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각성으로 차원최강 8권-1장 본선 : 다차원 대난투(2) (42/51)

각성으로 차원최강 8권

목차

1장 본선 : 다차원 대난투(2)

2장 더 비욘드

3장 세 번째 재앙

4장 유각

5장 마계(1)

1장 본선 : 다차원 대난투(2)

강현과 세르반테는 빠른 속도로 뜨거운 사막을 헤쳐나갔다.

파팟-

제2 구역의 차원이 사막지대인 만큼, 장애물 따위는 없었기에 탐색하는 데에 별로 신경 쓸 것도 없었다.

유일하게 조심해야 할 거라면, 숨을 답답하게 만드는 열풍과 작열하는 태양, 그리고.

쿠르르르-

지금처럼 뜬금없이 전방의 모래를 움푹 꺼지게 만들면서 모습을 드러내곤 하는 이 사막에 거주하던 종족들.

키아아아아오-!

웬만한 5층 건물을 크기의 시꺼먼 전갈이 내지른 흉성.

그 충격파로 인해 발생한 모래폭풍이 반경 수십 미터를 휩쓸었다.

“세르반테! 엄호를!”

“큭! 이 망할 전갈이! 알겠네!”

강현은 전갈을 향해 내달리며 스킬들을 연이어 발동했다.

[스킬, 광검[Lv.6]을 발동합니다.]

[스킬, 순보[Lv.3]을 발동합니다.]

팟-

강현의 신형이 순식간에 전갈의 머리 위에 나타났고.

[스킬, 광명의 눈[Lv.2]을 발동합니다.]

키아아?

순간적으로 강현을 놓친 전갈이 그를 발견하기 전, 순백의 광검이 내리그어진다.

[스킬, 광야참[Lv.1]을 발동합니다.]

[1/5의 마력을 소모합니다.]

쿠콰콰콰-

강현의 검에서부터 뿜어진 초승달 모양의 백색 검기가, 전갈의 약점인 머리 위로 가차없이 내려꽂힌다.

콰콰쾅!

키아아오오!

끔찍한 소리와 함께 주춤거리는 전갈.

강현은 놈의 머리가 반쯤 깨져 있다는 걸 확인하고는 살짝 혀를 찼다.

“……쯧.”

이번 공격으로 끝내려고 했는데, 아쉽게도 실패하고 말았다.

아무래도 광야참에 적중당하기 직전 머리를 살짝 비튼 모양이었다.

-괜히 화만 일으킨 듯하군.

‘……그러게요.’

전갈은 정말 화가 났는지, 몸을 미친 듯이 떨어댄다.

그걸 본 강현의 눈이 찌푸려졌다.

‘왜 저러는 거야? 징그럽게.’

집채만 한 전갈이 부르르 몸을 떨어대는 건, 썩 보기 좋은 광경은 아니었다.

그러나 전갈이 몸을 떨어댄 이유는 곧 밝혀졌다.

부르르르……. 파앗!

몸을 떨던 전갈의 꼬리가 기습적으로 늘어나더니, 그대로 강현을 향해 쏘아진 것이다.

쐐애애애액!

꿰뚫리면 죽을 게 분명한 전갈의 꼬리.

그게 자신에게 쏘아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강현에게서는 조금의 움직임도 찾아볼 수 없었다.

“강현, 가네!”

쿠오오-

저 뒤에서 내뿜어지는, 세르반테의 오러가 느껴졌으니까.

파해검법 제4식, [용오름].

강현이 전갈을 상대하던 동안 준비했을 세르반테의 일격.

푸른 검기의 소용돌이가, 전갈의 꼬리와 맞부딪친다.

콰콰쾅!

키아아아!

꼬리에 타격이 간 전갈이 온몸을 비트는 찰나.

[스킬, 순보[Lv.3]를 발동합니다.]

[스킬, 질주[Lv.2]를 발동합니다.]

강현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다시금 전갈에게 파고들었고.

화르르륵!

끝내, 반쯤 드러난 전갈의 머릿속에 진홍빛 화염을 적중시켰다.

키오오오오…….

쿠웅-!

머리가 단숨에 불타버린 전갈의 거체가 모래사장에 쓰러진다.

그와 함께 떠오르는 메시지.

[30pt를 획득하셨습니다.]

30pt를 얻었다는 문구를 본 강현이 눈을 빛냈다.

‘아까는 20pt였는데 지금은 30pt라…….’

이 시꺼먼 전갈을 쓰러뜨리기 전에도 거대 지네를 처치했었는데, 그때는 20pt를 주었었던 것이다.

그걸로 보아, 강한 개체를 쓰러뜨릴수록 더 많은 기여도를 주는 듯했다.

“후우! 강현, 괜찮나?!”

세르반테가 다가온다.

방금의 모래폭풍에 정통으로 직격당해서인지 거지꼴을 한 채였다.

자신도 함께 휩쓸렸었으니, 세르반테와 비슷한 꼴이겠지.

“예, 괜찮습니다. 잠깐 쉬었다 가죠.”

“좋은 생각일세! 크으, 그나저나 멋진 불꽃이었네! 언제 봐도 훌륭하군!”

세르반테가 감탄을 흘린다.

그는 강현이 사용하는 적흑의 투구와 망토, 일명 적흑 시리즈에 매료되었는지, 틈만 나면 그 얘기를 꺼내고 있었다.

“혹시 불꽃이 뜨겁거나 하지는 않나?”

세르반테가 눈을 반짝거리며 물어온다.

“예에. 주인한테는 괜찮더군요.”

“오오! 역시 그렇구만!”

세르반테가 아이처럼 신나한다.

강현은 아공간에서 생수 두 병을 꺼내 그런 그에게 한 병을 건네주었다.

“이 귀한 물을! 고맙네!”

꿀꺽, 꿀꺽.

“파하! 이제야 좀 살겠군!”

생수 한 병을 한꺼번에 들이킨 세르반테가 손등으로 입을 슥 닦았다.

“지금 와서 하는 말이다만, 처음 자네가 안 보였을 때는 자네가 죽은 줄만 알았네. 아니면 석인들한테 붙잡혔거나.”

세르반테가 진중한 어투로 말을 꺼내는 걸 따라, 강현의 얼굴도 덩달아 진지해진다.

한두 시간도 아니고, 이틀이나 실종됐었던 강현이다.

세르반테와 알렉시스가 충분히 걱정할 만했다.

“저 말고 다른 분들도 무사하다고 했었죠?”

“흐흐, 그래. 아마 자네가 아티팩트들을 쓸어갔다는 걸 알게 되면 놀라 자빠질걸세! 특히 알렉시스한테 찰싹 달라붙어 다니던 호위가 어떤 표정을 지을는지가 궁금해지는군!”

진중했던 것도 잠시, 이내 세르반테의 입꼬리가 비뚜름하게 올라간다.

강현의 목에 검을 겨누었었던 알렉시스의 여호위, 로웬을 말하는 걸로 보였다.

“뭐, 나야 모르는 놈들이 얻는 것보다는 자네가 얻는 게 백 배 낫지만 말이야! 으하하하!”

세르반테가 껄껄 웃으며 주변을 둘러본다.

“그건 그렇고 해가 지고 있는데, 어떻게 할 건가?”

“일단은…… 지금처럼 사막을 가로지를 생각입니다.”

강현은 대답하며 하늘을 살폈다.

과연, 세르반테의 말대로 어느새 해가 지평선을 넘어가는 중이었다.

‘다행이네.’

별다른 그늘도, 바람도 없이 열풍과 태양을 맨몸으로만 견뎌야 했던 그들이다.

사막의 일교차가 심하기는 하겠다만, 더운 것보다는 나을 거라 여겨졌다.

‘물론, 본격적인 경연은 이제 시작이겠지만.’

날이 어두워지는 만큼, 상당수 참가자들이 은밀히 움직일 수 있을 터였다.

‘시간도 넘치게 남아 있고.’

강현은 힐끔 남은 시간을 확인했다.

[다음 차원으로 넘어가기 전까지 남은 시간: 2일 5시간 8분]

두 번째 차원에서 보낼 사흘 중, 이제 하루가 지나갔을 따름이었다.

-곧 참가자들이 날뛰겠군.

‘예, 아직도 핀 포인트 점령을 못 한 참가자들이 특히 그러겠죠.’

이미 핀 포인트를 점령한 이들이 여유로운 반면, 핀 포인트를 점령하지 못한 참가자들은 조급할 테고, 나아가 절박할 거다.

핀 포인트를 미친 듯이 찾아다니겠지.

강현의 시선이 채팅창 옆의 화면으로 이동했다.

두 번째 차원으로 넘어왔을 때부터 떠올라 있던 조그마한 창이었다.

---

남은 참가자 수 : 18명.

점령된 핀 포인트 수 : 8개.

점령되지 않은 핀 포인트 수 : 4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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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그마한 창에는 남은 참가자와 핀 포인트의 숫자가 나와 있었다.

강현의 시선이 남은 참가자 수로 향했다.

남은 참가자 수는 18명.

그에 반해 점령되지 않은 핀 포인트 수는 고작 4개다.

참가자들이 얼마나 동맹을 맺었을지는 알 수 없었으나, 단순계산으로는 18명의 참가자가 4개의 핀 포인트를 두고 경쟁해야 하는 형국이었다.

치열한 경쟁을 통해 최종적으로는 12명만이 살아남을 거고, 그 12명을 필두로 세 번째 차원에서의 미션이 시작되겠지.

그리고 세 번째 차원에서의 미션은, 지금보다 훨씬 힘들 것이었다.

그걸 대비하려면 부지런히 움직여 또 다른 인간종 참가자를 찾아야 했다.

약 한 시간 뒤, 간단한 정비를 끝낸 강현이 입을 열었다.

“슬슬 출발하죠.”

“알겠네! 내가 앞장서도록 하지!”

주저앉아 있던 세르반테가 벌떡 일어나, 저만치 앞서나간다.

강현도 그의 뒤를 따라 저녁을 맞이한 사막을 가로질러 갔다.

한데 두어 시간가량을 이동했을 때였다.

“음? 강현!”

느닷없이, 무언가를 발견한 세르반테가 파바바박 뛰어간다.

“……?”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던 강현의 눈이 크게 떠진다.

“저건……!”

전방에 위치한 큰 피라미드형 건축물.

또 하나의 핀 포인트가 그들의 앞에 나타난 것이다.

[4-1번 핀 포인트를 발견했습니다.]

[알림 : 이미 참가자의 동맹은 2-4번 핀 포인트를 점령한 상태입니다. 4-1번 핀 포인트를 점령할 수 없습니다.]

나타나는 문구를 통해 아직 점령되지 않은 핀 포인트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남은 네 개 중 하나라는 거군.’

핀 포인트로 다가가자, 세르반테가 강현을 쳐다본다.

그냥 넘어가기는 아까운데 어떻게 하겠냐는 물음이 담긴 눈빛.

그 물음을 보며 강현은 재빨리 머리를 굴렸고.

금세 결론을 내렸다.

“그럼, 이렇게 하죠.”

* * *

[아, 인간종 동맹! 매복에 들어갑니다!]

[기척까지 싹 죽인 채 아무도 없는 것처럼 은신한 상태입니다! 다만, 조심해야 하겠는데요!]

[그렇습니다! 근처를 배회하는 여러 참가자들이 있으니까 말이죠!]

[예, 인간종 동맹은 모르겠지만, 자칫하다간 그들이 역으로 당할 가능성도 다분하다고 여겨집니다! 해설을 하는 저희야 더할 나위 없이 흥미진진하지만요!]

[물론 인간종 참가자들이 기척을 빠르게 죽인 만큼, 나머지 참가자들도 긴가민가하는 기색입니다! 어엇! 세르반테 참가자가 정찰을 떠나는군요! 이게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는, 계속 지켜봐야겠습니다!]

* * *

“하하, 이따 보세나! 적을 찾으면 신호를 보내겠네!”

그 외침을 끝으로 세르반테가 멀어진다.

두 시간가량을 기다려도 아무도 오지 않았기에 내린 결정이었다.

-흠, 만약 저 시끄러운 놈이 강적을 끌고 오면 어떡할 거지?

‘싸워보고 안 되면 도망치든가 해야죠.’

-크흐, 여유롭구나.

‘뭐, 어차피 만약 죽는다고 해도 다음 차원은 진출이니까요.’

강현은 어깨를 살짝 으쓱했다.

물론 그렇다고 아예 여유가 만땅인 건 또 아니었다.

그로서는 참가자들의 수를 최대한 줄여놓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기에는 인원이 모자랐다.

‘한 명만 더 있으면 될 텐데.’

아까 시꺼먼 전갈을 처리하면서도 아쉬움을 느꼈던 그였다.

한 명만 더 충원된다면 팀이 유기적으로 공수를 전환할 수 있었을 텐데, 인원이 모자라 그러지 못했다.

가급적 이번 차원에서 팀을 완성해야 하는 것도 그 이유였다.

만약 세르반테와 단둘이 세 번째 차원으로 넘어간다면, 강자들만 남은 참가자들 사이에서 고군분투를 펼쳐야 할 터였다.

“……빡세군.”

하긴, 다음 미션으로 진출하는 건 고작 6명.

이번 다차원 대난투를, 실질적으로 인간종들과 함께하는 거의 마지막 미션이라고 봐도 될 것이었다.

‘적어도 절반 이상은 떨어지겠지.’

인간종들을 떠올린 강현이 쓴웃음을 지었다.

남은 인간종은 다섯.

상식적으로 모든 인간종이 다 붙는다고 보기는 힘들었다.

“후우…….”

궁전의 최상층에 있던 이틀 동안 생각했던 내용이기는 하나, 새삼 또 한 번 실감된다.

이제는 정말로, 더 비욘드 이후의 삶을 준비해야 한다는 것을.

강현은 자신이 이번 미션에서 떨어진다면 어떻게 할 지를 예상해 보았다.

‘일단 지구에서의 영향력을 키우면서 <초월>을…… 아니지.’

떨어진 김에, 친분이 있던 이들을 만나러 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했다.

‘류트한테 먼저 가봐야 되나? 아니면 남궁강룡이나 이현?’

그런데 그때였다.

파사사사사삭-

상념을 깨우는, 이질적이면서도 미세한 소음이 들려온다.

의식을 집중하지 않으면 잘 들리지도 않을 만큼 작은 소음이었다.

“…….”

강현은 곧장 기감을 끌어 올린 채 귀를 기울였다.

‘땅굴인가.’

밑에서 일정 주기로 사삭거리는 소리가 들려오는 걸로 봐서는, 누군가 이곳을 향해 땅굴로 접근해 오는 것 같았다.

그 소음은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기에, 강현은 조심스럽게 손님을 맞을 준비를 해나갔다.

촤라라라락-

철컥-

아르크트와 더불어, 적흑 시리즈를 장착한 것이다.

하나 잠시 뒤.

스르륵- 팍!

“……?”

강현은 나타난 인영을 보고는 눈을 깜빡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핀 포인트 코앞의 모래알을 뚫고 빼꼼 고개를 내민 건, 그에게 있어 더없이 익숙한 붉은 머리칼이었으니까.

[레이센 란, 13위]

“어……? 다, 당신. 여기서 뭐 해요?”

강현을 발견한 레이센 란이 눈을 동그랗게 뜬다.

강현은 그런 그녀를 가만히 훑어보았다.

“꼴이 말이 아니네요.”

말 그대로였다.

사막을 아래에서부터 뚫고 나와서인지, 온몸이 먼지와 모래로 한가득 뒤덮인 상태였던 것이다.

그녀의 매력적인 이목구비가 보이지도 않을 정도였으니, 말 다 했다고 할 수 있겠지.

“다른 참가자가 근처에 있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비교적 안전하게 접근할 방법이 이것뿐이어서 어쩔 수 없었어요.”

얼굴을 살짝 붉힌 레이센 란이 이어 말했다.

“그건 그렇고, 당신은 왜 여기에 있는 거예요? 혹시 이 핀 포인트를 점령하려고?”

그녀의 눈빛에는 실망과 미약한 경계심이 깃들어있었다.

당연한 반응이었다.

그들 사이에 지금까지의 여정을 함께해오면서 쌓인 친분이 있다고는 해도, 그걸 미션에서까지 적용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만약 제가 점령하려고 여기 있었던 거라면 어떡할 겁니까?”

“당신이랑 경쟁해야 한다면…… 물러나야죠.”

“……!”

미처 예상하지 못한 대답이었지만.

레이센 란은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당연한 거 아니에요? 내가 본선에 올라와서는 중위권에서 전전하고 있기는 해도, 보는 눈까지 흐려진 건 아니니까요.”

“……?”

“1위를 밥 먹듯이 하는 참가자한테 먼저 달려들지는 않을 거라는 소리예요.”

레이센 란이 구덩이에서 몸을 빼며 미소 지었다.

“이길 확률보다 질 확률이 더 높으니까.”

그러고는 품에서 지팡이를 꺼내 휘둘렀다.

그러자 허공에서 물과 바람이 뿜어져 지저분했던 그녀의 차림을 깔끔하게 씻어내리면서, 뚜렷한 그녀의 이목구비가 드러난다.

그녀가 머리카락의 물기를 털어내며 중얼거렸다.

“후우, 이제야 살 것 같네.”

“그런 마법들도 쓸 줄 알았습니까?”

“그럼요. 명색이 마법사인데, 내 몸 하나 못 씻겠어요?”

레이센 란이 어이없다는 듯 반문한다.

“그래서, 여기 왜 있는 거죠? 혹시라도 이 핀 포인트를 점령할 거였다면 지금 말해주세요. 그래야 빨리 가서 다른 핀 포인트라도-”

“점령 안 할 건데요.”

“……네?”

적잖이 놀란 듯한 레이센 란에게 강현은 추가적인 설명을 해주었다.

“점령 안 합니다. 이미 다른 핀 포인트를 점령한 상태라, 다른 참가자들을 낚으려고 대기하고 있었거든요.”

“어쩐지 기척이 안 느껴지더라니……!”

긴장이 풀리기라도 했는지, 그녀가 털썩 주저앉는다.

“그러면 나랑 전투를 할 마음은-”

“저는 처음부터 없었습니다만……. 그쪽은 싸우고 싶었습니까?”

물어보면서도, 강현은 그 답을 알 것만 같았다.

‘절대 안 싸우고 싶었겠지.’

이틀가량이 남았다고는 해도, 남은 핀 포인트는 고작 네 개.

쓸데없이 싸울 바에야, 한시라도 빨리 다른 핀 포인트를 탐색하고 싶을 터였다.

“솔직히…… 거절하고 싶네요. 핀 포인트를 아직 못 찾아서 열심히 돌아다니는 중이었거든요.”

