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성으로 차원최강 9권
목차
1장 마계(2)
2장 창고
3장 발푸르기스의 밤
4장 초월
5장 차원수
에필로그: 일이 끝난 후
1장 마계(2)
엔딜 펠란의 말은 그만큼 뜻밖이었다.
“숨겨져 있을 아티팩트와 에테르? 그런 게 있습니까?”
-그거야 당연하지 않느냐. 이 몸은 마지막 출전을 할 때만 해도 설마 수천 년 동안 봉인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래서 아티팩트와 에테르들을 쟁여놓은 비밀 창고에 손을 대지도 않았다는 겁니까?”
-만약 이런 신세가 될 줄 알았겠으면 탈탈 털어서 대비를 했겠지. 비록 이 몸의 부하들은 뿔뿔이 흩어졌겠으나, 이 몸만 알던 비밀 창고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을 거다.
엔딜 펠란이 씁쓸하게 중얼거린다.
하기야, 저도 모를 만큼 갑작스럽게 봉인을 당해버린 엔딜 펠란이다.
후일을 대비한 비밀 창고를 만들어두는 권력자들이 많은 걸 보면, 엔딜 펠란이 여러 아티팩트와 에테르를 숨겨둔 것도 충분히 있을 법했다.
엔딜 펠란도 엄연히 이 제33 마계를 지배하는 <초월자>였으니까.
-물론 지금까지 이 몸의 [권역]이 비어있을 리는 없겠지. 분명 누군가가 점거하고 있을 거다.
“그럼 어떻게 합니까?”
-몰라서 묻나? 네놈이 아티팩트와 에테르를 원한다면, 이 몸의 [권역]을 점거한 게 누구든 간에 어떻게든 창고로 이동하면 된다. 그 과정에서 벌어지는 소란 따위는 네놈이 알아서 감당해야겠다만.
“…….”
기분 탓일까?
마계로 들어온 이후, 엔딜 펠란에게서 여지껏 찾아볼 수 없었던 패도(覇道)적인 모습이 엿보였다.
그게 다시 자신의 안마당이었던 공간으로 돌아왔다는 자신감에서 비롯된 건지, 혹은 안정감에서 비롯된 건지는 알 수 없었다.
‘확실히 성격이 시원해진 거 같기는 하단 말이지…… 잠깐.’
그러다 문득 떠오른 의문.
강현은 입을 열었다.
“[권역]을 점거했을 누군가가 비밀 창고를 털어갔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럴 가능성은 절대 없다.
엔딜 펠란이 단호하게 부인한다.
-그 비밀 창고는 이 몸의 마기 패턴에만 반응하는 것. 설령 이 몸의 최측근들이라 할지라도 결코 열 수 없다.
“그나마 다행이네요. 어떻게 [권역]에 들어가냐가 문제겠지만.”
다소 무모한 계획이기는 했어도, 헛수고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건 좋았다.
-네놈도 대충 눈치챘겠다만, 이 몸의 옛 [권역]에 있을 비밀 창고까지 가는 건 꽤 어려운 과정이 될 거다. 그렇지만 네놈에게도 좋은 경험이 되어주겠지. 또 에테르와 아티팩트를 취한다면 네놈에게도 좋을 거고.
“할 만한 도전이라는 거군요.”
그럴 듯한 말이었다.
강현은 말을 들으면서 떠오른 몇몇 궁금증들을 꺼냈다.
“음…… 아티팩트는 그렇다 치고, 에테르들도 유의미한 양입니까?”
-충분하다.
그 말을 들은 강현은 기대감이 피어오르는 걸 느꼈다.
솔직히 창고에 아티팩트들이 있다고는 해도, 그는 거기에 별다른 기대를 품지는 않았다.
그도 그럴 게, 여태까지의 여정에서 그가 획득한 최상급 아티팩트들만 몇 개인가.
칠흑의 아르크트, 적흑의 투구와 망토, 황금의 갑옷, ???의 나무토막, 수수께끼의 검…….
그는 이미 과분할 정도의 아티팩트들을 사용하고 있었고, 가진 것들을 적재적소에 활용하는 것도 벅찼다.
하지만 아티팩트가 아닌 에테르라면?
‘말이 전혀 달라지지.’
더 비욘드를 때려친 뒤 그의 목표는 에테르, 즉 ‘격’을 쌓아 <초월>에 도달하는 것.
<초월>에 보탬이 될 에테르라면 얼마든지 환영이었다.
‘엔딜 펠란이 그래도 <초월자>였는데 꽤 많이 쟁여뒀겠지. 이거 잘 하면 한 번에 13단계까지 바로 가게 되는 거 아니야?’
얼마나 에테르가 있을지는 몰라도, 빠르게 <초월>에 도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마계에서 반드시 <초월>을 달성할 계획이었던 그로서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소식이었다.
-그런다고 곧바로 <초월>할 수 있을 거라고 여기지는 않겠지? <초월>은 그렇게 쉽게 이루어지는 게 아니니, 날로 먹을 생각은 하지 말도록.
“…….”
물론 언제나 그래왔듯이, 엔딜 펠란은 산통깨는 소리를 해왔지만 말이다.
“꼭 말을 해도…….”
-뭐라고?
“아닙니다.”
짤막하게 대꾸한 강현은 끝이 없는 황무지를 계속해서 나아갔다.
잠시 후.
툭.
그때, 강현의 팔 위로 차가운 무언가가 떨어져내린다.
“응?”
팔을 내려다본 강현은 떨어져내린 차가운 무언가가 물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물이라고는 하나밖에 없었다.
“……비?”
이내 세찬 비가 쏟아져내리려는듯, 잿빛의 하늘이 삽시간에 어두워진다.
“……마계에도 비가 내리는구나.”
척박한 마계에도 기상현상이 나타난다는 것에 신기해하는데, 엔딜 펠란의 말이 들려온다.
-산성비가 내리려는 거다.
“예? 산성비요?”
-그래, 자칫하다간 부상을 입을 수 있으니 보호막을…… 아니다. 그건 나중에 따로 발동하고, 일단 이 몸이 먼저 펼치도록 하지.
고오오오오-
수수께끼의 검에서 칠흑의 마기가 새어나와 강현을 둥글게 감싸간다.
“산성비라 해도 괜찮을 거 같은데…… 굳이 힘들게 모은 마기를 쓸 정도입니까?”
강현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이래봬도 그는 헌터, 일반일을 아득히 뛰어넘은 초인이다.
산성비 건 그에게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할 터.
엔딜 펠란이 애지중지 모은 마기를 이런 곳에 쓰는 게 이해가 되질 않았다.
허나 그런 그의 생각은 금세 뒤바뀌었다.
쏴아아아아아-
-봐라.
내리는 비를 본 강현의 눈이 부릅 떠졌다.
“……!”
치이이이이-익
비에 젖은 땅이 부식되기 시작한 것이다.
엔딜 펠란이 미리 끌어올렸던 마기 덕분에 그의 주변에는 피해가 없었으나, 그외 지면에서는 온통 타들어가는 소리들만이 가득했다.
-이제 이 몸의 말뜻을 알았겠지? 이 몸의 마기로도 모자랄 수 있으니 보호막이나 전개하도록.
후우우웅-
강현은 휘광을 발동하여 몸을 둥글게 보호했다.
주황빛이 몸을 덮어가는 와중, 엔딜 펠란이 나직이 말해온다.
