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장 청소 (39/51)

3장 청소

거리를 좁혀오는 세 번째 세력을 본 엔딜 펠란이 흥미롭다는 기색을 보인다.

-호오. 저 까칠한 놈이 여기 있을 거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다만.

‘그러게 말입니다.’

강현은 새로이 나타난 이들의 면면을 훑어보았다.

그와 다를 게 없는 생김새의 인간종들이었다.

‘남녀가 고르게 섞여 있고…… 숫자는 열 명 정도. 무력은 대부분 나랑 엇비슷한가.’

저들의 선두에 알렉시스가 있을 줄이야.

엔딜 펠란의 말마따나,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리고 참으로 다행스럽게도, 그건 그들에게만 국한된 일이 아닌 듯했다.

“황금향의 아티팩트를 코앞에 두고 저놈들이 오다니……. 망할! 철수다!”

“크으! 두고 보자!”

석인과 고블린들의 대장이, 마치 삼류 악당 같은 대사를 외치며 물러난 것이다.

“휴우.”

멀어지는 그들을 보며 강현이 한숨을 내쉬었다.

때마침 알렉시스의 세력이 와주지 않았더라면 일이 심각해질 수도 있었다.

가령 포위라도 당했다면 강현 스스로의 힘으로는 빠져나가기가 거의 불가능했을 터였다.

그런데 가까이 접근해 오는 인간들을 본 강현이 얼굴을 미미하게 굳혔다.

‘음?’

인간들이 그를 보는 시선이, 정확히는 알렉시스를 제외한 나머지 인간들의 시선이 결코 곱지 않았다.

‘에이, 설마 이쪽도……?’

순간적으로 떠오른 불안한 생각을 애써 떨쳐버린 강현이었지만.

사사삭-

아니나 다를까, 목전까지 다다른 인간들이 기습적으로 그를 포위하면서 불안한 생각은 사실이 되었다.

스릉-

“그 검을 조금이라도 까딱이면, 그 즉시 네놈의 목이 날아갈 거다.”

그중 날카로운 인상의 여자가 강현의 목에 검을 들이대며 윽박지른다.

난데없는 협박에 강현이 떨떠름한 표정을 지어 보인 건 당연한 일이었다.

‘아까 알렉시스랑 내가 말한 걸 못 들었나?’

거리가 꽤 멀었을 때 나눈 대화이기는 했어도, 다짜고짜 칼을 들이대다니.

물론 포위가 오래가는 일은 없었다.

“그만, 그만. 물러나라. 내 지인이다.”

뒤따라온 알렉시스의 말에, 모두 하나둘 뒤로 물러나더니 언제 그랬냐는듯 포위를 해제한 것이다.

알렉시스의 지시를 듣는 걸로 봐서는 이 자리의 이들은 모두 그의 수하인 걸로 보였다.

“도련님…… 이 자는?”

강현을 윽박지른 여자가 경계하는 눈초리로 묻는다.

“경연에서 만난 같은 인간종 참가자-”

“그렇다면 경쟁자라는 거군요.”

“……이지만, 이제는 동료라고 할 수 있겠군. 예선에서부터 본선에 이른 지금까지, 쭉 함께하고 있으니까.”

여자의 눈매가 가늘어지는 걸 본 알렉시스가 재빨리 덧붙였다.

“됐고, 뒤로 물러나 있도록. 둘이서만 할 이야기가 있다.”

수하들을 뒤로 물린 알렉시스가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괜찮나? 호위들이 극성이라 미안하군.”

“너는…… 어떻게 여기 있는 거지?”

강현은 가장 궁금하던 걸 물어보았다.

“신계 출신이잖나.”

알렉시스가 심드렁하게 답했다.

“그러고 보니…….”

“그래, 내가 속한 차원을 다스리는 바람의 신이 내 증조부 되신다.”

“아, 그랬었지.”

기억이 날 듯 말 듯했는데, 알렉시스의 말을 듣자 확실히 떠올랐다.

‘예선 두 번째 미션 때, 제 증조부의 창고에서 아티팩트를 꺼내기도 했었지.’

당시 폭풍과 번개를 자유자재로 다루던 알렉시스를 상대하느라 얼마나 고생했던가.

“그러면 네 증조부께서 널 <초월계>에 초대해 준 건가?”

“그런 셈이지. 겸사겸사 일도 좀 배우고.”

강현은 새삼 신기하다는 눈으로 알렉시스를 바라보았다.

‘다른 곳도 아니고, <초월계>에서 일을 배운다니…….’

일종의 차원 금수저가 있다면 이런 게 아닐까 싶었다.

“그럼 너희가 이곳에 온 것도 그 일의 일환인가?”

알렉시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곳은 최근 다른 인간종 <초월자>들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는 빈 [권역] 중 하나다. 해서 우리도 눈여겨보고 있었지. 설마 네가 튀어나올 몰랐지만.”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다.”

“이곳은 이미 네가 ‘청소’를 마친 거겠지?”

“청소라기보다는…… 아니다, 아무튼 대강 정리는 끝냈어.”

강현은 초대를 받고 왔다는 걸 설명하려다가 관두었다.

번거롭기도 할뿐더러, 굳이 설명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건 알렉시스도 마찬가지인지, 손을 휘저으며 대수롭지 않게 넘어가는 기색이었다.

“역시 그런가. 뭐, 적어도 나는 문제 삼지 않을 테니 걱정은 안 해도 된다. 이곳이 아니더라도 빈 [권역]은 몇 개 더 있기도 하고, 우리가 온 건 석인들을 견제하고자 놈들의 비상 신호를 보고 따라온 것뿐이니까. 석인들이 얻지 못했다면 상관없다.”

“그렇다면 다행이네.”

석인들을 견제한다고 대놓고 말하는 걸 보아, <초월계>에서도 <초월자>들의 영역 다툼이 상당한 모양이었다.

“너도 이곳에 온 것을 보니 네 차원의 지배자가 올려보내 준 듯한데, 시간만 괜찮으면 잠시 내 처소로 같이 가지 않겠나? 세르반테가 와 있는데.”

“세르반테?”

강현이 놀란 눈으로 되물었다.

알렉시스만 해도 놀랐는데 세르반테까지 있다니.

“그래, 어떤가?”

강현은 잠깐 고민했으나,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지.”

할 게 없는 건 아니었지만, 잠시 시간을 내는 거라면 괜찮을 듯했다.

세르반테라는, 반가운 얼굴도 보고 말이다.

* * *

그렇게 알렉시스를 따라 그의 처소로 가는 길.

-그나저나, 상당히 바뀐 것 같지 않나?

‘예? 뭐가 말입니까?’

-저 건방진 놈 말이다. 거만한 물이 꽤 빠진 듯하다만.

그 말을 들은 강현은 앞서나는 알렉시스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딱히 의식하지는 못했으나, 그 역시 엔딜 펠란의 말을 듣자 알 수 있었던 것이다.

알렉시스를 상징하다시피 했던, 예선에서의 거만했던 말투가 지금에 이르러서는 거의 사라졌다는 것을.

‘더 비욘드를 하면서 나름의 고충이 있었나 본데.’

자신이야 본선에서도 항상 최상위권이었지만, 그를 제외한 나머지 인간종 참가자들은 크든 작든 순위의 변동을 겪어야만 했다.

최상위권에서 중위권으로, 혹은 최상위권에서 하위권으로.

그 과정에서 종족의 한계나 고하, 순위에서 오는 괴리감을 느꼈을 테고, 그건 알렉시스라고 별반 다르지 않았겠지.

턱-

저 앞에 가던 알렉시스와 그 수하들이 뜬금없이 걸음을 멈춘다.

‘왜 멈추는 거지?’

잠시 의아한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던 강현이었으나, 이내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지금부터 게이트로 이동할 거다. 나랑 같이 들어가면 된다.”

후우웅-

그 직후 반경 2m가량의 작은 게이트가 생성됐고, 강현은 알렉시스를 따라 내부로 진입했다.

“오…….”

게이트 너머로 이동한 강현의 입에서 감탄사가 새어 나왔다.

여지껏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크기의 성이 눈앞에 있었기 때문이다.

비록 지구의 것과 그 양식이 미묘하게 다르기는 했어도, 눈앞의 건축물은 분명 성이었다.

길이는 얼핏 봐도 2-300m에 달했으며, 높이 또한 100m가 거뜬히 넘어 보였다.

“증조부님이 직접 관리하는 곳은 아니고, 아버지가 관리하는 곳이다. 나도 이곳에서 생활하고 있지.”

<초월자>가 직접 관리하는 곳이 아닌데도 이런 크기라니.

알렉시스의 말을 들은 강현은 <초월자>들의 스케일을 다시 실감했다.

“세르반테는 연무장에 있을 테니, 조금만 기다리면-”

“도련님!”

저 멀리서부터 하인 하나가 부리나케 달려온다.

“아버님께서 청소할 [권역]을 선정하는 회의에 부르셨습니다! 바로 가 보셔야 할 듯합니다!”

“급한 일인가?”

“예, 다들 기다리고 계셔서…….”

“……알겠다.”

알렉시스가 강현에게 말했다.

“잠깐 혼자 있어줄 수 있겠나? 세르반테에게는 말을 해두겠다.”

이해하지 못할 일도 아니었다.

“그래.”

알렉시스가 사라진 뒤, 강현은 고급스러운 객실로 안내를 받았다.

“필요한 게 있으시면 침대 옆의 종을 당기시면 됩니다. 그럼, 편히 쉬시길.”

턱-

혼자 남게 된 강현은 기감을 끌어올려 주변을 훑었고, 근처에 아무도 없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세르반테가 오려면 시간이 걸릴 테니까…… 이 틈에 밀린 일을 처리하면 되겠군.’

-할 일이라니?

‘얻은 건 살펴봐야죠.’

조금 전 얻은 왕관을 뜯어볼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강현은 아공간에서 노인의 왕관을 꺼내 들었다.

누렇게 색이 바래기는 했어도, 기억 속의 노인이 쓰고 있던 왕관이 틀림없었다.

‘이 왕관을 왜 아디스가 가지고 있었는지는 몰라도…….’

적어도 노인과 친우라는 건 정말이었던 것 같았다.

강현에게 노인의 [권역]을 소개해 준 것만으로도 충분히 증명된 사실이었지만 말이다.

스윽-

강현은 [email protected]차원의 핵을 꺼내 왕관 옆에 나란히 놓았다.

이걸로 노인의 아티팩트 중 두 개를 모은 것이다.

‘어떻게 쓰는 건지는 몰라도 기분은 좋네.’

그때였다.

슈와아아-

‘[email protected]차원의 핵’에 황금빛이 번쩍이더니, 메시지가 나타난다.

