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더 비욘드
균형의 탑이 미친듯이 꿀렁이더니, 시꺼먼 ‘무언가’를 끊임없이 쏟아내기 시작한 것이다.
쿠구구구-
입구 부근에서 쏟아지는 새까만 것들이 어찌나 많은지, 멀리서 봤음에도 무언가 이상이 생겼다는 걸 확연히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자세히는 안 보이네.’
그런 생각을 한 순간이었다.
[가까이…… 가주지…… 잘…… 봐라…… 정상적으로…… 경연이…… 진행됐다면…… 못 봤을 터이니…….]
딱!
거인이 손을 튕기자 상공에 떠올라있던 몸이 급격히 하강한다.
눈 깜짝할 사이에 오십여 미터까지 내려간 강현은 시꺼먼 ‘무언가’들을 자세히 볼 수 있었고.
그 즉시 경악했다.
‘……!’
꿀렁-
균형의 탑 입구에서 쏟아지기는 시꺼먼 무언가들은.
다름아닌, 시꺼멓게 물든 각종 괴수들이었으니까.
상어 괴수, 고래 괴수, 고블린, 멧돼지 괴수…….
분명 가지각색의 종족들이었지만, 공통점을 가진 괴수들이었다.
그리고 그 공통점은 강현이 경악하는 이유와 맞물려있었다.
‘저건…… 균형의 탑을 오르면서 상대했던 종족들이잖아…….’
일전에 치루었던 서브 미션에서, 그가 직접 상대했었던 종족들이었던 것이다.
“미친…….”
저도 모르게 욕을 내뱉은 강현은 종족들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종족을 막론하고 모두 온몸이 말라 비틀어져있었는데, 그 모습이 마치 미라를 보는 듯했다.
그어어어…….
거기에 더해지는 괴수들이 본능적으로 내뱉는 듯한 괴성들.
이미 대다수 괴수들이 눈을 까뒤집고 입에서는 거품을 흘려대고 있는 걸로 봐서는, 무의식적으로 새어나오는 괴성일 터였다.
‘대체 무슨 일을 겪었길래…….’
저런 꼴이 되어서, 저런 방식으로 균형의 탑에서 나오게 되었을까.
저 종족들이 저렇게 만든 이는 누구이며, 뭘 의도한 걸까.
게다가 그의 기억대로라면 해양 괴수들은 3층, 저 고블린, 멧돼지 드으이 지상 괴수들은 4층에서 등장했었다.
‘도플갱어가 2층이었으니까…….’
2층부터부터 한 층씩 차례대로 내려온 셈이었다.
저들이 뭘 잘못했길래 저런 신세가 되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하나만은 틀림없었다.
괴수들이 떠다니는 저 광경은, 흡사 지옥이나 세상의 종말을 보는 것만 같다는 것.
‘괴수들이 폐사한 물고기들처럼 떠내려가는 광경이라니.’
상식적으로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장면에 강현의 얼굴이 절로 심각해졌다.
쏴아아아-
그가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에도, 균형의 탑에서 흘러나온 수만에 달하는 종족들이 섬 곳곳으로 퍼져나간다.
-생기를 빼앗긴 괴수들의 강이라니, 끔찍하기 그지없군.
엔딜 펠란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해온다.
‘생기요?’
-그래, 에테르와 생체의 기운을 통틀어 말하는 거다. 딱 봐도 쪽쪽 빨린 거 같지 않나?
‘……!’
-저 정도면 어느 한 존재에 의해 당한 건 아닌 듯하다. 어떤 의식이나 장치에 휩쓸린 거겠지.
‘의식이나 장치…….’
강현은 엔딜 펠란의 말을 되새겼다.
의식이든 장치든 간에 그로서는 생소한 단어들이었지만, 지금 이런 상황에서는 충분히 일리가 있게 느껴졌다.
‘이걸 나한테 왜 보여주는 거지?’
문득 드는 생각.
강현은 ‘태고의 거인’을 슬쩍 올려다보았다.
그는 팔짱을 낀 채 섬 곳곳으로 퍼져나가는 괴수들을 묵묵히 쳐다보고 있었는데, 이목구비가 없어 그 표정을 짐작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가 굳이 이곳까지 강현을 데려온 데에는 마땅한 이유가 있을 것이었다…….
[저곳을…… 봐라…….]
거인이 균형의 섬의 화(火) 구역을 가리킨다.
시선을 돌린 강현은 괴수의 강 일부가 주홍빛 대지와 근처에 있던 주민 일부에게 닿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크, 크아아아아-!
괴수의 강에 닿은 대지가 새카맣게 부식되고, 화(火) 구역의 주민들에게서 비명이 토해진다.
이어서 벌어진 일에 강현의 눈이 크게 떠졌다.
크르르르…….
괴수의 강에 닿은 주민들의 몸이, 마구 부풀어오른 것이다.
역시 강현이 한 번 본 장면들이었다.
‘이벤트전……!’