-주변의 식물들을 둘러봐라.
“식물들……?”
식물들을 본 강현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
황무지에 종종 자리한, 말라 비틀어진 시꺼먼 식물들.
그 식물들이 일제히 줄기를 쫙 늘어뜨리고 있었던 것이다.
산성비이건 뭐건 간에, 어떻게든 한 방울의 비라도 더 흡수하겠다는 듯한 움직임들이었다.
지면을 부식시킬 정도의 산성비를 흡수하겠다고 줄기를 늘린 결과는 뻔했다.
치이이이익!
산성비에 닿은 대부분의 식물들이 하나둘 스러져간다.
스러지는 걸 넘어, 형체도 없이 녹아버리기도 했다.
그러나.
‘살아남는 식물들도…… 있잖아?’
꿋꿋이 끝내 살아남은 식물들도 있었다.
비록 껍질이 녹아 벗겨지고, 가뜩이나 검었던 색이 더욱 바래지기는 했어도.
세찬 산성비에도 여전히 꼿꼿하게 자리를 지키는 식물들도 드물게 존재했다.
-일전에 말했듯이 마계는 철저한 강자존의 세상이다. 그리고 그건 식물들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지. 마계에 내리는 기상현상이라고는 지독한 산성을 띤 비와 눈밖에 없지만, 역설적으로 수분을 저장할 수 있는 기회도 산성비와 산성눈밖에 없다.
“…….”
-모든 식물들은 산성비라도 모으기 위해 안간힘을 쓰지. 물을 저장하다가 죽는 식물들은 가차없이 버려지고, 살아남은 식물들만이 계속해서 살아나간다.
강현은 엔딜 펠란이 무얼 말하려는 건지를 깨달았다.
‘발버둥치고 있다는 건가.’
마계에 존재하는 강자존의 법칙을 체화시켜주려는 것인 듯했다.
‘강자존이라…….’
그리고 그는 강자존이라는 말이 자신에게도 적용된다는 걸 알았다.
지금의 그 역시, 반드시 더 강해져야 했으니까.
더 강해져서, <초월>을 해야 했으니까.
“저한테 그럭저럭 어울리는 차원이네요.”
-크흐, 말귀를 알아먹은 모양이군. 그 말을 하고 싶었다.
엔딜 펠란과 이어진 짤막한 대화.
그 대화를 끝으로, 강현은 멈추지 않고 걸어 나갔다.
기필코 이 마계에서 <초월>을 이루고야 말겠다는 다짐과 함께.
쏴아아아아-
그렇게 강현은 세차게 내리는 산성비를 뚫으며 나아갔고, 그에 따라 마계에서의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 * *
턱-
질리도록 내리던 산성비가 그친 가운데, 구릿빛의 황무지 끝에 희미하게 건축물들이 보인다.
엔딜 펠란이 안내하는 곳을 향해 사흘 내내 걷기만 한 끝에 얻어낸 결과물이었다.
“후우, 드디어 왔나…… 힘들어 죽는 줄 알았네.”
강현이 앓는 소리를 냈다.
운 좋게 사흘 내내 폭우처럼 산성비가 쏟아진 덕에 그 어떤 악마나 마물도 만나지 않기는 했으나, 단점도 있었다.
마땅히 쉴 곳도 없어 제대로 된 휴식을 취하지도 못한 것이다.
‘그래도…….’
저기 수십 개의 건축물들이 보이는 걸로 봐서는 도시의 규모가 상당했다.
내부로 들어간다면 묵은 피로를 녹여낼 수 있을 터였다.
강현은 그렇게 생각했었다…….
-음? 웬 건축물이지? 원래 저 곳은 허허벌판이었거늘.
느닷없이 엔딜 펠란이 그 같은 말을 해오기 전까지는.
-흠…… 아무래도 이 몸이 활동하던 때와 길이 바뀐 걸로 보인다. 분명 드넓은 언덕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이 몸의 [권역]이 있던 곳까지 싸그리 하나의 도시가 되었군.
“예? 그 말은…….”
-여기서부터는 길을 찾아봐야 될 듯하다.
“…….”
뭐, 엔딜 펠란이 네비게이션도 아니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럼 일단 도시로 들어가야겠네.’
계획을 정리한 강현이 도시를 향해 발걸음을 박차려는데.
크르르르…….
저 멀리서부터 으르렁거리는 소리들이 들린다.
기감을 끌어올린 그는 이마에 큼직한 뿔이 달린 십여 마리의 늑대들을 볼 수 있었다.
-별 거 아닌 마물들이군.
“저게 마물입니까? 악마랑은 뭐가 다른 거죠?”
강현이 물었다.
그간 여러 번 마물과 악마에 대해 듣기는 했으나, 그 둘의 정확한 차이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던 것이다.
-지구로 비유를 하자면…… 악마는 인간이다.
“인간이요?”
-그래, 주역으로서 마계를 이끌어나가지.
“그럼 마물은…….”
-가끔 ‘격’이 높은 놈들은 말을 하기도 하나, 기본적으로는 지구의 맹수와 다를 게 없다고 보면 된다.
엔딜 펠란이 말을 덧붙였다.
-사흘 간의 산성비로 굶은 통에 네놈을 먹잇감으로 찍은 것 같군.
먹잇감이라.
자그마치 사흘 이상 굶었을 늑대들에게서 충분히 나올 수 있을 법한 반응이었다.
그런데.
“음?”
강현의 시선이 한 곳, 정확히는 늑대들의 맨 뒤를 향한다.
“어이……! 너는…… 라고!”
처음에는 몰랐는데, 자세히 보자 저 뒤에서 얄상한 목소리로 늑대들에게 지휘를 내리는 놈이 보였던 것이다.
이에 기감을 최대한 끌어올리자, 보다 선명하게 놈의 형체와 하는 말이 들려온다.
“왼쪽으로 가라고! 왼쪽! 그래야 저놈을 싸먹지! 너는 오른쪽으로 가고! 내가 지시하면 동시에 돌격하는 거다!”
강현은 소리를 지르는 악마를 가만히 뜯어보았다.
머리에 나 있는 두 개의 뿔, 등 뒤에 솟아나있는 한 쌍의 날개, 뒤에 달린 꼬리…….
유아처럼 작다는 것만 뺀다면 전형적인 ‘악마’의 모습이었다.
“오우! 쟤가 나 봤다! 얘들아, 빨리 진형 잡아라!”
자신에게 비웃음을 머금어보이는 악마를 본 강현의 눈이 서늘하게 빛났다.
‘이거…….’
마계는 잔인하리만치 강한 자만이 살아남는 차원.
그걸 바꾸어 말한다면, 강자일수록 무소불위의 힘을 지닐 수 있다는 소리였다.
그렇다면 자신이 하기에 따라, 저 꼬마 악마의 태도가 바뀔 수도 있지 않을까.
비웃음에서 경탄으로.
무시에서 두려움으로.
“자, 출발! 저놈을 뜯어먹어버려라!”
컹!
크르르……!
그 순간, 악마의 지시에 늑대들이 달려온다.
‘저 악마한테 길을 안내하라고 하면 되겠군.’
강현은 그걸 끝으로 생각을 정리했다.
[스킬, 광검-진(眞)을 발동합니다.]
그러고는 순백의 검을 빼 든 채, 늑대들에게 마주 달려나갔다.
늑대들을 모두 쓰러뜨리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크르르르…… 컹컹!