[봉인을 일부 해제했습니다(2/3)]

지난번 균형의 섬에서 [email protected]차원 출신 돌연변이 원주민을 조우했을 때 이후, 또 하나의 봉인을 해제했다는 내용의 문구였다.

‘이제 한 번 남은 건가.’

앞으로 한 번.

단 한 번이면, [email protected]차원과 차원수에 얽힌 완전한 진상을 알 수 있으리라.

하나 잠시 후 강현은 큰 문제에 직면해야 했다.

“그건 그렇고, 어떻게 쓰는 거지?”

그도 그럴 것이, 왕관을 어떻게 사용하는지 도저히 감이 오지 않았던 것이다.

에테르를 불어넣어도, 머리에 얹어도.

“…….”

왕관은 묵묵부답이었다.

강현의 얼굴이 굳은 건 당연했다.

‘불량품이라거나 그 효용이 다한 건가……? 아니, 아니야. 그럴 리가.’

저택에 있던 아티팩트는 이 왕관뿐이었다.

그렇다면 이 왕관이 아디스가 그에게 주려던 아티팩트라는 건데, 못 쓰는 걸 주었을 리는 없었다.

“……망할. 대체 발동 조건이 뭐야?”

그의 얼굴이 점차 찌푸려지고 있을 때였다.

탁탁탁탁-

자신이 있는 객실로 누군가 빠르게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지더니.

벌컥-

“강현! 내가 왔다!”

세르반테가 뛰어들어 온다.

“설마 너까지 여기 있다니! 사적으로 만나니 더 반갑군! 으하하하!”

“세르반테는 어쩐 일로 와 있는 겁니까?”

“저번 미션이 끝나고 더 강해지고픈 마음에 분통을 터뜨리는데, 소환되기 직전 알렉시스가 제안하더군. 청소라는 걸 도와주지 않겠냐고 말이야! 그래서 냉큼 수락했지!”

“아.”

청소를 언급한 걸로 봐서는 일종의 용병으로 고용한 걸로 보였다.

‘다른 세력들이랑 무력 충돌을 하면 강해질 여지는 있겠네.’

석인이나 고블린 같은 종족들과 싸우다 보면, 필시 깨닫는 게 있으리라.

그런데.

“……?”

강현을 바라보는 세르반테의 분위기가 뭔가 묘한 게 아닌가.

‘엄밀히는 묘하기보다는…….’

뭔가 할 말은 있는데, 잘 꺼내질 못하고 있는 듯한 분위기랄까.

눈을 동그랗게 뜬 강현이었으나, 곧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그래서 말인데…… 강현.”

흠흠, 헛기침을 여러 번 내뱉은 세르반테가, 은은한 기세를 방출하며 말을 꺼냈으니까.

고오오오-

“오랜만에, 대련 한번 어떤가?”

강현은 세르반테의 조용히 이글거리는 눈을 마주 바라보았다.

-아주 몸이 달아오른 것 같군. 누군가와 싸우고 싶어서 안달난 눈이다.

엔딜 펠란의 말대로, 세르반테는 당장에라도 몸이 근질거리는 듯했다.

만나자마자 뜬금없이 대련을 하자고 해올 정도이니, 말 다 했다고 봐도 무방하겠지.

다만 오랜만에 대련을 하자는 세르반테의 말과는 다르게, 그와 세르반테는 대련을 한 적이 없었다.

‘예선 이벤트 매치 결승 상대였지.’

당시 각성하고 패배를 겪은 적이 없던 강현에게 첫 번째를 안겨준 게 바로 눈앞의 세르반테였던 것이다.

그러니 굳이 따지자면 대련을 한 적은 없었지만.

“좋습니다.”

강현은 순순히 세르반테의 제안을 수락했다.

그 역시 자신의 정확한 무력 수준을 알고 싶던 참이었기 때문이다.

거기에 세르반테와의 대련은, 자신이 예선에서보다 얼마나 발전했을지를 알 수 있을 기회였다.

“바로 갈까요?”

그리고 그 같은 강현의 말에 세르반테가 화색을 보인 건 당연한 일이었다.

“오오! 좋아! 바로 가지! 어서 일어나게나!”

* * *

그 뒤, 세르반테는 성 지하의 연무장으로 그를 안내했다.

연무장은 온통 새하얀 자재로 뒤덮인 곳이었는데, 텅텅 비어 있었다.

“내가 알렉시스에게 조르고 졸라서 통째로 빌린 연무장이지! 이곳에 머무르는 동안에는 자유롭게 사용해도 된다고 허락을 받았네! 하하, 참으로 잘된 일이지 않나!”

스릉-

세르반테가 함박웃음을 지어 보이며 검을 꺼내 든다.

“그럼, 바로 시작하는 게 어떤가?”

고오오오-

순식간에 끓어오르는 맹렬한 기세.

강현은 재빨리 손을 내저었다.

“너무 급한 거 아닙니까? 이쪽은 아직 준비도 안 됐는데.”

“아, 미안하네. 자네가 편할 때 시작하도록 하지.”

“아닙니다, 잠시만요.”

짧게 답한 강현은 검을 마주 쥐었고.

[스킬, 광검[Lv.9]을 발동합니다.]

촤라라라락-

광검과 아르크트 1단계의 시동을 필두로, 대련을 위한 준비를 하나씩 해나갔다.

[스킬, 강림[Lv.1]을 발동합니다.]

…….

[[email protected]차원의 지배자 인식 완료.]

[‘핵’을 지니고 있을 때에 한해, 일시적으로 ‘격의 상승’을 이끌어냅니다.]

강림, [email protected]차원의 핵까지.

슈와아아아-

준비를 해나감에 따라 강현의 주위를 눈부신 순백의 빛이 휘감는다.

슈와아아-

한눈에 강대함이 느껴지는 빛이었기에, 필시 세르반테로 하여금 위협적인 기세를 느끼게 했을 것이지만.

세르반테는 위협은커녕, 도리어 더 좋아하는 기색이었다.

“하하하! 지난번과는 비교도 안 되게 강해졌군. 준비는 끝냈나?”

“예, 시작하죠.’

“알겠네, 그러면…… 바로 가지!”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세르반테가 바닥을 박살 내며 달려든다.

[스킬, 광명의 눈[Lv.2]을 발동합니다.]

광명의 눈이 발동하는 것과 동시에, 세르반테의 푸른 검과 순백의 검이 거칠게 맞부딪친다.

콰-앙!

‘약간 밀리나.’

세르반테의 완력을 버텨내지 못한 발이, 조금씩 뒤로 밀린다.

하긴, 그의 기억 속의 세르반테는 원래 신체 능력이 뛰어났었다.

당장 지난번 이벤트 매치 때만 하더라도, 초장부터 처참하게 밀리는 바람에 근접전을 포기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그간 인간종을 가볍게 뛰어넘는 괴물들과 상대해서일까.

‘할 만해.’

분명 위협적인 신체 능력이기는 했어도, 상대하지 못할 정도는 결코 아니었다.

‘아르크트 2단계를 시동하면 신체적으로는 오히려 이기겠는데.’

아르크트 2단계의 신체적 능력 향상과, ‘마기 폭발’을 사용한다면 충분히 이기기라 짐작됐다.

물론, 고작 전초전에서 아르크트 2단계 꺼낼 마음은 없었다.

카가가각-

강현이 검을 쥔 오른손에 힘을 주자, 밀리던 발의 떨림이 서서히 멎어간다.

“호오?”

세르반테의 눈에 놀라움이 깃든 순간, 강현은 기습적으로 검을 쥐지 않은 왼손 검지를 내밀었다.

[스킬, 광살포[Lv.1]를 발동합니다.]

[1/5의 마력을 소모합니다.]

키이이잉-

“……!”

강현의 손가락에 맺혀가는 광살포를 본 세르반테가 다급히 물러난다.

퓻-

이어서 발사되는 광살포.

파해검법 제3식, [파도 타기]

슈우우-

세르반테의 몸이 마치 파도를 유랑하는 것처럼 부드럽게 허공을 유영하며 광살포를 피해낸다.

그러나 광살포를 피해낸 것도 잠시, 세르반테의 얼굴이 굳어진다.

[스킬, 순보[Lv.5]를 발동합니다.]

슈슉-

어느새 그의 코앞에 나타난 강현이 검을 내질러오고 있었으므로.

[스킬, 섬광[Lv.8]을 발동합니다.]

강현이 내지르는 한 줄기 빛살에 세르반테도 검을 휘두르며 맞선다.

파해검법 제1식, [작살 던지기]

쾅! 콰콰쾅!

그 충돌을 첫 시작으로, 빠르게 몇 번의 충돌이 추가적으로 이루어진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그 충돌이 오래가는 일은 없었다.

“이, 이게 대체? 큭!”

강현의 날카로운 공격을 견디지 못한 세르반테가, 황급히 물러났으니까.

“최상급 수련의 방에서 검술 수련만 죽어라 하기라도 한 건가? 어떻게 내 자세의 약점을 다 꿰고 있는 거지?”

세르반테가 거리를 벌리며 소리친다.

그가 저런 반응을 보이는 것도 당연했다.

그로서는 강현이 광명의 눈을 통해 자신의 모든 걸 보고 있다는 걸 알 리가 없었으니 말이다.

-흥, 그런 사기 능력을 가진 걸 감사하게 여겨라. 이 몸이 보기에는 그 눈이 네놈 무력의 4할 이상을 담당하고 있는 듯하니.

‘아, 예.’

엔딜 펠란의 말을 대충 넘기는데, 세르반테가 오러를 끌어올리는 게 보인다.

‘검기를 날리려는 건가.’

아무래도 근접전으로는 안 된다는 걸 직감한 듯했다.

파해검법 제2식, [파도 베어내기]

잠시 후, 날아오는 큼직한 푸른 검기.

콰아아아-

가만히 있는다면 이 근처를 통째로 날려버릴 것만 같은 크기의 검기였다.

하나 강현은 피하지 않았다.

그저.

[스킬, 섬광[Lv.8]을 발동합니다.]

쐐애애액-

다가오는 검기의 ‘약점’을 단번에 갈라버린 뒤.

[스킬, 천광의 날개[Lv.2]를 발동합니다.]

날개를 꺼내 들어, 세르반테에게 짓쳐들 뿐.

쿠오오오-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강현이 다시금 세르반테와 맞붙었다.

“크윽!”

침음을 내뱉으며 강현의 검을 맞받아친 세르반테였으나, 승기는 금세 한쪽으로 기울어졌다.

쾅! 콰콰쾅!

여러 번 검이 맞부딪친 끝에.

“졌네, 졌어! 말도 안 나오게 강해졌군!”

검을 내동댕이친 세르반테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버린 것이다.

“단기간에 이토록 강해졌을 줄이야! 내가 자네와 이십여 합 만에 져버릴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네!”

