을 훑는 악마의 시선이, 발로를 가득 뒤덮은 중하급 악마들을 발견한다.

악마의 흉악한 인상이 일그러지면서, 사악한 미소를 지어보인다.

[마침…… 잘 됐군…… 마기가 모자랐었는데, 괜찮은 양분들이 있구나.]

말을 마친 악마가 두 팔을 내뻗는다.

이어진 일은 놀라웠다.

쿠오오오오-

악마의 손에서부터 어마어마한 마기가 분출되더니, 근처의 중하급 악마들을 빨아들이기 시작한 것이다.

“끄, 끄아아아아악!”

“이, 이게 뭐야! 뭐야아아아-!”

“사, 살려줘어어-!”

마기에 닿은 수백, 수천의 악마들이 악마의 손아귀로 빨려들어간다.

기괴한 걸 넘어 끔찍하기 그지없는 광경이었다.

“미친……”

식겁한 강현이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마기를 말도 안 되는 속도로 보충하고 있다. 아무리 저런다고 해도 단번에 <초월>의 ‘격’을 찾지는 못할 테지만, 그렇다고 오래 걸리지도 않을 거다.

“그럼……?”

-길어야 반나절. 그 안에 저놈을 쓰러뜨려야 한다.

반나절이라는 제한 시간을 들은 강현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크아아아아-!”

“죽기 싫어-!”

접근하기조차 힘든 지옥도가 펼쳐진 상황에서 어떻게 반나절만에 저놈을 쓰러뜨린단 말인가.

그냥 다가갔다가는 자신 역시 빨려들어갈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콰콰콰콰-

휘유우우-!

쉴 새 없이 마기를 배출하던 마기의 폭포가 꿈틀대며, 또다시 마석들을 배출한다.

그런데 마석을 중 하나를 본 강현의 눈이 이채를 띠었다.

‘저건……!’

해당 마석은 강현이 있는 방향으로 날아오고 있었는데, 반짝이면서도 큼직한 것이 최상급 마석이 틀림없었다.

최상급 마석이 나타났다는 게 뜻하는 바는 명확했다.

이틀이 넘게 이어진 발푸르기스의 밤도, 슬슬 끝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최상급 마석을 본 순간.

‘……잠깐.’

강현은 도박수를 떠올렸다.

저 악마에게 접근하기도 힘든 이 상황을 뒤집을 수도 있을 도박수를.

[호오, 최상급 마석이라.]

게걸스럽게 악마들을 집어삼키던 악마의 팔 한 짝이 날아가는 최상급 마석에게로 향한다.

수백 미터 이상의 거리가 떨어져있었으나, 악마에게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듯했다.

쿠구구구-

악마의 손에서부터 발생한 막대한 인력이, 날아가던 최상급 마석을 악마에게 끌어당기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마석이 악마의 손아귀에 들어가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슈슉-

악마가 손을 내미는 것보다 한 박자 빠르게 나무토막을 꺼낸 강현이, 적당한 시점에 마석을 ‘소환’했으니까.

[음?]

오지 않는 마석에 악마가 의아해하는 사이.

[스킬, 천광의 날개[Lv.3]를 발동합니다.]

그가 마석을 뺏겼다는 걸 눈치채기 전, 날개를 펼친 강현이 재빨리 날아올랐다.

‘폐가로 가야 해.’

그의 계획은 간단했다.

최상급 마석을 사용하여 엔딜 펠란이 남겨둔 에테르가 담긴 상자를 개방하는 것.

그리고 상자에 담긴 에테르를 통해, 저 악마가 힘을 회복하는 것보다 빠르게 <초월>에 이르는 것.

‘무조건 더 빨리 이르러주마.’

쿠오오오-

강현의 몸이, 나레프의 골목 사이의 폐가를 향해 내쏘아졌다.

사나크가 부른 <초월자>가 힘을 되찾기 전, 그보다 한 발 앞서 <초월>에 이르겠다는 도박수.

강현이 생각하기로 그 도박에 대한 근거는 충분했다.

‘보물 상자를 여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야.’

최상급 마석을 통해 보물 상자를 열고, 손을 내밀어 그 안에 있을 에테르 결정체들을 취하기만 하면 된다.

안에 있는 에테르 결정체가 얼마나 될지는 알 수 없었으나, 흡수하는 데에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을 터였다.

-흠…….

반면, 엔딜 펠란은 그와 다르게 여기는 모양이었다.

-이 몸이 남겨둔 에테르 결정체들이 얼마나 되는지는 이 몸도 알지 못한다. 만약 에테르 결정체의 양이 네놈이 <초월>하는 데에 필요한 에테르보다 모자라기라도 하면 어쩌려는 거지?

“그건…… 그때 가서 다시 생각해 봐야죠.”

강현이 어깨를 으쓱했다.

괜히 그가 도박이라 칭한 게 아니었다.

그는 <초월>을 목표로 가고 있기는 했어도, <초월>하지 못할 가능성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래도 벌써부터 실패를 가정할 필요는 없지 않겠습니까. 달리 할 수 있는 것도 마땅치 않은데.”

-뭐, 지금 같은 상황에서 가장 확률이 높은 방법인 건 맞다.

강현의 말에 수긍하는 엔딜 펠란.

강현은 자신의 단계와 에테르의 양을 확인해 보았다.

[현재 취한 에테르의 양(2525/16,000)]

그의 단계는 현재 12단계.

<초월>을 하려면 13단계까지의 에테르를 다 채워야 한다.

“음…….”

13단계까지의 남은 에테르를 본 강현이 떨떠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지금 보니까 많이 빡센 거 같기도 하고…….’

호기롭게 나서기는 했다만, 남은 에테르를 보자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도 훨씬 많은 양이 필요했던 것이다.

쿠르르르…… 콰쾅쾅!

그때, 뒤에서 어마어마한 굉음이 터져나온다.

-……계속 거기에 남아 있었으면 죽도 밥도 안 됐겠군. 빠져나온 건 좋은 선택이었다.