그가 지난번 레이센 란, 세르반테와 힘을 합쳐 처리했었던 돌연변이의 형상이었다.
‘고작 저 강에 휩쓸린 것만으로 돌연변이가 된다고? 지난번에 처리했던 돌연변이들도 저런 식으로 만들어진 건가?’
강현에게 떠오른 의문.
그러나 그 의문에 대한 답이 떠오르는 것보다는.
크아아아-!
변이를 마친 돌연변이들이 주변을 마구 부수기 시작하는 게 훨씬 빨랐다.
콰지끈-! 쾅!
꺄아아아악!
주위의 기물이 박살나고, 화 구역의 주민들에게서 비명이 터져나온다.
또한, 그건 비단 화 구역에만 국한된 게 아니었다.
크아아아아아-!
수(水)와 목(木), 토(土), 금(金)까지.
돌연변이들의 발생은, 모든 구역에서 일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쿠쿵! 쾅!
으아아아악!
돌연변이들의 만행에 의해 파괴되어 가는 균형의 섬.
강현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리 오래 있지는 않았어도, 나름 균형의 섬에 좋은 기억을 가지고 있던 그였다.
그런 균형의 섬이 저런 식으로 파괴되는 걸 보니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도와주기라도 하고 싶은데…….’
그러기에는 에테르가 도무지 모이지를 않았다.
저 밑에서 친숙한 목소리들이 들려온 건 그때였다.
“빌어먹을…… 에테르가 꼼짝도 하지를 않아!”
“나, 나도예요! 하다못해 맨몸으로라도 갈 수 있으면 도울 수 있을 텐데 그것도 안 되고……!”
고개를 돌린 그는 자신보다 조금 아래에 떠있는 레이센 란과 세르반테를 발견했다.
그들은 난리가 난 균형의 섬을 도우려는듯 몸을 마구 허우적대는 중이었는데, 강현과 마찬가지로 분노와 슬픔, 경악이 뒤섞인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저들이 왜……?”
[너에게…… 보여주는…… 김에…… 겸사…… 겸사…….]
거인의 말을 들은 강현은 확신했다.
‘역시 뭔가 목적이 있어.’
자신이야 만난 김에 저 광경을 알려주는 거라고 쳐도, 그것 외의 목적이 있지 않고서는 일면식도 없던 일행들까지 이곳으로 데려올 리가 없었다.
그리고 거인이 목적이 있을 거라는 사실은 강현으로 하여금 한 가지 다짐을 하게 만들었다.
‘알아야겠어.’
바로 거인이 그와 일행을 이곳까지 데려온 이유를 알아야 하겠다는 다짐이었다.
‘거기에, 가능하다면 거인의 정체까지.’
단단히 마음을 먹은 강현은 말을 꺼냈다.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
“이것들을…… 왜 보여주는 겁니까? 또 당신은 누구죠? 대체 얼마나 강대한 힘을 가지고 있길래 이런 것들이 가능한 겁니까.”
강현의 질문들에 거인은 잠시 침묵을 지켰다.
얼핏 봤을 때는 대답하지 않으려는 침묵처럼 보일 수도 있는 상황.
허나 강현은 지금 거인의 침묵은 무언가 말을 하기 직전에 보이는 거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렇기에 재촉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음에도 그는 잠시 기다렸고.
이내, 거인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내가 누군지는…… 머지않아…… 알게 될…… 거다…… 그리고 왜…… 이것들을 보여주는 지는…….]
일순간, 강현은 이목구비가 없는 거인의 입꼬리가 씩 올라가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지금…… 보여주도록 하지…….]
슈우우우우-
직후, 거인과 강현의 몸이 치솟는다.
“아저씨, 어떻게 좀-”
“나라고 달리 방법이 있는 게 아니-”
그에 따라 밑에서 투닥거리는 레이센 란과 세르반테의 목소리가 순식간에 멀어진다.
쿠오오오-
“……큭.”
엄청난 상승 속도에 강현이 적응하는 와중, 거인이 말해온다.
[보아…… 라…….]
키이이잉-
동시에 백여 미터 가량 상승하던 몸이 잠시 멈추며, 균형의 탑 내부가 훤히 비추어진다.
‘일종의 투시 능력인가.’
이런 식으로 균형의 탑 내부를 보이게 할 수 있을 거라고는 예상치 못했기 때문이다.
허나 그 놀람은 오래가지 않았다.
투시 능력으로 크게 놀라기에는 거인이 여지껏 보여주었던 것들이 원체 많았던 데다가…….
균형의 탑의 2층에서 낯익은 풍경을 발견해서였다.
‘요괴들의 차원이잖아.’
알록달록한 호롱불로 가득 뒤덮인 어두운 세상.
그가 꼬마 도깨비 유각을 만났었던 요괴들의 차원이 틀림없었다.
그걸 알게 된 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잠깐만. 6층에 있던 요괴들이 2층까지 내려왔다는 건…… 설마?’
요괴들이 2층까지 내려왔다는 것.