“어차피 당신도 전력을 다한 건 아니지 않습니까?”

검을 거두어들인 강현이 말했다.

그 말처럼, 세르반테와 대련을 하면서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세르반테가 그와 대련을 하면서 모든 수를 다 꺼낸 게 아니라는 것을.

“그건 맞네만……. 대련에서 다 꺼낼 수는 없는 일 아닌가? 게다가 자네도 마찬가지일 테니 어차피 피차일반이라고 할 수 있겠지.”

강현도 아르크트의 2단계와 ???의 나무토막을 꺼내지 않았으니 대강 맞는 말이기는 했지만.

‘서로 다 꺼낸 건 아니어도…… 생각보다 쉽게 이겼네?’

이렇게 힘들이지 않고 이겨버릴 줄 몰라서인지는 몰라도, 약간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흥, 그럼 네놈이 그간 1위를 연속으로 거머쥐었던 게, 단지 전략만이 뛰어나서였다고 여기느냐? 최소한의 무력은 뒷받침되어준 거다. 단지 여태껏 네놈이 싸운 대상이 대부분 괴물들이었기에 스스로의 무력을 체감하지 못했던 거겠지.

엔딜 펠란의 말을 듣자 일리가 있게 느껴졌다.

첫 번째 미션에서 겨루었던 그락크, 두 번째 미션에서 만났던 마인들의 집합체, 악신의 분신까지.

그가 최근 싸웠던 상대들을 봤을 때, 어느 하나 호락호락하지 않은 상대가 없기는 했다.

“후우, 몇 단계인가?”

숨을 고르던 세르반테가 물어왔다.

“10단계입니다만…… 세르반테는요?”

“흐흐, 나는 8단계의 후반부라네. 분명 예선에서만 해도 내가 더 높았을 텐데, 어느새 역전됐군. 그렇게 빨리 강해진 비결이 뭔가?”

“그냥, 하다 보니…….”

말을 하면서도 강현은 불친절한 답이라고 생각했으나, 이게 사실이었다.

그가 직접 한 것이라고는 더 위로 나아가기 위해 끊임없이 강한 상대들과 싸워 승리하고, 그에 따른 보상을 받은 것뿐이었으니까.

물론 여러 기연들도 있긴 했지만, 그걸 굳이 언급할 필요는 없었다.

다행히 세르반테는 말뜻을 이해했다는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하다 보니……. 좋은 말이군. 그냥 닥쳐오는 사건을 해결하다 보니 강해졌다는 말이 아닌가.”

“아시네요.”

“내가 굳이 이 <초월계>까지 온 것도 사실은 그것 때문이니까. 이곳에서 벌어지는 갖가지 일들에 뛰어들면서 강해지고자 온 거지.”

“……?”

“내 차원인 검계에서 나는 절대자나 다를 게 없어. 술을 잔뜩 퍼마시고 만취를 한 채 싸워도, 검이 아니라 나뭇가지를 들고 싸워도 나를 쓰러뜨릴 이가 없지. 심지어는 기세만 방출해도 태반이 쓰러져 버린다네.”

“…….”

“검계에 있어봤자 강해지는 데에는 아무 짝에도 쓸모없다는 결론이 나오더군. 에테르 밀도도 낮고, 대련을 할 만한 상대도 없으니. 그래서 저번 미션이 끝나고부터는 주욱 균형의 섬에 있었는데, 이번에는 마침 알렉시스가 좋은 제안을 해줬지.”

강현도 공감하던 사항이었다.

그는 이미 S급 헌터보다 강하고, 효율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게이트는 한정되어 있었다.

더 이상 노가다로도 레벨을 올리기가 버거워졌더라면, 그 역시 빠르게 균형의 섬으로 올라갔을 터였다.

“강현, 자네는 자신이 있나?”

“자신?”

“그래, 이 경연에서 끝까지 살아남아서 <초월>을 할 자신. 나는…… 솔직히 많지 않네. 한때는 세상을 주유하면서 마음만 먹으면 못 하는 일이 없다고 여겼지만, 이 경연을 하면서 점점 한계를 마주하는 기분이야.”

“…….”

“나 자신의 무력도 그렇고, 종족의 차이도 그렇고. 여기까지는 어찌어찌 잘 왔다만, 이대로 가다가는 다음 미션에서 탈락해 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더군. 남궁강룡과 이현이 그랬던 것처럼 말일세.”

세르반테가 씁쓸하게 읊조린다.

언제나 밝은 모습만을 보이던 세르반테의 어두운 내면을 봐서일까.

강현은 마음이 무거워져 가는 걸 느꼈다.

포기하지 않고 끊임없이 나아가는 자신과 달리, 슬슬 한계를 느끼는 이들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자신에게 다짜고짜 대련을 신청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강현이 할 말은 많지 않았다.

“할 수 있을 겁니다. 같이 올라가야죠.”

그저 상대가 진심이라는 걸 느낄 수 있도록 말해주는 것뿐.

이내, 복잡한 얼굴로 강현을 응시하던 세르반테가 씩 웃어 보인다.

“하하…… 그렇지. 끝까지 올라가야지! 쓸데없이 죽는 소리를 했군. 잊어주길 바라네. 으하하하!”

세르반테가 멋쩍은 웃음을 터뜨렸을 때였다.

“아주 무거운 이야기들을 나누고 있군그래.”

저 멀리서부터 알렉시스가 빠르게 걸어왔다.

“다, 다 들은 건가?!”

“저 밖에서도 들리던데.”

알렉시스가 연무장 밖을 가리키자, 세르반테가 얼굴을 붉힌다.

하나 알렉시스는 아랑곳하지 않는 기색이었다.

“세르반테. 청소하러 갈 [권역]을 정했다. ‘적흑의 천사’라는 <초월자>의 [권역]이다. 적흑의 투구, 망토 등, 적어도 상급의 아티팩트들이 있을 거라 추정되는 곳이지.”

“오, 정말인가?”

“그래. 사전에 합의한 대로 기본적으로 중급 에테르 결정체 두 개를 지급하고, 추가적인 성과에 따라 보상을 더 얹어주도록 하지.”

“좋군! 언제 출발할 예정인가? 오늘? 내일?”

알렉시스가 고개를 저었다.

“나도 빨리 출발하고는 싶다만, 사흘 뒤다. 아직 인원 확충이 안 되어서.”

“인원 확충? 인원이 모자라다는 뜻인가? 그러면…….”

그런데 그 말을 들은 세르반테의 시선이 강현에게 향하더니.

“강현! 너도 가겠나?! 알렉시스, 강현도 같이 가도 되겠지? 방금 대련해 보면서 알았는데, 실력이 장난이 아니라네!”

느닷없이 강현의 어깨를 붙들었다.

“우리로서는 나쁠 게 없지. 물론 그전에, 당사자가 간다고 해야겠지만. 조건은 세르반테와 똑같이 해주마. 어떤가?”

거기에 알렉시스가 동의하면서, 둘의 시선이 강현에게 쏠린다.

“……잠깐만.”

강현은 천천히 머리를 굴렸고,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미션이 시작하기까지 5일이나 남았겠다…….’

적흑의 투구나 망토 같은 거창한 이름의 아티팩트는 둘째 치더라도, 에테르를 얻을 수 있는 최적의 기회였다.

그렇다면, 그가 할 말은 정해져 있는 거나 다름없었다.

“가지.”

후일 ‘핏빛 참사’라 불리던 사건에, 강현의 합류가 결정된 순간이었다.

* * *

사흘 뒤.

“다들 모였나? 2㎞ 정도 도보로 이동하고, 이후에는 게이트를 사용할 예정이다. 적흑의 천사에 대한 자세한 정보 및 몇몇 전달사항들에 대해서는 게이트 앞에서 설명할 예정이니, 일단 출발하도록 하지.”

알렉시스를 필두로, 적흑의 천사의 [권역] 청소를 위한 스무 명가량의 인원이 성을 벗어난다.

터벅-

알렉시스와 그 호위들이 선두에 서자 일렬에 가까운 진형이 만들어진다.

선두를 제외하고도 인원 대부분이 ‘바람의 신’의 신계에 속해 있는 이들이어서일까.

신계 출신이 아닌 강현과 세르반테는 자연스레 행렬의 맨 뒤에서 이동하게 되었다.

-모이니까 제법 수가 되는군. 저 행렬 사이에 끼어있었다면 답답했겠어.

‘그러게 말입니다.’

강현은 엄숙한 분위기로 걷는 행렬을 바라보았다.

모두 최소 8단계 이상의, 결코 무시할 수 없는 힘을 가진 이들이었다.

뿐만 아니라 [권역]을 청소한다는 일을 결코 가볍게 여기지 않는 듯, 분위기 또한 더없이 진중했다.

-흥, 말이 청소지, 도둑질이나 다름없지 않으냐. 어떤 함정이 도사리고 있을 줄 모르는데 마음이 편할 리가 없지.

도둑질.

엔딜 펠란은 [권역] 청소를 그렇게 여기는 걸로 보였다.

‘하긴.’

그의 말처럼, 청소란 자리를 비운 <초월자>의 각종 아티팩트를 쓸어오는 행위.

<초월자>였던 엔딜 펠란의 입장에서는 도둑질이라고 여기는 게 당연했다.

‘뭐, 나름 준비는 열심히 했으니 비명횡사는 안 당하지 않겠습니까.’

-그건 모르는 일이지. 게다가 준비라고 해봤자 네놈보다는 옆의 시끄러운 놈만 재미를 본 듯하다만.

엔딜 펠란이 냉소한다.

강현은 옆의 시끄러운 놈, 세르반테를 힐끗 쳐다보았다.

“흐흐…… 신이 나는군……!”

세르반테는 청소를 간다는 게 그리 좋은지 열심히 중얼거리는 중이었는데, 온몸에 크고 작은 상처들이 가득했다.

지난 사흘간 강현과 끊임없이 벌였던 대련의 흔적들이었다.

시간이 사흘이나 있다면서, 강현을 붙잡고 계속해서 대련을 신청했던 것이다.

-도움도 별로 안 되는 놈이 실실거리기나 하고 있군.

그런 세르반테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엔딜 펠란이 차갑게 내뱉는다.

실제로 대부분의 대련은 강현의 압승으로 끝났기에, 얼핏 본다면 그로서는 얻은 게 없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었지만.

‘거의 처음으로 실전이 아니라 대련으로 감각을 점검할 수 있었던 데다가…….’

만약 세르반테와의 대련으로 얻을 게 없었더라면, 강현은 대련을 수락하지도 않았을 터였다.

강현의 시선이 시야 한구석으로 움직인다.

[현재 취한 에테르의 양(3,422/8,000)]

에테르의 양을 본 그의 입꼬리가 기분 좋게 올라갔다.