엔딜 펠란이 살짝 어처구니없어 하는 어투로 중얼거린다.

강현은 고개를 돌려 뒤를 확인해 보았고, 엔딜 펠란의 어투를 이해할 수 있었다.

굉음의 근원지를 본 강현의 눈이 가늘어졌다.

‘반구?’

어느새 발로 전체가 반투명한 반구에 뒤덮여 있었는데, 그 안에서 칠흑의 뇌전이 마구 내리치는 중이었던 것이다.

거기에 아직도 활발하게 솟구치는 마기의 폭포가 더해지자, 더할 나위 없는 음산함이 쉬지 않고 뿜어져 나왔다.

-저 안에서 희미하게 비명들이 들려오는 걸로 보아, 아예 각을 잡고 마기를 흡수하는 것 같군.

기감을 확장시켜 본 강현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사, 살려줘어어…….

-크아아아아악!

-제, 제발 여기서 빠져나가게 해줘…… 카아악!

바람에 희미하게 실려오는 비명소리들 덕분에, 저 반구의 내부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어서였다.

필시 저 악마의 손에 의해, 반구에 갇힌 중하급 악마들이 학살당하고 있겠지.

‘여기에 발을 디딘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부터 저런 짓을.’

이곳 제33 마계와는 하등 상관없는 강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기분이 전혀 좋지 않았다.

마기의 폭포를 보던 그의 머릿속에 어떠한 의문이 들었다.

‘그놈이 저 마기의 폭포를 바로 흡수할 수도 있습니까?’

마기의 폭포를 보다 보니, 혹시 그 악마가 마기의 폭포를 통해 힘을 회복할 수 있을지도 있지 않냐는 의문이었다.

-그건 불가능하다.

다행히 엔딜 펠란이 칼 같이 부정한다.

-마공에서부터 뿜어지는 저 마기의 폭포는, 겉으로 보기에는 정순해보여도 이물질이 상당히 끼어 있지. 저 마기를 받아들이려면 별도의 여과 과정을 거쳐야 하는데, 잘못하다간 큰 부상을 입을 수도 있다. 발푸르기스의 밤을 맞아 모인 악마들이 모두 눈이 빠지라 마석이 나타나기만을 기다리는 것도 그 때문이지.

“<초월>의 경지에 오른 악마라고 해도 똑같이 적용되는 말입니까?”

-물론이다. 만약 <초월>에 다다른 걸로 마기의 폭포를 취할 수 있다면 이 몸이 삼천 년 전 입을 가져다 박았을 거다. 그러나 소량이면 몰라도 대량의 마기를 취하는 건 그 당시 이 몸에게도 꽤나 위험부담이 따르는 일이었지. 저 악마도 마찬가지일 거다. 그러니까 마기의 폭포를 앞에 두고도 중, 하급 악마들을 삼키고 있는 것일 테고.

“후우…… 그나마 다행이네요.”

강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마기의 폭포를 직접적으로 흡수하지 못한다니, 천만다행이었다.

‘그럼 일단…… 도착이나 서둘러야겠군.’

슈와아아아-

크게 날갯짓을 한 강현이 속도를 더 내려는데, 엔딜 펠란이 말해온다.

-그나저나, 네놈과 별 상관도 없는 차원의 일에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뭐지?

“예? 그게 무슨 말입니까?”

-최상급 마석도 얻었겠다, 그냥 에테르만 취하고서는 지구로 돌아가면 되지 않느냐. 왜 <초월자>와 싸우려고 하면서까지 발 벗고 나서느냐는 말이다.

“글쎄요…….”

듣고 보니 정말 그랬다.

누가 시키거나 부탁한 것도 아닐지언대, 자연스레 그 악마를 상대하고자 하고 있었다.

“음…….”

강현은 잠시 머리를 굴려보았다.

왜 이렇게까지 하는지는 자신도 정확히 알 수 없었다.

“대강만 말해보자면…….”

강현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할 수 있을 것 같으니까? 이긴 한데 잘은 모르겠네요. 하지만…….”

-하지만?

“뭔가, 저 악마와 꼭 싸워야 한다는 직감이 듭니다.”

그 말처럼 그의 직감이, ‘리얼’과 더 비욘드를 거치면서 만들어진 직감이 말해오고 있었다.

사나크가 불러낸 <초월자>와 싸워야 한다고.

‘직감을 따라서 여태까지 손해 본 적은 없으니까.’

지금 이 자리에 있을 수 있는 데에는 그의 직감의 공이 컸다.

그렇기에 굳이 직감을 거부할 이유는 없었다…….

“강현!”

저 앞에서부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목소리의 주인을 본 강현이 마주 외쳤다.

“라크온!”

라크온을 필두로 한 수십 마리의 악마가 쏜살같이 하늘을 가로질러 오고 있었다.

강현과의 거리가 가까워지자, 라크온이 속도를 급격히 줄인다.

“잠깐 정지!”

“예!”

전투 준비를 마쳤는지, 묵직해 보이는 갑주를 착용한 라크온이 말을 걸어온다.

“다행히 몸은 괜찮은 듯하군. 적안의 마왕은 발로에 있나?”

적안의 마왕.

그게 사나크가 부른 악마의 이명인 듯했다.

‘적안의 마왕이라.’

놈의 시뻘건 두 눈과 어울리는 것 같기도 했다.

“예, 소환 과정에서 뭔가 지장이 있었던 모양인지 <초월>의 ‘격’을 잃은 상태였습니다. 지금 힘을 회복 중입니다.”

“놈과 싸울 생각인 거 같은데, 맞나?

“예? 그걸 어떻게…….”

라크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의 눈이 결의에 차 있는데 그걸 왜 모르겠나. 뭔가 묘수가 있어서 잠시 물러나는 것 아닌가?”

자신의 계획을 꿰뚫어 보는 라크온의 한마디에, 강현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자신의 눈빛만 보고 저런 말을 해올 줄이야.

입을 뻐끔거리는 강현에게 라크온이 빙긋 웃어 보인다.