자신의 추측이 맞아떨어졌다는 사실에 강현은 고개를 주억거렸고.

곧장 본론을 꺼내 들었다.

“보아하니 핀 포인트 점령으로 급한 거 같은데, 저랑 동맹을 맺을 의향이 있습니까?”

“네?”

강현이 동맹을 제의할 거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는지, 레이센 란이 깜짝 놀란다.

“진심인가요?”

“예, 이런 상황에서 거짓말을 왜 합니까.”

“자, 잠깐만요. 생각 좀 해보고요.”

갑작스러운 강현의 제안에 고민에 빠진 레이센 란.

그러나 그녀의 고민은 그리 길지 않았다.

“저야 수락이죠. 수락인데…… 궁금한 게 있어요.”

“뭡니까?”

“동맹을 맺게 되면 저는 핀 포인트를 점령하지 않아도 되는 건가요? 또 다음 차원에서, 핀 포인트를 점령하지 못한 채 다른 팀원들이 죽고 한 명만 남게 된다면 죽은 팀원들은 어떻게 되는 거죠?”

잠깐 생각 좀 해본다더니, 질문들이 쏟아져 나온다.

다행히 강현이 답을 알고 있는 질문들이었다.

처음에는 그도 몰랐으나, 틈틈이 채팅창의 시청자들에게 물어봄으로써 알게 된 것이었다.

“먼저, 동맹을 맺게 된다면 팀원들의 숫자와 상관없이 핀 포인트는 하나만 점령해도 됩니다. 가뜩이나 기여도도 훨씬 적게 주는데, 핀 포인트까지 인원수만큼 점령해야 되면 동맹의 의미가 없지 않습니까.”

“그건…… 그러네요.”

레이센 란이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한다.

“그리고 설령 핀 포인트를 점령하지 못한 상태에서 한 명을 제외하고 다 죽어버린다고 해도, 남은 한 명이 핀 포인트를 점령한다면 나머지도 다음 차원으로 함께 넘어가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건……!”

“예, 일종의 운명공동체라는 소리죠. 이제 메시지를 보내겠습니다.”

말이 끝남과 함께 강현은 그녀에게 동맹을 제안하는 메시지를 띄웠다.

이 정도면 충분히 설명을 해줬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참가자 레이센 란에게 동맹을 제의했습니다. 참가자 레이센 란이 수락한다면 동맹을 이루게 됩니다.]

그 제안에.

“동맹…… 맺을게요. 어차피 나야 나쁠 거 없기도 하고……. 당신이랑 다시 같이해 보고 싶기도 했으니까.”

“예?”

“……못 들었으면 말아요.”

무어라 말을 얼버무린 레이센 란이 수락을 하면서, 추가적인 메시지가 나타난다.

팟-

[참가자 레이센 란과 동맹을 맺었습니다. 현 시간부로 25%의 기여도를 획득하게 됩니다.]

[최대 3명까지 동맹을 구성할 수 있습니다.]

[현재 인원(3/3)]

3이라는 숫자를 본 강현의 입꼬리가 조용히 올라갔다.

이제야 비로소 이번 미션에서 살아남기 위한 모든 인원들을 모은 것이다.

그때, 레이센 란이 메시지를 보고는 어리둥절해한다.

“어? 여기는 우리 둘밖에 없는데 왜 세 명이라고 나오는 거죠?”

“아.”

그녀야 세르반테의 존재를 알 리가 없었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여기에는 없지만, 나머지 한 명은 세르반테입니다. 정찰 때문에 잠깐 자리를 비웠죠.”

“네에?! 그 아저씨까지 있다고요?”

레이센 란의 얼굴에 반가운 기색이 감돈다.

-그 시끄러운 놈이 정신 사납기는 해도, 만만하게 대할 수 있기에 그런 거 아니겠느냐.

‘하긴…… 지난번 균형의 섬에서 이벤트까지 같이 했으니까요.’

수긍이 가는 말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미 그와 세르반테, 레이센 란은 함께 균형의 섬에 나타난 돌연변이를 잡는 일을 했던 전적이 있었던 것이다.

그걸 고려한다면, 딱히 호흡을 맞추느라 시간을 쓸 필요도 없을 터였다.

‘레이센 란이 세르반테를 편하게 여기는 것도 있겠지.’

아무튼 팀원도 구했겠다, 그 길로 강현은 동맹에게 주어지는 일종의 보이스 채팅을 통해 세르반테를 호출했다.

앞으로 어떻게 하면 좋을지를 의논하기 위해서였다.

잠시 후.

-마침 나도 가려고 했는데 잘됐군! 지금 가겠네!

다가온 세르반테가 레이센 란을 보고는 주춤한다.

“어, 어엇? 네, 네가 왜 여기에……?”

분명 세르반테도 동맹에 속한 이상 메시지가 갔을 텐데, 대수롭지 않게 넘겨버린 모양이었다.

하지만 레이센 란을 보고 놀라는 것도 잠시.

“아차!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세르반테가 소리친다.

“강현! 참가자 하나가 다가오고 있네! 바로 근처까지 왔어!”

“……!”

삽시간에 긴장감을 돌게 하는 세르반테의 말.

“…….”

자신에게 향한 팀원들의 시선을 느끼며.

강현은 재빨리 결정을 내렸다.

“레이센 란이 합류한 건 나중에 얘기하도록 하고, 일단은 그 참가자부터 상대합시다.”

강현의 시선이 레이센 란에게 향했다.

“아까 이곳으로 올 때 썼던 땅굴, 우리도 쓸 수 있습니까?”

“네, 쓸 수 있어요.”

“잘됐네요.”

강현이 빙긋 웃었다.

“잘 들어주십시오. 어떻게 할 거냐면…….”

* * *

신혈종, 라스타는 저 멀리 보이는 핀 포인트를 향해 발걸음을 늦추지 않았다.

[라스타, 8위]

지난 미션을 통해 무려 8위에 오른 그였건만 한낱 핀 포인트 따위를 찾아 헤맸다니.

이제라도 찾게 되어 다행이기는 하나, 라스타는 불만스럽기 그지없었다.

쿠와아아-

싸늘한 사막의 밤바람이 수인화(獸人化)한 그의 털을 기분 나쁘게 흩뜨려서이기도 했다.

본신은 거대한 은빛 여우인 라스타였으나, 지금 같은 은밀히 탐색전에서는 함부로 그 위엄을 드러낼 수 없었다.

그것 또한 스스로의 종족에 대한 자부심이 상당한 라스타로서는 짜증 나는 일이었다.

‘그래도 찾기 했으니, 이제야 한숨 돌리겠…….’

그가 그렇게 생각한 순간이었다.

파사사삭!

느닷없이 눈앞의 땅이 움푹 꺼지더니, 시퍼런 칼날이 들이닥치는 게 아닌가.

“흡!”

쐐애액-

라스타의 손에서 급박하게 피어오른 강기가 칼날에 맞서간다.

쾅!

한차례 충돌이 일어난 뒤.

훌쩍 물러난 라스타는 자신에게 기습을 가한 참가자를 살폈다.

[세르반테, 19위]

“저놈은……?”

상대의 정체를 본 라스타의 얼굴이 험악해진다.

“네놈은…… 인간종?”

기억해 낼 수밖에 없었다.

신혈종에 대한 자부심이 가득한 그에게 번번이 거슬리던 이강현이 바로 인간종이었다.

뿐만 아니라 인간종 참가자들은 종족의 ‘격’도 최하위인 주제에, 여기까지 다섯이나 살아남았다.

거슬리지 않는 게 더 이상했다.

더욱이 눈앞에 서 있는 인간종이 짓고 있는, 해볼 만하다는 표정이 그를 더욱 화나게 만들었다.

감히 인간종 따위가 신혈종 앞에서 저따위 반응을 보이다니.

“……당장 죽여주마.”

쾅!

근처 모래지대를 박살 내며 쇄도한 라스타가 수강을 내지른다.

그에 맞서.

“흐읍!”

건방진 인간종도 나름 땀을 뻘뻘 흘리며 검기를 끌어낸다.

하나, 인간종이 낭패라는 얼굴을 해 보이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콰-앙!

쨍그랑!

“이, 이런…….”

몇 번 손속을 겨루지도 않았는데도, 검기가 수강을 도저히 버텨내지 못했던 것이다.

그 결과에 따른 다음 행동은 신속했다.

“크윽! 다, 다음에 보자!”

파파팍!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치는 인간종을 보며, 라스타는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제대로 상대를 알아보지도 않고 덤빈 모양인데…….

“그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해주마.”

콰앙!

그의 은빛 신형이 인간종을 향해 쏘아졌다.

쿠구구구-

발을 한 발짝 내디딜 때마다 인간종과의 거리가 좁혀진다.

정돈되어 있기보다는 거칠고, 신중하기보다는 야성적인 발걸음.

그 어마어마한 속도는, 마치 맹수가 사냥감을 추격하는 걸 연상케 했다.

그런데 그가 인간종을 거의 다 따라잡았을 때였다.

파삭-

밑의 모래지대가 다시 꺼지더니, 두 명의 인영이 튀어나온다.

‘매복!’

[이강현, 1위]

[레이센 란, 13위]

새로이 나타난 인간종들을 확인한 라스타가 미간을 굳혔다.

‘13위에, 이강현까지……. 크윽…… 셋이나 동맹을 맺다니……!’

둘이면 몰라도, 설마 셋이나 동맹을 맺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한 그였다.

세 명이 동맹을 맺는다면 손해 보는 기여도가 상당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건 아랑곳하지 않은 채, 시꺼먼 갑주를 장착한 이강현이 파고들어 온다.

한창 뛰는 데에 열중하던 라스타가 미처 자세를 정비하기도 전이었다.

쾅! 콰콰쾅! 콰쾅!

“큭!”

갑작스러운 기습에 라스타의 입에서 침음이 새어 나왔으나, 강현은 공격을 늦추지 않았다.

콰쾅! 쾅!

더욱 거세게 놈을 밀어붙였고.

“크, 크아악!”

이윽고 잔뜩 밀린 놈이, 황급히 물러난다.

파파팟-

강현은 거리를 벌리는 라스타를 잠깐 응시했다.

여태까지는 이런 상황에서 적에게 잠깐의 시간을 줄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강현이 성공적으로 기습을 했다고 한들, 적들이 작정하고 거리를 벌리려고 한다면 따라잡는 데에 시간이 걸렸었으니까.

그러나 지금은 말이 다르다.

“지금!”

“알겠네!”

“알았어요!”

쐐애애액-

화르르르륵!

어느새 다시 돌아온 세르반테와 대기하고 있던 레이센 란의 합공은, 라스타로 하여금 숨을 돌릴 틈도 주지 않게 만들었고.

“이, 이놈들!”

세르반테와 레이센 란의 매서운 합공에, 라스타의 몸에 혈선들이 그어지기 시작한다.

적에게 조금의 틈도 주지 않은 채, 한 번의 기습으로 끝장을 내는 것.

이게 바로 강현이 바랐던 그림이었다.

“크아아아아악! 죽여버리겠다-!”

마지막 발악인지, 라스타의 몸이 은빛으로 물든다.

필시, 본신으로 변하려고 하는 거겠지.

다만, 그가 본신의 모습을 꺼내는 일은 없었다.

[스킬, 순보[Lv.4]를 발동합니다.]

[스킬, 순보[Lv.4]를 발동합니다.]

…….

순보로 다가간 강현이, 그대로 끝을 내버렸으니까.

쿠-웅.

[참가자 라스타를 쓰러뜨리셨습니다.]

[100pt를 나누어 획득합니다.]

[제한된 무력의 7%를 해제합니다.]

반쯤 커진 은빛 여우가 쓰러지면서, 주변에 굉음이 울려 퍼졌고.

“…….”

다음 순간, 안색이 일변한 강현이 빠르게 소리쳤다.

“이제 물러나야 됩니다!”

“응……?”

“네? 그게 무슨 말-”

“일단 빠지세요!”

강현이 영문을 모르는 세르반테와 레이센 란을 데리고 서둘러 근방을 벗어난다.

그리고 그들이 떠난 직후.

[바이토넬, 3위]

[아륵크락타크, 4위]

…….

최상위권 참가자들이 등장했다.

“호오, 쥐새끼들은 빠져나간 거 같다만…… 대어가 걸렸군. 이 외계종. 잘 만났다.”

“그르르륵…….”

주변을 둘러본 그들은 금세 서로를 발견했고.

콰-아앙!

이내 핀 포인트를 사이에 두고는, 전투를 벌이기 시작했다.

주변을 그야말로 개판으로 만드는, 엄청난 규모의 전투를.

쾅! 콰콰콰쾅!

최상위권 참가자들이 4-1 핀 포인트에서 벌이는 전투의 여파는 근처 수백 미터까지 영향을 미쳤다.

쿠구구구…….

그 여파가 서서히 잦아들기 시작하는, 4-1 핀 포인트에서 한참 떨어진 곳.

스스스스…… 푸확!

아무것도 없던 모래지대에서 돌연 사람 머리통 세 개가 튀어나온다.

강현과 세르반테, 레이센 란의 것이었다.

“파하!”

“푸하! 드디어 숨통이 트이겠군!”

땅굴로 수백 미터에 달하는 거리를 이동해서일까.

얼굴을 잔뜩 구긴 강현과 세르반테가 거칠게 몸을 털며 마른세수를 반복하자, 그들의 전신에 잔뜩 묻어 있던 모래들이 후두둑 떨어져 내린다.

하나 얼굴과 몸을 터는 걸로 깔끔해지기에는 역부족한 상태였다.

“후우…… 잠깐만요.”

그런 그들의 차림새는, 레이센 란의 지팡이에서 뿜어진 물과 바람이 그들을 씻겨 내리고 나서야 깨끗해졌다.

“으하하하! 고맙네! 동맹이라는 게 나쁜 게 아니구만!”

“이 정도로 뭘요.”

호탕하게 웃는 세르반테에게, 레이센 란이 짤막하게 대꾸한다.

그러더니 고개를 강현에게 향한다.

“그나저나, 어떻게 안 거예요?”

“그래, 강현. 나도 궁금했네. 놈들이 올 걸 대체 어떤 방법으로 안 건가? 내 기감에는 잡히지도 않던데!”

“글쎄요.”

강현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저도 저놈들이 올 줄은 몰랐죠.”

“네? 그럼……?”

“그냥 아직 점령되지 않은 핀 포인트 근처에서 소란이 일어났으니, 눈치를 보던 근처 참가자들이 몰려올 거라는 직감이 들었던 것뿐입니다.”

“아니, 직감으로 그렇게 소리를 친 거였다고요?”

“예.”

“하…… 육감이라도 있는 거예요? 나는 그쪽이 알람 아티팩트라도 설치해 둔 줄 알았는데, 고작 직감이었다니.”

다소 어처구니없다는 얼굴을 해 보이는 레이센 란.

“으허허, 레이센! 내가 잠깐 강현이랑 같이 다니면서 알게 된 건, 웬만하면 강현의 말을 잠자코 따르는 게 좋다는걸세! 잘못된 판단을 하는 경우가 거의 없어!”

세르반테가 껄껄 웃어 보이다…… 가.

“아저씨는 왜 또 레이센이라고 불러요? 레이센이라고 부르지 말라니까요?”

“가, 갑자기 왜 나한테…….”

눈에 쌍심지를 켠 레이센 란이 세르반테를 갈구기 시작한다.

-ㅋㅋㅋㅋ혼란 온 레이센 란한테 괜히 세르반테만 두들겨 맞네

-방장이 뜬금없는 행동한 걸 처음 보면 저럴 수밖에 없지ㅋㅋ

-음? 이번 미션 유입인데 님들도 이강현 행동 이해 못 했음?

-ㅇㅇㅇ본선 초반에는 갈고리수집가였음

-ㄹㅇㅋㅋ 맨날 뜬금없이 이득 봐서 물음표 남발했었지

채팅창을 보자 레이센 란에게 동조하는 시청자들이 눈에 들어온다.

‘하긴.’

자신이 종종 보이는 확신에 가까운 직감에 기반한 행동을 처음 본다면 누구라도 그럴 것이었다.

‘리얼’과 더 비욘드를 거친 자신이야 그 직감에 적절한 근거가 있다는 걸 알지만, 처음 보는 이들이 그걸 느낄 리는 없었으니까.

‘레이센 란은 그 당황을 세르반테한테 풀고 있는 거 같긴 하다만…… 나쁠 건 없지.’

팀원들의 긴장도 풀 겸, 저렇게 투덕거리는 건 나쁘지 않아 보였다.

“아무튼, 잠깐 쉬었다 갑시다.”

“가, 강현! 레이센 좀 말려주게! 아니면 나한테 대체 왜 이러는 건지라도…….”

“이 아저씨가 진짜! 레이센이라고 부르지 말라니까요?! 이름 부르지 말라고요!”

“그럼 뭐라고 불러야…… 가, 강현! 어딜 가는 건가? 레이센…… 이 아가씨 좀 말려주게!”

세르반테가 애타게 그의 이름을 불러왔으나, 강현은 매정하게 뒤를 돌았다.

저 다툼 사이에 끼는 것보다는 잠깐 혼자 생각하는 게 나을 것 같아서였다.

-저 성깔 있는 여자는 시끄러운 놈한테 왜 저러는 거냐.

‘글쎄요…….’

그냥 더러운 아저씨를 싫어하는 게 아닐까.

그때였다.

……콰콰콰쾅!

수백 미터 앞이자, 그들이 있던 4-1 핀 포인트 부근에서 거대한 폭발이 일어난다.

새카만 마기와 은빛의 에테르가 뒤엉키며 생겨난 폭발이었다.

‘바이토넬 그 외계종 놈이 일으킨 건가.’

그 폭발을 보자, 새삼 안전한 곳으로 대피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력이 제한된 그들로서는, 저 자리에 있어봐야 휘말릴 뿐이었을 걸로 보였기 때문이다.

‘바이토넬이 강한 건 알았다만, 그 외계종 놈도 저렇게나 강할 줄이야.’

그 멍청하게 떠다니는 허연 풍선처럼 생긴 놈이 어떻게 싸우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상당히 요란하게 싸우는 듯한데…… 저놈들도 핀 포인트가 급한 건가?

‘그건 아닐 겁니다.’

강현은 고개를 저었다.

이번 미션은 참가자들 중 누가 핀 포인트를 점령했는지 알려주지 않는다.

그걸 알려줌으로써 미션이 단순해지는 것을 염려한 듯했다.

하지만 알려주지 않아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는 것들이 있다.

‘저들은 이미 핀 포인트를 점령했을 겁니다.’

-흠…….

상식적으로 핀 포인트가 급한 놈들이 저렇게 소란을 일으키면서 싸울 리가 없다.