사흘 전 424에 불과했던 에테르가, 거의 3,000 가까이 올랐다면 누구라도 그럴 것이었다.

‘저 성에 묵길 잘했지.’

그는 고개를 뒤로 돌려 멀어지는 바람의 신의 성을 쳐다보았다.

처음 <초월계>에 왔을 때도 에테르의 밀도에 놀랐으나, 저 성은 보통의 <초월계>보다 더 농밀한 에테르를 지닌 곳이었다.

그 덕에 호흡에 집중하기만 하면, 손쉽게 에테르를 올릴 수 있었고.

-그래 봤자 며칠 전 보상으로 받은 에테르 결정체가 더 많이 올려주지 않았느냐.

물론 엔딜 펠란의 말처럼, 에테르 상승에 결정적인 공헌을 한 건 미션 1위 보상으로 지급된 중상급 에테르 결정체이긴 했다.

알렉시스의 제안을 수락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중상급 에테르 결정체 및 <초월계>로 3회 입장할 수 있는 입장권이 주어졌던 것이다.

하나 그걸 감안하더라도 지난 사흘이 쏠쏠한 시간이었다는 건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더군다나 이번 청소가 끝나면 알렉시스한테 또 에테르 결정체를 받을 테고.’

그렇게 된다면 11단계도 얼마 남지 않게 된다.

더 비욘드 측에서 참가자들의 편의를 위해 제공한 키트는 총 13단계까지 있으니, <초월>에 이르기까지 고작 두 단계 남은 셈이었다.

‘13단계가 되면 제일 먼저…… 아니지.’

잠시 상상의 나래를 펼치던 강현은 고개를 저어 상념을 털어냈다.

아직 10단계이면서 벌써 13단계를 상상하고 있다니.

그런 건 나중에 생각해도 충분했다.

‘그나저나,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오늘따라 기분이 안 좋아 보이는데요.’

강현이 엔딜 팔란에게 물었다.

-기분이 안 좋아 보인다니, 무슨 말이지?

‘그냥…… 퉁명스러운 거 같아서요.’

원래도 쌀쌀맞은 엔딜 펠란이었으나, 오늘은 특히 그 정도가 심하게 느껴졌다.

-무슨 일이 있을 수 있다는 거냐. 어차피 이 좁아터진 검에 처박혀 있어야만 하는 신세인데.

“…….”

언제나처럼 차갑게 쏘아붙이는 엔딜 펠란.

강현은 그의 반응에 날이 서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어쩌면 수수께끼의 검에 갇혀 있어야 하는 것에 대한 회의감을 느끼는 건지도 몰랐다.

그때였다.

턱-

선두의 알렉시스가 멈춤에 따라, 행렬이 차례대로 정지한다.

이어지는 알렉시스의 손짓에 일행은 게이트 앞으로 모여들었다.

알렉시스가 전방에 보이는 조그마한 게이트를 가리켰다.

“이제 저 게이트를 넘기만 하면 곧장 적흑의 천사의 [권역]에 진입한다. 그전에 주의사항 및 자세한 정보를 설명하도록 하지. 한 번만 설명할 테니 잘 듣도록.”

알렉시스의 말에 일행이 빠르게 집중한다.

“적흑의 천사는 제10 천계의 지배자로서, 아주 오래전에 벌어졌던 천마대전에 참여했을 만큼 영향력 있는 <초월자>다. 이명이 적흑의 천사인 이유는, 불의를 마주하면 절대 좌시하지 않고 근처를 깡그리 쓸어버리는 그녀의 불같은 성정에서 유래되었지. 그렇기에 별다른 세력을 일구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연히 우리 제1 신계와 석인들의 제8 석계, 고블린 혼혈들의 제3 아인계와 더불어 이곳 제20 남서 <초월계>를 사 등분 했다.”

“…….”

“다만 수십 년 전부터 [권역]에 출입하지 않는다는 소식이 들려오기 시작했다더군. 해서 각 종족은 은밀하게, 그리고 꾸준하게 적흑의 천사의 [권역]을 정찰했고, 그녀가 돌아오지 않을 거라는 결론을 내렸지. 이게 그 정찰의 결과물이다.”

팟-

알렉시스가 품에서 노란 구슬을 꺼내 들자, 둥근 궁전으로 보이는 곳의 투명한 홀로그램이 떠오른다.

내부 구조가 상세하게 표현된 걸로 보아 오랜 시간 조사를 해온 걸로 보였다.

그런데 궁전의 규모를 확인한 강현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

‘뭐야…….’

홀로그램 상으로만 봤음에도, 그 너비가 말도 안 될 정도라는 걸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궁전의 동서남북에는 각각 구름을 가볍게 꿰뚫는 높이의 기둥들이 자리하고 있었는데, 그 각각의 크기가 알렉시스 일가의 성을 보는 듯했다.

괜히 상당한 영향력을 가졌던 <초월자>라고 한 게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적흑의 천사가 자신의 무구들을 두었으리라 추정되는 곳은 바로 저곳, 궁전의 중심부다. 적흑의 투구와 망토를 비롯한 최상급 아티팩트들이 있을 거라고 예상되며, 따라서 우리의 목적지도 당연히 저곳이라고 할 수 있지.”

궁전의 정중앙 부근이 노란빛으로 반짝거린다.

드높은 부속 기둥들 사이에 숨겨진, 궁전 중에서도 가장 깊숙한 곳이었다.

“우리가 [권역]에 진입하고자 뚫어놓은 곳은 이곳이다. 아버지가 주관한 회의에서는 제3 출입구라고 칭하더군.”

이번에는 궁전 외곽 수풀에 위치한, 지하로 통하는 땅굴이 번쩍거린다.

“보다시피 구불구불한 땅굴이 1㎞ 가까이 이어진 곳이지. 그 끝은 중심부와 연결되어 있기에, 제3 출입구를 통해 궁전의 중심부로 진입한다는 게 상부의 계획이다.”

알렉시스의 말을 머릿속에 잘 새겨듣는 와중, 뭔가 기시감이 느껴진다.

그 기시감의 정체를 곰곰이 생각해 본 강현은 이내 깨달을 수 있었다.

‘지구에서 괴수 게이트에 들어가기 전 해주는 브리핑이랑 똑같네.’

발표자가 백아영이 아니라 알렉시스라는 것, 그 목적지가 괴수들이 있는 게이트가 아닌 <초월자>의 [권역]이라는 것만 빼면, 지구에서의 게이트 브리핑과 하등 다를 게 없었던 것이다.

이어지는 주의사항도 마찬가지였다.

“주의할 점은 자리를 비운 적흑의 천사와는 달리 그녀의 권속들은 [권역] 곳곳에 여전히 남아 있을 수도 있다는 점이다. 또 각종 함정과 장치들이 가득하다고 하니, 그것들 역시 조심해야겠지. 마지막으로 별로 가능성이 없기는 하다만, 우리보다 석인들이나 고블린들이 우리보다 먼저 도착해 있을 수도 있다. 그 점 또한 반드시 유념하도록. 그럼, 바로 들어가도록 하겠다.”

알렉시스의 말이 끝나자 일행은 하나둘 게이트 내부로 진입했고, 강현도 게이트를 넘어 적흑의 천사의 [권역]에 들어섰다.

후우웅-

[권역] 청소의 시작이었다.

* * *

게이트를 넘은 강현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건, 아까 본 거대한 궁전과 기둥들이었다.

홀로그램으로 봤을 때도 그랬으나, 직접 보자 더욱 웅장한 느낌이었다.

‘저기 어디 있는 땅굴을 쭉 따라 저 내부로 들어가서, 아티팩트를 쟁취해 내면 된다는 건가.’

꽤 긴 설명을 들은 것 같았지만, 막상 정리하자 참으로 간단했다.

‘지구랑 스케일이 다르긴 하네.’

마음 같아서는 여유롭게 근처를 거닐며 감상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그럴 시간은 없었다.

스윽-

알렉시스를 시작으로, 일행은 이미 땅굴로 진입하는 중이었으니까.

“강현! 어서 가지!”

강현도 세르반테의 손에 이끌려 땅굴 내부로 향했다.

‘음?’

땅굴에 들어선 강현이 고개를 갸웃했다.

‘공기가 쾌적하잖아?’

땅굴이라길래 퀴퀴하고 습한 곳을 연상했는데, 예상보다 훨씬 쾌적했다.

-<초월계>에는 마기나 사기와 같은 류의 사악한 에테르가 아닌 이상 그런 공간이 없다. 지배자의 입맛에 따라 환경을 설정할 수가 있지. 그 같은 점에서 이 [권역]의 주인은 천사였다고 하니, 인간과 크게 차이나지 않는 환경을 선호할 거다.

‘이 [권역] 전체의 환경이 그렇다는 겁니까?’

-당연한 거 아닌가?

‘…….’

이 넓은 [권역]의 기후까지 조성할 수 있다니.

‘아무리 <초월자>라고 해도, 이런 것들까지 할 수 있다고……?’

그동안 그들의 전지전능함에 관한 이야기는 많이 들었지만, <초월계>에 올라오고 나서야 진정한 <초월자>의 힘을 하나씩 알아가는 기분이었다.

“강현, 무슨 생각을 그리 심각하게 하나?”

그의 옆에서 따라 걷던 세르반테가 말을 걸어온다.

“별건 아니고…… <초월자>들의 스케일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하하! 자네도 슬슬 체감이 되고 있나 보군! 나도 비슷하네.”

“그렇습니까?”

“결국 경연에 참가하는 이상, <초월자>가 되는 게 우리의 목표이지 않나. 신경이 쓰이고, 그들의 위대함에 몸을 떠는 게 당연하지. 다만 나는, 결코 그 규모에 주눅 들어서는 안 된다고 보네. 오히려 싸워나가야 하지.”

“싸워나간다고요?”

“그래. 내가 자네를 붙잡아 대련을 하고, 알렉시스가 가문에서의 입지 성장을 위해 이 일을 도맡아 하는 것처럼 말이야! 하하하! 그래야 설령 이 경연에서 떨어지더라도 <초월>을 준비할 수 있지 않겠나!”

그 말을 들은 강현은 깨달았다.

‘벌써 더 비욘드에서 떨어졌을 때를 대비하고 있는 건가.’

세르반테의 더 강해지고자 하는 몸부림과 알렉시스의 [권역] 청소는 모두, 앞으로를 상정한 행동들이라는 것을.

그러자 자연히 이러한 의문이 생겨난다.

‘나는 뭘 하고 있지?’

바로 그 자신은 무슨 대비를 하고 있냐는 의문이었다.

아무리 현재 1위를 차지하고 있다고는 해도, 다음 미션에서 얼마든지 떨어질 수 있는 게 더 비욘드다.

그렇다면 더 강해지기 위한 본격적인 전략 수립이 필요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바스락-

“……?”