그건, 그들이 앞서 균형의 탑에서 방출된 종족들의 다음 타자로 지목됐다는 것과 별반 다를 게 없었으므로.
‘게다가 차원이 원체 어두워서 잘 보이지는 않지만…… 조금씩 검게 물들어가고 있어.’
안력을 집중하자, 호롱불이 아주 약간씩 까매지는 게 눈에 들어왔다.
워낙 미세하여 저 차원에 거주하는 요괴들이라고 한들, 쉽사리 알아차리기 힘들 정도의 세기였다.
앞으로 벌어질 일들이 눈에 선했다.
요괴들은 그들 스스로도 알지 못하는 사이 가랑비에 옷이 젖듯 조금씩 검게 물들어갈 테고.
일정 이상 물들게 되면, 앞서 나타났던 시커먼 강의 일부분이 되어 균형의 탑을 빠져나가겠지.
‘유각…….’
명랑하게 웃어보이던 꼬마 도깨비를 떠올린 강현은 이를 악물었다.
유각에게 언젠가 꼭 균형의 탑에서 구해주겠다는 약속을 했었는데, 만약 거인이 그를 이곳에 데려와주지 않았더라면 꼼짝없이 그 약속을 저버릴 뻔했다.
그때, 거인이 손을 들어 요계의 어느 지점을 가리킨다.
[저걸…… 봐라…….]
강현은 거인이 가리킨 곳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하얀 실?”
그곳에는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하얀 실들이 있었다.
워낙 그 크기가 작아, 거인이 집어주지 않았더라면 놓쳤을 것만 같았다.
‘저게 뭐지?’
그 의문에 대한 답은 금세 알 수 있었다.
엔딜 펠란이 발작하듯 외친 것이다.
-저 실은…… ‘격’이다!
‘예? 저것들이 ‘격’이란 말입니까?’
-그래, 이 차원의 ‘격’! 이제야 아까 그 종족들이 말라 비틀어졌던 이유를 알겠다! 저 ‘격’들, 그러니까 그들 차원의 ‘격’을 암암리에 모두 빨아먹힌 거다!
“……!”
충격적인 엔딜 펠란의 말에 강현의 눈이 부릅 떠진 건 당연한 일이었다.
-지금도 봐라! 저 ‘격’들이 어딘가로 올라가고 있지 않느냐!
과연, 일렁이는 ‘격’들이 뭉게뭉게 위로 올라가는 게 보였다.
-저 ‘격’들이 모이는 곳을 확인한다면 괴수의 강을 발생시킨 원인을 알 수 있을 거다!
그 말을 들은 강현은 거인에게 말했다.
“균형의 탑 끝까지도 올라갈 수 있습니까?”
탑의 끝까지 올라갈 수만 있다면 저 ‘격’을 모으는 원인을 알 수 있을 터였다.
[그러려고…… 했다…….]
거인이 선뜻 고개를 끄덕이면서, 그의 몸이 다시금 솟아오르기 시작한다.
빠르게 상승하는 몸을 느끼며 강현은 직감했다.
균형의 탑 내부 차원들의 ‘격’을 흡수하고 있는 원인이 무엇이든 간에, 필시 더 비욘드의 핵심적인 비밀일 것이라는 걸.
쿠오오오오-
이윽고 백 층 정도를 올라간 끝에, 강현은 차원들의 ‘격’을 빨아들이는 원인을 파악할 수 있었고.
그 순간, 강현은 거인이 그에게 뭘 보여주고 싶었는지를 깨달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실타래처럼 모인 차원의 ‘격’이 빨려들어 가는 그곳은.
츠츠츠츳-
온 하늘을 드리운 짙은 고동색의 거대한 나무, 차원수의 뿌리였으니까.
“왜 차원수가 여기에…….”
뜻밖의 사실에 강현은 몸이 뻣뻣하게 굳는 걸 느꼈다.
설마 균형의 탑의 꼭대기에 차원수가 자리하고 있을 줄이야.
‘더 비욘드랑 차원수가 관련이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지난번 ‘적흑의 천사’의 궁전에서 만난 ‘적흑의 천사’의 권속은 말했었다.
더 비욘드와 차원수는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고.
그러니 웬만하면 빨리 나오는 게 좋을 거라고 말이다.
그때 미션을 진행하면서 차근차근 알아보겠다는 식으로 대답을 하긴 했으나, 이런 식으로 관련이 있을 거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다.
심지어 차원수가 그냥 가만히 있는 것도 아니다.
쿠오오오-
그가 바라보는 지금도 수백 미터에 달하는 뿌리들을 통해 균형의 탑 내부 차원들의 ‘격’을 쪽쪽 빨아들이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건 강현에게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상식밖의 일로 다가왔다.
저 짙은 고동색 나무, 차원수가 어떤 존재인가.
‘황금향’을 멸망시킨 걸로도 모자라서, 빙룡 아디스가 이끄는 제115 군소차원을 비롯한 각종 차원들을 침략하고 있는 존재다.