‘아마 주변을 어슬렁거리다가 인기척이 느껴지자마자 온 게 분명해.’

그 상대가 누구든 간에, 이 기회에 경쟁자를 줄이려는 의도가 엿보였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강현은 등골이 오싹해짐을 느꼈다.

‘만약 조금만 더 머물렀으면…….’

자신을 포함한 일행 또한 저 싸움에 그대로 휘말렸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됐다면, 고래 싸움에 등 터지는 새우 꼴을 면치 못했겠지.

-새우는 아니다. 이 몸은 네놈들 셋이 뭉친다면…… 상어 정도는 된다고 본다.

‘상어…… 열심히 해야겠네요.’

엔딜 펠란의 정정에도 강현은 웃을 수 없었다.

이번 미션을 뚫고 마지막 미션으로 진출하는 인원은 고작 여섯.

웬만하면 저들과 싸워야 된다고 봐야 했다.

그는 남은 시간을 확인했다.

[다음 차원으로 넘어가기 전까지 남은 시간: 1일 22시간 29분]

이 사막을 벗어나 세 번째 차원으로 이동하기까지 남은 시간은 약 이틀.

그 시간 안에 최대한 빨리 본신의 무력을 되찾을 필요가 있었다.

‘슬슬 그만 투덕거리고 이동하자고 해야겠군.’

강현이 고개를 돌렸을 때였다.

“…….”

방금의 폭발에 영향을 받았는지, 레이센 란과 세르반테가 입을 꾹 다물고 있는 게 보였다.

비단 입만 닫고 있는 게 아니라, 눈에서는 투쟁심이 이글거리는 중이었다.

필시 이들도 저 멀리서 벌어지는 최상위권 참가자의 싸움에 자극을 받은 거겠지.

‘세 번째 차원은…… 일종의 서바이벌 게임 같은 형식이었지.’

강현은 엘이 설명했던 각 차원의 특징 중 세 번째 차원의 특징을 떠올리며 말을 덧붙였다.

“일단 남은 시간, 그러니까 이 사막에 있는 동안에는 무력 제한을 푸는 데에 열중할 겁니다.”

“그 뒤는요?”

“다음 차원에서는 어떡할 계획인가?”

득달같이 물어오는 일행들.

하나 강현은.

“그다음 계획은…… 넘어가기 직전에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씩 웃어 보이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뭐예요! 말해줘요!”

“말해주게, 우리도 동맹의 일원이지 않나!”

새어 나오는 볼멘소리에도 강현은 몸을 돌려 앞서나갈 뿐이었고.

“우씨…… 같이 가요!”

“그래, 같이 가세나!”

이내, 붉은 머리칼의 마법사와 녹슨 갑옷의 방랑기사가 그 뒤를 따랐다.

* * *

[아, 수많은 시청자분들이 손에 땀을 쥐셨을, 바이토넬 참가자와 아륵크락타크 참가자의 치열한 전투가 결국 마무리됩니다! 1차전의 승리는 아륵크락타크 참가자입니다! 바이토넬 참가자, 이를 갈며 역소환됩니다! 하하, 벌써부터 저 두 참가자가 다음 차원에서 또 만나길 기대하는 분들이 많은 걸로 보입니다!]

[그거야 당연합니다, 중계를 하는 저도 정말 흥미롭게 지켜본 전투였는걸요! 물론, 근방에 있던 참가자들은 날벼락을 맞은 셈이었겠지만요!]

[예, 근처에 있던 두 명의 참가자가 그 전투에 휘말려 탈락해 버렸죠! 힘의 제한이 있긴 해도, 최상위권 참가자들의 무력을 실감할 수 있는 아주 유익한 시간이었습니다!]

[무려 세 참가자의 기여도를 흡수해서일까요? 아륵크락타크 참가자도 더없이 만족스러워 보입니다! 평소보다 더 높은 높이에 둥둥 떠 있네요]

[하하하, 그걸 보니 알겠군요. 그가 자신이 미처 놓친 참가자들이 있다는 건 모른다는 걸요!]

[그러고 보니 본격적인 전투가 벌어지기 전, 미리 눈치를 챈 인간종 참가자들이 유유히 빠져나갔었죠? 이강현 참가자가 주도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1위 참가자의 냉철한 판단력을 볼 수 있었던 시간이었습니다!]

[말씀드리는 순간, 화면이 전환되며 인간종 동맹이 나타나네요! 사막의 갑각종들을 처치하며 무력을 기르는 데에 집중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과연, 인간종 참가자들이 최상위권 참가자들과의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을지! 그것 또한 유심히 지켜볼 포인트일 것 같습니다!]

* * *

키오오오오…….

강현에게 눈을 부라리던 거대한 돈벌레가 힘을 잃은 채 쓰러진다.

쿠웅-

[20pt를 획득합니다.]

[제한된 무력의 2%를 해제합니다.]

지금의 2%를 더해, 해제한 무력은 이걸로 총 60%.

레벨도 다시 50까지 끌어 올릴 수 있었다.

‘기여도.’

…….

6위 라크리셀 셀라토리온(270pt)

7위 이강현(240pt)

8위 세르반테(220pt)

…….

기여도 순위를 불러내어 보더라도 썩 괜찮은 수치였다.

그 사실에 미소를 지은 강현의 시선이, 마지막으로 남은 시간으로 향한다.

[다음 차원으로 넘어가기 전까지 남은 시간: 0일 0시간 37분]

‘이 정도면…… 진짜 알차게 썼네.’

두 번째 차원으로 넘어온 참가자들이 24명이었던 걸 고려해 보면, 이틀도 안 되는 시간에 상위권으로 올라선 셈이었다.

거기에 일행과의 호흡도 더욱 정교하게 맞출 수 있었으니, 일석이조였다고 해야 할까.

“모여보시죠.”

세르반테와 레이센 란이 모여든다.

“이제 곧 세 번째 차원으로 넘어갈 겁니다. 세 번째 차원부터 미션 형식이 약간 바뀌는 건 기억하시죠?”

“그럼! 둥근 섬의 원하는 구역에서 시작할 수 있고, 일정 주기마다 원의 넓이를 줄인다고 하지 않았나! 참가자들이 중앙으로 모여들 수밖에 없도록!”

세르반테의 말대로, 엘은 말했었다.

세 번째 차원부터는 미션이 보다 ‘서바이벌’에 가깝게 바뀔 것이라고.

섬이라고 할 수 있는 고립된 공간 곳곳에 위치한 핀 포인트를 찾는 건 똑같지만, 섬의 원하는 구역에서 시작할 수 있다는 점이 달랐다.

강현이 ‘리얼’을 시작하기 전 잠깐 지구에서 유행했던 서바이벌 게임을 보는 것처럼 말이다.

“예, 맞습니다. 그 전략에 대해 설명하려 합니다. 정확히는, 어디서 시작할 건지를요.”

“외곽에 시작하는 게 정석 아닌가요? 기회를 엿보면서 서서히 중앙으로 접근할 거 같은데요.”

레이센 란의 물음에 강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대로 대다수 참가자들은 그러겠죠. 그렇지만 우리는 중앙에서 시작할 겁니다.”

“주, 중앙이요?!”

“괘, 괜찮겠나? 위험부담이 너무 커 보이는데.”

확실히 세르반테의 말마따나 핀 포인트를 점령하지 못한 상태라면 너무 위험부담이 클 터였으나, 강현은 단호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그는 알고 있었으니까.

“최상위권으로 올라서려면, 중앙에서 다른 참가자들을 해치우면서 살아남는 것밖에는 없습니다.”

다음 차원에서 ‘존버’는 답이 아니라는 걸.

전투.

오로지 치열한 전투를 통한 빠른 무력의 해제만이, 그들이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이었다.

그리고 그간 해제한 무력과 일행들과 맞춘 합.

그것들만 잘 따라준다면.

‘충분하지.’

다음 차원에서 최상위권의 대열에 합류하는 것쯤은 충분히 가능했다.

잠시 후.

[다음 차원으로 넘어가기 전까지 남은 시간: 0일 0시간 0분]

[다음 차원으로의 이동을 시작합니다……. 세 번째 차원은 ‘생존의 섬’입니다.]

[착륙하는 과정에서 원하는 위치를 설정할 수 있습니다. 1-1부터 9-9까지, 낙하산을 끌어 희망하는 위치를 선택해 주세요.]

쿠와아아아-

몸이 저 하늘 위로 이동하는 느낌.

강현은 어느새 자신의 몸이 다시 상공에 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그걸 알게 된 이상, 더 망설일 건 없었다.

[현재 착륙할 위치는 5-5입니다.]

강현은 저 아래 보이는 섬의 중앙을 향해, 거침없이 몸을 날렸다.

아래로 몸을 기울이자, 지상 쪽으로 더욱 빠르게 가까워진다.

괜히 생존의 섬이라는 명칭이 붙은 게 아니었는지, 밀림과 고원, 평야 등 다양한 지형이 골고루 섞여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중앙은……. 밀림이군.’

쿠오오오-

중앙의 지형을 확인한 강현은 고개를 돌렸다.

[다음 차원으로 넘어가기 전까지 남은 시간: 2일 23시간 59분]

그들에게 주어진 시간과 함께, 일행들을 보기 위해서였다.

“으하하하하!”

“…….”

세르반테는 껄껄 웃으며 그를 바짝 뒤따라오는 중이었고, 레이센 란은 이 하강이 싫은지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

강현은 그들을 향해 입을 열어보았다.

“다들- 이런.”

귓가에 워낙 바람 소리가 들리는 통에, 말이 전달되지를 않았다.

-출발하기 직전까지 실컷 의견을 나누어놓았으면서, 뭘 또 말하려는 것이냐.

‘그거랑은 다른 겁니다.’

엔딜 펠란의 핀잔에 강현이 짧게 대꾸했다.

아무리 팀원들과 미리 말을 맞추었다지만, 그의 머릿속에는 추가적인 브리핑 사안들이 가득했던 것이다.

‘그래도 잘 따라오고 있으니까…….’

곧 저들에게 말을 전달할 기회가 올 터였다.

[참가자의 안전한 낙하를 위한 낙하 마법을 가동합니다.]

잠시 뒤, 낙하산이 펴짐에 따라 귓가를 잠식하던 소음이 멎어 들었다.

“주변을 살피세요! 우리와 비슷한 생각으로 중앙을 노리는 놈들이 있을 겁니다!”

“알겠네!”

“바로 확인할게요!”

얼마 지나지 않아 세르반테가 외쳤다.

“한 놈 발견했네! 정면 기준으로 동쪽일세!”

“저도 한 명 찾았어요! 남동쪽 방향이에요!”

일행들이 중앙에 안착할 참가자들을 하나둘씩 찾아 나간다.

과연 해당 방향을 보자 두 명의 참가자들이 내려서는 게 눈에 들어왔다.

거리가 꽤 됐기에 종족까지는 인식할 수 없었으나, 참가자라는 건 분명했다.

‘나만 찾으면 되겠네.’

강현은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보았다.

‘서쪽은……. 없고. 정면에도 없군. 뒤쪽은…….’

뒤를 돌아본 강현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들의 바로 뒤에, 구릿빛 피부의 요괴종이 사악한 미소를 짓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강, 16위]

구릿빛 황소가 인간의 형상을 한 듯한 생김새를 한 요괴종이었다.

강현과 눈이 마주친 요괴종의 입가에서 미소가 사라진다.

기습할 생각에 싱글벙글하고 있던 거겠지.

강현이 수수께끼의 검을 꺼내며 크게 외쳤다.

“바로 뒤에 하나 있습니다! 내려가자마자 충돌할 것 같으니 준비하세요!”

“뒤에 있었다니,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군!”

“준비할게요!”

세르반테와 레이센 란이 각각 검과 지팡이를 꺼내 들었고.

지상에 일행들과 요괴종의 발이 동시에 닿았다.

털썩.

그리고 그다음 순간, 일행들의 신형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스킬, 광검[Lv.7]을 발동합니다.]

[스킬, 순보[Lv.3]를 발동합니다.]

슈와아아-

요괴종을 향해 강현과 세르반테가 좌우로 돌진하는 한편, 후방의 레이센 란이 주문을 읊기 시작했다.

“이놈들!”

요괴종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허공에서 수백 개의 가시들이 박힌 큼직한 방망이를 꺼내 들더니, 샛노란 요기를 불어넣은 채 마주 달려든 것이다.

“세르반테, 제가 먼저 맡겠습니다!”

촤라라라락! 철컥!

[스킬, 광명의 눈[Lv.2]을 발동합니다.]

아르크트와 적흑의 투구, 망토를 장착한 강현이 요괴와 맞부딪쳤다.

콰-앙!

“큭!”

강현의 입에서 침음이 새어 나왔다.

괜히 황소처럼 생긴 게 아닌지, 어마어마한 괴력이 느껴졌다.

만일 지난 이틀 동안 무력을 충분히 해제하지 못했더라면, 이 한 번의 충돌로 저 멀리 튕겨 나갔을 수도 있었으리라.

“크흐흐……. 죽어라!”

비웃음을 머금은 요괴가 다시 방망이를 휘둘러 온다.

쿠오오오-

추가적인 요기를 투입했는지 그 색깔이 훨씬 짙어져 있었는데, 가공할 기세가 전해져 왔다.

부딪친다면 필시 내장이 진탕될 만한 위력.

하나 다행스럽게도 강현이 저 방망이를 받아내는 일은 생기지 않았다.

파해검법 제3식, [파도 타기]

슈우우우-

허공을 유영하듯 요괴에게 접근한 세르반테가, 그보다 한발 앞서 검을 휘둘렀으니까.

파해검법 제2식, [파도 베어내기]

세르반테의 검에서부터 내뿜어지는 푸른 검기에, 눈살을 찌푸린 요괴가 방망이의 경로를 비튼다.

“검강도 아니고, 검기 따위로 나를 막을 수 있을 듯싶으냐!”

콰우우욱-

단숨에 검기를 갈라버리는 방망이.

방망이는 그러고도 기세를 잃지 않고 세르반테를 노려갔다.

파해검법 제1식, [작살 던지기]

세르반테가 호기롭게 검을 맞대보았으나, 피를 토하며 나가떨어질 뿐이었다.

-와우, 쟤 좀 세다

-좀 센 게 아니라 미친 듯이 센데?

-쟤 우강이잖아. 무력으로만 치면 전체 10위권 내임

-ㅇㅇ대가리가 나빠서 그렇지

-아 진짜? 어쩐지

시청자들이 떠드는 걸로 보아, 원체 강하기로 소문난 참가자인 듯했다.

하긴, 스스로의 강함에 자신이 있으니까 중앙으로 오기야 했을 터였다.

바로 그 점이,

‘놈의 패착이 되겠지만.’

강현은 힐끗 뒤를 돌아본 뒤, 망토를 펄럭이며 달려갔다.

화르르륵!

투구와 망토에서부터 일어난 선홍빛 화염이 요괴종에게 짓쳐든다.

“흥!”

푸화아악!

가소롭다는 듯 코웃음을 친 요괴가 입에서 독으로 보이는 보랏빛 운무를 방출함으로써 맞서 갔지만.

그 독무가 강현의 화염과 맞닿는 일은 없었다.

화르르르르륵!

느닷없이 요괴의 주변에 피어오른 거대한 불길이, 독무를 순식간에 집어삼켜 버렸으므로.

말할 것도 없이 후방에 있던 레이센 란의 작품이었다.

강현과 세르반테가 투덕거리는 동안, 그녀 또한 놀고 있던 게 결코 아니었던 것이다.

‘오히려 놀았다기보다는…….’

자신이 가진 최강의 화염 마법을 준비했는지, 얼굴이 창백해져 있었다.

물론 그녀가 지친 만큼, 그 효과만큼은 확실했다.

“크아아악?!”

요괴가 엄청난 양의 요기를 방출했음에도 더욱 거세게 요괴의 몸을 불태웠다.

거기에 강현의 화염까지 더해지자, 불길은 걷잡을 수 없이 거세져 갔다.

“크으……. 내가 여기서 쓰러질 줄 아느냐……!

“어.”

짓씹듯 내뱉는 요괴에게 담담하게 답한 강현의 신형이 쏘아졌고.

쾅! 콰콰쾅!

광명의 눈에 보이는 약점들을 집요하게 공략해 갔다.

“이, 이놈이!”

요괴의 몸에 혈선들이 하나둘 그어져 간다.

아무리 괴력을 보유하고 있다고 한들, 온몸이 불길에 휩싸인 채 온전한 힘을 낼 수는 없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스킬, 섬광[Lv.6]을 발동합니다.]

푸욱-

“크아아아아악!”

끝내, 섬광에 목을 꿰뚫린 요괴가 쓰러진다.

쿠웅-

전체 10위권의 무력을 가진 참가자와의 전투에서 승리한 것이다.

[참가자 우강을 쓰러뜨리셨습니다.]

[250pt를 나누어 획득합니다.]

[제한된 무력의 12%를 해제합니다.]

제한된 무력이 해제됐다는 문구가 나타난다.

‘이걸로 해제한 무력은 모두 72%인가.’

이 정도면 중앙에서 다른 참가자들을 잡아먹으면서 큰다는, 처음의 계획을 잘 달성하고 있다고 봐도 무방했다.

“아저씨, 괜찮아요?”

“끄응……. 저렇게 괴물 같을 줄 알았으면 무리하더라도 검강을 꺼낼 걸 그랬네.”

저 뒤에서 레이센 란이 세르반테의 손을 잡아 일으킨다.

틈날 때마다 세르반테를 갈구는 레이센 란이라고는 해도, 결국 그를 의지하는 동료라고 여기는 거겠지.

강현은 검에 묻은 피를 털어내며 말했다.

“방금 전투로 소란스러웠을 테니까, 일단 근처를 벗어납시다.”

강현은 그런 그들을 데리고는 전장에서 벗어났다.

세 번째 차원까지 넘어온 참가자들은 모두 열둘.

‘많은 수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적은 수도 아니야.’

싸움의 낌새를 눈치챈 참가자들이 득달같이 달려올 가능성은 다분했다.

“다른 참가자들이 보였던 곳으로 쭉 가보죠.”

강현은 조금 전 상공에서 확인했던 중앙의 두 참가자들이 있을 동쪽으로 방향을 잡고는 앞서 나갔고, 팀원들이 그 뒤를 따랐다.

일행이 두어 시간가량 걸어나갔을 때였다.

“강현! 저 앞에 이상한 건축물이 보이네!”

세르반테의 말대로, 눈앞에 신기하게 생긴 건축물이 보이는 게 아닌가.