“내가 삼천 년 동안 밥만 축내고 있던 건 아니지.”

라크온의 시선이 수수께끼의 검으로 이동한다.

“왕이시여.”

-뭐냐.

엔딜 펠란의 형상이 우스스- 수수께끼의 검에서부터 모습을 드러낸다.

“저희가 시간을 벌고 있으면 되겠습니까?”

-이놈이 수는 도박에 가깝다. 빠져나갈 구멍은 만들어두도록.

“도박이라…… 대충 알겠군요. 폐가로 가시는 겁니까?”

-……그래, 알고 있었나?

“유적 내부에 뭔가 숨겨두셨다는 것 정도는 눈치채고 있었지요.”

“……!”

다시 한번 놀란 강현.

하나 라크온은 미소를 지어보일 뿐이었다.

“말했잖나, 삼천 년 동안 밥만 축내고 있던 건 아니라고. 그나저나 왕이시여, 마음 같아서는 더 길게 이야기를 나누고 싶으나, 아무래도 가봐야겠습니다.”

-빨리 출발하기나 하도록.

“알겠습니다, 못다 한 이야기는 나중에 나누도록 하지요.”

짧은 예를 취해 보인 라크온이 수하들에게 소리쳤다.

“다시 출발한다!”

“명을 받듭니다!”

쿠오오오-

그러고는 그대로 수하들과 함께 강현을 지나쳐 갔다.

그 목적지는 칠흑의 반구에 둘러싸여 있는 발로일 터였다.

-네놈도 서둘러라. 라크온이 적안의 마왕을 견제한다고 한들, 큰 효용을 보지 못할 가능성이 훨씬 크니까.

“예.”

고개를 주억거린 강현도 속도를 높여 나레프로 향했고.

그로부터 잠시 후.

쿠구구구- 콰콰쾅! 콰쾅!

발로에서부터 무시무시한 폭발음이.

끼이이이익…….

나레프의 어느 폐가와 연결된 지하에서는 오래된 문이 열리는 소리가 각각 울려 퍼졌다.

* * *

폐가를 통과한 뒤, 궁전까지 가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강현은 옛 시가지를 지나 순식간에 궁전 내부의 비밀 통로에 당도했다.

비밀 통로의 끝에 도달하자, 지난번에 봤던 문이 눈에 들어온다.

강현이 품에서 최상급 마석을 꺼내며 말했다.

“열어주시죠.”

-오냐…….

스아아아-

수수께끼의 검에서 새어 나온 마기가 기괴한 문양을 형성하며, 비밀 창고로 통하는 문을 열어젖힌다.

끼기기기…….

문이 열리자마자 강현은 곧장 창고의 끝으로 다가가.

굳게 잠긴 보물 상자를 마주했다.

-이것도 열어주마…….

수수께끼의 검에서 흘러나온 마기가 강현이 든 최상급 마석을 집어삼킨다.

드드드드…….

그러자 천천히 보물 상자가 열리기 시작한다.

삼천 년 전 엔딜 펠란이 남겨두었던 에테르 결정체들의 모습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슈와아아아-

보물 상자가 열리면서 새어 나오는, 영롱한 빛.

강현은 재빨리 상자 안의 에테르들을 가늠해 보다가.

“이건…….”

할 말을 잃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흐흐, 어떠냐. 이 몸의 흔적이.

엔딜 펠란이 기고만장하게 말해온 것처럼, 그 양이 엄청났던 것이다.

중급, 중상급, 상급, 최상급…….

어림잡아도 2~30개는 훌쩍 넘는 크고 작은 에테르 결정체들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강현으로서도 처음 보는, 말 그대로 어마어마한 양의 에테르 결정체들.

‘이거면…… 진짜 가능할지도 몰라.’

이렇게나 많은 에테르 결정체를 본 이상, 더 망설일 건 없었다.

“그럼, 바로 가겠습니다.”

강현은 즉시 상자 안의 모든 에테르 결정체들, 그리고 지난 이틀 동안 얻었던 마석들을 탈탈 털어내어 챙긴 뒤 바닥에 주저앉았고.

스윽.

손을 내밀어 에테르들을 취해나갔다.

[취할 수 있는 에테르가 감지되었습니다. 취하시겠습니까?]

[현재 취한 에테르의 양(2,525/16,000)]

스아아아…….

그렇게 강현의 주변에 모인 에테르 결정체들이, 하나둘 흡수되기 시작했다.

[현재 취한 에테르의 양(3,525/16,000)]

[현재 취한 에테르의 양(5,922/16,000)]

[현재 취한 에테르의 양(8,018/16,000)]

[현재 취한 에테르의 양(15,899/16,000)]

[현재 취한 에테르의 양(16,247/16,000)]

[12단계 → 13단계]

[감각이 대폭 세밀해집니다.]

[에테르 감지력이 대폭 상승합니다.]

…….

[참가자 이강현의 현재 단계는 13단계입니다.]

[종족의 한계에 도달했습니다.]

[취할 수 있는 에테르를 모두 채울시, <초월>이 진행됩니다.]

[현재 취한 에테르의 양(247/32,000]

…….

슈와아아-

12단계를 넘어 13단계에 접어들자, 강현의 주변을 찬란한 빛이 뒤덮어 나갔다.

그러나 강현은 아랑곳 않고 에테르를 계속해서 취해나갈 뿐이었다.

[현재 취한 에테르의 양(247/32,000]

[현재 취한 에테르의 양(2,523/32,000]

[현재 취한 에테르의 양(5,600/32,000]

…….

13단계를 넘어, <초월>을 향해.

* * *

발로와 나레프 사이의 어느 메마른 협곡.

쾅! 콰쾅!

한 바탕 폭발음이 울린 뒤.

“크, 크아악!”

“커헉!”

다섯 마리의 악마가 저 멀리 나가떨어짐과 함께, 이십여 마리의 악마가 다급히 물러난다.

“큭!”

물러난 악마들의 선두에 위치한 라크온이 이를 악물었다.