크르아아-!
늑대들이 많은 실전 경험에서 오는 위협적인 움직임을 보이며 달려들기는 했다.
하지만 그들은 어디까지나 하위종인 마물.
최상위종이 득실거리는 더 비욘드에서 연달아 정상에 올랐던 강현의 상대는 결코 되지 못했다.
별다른 전투를 거칠 필요도 없었다.
[스킬, 광명의 눈[Lv.2]을 발동합니다.]
그저 광명의 눈과.
[스킬, 섬광[Lv.8]을 발동합니다.]
섬광, 그리고.
[스킬, 광야참[Lv.2]을 발동합니다.]
[1/5의 마력을 소모합니다.]
한 번의 광야참만으로도 늑대들에게 ‘힘의 차이’를 느끼게 하기에는 충분했던 것이다.
끼이이잉…….
커, 컹…….
바닥에 널부러진 늑대들을 본 강현은 검을 늘어뜨렸다.
‘그래도 확실히 다르기는 하네.’
엔딜 펠란이 말했던 대로, <초월계>에서 겨루었던 이들과는 달랐다.
그들이 자신과 필적, 혹은 그 이상의 강한 힘을 지녔음에도 그 강함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다면.
이 늑대들은 동원할 수 있는 모든 힘을 쥐어짜내면서 덤볐다고나 할까.
‘나랑은 힘의 차이가 너무 명확해서 어떻게 할 여지도 없긴 했지만…….’
자신들과 조금 더 강한 타차원의 적을 만난다면, 충분히 이겨볼 만할 터였다.
[취할 수 있는 에테르가 감지되었습니다. 취하시겠습니까?]
[현재 취한 에테르의 양(5,650/8,000)]
늑대들을 쓰러뜨림에 따라 떠오르는 메시지.
강현은 손을 내뻗어 그대로 에테르를 흡수했다.
스아아아-
[현재 취한 에테르의 양(5,720/8,000)]
증대된 에테르를 본 강현이 눈을 깜빡였다.
“70이나 줬다고……? 왜 이렇게 많이 주는 거지?”
고작 늑대 몇 마리 쓰러뜨렸을 뿐인데, 그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에테르가 들어온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여지껏 이 정도 수준의 괴수들은 기껏해야 20, 잘하면 30을 줄 뿐이었다.
헌데 이 늑대들에게서는 자그마치 70에 달하는 에테르를 얻게 되다니.
그로서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마계의 특성이다.
“특성?”
-그래, 비록 균형의 섬이나 <초월계>처럼 숨을 쉬는 것만으로도 에테르를 얻지는 못하나, 그 대신 마물이나 악마들을 쓰러뜨림으로써 주는 에테르가 타차원에 비해 훨씬 많지.
“어쩐지 숨쉬는 걸로 에테르를 안 주는 게 이상하다 싶더라니…….”
이런 식으로 에테르를 더 줄 줄이야.
척박한 환경에, 강자가 모든 것을 쥐는 마계의 특성과 더없이 어울렸다.
-나름 상위 차원인 마계인데, 그보다 더 낮은 차원들보다도 에테르를 덜 주는 건 말이 안 되지 않느냐.
“그러네요.”
강현이 고개를 끄덕거렸을 때였다.
“이, 이…… 이럴 수가!”
저 멀리서 싸움을 지켜보던 꼬마 악마가 엉금엉금 기어온다.
참패를 당할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는지 넋이 반쯤 나간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내, 내 늑대들이! 내 늑대들이……!”
저 악마를 쓰러뜨린다면 더 많은 에테르를 얻을 수 있겠지만, 저 녀석에게는 길을 물어봐야 했다.
강현은 소리치는 악마에게 다가갔다.
“허억?! 으, 으으…… 져, 졌습니다……! 제발 목숨만은…….”
꼬마 악마가 벌벌 떨면서 정신없이 머리를 조아린다.
-저렇게 저자세로 나온다 해도 쓸데없이 친절하게 대해주거나 할 필요는 없다.
“……?”
-지금은 비굴한 모습을 보여도 기회만 된다면 언제든 네놈의 뒷통수를 칠 가능성이 다분하다.
“……아.”
-도망갈 수도 있고, 강한 악마가 나타나면 그쪽에 그대로 붙어버릴 수도 있다. 그럴 바에는 처음부터 공포와 두려움이라는 감정을 이끌어내어 속박하는 게 낫지.
엔딜 펠란의 말을 들은 강현은 자신이 지금 보여야 할 태도가 뭔지 깨달았다.
강압적인 모습.
저 악마에게는 그게 필요했다.
“이름.”
지나칠 정도로 짤막한 질문.
그러나 대답은 금방 돌아왔다.
“로, 로아크입니다!”
“신상은.”
“나, 나이는 서른 넷, 이 근방에서 외지인 약탈을 하면서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외지인을 약탈했다는 건…… 건달이라고 보면 될 듯했다.
강현은 눈앞의 로아크가 평범한 악마라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그가 생각을 정리하는 동안에도 로아크는 조아림을 멈추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저, 저는 그저 요즘 도시 상황도 안 좋고, 너무 배도 고파서…….”
과도할 정도의 반응에 눈살을 찌푸린 강현이었지만.
-참고로 악마끼리 싸움이 일어난다면 그 결과는 보통 정해져 있다. 승자가 패자를 잡아먹거나, 심심풀이로 죽이거나, 목에 줄을 묶어 노예처럼 끌고 다니지.
이어진 엔딜 펠란의 말을 듣고서는 납득했다.
자칫하다간 끔찍하게 죽을 수도 있는데, 저자세로 나오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
강현이 아무 말을 하지 않자, 로아크가 두 눈을 질끈 감는다.
“히, 히익!”
그의 앞에 선 강현이 무얼 요구할지 몰라 그러는 것일 터.
속으로는 아마 죽음을 각오하고 있을 수도 있겠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강현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쉴 곳.”
“으, 으아악! 제, 제발! 벌써 죽기는 싫단 말입…… 예?”
뜻밖의 말을 들었다는듯 슬며시 들어올려지는 로아크의 두 눈.
거기에 강현은 담담하게 반복해서 말할 뿐이었고.
“쉴 곳을 안내하라.”
“……예? 쉬, 쉴 곳 말입니까?”
그 말에, 풀죽어있던 로아크의 새까만 귀가 쫑긋 펴졌다.
* * *
잠시 후, 강현은 로아크의 안내를 받아 ‘나레프’라 불리는 도시 내부의 고급 여관으로 이동했다.
강현으로서는 생소한 마계의 시내를 가로질러야 했으나, 다행히 로아크가 도시 내부를 훤히 알고 있어 별 문제는 없었다.
강현을 힐끗거리며 쳐다보는 악마들이 있긴 했어도, 엔딜 펠란이 마기를 둘러 얼굴을 적절하게 가려주었다.
“무, 물 온도는 괜찮으십니까!”
욕실 내의 아궁이에 열심히 부채질을 하던 로아크가 물어온다.
“좋다. 나가보도록.”
“그, 그럼 저는 대기하고 있을 테니 언제든지 불러주십시오!”
로아크가 종종걸음으로 욕실을 벗어난다.
끼이익- 턱.
문이 닫히고 나서야 강현은 몸을 편히 뉘였다.
찰박-
“……이제야 살 거 같네.”