‘적흑의 천사’의 궁전 최상층에서 봤던 새하얀 제단과 흡사하게 생긴 제단이었는데, 그것보다는 크기가 훨씬 컸다. 인간이 아니라, 거인족이 누울 수도 있을 만큼.

“접근해 봅시다.”

제단의 정체는 곧 밝혀졌다.

[5-5번 핀 포인트를 발견했습니다.]

더 가까이 다가가자, 이 같은 메시지가 떠올랐던 것이다.

‘당분간은 참가자들이랑 싸우는 데에 중점을 두려 했는데…….’

뜻하지 않게, 여섯 개의 핀 포인트 중 하나를 발견하게 됐다.

“제가 손을 대볼게요.”

레이센 란이 제단에 손을 가져다 댄다.

[참가자 레이센 란이 5-1 핀 포인트를 점령 중입니다…….]

[지도에 5-1 핀 포인트의 위치가 표시됩니다.]

지난 차원들과 마찬가지로, 똑같이 근처에 있을 참가자들에게 메시지가 전달되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레이센 란의 눈이 커진다.

“이거……. 점령하는 데에 드는 시간이 짧아졌어요!”

“……!”

강현이 급히 되물었다.

“몇 분입니까?”

“원래 30분이었죠? 지금은 15분이에요!”

그렇게 말한 레이센 란이 손을 뗐다가, 다시 갖다 댄다.

“혹시나 해서 손을 떼었다가 다시 대봤는데……. 메시지는 처음 한 번만 나타나나 봐요!”

레이센 란의 말대로였다.

그녀가 손을 떼었다가 다시 갖다 댔음에도, 근처 참가자들에게 메시지가 전달되지 않은 것이다.

‘흠, 써먹을 구석이 있는 거 같기도 한데…….’

그런 생각을 하던 강현이 눈을 부릅떴다.

파바바바박!

엄청난 속도로 이곳으로 다가오는 기척‘들’을 느꼈기 때문이다.

“조심!”

그가 외치자마자 오른쪽과 왼쪽에서 두 인영이 밀림을 뚫고 튀어나온다.

허공을 둥둥 떠다니는 허연 풍선과, 새파란 머리칼을 한 사내였다.

[아륵크락타크, 4위]

[수운, 7위]

-하나는 외계종이고……. 나머지는 용종이군. 헤츨링으로 보이긴 하다만…… 무시해선 안 된다.

‘그런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무시는커녕, 무려 최상위권 참가자들이 둘씩이나 등장해서인지 일행이 경직됐다는 게 느껴진다.

그러나 가만히 있을 틈은 없었다.

등장한 참가자들이 그들 일행을 발견한 직후,

“@ @#[email protected]#$…….”

“크하하하! 어딜 핀 포인트를 먹으려고 하느냐!”

각자 은빛 소용돌이와, 퍼런 파도를 날려왔으니까.

촤라라라라락! 철컥!

그 즉시 아르크트 1단계와 적흑의 투구, 망토를 장착한 강현이 은빛 소용돌이를, 레이센 란의 불꽃과 세르반테의 검기가 퍼런 파도를 막아간다.

콰콰쾅!

크나큰 충돌 이후, 아륵크락타크와 수운의 눈이 마주친다.

“Um…….”

“……크흠.”

이어서 잠시 찾아온 소강상태.

호기롭게 등장한 것과 다르게 둘 다 쉽사리 몸을 떼지 않았는데, 강현은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서로의 눈치를 보는 건가.’

자신이 움직인다면, 다른 한쪽이 자유롭게 사태를 관망할 수 있게 되는 걸 경계하는 걸로 보였다.

즉 어느 한쪽도 함부로 움직이기 힘드니, 이 소강상태가 당분간 지속된다고 봐도 될…….

그 순간이었다.

‘잠깐.’

강현의 머리에 괜찮은 계책이 떠오른 것은.

잘만 하면, 이 상황을 써먹을 수 있을 것 같은 계책.

‘엔딜 펠란, 이 전략 어떻습니까? 이 소강상태를 유지하는 쪽으로 가면서…….’

강현은 곧장 엔딜 펠란에게 계책을 설명해 주었고,

-……약삭빠른 놈.

그로부터 욕지거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의 욕지거리는, 이 상황에서 강현이 가장 듣고 싶은 소리였다. 그가 떠올린 계책이, 충분히 통할 수 있다는 뜻이었으니 말이다.

‘좋아, 밀고 나간다.’

재빨리 계책을 정돈한 강현이 천천히 입을 달싹였다.

-아아, 제 말 들립니까? 이 상황이 계속 유지되면 말입니다…….

* * *

전 차원 가운데에서도 마계과 함께 최상위 차원으로 꼽히는 용계.

그러한 용계 중 하나인 제2 용계의 기대주, 수룡 수운은 전방의 인간종들을 훑어보았다.

[세르반테, 19위]

[레이센 란, 13위]

대다수 종족을 아득히 뛰어넘은, 드래곤의 오감이 인간들의 반응을 하나씩 수집한다.

“크흠…….”

“…….”

낡아빠진 갑옷을 입고 있는 중년인의 동공에서는 미세하게 흔들림이, 핀 포인트에서 손을 뗀 붉은 머리칼의 여자에게서는 손발의 떨림이 전해져온다.

저들 스스로도 의식하지 못할 만큼 미세한 정도의 반응이었으나, 수운의 푸른 눈은 정확하게 그것을 파악했다.

세상에 나오는 순간부터 만물을 읽는 능력을 자연스레 터득하는 드래곤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누가 인간 아니랄까 봐 잔뜩 긴장하고 있군.’

가소롭다는 듯 코웃음을 친 수운은 시선을 천천히 그 옆으로 이동시켰다.

그러고는 눈에 띄게 미간을 찌푸렸다.

[이강현, 1위]

두 인간들과 달리, 이강현에게서는 그 어떤 긴장의 기색도 느껴지지 않아서였다.

저 풍선 외계종과 자신을 눈앞에 두었음에도 불구하고 긴장은커녕, 더없이 침착해 보였다.

그리고 바로 그 점이 수운의 심기를 건드렸다.

“……건방지게.”

마음 같아서는 당장 응징해 주고 싶었지만, 섣불리 발을 뗄 수가 없었다.

인간종들이 걸리는 건 물론 아니었다.

바로 풍선 괴물 때문이었다.

‘아륵크락타크…….’

수운은 잘 알고 있었다.

저 외계종은 절대 만만한 상대가 아니라는 것을.

여러 미션에서 본 저놈은 최상위권 참가자의 무력을 지니고 있었다.

모든 무력을 해제한 게 아닌 지금, 도리어 그가 역으로 당할 가능성도 충분하리라.

‘게다가 함부로 인간이나 풍선과 싸웠다가 나머지 한 쪽이 나를 공격하기라도 한다면…….’

자칫 핀 포인트를 앞에 두고 물러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만들어질지도 모른다.

그게 아니라면, 자신과 한쪽이 싸우는 동안 나머지가 공짜로 핀 포인트를 점령하거나.

수운의 눈이 꿀렁이는 아륵크락타크에게 향했다.

‘저놈과 전면전을 펼치면 힘들다. 역시 난전을 유도해야 하는 건가.’

그는 이미 아륵크락타크과의 싸움만을 상정했다.

인간종들을 어떻게 할지는 고려하고 있지도 않았다.

“……빌어먹을 놈들.”

머리를 굴리던 수운이 느닷없는 욕을 내뱉었다.

-노잼

-왜 가만히만 있냐

-빨리 뭐라도 좀 해보셈

시야 한구석의 채팅창에 망할 시청자들의 성토가 시작돼서였다.

‘아주 틈만 나면 지랄이지.’

그의 방에 들어오는 시청자들은 더 비욘드가 진행되는 내내 한결 같았다.

대체 ‘드래곤’이라는 종족의 기댓값이 얼마나 높은 건지, 조금이라도 지지부진한 진행을 용납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 탓에 수운의 기분까지 덩달아 안 좋아진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다만, 시청자들의 말과 달리 수운은 슬슬 움직일 생각이었다.

스스로의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아서였다.

‘나는 지배자께서 직접 살펴주시는 수룡족의 기대주, 수운이다.’

그는 자신의 신분을 되뇌었다.

드래곤 중 <초월자>는 많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강한 제2 용계의 지배자, 수룡왕에게 직접 예쁨을 받고 있는 그였다.

그런 그가 눈치만 보고 있다니?

이대로 가다가는 어디 가서 말도 꺼내지 못하리라.

스아아-

그의 동공이 가늘어지며, 서서히 깊은 몰입을 이끌어간다.

온 신경을 풍선에게 집중하는, 일종의 전투 태세에 들어가는 것이었다.

촥-

수운이 손바닥을 뻗자, 휘몰아치는 푸른 에테르가 둥글게 감겨간다.

마치 바다의 파도를 한 줄기 끌어온 듯한, 보는 이로 하여금 놀라움을 금치 못하게 하는 광경.

쿠오오오-

계속해서 에테르를 뭉치자 그 크기는 가히 거대한 포탄과도 같아졌다.

“받아라.”

그리고 그것은 이내 수백 개의 작은 포탄으로 나뉘어 전방에 내쏘아졌다.

콰콰콰콰-

수백 개의 포탄이 빼곡히 적들을, 아륵크락타크와 인간종들을 덮쳐간다.

그는 아륵크락타크와 인간종 중 어느 한쪽만을 노리는 게 아닌, 양쪽 모두를 노리기로 했다.

‘물방울에 몸이 터진다는 게 무슨 뜻인지 친히 알게 해주지.’

부랴부랴 반격을 준비하는 적들을 본 수운이 사악하게 웃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의 얼굴이 구겨졌다.

그의 포탄 세례에 맞서.

“강현!”

“알아서 막죠!”

인간들은 각각 진홍빛의 불꽃과 푸른 검기로.

“#$ %.”

아륵크락타크는 은빛 거미줄을 뿜어내 어렵지 않게 그것들을 막아냈기 때문이다.

파바바박…….

각기 불꽃과 검기, 거미줄에 막혀 금세 자취를 감춘 포탄들.

그걸 본 수운의 눈이 가늘어졌다.

‘저 풍선은 그렇다 치더라도…….’

수운이 예상했던 것보다 인간들이 날카로운 방어를 보여주었다.

인간을 경시하던 그가 아주 약간은 인식하게 될 정도로.

그는 동작을 멈추고 다시 적들을 노려보았다.

이번에는 인간들도 시야에 넣은 채였다.

그리고 수운이 다시 제자리에 멈춤에 따라 다시 정적이 찾아왔다.

“…….”

일 분인지, 삼 분인지, 오 분인지 모를 정적 속에서 수운은 생각했다.

‘저 인간 놈들도 딱히 적극적으로 나설 마음이 없는 듯하군. 저 풍선 놈도 그건 마찬가지…… 어?’

그가 눈을 부릅떴다.

적들을 살피는 와중 이상한 걸 발견해서였다.

‘그러고 보니, 여자가 없잖아?’

인간 여자가, 레이센 란이 없었던 것이다.

분명 핀 포인트 근처에 있었던 것 같았는데, 어딜 갔는지 도무지 보이지를 않았다.

‘대체 어딜…… 설마 동맹을 남겨두고 도망가기라도 한 건가? 아니지, 설마-’

그의 눈이 커졌다.

여자가 있던 곳으로 드래곤 특유의 감각을 집중하자, 알 수 있었던 것이다.

그 여자는 사라진 게 아니라, 처음 있었던 곳에 그대로 있었다는 걸.

단지.

‘투명화 마법!’

어쭙잖은 재주로 잠깐 자신의 눈을 피했을 뿐이었다는 걸.

그때였다.

스르르르-

핀 포인트 옆에 붉은 머리칼의 여자가 다시 나타남과 함께.

[남은 시간 : 0일 0시간 0분.]

[참가자 레이센 란이 5-5 핀 포인트의 점령을 완료했습니다.]

결코 떠올라서는 안 될 메시지가 떠오른다.

인간종들이 핀 포인트를 점령했다니.

“……!”

“……!”

아륵크락타크가 거체를 부르르 떨었고, 수운은 이를 아득바득 갈았다.

자신과 아륵크락타크라는 최상위권 참가자를 양옆으로 마주쳤음에도 소극적으로 행동하던 이유를 깨달아서였다.

“네놈들, 처음부터 이럴 생각으로 시간을……!”

그런 그에게 이강현은 씩 웃어 보였고.

“그럼, 다시 서로 할 거 하자고.”

그 말을 끝으로.

파바바바바박!

그들의 몸을 푹 꺼지게 만드는 땅굴을 통해, 기습적으로 도망가 버린다.

“이 개 같은 것들!”

“#$%#$%!”

직후 분노한 푸른 파도와 은빛 에테르가 땅 밑을 휩쓸었으나, 인간들은 이미 자취를 감춘 뒤였다.

고오오오-

그런데 미처 감정이 가라앉기도 전.

“@#$…… $%^.”

“어?”

수운은 자신이 졸지에 잔뜩 화가 난 아륵크락타크와 단둘이 마주보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자, 잠깐!”

쿠화아아악-!

그는 주변 공간을 잠식하는 아륵크락타크의 은빛 거미줄에 저항한 끝에 겨우 자리를 피할 수 있었다.

아륵크락타크가 도중에 어딘가로 둥둥 사라져 버렸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인간 새끼들…… 가만두지 않겠다!”

한참을 물러난 수운이 분통을 터뜨렸다.

감히 쥐새끼처럼 핀 포인트를 몰래 점령해?

그야말로 눈 뜨고 코를 베어버린 셈이었고, 절대 용서할 수 없는 일이었다…….

‘방금의 그 행위를, 죽을 때까지 후회하게 되리라……!’

수운은 어떤 수를 써서든 놈들을 죽이기로 마음먹었다.

그것이 설령, ‘부정’을 저지르는 것이라고 해도.

스윽-

핏발 선 눈을 부라린 수운이 품에서 푸른 비늘을 꺼내 들었다.

수룡왕이 친히 하사한 ‘비늘’이었다.

‘도와주십시오, 지배자이시여-!’

시청자들이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비늘을 남몰래 감싸쥔 그는 간절히 바랬다.

그들의 왕이 인간들을 벌해주기를.

그래서 그 연놈들이, 후회와 절망을 뼈저리게 느끼기를.

그의 염원이 닿았던 것일까.

슈와아아-

이내 푸른 비늘에 검은빛이 감돌았고.

[기꺼이…… 도와주마…….]

뚝뚝 끊기는, 하나 아득한 ‘격’ 느껴지는 목소리가 수운의 귓가에 들려왔다.

* * *

“우웨에에엑!”

세르반테가 연거푸 피를 토했다.

“세르반테, 괜찮습니까?”

“괜찮아요, 아저씨?”

강현과 레이센 란의 물음에도 구역질만을 반복할 정도로 세르반테의 내상은 가볍지 않았다.

-흠, 아까 드래곤의 공격을 막는 과정에서 내상을 입었었나.

‘예, 어쩔 수 없었습니다. 세르반테가 멀쩡한 척을 해줬어야 됐어요.’

레이센 란이 다시 핀 포인트에 손을 갖다 댔는데도 메시지가 떠오르지 않는다는 걸 확인한 강현은 그녀에게 지시했다.

자신들이 어떻게든 시간을 벌 테니, 한 번 핀 포인트에 손을 대보고 있으라고.

‘해볼 만한 이유는 있었으니까요.’

수운과 아륵크락타크가 자신들에게는 별로 신경 쓰지 않고 서로에게만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는 점.

또 신경을 써도 자신에게나 쓰지, 세르반테와 레이센 란은 안중에도 없다는 걸 간파하고 즉석으로 짠 전략이었다.

한데 그의 말을 따라 투명화 마법까지 쓴 레이센 란이 핀 포인트의 점령을 시도하던 도중, 수운이 물의 포탄을 날려왔다.

‘그때가 위기였었지.’

작전을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강현과 세르반테가 그 포탄들을 쉽게 막아낸 것처럼 ‘보일’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놈은 강현과 세르반테가 넉넉하게 그것들을 막아낸 줄 알겠으나, 그건 어디까지나 ‘척’에 불과했다.

적흑의 아티팩트를 발동했던 강현이야 큰 이상이 없었지만, 검기로 포탄들을 막아낸 세르반테는 상당한 내상을 입었던 것이다.

-흠, 그래도 어마어마한 이득을 본 듯한데, 아닌가?

‘세르반테의 내상만 빼면요.’

핀 포인트를 점령하면서 다음 차원 진출을 확정 짓긴 했으니, 어마어마한 이득은 맞았다.

‘세르반테가 진정되면…… 돌아다니면서 이 차원의 종족들을 처리해야겠어.’

핀 포인트를 예상보다 다소 이르게 점령하기는 했어도 마음이 느슨해질 여유는 없었다.

이 차원에서 할 수 있는 건 다 하고 넘어가야 했다.

잠시 후.

“강현, 괜찮아졌네. 그만 가세나.”

세르반테가 진정되자 강현은 일행을 이끌고 근처를 돌아다니며 세 번째 차원의 종족들인 수인들을 부지런히 처리했고.

[제한된 무력의 4%를 해제합니다.]

[제한된 무력의 6%를 해제합니다.]

[제한된 무력의 3%를 해제합니다.]

…….

[제한된 무력의 2%를 해제합니다.]

[제한된 무력을 모두 해제하셨습니다.]

잠도 자지 않고 이틀간 사냥에만 매진한 끝에, 모든 무력의 제한을 해제할 수 있었다.

“으하하하! 이제야 몸이 가벼워졌구만!”

“좋았어……!”

그 사실에 세르반테가 호기롭게 웃어보이고, 레이센 란의 얼굴이 화색이 감돈다.

하지만 그들의 미소는 오래가지 못했다.

“……#$%#$%.”

저 멀리서, 요근래 익숙해진 괴성이 들려왔으니까.

“모두 전투 준비를!”

강현이 외침과 동시에.

꿀렁-

이틀 전 마주했던 허여멀건 큼직한 풍선, 아륵크락타크가 다시금 모습을 드러낸다.

[아륵크락타크, 4위]

-호오, 설마 이틀 동안 추적해온 건가? 끈질기군.

‘그러게 말입니다. 이걸 운이 좋다고 해야 하나 안 좋다고 해야 하나…….’

강현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나마 자신들이 모든 무력 제한을 해제했을 때 놈이 등장한 걸 다행이라고 여겨야 할지 알 수 없어서였다.

물론 하나만은 확실했다.

‘지금이 저놈과 싸울 적기이기는 해.’

핀 포인트를 점령했기에 죽어도 상관없는 데다가, 이번에는 수운도 없다.

즉, 놈과 마음 편하게 일대일로 싸울 여견이 만들어졌다는 뜻.

강현은 일행들을 둘러보았다.