그 같은 존재를 더 비욘드가 벌어지는 균형의 탑 꼭대기에서 보게 된 셈인데, 당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차원수를…… 알고 있었는가…….]
옆에 있던 ‘태고의 거인’이 묻는다.
그는 이미 차원수가 이곳에 있다는 걸 알고 있었는지, 실시간으로 차원수의 뿌리로 흘러들어가는 ‘격’을 보고도 미동조차 보이지 않았다.
“예, 어쩌다 보니 알게 됐습니다.”
[흐음…… 그렇…… 군…….]
고개를 끄덕인 거인이 말을 이어나갔다.
[차원수는…… 차원들을…… 집어삼킨다…… 이 경연은…… 차원수에게…… 차원들을 주기적으로 공급하지…… 또…… 공급하고 남은 찌꺼기는…….]
“입구를 통해서…… 빠져나간다는 거겠죠.”
[바로 그렇다…… 역시…… 똑똑하군…….]
강현은 거인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깨달았다 .
거인은 지금 그가 이곳까지 올라오면서 알 수 있을 거라 예측했던 것, 즉 더 비욘드의 핵심을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핵심은 강현에게 더없이 충격적이었다.
‘차원수한테 차원을 공급한다니.’
강현은 시선을 위로 올렸다.
쿠오오오오-
하얀 실타래 같은 늘어진 ‘격’들을 수천 미터에 걸쳐 흡입하는 차원수가 눈에 들어온다.
저 끔찍하리만치 거대한 뿌리가 게걸스럽게 빨아먹는 건 수액도, 물도 아니다.
해당 차원에서 살아가는 종족들을 포함하여, 수많은 생명체들이 살아가는 차원을 이루는 ‘격’들이었다.
차원들의 본체나 다름없는 물질을 아낌없이 빨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괴수의 강이 새까맣던 건…… 차원의 ‘격’이 완전히 소진돼서였던 건가.’
차원의 모든 ‘격’을 빨린 차원의 종족들은 이지를 잃은 채 균형의 탑 1층을 통해 외부로 방출되는 듯했다.
그런 이들을 거인은 찌꺼기라고 부르는 걸로 보였고.
-한때 수많은 악마들을 이끌었던 이 몸이지만…… 이 몸이 여태까지 본 것중 가장 끔찍한 광경이로군.
엔딜 펠란이 가라앉은 어조로 말해왔으나, 강현은 침묵을 유지했다.
갑작스레 이러한 진실들을 마주했기에, 받아들이는 데에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허나 잠시 뒤, 그는 정작 거인의 말이 끝나지 않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대부분의 찌꺼기들은…… 입구로 빠져나가지만…… 쓸 만한 건…… 따로 빼놓는다…….]
“그 말은……?”
[쓸 만한 ‘격’들은…… 참가자들에게…… 보상으로…… 지급하지…….]
“차원들의 남은 ‘격’을 모아서 참가자들한테 보상으로 줬다는 말입니까?”
[그렇다…….]
“이런 미친…….”
그간 받았던 보상들의 출처가 찌꺼기가 되어버린 차원들의 ‘격’을 모은 거였다니.
이루 말할 수 없는 역겨움이 엄습해온다.
‘잠깐만.’
그 순간 떠오른 의문.
‘차원들이 이렇게나 흡수되고 있는데…… 보충은 어떻게 하는 거지?’
단기간에 몇 개나 되는 차원을 해치운 차원수다.
아무리 균형의 탑에 많은 종족들이 산다고 해도, 빨아들이는 차원들을 보충할 방법이 없다면 언젠가는 탑 전체가 텅텅 비어버릴 터였다.
강현은 천천히 물었다.
“궁금한 게 있습니다.”
[…….]
“차원수한테 빨아먹힌 차원들을 대체할 만한 차원의 공급은 어디서 하는 겁니까?”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하려면…… 다시…… 내려가야 한다…….]
거인이 손짓하자, 몸이 하강하기 시작한다.
쿠와아아아아-
솟구쳤던 것과 마찬가지로 무시무시한 속도로 내려가기를 한참.
강현이 순식간에 지상에 가까워졌다는 걸 인식할 때쯤, 거인이 손을 들어 3, 4층 부근을 가리켰다.
[저들을…… 보아라…….]
거인의 손을 따라간 강현은 경악했다.
그곳에서 나름 익숙한 이들을 찾아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끄으응-차!
-하, 하아아압!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땀투성이가 된 채로 각종 노역을 하고 있는 그들은.
“지난번에 상대했던 놀이랑 오크잖아……?”
본선 첫 번째 미션인 모의차원전쟁에서 상대했던 놀 구릭토프와 오크 그락크의 종족들이었다.
‘구릭토프도, 그락크도 탈락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탈락했던 모든 종족이 균형의 탑에 있는 건 아니었으나, 하필 놀과 오크들이 저곳에 있는 건 결코 우연이 아닐 터였다.
필시 탈락과 관련이 있는 거겠지.