로아크가 그의 시야에서 사라졌음에도 강현은 별 걱정을 하지 않았다.
여관에 들어오면서 로아크의 전재산을 빼앗았기 때문이다.
그를 도와줄 때마다 조금씩 돌려주겠다고 했으니, 쉽사리 도망가지 못할 터였다.
“샤워기가 없긴 해도…… 목욕이 좋긴 좋네.”
뜨끈한 물에 몸을 뉘이니 피로가 싹 가시는 기분이었다.
강현은 잠시 목욕을 즐겼다.
“…….”
몸에 쌓여있었던 피곤함이 빠져나가고, 노곤함이 몰려든다.
지구와 균형의 탑에서 고생했던 걸 생각하면 닷새 째 제대로 쉬지 못한 그였다.
그간 달려온 걸 고려한다면 이쯤에서 하루 쉬어주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그건 그렇고 마계에서 목욕을 할 수가 있다니. 마계도 사람, 아니지. 악마 사는 곳이기는 하구나.’
도시와 여관을 보고, 목욕까지 하고 있으려니 새삼 실감이 됐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마계 또한 여러 종족들이 어우러져 살아가는 차원이 맞다는 걸.
-……현! 몸은…… 가!
내려놓은 옷가지 사이에서 중년 남자의 목소리가 새어나온 건 그때였다.
그리고 그에게 이런 식의 연락을 할 수 있는 중년 남자는 한 명 뿐이었다.
“……괜찮다니까 또 연락을 하네.”
강현의 미간이 살짝 구겨진다.
여기까지 오는 지난 사흘 중 첫 번째 날에, 그는 세르반테와 레이센 란에게 연락을 건넸었다.
자신은 잘 있다는 안부 인사와 더불어, 더 비욘드를 그만두게 되었다는 소식을 전한 것이다.
개인적인 친분을 제외하더라도 같은 팀으로 미션에 참가하고 있었으니 마땅히 전해야 할 이야기였다.
그런데 세르반테와 레이센 란은 뭐가 걱정이 됐는지, 그 이후로 하루에 한 번씩 전화를 해오는 중이었다.
강현은 연락구를 들어 마력을 불어넣었다.
“이강현입니다.”
-으하하! 잘 지내나 보군! 오늘은 뭘 했나?!
-괜찮은 거 맞죠?
-어허! 내가 말하고 있는데 왜 끼어드나!
-이 아저씨가! 아까는 처음부터 같이 말하자고 했잖아요!
그러나 미간이 구겨졌던 것도 잠시.
둘의 투닥거림을 듣고 있으려니, 강현의 구겨졌던 미간이 서서히 펴진다.
그들의 말 속에 숨겨진, 자신을 향한 한 줄기 걱정을 느껴서였다.
생사를 함께 했던 동료가 걱정해주는 것.
썩 나쁘지 않은, 아니, 더할 나위 없이 괜찮은 기분이었다.
비록 소속 차원과 현재 있는 차원이 다르다고는 해도, 그들의 마음만은 이어져있다는 걸 알게 되었으니까.
그리고 서로의 마음이 이어져있다는 것.
강현의 입가에 미소를 피어오르게 하기에는 그거면 충분했다.
“다들 그만하고 제 말이나 들으시죠. 제가 이번에 마계의 어떤 도시로 넘어왔는데 말입니다…….”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은 강현이 대화에 합류했고, 그들의 온기 가득한 대화는 한참이나 이어졌다.
* * *
다음 날.
-창고의 근처에 접근하면 이 몸이 느낄 수 있을 거다. 잘 돌아다녀보도록.
그 말을 들은 강현은 로아크의 안내를 받아 나레프 곳곳을 돌아다녔다.
자신의 돈이 들어간 강현의 품을 힐끔거리며 쳐다보기는 했으나, 로아크는 순순히 나레프의 중요한 곳들을 안내해주었다.
“여기가 가장 세력이 큰 악마 백작, 라크온 님의 거처입니다…….”
“이곳은 라크온 님의 수족, 카르케 님의 거처입니다…….”
…….
열심히 설명을 해가는 로아크.
허나 강현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나름 바쁘게 돌아다니고 있기는 한데, 어딜 가도 엔딜 펠란의 기감이 반응하지 않아서였다.
‘여기도 없군.’
그렇게 허탕이 오후 늦게까지 계속되자, 강현의 머릿속에 방법을 바꿔야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이렇게 무작정 찾는 걸로는 안 되나? 어떻게 해야 되지?’
그때였다.
쿠구구구-
느닷없이 저 멀리서부터 상당한 양의 마기가 넘실거린 것은.
위협적이고 사이한 기운이 물씬 느껴지는 마기였다.
“이건……?”
“히, 히익!”
어리둥절한 강현과 달리 기겁하는 로아크.
로아크가 뭔가 알고 있다고 직감한 강현의 눈이 빛났다.
“이봐, 지금 이 마기는 뭐지?”
“저, 저게 제가 요즘 도시 상황이 안 좋다고 한 이유입니다! 높으신 분들이 충돌을 자주 하고 계셔서……!”
“흠…….”
높으신 분들이라.
어차피 번번이 허탕만 치는데, 그곳으로 가보는 것도 괜찮을 듯싶었다.
“안내해.”
“그, 그건……!”
가기 싫다는듯, 쪼그려 앉아 머리를 싸맨 로아크가 소리를 쳐댔지만.
“돈, 버릴까?”
“으, 으으……!”
강현의 협박은 강력했다.
“저, 저는 휘말려도 모릅니다……!”
“걱정 마, 뭔 일 일어나면 지켜주기는 할 테니까.”
강현은 로아크의 안내를 받아 도시 중앙의 광장으로 이동했고, 볼 수 있었다.
저 앞에서 으르렁거리고 있는, 충돌 직전의 악마들을.
상당한 마기가 뿜어져나오는 것이, 한 눈에 고위 악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어딜 쓸데없는 짓을…… 이 땅에는…… 더이상 지배자가…….”
“크흐흐, 어리석은 선택을…… 내가 그 선택을 친히…….”
왼편에 자리한 중년의 악마와 오른편에 위치한 검은 로브를 뒤집어쓴 악마의 언쟁.
‘잘 들리지는 않아도…… 여기서라도 잠깐 지켜볼까.’
기감을 끌어올리면 그럭저럭 들릴 듯했다.
강현은 상황도 파악할 겸, 저들의 대화를 지켜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당장 다가가라. 저들의 대화를 들어야 한다.
‘예?’
-왼쪽에 있는 악마는 이 몸의 옛 부하다. 더욱이, 저 녀석에게서 비밀 창고의 흔적도 느껴지고.
가만히 있던 엔딜 펠란이, 왼편의 악마를 알아보기 전까지는.
-엄밀히 말해서는, 이 몸만이 알아볼 수 있는 특정 마기 패턴이 저 녀석에게서 미세하게 느껴지는 거지만.
“……!”
강현은 눈을 부릅떴다.
왼편의 악마에게서 비밀 창고의 흔적이 느껴진다는 것도 놀라웠지만, 오롯이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다.
‘옛…… 부하라고요?’
그의 옛 부하가 저기 있다니.
엔딜 펠란이 봉인된 지 무려 수천 년이 지났다는 걸 감안한다면, 그야말로 믿기 힘든 이야기였다.
-그래, 이 몸을 수행하는 네 명의 악마 중 하나였지.
