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성으로 차원최강 7권
목차
1장 본선 : 악신 제거(2)
2장 초월계
3장 청소
4장 천사의 권속
5장 본선 : 다차원 대난투(1)
1장 본선 : 악신 제거(2)
‘용’, 그러니까 드래곤의 목소리가 넓은 공동에 울려 퍼진다.
강현은 공동을 가득 채운 드래곤의 모습을 살펴보았다.
‘이건…….’
<초월자>를 만난 게 이번이 처음이 아니기는 했다.
차원과 차원 사이 ‘통로’를 헤매던 그를 납치했던 ‘태고의 거인’과 [email protected]차원의 노인을 만난 적이 있었으니까.
다만 그 정체가 확실하지 않은 ‘태고의 거인’, 그리고 만난 시점에서 이미 대부분의 ‘격’을 상실했었던 노인과는 달리.
비교적 그에게 친숙한 대상인데다가, <초월자>로서의 ‘격’을 온전히 지니고 있어서일까.
눈앞의 드래곤은 앞서 만났던 <초월자>들과 느낌이 전혀 달랐다.
‘아니…… 가만히 웅크리고만 있는데 뭐 이렇게 커?’
산.
드래곤을 마주한 강현이 처음 받은 느낌이었다.
높이는 30m에 달했고, 길이 또한 못해도 100m가 넘어 보였다.
비록 파충류를 보는 듯한 안면과 세로로 길쭉한 동공은 영락없는 도마뱀을 연상케 했지만.
거체 전체를 수놓은 영롱한 얼음빛의 비늘들은, 눈앞의 존재가 도마뱀과는 궤를 달리한다는 걸 알게 해주었다.
‘빙룡(氷龍)이라고 해야 되나.’
빙인이 아닌 웬 드래곤이 이 차원을 지배한다는 말에 그 경위가 내심 궁금했던 강현이었는데, 얼음(氷)이라는 연결고리가 있는 듯했다.
[혹여 에테르를 느끼지 못할까 봐 걱정했었는데…… 기우였군……. 내 이름은…… 이미 전해 들었겠지……. 아디스라고 부르면 된다…….]
빙룡, 아디스가 천천히 말을 이어나간다.
분명 파충류의 입에서 나오는 목소리였음에도 불구하고, 신기하게도 파충류의 목소리라기보다는 중후한 남성에 더 가까웠다.
다만 ‘태고의 거인’을 만났던 지난번처럼 느릿하게 말을 하는 걸 보아, 드래곤도 ‘격’의 조절을 하고 있는 거로 보였다.
그때였다.
[잠시, 그대를 보고 있는 이들의 시선을 차단하겠다…….]
“……?”
스아아아-
아디스의 거체에서 아득한 ‘격’이 흘러나와 공동 전체를 감싸 나간다.
무슨 말인가 싶어 잠시 고개를 갸웃한 강현은, 이내 눈을 부릅 떠야만 했다.
“……!”
그럴 수밖에 없었다.
전기가 지직거리는 듯한 소음이 연이어 들리더니.
팟-
-…….
-…….
-…….
이내, 일제히 채팅창이 끊겨버린 것이다.
놀란 강현이 빠르게 고개를 돌려 아디스를 응시했으나, 그는 대수롭지 않게 말을 이어나갈 뿐이었다.
[원래라면 그대가 나를 만나는 일은 없어야 정상이기도 하고…… 관찰당하는 건 사양이다……. 물론 내가 그대를 불렀다는 걸 훤히 드러낼 수는 없으니, 화면 너머 <초월자>들에게는 잠깐 환영 마법을 걸어두었다……. 그들의 눈에는 그대가 이 설산을 부지런히 돌아다니는 중으로 보일 것이니 참고하도록…….]
“그게…… 가능한 겁니까?”
[그들의 ‘격’은 나와 같은 <초월>의 경지에 이르렀으나, 그들은 화면을 통해 그대를 볼 수밖에 없지……. 게다가 이 차원 전체는 나의 [권역] 안에 속해 있으니, 그 화면들을 잠시 속이는 것 정도는 가능하다.]
차츰 ‘격’을 조절하는 것에 적응을 했는지, 느릿하던 아디스의 어투가 점차 정상화되어 간다.