홱-
왠지 모를 불안함을 느낀 강현은 돌려 거인을 응시했고.
[차원들의 보충은…… 경연에서 떨어지는…… 참가자들을 선별하여…… 탑에 집어넣음으로써 이루어진다…… 모든…… 인원들을…… 데려오지…… 또…… 새로운 종족이 들어올 때마다…… 탑의 층수가…… 한 칸씩…… 내려간다…….]
“……!”
자신의 예감이 맞아떨어졌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더 비욘드가…… 이런 말도 안 되는 운영을 하고 있었다고?’
더 비욘드의 운영하는 목적과, 그 주체에 대해 궁금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기는 했다.
참가자들을 어마어마한 속도로 성장시켜 주는 데다가 그 끝에는 <초월>이 걸려 있고, 무엇보다 참가자들을 성장시켜줌으로써 더 비욘드 측이 딱히 이득 볼 것도 없어 보였으니까.
헌데 이런 구역질 나오는 비밀이 숨어있었다니.
‘이제야…… 이제야 이해가 가네.’
강현은 그제서야 천사의 권속이 했던 말을 이해했다.
어떤 식으로 균형의 탑에 가둘 탈락자들을 선별하는지는 몰라도, 자칫하다가는 강현이 저곳에 들어갈 수도 있었을 것이었다.
그러니 그에게 호의를 가진 천사로서는 빨리 나오라고 하는 게 당연했다.
잘못하다가는 강현 혼자만이 아니라, 애먼 지구의 인간들까지 통째로 빨려들어 갈 수도 있었으니 말이다.
“…….”
강현은 온 지구의 인간들이 균형의 탑에 갇혀 노역하는 상상을 해보았다.
상상만으로도 오싹함과 섬뜩함이 밀려들어온다.
그는 다시 놀과 오크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크흐흑…… 너, 너무 무겁다!
-도와달라!
-빌어먹을! 대체 언제까지 내려가야 하는 거냐……!
자세히 보자, 다들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진 얼굴들을 하고 있었다.
‘저들이 저런 걸 원했던 건 절대 아니겠지.’
예선과 본선을 거치면서, 강현은 많은 차원들이 그들의 참가자들에게 큰 규모의 지원을 해주었다는 사실을 접하게 되었다.
지원을 해준 이들이 꿈꿨던 건 자신들의 종족이 <초월>을 하여 얻게 될 장밋빛 미래지, 저곳에서 노역이나 하는 생이 아니었을 터였다.
“그럼…… 더 비욘드는 <초월>을 미끼로 차원수에게 차원들을 수급하기 위해 벌이는 일입니까?”
[본질은…… 그렇다…… 참가자들은…… 알지 못하는 새에…… 종족의 명운을 건…… 경연에 참가하게 되는 것이지…….]
“만약 끝까지 올라간다면 <초월>은 제대로 시켜줍니까? 그것도 아니라면-”
[그건…… 사실이다…… 차원수에 흘러가는…… ‘격’의 일부를 나누어주기에…… 가능하지…….]
비록 상품인 <초월>은 예정대로 시켜준다는 걸 알게 됐으나, 달라질 건 없었다.
거인의 말대로, 탈락한다면 균형의 탑에 끌려갈 수 있다는 걸 알려주지 않은 이상, 참가자들은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 종족의 명운을 짊어진 셈이었으니까.
“혹시 다른 시청자들도 이걸 알고 있습니까?”
[아는 이는…… 거의 없다…….]
고개를 젓는 거인.
그걸 보자마자 일순간 십수 개의 의문들이 샘솟았다.
다른 시청자들에게는 어째서 이 사실을 알리지 않는 건지.
더 비욘드는 왜 차원수에게 애꿎은 차원들을 바치는 건지.
탈락자의 종족이 균형의 탑에 ‘갇히는’ 기준은 어떻게 되는지.
마지막으로, 거인은 무슨 이유로 이 같은 비밀들을 자신에게 말해주는 건지.
그러나 그는 의문들을 꾹 눌러참아야 했다.
그보다 한 발 앞서, 거인의 입이 먼저 열렸으므로.
[궁금한 게…… 많은 것 같구나…… 하나씩…… 하나씩…… 설명해주고 싶지만…… 곧 돌아가야 한다…….]
“돌아가야 한다고요? 그건 또 왜-”
[곧…… 찌꺼기들이…… 퍼져나갈 테니까…….]
“……?”
강현이 턱을 살짝 갸웃거렸을 때였다.
무언가를 알아차린 엔딜 펠란이 다급히 외쳐왔다.
-괴수들의 강을 말하는 거다! 난데없이 도플갱어들이 침략해왔던 걸 떠올려봐라!
‘괴수들의 강이랑 도플갱어…… 설마……?’
강현의 입이 벌어진다.
엔딜 펠란의 말을 듣자 생각나는 게 있었던 것이다.
본선의 첫 번째 미션이 끝나고, 대다수 참가자들이 모두 겪은 일들이 있었다.