모두 그를 보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군.’

말하지 않아도 통하는 게 있는 모양이었다.

한계를 시험하고, 더불어 더 위로 나아가기 위해.

저 아륵크락타크는 반드시 이겨야 할 상대였다.

“……갑니다.”

쾅!

그 길로 땅을 박찬 강현은 놈에게 달려들었고.

푸른 검기, 붉은 불꽃을 두른 동료들과 함께, 아륵크락타크가 내뿜는 은빛 거미줄과 그대로 격돌했다.

아륵크락타크와의 거리가 빠르게 좁혀진다.

놈과의 거리를 가늠하면서, 강현은 남은 시간을 확인했다.

[다음 차원으로 넘어가기 전까지 남은 시간: 0일 12시간 3분]

처음 주어졌던 사흘의 시간 중 남은 건 반나절.

여태까지 다른 참가자와 부딪쳤던 주기로 보아, 지금의 싸움이 이 차원에서의 마지막 전투가 될 확률이 높았다.

“제가 중앙에서 갈 테니 나머지는 측면을!”

그렇게 외친 강현은 스킬들을 발동했다.

[스킬, 광검[Lv.9]을 발동합니다.]

[스킬, 천광의 날개[Lv.2]를 발동합니다.]

[스킬, 강림[Lv.1]을 발동합니다.]

[[email protected]차원의 지배자 인식 완료.]

[‘핵’을 지니고 있을 때에 한해, 일시적으로 ‘격의 상승’을 이끌어냅니다.]

스윽-

수수께끼의 검에는 순백의 빛이, 등 뒤에서는 흰 날개가, 전신에는 하늘에서 떨어진 한 줄기 빛의 벼락이 깃든다.

거기에 능력치를 강화시켜주는 강림에, ‘격’을 증대해 주는 [email protected]차원의 핵, 에테르를 ‘강화’시켜 주는 ???의 나무토막까지.

‘오랜만에 꺼내는 거 같네.’

무력이 봉인된지 시간이 꽤 지났으니 오랜만에 저 스킬들을 발동하는 것이기는 했다.

촤르르르륵- 철컥!

마지막으로 강현은 아르크트 1단계를 시동하는 한편, 적흑의 망토와 투구의 장착까지 마쳤다.

각종 스킬들에 아티팩트들까지 둘러서일까.

전신에서부터 막대한 활력이 전해져 온다.

아주 오랜만에 느끼는 감각이었다.

‘하기야.’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일련의 이 과정들을 통해, 현재 강현은 꺼낼 수 있는 ‘대부분의’ 전력을 꺼낸 셈이었으므로.

아륵크락타크가 코앞까지 가까워진다.

[스킬, 광명의 눈[Lv.2]을 발동합니다.]

강현은 황금빛으로 반짝이는 놈의 몸 곳곳의 약점들을 살피며 망토를 펄럭였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검을 가로로 길게 휘둘렀다.

[스킬, 광야참[Lv.2]을 발동합니다.]

[1/5의 마력을 소모합니다.]

화르르륵!

진홍빛 불꽃과 함께 광야참이 아륵크락타크에게 짓쳐 든다.

공격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으랏차!”

파해검법 제4식, [용오름]

“화염의 지배자이시여, 부디 그대의 양에게 아득한 힘의 일부를 하사해 주시옵소서…….”

쿠오오오오!

세르반테의 검에서 내쏘아진 푸른 검기의 폭풍과 레이센 란의 지팡이에서 뿜어진 화염의 파도까지 합세한 것이다.

정면과 우측, 좌측에서 그들의 공격이 한꺼번에 짓쳐든다.

“@, @#$…….”

흠칫 놀라는 아륵크락타크를 본 강현은 직감했다.

지금의 이 공세는, 놈에게도 결코 좌시할 수 없을 위력의 합공이라는 것을.

부르르-

아륵크락타크의 풍선 같은 몸이 부르르 떨리더니, 몸통 중앙이 쩍 갈라지며 웬 눈이 떠지기 시작한다.

이어서 눈이 1/3가량 떠졌을 때였다.

슈와아- 콰우우우욱!

놈의 몸에서부터 은빛 에테르의 물결이 새어나와 정면에 물결의 벽을 형성한다.

바다에서 파도 한 줄기를 끌어오기라도 한 듯, 놈의 정면에서 나풀거리는 은빛 물결.

마치 비단을 풀어놓은 것만 같은, 언뜻 보기에는 더없이 아름다워 보이는 물결이었다.

그러나 강현은 저 물결의 위력을 잘 알고 있었다.

이틀 전 놈의 공격을 받아내며 알게 되었던 것이다.

저 은빛 물결은.

‘강기 덩어리지.’

모조리 강기로 이루어져 있다는 걸.

콰콰콰콰쾅!

과연, 은빛 강기의 물결은 강현 일행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막아내고는 자취를 감추었다.

-흠, 방금 공격을 그다지 힘들이지도 않고 받아치다니……. 괜히 괴물처럼 생긴 게 아니군. 무력도 괴물 수준이다.

엔딜 펠란이 감탄할 만도 했다.

만약 강현 일행이 무력의 제한을 전부 해제하지 못했더라면, 방금 공격을 통해 은빛 물결을 없애지도 못했을지도 몰랐다.

‘무력 제한을 다 해제한 것도 아닐 텐데 진짜 더럽게 강하네.’

한 발 물러난 강현은 꿀럭이는 아륵크락타크를 가만히 응시했다.

놈도 예상보다 강현 일행의 공격이 강했는지, 자신들을 예의주시하고 있는 걸로 보였다.

그때 엔딜 펠란의 말이 들려왔다.

-호오, 저놈이 무력을 다 해제한 게 아니라고 확신하는 거냐?

‘예.’

지난 이틀 간 그들은 미친듯이 돌아다니며 사냥만을 반복했다.

저놈 종족의 특성은 잘 알지 못하지만, 상식적으로 자신들을 쫓아오려면 다른 곳에 한눈팔 시간이 없었을 터였다.

저놈이 그러면서까지 자신들을 쫓아온 이유는 뻔했다.

‘아마 핀 포인트를 눈 뜨고 뺏긴 게 짜증나서겠지.’

자신들을 쫓아오려면 핀 포인트 점령도 못한 채 추적에만 집중해야 했을 텐데, 어지간히 화가 난 듯싶었다.

-외계종들은 상대하기 까다롭다. 기본적으로 소통이 잘 되지 않을 뿐더러, 쓰는 능력 또한 기괴하기 때문이지.

‘그러고 보니 저놈의 말은 왜 못 알아듣는 겁니까? 다른 종족이랑은 다 통하는데.’

강현은 엔딜 펠란의 말을 듣고 생겨난 의문을 내뱉었다.

더 비욘드에 참가한 이후 다른 종족들과는 무리없이 소통을 해왔었는데, 그게 눈앞의 아륵크락타크와는 안 된다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물론 그러한 그의 의문에.

-그건 이 몸도 모른다. 소통이 안 되니까 외계종 아니겠나?

엔딜 펠란은 대충 대답할 따름이었다.

-전략이 어떻게 되죠?

그런 가운데, 레이센 란이 팀 보이스를 통해 물어온다.

강현은 아륵크락타크에게서 눈을 떼지 않으며 일행을 힐끗 살폈다.

‘그간 호흡을 맞춘 게 헛되지는 않았군.’

이틀 전 수운과 아륵크락타크의 등장에 눈에 띄게 긴장하던 것과는 다른 모습들이었다.

강적을 앞에 두고도 침착함을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 번 더 가봅시다. 제가 먼저 들어갈 테니 보조를!’

팟-

날개를 박찬 강현은 아륵크락타크에게 쇄도했다.

[스킬, 하늘을 덮는 빛의 그물[Lv.1]을 발동합니다.]

[1/5의 마력을 소모합니다.]

쿠구구구-

강현의 검에서 거대한 빛의 그물이 뿜어져 아륵크락타크를 덮쳐간다.

만약 성공적으로 놈에게 달라붙는다면, 상당한 규모의 폭발을 일으킬 터인 빛의 그물이었지만.

아쉽게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쿠오오오-

놈이 방출한 은빛의 물결에 의해 다시금 막힐 뿐이었으므로.

다만 여기서 아륵크락타크가 미처 예상하지 못한 게 있었으니.

“하압!”

화르르륵!

세르반테와 레이센 란의 공격이 시간차로 이어져 물결을 소멸시켰다는 점이었다.

은빛 물결이 없어진 그 찰나의 틈.

강현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스킬, 순보[Lv.4]를 발동합니다.]

[스킬, 순보[Lv.4]를 발동합니다.]

순보를 연달아 발동하여.

[스킬, 광야참[Lv.2]을 발동합니다.]

[1/5의 마력을 소모합니다.]

촤아악-!

끝내 놈에게 제대로 된 한 방을 먹인 것이다.

“@-----!”

투둑, 투둑.

놈이 광야참에 미처 대응하지 못하면서, 허연 젤리 같은 덩어리들이 후두둑 떨어진다.

그에 따른 반응은 즉각 돌아왔다.

“@#…… @%#-!”

놈이 괴성을 질러대면서, 어마어마한 기세를 분출하기 시작한다.

파르르-

강현의 피부가 절로 떨릴 만큼의 강력한 기세.

분노한 아륵크락타크의 변화는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눈이…… 눈이 더 떠지고 있어요!

레이센 란의 말처럼, 아까는 1/3가량 뜨여 있던 눈이 절반까지 뜨인 것이다.

눈이 추가적으로 뜨임으로써 생긴 변화는 금세 나타났다.

쿠콰콰콰콰콰-

놈에게서 은빛 강기들이 실타래처럼 뿜어졌으니까.

거기에 뿜어진 은빛 강기는 놈의 주변을 잠식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점차 그 영역을 확장해 갔다.

-공간을 강기로 잠식시키려는 거다. 이대로 있다가는 저 강기에 휘말려 죽겠군. 어떻게 할 거지?

공간을 강기로 잠식시키다니, 터무니없는 짓거리였다.

강현은 엔딜 펠란의 질문에 대답하기에 앞서 레벨을 확인했다.

레벨 : 64

‘쩝.’

강현이 아쉬움에 입맛을 다셨다.

레벨이 65였더라면 여태까지의 스킬들과는 궤를 달리하는 스킬을 배울 터였고, 그랬다면 이 전투를 보다 수월하게 승리로 이끌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65레벨이 되어 생각한 스킬을 배운다면 이 전투를 보다 수월하게 승리로 이끌 수 있었을 터였지만.

‘어쩔 수 없지.’

없으면 없는 대로, 가진 것만으로 이 난관을 타개해야 할 듯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이 상황에 적합한 아티팩트가 있다는 점이랄까.

‘역시 그걸 꺼내는 수밖에 없나.’

-흐흐, 드디어 꺼내는 거냐?

‘그래야죠. 달리 수가 없는데.’

그렇게 대꾸한 강현은 품에서 황금의 왕관을 꺼내 들었다.

얼마 전까지는 사용법조차 알지 못했던 황금의 왕관.

그러나 그는 궁전에서 왕관의 발동 방법에 대해 알게 되었고, 지금이 바로 이 아티팩트를 사용할 적기였다.

‘설마 광명의 눈이랑 같이 쓰는 거였다니.’

피식 웃은 강현이 광명의 눈의 시야에 왕관을 집어넣자.

슈와아아아-

왕관이 찬란한 황금빛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왕관을 머리에 올린 강현은 은빛 강기의 물결에 그대로 뛰어들었고.

“어엇! 가, 강현! 위험하네!”

“뭐 하는 거예요! 죽고 싶어 환장했어요?!”

스으윽-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휘몰아치는 은빛 물결을 통과하며 아륵크락타크의 지척까지 접근했다.

“@……?”

강현이 손쉽게 강기를 뚫고 들어오자 놈이 펄쩍 물러나려 했지만, 강현이 그냥 보내줄 리가 없었다.

[스킬, 섬광[Lv.8]을 발동합니다.]

푸욱!

“@#---!”

난데없이 칼을 얻어맞은 놈이 엄청난 기세를 방출하며 다급히 물러난다.

강현도 무리하지 않고 훌쩍 원래 자리로 되돌아갔다.

자리로 돌아간 그는 마주할 수 있었다.

“강현, 대체 어떻게 저걸 뚫고 들어간 건가……?”

“그, 그래요. 그냥 들어갔다가는 몸이 갈기갈기 찢겼을 거 같은데…….”

눈을 부릅뜨고 있는 일행들의 시선을.

물론 강현은 웃어 보일 뿐이었다.

“그냥, 가지고 있는 아티팩트로 뚫을 수 있을 거라는 예감이 들었거든요.”

궁전에서 알게 된 왕관의 효과는 간단했다.

왕관을 중심으로 한 반투명한 황금빛의 보호막을 만들어, 보호막에 닿는 에테르를 끊임없이 교란시키는 것.

‘교란된 에테르는 강기의 흐름을 깨뜨리고, 흐름이 깨진 강기는 원래 모양과 힘을 잃어버리지.’

모양과 힘을 잃어버린 에테르들은 강현에게 어떠한 피해도 입히지 못한다.

즉 왕관이 발동되는 한, 자신은 저 강기의 폭풍 같은 광역기에도 얼마든지 접근할 수 있었다.

그걸 놈도 깨달은 걸까.

츠츠츠…….

아륵크락타크를 중심으로 퍼져 나가던 은빛 강기들이 다시 종적을 감추어간다.

이대로 가봤자 에테르 낭비만 하게 될 뿐이라는 걸 느낀 거겠지.

다만 은빛 강기를 거둔 것과는 달리, 놈의 분노는 조금도 가라앉지 않은 걸로 보였다.

스르륵-

놈의 몸통에 기괴하게 자리한 눈이 완전히 뜨이려고 한 것이다.

‘시동.’

이에 강현도 지지 않고 아르크트 2단계까지 시동했다.

광역기를 봉쇄한 만큼, 충분히 할 만했다.

“준비를 해야겠구만.”

“저도요.”

세르반테와 레이센 란도 비장의 무기를 꺼내려는 듯한 움직임을 보인다.

탐색전도 끝냈겠다, 슬슬 본격적인 전투에 들어갈 시간이었다.

-다섯을 세고 먼저 가겠습니다. 하나, 둘…….

그렇지만 강현이 다시 돌진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그가 둘까지 세었을 때.

쿵!

“겨우 찾았네. 이 망할 풍선 새끼. 감히 날 쓰러뜨려? 넌 뒈졌다.”

“…….”

저 높은 하늘에서부터,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는 악마와 무신경한 드래곤이 나타났으니까.

[바이토넬, 3위]

[라스리셀 셀라토리온, 2위]

느닷없는 또 다른 최상위권 참가자들의 등장.

그 사실에 강현이 중얼거린 건 당연한 일이었다.

“……난장판이네.”

아무래도, 일이 생각보다 커진 듯했다.

삽시간에 혼란스러워진 장내.

강현의 선택은 재빨랐다.

-일단 물러납시다!

그렇게 외치며 훌쩍 뒤로 물러났던 것이다.

바이토넬이 아륵크락타크에게 왜 원한을 보이는 건지, 또 바이토넬과 라크리셀 셀라토리온이 함께 나타난 배경은 뭔지 아는 게 우선이라는 판단하에 내린 선택이었다.

팟-

다행히 바이토넬과 라크리셀 모두 일행이 물러나건 말건 별 터치를 하지 않은 덕에, 그들은 십여 미터 가량 몸을 뺄 수 있었다.

‘아니지, 굳이 말하자면 터치를 안 했다기보다는…….’

온 신경을 아륵크락타크에게만 쏟고 있다고 보는 게 맞을 터였다.

지금 이 순간에도 아륵크락타크를 향한 바이토넬의 으르렁거림은 끊이지 않았으니 말이다.

잠시 대화를 그들의 대화를 듣던 강현은 바이토넬이 저런 모습을 보이는 이유를 알게 되었다.

“어이, 풍선 덩어리. 이번에는 이틀 전이랑 아예 다를 거니까 기대해라.”

“…….”

“비웃지 마라! 이 풍선 덩어리 새끼!”

강현과 일행이 핀 포인트를 점령하고 물러난 뒤 벌어졌던, 근처 수백 미터에까지 영향을 미치던 바이토넬과 아륵크락타크의 전투.

‘바이토넬이 졌었구나.’

그 전투에서 아륵크락타크에게 패배한 것 때문에 앙금을 품고 여기까지 온 모양이었다.

그래서일까.

지금 바이토넬이 보이는 모습은, 여태까지 강현이 알던 것과는 달랐다.

여유롭게 미소짓던 흑발의 미소년은 사라진 채, 잔뜩 얼굴을 구긴 악마만이 있을 따름이었다.

“크흐흐…… 뭐라고 하는지는 역시 모르겠군. 뭐, 상관은 없다. 왜냐하면-”

바이토넬이 땅을 박살내며 아륵크락타크에게 달려들었다.

“어차피 곧 뒈질 테니까!”

쿠오오오-

짓쳐드는 바이토넬의 손에서 칠흑의 마기가 피어오른다.

당연히 아륵크락타크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은빛 강기의 실타래를 분출함으로써 바이토넬을 노려갔다.

‘바이토넬이 불리하겠는데.’

고작 주먹만한 바이토넬의 마기에 비해 은빛의 실타래는 주변을 완전히 뒤덮을 정도였다.

이대로 부딪친다면, 말 그대로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격이리라.

그런데 그때였다.

“흐흐, 또 그 빌어먹을 실타래를 뿜을 줄 알았지!”

아륵크락타크의 지척까지 접근한 바이토넬이 사악하게 웃어보이는 게 아닌가.

“똑같은 수법에 또 당할 줄 알았더냐!”

이어서 바이토넬이 마기를 띄운 주먹을 움켜쥐자, 손에 떠올라 있던 마기는 자그마치 수십 배나 부풀어올랐고.

쿠구구구구-

이내 지름만 십여 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마기의 구체로 화해, 아륵크락타크의 은빛 실타래에 부딪쳤다.

콰콰콰콰콰쾅!

은빛과 암흑으로 뒤섞인 빛과 굉음, 어마어마한 충격파가 밀림을 휩쓴다.

“큭!”

아르크트 2단계를 시동하고 있던 강현이 밀릴 정도였다.

그러나 그러한 폭발을 일으킨 바이토넬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번에야말로 죽여주마!”

그저 아륵크락타크에게 큼직한 칠흑의 마기 구체를 연달아 발사할 뿐.

“@#…… @$---!”

아륵크락타크도 은빛 물결을 끊임없이 뿜으며 그에 대항했고, 미사일이라도 떨어지는 듯한 폭발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콰콰쾅! 콰쾅!

‘이런 미친……. 무식하게도 싸우는군.’