하지만 강현은 거기에 신경 쓸 새도 없었다.
그는 지금, 아디스가 가진 힘에 순수한 경탄을 하는 중이었으니까.
‘채팅을 끊어버리다니…….’
아무리 화면, 즉 ‘카메라’들을 속인 거라고는 해도 말도 안 되는 힘이었다.
동시에, 아디스가 이런 행동을 하면서까지 그를 만나려는 이유가 궁금해졌다.
원래라면 만날 이유가 없었다는데도 불구하고 따로 불렀다니 더욱 그랬다.
[내가 그대를 만나고자 하는 건…….]
아디스가 말을 계속해 나간다.
강현은 그 커다란 입을 보며 머리를 굴렸다.
‘악신의 분신의 약점을 알려주려는 건가? 아니면 경고? 그것도 아니면…….’
순간적으로 여러 추측들이 떠올랐다가 사라져 갔으나, 아디스의 입에서 나온 말은 전혀 생각 외의 것이었다.
그 말은 강현을 다시 한번 놀라게 만들었다.
그도 그럴 게.
[그대가 사용하는 황금빛의 힘에 관심이 가서다. 어떻게 얻은 건지가 참으로 궁금하군.]
그가 사용하는 ‘황금빛의 힘’은 하나밖에 없었으니까.
[email protected]차원의 유산인 광명의 눈, 그것이 틀림없었다.
* * *
아디스의 말에 강현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광명의 눈을 쓰는 걸 눈치챘다고……?’
아무리 이곳이 <초월자>의 [권역]이라고 할지라도 그가 사용한 스킬까지 훤히 알 수 있을 줄이야.
일전에 엔딜 펠란이 했던 말이 절로 떠올랐다.
‘<초월자>들은 자기 [권역]에서는 신이나 다름없다더니…….’
조금의 과장도 없는 듯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아디스가 재차 말해온다.
[그대를 헤치거나 하려는 의도는 없다. 단지 그대가 사용하는 그 힘에서부터, 옛 친우의 흔적이 느껴지는 것 같아서 말이지…….]
“……!”
‘옛 친우’라는 말을 듣자 떠오르는 게 있었다.
‘[email protected]차원의 핵’을 건네주면서 노인이 해주었던 말이었다.
-앞으로도 뜻하게 않게 일이 잘 풀릴 때가 있을 수도 있다. 너에게 내 ‘격’이 깃들었기에, 몇몇 <초월자>들이 친숙함을 느낄 수도 있을 테니.
노인을 ‘옛 친우’라고 언급한 걸 보면, 아디스는 노인의 ‘격’에서부터 친숙함을 느끼고 그를 부른 걸까?
생각을 정리하며 강현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설마…… 그 노인을 아시는 겁니까?”
그리고 과연.
[그렇다. 상당히 오래전 연락이 끊기기는 했어도, 그는 분명히 내 친우였지.]
아디스는 그 거대한 머리를 까딱임으로써 그 의문을 긍정했다.
[그래서, 그 힘을 어떻게 얻게 되었는지 말해줄 건가?]
아디스의 노란 동공이 강현을 응시한다.
<초월자>가 빤히 내려다보고 있는 상황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선택은 한 가지였다.
강현은 순순히 [email protected]차원의 노인과 있었던 일들을 말해주었다.
물론 모든 걸 말하지는 않고, 그저 어쩌다 인연이 닿게 된 노인이 자신의 메시지가 담긴 ‘핵’을 건네주었다고만.
하나 아디스는 그걸로도 대강의 사정을 파악한 걸로 보였다.
[흠……. 그대가 받았다는 ‘핵’을 꺼내볼 수 있겠는가?]
스윽.
강현이 품에서 ‘핵’을 꺼내자, 아디스의 몸에서 부드러운 에테르가 뿜어져 ‘핵’을 감싸갔고.
에테르에 둘러싸인 ‘핵’이 두둥실 떠올라 아디스의 눈앞으로 이동한다.
‘핵’을 앞에 둔 아디스의 큼직한 눈이 번쩍였다.