묵묵히 행렬을 따라가던 강현이 고개를 들었다.

저 위에서부터, 인위적인 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세르반테, 이상한 소리 못 들었습니까?”

“음? 나는 잘 모르겠다만?”

“……잘못 들었나.”

그러나 잠시 후.

바스락-

또다시 소리가 들려온다.

그리고 면밀히 기감에 집중하던 강현의 얼굴이 굳어졌다.

“이건……!”

바스락거리는 소리의 근원지에서, 상당량의 에테르가 응축되는 게 느껴진 것이다.

“조심해야 합니다! 기습일 수도 있습니다!”

그걸 직감하자마자 강현은 있는 힘껏 소리쳤고.

콰콰콰콰쾅!

다음 순간, 땅굴 전체를 뒤덮는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다행스럽게도, 책임자인 알렉시스는 강현의 외침을 경시하지 않았다.

강현의 외침과 폭발 사이의 짧은 틈.

그사이에 재빨리 일행을 앞으로 이끌었다.

“크으윽! 모두 전진해라! 조금만 더 가면 미리 구축해 놓은 공동이 나온다! 최대한 속도를 끌어올려!”

일행은 폭발에 의해 땅굴이 무너져내리기 직전 한발 앞서 이동했고, 폭발의 범위를 벗어날 수 있었다.

아슬아슬하게, 인위적으로 만든 것이 느껴지는 공동에 진입한 것이다.

그리고 행렬의 마지막에 있던 강현과 세르반테가 공동을 밟자마자.

쿠르르르릉-

그들이 지나온 통로가 순식간에 무너져 내린다.

그에 따라 공동도 흔들리기는 했으나, 무너져 내리지는 않았다.

“……하마터면 타지에서 생매장당할 뻔했군.”

힐끔 뒤를 본 세르반테가 얼굴을 굳힌다.

자신이 방금 지났던 길이 무너지고 있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비단 세르반테만이 아니라 다른 이들도 비슷한 반응이었다.

“대, 대체 누가…….”

“기습인가……?”

난데없는 폭발에 대부분 놀란 듯했다.

“……다이너마이트라도 잔뜩 매설해 놓은 줄 알겠네.”

강현이 중얼거렸다.

사태가 급박하게 돌아갔던 걸로 봐서는, 자신이 외치지 않았더라면 출발이 늦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됐다면, 일행 중 일부는 이곳에 오지 못한 채 무너져 내리는 통로의 잔해에 깔려버렸겠지.

거기에 맨 뒤에 있던 자신과 세르반테가 포함됐으리라는 건 자명한 일이었고 말이다.

“괜찮나?”

그런 가운데, 선두에 있던 알렉시스가 강현에게 다가온다.

“조금만 늦었어도 꼼짝없이 깔려 죽을 뻔했는데, 덕분에 살았다.”

알렉시스가 고개를 살짝 숙이며 감사를 표한다.

진심으로 고마워하는 표정에 강현이 의외라는 듯 눈을 치켜떴다.

‘이런 얼굴도 할 줄 알았나.’

항상 오만하던 알렉시스가 감사를 표해올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하나 고마워하는 표정을 지은 것도 잠시, 알렉시스의 얼굴이 심각해진다.

“우리를 기습한 놈들에 대해서는…… 르웬이 조사를 나갔으니 곧 그 정체를 알 수 있을 거다. 이미 대충 짐작이 가기는 하다만.”

“르웬?”

“아, 내 호위의 이름이다. 지난번 처음 만났을 때 잠깐 대화도 나누지 않았나.”

“아.”

만나자마자 강현의 목에 다짜고짜 검을 겨누었던 날카로운 인상의 여자 호위를 말하는 걸로 보였다.

알렉시스가 이런 상황에서 정찰을 보낼 정도면 꽤나 신뢰하는 모양이었다.

“아무튼 하던 말을 마저 하자면, 나는 폭발을 일으킨 게 석인들일 거라고 거의 확신하고 있다.”

“석인들이?”

“우리를 노릴 세력은 석인과 고블린, 둘뿐인데 만약 고블린들이 범인이라면 통로를 무너뜨리려고 하지는 않았을 거다. 놈들은 저 통로에 폭발을 일으킬 능력도 없을뿐더러, 사냥감을 포위하는 걸 즐겨 하거든.”

“그럼…… 석인들은 저 통로를 폭파할 만한 능력이 있다는 건가?”

“지면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놈들의 [종족 특성]은 알고 있겠지? 저 통로를 무너뜨리는 건 충분히 가능할 거다. 대지에 민감한 놈들이니, 우리가 땅굴로 들어오는 것도 느꼈을 테고.”

강현의 얼굴이 덩달아 심각해진다.

이 궁전에 진입하기 전 다른 종족들이 왔을 수도 있다는 경고를 듣기는 했어도, 설마 본격적으로 움직이자마자 기습이 들어올 줄이야.

아무래도 생각보다 상황이 좋지 않은 듯했다.

“다만, 충동적으로 기습을 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기습을 충동적으로 했다고?”

알렉시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까지는 내 추측에 불과하지만. 기습을 제대로 하려고 했다면 우리가 빠져나갈 수 있는 틈조차 주지 않았을 것 같거든.”

그때였다.

“도련님, 기습해 온 놈들의 흔적을 찾았습니다.”

저 공동의 끝에서부터 르웬이 흑발을 찰랑이며 나타난다.

몸 구석구석이 먼지로 뒤덮여 있었으나, 눈빛만큼은 차갑기 그지없었다.

“석인들이 맞습니다. 저희가 빠져나간 것도 모른 채 지상 위에서 킬킬대고 있더군요. 숫자는 열 명이 조금 넘어 보였습니다.”

“흐음…… 열 명이 조금 넘어 보인다고? 본대가 따로 있다는 거겠군.”

“현재로선 그럴 확률이 커 보입니다. 제 판단으로는 아티팩트를 노리는 본대와 대기 병력이 나뉜 모습이더군요. 지금은 놀고 있지만, 머지않아 저희의 피해를 확인하고자 정찰 인원을 보낼 거로 보입니다.”

“그렇단 말이지……. 고생했다.”

“감사합니다.”

잠시 턱을 괴고 생각에 잠겨 있던 알렉시스가 입을 열었다.

“좋아, 그럼 바로 이곳을 벗어나 놈들을 공격한다. 모두 준비-”

“잠깐만.”

알렉시스가 공격을 지시하려던 순간, 강현이 그 말을 가로막는다.

그러자 르웬의 눈에 쌍심지가 켜졌다.

“그쪽은 뭔데 감히 도련님의 말을 가로막…….”

“할 말이 있어서.”

“물러나야 할 시점을 끝까지 모르고-”

“그만, 자격이 있는 동료다.”

알렉시스가 르웬의 말을 끊었다.

“하지만…….”

“네 눈앞에 있는 참가자가, 예선과 본선 모두에서 1위를 밥 먹듯이 하고 있는 괴물이라면 믿겠나?”

“……!”

르웬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는다.

강현을 탐탁지 않게 여기던 그녀로서는 전혀 예측하지 못하는 말이었겠지.

그런데.

“설마 경연에서 두각을 드러내고 있다는 그 인간종 괴물이……?”

“그래, 요근래 <초월자>들의 연합을 떠들썩하게 만들고 있는 장본인이지.”

‘<초월자>들의 연합?’

알렉시스와 르웬의 대화에 강현이 어리둥절한 기색을 내보였다.

“아, 너는 아직 모르는 건가?”

알렉시스가 뒤늦게 그걸 눈치채고 말했다.

“지난번 미션이 시작하기 전 엘이 했던 말을 기억하고 있겠지?”

“엘의 말?”

“소환되기 직전 했던 말이다. 한 번 잘 떠올려 봐라.”

강현은 곰곰이 머릿속을 뒤져보았고.

“아.”

이내 소리를 내었다.

가만히 기억을 되짚어보자, 빙인들의 차원에 소환되기 직전 엘이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는 걸 알게 된 것이다.

엘은 이렇게 말했었다.

[-이번 미션에 많은 시청자분들이 주목을 하고 있으니, 내리는 모든 선택에 후회없으시길 바라겠습니다.]

많은 시청자들이 이번 미션을 주목하고 있으니 잘 선택하라고.

“시청자가 주목한다고 한 게 <초월자>들의 연합이랑 관련이 있다는 건가?”

“그래, 내가 알기로, 꽤 많은 연합들이 너를 주목하고 있는 중이지. 조만간 연락이 갈 거다.”

“…….”

강현은 눈을 깜빡였다.

계속해서 1위를 함에 따라 시청자들의 시선이 쏠릴 수도 있겠다는 예상을 하기는 했다.

그러나 <초월자>의 혈육이라 할 수 있는 알렉시스에게 직접 말을 전해 듣자 기분이 묘해졌다.

“뭐, 상황이 상황이니 그 얘기는 나중에 하고. 이제 네 전략을 말해봐라.”

알렉시스의 말에 강현은 상념을 접어두었다.

바깥에 석인들이 득실거리고 있는 만큼, 시청자들에 관한 건 이번 일이 끝나고 해도 늦지 않을 터였다.

‘본대는 따로 있고, 충동적으로 기습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했지.’

강현은 르웬이 전달해진 정보를 정리하며 천천히 말을 꺼냈다.

“알렉시스, 너는 곧장 밖으로 나가서 공격을 하려고 했겠지?”

“그래, 놈들이 시시덕거리고 있는 걸 노리려고 했지.”

“내 전략도 크게 다르지 않아. 단지…….”

“단지?”

“거기서, 약간만 비트는 거지.”

“……?”

의아한 표정을 짓는 알렉시스에게 강현은 씩 웃어 보였다.

“놈들이 방심하고 있는 틈을 타서, 싸먹어버리는 거다.”

* * *

그 시각, 궁전의 지상.

“흐흐흐…… 그 신계 놈들의 동향은 파악했나?”

“조금 전 인원을 내려보냈습니다!”

“곧 확인할 수 있겠군……. 어차피 볼 필요도 없겠지만 말이야! 하하하!”

석인들의 대기 병력을 맡게 된 드레스는 땅굴의 출구를 보며 킬킬댔다.

‘이쪽으로 오자마자 신계 놈들한테 한 방 먹이다니. 이렇게 운이 좋을 데가!’

아티팩트를 탐사하는 본대에 합류하지 못하고 후방의 경계를 책임지게 되었을 때는 얼마나 죽상을 지었었던가.

다만 그것도 잠시, 지금 그의 입꼬리에는 웃음이 만연했다.

자신의 불행을 본 어느 <초월자>가 선물이라도 준 건지, 신계 놈들이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졌던 것이다.