‘도플갱어들이 그랬던 것처럼 아까 봤던 괴수들도 참가자들의 차원을 침략할 거라는 말입니까?’
-그래! 게이트를 마구 생성했었던 걸 보면, 각 차원들에 도착하기까지 얼마 안 걸릴 게 틀림없다! 네놈의 차원이 망하는 걸 보고 싶지 않다면 최대한 빨리 돌아가야 된다는 소리다!
강현이 급박한 표정을 짓자, 거인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네가…… 생각하는…… 대로다…….]
[돌아가라…… 돌아가서…… 너의…… 차원을…… 지켜라…….]
슈와아아아아아-
강현과 거인을 중심으로 환한 빛이 뿜어지기 시작했다.
“큭!”
눈이 부실 것만 같은 청록빛에 강현이 두 눈을 질끈 감는 와중.
거인의 말이 계속해서 이어진다.
[차원을 지키고…… 올바른…… 선택을 내린다면…….]
[곧…… 나를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그럼…….]
쿠콰콰콰콰-
묘한 말을 남기자마자 엄청난 속도로 솟구쳐 사라져가는 거인의 몸.
[만나서…… 즐거웠다…… 강현…….]
이내 높은 곳에서 들려오는 늘어지는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태고의 거인’이 완전히 사라졌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슈와아아-!
눈부신 청록빛이 온 세상을 뒤덮음과 더불어, 강현은 자신의 몸이 차원을 건너뛰는 걸 느꼈다.
정신을 차린 강현은 익숙한 평야를 볼 수 있었다.
“여긴…….”
라크리셀 셀라토리온과 치열한 격전을 치루었던 평야였다.
도중에 수룡왕 수란이 등장하면서 그의 [권역]으로 이동됐었으나, 다시 미션 장소로 돌아온 것이다.
‘먹구름은 싸그리 없어졌군.’
하늘 전체를 드리우던 먹구름은 어느새 자취를 감춘 상태.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어찌나 하늘이 말끔한지, 마치 방금까지 <초월자>들과 얽혔던 일들이 없었다고 말해오는 듯했다.
다만, 아무 일도 없었던 건 아니었다.
직전까지 폭우가 쏟아졌는지, 바닥이 축축하게 젖어 있었던 것이다.
강현은 발이 흠뻑 젖는 불쾌감에 얼굴을 찌푸렸다.
‘바로 지구로 보내줄 줄 알았는데…….’
다시 미션 장소로 돌려보내다니.
뭔가 이유가 있는 걸까?
-흠, 아직 미션이 진행되고 있는 상황이어서 그런 것 아니겠나. 그 존재 정도면 네놈을 지구로 돌려보낼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됐다면 이 경연에서 무단이탈하게 됐을 거다.
엔딜 펠란이 그럴듯한 말을 해온다.
‘하긴, 그건 그러네요.’
엔딜 펠란이 말한 것처럼, ‘태고의 거인’이 능력이 없어서 자신을 지구로 보내지 못한 건 절대 아닐 터였다.
그걸 고려한다면…….
‘아무리 더 비욘드의 실체를 알게 됐다고는 해도, 일단 하던 미션은 마무리하라는 거겠지.’
물론, 지금도 균형의 섬을 초토화시킨 괴수들은 지구로 다가오고 있을 것이었다.
한시라도 빨리 지구로 돌아가 미리 대비를 해야 했다.
‘어디 보자…….’
강현은 수란이 나타나면서 먹통이 됐었던 채팅창을 확인해 보았다.
-…….
-…….
-…….
-…….
아직까지 복구가 되지 않았는지 조용하기 그지없었다.
그는 그 대신 시야 한구석의 생소한 메시지를 발견할 수 있었다.
[미션이 일시적으로 중단되었습니다. 참가자들은 자리에서 움직이지 말아주십시오.]
[긴급복구중…… 8%…… 5%…… 18%…….]
문구를 본 강현의 눈이 이채를 띠었다.
적혀 있는 걸로 봐서는, 저 복구 퍼센트가 100%가 된다면 미션이 재개될 것 같았다.
‘복구 퍼센트가 오르는 속도도 꽤 빠르니까…… 일단은 기다려야겠군.’
미션이 재개되어야 앞으로의 방침을 정할 수 있을 거로 보였다.
그때, 저 멀리서 고운 목소리가 들려온다.
“여기요!”
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린 강현은 빠르게 다가오는 레이센 란과 세르반테를 발견했다.
둘 모두 놀라움과 걱정이 뒤섞인 얼굴들을 하고 있었다.
“강현! 괜찮나! 어디 다친 데는 없는 건가!”
레이센 란을 훌쩍 앞질러 달려온 세르반테가 두 손으로 강현의 어깨를 붙잡는다.
“괜찮습니다. 털끝 하나 안 다쳤어요.”
“휴우…… 다짜고짜 <초월자>와 단둘이 남게 되어 걱정했었네! 아무 이상이 없다니 정말 다행일세!”
그제야 표정을 조금 푸는 세르반테.