강현은 그제야 저 둘의 싸움의 영향이 수백 미터 밖까지 미쳤던 이유를 깨달았다.

저렇게 에테르를 퍼부으면서 싸워대고 있으니, 한참 멀리서도 보일 수밖에 없었을 터였다.

쾅!

“……윽.”

굉음이 어찌나 귀를 울려오는지, 포탄이라도 떨어진 듯했다.

‘안 되겠어.’

강현은 서둘러 일행들에게 외쳤다.

-당장 후방으로 빠지세요! 여기 있다가는 저 둘의 싸움에 휘말릴 겁니다!

-알겠네!

-쭉 빠질게요!

다행히 대답이 금방 돌아오면서, 강현은 즉각 물러나기 시작했다.

팟-

뒤를 돈 강현이 눈살을 찌푸렸다.

‘……앞이 잘 보이지도 않네.’

그 말처럼, 어느새 장내에는 피어오른 자욱한 먼지 때문에 앞이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던 것이다.

다만, 별수 없었다.

[스킬, 질주[Lv.4]를 발동합니다.]

강현은 기감을 최대한으로 끌어올린 뒤 후방으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앞이 거의 보이지 않기는 했으나, 기감을 통해 대강의 지형지물은 파악할 수 있었다.

파팟-

확장된 기감 속, 뒤따라오는 두 개의 인영이 느껴진다.

레이센 란과 세르반테의 기척이었다.

‘잘 따라오고 있군…… 조금 더 물러나다가 정비를 하고- 음?’

일행의 기감을 훑던 강현의 눈이 크게 떠졌다.

일행의 뒤를 엄청난 속도로 따라잡는 또 하나의 기척이 느껴져서였다.

그리고 바이토넬과 아륵크락타크가 정신없이 싸우고 있는 지금, 자신들의 뒤를 따라올 놈은 하나밖에 없었다.

‘라크리셀 셀라토리온!’

그걸 깨달은 순간이었다.

키이잉-

라크리셀로 예상되는 놈에게서 에테르가 뿜어져 나온다.

베일 것만 같은 예기가 느껴지는 에테르였는데, 그 끝은 명백히 선두의 강현을 향해있었다.

[스킬, 휘광[Lv.3]을 발동합니다.]

[스킬, 빛의 인도[Lv.1]를 발동합니다.]

[1/5의 마력을 소모해, 휘광[Lv.3]을 강화합니다.]

강현이 빛의 인도로 강화한 휘광을 몸에 두르자마자, 놈이 쏘아낸 에테르가 부딪쳐 온다.

마치 광살포를 보는 듯한 은빛 광선이었다.

카가가가각-

강화된 휘광이 깨지기 직전까지 몰렸다가, 겨우 광선을 밀어낸다.

‘추가적인 공격은…… 없군.’

광선을 끝으로 더이상의 공격은 날아오지 않았기에, 이윽고 강현은 먼지가 일어나지 않은 곳까지 이동할 수 있었다.

탁 트인 평야가 펼쳐진 지형이었다.

잠시 후 세르반테와 레이센 란이 먼지를 뚫고 튀어나온다.

“강현! 나와 레이센은 괜찮네! 자네는 괜찮나?!”

“레이센이라고 부르지 말- 에휴, 됐어요. 그나저나 깜짝 놀랐어요! 갑자기 2, 3위가 막 튀어나오고…… 응? 왜 그래요?”

레이센 란이 말을 멈춘다.

그녀와 세르반테가 무사하다는 걸 봤음에도, 강현이 여전히 먼지로 뒤덮인 뒤편을 주시하고 있다는 걸 봐서였다.

“…….”

강현을 따라 레이센 란과 세르반테 역시 뒤편을 보고 시작했고,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스윽-

먼지를 헤치며 무표정한 은발의 미청년이 모습을 드러낸다.

[라크리셀 셀라토리온, 2위]

“……!”

세르반테와 레이센 란 모두 라크리셀이 쫓아오고 있다는 걸 미처 알지 못했는지, 눈을 부릅 뜬다.

헌데 이어지는 둘의 반응은 확연히 달랐다.

“흐흐, 이번에는 드래곤인가…… 재밌군!”

“드, 드래곤……!”

흥미를 보이는 세르반테와는 다르게, 레이센 란은 눈에 띄게 당황한 것이다.

“피, 피해야 하지 않을까요?”

심지어는 물러서는 게 좋지 않겠냐고 말해오기까지.

“어허, 갑자기 왜 약한 소리를 하나! 아까 그 풍선과 크게 차이나지 않을 걸세!”

“드래곤은 마법의 종주 수준이라구요! 저는 별 도움도 안 될 거예요!”

레이센 란의 말을 듣자, 그녀가 라크리셀과의 싸움을 꺼리는 원인을 알 것도 같았다.

-마법사들은 기본적으로 드래곤들을 경외한다. 그들이 사용하는 마법 중 상당수를, 인간의 모습으로 유희하던 드래곤들이 만든 것이기 때문이지.

‘마법사들이 드래곤 앞에서 쪽도 못 쓰는 수준입니까?’

-보통은 그렇지. 저 도마뱀이 헤츨링이기는 하다만, 그래도 은룡이다.

‘은룡?’

-그래. 드래곤들은 머리색으로 상세한 종족을 구분하는데, 저놈은 은발이지 않느냐? 은룡이라는 뜻이지. 그리고 은룡은 다른 종족들보다 특히 마법에 뛰어나다.

‘그 말은…….’

-웬만한 마법사보다 몇 단계는 더 높은 수준의 마법을 구사할 거라는 소리다.

그게 의미하는 바는 하나였다.

라크리셀과의 전투에서는, 레이센 란이 큰 도움이 되지 못하리라는 것.

허나 그걸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강현은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아갔다.

“마법으로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해도 싸워야 됩니다.”

“하지만……!”

“아무리 저놈이 마법의 종주인 드래곤이라고 해도, 언젠가는 한 번 부딪쳐야 될 뿐더러…….”

스윽-

일행의 맨 앞에 선 강현이 천천히 입을 열었고.

“저놈도 곱게 보내줄 마음이 없는 거 같으니까요.”

실제로 우두커니 서있는 라크리셀에서는 은은하면서도 압박감있는 기세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여지껏 표정이 바뀌는 걸 본 적도, 말을 하는 걸 들은 적도 없었지만, 강현은 그 기세에서 절대 놓치지 않겠다는 라크리셀의 의지를 읽어낼 수 있었다.

“그렇지만……!”

레이센 란의 우려에도 강현은 확고했다.

그가 라크리셀과 싸우려는 건, 단순히 그 이유들 때문만은 아니었으므로.

‘아륵크락타크보다 훨씬 더 할 만해.’

놈도 필시 무력을 다 해제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큰 데다가, 아군 일행의 합도 더없이 잘 맞추어져 있긴 했다.

또 에테르의 흐름을 교란시키는 황금의 왕관에, 그가 지닌 각종 아티팩트들 또한 크나큰 도움이 되어줄 터였다.

물론 그가 아륵크락타크보다 훨씬 할 만하다고 여기는 결정적인 이유는 따로 있었다.

무엇보다도.

‘익숙하겠지.’

외계종인 아륵크락타크보다 비교적 익숙하게 상대할 수 있으리라는 것.

그 사실은 강현으로 하여금 라크리셀과의 격돌을 결정하게 만들었다.

라크리셀과의 전투를 승리로 이끌 열쇠가 바로 그것이었으니까.

고오오-

일시적으로 침묵이 감도는 가운데, 장내의 이들은 제각기 기세를 끌어올렸고.

다음 순간.

쾅!

하늘에 조용히 짙은 먹구름이 드리우는 가운데,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강현 일행과 라크리셀의 신형이 동시에 서로를 향해 쏘아졌다.

* * *

-올, 저기서 안 빼네? 역시 이강현이다. 마음에 쏙 들어.

-암, 필요할 때는 싸워야지.

-아, 보면 볼수록 지난번 궁전에서 놓친 게 아깝네…… 그때 만났어야 되는데.

-야 너두? 야 나두!

-근데 패기는 좋은데 판단력이 아쉬운듯. 아무리 세 명이어도 라크리셀을 이길 가능성은 거의 없지 않나

-ㅇㅇ나도 그렇게 생각. 황금향 주인장 왕관이랑 적흑의 천사 아티팩트가 있다고 해도 좀 섣부른 판단인듯

-그래도 앞길은 창창해보이니까 우리 <백야>에서 보완만 조금 더 해주면 될듯?

-? 뭔 개소리임? 이강현이 거기를 왜 감? 쟤는 <창조>에 올 건데

-ㅋㅋㅋㅋㅋㅋ<백야>? <창조>? 올해 들은 소리 중에 제일 웃겼다. 차라리 이강현이 라크리셀이랑 맞짱 떠서 이긴다는 게 더 설득력 있겠…… 응? 자, 잠깐.

-어……? 저 상황 뭐임?

-저, 저럴 리가 없는데? 왜 박빙이지? 아륵크락타크보다 라크리셀이 더 센 걸로 아는데…….

-하늘에 먹구름은 또 왜 끼는거임? 날씨 안 바뀐다고 했던 거 같은데

-글게. 저러다가 폭우 쏟아지겠네

-머가 먼지 도저히 모르겠다. 나는 해설이나 보러 간다.

-나도 해설 찾아간다.

-나도.

-ㄴㄷ

…….

-흐음…… 먹구름…… 이라……

* * *

라크리셀과 거리를 좁혀가는 와중, 엔딜 펠란의 말이 들려온다.

-곧 저놈과 부딪치면서 깨닫게 될 테지만, 미리 알려주도록 하지.

‘상대법이라도 알려주려는 겁니까?’

-비슷하다.

엔딜 펠란이 말을 이어나간다.

-헤츨링 수준의 드래곤들을 상대하는 법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그저 마력이 무한에 가깝다고 보면 되지.

‘…….’

-물론 <초월>에 도달한 드래곤이라면 말이 달라지지만, 헤츨링이라면 저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거다. 단순하다고도 할 수 있지. 그럼에도 저놈이 압도적인 무력 1위를 연이어 차지하고 있는 건…….

‘단순하긴 해도 그만큼 강하다는 거겠죠.’

-그래. 놈은 강할 거다. 네놈이 어련히 잘하겠다만……. 공격 한 방 한 방이 크게 다가올 거라는 걸 명심하도록.

라크리셀의 단순하면서도 강력한 무력.

강현은 이미 녀석을 익숙하게 상대할 수 있을 거라고 여기고 있었으니,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을 다시 확인받은 셈이었다.

‘그래도 뭐…….’

엔딜 펠란이 안 그런 척 신경을 써주는 게 느껴져서일까?

그런대로 나쁘지 않은 충고처럼 느껴졌다.

그때 십여 미터까지 가까워진 라크리셀이 오른팔을 쭉 뻗는다.

쿠오오오-

그러자 은빛의 마력이 일렁이더니, 그의 손에 은빛 검이 생겨난다.

검기와는 약간 다르게 생긴 걸로 봐서 마력으로 이루어진 마검(魔劍)으로 보였다.

‘오러나 마력이나 그게 그거지만.’

어차피 오러든 마력이든 간에 ‘에테르’의 하위 분류에 속하는 걸 종족마다 다르게 부르는 명칭일 뿐이었으니, 딱히 신기해할 건 아니었다.

라크리셀의 손짓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스윽-

검을 쥐지 않은 왼손을 흔들자.

츠츠츠츳-

돌연 강현의 발밑의 땅에서부터 은빛의 손 수십 개가 튀어나온 것이다.

홱!

순간 발을 잡아채인 강현이 중심을 잃고 휘청거렸다.

-아마 땅속 어딘가에 ‘핵’이나 ‘중심’이 있는 마법일 가능성이 크다…… 조심해라!

엔딜 펠란이 외쳐온다.

강현이 휘청거리자마자 라크리셀이 엄청난 속도로 가속해 오고 있었던 탓이었다.

검을 날카롭게 내민 것이, 만약 자빠지기라도 한다면 그 즉시 베어버리겠다는 의지가 전해져 왔다.

그러나 강현이 넘어지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쿠오오-

라크리셀이 다가오기 직전 강현의 눈이 황금빛으로 번쩍이면서.

[스킬, 광명의 눈[Lv.2]을 발동합니다.]

[스킬, 참격[Lv.4]을 발동합니다.]

지면 깊숙한 곳에 위치한 은빛 손들의 ‘중심’을 단숨에 파괴해 버렸으니까.

츠츠츠…….

마법의 ‘중심’을 파괴해서인지 손들이 신기루처럼 깡그리 사라졌고, 그 덕에 자유를 되찾은 강현은 몸을 뒤로 뺌으로써 아슬아슬하게 라크리셀의 검을 피해냈다.

쐐애애액!

강현의 턱끝을 스쳐 지나간 라크리셀의 검이 매섭게 허공을 가른다.

라크리셀이 눈을 살짝 치켜뜬다.

아무래도 그는 강현이 이번 공격을 피하지 못할 거로 본 듯했다.

‘날 얼마나 약하게 보고 있던 거야?’

미간을 찌푸린 강현이 검을 내찔렀고.

[스킬, 섬광[Lv.8]을 발동합니다.]

깡-!

백색의 광검이 그대로 라크리셀의 은빛 마검과 충돌한다.

콰콰콰쾅! 콰쾅!

순식간에 여섯 번의 폭발음이 터져나온다.

주르륵-

일 미터가량 뒤로 밀려난 강현은 라크리셀이 밀려난 정도를 확인했다.

자신과 큰 차이가 없는, 마찬가지로 일 미터 가량의 밀려난 상태였다.

‘할 만하군.’

아르크트 2단계를 시동한 덕분인지, 적어도 완력 면에서는 그다지 밀리는 구석이 없었다.

그리고 그렇다면 굳이 대치를 할 필요가 없을 터였다.

[스킬, 질주[Lv.4]를 발동합니다.]

타타타탁-

강현이 다시 뛰어들자, 그에 대응하여 라크리셀 또한 검을 곧추세우…… 다가.

홱!

느닷없이 자세를 물리더니 양 측면을 빠르게 훑는다.

그로서는 그러는 게 당연했다.

그도 그럴 게.

“흐압!”

화르르르륵!

우측에서는 시퍼런 검기를 앞세운 세르반테가, 좌측에서는 레이센 란이 쏘아낸 큼지막한 화염구가 짓쳐 들고 있었으므로.

그들의 공격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스킬, 광야참[Lv.2]을 발동합니다.]

[1/5의 마력을 소모합니다.]

정면에서 달려드는 강현의 광야참까지 더해지자, 삽시간에 삼면에서 라크리셀을 합공하는 형세가 만들어진다.

강현이 라크리셀을 정면에서 전담하고 나머지는 강현을 보조하면서 라크리셀을 기습하는 것.

이게 바로 강현 일행이 세운 전략이었다.

모든 무력 제한을 해제한 더 비욘드 본선 참가자 셋이 날린 일격이다.

라크리셀이라도 한 방 먹을 수밖에 없을 테고, 그렇게 된다면 기세를 탈 수 있을 것이었다.

‘세르반테는 더 신날 테고…… 레이센 란도 자신감을 찾을 수 있겠지.’

그런데 강현이 의아하다는 얼굴을 해 보였다.

‘음?’

자신의 목전까지 광야참과 화염, 푸른 검기가 쇄도했는데도 불구하고 라크리셀에게서는 별 동요를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이내 밝혀졌다.

팍-

그가 느닷없이 검을 바닥에 내리꽂더니, 양팔을 교차시켜 양쪽 측면에 손바닥을 내뻗는다.

그러자 오른쪽의 세르반테에게는 가공할 위력의 충격파가, 왼쪽에서 날아오는 화염구의 앞에는 은빛의 방패가 생겨나는 게 아닌가.

“크헉!”

슈우우…….

충격파에 이렇다 할 저항도 하지 못하고 휩쓸려 버린 세르반테가 저 멀리 날아가고, 은빛 방패에 가로막힌 화염구가 빠르게 자취를 감춘다.

거기에 마지막으로.

키이이잉-

미리 꽂아놓았던 검에서부터 생성된 반투명한 은빛 결계가 광야참까지 가로막는다.

쾅! 카가가가각…….

은빛 결계에 막힌 광야참마저 서서히 소멸되어 간다.

“이럴 수가…….”

“여, 역시 드래곤…….”

강현의 얼굴이 굳어졌다.

‘이걸 이런 식으로 막는다고?’

틀림없이 유효타를 먹을 수 있을 거라고 여겼는데 털끝 하나 스치지 못할 줄이야.

전혀 예상하지 못한 시나리오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아니야.’

강현의 신형이 쏘아졌다.

‘이대로 있다가는 도리어 우리 기세가 꺾인다.’

일행은 당혹스러워하는 게 눈에 보이는 반면, 라크리셀은 여전히 태연자약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 상태에서 시간을 더 지체하다가는 기세가 역으로 라크리셀 쪽으로 넘어가겠지.

그걸 고려한다면 어떻게 해서든 지금 타이밍에 이득을 봐야 했다.

라크리셀의 목전에 다다른 강현은 아르크트 2단계의 기능 중 하나인 마기 폭발을 발동했다.

‘마기 폭발.’

쿠콰콰콰-

칠흑의 마갑에서부터 상당한 위력의 마기가 내쏘아진다.

강현의 공세는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화르르르륵!

적흑의 투구와 망토에서부터 뿜어진 진홍빛 화염까지 더해졌다.

-악마가 쓰던 갑주에 천사가 쓰던 투구와 망토라. 이질적이구나.

엔딜 펠란의 말대로 더없이 이질적인 광경이었으나, 그 조화는 썩 훌륭했다.

키이이이잉-

쩌저저저저적-

라크리셀이 다시 한번 전개한 은빛 결계를 쉽사리 부순 것도 모자라, 그러고도 멈추지 않은 채 끝내 라크리셀의 신체에까지 이르렀으니까.

콰콰콰쾅!

“……큭!”

자욱히 피어오른 먼지 속에서 라크리셀의 침음이 들려온다.

명백한 유효타를 먹였다는 거겠지.

“오오……! 좋군! 결국 한 방 먹였구만!”

“정말 드래곤을 상대로 공격을 성공시키다니…….”

세르반테와 레이센 란 또한 놀란 듯보였다.

고오오…….

과연 먼지가 사라지자 몸 곳곳이 피투성이가 된 라크리셀의 신형이 드러난다.

상당한 타격을 입었는지, 당황한 기색이 훤히 드러났다.

‘역시.’

그걸 본 강현은 확신했다.

라크리셀이 그들을 내심 얕잡아보고 있었다는 것을.

그게 아니고서야 상처를 입었다는 것에 당황할 이유가 없었다.