전투가 시작한지 한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았거늘, 벌써 절반 가까이의 수하들이 당해버렸다.

그리고 자신들이 당한 반면, 적안의 마왕은…….

[흐흐…… 고작 이게 다인가?]

쿵.

발걸음을 내디딘 적안의 마왕이 비웃음을 흘린다.

그 비웃음은 메아리처럼 퍼져나가, 이내 온 협곡에 울려퍼졌다.

“으으.”

“저 악마를 이기는 건 무, 무리야…….”

듣는 것만으로도 탈력감과 좌절감이 깃드는 메아리에, 수하들의 얼굴에 절망이 서린다.

[기세 좋게 나타났을 때만 하더라도 내심 기대를 했었는데…… 이거 실망이군.]

쿠오오오-

말을 하는 적안의 마왕의 왼팔에서부터 폭풍과도 같은 마기가 몰아친다.

라크온은 저 마기들의 의미를 잘 알고 있었다.

“설마 원격으로도 흡수가 가능할 줄이야…….”

조금 전 그들의 전장이었던, 발푸르기스의 밤이 벌어지고 있던 발로.

적안의 마왕의 왼팔은 그곳과 연결되어 있었고.

지금도 칠흑의 반구를 통해 발로에 가두어둔 중, 하급 악마들을 끊임없이 흡수하는 중이었다.

쿠콰콰콰-

즉, 적안의 마왕이 차원을 급박하게 넘어오면서 잃었던 <초월>의 ‘격’을 실시간으로 되찾아가고 있다는 말이었다.

그게 의미하는 바는 간단했다.

적안의 마왕이 현재 반구를 유지하고, 반구 내부의 중, 하급 악마들을 흡수하는 동시에 자신들을 상대하고 있다는 것.

“한꺼번에 여러 일을 하면서도 이런 괴물 같은 모습이라니.”

퉤.

라크온이 입안에 고인 피를 내뱉으며 중얼거렸다.

자신들이 달려든다면 적안의 마왕의 신경이 분산될 거라 여기고서는, 발로에 도착하자마자 기습을 지시했던 라크온이었다.

그는 아무리 강자라 하더라도 한 번에 여러 가지 일에 집중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자신들이 달려든다면 적안의 마왕이 ‘격’의 흡수를 멈추거나, 몸을 피하면서 ‘격’을 계속 흡수해 나갈 줄 알았던 것이다.

한데 적안의 마왕은 ‘격’을 흡수하고 있는 왼손을 움직이지도 않은 채 달려드는 자신들을 맞이했고, 압도적으로 몰아붙이기까지 했다.

당하는 라크온으로서도 전혀 예상치 못한 일.

적안의 마왕의 마기와 전투 경험은 그만큼 뛰어났다.

물론, 단지 그것들 뿐만이었다면 라크온 일행이 이 정도로 몰리지는 않았을 터였다.

그들이 이토록 속수무책으로 당한 ‘진짜’ 원인은…….

[흐흐…… <초월>의 ‘격’을 되찾지 못한 상태임에도 너무나 쉬운 상대들이 아닌가.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넘어올 걸 그랬군.]

그때, 적안의 마왕이 발로의 반구와 연결되어 있지 않은 오른팔을 내뻗는다.

그러자 적안의 악마의 손에서부터 어마어마한 마기의 구체들이 형성되어.

쿠오오오-

라크온과 그의 수하들에게 쏘아진다.

아직 <초월>의 ‘격’을 되찾지는 못했음에도, 더할 나위 없이 위협적인 공격이 짓쳐 들어온다.

당장 받아쳐야만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을 만한 위력.

그러나 라크온은 섣불리 반격 지시를 내리지 못했다.

적안의 마왕에게 반격을 하는 것이, 그들을 여기까지 몰리게 만든 ‘진짜’ 원인과 밀접한 관련이 있어서였다.

“라, 라크온 님!”

“이러다 다 죽겠습니다!”

망설이던 라크온에게 수하들의 비명과도 같은 외침이 들려온다.

이대로 다 죽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에, 라크온은 어쩔 수 없이 입을 열었다.

“마기를 둘러 방어해라!”

쿠오오오-

라크온을 필두로 수하들이 가지각색의 마기를 일으킨다.

악마들의 손을 떠난 마기들이 적안의 마왕이 내쏜 마기의 구체와 충돌했다.

콰콰콰쾅!

자욱하게 피어오른 마기의 잔재들과 먼지가 주변에 확 퍼져나간다.

그때였다.

[흐흐흐…….]

기분 나쁜 웃음을 흘린 적안의 마왕의 시뻘건 두 눈이 붉은빛을 내뿜는다.

붉은빛이 만들어낸 결과는 놀라웠다.

지이이이잉-

붉은빛이 흩어져 가던 근방의 마기들을 모조리 흡수하기 시작한 것이다.

쿠구구구-

덩어리처럼 모인 마기들이 적안의 마왕의 오른손으로 흘러 들어간다.

“빌어먹을 ‘붉은 눈’…….”

한층 강해진 적안의 마왕의 ‘격’을 느낀 라크온의 입에서 욕지거리가 새어 나왔다.

저게 바로 그로 하여금 반격을 망설이게 한, 그들이 밀릴 수밖에 없던 ‘진짜’ 원인이었다.

‘붉은 눈.’

자신보다 낮은 ‘격’을 가지고 있는 이들의 에테르를 흡수할 수 있게 하는, 그야말로 말도 안 되는 [권능].

저 <초월자>의 이명이 ‘적안의 마왕’이 된 이유이기도 했다.

[흐하하하! 고맙다. 아직 멀긴 했다만, 이로써 한 걸음 더 본래의 ‘격’에 가까워졌구나.]

라크온 일행이 방출했던 마기의 흡수를 마친 적안의 마왕이 입꼬리를 비스듬하게 올린다.

쿵.

한 걸음 앞으로 나서는 적안의 마왕을 본 라크온이 다급히 소리쳤다.

“조금 더 후퇴한다!”