키이이이잉-
눈앞에 떠오른 ‘핵’이 찬란한 황금빛을 내뿜기 시작했다.
광명의 눈을 습득했을 때 이상의 황금빛이 공동을 가득 뒤덮는 걸로 보아, 아무래도 노인이 전하려던 것들을 열어보는 듯했다.
[흠……. 역시…… 이렇게 된 거였나.]
아디스가 노인의 메시지를 빠르게 확인하는지, 찬란하던 황금빛이 서서히 사그라든다.
그런데 황금빛이 거의 자취를 감추었을 때였다.
[이쪽도 그 차원과 비슷한 상황에 처해 있어서 남 일 같지가 않군. 내가 전하려는 것도 넣도록 하지.]
“……?”
스으으으…….
그렇게 말한 아디스의 머리에서부터 푸른 에테르가 흘러나오더니 ‘핵’에 그대로 스며드는 게 아닌가.
찬란한 황금빛에 신비로운 푸른빛이 뒤섞이면서, 공동 내부가 또 한 번 환해진다.
빛이 진정되자 ‘핵’이 다시 강현의 품으로 날아온다.
[그대가 계속해서 강해진다면 이것 또한 언젠가는 볼 수 있을 터이니, 때가 되면 확인해 보도록.]
“…….”
[이걸로 내가 그대를 부른 용건은 끝났다. 이제 다시 빙인들에게 합류하면 될 것 같군.]
스아아아-
말을 마친 아디스로부터 강현을 공동의 출구로 유도하는 부드러운 에테르가 흘러나온다.
그 의미는, 명백한 축객령이겠지.
하지만 강현은 발을 움직이지 않았다.
묻고 싶은 게 있었기 때문이다.
[음? 할 말이라도 있는 건가?]
“왜…… 날뛰는 마인들을 가만히 두는 겁니까? 당신이 움직인다면 순식간에 이 재앙을 끝낼 수 있을 텐데.”
마인들에게 고통받는 빙인들을 바로 옆에서 지켜본 강현이었다.
그들이 힘겹게 싸워나가는 것도, 그 와중 들려오는 수호룡의 울음소리에 한 줄기 희망을 갖는 것도.
그걸 뻔히 알고 있을 텐데도, 왜 이 차원의 지배자라는 존재가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는지 그로서는 이해가 되질 않았다.
[확실히 그대의 말처럼 내가 나선다면 쉽사리 이 일을 끝낼 수 있겠지만…… 어쩔 수 없다. 그 악신의 분신과는 서로 직접 나서지 않기로 했으니까.]
“예?”
[서로 합의를 봤다는 말이다. 그놈도, 나도 선을 넘지 않는 걸로.]
“대체…… 왜 그런 겁니까?”
자신의 종족들이 죽어가고 있는데 합의를 봤다니.
강현이 충격받은 얼굴로 되물었으나, 아디스는 담담하게 말할 뿐이었다.
[그 노인과 비슷한 상황에 처해 있다고 하지 않았나. ‘황금향’을 침략해오는 @#$…… 아무튼, ‘무언가’를 상대로 노인이 맞서 싸웠다는 건 알고 있겠지? 나도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지금도 그 무언가와 싸우고 있는 겁니까?”
[그래, 지금 이 순간에도 내 신경 대부분은 외부의 차원방벽에 쏠려 있지. 끊임없이 침투를 시도하는 ‘무언가’를 막기 위해서다. 그리고 그 상황은 악신의 분신도 알고 있지.]
아디스가 말을 이어나갔다.
[악신의 분신이 소멸을 각오하고 날뛴다면 그 ‘무언가’를 막는 데에 지장이 생길 수 있기에 거래를 나눈 거다. 서로 직접적으로 나서지 않는다는 거래를. 놈이 루크 산맥에만 박혀 있는 게 바로 그 이유 때문이다.]
“…….”
[한쪽이 먼저 거래를 깨고 직접적으로 나서거나 일정 수준 이상의 힘을 쓰지 않는 이상, 다른 한쪽도 움직이지 못하지. 물론 거래이니만큼, 먼저 나선 쪽에 일종의 페널티는 있다만.]
“페널티……?”