라크리셀은 강현 일행을 자신의 아래로 보고, 혼자 정리할 수 있다는 판단하에 자신들을 뒤따라 온 게 분명했다.

‘이렇게만 가면 되겠군.’

스윽-

강현이 다시 나서려는데, 엔딜 펠란이 말해온다.

-호오. 거의 자력으로 드래곤에게 타격을 입히다니……. 이 정도 성장세라면 조만간 마계에서 힘을 기를 수도 있겠군.

뜬금없이 마계를 언급하는 엔딜 펠란.

강현이 동작을 잠깐 멈추고는 되물었다.

‘마계요? 갑자기 웬 마곕니까?’

-마계에 가면 더 빠른 성장을 이루어낼 수 있을 거다. 여태까지는 네놈이 너무 약해 도무지 갈 수 없었는데, 조만간 가도 될 듯하군.

그의 추가적인 성장을 위해 한 말인 걸로 보였다.

그러나 강현은 고개를 저었다.

‘마계까지 갈 것도 없습니다. 굳이 거기까지 안 가더라도 괜찮을 거 같으니까요.’

마계까지 가지 않는다고 해도 충분히 성장폭을 넓힐 방법은 많았다.

예를 들어.

‘저놈만 쓰러뜨려도 기여도를 잔뜩 줄 텐데요, 뭐.’

라크리셀 셀라토리온.

방심한 채 기어들어 온 대어, 저놈을 잡아먹는다든가.

‘절대 안 보내주지.’

강현은 놈을 그냥 보내줄 마음이 추호도 없었다.

그리고 그가 그 같은 마음을 품을 수 있는 이유는 간단했다.

‘아륵크락타크랑은 달라.’

아륵크락타크는 표정을 알아볼 수도, 말을 알아들을 수도, 공격도 생소한 외계종이었지만.

제아무리 눈앞의 라크리셀이 드래곤이라고 해도, 그들에게 더할 나위 없이 익숙한 마력을 사용하는 드래곤이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아륵크락타크와 벌였던 전투와는 달리, 라크리셀과의 전투는 전투의 구도가 어떻게 되어가는 건지 그 형세를 알기가 훨씬 쉬웠다.

그리고 그 형세는, 그들이 유리하다고 말해오고 있었다.

‘드래곤을 상대로 우세를 점하고 있다니.’

몇 달 전의 자신이 들었다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한다며 손사래칠 이야기.

격세지감을 느끼며 강현은 라크리셀에게 달려들었고.

“나도 가지!”

“저도 진입할게요!”

그런 그의 뒤를, 그의 동료들이 거들었다.

* * *

[믿을 수 없는 광경이 연이어 펼쳐지고 있습니다! 라크리셀 참가자, 인간종 동맹에 의해 끊임없이 밀리고 있습니다!]

[그를 찬란하게 빛나게 해주던 은빛의 마력이 전혀 통하지 않는 모습입니다! 동맹들의 보조를 받는 이강현 참가자의 갑주와, 그가 뿜는 불꽃을 뚫어내질 못하네요! 근접전을 하자니 이강현 참가자의 검술이 너무나도 강력하고요! 라크리셀 참가자, 당혹스러워하는 기색이 역력합니다! 대체 어떻게 된 걸까요?!]

[라크리셀 참가자의 예상보다 인간종 동맹이 훨씬 강했다는 것, 그것 외에는 설명할 길이 없네요! 그렇지만 라크리셀 참가자의 판단력을 마냥 탓하기도 어렵습니다.]

[예. 비단 라크리셀 참가자만이 아니라 저희를 포함한 대다수 시청자 분들까지 그의 승리를 점쳤으니까요!]

[라크리셀 참가자! 더는 일어서지 못하네요! 이강현 참가자의 날카로운 검술에 맥을 못 추린 결과라고 할 수 있겠죠!]

[라크리셀 참가자는 이번 차원에서 핀 포인트를 점령하지 못했습니다! 이 싸움에서 패배하면 다음 미션 진출이 불투명해져요!]

[이강현 참가자, 거침없이 라크리셀 참가자를 베어내면서…… 결국! 라크리셀 셀라토리온이라는 초대어를 낚아채고 맙니다! 절대적인 강적에 맞서 물러서지 않고 맞서 싸운 끝에 결국 승리를 쟁취해 내네요!]

* * *

[참가자 라크리셀 셀라토리온을 쓰러뜨리셨습니다.]

[300pt를 나누어 획득합니다.]

강현은 떠오른 문구를 보고서는 검을 내려놓았다.

“후우.”

문구는 말해오고 있었다.

그들이 라크리셀 셀라토리온을 쓰러뜨린 게 맞다고 말이다.

그 문구를 보자 이겼다는 실감이 난다.

“강현! 다친 데는 없나?! 참고로 나는 괜찮네!”

“저도요!”

그건 동료들도 마찬가지인지, 얼굴들이 붉게 상기되어 있다.

강현이 피식 웃으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먹구름이 잔뜩이었다.

비가 올지도 모르니, 잠깐 동태를 확인하는 게 낫겠지.

“잠시 쉬었다가…….”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쿠구구-

난데없이 하늘에 빽빽하게 드리운 먹구름들에서.

꽈르르르르르릉-!

강현 일행의 코앞에, 거대한 번개가 내리친 것은.

번개를 본 강현은 그 즉시 심각함을 인지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번개가 내리친 직후.

-와 진짜 대박이다

-ㅋㅋㅋㅋㄹㅇ 보는 내내 뭔가 짜릿했음

-ㄹㅇ…….

-…….

-…….

-…….

활발하게 시청자들이 떠들어대던 채팅창이 그대로 나가버린 것이다.

“…….”

채팅창이 끊어진다는 것.

강현이 일전에 겪은 현상이었다.

빙인들의 차원에서, <초월자>인 아디스를 만났을 때 겪었던 일이었다.

“당장 도망가야 합니다! 이건 분명-”

하나 강현이 말을 잇기 전.

쩌저저저적-

눈앞의 공간이, 즉, 더 비욘드가 설정해 놓은 차원이 깨져갔고.

챙그랑!

산산이 부서진 차원 속에서, 짙은 푸른빛 머리칼의 중년인이 나타났다.

쿠구구구-

중년인에게서 뿜어지는 아득한 ‘격’에 강현은 이를 악물었다.

중년인이 강현을 보며 입을 열었다.

[수운이 친히 부탁한 게 네놈인가. 제법 가능성이 충만한 것이, 과연 수운을 밀어낼 만하구나.]

“…….”

[하나 네 그런 가능성을 탓하거라. 네 가능성이 네놈을 옥죄게 만들었으니.]

쿠콰콰콰-

형언할 수 없는 기세와 함께, 중년인은 선언하듯 말했다.

[나 수룡왕 수란의 이름을 걸고, 너의 목숨을 거두겠다.]

자신을 수룡왕 수란이라 소개한 중년인의 말에, 장내에 침묵이 흐른다.

다만 침묵이 흐른다고 해도 중년인에게서 뿜어지는 기세는 그대로였기에, 강현은 힘겹게 침묵을 깨고는 입을 열었다.

“대체…… 왜?”

가능성 운운한 건 그렇다 치더라도, 지금까지 보인 힘으로 보아 눈앞의 수운은 <초월자>가 확실하다.

헌데 그 같은 존재가 자신을 죽이기 위해 이곳까지 친히 강림하다니?

그렇게까지 하는 그 이유에 대한 질문이었다.

[왜라…… 무슨 연유로 네 목숨을 거두느냐는 거겠지. 간단하다.]

그 질문에 대한 수란의 답은 짤막했다.

[내가 친히 보살피고 있는 수운이 너의 죽음을 원했으니까. 이곳으로 들어오려면 다소 무리를 해야 했지만, 사전에 약조한 게 있었기에 어쩔 수 없었지.]

“…….”

[흠, 구름을 불러내 공간을 찢어버렸는데, 어땠나? 나 스스로는 나름 괜찮은 시도였다고 보고 있다만.]

강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대답이 나오질 않았다.

고작 수운 그놈 하나 때문에 시청자들이 빤히 보고 있을 채팅창을 정지시키고, 먹구름을 불러내 공간을 찢어버렸단다.

말도 안 되는 짓거리가 아닐 수 없었지만.

눈앞에 있는 수란의 존재는, 저 <초월자>는, 그 말이 모두 사실이라고 말해오고 있었다.

‘수운이 앙심을 품고는 날 죽여달라고 사주를 했고, 그래서 <초월자>가 직접 무리를 하면서까지 미션 장소에까지 쳐들어왔다는 건가. 그건 그렇고 그 도마뱀 새끼는 왜 나한테 억하심정이 생긴 거지?’

말을 마친 수란이 그를 빤히 보고만 있었기에, 강현은 재빨리 수운이 앙심을 품었을 이유를 생각해보았다.

‘우리가 놈을 탈락시킨 것도 아니고 대치하는 사이 핀 포인트를 가로채기만 했을 뿐인데…… 잠깐, 설마 그것 때문에……?’

어처구니가 없었으나, 떠오르는 이유는 그것밖에 없었다.

‘개새끼. 뭔 드래곤이라는 새끼가 쪼잔하게…… 응?’

돌연 강현이 의아하다는 얼굴을 해보였다.

그를 지켜보고 있던 수란이 묘한 미소를 지어보여서였다.

기감을 끌어올린 강현은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꿈틀-

그의 뒤에 자리한 세르반테와 레이센 란에게서 미세한 꿈틀거림이 보여졌던 것이다.

각각 검과 지팡이를 까딱이는 것이, 흡사 기습을 하려는 각이라도 보는 듯했다.

‘한 번 해볼까?’

강현도 기습으로 마음이 기우는 걸 느꼈다.

라크리셀 셀라토리온을 비교적 쉽게 쓰러뜨린 그들이다.

아무리 <초월자>라고는 해도, 찰나의 틈만 만들어낼 수 있다면 이곳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도 몰랐다.

‘어차피 여기서 죽는다고 해도 다음 차원으로는 넘어갈 테고.’

이미 핀 포인트를 점령한 그들이기에, 실패에 대한 부담도 현저히 적을 터였다.

그러나 엔딜 펠란은 다르게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저놈은 <초월>의 경지에 다다른 괴물이다. 절대 경거망동하면 안 된다!

다급한 외침을 해온 것이다.

강현은 엔딜 펠란이 이토록 강하게 말하는 걸 이제까지 들은 적이 없었다.

그가 이렇게까지 말하는 걸 보면, 정말 강대한 <초월자>인 거겠지.

다만, 강현의 모든 의문이 해소된 건 아니었다.

‘어차피 저자한테 여기서 죽더라도, 다음 차원으로 넘어가지 않습니까? 틈을 만드는 걸 시도해봐도 그럭저럭 괜찮을 거 같은데요.’

앞서 생각했듯이, 더 비욘드의 미션이라는 특수성을 믿은 것이었다.

지금 이 ‘생존의 섬’은 미션의 세 번째 차원이며, 다음 차원으로 넘어가기 위해 필요한 핀 포인트도 미리 점령해놓은 그들이었다.

그렇기에 설령 죽는다고 해도 별 탈없이 네 번째 차원으로 넘어갈 터였다.

‘어차피 죽는 데에 부담도 없겠다, 아무것도 안 하고 죽는 것보다는 저항하다가 죽는 게 낫지 않나.’

하지만 이어지는 엔딜 펠란의 말에 강현은 눈을 부릅 떴다.

-무슨 말을 하는 거냐. 저놈이 나타나면서 근처 공간이 싸그리 박살났던 건 잊어버린 것이냐? 주변을 봐라. 놈은 이미 이곳에 자신의 [권역]을 덮어씌웠다. 이곳에서 죽는다고 다음 차원으로 넘어가는 게 아니라는 말이다. 저놈에게 죽으면 그냥 끝이다.

“……!”

과연, 엔딜 펠란이 말한 대로였다.

급히 주변을 둘러보자, 그들이 있던 평야에 웬 시퍼런 에테르가 일렁이는 동굴 같은 곳이 겹쳐보였던 것이다.

평범한 동굴도 아니고, 그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드넓은 동굴이었다.

‘미친…….’

강현은 그제서야 깨달았다.

수란은 단순하게 그들을 다음 차원으로 넘겨보내려는 게 아니라, 철저하게 목숨을 거둘 마음이라는 걸.

그리고 그 순간, 강현은 팀 보이스를 켰다.

-움직이지 마세요. 저자는 <초월자>고, 이 근방은 이미 저자의 [권역]에 속해있습니다. 여기서 죽으면 아예 끝이에요.

그러자 일행들이 황급히 눈알을 굴린다.

이내 뻣뻣해지는 걸로 봐서는, 그들도 뒤늦게 바뀐 풍경을 확인한 듯했다.

[아깝군.]

그런데 그걸 본 수란이 아쉽다는 표정을 지어보이는 게 아닌가.

강현은 수란의 말을 듣고는 등줄기에 식은땀이 나는 걸 느꼈다.

[혹여 덤벼들기라도 하면 본보기로 사지를 찢어버리려고 했거늘.]

“…….”

[운이 좋은 줄 알거라. 만약 수운이 바친 대가가 충분했더라면 너희들의 목숨까지 거두었을 터이니.]

“죽는 건…… 나 하나뿐입니까?”

강현의 물음에 수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그런 거라면 나머지는 내보내주시죠.”

강현이 일행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그, 그게 무슨 소리예요! 우리가 왜 가요!”

“마, 맞네! 여기 남아서 같이-”

화들짝 놀란 레이센 란과 세르반테가 무어라 외치려했지만.

[호오, 예상외의 발언이긴 하나…… 좋다.]

휙.

수란의 손짓에 홀로그램이 꺼지듯이 사라진다.

‘됐어.’

괜히 자신과 같이 있다가 불똥에 튀길 바에는, 보낼 수 있을 때 보내는 게 나았다.

쿠오오오-

물론 수란과 단둘이 남게 되자, 그에게서 뿜어지는 ‘격’이 한층 더 막대해지기는 했다.

수란이 더 많은 ‘격’을 분출해서는 아니었다.

단지 세르반테와 레이센 란이 받아내주던 양의 ‘격’까지 강현에게 향해서였는데, 그는 단지 그것만으로도 전력을 다해 ‘격’을 끌어올려 저항해야 했다.

[나머지는 다시 원래 있던 공간에 내려놓았다. 이제 남은 건 너 하나군.]

그런 걸 아는지 모르는지, 수란은 태연한 기색으로 말해올 뿐이었다.

강현은 각성 이후 단 한 번도 느끼지 못했던 절망감이 전신에 엄습해오는 걸 느꼈다.

‘도저히 빠져나갈 구석이 안 보여.’

조금 전만 해도 단지 미션 장소와 살짝 겹쳐보였을 따름이었던 동굴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더욱 선명해져, 이제는 오히려 미션 장소가 흐릿하게 보일 지경이었다.

수란이 시종일관 여유로운 태도를 보이고 있는 이유 또한, 강현이 이곳에서 절대 도망칠 수 없을 거라는 확신이 있어서겠지.

강현을 죽이는 건 일도 아닐 텐데, 계속 이런저런 말들을 걸어오는 것도 그런 확신에서 오는 여유일 터였다.

‘빌어먹을. 엔딜 펠란도 말이 없고…….’

강현이 입술을 꽉 깨물었다.

도무지 길이 보이지 않는 건 엔딜 펠란도 마찬가지인지, 아까부터 침묵만을 고수하고 있다.

“…….”

자신을 죽이려는 <초월자>와 그의 [권역]에서 마주보고 있는 상황.

이런 상황에서는, 대체 어떻게 해야 살아남을 수 있을까.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답이 나오지 않는 상황이었으나, 반드시 답을 내야 했다.

만약 답을 내지 못한다면, 자신의 목숨은 오늘부로 끝날 터였으니까.

* * *

‘흠…….’

제2 용계의 지배자인 동시에, <초월자>들 사이에서는 ‘수룡왕’이라는 이명으로 알려진 성룡, 수란은 눈앞의 애송이를 가만히 응시했다.

자신과 마주한 지금도 손끝을 까딱이고, 눈을 굴려대고 있다.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하는 저 모습은, 그가 저 자리에 도달하기까지 절대 포기하지 않는 ‘끈기’를 보였을 거라 유추하게 해주었다.

‘1위를 계속해서 차지할 만하군.’

거기서 엿보이는 정신적인 ‘가능성’을 본 수란은 깔끔하게 인정했다.

비록 인간종 셋에 의해 합공을 당한 거라고는 해도, 수운이 한 방 제대로 먹을 만했다는 것을.

처음 수운이 인간종들에 의해 부당한 피해를 봤다고 말해왔을 때는 의아하게 여겼던 그였다.

인간종들이 수운에게 부당한 피해를 줄 수 있을 것 같지 않아서였다.

하지만 이강현을 보자 납득이 갔다.

길지 않은 시간 동안 폭발적으로 상승한 걸로 여겨지는 ‘격’에 저런 정신적인 면이 더해지니, 상위권을 차지하지 못할 리가 없었다.

설령 그 무대가 최상위 종족들이 득실거리는 더 비욘드의 본선이라고 해도 말이다.

그리고 바로 그 점이, 수란으로 하여금 이강현을 나쁘지 않게 보도록 만들었다.

자신의 휘하에 들인다면, 200년 내로 <초월>에 오를 수 있을 만한 재목인데.

그런 생각을 하던 수란이 내심 쓰게 웃었다.

‘비늘을 괜히 줬나.’

본선이 시작하기 전 수운을 불러 비늘을 건네주었었는데, 그 탓에 자라나는 새싹을 밟아야하게 된 것이다.

그가 수운에게 비늘을 건네주며 했던 ‘약속’은, 제아무리 <초월>의 경지에 도달한 수란이라고 해도 함부로 깰 수 없었기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다만 시간을 더 지체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콰콰콰콰쾅!

수란의 거대한 의식에 들리는 폭발음이 점차 커져가고 있었으므로.

미션 장소에 그의 [권역]을 덧씌운 걸, 더 비욘드 측에서 엄청난 속도로 추적해오고 있는 것이었다.

더 비욘드 측에 정체를 들킴으로써 볼 손해를 고려한다면, 이제 슬슬 끝내야 하리라.

[달리 악감정은 없으니, 고통없이 보내주도록-]

수란이 말을 마치기도 전이었다.

팟-

마치 땅으로 꺼지기라도 한듯 이강현의 신형이 사라진다.

어찌나 그 동작이 신속했던지, 겉으로 보기에는 흡사 순간이동을 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었을 터였지만.

[……재밌구나.]

수란의 초월적인 시력은 이강현이 그저 일종의 블랭크를 연달아 쓴 것뿐임을 즉시 간파했다.