뒤따라온 레이센 란이 핀잔을 준다.
“이 아저씨가 얼마나 당신 걱정을 해대던지…… 나는 둘이 조카 삼촌 사이라도 되는 줄 알았다니까요.”
말은 그렇게 해도 레이센 란의 얼굴 또한 살짝 밝아져 있었다.
-흐흐, 예선에서만 해도 서로 죽어라 싸워대던 경쟁자들이 자기들 일처럼 걱정해 주는군. 기분이 어떠냐.
엔딜 펠란이 짓궂게 클클댄다.
‘뭐…… 나쁘지는 않네요.’
이미 이들과 여러 고난을 헤쳐와서인지, 이제는 경쟁자라기보다는 동료처럼 느껴졌다.
비단 동맹을 맺은 이번 미션이 아니더라도 말이다.
“으음…… 험, 험.”
세르반테가 잠시 무언가를 고심하더니, 이내 결심한 얼굴로 말해온다.
“강현, 우리는 아까 돌아왔었는데, 폭우가 쏟아지는 바람에 근처 동굴로 대피해 있었네. 한데 갑자기…… 그게…….”
세르반테가 말을 하다가 말고 우물쭈물댄다.
그러자 하아, 하고 한숨을 한 번 내쉰 레이센 란이 신중한 어조로, 그러면서도 또박또박 물어왔다.
“대피했었는데, 갑자기 균형의 섬으로 이동했었어요. 정확히는 균형의 탑 근처 하늘에 둥둥 떠 있었고요.”
“…….”
“그래서 혹시 당신도 균형의 섬에 있었나 해서요.”
강현은 세르반테가 머뭇거렸던 이유를 이해했다.
아무래도 그들이 본 게 보통 광경들이 아니다 보니, 선뜻 묻는 게 망설여졌겠지.
강현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예, 저도 봤습니다.”
강현의 대답에 일행들의 얼굴이 대번에 굳는다.
“여, 역시 우리만 본 게 아니었군! 자네도 그 광경을 봤단 말인가? 균형의 섬이 엉망이 되어가는 과정들을?”
“예, 다 봤어요.”
그렇게 대답한 강현은 잠깐 생각했다.
‘태고의 거인’이 균형의 탑 내부를 보여준 것도.
차원수가 있는 곳까지 데리고 간 것도 자신뿐이다.
그렇기에 이들에게 차원수, 그리고 탈락한 참가자들이 균형의 탑에 갇히게 됐다는 사실을 알려줄까도 했지만.
‘당장 믿게 하기는 어렵겠지.’
자신이 아무리 설명을 조리 있게 한다고 한들, 직접 보지 않는 이상 이 자리에서 받아들이기는 어려울 것이었다.
괜한 혼동만 더 주는 것보다는 차라리 앞으로 닥쳐올 위기를 알리는 게 낫겠지.
“균형의 섬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알려드릴 게 있습니다.”
“……?”
“곧 도플갱어들이 그랬던 것처럼 아까 봤던 괴수들이 차원을 침략할 겁니다. 가급적 빨리 각자 차원으로 돌아가서 대비해야 해요.”
“뭐, 뭐라고……!”
“네?!”
경악하는 일행들.
강현은 설명을 이어나갔다.
“이 자리에서 다 설명드리기는 어렵지만, 지난번 도플갱어들이 쳐들어왔던 걸 떠올리면 될 겁니다.”
“하, 하지만 강현. 한창 미션이 복구되고 있는데 어떻게…….”
강현은 복구 문구를 바라보았다.
[미션이 일시적으로 중단되었습니다. 참가자들은 자리에서 움직이지 말아주십시오.]
[긴급복구중…… 66%…… 70%…… 73%…….]
빠르게 퍼센트가 오르고 있기는 했어도, 세르반테의 말마따나 당장 돌아갈 방법은 없었다.
“복구가 다 될 때까지는 기다려 보죠. 그닥 오래 걸릴 거 같지는 않으니까.”
“오르는 추세만 보면 금방 완료되기는 하겠네요.”
[긴급복구중…… 80%…… 82%…… 85%…….]
과연, 지금 속도를 유지한다면 5분도 걸리지 않을 듯했다.
“그, 그럼 잠시 기다려 봐야겠군……!”
“…….”
세르반테의 말을 마지막으로 잠깐의 정적이 깃든다.
초월적인 일들에 휘말린 끝에 찾아온 여유에, 일행은 각자 다른 반응을 보였다.
“……또 침략이라니.”
“음…….”
세르반테가 안절부절함을 감추지 못했고, 레이센 란은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지 미간을 지그시 좁힌다.
강현은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예상해 보았다.
‘미션이 마무리되고 지구로 돌아가게 되면, 괴수들의 침략을 대비한다.’
거기까지는 명확했으나…….
‘그 이후가 문제군.’
‘태고의 거인’은 그에게 더 비욘드의 실체를 낱낱이 알려주었다.
역겨움과 끔찍함만이 느껴지는 더 비욘드의 실체.