[만일 내가 먼저 나선다면 놈은 본신에 가까운 힘을 얻게 되고, 놈이 먼저 나선다면 나 또한 그 ‘무언가’를 막아내면서 이 재앙에 개입할 수 있을 정도의 힘을 가지게 된다고 보면 된다.]
아디스가 말을 끝냄에 따라 공동 안을 정적이 메웠다.
‘왜 안 나서는지 의아하기는 했었는데…….’
설마 이런 사정이 있었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아무리 거래를 했다고는 해도…… 빙인들이 어떻게 되든 상관이 없는 겁니까? 아롤디스 왕국이 엉망이 되고 있는-”
[그들을 살리자고 이 차원을 멸망의 구렁텅이로 빠뜨릴 수는 없다. 이 차원만이라도 살리기 위해서는 피할 수 없는 선택이다. 그러니-]
아디스에게서 항거할 수 없는 ‘격’이 새어 나온다.
새어 나온 ‘격’은 강현을 공동의 출구로 인도했다.
[이 차원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든, 그대는 신경 끄고 갈 길을 가도록 해라. 어차피 그대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건 그 경연에서 끝까지 살아남는 게 아닌가? 그대의 할 일은 아직 갈 길이 머니, 거기에 신경을 썼으면 좋겠군. 머지않아 선택의 때가 올 터이니.]
“……?”
강현이 의구심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더는 이곳에 머무르는 걸 혀용하지 않겠다는 듯, 부드러운 힘이 그를 이동시킨다.
멀어지는 강현의 귓가에, 아디스의 담담한 중얼거림이 꽂혔다.
[……그리고 상관이 없었다면, 그대에게 이런 말들을 하지도 않았겠지.]
* * *
아디스는 이강현이 사라진 곳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처음에는 옛 친우의 흔적을 느껴 부른 것이었는데, 몇 번의 문답을 나누다 보니 쓸데없는 말까지 해버렸다.
[이강현…….]
그가 오랜 친우의 유지를 이었다는 건 예상하지 못했으나, 역시 최근 <초월계>에서 관심을 가질 만한 인간이었다.
그가 자신이 ‘의도한 것’을 해줄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이걸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다.
아디스는 차원 방벽을 향해 거의 모든 의식을 전환했다.
쿠구구구구-
미친 듯이 차원 방벽을 헤집으려는 짙은 고동색의 물질에 싸워나갔다.
수천 년 전 <초월>에 이른 그로서도 감당하기 힘든 파괴적인 ‘격’이 전해져 온다.
막대한 드래곤의 의식에도 손상이 갈 만큼의 ‘격’이었다.
여기서 만일 전력을 다한다면 의식의 손상을 다소 피할 수 있었겠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미세하게나마 약간의 의식을 따로 빼두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의식의 손상을 피하는 것보다는, 남겨둔 의식에서 들려오는 한 소녀의 목소리가 더 중요했으니까.
-어맛, 시즈! 여기서 뭐 하는 거니!
설령 전력을 다하지 않음으로써, 그의 의식이 조금씩 깎여나가고 있다고 할지라도.
-냐옹.
남겨둔 의식에서 한 마리의 검은 고양이가 된 그는 잠시 몸을 움직여주었고.
다시 의식을 전환하여, 파멸적인 ‘격’에 맞서 싸워나갔다.
쿠콰콰콰-
제115 군소차원의 부근에서, 천지를 뒤흔드는 굉음이 퍼져 나갔다.
아디스의 공동, 아니, 레어를 빠져나와 다시 마인들의 거점 라우스로 이동하는 길.
뒤늦게 광명의 눈을 얻으면서 펼쳐졌던 [email protected]차원의 풍경을 전해 들은 엔딜 펠란이 중얼거린다.
-그 광명의 눈이라는 걸 습득하면서 또 보였단 말이지……. 이제 한 번만 더 그런 게 보인다면 유의미한 정보를 취합할 수 있겠군.
‘저랑 비슷한 생각을 하셨네요.’
-흥, 네놈이 한 생각을 이 몸이 못했을 리가. 오히려 이 몸과 비슷한 걸 떠올린 네놈을 칭찬해 주고 싶구나.
엔딜 펠란이 거만하게 내뱉었다.