‘아니, 그렇다고 해도 아직까지 살아있다는 게-’
-아, 네놈에게 말한 적이 없으니 모를 만도 하군. 대부분의 악마는 수명이 아주 길다.
“……몇천 년이나 살 정도로 말입니까?”
-외상이나 병에 걸리지만 않는다면 일만 년까지는 살 거다. 정확히는, 일정 수준의 ‘격’을 획득한 악마들에게 한정된 거긴 하다만.
터무니없는 말에 강현의 입이 쩍 벌어진다.
하지만 엔딜 펠란은 뭘 그런 걸로 놀라냐는 반응을 보일 뿐이었다.
-<초월자>들도 만났으면서 쓸데없는 일에 놀라는군. 아무튼, 이 몸의 기감에 느껴지는 저 녀석의 수준이라면 지금까지 살아있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저 왼쪽의 악마가 그렇게나 강하단 말입니까?”
-기감을 끌어올린다면 느낄 수 있을 거다. 저 녀석이 지금의 네놈보다 월등히 강하다는 걸.
그 말을 따라 기감을 끌어올린 강현은 알 수 있었다.
고오오오-
폭풍전야처럼 일대를 은은하게 뒤덮고 있는, 왼쪽의 악마가 뿜어내는 압도적인 마기를.
이 정도의 마기를 자신이 미처 알아채지 못하다니?
강현이 놀란 얼굴을 해보이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마기를 은밀히 깔아둔 건가?’
그게 아니라면 기감을 끌어올리기 전에는 딱히 느끼지 못했던 게 설명이 되질 않았다.
다만.
“허억!”
“피, 피해!”
다른 악마들은 광장 주변을 얼씬도 하지 않는 걸로 보아, 그 마기를 본능적으로 느낀 것 같았다.
-그뿐만이 아니다. 이곳을 친숙해하는 이 몸과는 다르게, 네놈에게는 아직 마기가 생소하다는 것도 고려해야 한다.
‘그건 그러네요.’
그 말처럼, 마기는 아직 강현에게 익숙하지 않다.
그렇다면 마계에서만큼은 엔딜 펠란의 기감이 그의 것보다 더 정확하다고 봐도 될 듯싶었다.
-……하나둘 정도는 남아 있을 수도 있다고 여겼는데, 설마 저 띨빵했던 녀석을 만나게 될 줄이야.
미묘한 말투로 중얼거리는 엔딜 펠란.
기억 속의 저 악마를 회상하는 모양이었다.
‘어쨌거나.’
강현은 언쟁을 벌이는 악마들을 보며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엔딜 펠란이 왼편의 악마를 알아본 것도 모자라 그에게서 비밀 창고의 흔적까지 느껴진다면, 더 가까이 다가갈 필요가 있을 듯했다.
비밀 창고에 대한 걸 알게 된다면 더할 나위 없겠으나, 꼭 그게 아니더라도 쓸 만한 정보를 얻게 될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따라와라. 기척은 최대한 죽이고.”
“아, 알겠습니다……!”
강현은 로아크와 함께 악마들에게 천천히 접근했다.
가까이 다가가자 악마들의 목소리가 더욱 선명하게 들려온다.
“크크크…… 라크온, 정녕 이렇게 나올 건가? 모두를 위한 길을 제시했건만, 굴러들어온 복을 걷어차려 드는구나!”
로브를 뒤집어쓴 악마가 한 발짝 앞으로 나서며 말한다.
‘라크온?’
강현이 고개를 갸웃했다.
왠지 낯이 익은 이름이었…….
‘아.’
그는 라크온이라는 이름을 어디서 들었는지 기억해냈다.
조금 전 이 도시에서 가장 세력이 큰 악마의 거처를 로아크가 소개해주었는데, 그 이름이 라크온이었다.
‘그게 엔딜 펠란의 부하였다니…….’
아직도 어안이 벙벙해지는 이야기였다.
그때, 라크온이라 불린 왼쪽의 악마가 마주 나선다.
“그건 내가 할 소리다, 사나크. 이곳 제33 마계는 더없이 안정되어 있다. 괜한 혼란을 만들 필요는 없다는 소리다.”
“크큭, 그건 네가 몰라서 하는 소리다. ‘그분’의 은혜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우리에게 남는 건 파멸뿐이지.”
대화를 듣는 강현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다.
은혜니 파멸이니 하는 단어가 나오는 걸로 봐서는 상당히 심각한 내용인 듯했는데, 그로서는 알아듣기 힘든 내용의 대화였던 것이다.
‘뭔 말인지 압니까?’
-전혀 모르겠다만.
‘…….’
딱 잘라 대답하는 엔딜 펠란.
‘더 들어봐야겠는데…….’
보다 자세한 대화를 듣고 싶은 마음에 강현이 한 발짝 나아간 순간이었다.
“됐고, 꺼져라. 한 번만 더 찾아온다면 가만두지 않을 테니.”
라크온이 싸늘한 축객령을 내리더니.
쿠콰콰콰콰-
돌연 그가 깔아둔 마기에서부터, 어마어마한 기세가 휘몰아치기 시작한다.
“히, 히익!”
쪼그려 앉은 로아크가 머리를 감싸 쥔다.
강현은 휘광을 발동하여 마기의 폭풍으로부터 자신과 로아크를 보호했다.
워낙 마기의 폭풍이 강한 탓에, 저들이 휘광을 알아차릴 가능성은 없다고 봐도 무방할 터였다.
‘장난 아니군…….’
휘광이 막아주고 있는데도 피부가 떨려올 정도로 위압적인 마기였다.
사나크에게도 위협적인 건 마찬가지였는지.
“협상을 제발로 결렬시키다니 이런 어리석은…… 네놈은 이 선택을 후회하지 말라!”
그 같은 말을 짓씹듯 내뱉음과 함께, 스르르 사라진다.
마치 땅으로 꺼지라도 한듯 깔끔한 도망이었다.
사나크가 사라짐에 따라 라크온도 마기를 거두어들인다.
고오오오…….
모든 마기가 가라앉으면서, 정적이 감도는 광장.
그 속에서, 라크온은 얼굴을 일그러뜨린 채 우두커니 서 있더니.
이내 어딘가로 발걸음을 옮겼다.
“어이, 쫓아가자.”
“으, 으…….”
“안 움직여? 돈 버릴까?”
“아, 아닙니다! 바로 움직이겠습니다!”
그런 라크온의 뒤를, 울상을 꼬마 악마와 강현이 빠르게 뒤쫓았다.
* * *
라크온은 광장을 벗어나, 근처 골목과 골목 사이의 꾸불꾸불한 길로 나아갔다.
강현은 그런 그를 한참 떨어져서, 즉 철저하게 기감에만 의존하면서 따라갔다.
-라크온은 아직 <초월>에 이르지는 못했다. 그러나 네놈보다는 명백히 강한 듯하니, 안전하게 따라가고 싶다면 멀리 떨어져서 기감을 따라가는 게 좋을 거다.
이 같은 엔딜 펠란의 충고 때문이었다.
눈과 귀가 아닌 라크온의 기감만을 따라간다는 것에 처음에는 적응이 잘 되지 않았으나, 시간이 지나자 서서히 익숙해졌다.
스윽.
저 멀리 라크온이 또다른 골목에 들어가는 게 보인다.
‘거처로는 안 가는 건가?’
갈수록 아까 로아크가 소개해 주었던 라크온의 거처와 정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었다.