“아, 알겠습니다……!”

“며, 명을 받듭니다!”

라크온이 땅을 박찼고, 그런 그를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수하들이 뒤따랐다.

‘저 [권능]이 있는 한 우리의 반격은 놈이 ‘격’을 더욱 빨리 회복할 수 있게 해줄 뿐이다.’

그 말인즉슨, 그들이 적안의 마왕을 상대로 할 수 있는 건 극히 제한된다는 말이었다.

‘그나마 사방에서 일사불란하게 덮치면 가능할지도 모르겠다만…….’

그것도 무리였다.

지금 반격을 도모하기에는 이미 기세가 완전히 적안의 마왕에게 넘어갔다.

“대체 어떻게 해야…….”

라크온은 머리를 쥐어짜 내 방안을 궁리했다.

후퇴할 공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들의 도시 나레프가 근처에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가 아예 몸을 빼려 든다면…….’

적안의 마왕은 곧장 나레프로 향할 게 뻔했다.

그러니 적안의 마왕으로부터 아예 도망치는 건 불가능했다.

어떻게든, 어떤 수를 써서든 적안의 마왕을 그들의 힘으로 막아내야 했다.

다만 적안의 마왕을 상대로 할 수 있는 게 한정적이라는 게 문제였다.

그간 살아온 삼천 년의 세월이 무색하게도, 그가 할 수 있는 거라곤 그저 놈으로부터 거리를 벌리는 동안 먹힐 만한 전략을 떠올리는 것뿐이었다.

[또 도망가는 건가? 이쯤 되면 어디까지 도망을 가려는 건지 궁금해지는군.]

들려오는 메아리에 뒤를 보자, 적안의 마왕이 느긋하게 발걸음을 내디디고 있었다.

자신들을 이미 다 잡은 물고기로 취급하는지, 적극적으로 쫓아오지도 않는다.

어차피 시간은 자신의 편이니, 쓸데없이 서두를 필요는 없다는 거겠지.

[네놈들도 내가 저기 보이는 도시로 가는 건 원치 않을 텐데…… 아니면 저 도시를 믿는 것인가?]

한참 뒤에서부터 나직이 들려오는 적안의 마왕의 음성.

[도시를 믿는 거라면 도시를 부숴주마. 이 차원을 믿는 거라면 이 차원을 부숴주마. 네놈들이 무릎을 꿇을 때까지, 그 끝에 이 차원의 모든 땅이 내 손아귀에 들어올 때까지!]

나직이 시작된 그의 음성은, 끝에 이르러서는 우레처럼 온 사방에 몰아쳤다.

‘이대로 가다가는 나레프가 위험하다.’

적안의 마왕이 나레프에 당도하게 두어서는 안 됐다.

만약 적안의 마왕을 나레프에 진입하게 뒀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날지 벌써 눈에 선했다.

그 즉시 오른손을 내뻗어 도시 내부의 모든 걸 흡수하려 들 터였다.

문제는 그걸 알고 있는데도 마땅한 수가 떠오르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그러고 보니…….’

순간 나레프의 지하에 있을 그의 왕과 왕의 계약자에게 생각이 미쳤으나, 라크온은 고개를 저었다.

왕은 봉인되어 있고, 왕의 계약자는 자신보다 약하다.

뭘 하러 갔는지는 모르겠지만, 별 도움이 안 된다고 봐야 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격’을 쌓는 데에 더 집중할 걸 그랬군.”

라크온이 허탈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그전에도 그다지 열심히 하지는 않았지만, 나레프를 세운 지난 천 년 전부터는 아예 ‘격’을 쌓는 걸 등한시했던 그였다.

뒤늦게 후회가 물밀 듯이 밀려왔다.

이런 위기가 닥쳐올 줄 알았다면.

힘이 필요할 때가 올 줄 알았다면.

나레프에만 온 신경을 쏟는 게 아니라 ‘격’을 쌓는 것 또한 등한시하지 않았을 텐데.

“후우.”

이미 지난 일이었다.

라크온은 서서히 잠식해 오는 현실, 무력함과 절망을 애써 털어냈다.

‘나레프에 인원을 보내야겠군.’

적안의 마왕을 당장 막을 수단이 없는 이상, 현재로서는 나레프에 수하들 중 하나를 보내 대피를 지시하는 게 최선일 듯했다.

그는 일단 인원들을 대피시킨 뒤, 수하들과 함께 다른 고위 악마들을 모으는 수밖에 없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런데 그때였다.

쿠구구구구-

돌연, 나레프에서부터 상당한 ‘격’이 이쪽으로 빠르게 다가오는 게 느껴진다.

“이건?”

자신보다 명백히 강한, 여태껏 나레프에서 느껴본 적 없는 ‘격’.

그 사실에 잠시 의아해했던 라크온이었으나, 이내 깨달았다.

누가 오고 있는 것인지를.

“왕이시여……!”

왕과 왕의 계약자.

할 일을 마친 그들이 오는 게 틀림없었다.

이내 그는 자신의 예측이 들어맞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쿠오오오오-

찬란한 순백의 날개를 반짝이며.

“괜찮습니까?”

왕의 계약자, 이강현이 모습을 드러냈으니까.

* * *

강현은 저 멀리 보이는 <초월자>, 적안의 악마를 바라보았다.

전혀 거리낄 게 없다는 듯, 자신의 등장에도 아주 여유롭게 걸어오고 있다.

“자네, ‘격’이 대폭 상승했군.”

라크온의 말에 강현이 대답했다.

“예, 다행히 갔던 일을 무사히 마쳤습니다.”

“무슨 일을 한 건지는 몰라도, 나보다도 훨씬 강해진 거 같은데, 맞나?”

“그래 보이는군요. 목표했던 것만큼은 아니지만요.”

강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 목표와는 달리 <초월>을 이루지는 못했다.

[현재 취한 에테르의 양(26,588/32,000]

그의 현재 에테르는 26,000가량.

모든 에테르 결정체와 마석을 취했음에도, <초월>까지는 6,000 정도가 모자랐다.