스윽.

그가 그대로 허공에 손을 내젓자, 이강현의 몸이 원위치로 돌아온다.

“큭!”

이 방대한 동굴 전체가 그의 [권역]에 속해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쓸데없는 반항은 관두는 게 좋을 거다.]

그렇게 말한 그가 손을 까딱였다.

쿠구구구구구-

그의 앞에 작은 청창(靑槍) 하나가 생겨난다.

작아보이지만, 헤어릴 수 없을 만큼의 ‘격’이 담긴 창이었다.

“당신이라면…… 포기할 수 있겠습니까!”

[힘들겠지. 그러나 어쩌겠나. 네놈은 이곳에서 벗어날 수 없고, 이 창을 받아낼 수 있을 리도 없을 텐데.]

그런데 수란이 창을 내쏘려고 했을 때였다.

슈와아아아아-

예고도 없이, 동굴이 새하얀 빛으로 물들기 시작한다.

[차원 침투?]

엄청난 속도로 새하얗게 변해가는 동굴을 본 수란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어보인다.

이건 누군가가 자신의 [권역]에 침투할 때 나타나는 현상이었는데, 전혀 전조가 보이지 않았었기 때문이다.

전조도 없이 차원에 침투할 수 있는 존재가 다가오고 있다니.

‘이런 ‘격’을 가진 존재가 개입한다고……?’

예상밖의 일에 수운의 얼굴이 진지해진다.

허나 그가 그러거나 말거나 빛은 동굴을 빠르게 잠식해갔고.

잠시 후.

쿠구구구구구-

저 하늘 위에서부터 수백 m는 되어 보이는 ‘거대한 손’이 나타났다.

“저건!”

강현은 저도 모르게 소리를 냈다.

그도 그럴 게, 저 손의 주인은 그에게 더없이 익숙했으니까.

‘설마……!’

그리고 그의 생각을 뒷받침하듯.

[흐음…….]

이내, 저 높은 곳에서부터 늘어지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태고의 거인’의 등장이었다.

* * *

쏴아아아아아아-

평야에, 아니, 섬 전체에 걸쳐 폭우가 쏟아진다.

평야 근처에 있던 동굴.

동굴의 입구 부근에서 레이센 란은 빗물에 잠겨가는 평야를 바라보았다.

아까 괜히 먹구름이 몰렸던 게 아닌지, 어마어마한 양의 비가 내리는 중이었다.

“갑자기 비가 이렇게나 쏟아지다니…….”

레이센 란은 <초월자>의 손짓에 의해 평야로 돌아오자마자 비가 내렸던 걸 기억해 냈다.

만약 공간을 이동했다는 사실에 당황하고 있었더라면 온몸이 비로 축축하게 젖어버렸을 터였다.

다행히 그녀는 당황하는 것보다는 비를 피하는 데에 초점을 두었고, 이 동굴로 급히 대피한 덕분에 폭우를 피할 수 있었다.

‘이 폭우를 아까 그 <초월자>가 일으킨 건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적어도 하나만큼은 확실하다.

결코 정상적인 현상이 아니라는 것.

‘게다가 이상한 건 저 폭우만이 아니야.’

시야 한구석을 본 레이센 란의 얼굴이 심각해진다.

-…….

-…….

-…….

-…….

<초월자>의 [권역]에서 벗어나 평야로 돌아왔음에도 여전히 채팅창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평소 시청자들이 전해주는 각종 정보를 통해 돌아가는 사정을 파악하던 그녀가 유일하게 볼 수 있는 문구는 하나였다.

[미션이 일시적으로 중단되었습니다. 참가자들은 자리에서 움직이지 말아주십시오.]

[긴급복구중…… 5%]

바로 미션이 일시적으로 중단되었다는 내용의 문구였다.

미간을 찌푸린 채 한참 동안 무언가를 고민하던 레이센 란이 등을 돌렸다.

동굴 구석에 있는 세르반테를 부르기 위해서였다.

“아저씨.”

“……왜 부르나.”

“아저씨도 채팅창 안 보이죠? 미션이 중단됐다는 문구도 떴을 테고요.”

“그래, 나도 마찬가지네. 아마 심각한 일이 벌어진 거겠지.”

세르반테가 고개를 끄덕인다.

“……미션이 중단돼 버렸다니.”

레이센 란이 중얼거렸다.

그간 각종 고난을 헤쳐왔던 그녀로서도 어떻게 해야 할지 감조차 오지 않는 일이었다.

“후우.”

세르반테가 한숨을 내쉬며 말을 꺼낸다.

“강현은…… 괜찮은 거겠지?”

아무래도 <초월자>와 단둘이 남게 된 그가 걱정되는 듯했다.

사실 레이센 란도 마찬가지였다.

만일 그가 라크리셀 셀라토리온이나 바이토넬, 아륵크락타크과 단둘이 남게 되었다면 딱히 걱정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강현은 예선과 본선을 통틀어 가장 많이 1위를 차지했던 참가자이고, 그의 기록이 거품이 아니라는 건 누구보다도 그녀가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이번의 상대는 참가자가 아닌, 무려 <초월자>다.

그들이 염원하고, 소망하던 <초월>의 경지에 오른 차원의 지배자.

그런 괴물과 단둘이 있을 이강현을 생각하면, 걱정이 안 되는 게 이상했다.

해서 원래였다면 그녀 또한 같이 한숨을 내쉬며 걱정을 토했을 것이었다.

그렇지만 세르반테의 잔뜩 일그러뜨린 표정을 보니 도저히 한숨이 나오질 않았다.

“괜찮을 거예요. 알잖아요. 그가 얼마나 말도 안 되는 걸 보여줬었는지.”

“그렇…… 겠지?”

“네, 그러니까 마음 편하게 먹으면서 기다리기나 해요. 곧 멀쩡하게 나올 테니까.”

“후, 고맙네.”

세르반테의 표정이 그제서야 조금 풀어진다.

레이센 란의 말에 별다른 공신력이 있는 것도 아닌데도 말이다.

아저씨 그 자체인 생김새와는 달리, 그 속에는 순박함이 존재해서겠지.

‘경연에서 서로 경쟁하는 참가자를 걱정하고 있다니.’

누가 듣는다면 어처구니없어할 수도 있을 터였으나, 레이센 란은 잘 알았다.

지금 자신이 느끼는 감정도 세르반테와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을.

그녀 또한 이강현의 안위를 끊임없이 생각하고 있었다.

‘참…….’

<초월>을 위해 경쟁하는 서로의 처지를 고려한다면 그야말로 웃기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녀는 예선에서 이강현을 처음 봤을 때를 떠올렸다.

‘처음에는 별 거 아니었는데.’

[종족 특성]을 깨달은 지도 얼마 안 되었던 그였다.

헌데 급격히 성장하여 예선과 본선 모두에 걸쳐 1위를 밥 먹듯이 하는 걸로도 모자라서.

지금은 <초월자>가 그 하나를 직접 죽이기 위해 강림할 정도가 되어버리다니.

그리고 그 과정을 거치면서, 그는 어느새 그녀와 세르반테가 깊이 의지하고 걱정하는 ‘동료’가 되었다.

‘하아…… 저 아저씨 때문에 한숨도 제대로 못 쉬겠네.’

그녀가 크게 한숨을 쉬기라도 했다가는 세르반테가 다시 울상을 할지도 몰랐다.

레이센 란은 할 수 없이 다시 몸을 돌렸다.

그리고 구멍이라도 뚫린 듯한 하늘을 올려다보며 이강현이 무사하기를 바랬다.

[미션이 일시적으로 중단되었습니다. 참가자들은 자리에서 움직이지 말아주십시오.]

[긴급복구중…… 25%]

그나마 긴급 복구가 빠르게 되고 있다는 게 다행이었다.

지금도 퍼센트가 팍팍 오르고 있으니 머지않아 이 망할 비도 진정되고, 이강현의 안위도 알 수 있을…….

그때였다.

슈와아아아아-

느닷없이 사방이 희게 물들기 시작하면서.

[오류가 발생했습니다.]

[긴급복구중…… 23%…… 20%…… 15%…….]

복구 퍼센트가 뚝 떨어지는 게 아닌가.

“어?!”

레이센 란은 깜짝 놀랐다.

조금만 기다리면 복구가 됐을 거 같은데, 난데없이 오류가 발생하다니?

그녀로서는 어찌된 일인지 영문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이, 이건 대체……?”

뒤에서 들려오는 세르반테의 목소리로 보아 그 역시 어리둥절한 듯 보였다.

하지만 그들이 어떤 반응을 보이든 간에 하얀빛은 삽시간에 근방을 뒤덮였고.

[긴급복구중…… 12%…… 8%…… 3%…… 0%]

복구 퍼센트가 0%이 되자, 기다렸다는 듯 온 세상을 하얗게 물들였다.

슈와아아아-!

* * *

강현은 하늘을 뚫고 나타난 ‘태고의 거인’의 손을 보고는 그대로 눈을 깜빡였다.

엄밀히는, ‘태고의 거인’의 손을 보자 몸이 뻣뻣하게 굳어 눈을 깜빡이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서였다.

딱히 ‘태고의 거인’이 그에게만 기세를 뿜는 건 아니었다.

하나 그에게서 은은히 흘러나오는 형언할 수 없는 ‘격’은 자연스럽게 강현을 굳게 만들었다.

[먹구름…… 은…… 위험…… 하지…….]

저런 이상한 소리를 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도 그랬다.

-어, 어떻게 저 존재가 또……? 네, 네놈. 저 존재와 정말 아무 사이도 아니냐?

‘예, 같이 처음 봤잖습니까.’

-그건 안다. 다만 무슨 연유로 저 존재가 네놈을 또 구하러 왔는지…… 아, 아니지, 여기까지는 무슨 방법으로 온 건지…….

엔딜 펠란이 무어라 횡설수설하는 걸 보아 그도 강현처럼 많이 놀란 것 같았다.

그때 ‘태고의 거인’의 손에 변화가 생겼다.

슈우우우…….

수백 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팔이 그 크기를 순식간에 줄이더니, 이내 십여 미터 정도 되는 거인의 형상을 이루고는 지상에 떨어져 내린 것이다.

쿠웅-

온몸에 둘린 신비로운 청록빛에, 이목구비가 있어야 할 자리에는 아무것도 없는 얼굴.

일전에 강현이 봤던 모습 그대로였다.

[일부러…… 새하얀 빛을 사용했다…… 어떤…… 가…….]

“……?”

[너와…… 같은 색…….]

“설마……?”

강현의 입이 벌어졌다.

‘태고의 거인’이 손을 내보이기 전, 근방이 순백의 빛으로 물들었던 걸 떠올린 것이다.

설마 그게 일부러 자신이 쓰는 순백의 빛을 내보인 거였다니.

-어이가 없군……. 에테르를 쓸 때 나오는 빛은 자신의 본질이나 다름없다. 한데 그 색깔을 제멋대로 바꿔댈 수 있는 존재가 있을 줄이야…….

엔딜 펠란이 허탈한 어조로 중얼거린다.

빛을 바꾼다는 건 그가 이렇게 말할 정도로 힘든 일인 듯싶었다.

그런데 ‘태고의 거인’은 그걸 태연하게 성공시켰단다.

강현은 처음 그를 만났던 지난번에는 받지 못했던, 일종의 경외에 가까운 감정이 생겨나는 걸 느꼈다.

그것은 본능에 새겨진, 절대적인 강자에 대한 경외였다.

‘분명 나는 지난번이랑은 비교도 안 될 만큼 강해졌는데…… 강해질수록 더 멀어지는 느낌이군.’

알면 알수록 ‘태고의 거인’이 가진 힘의 끝을 가늠하기조차 힘들었기에, 어찌 보면 당연하다고 할 수도 있을 터였다.

[그대는……?]

수란이 ‘태고의 거인’을 향해 입을 열었다.

[보통 ‘격’을 가진 존재는 아닌 듯한데, 괜한 충돌을 일으키고 싶지 않다면 그대의 신원을 밝혀라. 만약 밝히지 않는다면-]

쿠구구구구-

마치 태풍이 일어나는 것만 같은 기세가 수란에게서 내뿜어진다.

그에 대해 ‘태고의 거인’의 답변은 간단했다.

[나는…… 이강현…… 의…… 구조대…….]

구조대.

장난 같은 대답에 수란의 얼굴이 구겨지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구조대라고……?]

[그러니 그를…… 데려가겠다…….]

[하.]

수란이 얼굴을 싸늘하게 굳혔다.

[헛소리를 하는군. 데려가고 싶다면 어디 한번 막아보라.]

수란이 조금 전 만들어두었던 푸른 창을 강현에게 내쏘았다.

쿠콰콰콰콰콰-

강현으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격’을 품은 창이 쏘아진다.

쐐애애애애액-

“큭!”

그 속도와 기세에 강현은 저도 모르게 스킬을 발동하려 했…… 지만.

다음 순간 그는 볼 수 있었다.

홱-

[걱정…… 마라…….]

푸른 창이 어느새 ‘태고의 거인’의 손에 들려 있는 것을.

“응?”

강현이 어리둥절한 얼굴을 해 보였다.

분명 창이 강현을 향해 일직선으로 내쏘아지는 걸 봤는데, 뜬금없이 거인의 손에 쥐여 있다니?

-저 거인이 창을 가로챘다.

‘예? 전 못 봤는-’

-그건 그저 네놈의 눈이 따라가지를 못했을 뿐이지.

‘그럴 수가…….’

대체 얼마나 움직임이 빠르길래 11단계에 이른 강현이 쫓아가지도 못한다는 걸까.

그러나 더 놀라운 일은 직후에 일어났다.

[흥, 이것도 한 번 받아보아라.]

[…….]

쿠콰콰콰콰-

수란에게서는 푸른빛이, 거인에게서는 새하얀 빛이 새어 나와 서로 마구 얽히고설키기 시작한 것이다.

반경 수백 미터를 훤히 뒤덮는, 어마어마한 에테르들의 향연이었다.

-저 둘이 충돌하려는 거다!

콰콰쾅! 콰쾅!

엔딜 펠란의 말이 끝나자마자 얽히던 에테르들에게서 폭발음이 터져나온다.

‘거인이 이기지 않을까요?’

강현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가 여태껏 봐왔던 그 어떤 <초월자>보다 강대해 보였던 거인이다.

그런 강현으로서는 거인이 진다는 걸 상상하기조차 힘들었다.

하지만 이어지는 엔딜 펠란의 말에 그의 안색이 굳어졌다.

-저 거인이 괴물인 건 맞다만, 속단할 수는 없다. 이 공간은 방금까지 저 드래곤의 [권역]이었던 곳. 예측하지 못한 방향으로 승부가 향할 가능성은 다분하다.

“……!”

그 말을 듣자 강현도 결코 마음을 놓고 볼 수가 없었다.

자신의 목숨이 걸려 있는 거나 다름없었던 만큼, 강현도 손에 땀을 쥐고 거인과 수란의 싸움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진 것은 그때였다.

슈우우우우우…….

[이 정도 ‘격’이면…… 불가항력이라 이해해 주겠지. 약속을 깨도 되겠어.]

돌연, 그렇게 중얼거린 수란이 깔끔하게 기세를 거둔 것이다.

[나는 더 겨루고 싶은 의지가 없다. 그대는?]

[그렇다면…… 나도…….]

스으으으…….

수란의 말에, 거인도 기세를 거두어들인다.

‘이건 또 뭔……?’

갑자기 일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사실에 강현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와중, 수란이 말했다.

[그럼, 다음에는 부디 나쁘지 않은 만남을 가졌으면 좋겠군.]

꽈르르르르릉!

처음 나타났던 것과 마찬가지로, 우렛소리를 끝으로 수란이 사라졌다.

‘뭐가 어떻게 된 건지는 모르겠군.’

-흠, 이 몸이 느끼기에는 저 드래곤은 네놈을 그다지 죽이고 싶어 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예? 저한테 쏘려고 시퍼런 창까지 만들어내지 않았습니까?’

-느낌적으로 그렇다는 거다. 아마 네놈을 죽여야 하는 반강제적인 사정이 있었던 듯싶은데, 저 거인의 등장으로 그걸 무력화할 수 있게 된 게 아닐까 하다만.

‘음.’

확실히 그를 죽이는 걸 썩 내켜 하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그 가정은 어디까지나 엔딜 펠란의 추측.

명확한 사실은 아니었다.

지금 그에게 있어 명확한 건 단 하나였다.

‘결국 또…….’

‘태고의 거인’이 그를 구해주었다는 것.

강현은 거인을 가만히 응시했다.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뭘…… 이 정도로…….]

뒤통수를 긁적거리는 거인.

강현은 말을 계속했다.

꼭 물어보고 싶은 게 있었다.

“궁금한 게 있습니다. 저를 왜 또 도와준 겁니까?”

[팬…… 심…….]

다른 이유가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으나, 저렇게 답을 해오니 뭐라 할 말이 없었다.

강현은 할 수 없이 다른 걸 물어보기로 했다.

“이제 다시 돌려보내 주는 겁니까?”

시야 한구석에 미션이 중단되었다는 문구가 떠올라 있었는데, 거인이 그를 돌려보내 준다면 다시 미션이 재개될 것만 같았다.

거인이 돌려보내 준다고 하면,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해야 했다.

그런데 거인이 고개를 젓는다.

[아직…… 안…… 되지…… 따로…… 보여줄 게…… 있다…….]

“보여줄 거요?”

강현의 반문에, 거인은 손가락을 튕김으로써 대답을 대신했다.

딱!

그러자 그들을 둘러싼 공간이 홱홱 뒤바뀌기 시작한다.

-이건…… 공간을 이동하고 있다. 또 자신의 [권역]이라도 데려가려는 모양이군.

잠시 후, 그는 엔딜 펠란의 말이 틀렸다는 걸 알게 되었다.

뒤바뀌던 공간이 멈춘 뒤 드러난 곳은, 그에게 나름 익숙한 곳이었으니까.

‘균형의 섬?’

끝을 모르고 솟아있는 균형의 탑에, 다섯 개의 구역이 오행으로 나뉜 섬.

본선이 열리는 균형의 섬을 내려다보게 된 것이다.

‘균형의 탑이 약간 까매지기는 했어도…… 비슷하군.’

새하얗던 균형의 탑이 약간 회색으로 된 걸 빼면 그가 아는 균형의 섬과 다를 게 없었다.

강현이 균형의 섬을 살피고 있는데, 거인이 말해온다.

[잘…… 봐라…… 이 경연의…… 진실을…….]

“진실……?”

무언가를 암시하는 듯한 거인의 말.

그리고 다음 순간.

꾸르르르르륵-

균형의 탑에서부터의 충격적인 광경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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