‘나쁘지는 않아.’
그가 그렇게 여기는 이유는 간단했다.
그도 그럴 게…….
-조금 전 들렀던 라크온의 거처에서는 창고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지 않느냐. 지금 라크온이 가는 곳에서 그 흔적을 발견할 수도 있을 거다.
‘저도 비슷한 생각을 하던 중이었습니다.’
강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구석진 곳으로만 들어가는 걸로 봐서는, 비밀스러운 장소로 향하는 듯했던 것이다.
‘없어도 뭐…… 계속 따라다니다 보면 언젠가는 흔적을 발견할 수 있겠지.’
엔딜 펠란이 라크온과 그에게서 비밀 창고의 흔적을 찾아낸 시점에서 강현과 엔딜 펠란의 계획은 비교적 간단해졌다.
라크온을 쫓아다니면서 어떻게든 비밀 창고의 위치를 찾고.
추후 라크온이 자리를 비운 틈을 타, 그곳에 몰래 진입하는 것.
‘처음에는 접선을 해볼까도 생각해봤지만.’
그건 엔딜 펠란이 보류했다.
-아무리 이 몸이 라크온을 알아봤다고는 해도, 녀석이 이 몸의 휘하에 있던 건 수천 년 전이다. 그 긴 세월 동안 녀석이 뭘 겪었는지, 어떻게 변했는지, 현재는 어떤 상황에 처해있는지 이 몸은 모른다. 직접 만나는 건 가급적 최후의 보루로 남겨두어야 한다는 소리다.
충분히 수긍이 갈 만한 이야기였다.
다만 걸리는 게 없는 건 아니었다.
‘라크온한테 흔적이 묻어있는 게, 설마 라크온이 직접 들어가서 그런 건 아니겠죠?’
-직접 들어간 건 아닐 거다. 비밀 창고 근처를 들르거나 해서 쌓인 거겠지.
엔딜 펠란이 핀잔을 준다.
-이 몸만이 아는 마기 패턴이 있어야 들어갈 수 있다고 이미 말하지 않았더냐? 설마 이 몸을 의심하는 건 아니겠지?
‘아뇨, 그…… 럴 리가요. 혹시나 해서 물어본 거죠.’
사실 약간 걱정이 되기는 했다.
이미 라크온이 엔딜 펠란의 비밀 창고를 싸그리 털어버렸을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이렇게까지 고생했는데 그냥 허탕만 친 거라면…….’
허탈함과 분노, 짜증이 한꺼번이 치밀어오를 것만 같았다.
강현은 고개를 흔들어 끔찍한 상상을 털어냈다.
‘엔딜 펠란이 저렇게 확신에 차 있는 걸로 봐서는 믿을 만하겠지.’
이런 개고생을 한다고 해도 그만큼의 수확, 에테르와 아티팩트들을 획득할 수만 있다면 그로서는 만족이었다.
그때였다.
슥-
저 앞에 있던 라크온의 기척이 오른쪽으로 꺾인 어느 골목을 지나치자마자 사라진다.
‘어?’
예고도 없이 벌어진 일.
다급해진 강현은 발걸음을 재촉하여 라크온이 사라진 골목으로 이동했다.
골목을 지난 강현은 볼 수 있었다.
‘저건……?’
툭 건드리면 우르르 무너질 것만 같은, 다 쓰러져가는 폐가를.
주변을 둘러보아도 저 폐가밖에 없는 것이, 아무래도 라크온은 저 안으로 들어간 듯했다.
‘어떻습니까? 느껴집니까?’
-느껴지지는 않지만…… 저 폐가, 보통 폐가가 아니군.
‘예? 그게 무슨 말입니까?’
-인위적인 마기 때문에 탐색할 수가 없다. 다른 마기의 정찰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것처럼 꽉 막혀있군.
‘그렇다면 저 폐가가 혹시…….’
-창고와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
‘오, 그러면…….’
그 말을 듣고 혹한 강현이었지만, 그것도 잠시.
순간적으로 받은 싸한 느낌에 그의 얼굴이 굳어졌다.
“…….”
최근 수십 번의 실전 경험을 거치며 단련된 그의 직감이 말하고 있었다.
저곳은 뭔가 수상하다고.
일단 물러나야 한다고.
‘뭔가 이상하네요. 일단은 물러났다가…….’
곧장 로아크의 목덜미를 들어올린 강현은 그대로 물러나려 했다.
허나 그는 이내 멈춰서야만 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턱.
“네놈은 뭐지?”
강현이 여지껏 뒤쫓던 악마, 라크온이 그의 뒤를 잡고 있었으니까.
* * *
“어…….”
“저 ‘창고’가 아니었더라면 하마터면 쥐새끼가 따라오는 줄도 모를 뻔했군.”
라크온이 으르렁거린다.
잔뜩 구겨져 있는 그의 푸른 얼굴이 현재 그의 안 좋은 심정을 대변해 주고 있었다.
“묻지 않느냐, 네놈은 누구고 나를 쫓은 목적은…… 잠깐.”
말을 멈춘 라크온이 손가락을 들어올린다.
그러자 손가락에서 돌풍이 분출되더니, 강현의 얼굴을 가리던 마기를 싹 날려버린다.
강현의 맨얼굴을 본 라크온의 표정이 일변한다.
“이제 보니…… 그냥 쥐새끼도 아니었군. 인간이 감히 마계로 기어들어오다니, 간이 어지간히 배 밖으로 나왔구나. 옆의 악마는 인질인가? 당장 풀어줘라.”
인질은 아니었으나, 강현은 순순히 로아크를 풀어주었다.
“으, 으아아악!”
풀려난 로아크는 발이 빠져라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라크온의 눈은 강현에게만 고정되어 있었다.
“가뜩이나 기분도 더러웠는데 마침 잘됐다.”
쿠구구구구-
“네놈을 갈가리 찢어, 내 분을 풀도록 하지.”
쿠콰콰콰콰-
말이 끝남과 동시에 라크온에게서 뿜어진 마기가 강현의 전신을 압박해온다.
‘빌어먹을.’
웬만하면 싸우고 싶지 않았지만, 싸움 말고는 답이 없어 보였다.
‘후우…… 그래도 엔딜 펠란이 마기를 보태준다면 빠져나가는 건 시도해 볼 만해.’
강현은 퇴로를 물색하며 검을 꺼내 들었다.
그 순간이었다.
고오오오-
수수께끼의 검에서 마기의 구름이 뭉게뭉게 피어오르더니.
츠츠츠츠…….
빠르게 어떤 형상을 갖추어나가는 게 아닌가.
그로서는 처음 접하는 특이한 문양이었다.
문양을 본 강현은 기겁했다.
‘미친!’
문양을 만들어내는 엔딜 펠란이 상당한 양의 마기를 소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다가는 도움 받을 마기도 없어지겠다는 예감에 강현이 급히 물었다.
‘지금 뭐 하는 겁니까! 왜 마기를…….’
그런데 라크온의 반응이 이상했다.
“이, 이럴 수가…….”
문양을 보고는 흠칫 놀라더니.
강현이 전혀 생각지도 못한 행동을 해온 것이다.
털썩.
한쪽 무릎을 꿇은 라크온이,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아…… 왕이시여…….”
느닷없이 예를 취해오는 라크온.
심지어 그냥 예를 취한 것도 아니었다.
“…….”