<초월>일 이루어 적안의 마왕을 이기겠다는 목표는 지키지 못한 셈이었다.

하지만.

“일단 자리를 피하는 게 어떻겠나? 같이 대책을 논의해 보-”

“아뇨.”

강현은 고개를 저었다.

<초월>을 하지 못했는데도 그가 이곳까지 온 이유는 명확했다.

13단계에 이르면서 늘어난 기감을 통해 적안의 악마를 감지할 수 있게 되었고.

그 결과 결론을 내릴 수…….

“자네야 잘 모르겠다만, 저자에게는 비슷한 ‘격’을 쌓은 존재가 아니라면 공격이 통하지 않네! 자신보다 낮은 ‘격’을 지닌 존재의 에테르를 흡수할 수 있는 [권능]을 가지고 있어!”

라크온의 말이 상념을 끊는다.

하나 강현은 광창을 만들어 날릴 뿐, 대답하지 않았다.

[스킬, 섬멸의 광창[Lv.2]을 발동합니다.]

[1/5의 마력을 소모합니다.]

쿠콰콰콰-

강현의 손에서 만들어진 큼직한 광창이 적안의 마왕을 향해 날아간다.

“일단 한 번 보시죠.”

“뭘…… 아닛?!”

말을 하다만 라크온이 경악한다.

[흥, 가소로운 공격을…… 음?]

적안의 마왕이 코웃음을 치며 발동한 붉은 눈이, 기능하지 않았던 것이다.

콰콰콰쾅!

[크아악!]

그대로 광창에 적중당한 적안의 마왕이 주르륵 밀려난다.

붉은 눈이 발동하지 않는다는 게 뜻하는 건 명확했다.

적안의 마왕과 강현의 ‘격’이, 유의미한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는 것.

“어떻습니까? 나쁘지 않죠?”

“대체 어떻게 붉은 눈을…….”

“멀리서도 느껴지더군요, 충분히 할 만하겠다고.”

그 말처럼, 13단계에 다다르면서 증대한 기감은 말해왔었다.

비록 <초월>을 이루지는 못했어도, 적안의 마왕을 상대하기에는 결코 모자람이 없다고.

게다가 그가 노리는 건 그것만이 아니었다.

“또, 못다 한 목표도 달성해야 하고요.”

강현은 몸을 일으키는 적안의 마왕을 가만히 응시했다.

에테르 결정체와 마석들로는 이루지 못했던 <초월>.

그는 이 자리에서 적안의 마왕을 쓰러뜨리고 <초월>에 이를 생각이었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더 지체할 건 없었다.

“……간다.”

적안의 마왕이 완전히 몸을 일으키기 전.

찰나의 틈을 노린 강현의 신형이, 번개같이 쏘아졌다.

[……!]

기습적으로 달려드는 강현을 본 적안의 마왕이 흠칫 놀란다.

[이놈…… 한 번 공격에 성공했다고 기고만장해졌구나!]

적안의 마왕이 오른팔을 내뻗자, 거대한 마기의 구체가 뿜어져 나온다.

쿠오오오-

주변의 공간을 어그러뜨리면서 날아오는 마기의 구체.

당장 물러나야 할 것만 같은 위력의 구체였으나, 강현은 물러나지 않았다.

도리어 더욱 속도를 높여, 마기의 구체와 마주했다.

‘해야 해.’

종족의 한계를 뛰어넘기 위해서는, <초월>을 위해서는, 지금 이 자리에서 적안의 마왕을 쓰러뜨려야 했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반드시 그래야만 하는 이유가 존재했다.

[스킬, 광야참[Lv.3]을 발동합니다.]

[1/5의 마력을 소모합니다.]

쿠콰콰콰- 콰콰쾅!

강현의 검에서부터 뿜어진 백색의 초승달 검기가 단번에 마기 구체를 분쇄한다.

[크윽……!]

공격이 무위로 돌아간 적안의 마왕이 침음을 내뱉는 가운데.

스윽.

강현의 시선이 순간적으로 적안의 마왕의 한참 뒤에 있는 마기의 폭포로 향한다.

쿠오오오…….

며칠 내내 하늘을 뚫을 것처럼 솟구치던 마기의 폭포가 서서히 잦아들어 가는 중이었다.

즉, 발푸르기스의 밤이 거의 끝나간다는 소리였고, 그 말은.

‘더 이상 마석이나 에테르 결정체를 구할 방법이 없다는 거지.’

그것들로 ‘격’을 쌓을 수 있는 기회가 사라진다는 뜻이었다.

-크흐, 참으로 다행이지 않느냐? 하필 네놈의 앞에 온전한 ‘격’을 되찾지 못한 데다가, 심지어 제 처지도 인지하지 못하고 건방지기까지 한 <초월자>가 있다는 것은.

엔딜 펠란이 클클댄다.

-너무나도 좋은 먹잇감이 아니느냐.

<초월자>를 앞에 두고도 먹잇감이라 칭하는 엔딜 펠란.

적안의 마왕의 ‘격’을 가늠한 강현은 그의 말이 부분적으로 맞다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먹잇감 수준은 아니어도…….’

느껴졌다.

<초월자>라는 타이틀을 떼고 본다면.

적안의 마왕이라는 이명을 떼고 본다면.

‘지금 더 많은 ‘격’을 쌓은 건 나다.’

지금 더 강한 건, 적안의 마왕이 아니라 그 자신이라는 것이.

물론 그가 스스로 그 사실을 알게 된 건 아니었으며, 처음부터 알았던 것 또한 아니었다.

강현은 찬란한 빛을 내뿜고 있는 수수께끼의 검, 정확히는 그 안에 있는 엔딜 펠란을 힐끗 쳐다보았다.

‘……하여간, 눈치 하나는 빠르다니까.’

조금 전 에테르를 모두 취했음에도 <초월>에는 다다르지 못했다는 걸 알게 됐을 때, 강현은 크게 실망했었다.