그것도 평지도 아닌, 석인들의 [종족 특성]과 크게 연관되어 있는 땅굴로.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드레스가 바로 공격 명령을 내린 건 당연한 일이었다.

‘으흐흐, 지금쯤 한창 추스르고 있겠군. 보고 동향만 전해 듣고 천천히 가도…….’

필시 골골대고 있는 놈들을 일격에 쓸어버릴 수 있으리라.

그리고 그 같은 전공은 그에게 큰 부와 명예를 가져다줄 게 분명했으니, 행운이 아닐 수 없었다.

그렇기에 잠시 후.

“동향을 파악했습니다! 현재 땅굴 사이에 위치한 공동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으며-”

그의 웃음은 신계 놈들의 동향을 파악했다는 보고가 들려왔을 때까지만 해도 지워지지 않았다.

“자세한 피해 상황은…… 커헉?!”

푸욱-

날카로운 인상을 한 여자의 검이, 부하의 배를 꿰뚫기 전까지는.

“뭐, 뭐냐!”

깜짝 놀란 드레스는 뭔가 잘못됐다는 걸 깨달았지만.

이미 늦어 있었다.

“놈들을 죽여라!”

“도련님의 명을 받듭니다!”

사방에서 신계 놈들이 나타난 것이다.

“노, 놈들을 막아!”

쾅! 콰쾅!

신계 놈들과 석인들 사이에 갑작스러운 전투가 펼쳐진다.

“하하하! 전투다! 강현과 대련을 한 성과를 알 수 있겠군!”

“쓸데없는 소리하지 말고 전투에나 집중해라!”

“으하하! 알겠다, 알렉시스!”

선두의 두 인간종을 필두로 쏟아져 나오는 스무 명가량의 적들.

일이 이런 식으로 전개될 거라고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던 드레스가 이를 갈았다.

“어이! 당장 연락구를 꺼내서 본대에게 보고를 돌려라! 한시가 급하다고 해!”

“예, 옛!”

한데 부하가 연락구를 꺼냈을 때였다.

쐐애애액-

새하얀 검기가 날아오더니, 연락구를 반으로 갈라버린다.

“으아앗?!”

“너, 너는?”

검기가 날아온 방향을 본 드레스가 눈을 부릅떴다.

황금향의 아티팩트를 가로채 간 놈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잘 만났다! 네놈을 죽이고, 황금향의 아티팩트를 가져가주마!”

분노한 드레스가 손을 내뻗자, 땅에서부터 날카로운 암석이 삽시간에 솟아난다.

슈슈슈슉-

이어서 쏘아지는 암석 조각들.

그런데 놈은 암석 조각들을 받아치기는커녕.

팟-

재빨리 자리를 벗어나, 도망치는 게 아닌가.

“뭣이?!”

잠깐 놈이 도망치는 방향을 응시한 드레스가 대경실색하며 소리쳤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놈이 본대 쪽으로 가고 있다! 인원을 보내! 기필코 놈보다 먼저 가서 알려야 한다!”

지금 놈이 도망치는 곳은, 아티팩트를 탐사하러 간 석인들의 본대가 있는 방향이었으니까.

* * *

뒤에서 석인들의 대장이 길길이 날뛰는 소리가 들려왔으나, 강현은 무시했다.

[스킬, 천광의 날개[Lv.2]를 발동합니다.]

[스킬, 질주[Lv.5]를 발동합니다.]

순백의 날개를 활짝 펼쳐, 궁전의 중앙으로 빠르게 나아간다.

-호오, 어쩌다 본대 쪽으로 방향을 틀겠다는 생각을 한 거지?

“그냥…… 딱 떠오르던데요. 어차피 놈들의 본대가 아티팩트를 얻으면 끝이지 않습니까.”

지금 나눈 대화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즉흥적으로 이런 결정을 내린 것이었다.

석인들의 별동대와 어울릴 게 아니라, 먼저 간 본대를 노리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그래서 돌덩이들이 연락구를 꺼내길 기다렸다가 칼같이 끊은 건가……. 괜찮은 계획인 것 같군. 거만한 놈한테는 말 안 해도 되겠나?

“말하려고 했는데 워낙 바빠 보여서요.”

알렉시스나 세르반테에게 말은 하려고 했지만, 그들은 이미 치열한 전투의 중심에 있는 상태였다.

별동대라고는 해도 석인들은 열 명이 넘었기에, 쉽게 전투가 끝날 기미도 보이지 않았고.

해서 차라리 단독으로라도 작전에 나서는 게 낫다고 판단을 내린 그였다.

“그래도 바닥에 글자를 새겨두었으니 제 행적을 파악할 수는 있을 겁니다.”

슈우우우-

궁전에 진입하자,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드넓은 대리석들이 눈에 들어온다.

군데군데 파괴된 바닥이나 화살, 비늘들 따위가 있는 걸로 봐서는 석인들의 본대가 함정을 돌파한 흔적인 듯했다.

-앞서간 돌덩이들이 길을 다 뚫어준 모양이군. 잘만 하면 그 천사의 아티팩트를 가로채는 것도…… 잠깐. 설마, 네놈?

강현은 빙긋 미소를 지었다.

엔딜 펠란이 깨달은 것처럼, 그가 궁전 중앙으로 이동하는 이유는 단지 석인들의 본대를 막기 위함만이 아니었다.

혼란스러운 전장을 살피다 보니, 문득 이 같은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적흑의 천사가 사용했을 최상급 아티팩트들.

그것들을 석인들에게 넘겨줄 바에야, 자신이 가지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엔딜 펠란은 어처구니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어이가 없군. 돌덩이들의 별동대만 해도 열 명이 넘었다. 하물며 놈들의 본대면 그 수가 훨씬 많을 텐데, 어떻게 아티팩트를 가로채겠다는 거지? 팔다리 한 짝을 내놓을 각오를 하지 않는 이상 거의 불가능…….

“무조건 뺏겠다는 건 아닙니다. 저라고 본대가 더 많다는 걸 모를 리가 없잖습니까.”

강현은 엔딜 펠란의 말을 정정했다.

-그러면?

“일단은 놈들이 아티팩트를 얻는 걸 최대한 저지하다가 기회가 오면 행동에 나서겠다는 거죠. 또 다 빼앗을 마음도 없습니다. 한두 개면 족해요.”

그저 상황을 엿보다가, 혹은 석인들을 저지하는 과정에서 기회가 생기면 움직이는 것.

그게 강현이 세운 계획이었다.

-흥, 웃기는 소리를 하고 있군. 아티팩트가 몇 개나 있을 줄도 모를 뿐더러, 그 말이 그 말 아니냐.

물론, 엔딜 펠란은 코웃음을 칠 따름이었지만 말이다.

-문제는 그뿐만이 아니다.

“예?”

-네놈이 만약 어쩌다 아티팩트 한두 개를 얻었다고 치자. 그걸 그 거만한 놈이 보게 된다면 어떡할 거지?

확실히, 알렉시스가 보게 된다면 괜한 오해를 할 수도 있을 터였다.

처음부터 이걸 노리고 제안을 수락했다는 의심을 받게 될 수도 있겠지.

“……그럴 일 없도록 해야죠. 뭐, 설명하면 이해해 주지 않겠습니까.”

-이해를 해주는 대신 아티팩트들을 내놓으라고 하면?

“알렉시스가 딱히 내놓으라고 할 것 같지는 않은데요.”

지금까지 파악한 알렉시스의 성격이라면, 아티팩트 한두 개를 강현이 가지게 돼도 쿨하게 내어줄 가능성이 커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알렉시스는 자신의 출신에 대한 자부심과 긍지를 느끼고 있고, 거기서 비롯된 품위 또한 상당하다.

그런 알렉시스이니만큼, 설령 강현의 손에 몇몇 아티팩트들이 들어간다고 해도 다짜고짜 무력을 행사하지는 않을 것이었다.

강현이 욕심을 부려 모든 아티팩트를 취하려 하는 게 아니라면, 끽해야 욕이나 한 번 하고 말겠지.

-꼭 그 거만한 놈이 아니라 녀석의 윗선에서 지시를 내릴 수도 있는 일이다.

“그건…… 나중에 생각하기로 하죠.”

엔딜 펠란이 다시 냉소했으나, 강현은 대화를 정리했다.

변수가 무궁무진하게 일어날 수 있는 환경이라고는 해도,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미리 걱정할 필요는 없었기 때문이다.

‘아티팩트고 뭐고, 일단 석인들의 본대나 찾게 되면 좋겠군.’

그는 속력을 더욱 올려 궁전 깊숙한 곳으로 나아갔다.

그 속도가 어찌나 빨랐는지, 혹여 석인들의 별동대장이 추격 인원을 보냈다고 해도 상관없을 듯했다.

그들이 강현을 따라잡는 것보다 강현이 석인들의 본대를 찾아내는 게 훨씬 빠를 터였기에.

슈와아아아-

더욱 깊은 곳으로 들어감에 따라, 강현의 눈이 이채를 띤다.

“저건…….”

석인들의 돌파에 의해 바닥에 흩뿌려진 함정들의 수준이 달라진 것이다.

화살과 바늘 따위의 일차적인 예기들이 자취를 감추고, 석인들의 잔해로 보이는 갈색의 암석들과 조각상이었을 거로 보이는 파편 수백 개가 눈에 들어왔다.

‘갈색 암석은 석인들이겠고…… 저 조각상들은 뭐지?’

파편들은 모두 새하얀 대리석으로 되어 있었는데, 갑옷과 창의 파편들이 상당수 섞인 걸로 보아 온전한 형상을 이루고 있었더라면 거친 전사의 조각상이었으리라는 걸 짐작케 했다.

-이곳의 지배자가 거느렸던 [권속]들이나 사역마들이겠군. 에테르에서 생기가 느껴지는 걸 보니 파괴된 지 그리 오래되지 않은 듯하다.

“에테르의 생기? 그건 또 뭡니까?”

-한 번 저 파편들을 향해 기감을 확대해 봐라.

강현은 기감을 확장해 보았다.

슈우우-

파편들에게서 미세하게 새어나오는 에테르의 아지랑이가 느껴진다.

-그 아지랑이를 에테르의 생기라고 한다. 에테르가 담겨 있던 물체나 아티팩트가 파괴되면 잠시 흘러나오지. 놈들의 본대가 지나간 지 얼마 안 됐다는 뜻이다.

“근데 통로가 이렇게 넓은데 왜 싸웠을까요? 조각상들을 넉넉히 피해갈 수 있었을 텐데.”

강현이 통로의 폭을 살피며 물었다.

아무리 조각상들이 수십 개나 됐다고는 해도, 일자로 이어지는 이 통로의 폭은 자그마치 수십 미터에 달했다.

석인들의 본대가 마음만 먹었으면 충분히 조각상들을 피해가며 이동할 수 있었을 텐데, 굳이 충돌한 이유를 알 수 없었던 것이다.