마치 세상에서 혼자 정지해 있기라도 한 것처럼, 조금의 움직임도 보이지 않고 있다.
강현이 당혹스러운 얼굴을 해보인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직전까지 자신을 죽이겠다며 눈을 부라리던 악마가 이런 태도변화를 보일 줄은 꿈에도 생각 못 했기 때문이다.
‘엔딜 펠란이 처음부터 이걸 노리지는 않았을 거 같긴 한데…….’
당혹스러워하던 그의 심정은 한껏 거만해진 엔딜 펠란의 목소리가 들려온 뒤에야 한결 나아졌다.
-크흐흐흐, 마지막 도박수를 던져본 것이었는데, 보기 좋게 통했군.
역시, 완전히 의도한 건 아닌 걸로 보였다.
‘도박수라면…… 그냥 한 번 던져본 거였습니까? 아니면 라크온이 이런 반응을 보일 줄 알았는지-’
-알았을 리가 있겠느냐.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네놈이 죽겠다 싶어 도박을 해본 거지.
‘하긴.’
강현은 싸늘하게 기색을 내보이던 라크온을 떠올렸다.
엔딜 펠란의 도박이 성공했기에 망정이지, 기껏 만든 문양을 라크온이 무시해버렸다면?
분노한 라크온에 의해, 강현은 그대로 뭉개졌을지도 모른다.
‘일이 잘 풀려서 천만다행이군.’
더이상 라크온에게 목숨을 위협받을 일은 없을 듯했다.
강현은 시선을 아래로 내려보았다.
여전히 미동도 않는 라크온이 눈에 들어온다.
‘저 문양이 뭐길래 라크온이 저러고 있는 겁니까?’
-방금의 문양은 이 몸이 다스리던 때의 제33 마계를 상징하던 문양이다. 이 몸의 수하였던 저 녀석이 예를 취한 것도 무리는 아니라고 할 수 있지.’
강현의 눈이 재빨리 옆의 시꺼먼 문양으로 향했다.
문양에는 몰아치는 폭풍과 타오르는 화염을 각각 한 손에 쥔, 한 악마의 뒷모습이 새겨져있었다.
‘확실히 뭔가 있어보이기는 했지만, 그런 뜻의 문양이었다니.’
엔딜 펠란이 지배자로서 군림하던 지난날을 상징하는 문양이었으니, 충분히 효과가 있을 만했다.
다만, 그렇다고 모든 의문이 해소된 건 아니었다.
‘저 문양이 그렇게 상징적인 거였습니까? 저거 하나만을 보고 무릎을 꿇을 정도로?’
그가 물었다.
단순히 문양만 보고 예를 취해왔다기에는 석연치 않은 구석이 존재했던 것이다.
-문양도 문양이다만, 아마 저 문양이 만들어지는 과정 속에서 느껴지는 익숙한 이 몸의 마기 때문도 있을 거다.
‘그 말은…… 당신을 알아봤다는 겁니까?’
-그렇다고 볼 수 있지. 그나저나, 네놈의 에테르를 잠시 빌릴 수 있겠나?
‘예?’
-옛 수하를 저렇게 내버려둘 수는 없지 않느냐. 잠깐 이 몸의 옛 모습을 꺼내도록 하지.
“……?”
저의를 알 수 없는 엔딜 펠란의 말.
이내 강현은 그 뜻을 알게 되었다.
스아아아…….
돌연, 신체 내부의 에테르가 수수께끼의 검으로 흘러들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얼마나 빨아가려는 거야?’
강현의 미간이 살짝 구겨졌다.
이 기세대로라면 거의 절반 이상의 에테르가 빠져나갈 것 같아서였다.
허나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수수께끼의 검은 강현의 몸에서부터 더 많은 에테르를 빨아들여갔고.
그 끝에, 다시 한 번 칠흑의 마기를 분출해냈다.
쿠드드드득-
마기가 만들어내는 형상을 본 강현이 눈을 크게 떴다.
‘저건…….’
그도 그럴 게, 나타난 형상은 엔딜 펠란이 만들어낸 문양에 새겨져있던 악마와 흡사한 생김새를 가지고 있어서였다.
‘아까 그 문양에 그려져있던 악마는 역시 엔딜 펠란을 본뜬 거였나.’
자세히 보니, 예전 ‘태고의 거인’이 보여주었던 엔딜 펠란의 체구와 비슷해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그가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에도 형상은 빠르게 모습을 갖추어나갔다.
탄탄한 근육질의 구릿빛 신체, 이마 위로 곧게 뻗어있는 두 개의 뿔, 등 뒤에 자리한 거대한 한 쌍의 날개…….
비록 이목구비가 흐릿하긴 했어도, 대략적인 형체만으로도 위압감이 뿜어지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잠시 후, 또렷해진 엔딜 펠란의 형상이 나직이 그 입을 열었다.
-라크온…….
강현의 머릿속에서만 들려오던 엔딜 펠란의 목소리.
한때 제33 마계를 다스리던 <초월자>의 음성이, 그의 옛 [권역]에 울려퍼지고 있었다.
목소리를 들은 라크온의 반응은 간단했다.
스윽.
서서히, 조심스럽게 고개를 든 것이다.
“엔딜 아르무트 펠란, 위대한 제33 마계의 마지막 왕이시여……!”
다시금, 제 왕의 이름을 입에 담으면서.
* * *
경건함과 경악, 떨림이 전해져오는 라우크의 말에, 강현 또한 절로 진중해졌다.
수천 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주군을 마주한 라우크의 벅찬 감정이 생생히 느껴져서였다.
그 감정이 오래가는 일은 없었다.
-이 몸은 더이상 네 왕이 아니다. 쓸데없는 사탕발림은 집어치우도록.
다름 아닌 당사자인 엔딜 펠란에 의해서였다.
귀찮은 예는 필요없다는 엔딜 펠란의 으름장에 라크온은 급히 말을 이어나갔다.
“하오나, 왕이시여, 한때 신하였던 예를-”
-집어치우라고 했다.
“아, 알겠습니다…….”
그 대화를 듣는 강현은 도무지 적응이 되질 않았다.
조금 전까지 자신을 죽이려고 하던 라크온이 순식간에 고분고분해진 걸 보니 위화감이 몰려온달까.
<초월자>였던 시절 엔딜 펠란이 어떤 지배자였는지 대략 짐작이 가능했다.
‘몇천 년 전 수하가 이렇게 쩔쩔매는 것만 봐도 감이 오네.’
필시 압도적인 카리스마를 바탕으로 이 마계를 이끌어나갔으리라.
-너도 대충 눈치는 챘겠으나, 지금 이 몸은 봉인되어 있는 신세다.
난데없이 폭탄 선언을 내뱉는 엔딜 펠란.
“봉인…… 말입니까?”
라크온의 눈이 부릅 떠진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 간단히 설명해주도록 하지…….
엔딜 펠란이 천천히 말을 시작했다.
자신은 천마대전을 겪으면서 검에 봉인됐고, 검에 갇힌 상태로 무려 수천 년을 지내왔으며, 강현의 <초월>까지 도와준다면 추후 봉인을 풀어주기로 다른 <초월자>와 계약을 했노라고.
-……그렇게 된 거다.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 없던 이유가 설마 봉인 때문이었다니…… 왕이시여…… 어찌 억겁의 시간을 헤매고 계셨나이까…….”