<초월>의 경지에 이르러야 적안의 마왕을 상대할 수 있을 거라 여겼던 그였는데, 그러지 못했으니 적안의 마왕을 막아내지 못할 걸로 보였기 때문이다.

엔딜 펠란이 말해온 건 그때였다.

‘한 번 기감을 끌어올려 봐라. 이 몸의 예상으로는, 지금의 네놈이라면 충분히 상대할 수 있을 것 같으니.’

“예……?”

반신반의하며 기감을 끌어올려 본 강현은 크게 놀랐다.

엔딜 펠란의 말처럼, 저 멀리 잡히는 적안의 마왕의 ‘격’은 그보다 낮았던 것이다.

그가 그걸 깨달은 순간 엔딜 펠란은 선언했다.

-적안의 마왕을 쓰러뜨려라. 그놈을 쓰러뜨린다면 그 순간 네놈은 <초월>할 수 있을 터이니.

“그게 무슨…….”

-모자란 6,000가량의 에테르를 얻을 수 있을 거라는 소리다. 아무리 놈이 ‘격’을 잠깐 잃었다고는 해도 <초월자>다. 하나의 차원을 지배하는 지배자가 설마 6,000의 에테르를 안 주겠느냐?

6,000이나 되는 에테르를 지나치게 쉽게 말하는 엔딜 펠란이었으나, 강현의 생각에도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초월>에 다다르는 것만 해도 수십만의 에테르가 필요한데, 아무리 못해도 1만 이상은 줄 거로 보였다.

여기까지가 그가 적안의 마왕을 상대하기 위해 움직였던 배경.

비록 라크온이 상당히 고전을 치른 걸로 보였다만, 다행히 완전히 늦기 전에는 도착할 수 있었다.

‘자기보다 ‘격’이 낮은 상대의 에테르를 흡수할 수 있는 [권능]이 있을 줄은 몰랐다만…….’

‘격’이 비슷한 강현에게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었다.

쿠오오-

적안의 마왕과의 거리가 지척에 이르자, 강현은 하나둘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적안의 마왕을 상대하기 위한 준비들이었다.

스윽.

강현의 품에서 아티팩트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낸다.

[email protected]차원의 핵, ???의 나무토막, 아르크트 2단계, 적흑 시리즈, 오우거의 손…… 마지막으로.

슈와아아-

아르크트의 위를 가볍게 뒤덮은, 영롱한 황금의 갑옷까지.

[스킬, 광명의 눈[Lv.2]을 발동합니다.]

이어서 적안의 마왕의 약점을 훤히 들여다본 강현이 거침없이 검을 내질렀다.

[죽어라!]

거기에 적안의 마왕도 새카만 마기로 물든 주먹으로 응수하면서, 귀가 터질 듯한 폭발음이 터져나왔다.

콰-앙!

폭발음이 가신 뒤.

[이럴 수가…….]

상대를 확인한 적안의 마왕의 얼굴이 당혹스럽게 일그러졌다.

모든 힘을 다해 내질렀거늘, 눈앞의 인간은 조금도 밀려나지 않았다.

-저놈의 심리 상태는 뻔하다.

그런 적안의 마왕을 보며 엔딜 펠란이 싸늘하게 중얼거렸다.

-예상과 다르게 이곳으로 급작스럽게 넘어오게 되면서 잠깐 긴장을 했을 테지만, 못난 라크온 놈을 상대하면서 그 긴장은 금세 풀어졌겠지. 그렇게 마음이 느슨해진 상태에서 네놈을 만나게 됐고, 네놈이 자신에 비해 전혀 꿀리지 않은 게 당황으로 이어진 거다.

‘라크온이 밀린 게 저한테는 도움이 됐다는 거네요.’

-……그래.

대답하는 엔딜 펠란에게서 은은한 분노가 전해져 온다.

필시 라크온을 건드린 데에서 생겨난 분노일 터였다.

강현은 기꺼이 그가 분노를 해소하는 데에 도움을 주기로 했다.

[스킬, 섬광[Lv.9]을 발동합니다.]

쐐애애액-

적안의 마왕을 향해, 한 줄기 빛살을 쏘아냄으로써.

쾅! 콰쾅!

섬광을 시작으로 강현은 맹공을 퍼부었고, 거기에 적안의 마왕도 쉴 새 없이 손을 내질렀다.

콰콰쾅! 콰쾅!

잠시 이어지는 백중세에 강현은 확신했다.

<초월자>의 [권역]도 없고, [권능]도 통하지 않는 이상.

눈앞의 적안의 마왕은, 그저 ‘적당히 강한’ 상대일 뿐이라는 걸.

그가 그런 생각을 했을 때였다.

[크아악!]

쿠구구구-

“응?”

이상현상에 그가 눈을 크게 떴다.

적안의 마왕이 고함을 지르자, 놈의 ‘격’이 한층 강해진 게 느껴진 것이다.

정확히는, 그가 아까부터 축 늘어뜨린 왼팔로 ‘격’이 모여들고 있었다.

‘뭐지?’

강현이 의아하다는 기색을 내보였다.

갑자기 ‘격’이 늘다니, 뭔가 이질감이 들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저 뒤에 있는 라크온의 외침이 들려오면서 그 의문은 금방 해소되었다.

“놈의 왼팔은 발로에 가두어둔 중, 하급 악마들과 연결되어 있네! 실시간으로 악마들의 ‘격’을 흡수하고 있어!”

강현은 곧장 고개를 들어 발로를 쳐다보았다.

저 반구가 왜 생겼는지 궁금했었는데, 원격에서도 ‘격’을 회복하기 위함으로 보였다.

‘저걸 먼저 해결해야겠군.’

팟-

살짝 물러난 강현이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일단 ‘격’의 공급을 끊는 게 우선일 듯했다.

‘괜찮은 방법 없을까요?’

-잘 보면 놈의 왼팔에 안개처럼 둘러싸인 마기가 보일 거다. 저것들을 끊어버리면 될 거 같군.

과연, 엔딜 펠란의 말대로였다.