그것들을 거인은 왜 직접 보여준 걸까.
대체 그에게서 뭘 바라는 걸까.
“…….”
답은 섣불리 나오지 않았다.
그러기에는 너무 짧은 시간이었다.
[미션이 일시적으로 중단되었습니다. 참가자들은 자리에서 움직이지 말아주십시오.]
[긴급복구중…… 92%…… 96%…… 98%…….]
그들이 고민하는 동안에도 복구 퍼센트는 빠르게 차올라.
[긴급복구중…… 100%]
[긴급복구가 완료되었습니다.]
순식간에 복구를 완료했다는 메시지를 띄워냈다.
그런데 복구 완료를 알리는 메시지가 떠올랐을 때였다.
팟-
[공지 : 오류로 인해 미션을 임시 종료합니다.]
[추후 모든 오류가 제거된 뒤 미션이 재개됩니다.]
[잠시 후 참가자들의 각각의 차원으로의 소환이 시작됩니다…….]
돌연 이 같은 메시지들과 더불어, 새하얀 빛무리가 바닥에서부터 차오르는 게 아닌가.
슈와아아아아-
예상하지 못한 전개에 강현은 눈을 깜빡였다.
‘뭐야…… 미션이 재개되는 게 아니라 원래 차원으로 돌아간다고?’
-아무튼 바로 돌아가게 됐으니 상관없는 것 아니냐.
‘그건 그렇지만요.’
어쨌든 돌아가게 됐으니 잘된 일이기는 했다.
하나.
‘……설마 거인은 일이 여기까지 예측한 건가.’
강현은 다시금 실감했다.
‘태고의 거인’은 그로서는 재단할 수가 없는, 도무지 한계가 보이지 않는 존재라는 것을.
그때였다.
“잠깐만요! 소환이 이루어지기 전에 줄 게 있어요.”
스윽-
허리까지 올라온 빛무리 속.
생각에 잠겨 있던 레이센 란이 품에서 주먹만 한 구슬 두 개를 꺼낸다.
레이센 란의 머리색과 같은 아름다운 붉은색이 감도는 구슬이었다.
“혹시 몰라서 드리는 건데, 우리 가문에서 제작한 최상급 연락구예요. 이걸 쓰면 차원을 건너서도 연락할 수 있을 거예요. 받아요.”
그녀는 강현과 세르반테에게 구슬을 하나씩 건네주었다.
과연 최상급 연락구답게, 직접 쥐어보자 신묘한 에테르가 전해져 왔다.
“오오……! 고맙네! 그냥 쓰면 되는 건가?”
“그건 아니고 마나…… 아니, 에테르가 꽤 필요하긴 해요, 대충 8, 9단계 정도? 그래도 다들 이제 그 정도 에테르는 쓸 수 있잖아요?”
그렇게 말한 레이센 란이 살짝 웃으며 어깨를 으쓱해 보인다.
“으하하하! 맞는 말이네! 잘 쓰겠네!”
세르반테가 호탕하게 웃어 보인다.
강현도 고개를 살짝 숙였다.
“나중에 연락드리죠.”
설령 그처럼 모든 걸 본 게 아니라고 해도, 그녀 또한 나름 머리가 복잡할 터였다.
그러니까 연락구를 준 거겠지.
그리고 그건 강현에게도 좋은 일이었다.
앞으로의 일들을 혼자 의논하지 않아도 될 터였으므로.
슈와아아아-!
그런 가운데 빛무리는 계속해서 올라왔고.
“다들 다시 만나세!”
“그럼, 나중에 봬요.”
“잘 해내시길 바랍니다.”
서로에게 건네는 인사를 끝으로, 온 세상을 덮었다.
[참가자 이강현 확인, 제3 군소차원으로의 소환을 시작합니다.]
* * *
“…….”
눈을 뜬 강현은 집으로 돌아왔다는 걸 알게 되었다.
거실과 부엌, 각종 가구들까지.
지난번 미션이 끝나고는 곧장 <초월계>로 올라갔어서인지, 상당히 오랜만에 돌아온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감상에 잠겨 있을 시간은 없었다.
그는 곧바로 창문으로 다가갔다.
바깥을 내다보기 위해서였다.
‘아직은 괜찮군.’
이내 거리를 활보하는 사람들, 청명한 하늘을 본 강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 괴수들이 도달하지 않은 듯했다.
다만.
‘당장 대비를 해야 돼.’
그 사실이 강현에게 여유를 가져다주지는 않았다.
언제 이 평온이 깨져도 이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나쁘게만 볼 건 아니었다.
‘쳐들어오는 걸 아예 막을 수는 없겠지만…….’
최대한 대비를 한다면, 괴수들의 침략으로 인한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을 터였다.
그리고 그러려면…….
‘이 위기를 알리는 게 먼저다.’
다른 이들에게 이 위기를 알려야 했다.
생각을 정리한 강현은 곧장 헌터관리국으로 이동했다.
지금은, 일단 움직여야 할 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