그의 주군이 겪었을 고통을 생각하는지, 라크온의 얼굴이 악귀처럼 일그러진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체념한듯 크게 한숨을 내쉰다.
“후우, 그 오랜 시간을 함께하지 못했던 저로서는 화를 낼 자격도 없겠지요…… 그저 송구할 뿐입니다.”
-흐흐, 이 몸이 봉인됐다는 걸 알았으면, 도와줄 힘은 있고?
엔딜 펠란이 실소하자, 라크온이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왕께서 사라지신 이후로 삼천 년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없던 힘이 생길 때도 됐지요.”
-……!
“……!”
엔딜 펠란과 강현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삼천 년……? 이 몸이 사라진 후로 시간이 삼천 년이나 흘렀다는 말이냐?
엔딜 펠란이 얼마나 봉인됐었는지를 알게 되어서였다.
라크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봉인 이후로 시간의 흐름을 제대로 가늠하지 못하셨을 테니, 모르실 만도 하군요…… 왕께서 사라지신지 대략 삼천 년이 지났습니다.”
-…….
“그렇지만 제게 한 번 왕은 영원한 왕. 삼천 년의 세월이 지나도록, 단 하루도 왕의 안위를 생각하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라크온이 담담하게 말을 계속했다.
“왕께서 실종됨으로써 천마대전이 흐지부지된 이후, 처음 천 년 동안에는 저를 포함한 왕의 수족 대부분은 [권역]에 모여있었습니다. 허나 또 한 번 천 년이 지난 뒤에는 모두 뿔뿔이 흩어져 마계를 배회하게 되었고, 마지막 천 년이 흐르는 동안 저는 홀로 이곳으로 돌아와 이 도시, 나레프를 일구어냈습니다.”
-이 도시를 말하는 거라면, 잘 봤다. 이 몸이 다스리던 때에는 찾아보기 힘들었던 규모의 도시더군.”
“왕께서 좋게 봐주신다면 감사할 따름입니다.”
쓰게 웃은 라크온이 한 마디를 덧붙인다.
“비록 나레프의 성장에만 집중한 탓에 많은 ‘격’을 쌓지는 못했지만, 제게 있어서는 그 무엇보다 가치있는 일이었지요.”
-하긴, 너는 예전부터 직접적으로 싸우는 것보다는 뒤에서 조율하는 걸 좋아했었지. 그럴 수도 있겠군.
과거를 떠올리는듯, 회한에 찬 엔딜 펠란의 목소리가 골목을 울린다.
‘이거…… 이러다가 길바닥에서 옛날 얘기만 주구장창하는 거 아니야?’
강현은 이대로 가다가는 둘의 회상만 한 세월 들을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혔다.
엔딜 펠란의 비밀 창고가 있을 거로 추정되는 폐가가 코앞에 있다는 걸 감안한다면, 이쯤에서 대화의 흐름을 바로잡아야할 필요가 있었다.
스윽.
강현은 수수께끼의 검에 약간의 에테르를 실어보냈다.
양이 많지는 않지만, 끝을 날카롭게 한 에테르였다.
-음?
에테르를 느낀 엔딜 펠란의 형상이 강현을 쳐다보다…… 가.
-아.
이곳까지 온 목적을 기억해냈는지, 대화의 방향을 돌린다.
-주어진 시간이 없는 것도 아니니, 못다한 말은 나중에 해도 될 거다. 그건 그렇고, 궁금한 게 있다.
“혹, 궁금한 게 있으시다면 얼마든지 물어주시길.”
-네가 들어가려던 저 폐가. 저곳이 뭐하는 곳인지 궁금하군. 이 몸과 이 몸의 계약자가 들어갈 수 있는지도 알고 싶고.
“역시, 저 폐가가 목적이셨군요.”
라크온의 시선이 폐가로 향한다.
“일반 악마들에게는 비밀 장소로 지정된 구역이나…… 왕께서는 충분히 들어가실 권리가 있습니다. 설명은 이동하면서 하도록 하고, 일단 진입하겠습니다.”
말이 끝남과 함께 라크온이 폐가로 걸어나갔고, 수수께끼의 검을 쥔 강현도 그를 뒤따랐다.
“제가 폐가를 가던 이유는, 아까 만난 사나크 때문입니다.”
-아까 그 로브를 뒤집어쓴 놈을 말하는 건가?
“맞습니다.”
라크온이 말했다.
“왕께서 사라지신 이후, 삼천 년 동안 이 마계에는 <초월자>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헌데 약 십여 년 전, 사나크라는 악마가 나타나 마계를 노리는 <초월자>들이 있다며 그들로부터 이곳을 지켜줄 타차원 출신 지배자의 필요성을 역설하더군요. 그들을 위한 게이트를 열어줄 고위 악마들을 포섭하기 시작한 겁니다. 아까 보신 게 세 번째 제안이었죠.”
-…….
“다만 이미 상당수 근처 도시의 설득이 끝났기에, 저로서는 다소 귀찮아진 상황이었습니다. 가뜩이나 계속 거절한다면 한 달 앞으로 다가온 ‘발푸르기스의 밤’에 난리를 피우겠다고까지 협박해 온 통에…….”
“발푸르기스의 밤?”
생소한 단어에 강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백 년에 한 번, 그믐달이 뜨는 밤, 제33 마계의 중심부에서는 아주 정순한 마기의 폭포가 터져나온다. 그 마기를 취하고자 이 차원의 모든 악마와 마물들이 몰려드는 날이지. 이 몸이 다스리던 때에도 있던 축제였는데, 아직도 있나보군.
“그렇습니다. 게다가 마계의 폭포가 터지는 곳은 나레프 근처이기에, 수많은 악마와 마물들이 도시로 몰려들죠. 폐가로 가던 건 놈들의 협박을 대비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말하는 걸 들어보니, 이 제33 마계만의 행사라고 봐도 무방해보였다.
‘잠깐, 그 발푸르기스의 밤이라는 게 이곳 근방에서 일어나는데 난리를 피우겠다고 한 거면…… 거의 테러를 일으키겠답시고 협박하는 거 아니야?’
테러.
예상보다 심각한 사안이었다.
그와 동시에 또다른 궁금증이 생겨났다.
“그런데 그걸 어떻게 대비한다는 겁니까?”
라크온은 지금 테러를 대비하고자 폐가로 가고 있다고 했는데, 그게 무슨 뜻인지에 대한 궁금증이었다.
그 의문은 오래지 않아 해소되었다.
천천히 폐가의 문을 열면서, 라크온이 말을 꺼낸 것이다.
“왕이시여, 고할 게 있나이다.”
-뭐냐.
“사실, 나레프는 이 폐가 아래에 있는 걸 위해 지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
“옛 터전을 훼손하지 않고자, 그 위에 통째로 도시를 올린 것이니 말입니다.”
-그 말은……!
경악하는 엔딜 펠란.
강현도 라크온의 말뜻을 깨닫고는 안색이 급변했다.
“지금 보실 것들은 왕께도 익숙하실 겁니다.”
그렇게 말한 라크온은 그들을 폐가 밑 계단의 지하로 이끌었고.
끼이익-
또다른 문을 열었다.
“왕이시여, 이렇게밖에 옛 영광의 흔적을 보여드리지 못하는 절 용서하소서.”
그리고 다음 순간, 그들의 눈앞에 엔딜 펠란이 다스리던 시절의 [권역]이 펼쳐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