적안의 마왕의 왼팔을 보자, 웬 흐물흐물한 마기들이 실타래처럼 늘어져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분명 발로의 반구와 연결되어 있는 마기겠지.

‘그렇다면…….’

곰곰이 가진 패들을 점검하던 강현의 눈이 빛났다.

마침 괜찮은 스킬이 떠올랐다.

‘그거면 되겠네.’

그가 75레벨을 달성하면서 배운 스킬.

그 스킬을 사용한다면 한 방 먹여줄 수 있을 것이었다.

* * *

‘빌어먹을, 어디서 저런 놈이!’

적안의 마왕이 속으로 분통을 터뜨렸다.

다 잡은 고기들을 천천히 사냥할 일만 남은 줄 알았더니만, 느닷없이 저런 괴물이 튀어나올 줄이야.

분명 소환된 직후 도시를 훑었을 때는 감지되지 않던 놈이었기에 더욱 어처구니가 없었다.

고작 인간이 저런 강함을 가졌다는 것에 대한 놀라움도 들었으나, 그보다는 후회가 더욱 치솟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아예 모든 ‘격’을 회복하고 올 것을……!’

빌어먹을 사나크가 불안정한 소환 의식을 하는 바람에 아티팩트도, 그의 충성스러운 수하들도, <초월>의 ‘격’도 두고올 수밖에 없던 그였다.

저런 놈이 있는 줄 알았더라면 진즉에 힘을 회복하는 데에만 집중했을 텐데.

적안의 마왕에게는 더없이 한탄스러운 일이었다.

하나 그의 한탄에도 불구하고.

쾅!

인간은 가차없이 쇄도해 올 뿐이었다.

슈와악-

인간의 검에서 뿜어진 백색 에테르에 적안의 마왕의 얼굴이 구겨졌다.

하필 악마와 상극인 빛 속성의 에테르를 쓰기까지 하다니.

놈에게 티를 내지는 않았지만, 놈의 검과 부딪칠 때마다 피해가 누적되고 있었다.

쾅! 콰콰쾅!

예리하게 찔러오는 인간의 검을 막는 적안의 마왕의 머리에는 한 가지 생각밖에 없었다.

‘내가 놈보다 더 많은 ‘격’을 얻게 될 때까지 어떻게든 버틴다. 버텨서, 붉은 눈을 발동시킨다.’

지금도 천천히 흡수되고 있는 악마들의 ‘격’과 붉은 눈.

지금 같은 추세로 놈이 공격을 해온다면 결코 쉽지 않겠다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그로서는 그것들만이 희망이었다.

다행히 인간과 자신의 ‘격’의 차이는 그리 크지 않았기에, 잘하면 버틸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그런데 그때였다.

‘음?’

미세하게 비어 있는 인간의 왼쪽 옆구리를 본 적안의 마왕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실수인지 뭔지는 몰라도, 일시적으로 왼쪽 옆구리가 무방비 상태가 되어있었다.

‘기회다!’

적안의 마왕은 무의식적으로 손을 내뻗었다.

공격은 최선의 방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내심 저놈의 공격을 버티기 힘들 거라 여겼던 그에게는 놓칠 수 없는 반격의 기회였다.

쿠오오오오오-

그의 손에서부터 전력을 다한 마기가 터져나간다.

그러나 인간을 본 적안의 마왕은 무언가 잘못됐다는 걸 직감했다.

씨익-

인간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가 있던 것이다.

다음 순간, 그는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팟-

인간의 몸이 슉 날아오르면서 마기를 자연스럽게 피함과 동시에.

[스킬, 천벌[Lv.1]을 발동합니다.]

[1/2의 마력을 소모합니다.]

쿠르르릉- 쾅쾅!

저 하늘에서부터 갑작스럽게 일어난 거대한 백색 벼락이 그에게 내리꽂혔으니까.

강현이 75레벨을 달성하면서 습득한 스킬, ‘천벌’이었다.

천벌

-하늘에서부터 막대한 빛의 벼락을 내리칩니다. 벼락에 적중당한 적은 큰 피해를 입습니다.

[크으으으윽……!]

순백의 벼락에 휩싸인 적안의 마왕이 침음을 삼켰다.

‘일단 여기를 벗어나야…….’

죽음의 공포를 느낀 그가 이 자리를 빠져나가려던 때였다.

뚝-

왼손에서 느껴져서는 안 되는 느낌이 든다.

왼손을 본 그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었다.

벼락을 견디지 못하고, 반구와 연결된 왼손의 마기가 끊어진 것이다.

그게 의미하는 바는 하나였다.

저 인간을 이길 마지막 수단이 사라져 버렸다는 것.

[크, 크윽…… 두고 보자!]

표정을 참혹하게 일그러뜨린 적안의 마왕이 황급히 뒤를 돈다.

도망을 치려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내 그는 발걸음을 멈추어야 했다.

[이, 이놈…….]

턱.

그의 생각을 읽고 있었다는 듯, 어느새 강현이 그의 뒤에 자리해 있었으니까.

“그럼, 끝내자고.”

[크아아아아! 이, 이 내가! 내가 이딴 곳에서 소멸할 듯싶으냐!]

막다른 길에 몰린 적안의 마왕이 이성을 잃은 채 달려들었지만, 승패는 금세 기울었다.

푹-

[커헉……!]

순식간에 강현의 검에 명치를 꿰뚫린 적안의 마왕이 그대로 쓰러진 것이다.

쿠웅-

그렇게 적안의 마왕의 거구가 땅에 쓰러진 협곡에 잠시 정적이 감도는 가운데.

[취할 수 있는 에테르가 감지되었습니다. 취하시겠습니까?]

[현재 취한 에테르의 양(26,588/32,000]

스아아…….

[현재 취한 에테르의 양(33,590/32,000]

[추가로 넘어갈 ‘단계’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축하합니다, 모든 에테르를 채우셨습니다.]

…….

[<초월>을 시작합니다.]

슈와아아아-

강현의 눈앞을, 수많은 메시지들이 채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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