-아니, 길이 이렇게나 편한 건 네놈이 늦게 와서다. 촘촘히 이곳에 깔려 있었을 결계들의 흔적이 느껴지는군.

“예? 결계요?”

뻥 뚫린 고속도로나 다름없는 이 통로에 결계가 있었다니?

그로서는 전혀 생각지도 못한 말이었지만, 엔딜 펠란은 차갑게 대꾸할 뿐이었다.

-그래, 이곳의 지배자가 멍청이도 아니고, 길을 이딴 식으로 만들어서 침입자들이 자신의 아티팩트까지 한 번에 올 수 있도록 했을 리가 있겠느냐?

“…….”

-이미 돌덩이들이 다 뚫어놓은 길로 편하게 오는 네놈은 모르겠다만, 처음 이곳에 진입한 돌덩이들은 공간을 왜곡한, 미로와 같은 공간을 마주해야만 했을 거다. 그것들을 개척하느라 진땀을 냈을 테고.

“그런 거였다니…….”

강현은 눈을 깜빡였다.

그의 말에 따르면, 자신은 무혈입성을 하고 있는 셈이었다.

-네놈이 워낙 빠르게 전진하고 있는 만큼 곧 돌덩이들의 본대와 마주칠 거라 여겨진다. 조심해도…….

“……잠깐만요.”

슈우우…….

엔딜 펠란의 말을 끊은 강현이 속도를 급격히 줄였다.

그러고는 기감을 최대한 끌어올렸다.

엔딜 펠란과 대화를 나누는 도중, 전방에서 뭔가를 느껴서였다.

스아아-

이내 확장된 시각이 1㎞ 정도 앞에 모여 있는 스무 명 가량의 석인들을 포착함과 더불어, 예민해진 청각이 쑥덕이는 그들의 말소리를 감지해 낸다.

-이것만 넘으면 적흑의 천사의 아티팩트를 얻을 수 있…….

-지체하지 말고 어서 뚫어야…….

희미하게 들려오는 대화에 강현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드디어 석인들의 본대를 따라잡은 것이다.

그러나 기뻐하는 것도 잠시, 강현의 눈빛이 침착해진다.

지금은 단순히 좋아하기보다 냉정하게 적들의 상황을 파악할 때였다.

‘먼저 무력부터.’

조심스레 오른쪽 통로의 끝으로 달라붙은 강현은 놈들의 무력을 살폈다.

고오오-

하나같이 가공할, 그러니까 자신과 크게 차이나지 않는 기세들을 지니고 있었다.

별동대보다 단계 한두 개씩은 더 차이난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였다.

다만.

‘왜 가만히 있는 거지?’

전진하지 않고 정지해 있는 놈들을 본 강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가 보기에는 앞에 아무것도 없어보였는데도 불구하고, 보이지 않는 벽이 있기라도 한 듯 서성거리고만 있었다.

슈와아-

의아한 기색을 보이던 강현은 더욱 기감을 끌어올려 전방을 샅샅이 살핀 끝에.

“아.”

그제야 알 수 있었다.

후우웅-

석인들의 본대를 가로막고 있는, 흰색의 반투명한 막을.

워낙 투명한 데다가 석인들이 가리고 있기까지 해서 처음에는 보이지 않았지만, 자세히 살피자 수십 미터 통로를 가득 메운 벽이 보였다.

이어서 벽 너머를 본 강현이 눈을 번뜩였다.

“……!”

반투명한 벽 너머로는 신성함이 느껴지는 제단이 위치해 있었는데, 그 위에 붉은 투구와 망토가 있었던 것이다.

그 색깔로 미루어보아, 적흑의 천사가 사용했다는 최상급 아티팩트들이 틀림없었다.

-저 벽이 마지막으로 남은 결계인 듯하군.

‘공간을 왜곡하거나 하지는 않는 듯한데, 저런 것들도 결계라고 부릅니까?’

-그냥 침입자들을 막기 위해 설치해 놓은 것들은 몽땅 다 결계라고 생각해라.

그리고 석인들의 손이 분주히 움직이는 걸로 봐서는, 무언가를 하려는 기색이었다.

필시 자신들의 앞을 막는 저 벽을 부수기 위해서겠지.

-……를 준비해라! 한 번에 뚫는다!

쿠구구구-

석인들이 수결을 끝맺자, 바닥에서 바위 조각들이 솟아오르더니 용의 형상을 빠르게 갖추어나간다.

‘어떻게 할지 빨리 결정을 해야겠군.’

강현은 시간이 얼마 없다는 걸 직감했다.

석인들의 용이 결계를 깬다면, 그대로 아티팩트들을 놈들에게 넘겨줘야만 하는 것이다.

즉, 한시가 급한 상황이었다.

“……어쩔 수 없나.”

강현이 얼굴을 굳혔다.

“후우.”

그는 숨을 크게 내쉬며 호흡을 가다듬었고.

쩌저저적-

이윽고 굉음을 터뜨리며 흰색 벽과 충돌한 토룡이 벽을 거의 깨나가던 순간.

[스킬, 광검[Lv.9]을 발동합니다.]

[스킬, 섬멸의 광창[Lv.1]을 발동합니다.]

[1/4의 마력을 소모합니다.]

[스킬, 빛의 인도[Lv.1]를 발동합니다.]

[1/5의 마력을 소모해, 섬멸의 광창[Lv.1]을 강화합니다.]

기습적으로 스킬들을 발동하며 앞으로 튀어 나갔다.

일이 어떻게 될지는 몰라도, 일단은 방해하고 봐야 했다.

…….

지나치게 석인들에게 신경을 곤두세워서일까.

강현은 미처 알지 못했다.

[…….]

아득히 높은 궁전 중심부의 천장.

그 부근에서, 자신을 빤히 내려다보고 있는 존재가 있다는 것을.

아기를 보는 듯한 작달막한 몸집과, 앙증맞은 한 쌍의 흰 날개를 가진 아기 천사였다.

그리고 천사의 반짝이는 눈은, 순백의 검을 휘두르는 강현에게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 * *

그 시각, 궁전의 초입.

“크, 이놈들…….”

별동대를 이끌던 책임자, 드레스의 머리가 툭 떨어진다.

“……끝났나.”

드레스를 끝으로 모든 석인들을 쓰러뜨린 알렉시스는 손을 거두어들였다.

그런 와중, 르웬이 허리를 정중하게 숙여온다.

“이걸로 석인들의 별동대를 모두 정리했습니다.”

“우리 측의 피해는?”

“두 명 전사, 두 명 중상에 경상 다수입니다.”

“네 명 이탈이라…….”

씁쓸하게 중얼거리던 알렉시스의 눈에 호탕하게 웃어 보이는 세르반테가 들어온다.

이번 전투에서 그가 날뛰어주지 않았더라면, 더 큰 피해가 발생했겠지.

“지친 인원들이 대부분이라, 잠깐 쉬었다 가시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리고?”

르웬이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을 꺼낸다.

“아무래도, 도련님의 동료가 아티팩트를 노리고 배신을 한 듯합니다.”

“…….”

“모습을 어찌나 감쪽같이 숨겼는지, 언제 사라졌는지도 미처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그도 찾을 겸 잠시 이곳에 머물다가 가시는 게…….”

“마음 같아서는 그러고 싶지만, 최대한 빨리 가야 한다. 또…….”

르웬의 말을 끊은 알렉시스가 짤막하게 덧붙였다.

“녀석은 배신 따위를 한 게 아니다.”

그는 이강현이 배신한 게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그가 르웬에게 빨리 출발해야 한다고 말했던 것부터가.

-난 중심부로 먼저 간다.

이강현이 바닥에 삐뚤빼뚤하게 새긴 걸로 추정되는, 저 짤막한 글귀를 보고 한 말이었으니까.

“아…….”

“몸상태가 좋지 않은 이들은 나중에 오라고 해라. 그럼, 먼저 가고 있도록 하지.”

알렉시스는 몸을 돌려 궁전의 중심부로 발걸음을 내디뎠다.

쿠르르릉-

그의 목적지인 궁전의 중심부에서부터, 이강현이 내는 게 분명한 크고 작은 굉음들이 터져나오고 있었다.

콰콰콰쾅!

거대한 순백의 창이 날아와 폭발을 일으킨 직후.

새하얀 검, 칠흑의 갑주를 두른 적이 빠르게 거리를 좁혀온다.

“저놈은 무슨…….”

제8 석계의 지배자인 ‘암석의 거인’의 여덟 수족 중 하나, 우레스는 눈살을 찌푸렸다.

‘적흑의 천사’의 아티팩트를 취하기까지 고작 벽 하나를 남겨두고 있었는데, 난데없이 방해꾼이 튀어나오다니.

“어쩐지 일이 잘되어간다고 생각했더니만…….”

이번 ‘청소’의 총책임자인 그로서는 탐탁지 않은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어디 종족이지? 못 보던 색깔의 검기인데.’

우레스는 출신을 알 수 없는 방해꾼을 향해 기감을 끌어올렸다.

스아아-

감각이 예민해지며, 방해꾼의 무력이 파악된다.

우레스의 기감은 방해꾼이 자신보다는 약하고, 수하들과는 비슷한 수준이라는 것을 말해왔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순간.

“죽여라. 나는 이 결계를 뚫고 있을 테니.”

짧게 명령을 하달한 우레스는 그대로 몸을 돌려버렸다.

자신보다 약한 건 둘째치고, 수하들과 비슷한 수준이라면 그가 직접 나설 이유는 전무했다.

“옛!”

이어서 십수 명의 수하들이 달려나감에 따라, 우레스도 신경을 돌렸다.

고오오-

다시금 결계를 마주한 우레스는 에테르를 끌어 올렸다.

이제는 결계를 깨는 데에 집중해야 했다.

그가 수결을 맺으려 할 때였다.

“커헉!”

“큽!”

뒤에서 전해져 오는 소리가 이상했다.

소리가 들려오는 것 자체가 이상한 건 아니었다.

방해꾼과 비슷한 수준의 수하들 열 명을 보낸 만큼, 금세 승부가 나는 게 정상이었으니까.

다만 그를 의아하게 만든 건 그 소리들이 어딘가 낯익다는 점이었다.

“음?”

우레스는 의아한 기색으로 뒤를 돌아보았고, 볼 수 있었다.

서걱-

푹-

닥치는 대로 수하들을 베어버리고 있는, 빌어먹을 방해꾼을.

어찌나 방해꾼이 잘 싸우는지, 벌써 열 명 중 절반 가까이 되는 수하들이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그게 의미하는 바는 하나였다.

자신이 파악한 방해꾼의 수준이 잘못됐다는 것.

“이런…….”

그 사실에 우레스가 당혹스러워한 건 지극히 당연했다.

그때, 저 뒤에서 두어 명의 석인이 다가오는 게 느껴진다.

죽으라 달려오고 있는 걸로 봐서는, 별동대에서 보낸 전령으로 보였다.

“우, 우레스 님! 신계 놈들이 나타났습니다! 또 황금향의 아티팩트를 가로챘을 거라 추정되는 놈이 이쪽으로 날아가…… 헉?!”

그에게 헐떡이며 보고하던 전령들이 눈앞의 참상을 보고는 숨을 들이켠다.

“이, 이게 대체…….”

“벌써 놈이 도착했다고?”

그리고 그들의 말이 끝나기도 전.

슈와아아아-

그들의 존재를 알아차린 방해꾼의 검에서부터, 거대한 순백의 검기가 뿜어진다.

“으, 으아아악!”

자신들을 노리고 짓쳐 드는 백색 검기를 본 전령들이 기겁했다.

피할 수 있는 속도도 아닐뿐더러, 저걸 맞는다면 죽을 게 뻔했으므로.

그냥 죽는 것도 아니고, 온몸이 산산이 부서져 죽을 터였다.

다행스럽게도 전령들의 몸이 부서지는 일은 없었다.

쿠르르릉-

백색 검기가 전령들에게 당도하기 전, 그 사이를 거대한 석벽이 가로막았으니까.

콰쾅!

삽시간에 주변을 자욱한 먼지가 뒤덮는다.

하지만 석벽을 불러내어 검기를 막은 장본인, 우레스의 시선은 방해꾼에게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스아아-

에테르를 끌어 올려 먼지구름을 저 멀리 날려버린 우레스가 한 발짝 앞으로 나섰다.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조금 전과 달리, 얼굴을 딱딱하게 굳힌 채였다.

“정체가 뭔지는 모르겠다만……. 몸 성히 빠져나갈 거라는 생각은 버리는 게 좋을 거다.”

쿠오오오-

우레스에게서 뿜어지는 기세에, 방해꾼도 자세를 바로한다.

“…….”

잠시 이어지는 정적.

우레스는 방해꾼에게서 눈을 떼지 않으며 주변을 훑었다.

놈에게 처참하게 당한 다섯의 석인들과, 지친 기색이 역력한 나머지 수하들이 눈에 들어온다.

그쯤되자 우레스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저놈은 예상보다 강하다. 그것도 훨씬.’

자신이 방해꾼의 수준을 잘못 파악했다는 것을.

수하들에게만 맡겨둘 게 아니라, 처음부터 자신까지 나섰어야 했다.

‘신계 놈들까지 온다면 곤란해진다.’

우레스는 궁전 초입에 남겨두었던 별동대가 이미 당했다고 가정했다.

거기에 설상가상으로 자신이 이끄는 본대마저 저 방해꾼에게 적지 않은 피해를 입은 상황.

간이나 보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남은 수는 열다섯. 최대한 빠르게 놈을 처치하고 아티팩트를 취한다.’

우레스는 재빨리 판단을 내렸고.

쾅!

기습적으로 튀어 나가면서 지시를 내렸다.

“라루크와 아레타는 결계를 해제하는 데에 집중하고, 나머지는 놈을 협공해라! 마지막으로 아른, 너는 [권역]에 지원을 요청하도록! 신계와의 전면전을 대비한다!”

“알겠습니다!”

“넷!”

우레스의 지시를 따라 두 명의 석인들은 결계로, 나머지 석인들은 사방에서 방해꾼에게, 남은 한 명의 석인은 연락구를 꺼낸다.

우레스 또한 방해꾼에게 달려들려다가…… 멈칫했다.

끼익-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를 방해꾼에게서 느꼈기 때문이다.

왠지는 모르겠지만, 저놈을 지켜봐야할 것만 같았다.

이건 수십 년 동안 <초월계>에서 버티면서 자연히 생겨난, 경험에 의해 생겨난 직감이라고 해도 무방했다.

해서 그는 후방으로 물러나 방해꾼을 주시했고.

이내, 자신의 예상이 들어맞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팟-

방해꾼이 눈매를 좁히더니, 자신에게 달려드는 수하들이 아닌 연락구를 꺼내고 있는 구석의 수하에게 검기를 방출한 것이다.

쐐애액-

전장의 구석을 향해 거대한 백색 검기가 쏘아진다.

그걸 두고만 볼 우레스가 아니었다.

쿠르르르릉-

순식간에 소환된 석벽이 다시 한번 검기를 틀어막는다.

“이 틈에 빨리 지원을 요청해라!”

“아, 알겠습니다!”

수하가 허둥지둥 연락구에 빛을 불어넣는다.

“여, 여기는 ‘적흑의 천사’의 [권역]입니다! 일이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현 위치는-”

[권역]으로의 지원 요청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지는 걸 본 우레스가 방해꾼을 향해 씩 웃어 보였다.

그 순간이었다.

자신의 목전까지 치달은 석인들에도 불구하고, 결계를 해제하는 인원들을 보던 방해꾼이 검지손가락을 내밀더니.

키이잉-

기습적으로 한 줄기 빛을 내쏘는 게 아닌가.

“이런!”

우레스가 뒤늦게 수결을 맺으려 했으나, 때는 이미 늦어 있었다.

“커헉!”

“크어어억!”

풀썩.

빛에 꿰뚫린 두 수하들이 결계를 해제하다 말고 쓰러진다.

“빌어먹을!”

우레스의 입에서 참지 못하고 욕지거리가 튀어나온다.

코앞에 석인들이 있는데도 설마 노리는 게 두 개나 있었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러나, 놀랄 일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수하들을 상대로 펼쳐지는 방해꾼의 무위는 그보다 더했다.

“사방에서 한 번에 덮쳐들어 간다!”

동시에 사방면에서 들어오는 수하들을 상대로도, 전혀 꿀리지 않았다.

쐐애애액- 쾅! 콰콰쾅!

달려드는 수하들을 고작 한두 합으로 밀어내는 것도 모자라.

“벽을 불러내!”

석벽을 소환하면 그 석벽을 두 동강 내버렸고.

“크윽! 석벽이 깨졌다!”

“골렘을 소환해라!”

거대한 골렘들을 단숨에 파괴했다.

“저럴 수가…….”

우레스의 입이 벌어졌다.

석벽은 둘째치더라도, 골렘은 저렇게 단숨에 파괴할 수 있는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보통 하나의 핵만을 가진 대부분의 골렘들과는 다르게, 그들이 연구한 골렘은 각 팔다리에 추가적인 핵을 가지고 있었다.

골렘을 상대할 적들이 쉽사리 골렘의 가동을 중지시킬 수 없게 하기 위함이었다.

한데 눈앞의 방해꾼은 그 연구 성과를 비웃기라도 하듯, 정확히 핵의 위치만을 공격하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건 쉴 새 없이 번뜩이고 있는 광명의 눈 덕분이었지만, 우레스가 그 사실을 알 리가 없었다.

“커헉!”

“크으윽!”

털썩.

눈 깜짝할 사이에 두 석인이 쓰러진다.

“어, 으…….”

방해꾼의 무력에 수하들이 더이상 다가가지 못하면서, 장내에 침묵이 감돌기 시작한다.

그 압도적인 무력을 보아서일까.

원래라면 수하들을 닦달했어야 할 드레스도 무어라 하지 못했다.

그저 불편할 정도의 침묵 속에서,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 뿐.

“네놈은…… 대체 뭐 하는 놈이냐.”

* * *

석인들의 대장이 물어왔음에도, 강현은 침묵을 고수했다.

그가 대답하지 않고 싶어서 무시한 건 딱히 아니다.

단지 입을 열었다가는.

‘죽겠네.’

그의 현재 상태가 들통날 게 뻔했기에 가만히 있는 것뿐.

무리하면서까지 마력 소모가 큰 스킬들을 난사한 탓에, 마력이 거의 바닥을 보이는 중이었던 것이다.

‘그나마 아르크트를 뒤집어쓴 덕에 안 보여서 망정이지…….’

얼굴을 가리고 있는 아르크트가 아니었더라면, 저 석인들에게 잔뜩 찌푸리고 있는 얼굴을 보여야 했으리라.

‘그래도 나쁘지 않아.’

그럼에도 성과는 있었기에, 강현은 그 마력이 아깝지 않았다.

석인들로 하여금, 그의 무력을 더 과대평가하게 만들 수 있었기에.

그가 멈춰 있는데도 놈들이 섣불리 다가오지 못하고 있는 게 그 증거였다.

‘지원을 못 끊은 게 아쉽긴 하다만…….’

그래도 지원이 오는 데도 시간이 걸릴 테니, 상황은 결코 나쁠 게 없었다.

“…….”

정적이 감도는 가운데.

-……어서 ……러야 한다!

-……일단 뛰어!

그가 지나온 방향에서부터, 소란스러운 소리들이 전해져 온다.

‘알렉시스가 거의 다 왔나 본데.’

빨리 이동하라는 지시가 들려오는 걸로 보아, 그 역시 시간이 생명이라는 걸 눈치챈 모양이었다.

이제 알렉시스 일행까지 온다면 더 난장판이 되겠지.

‘붙게 되면 넉넉히 이기고도 남는다.’

강현은 냉정하게 적들의 수준을 진단했다.

저 석인들의 대장은 강해 보였으나, 직접 상대해 본 다른 석인들은 거품이 있었던 것이다.

-거품이라기보다는 실전 경험이 모자란 걸 거다. 네놈만큼 생사의 기로를 왔다 갔다 한 놈들은 많지 않을 터이니.

‘그럴 수도 있겠네요.’

엔딜 펠란의 말에 대꾸하는데, 놈들의 대장이 미세하게 입을 달싹이는 게 보인다.

“나만 ……직이고 다른…… 들은…….”

뭐라고 하는지 정확히는 알 수 없었지만, 강현은 눈치껏 알아들었다.

턱-

한 발짝 앞으로 나선 대장을 제외한 석인들이, 모두 결계 쪽으로 슬그머니 이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래도 강현을 자신이 직접 막고, 수하들을 통해 결계를 열려는 것으로 보였다.

‘후우, 또 나서야겠군.’

이대로 놈들이 은근슬쩍 결계를 해제하게 둘 수는 없었다.

적어도 알렉시스 일행이 오기 전까지만이라도 시간을 끌어야 했다.

꽈악-

그는 다시 검을 움켜쥐고, 언제든 튀어 나갈 수 있도록 몸의 긴장을 유지했다.

그런데 그때였다.

스아아-

처음 느껴보는, 신성한 에테르가 온몸에 감돎과 더불어.

[가만히 있어도 돼.]

“……?”

자유분방한 어린 소녀의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저 너머에 있는 것들, 가짜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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