당연하게도, 강현은 엔딜 펠란의 자랑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중이었다.
아디스를 만난 이후 솟아난 여러 의문들이 머릿속을 헤집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방장님 도중에 갑자기 산 돌아다닌 건 왜 그런 거죠?
-이건 ㄹㅇ 설명 필요함. 미친놈인 줄 알았음
-ㅋㅋㅋㅋㅋ길 잘 가다가 갑자기 방향을 왜 트냐곸ㅋㅋ
…….
공동을 나서고 얼마 지나지 않아 원래대로 돌아온 채팅창이 보인다.
아디스의 말처럼, 시청자들은 그가 느닷없이 설산을 쏘다닌 걸로 아는 듯했다.
즉 화면을 조작한 것이라고는 해도, <초월자>들을 속이는 데에 성공한 것이다.
“아…… 그냥 그러고 싶더라고요. 여유도 좀 찾고.”
물론 그 뒷감당은 오롯이 강현 자신의 몫이었지만 말이다.
-ㅋㅋㅋㅋㅋ미션에서 여유래ㅋㅋㅋ
-이미 님 경쟁자들은 앞서갔음 ㅅㄱ
-ㅋㅋㅋ이거 또라이네
그나마 시청자들이 그의 행동을 뜬금없는 기행 정도로 여기는 것 같아 다행이었다.
서벅-
눈을 헤치며, 강현은 곰곰이 아디스와의 대담을 되짚어보았다.
뜬금없는 만남이었어서 그런지 아직까지도 다소 실감이 안 나긴 했지만.
그가 조금 전 이 차원의 수호룡인 아디스와 만나 문답을 주고받은 건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가 자신에게 전하고자 하려는 것‘들’이 있다는 것도.
‘그가 저한테 뭘 말하려고 했던 걸까요?’
-글세……. 아마 이 차원을 침략하고 있다는 ‘무언가’에 대한 말들이 아니겠나? 네놈이 계속해서 강해진다면 언젠가 확인할 수 있겠지.
‘그건 당연히 그렇겠지만…… 그것 말고도요.’
-음? 무슨 말이지?
강현은 머릿속을 채우던 의문들을 일부 풀어냈다.
‘악신의 분신과 나눴다는 거래 내용을 지나치게 자세하게 설명해 줬다는 느낌을 받지 않으셨습니까? 그냥 나서지 못하는 이유가 있다고만 말했어도 될 텐데요. 또 머지않아 ‘선택의 때’가 온다고 말한 것도 그렇고요.’
-흠……. 듣고 보니 그렇군. 확실히, 참가자에 불과한 네놈에게 악신의 분신과 나눈 상세한 거래까지는 말할 필요가 없었지. 그런데도 굳이 그걸 말했다는 건…….
‘저한테 뭔가 원하는 게 있다는 겁니까?’
-어디까지나 추측이지만, 이 몸의 짐작으로는 그렇다. 그리고 ‘선택’이라는 말은…… 이 미션이 시작하기 직전 이미 들은 듯하다만.
‘예? 그걸 언제…… 아!’
강현이 눈을 크게 떴다.
엔딜 펠란이 뭘 말하는 건지를 깨달은 것이다.
그는 즉각 이번 미션의 설명지를 불러냈고, 이내 원하는 부분을 찾아낼 수 있었다.
…….
차원의 존망이 걸린 위기에서 과연 어떤 선택을 내려야 하는지, 그리고 그 선택에 따른 책임을 지는 방법을 알아갈 것입니다.
…….
-비단 이 설명지에서만이 아니다. 그 가면 쓴 놈도 말했었지.
엔딜 펠란의 말대로였다.
미션 설명과 더불어, 소환이 시작되기 직전 엘도 이런 말을 했었다.
-이번 미션에 많은 시청자분들이 주목을 하고 있으니, 내리는 모든 선택에 후회 없으시길 바라겠습니다.
미션 설명과 마찬가지로, ‘선택’을 잘하라고.
그것들이 아디스가 말했던 ‘선택’과 겹치는 건, 단순한 우연일까?
절대 그럴 리가 없었다.
‘선택이라…….’
강현은 입안에서 ‘선택’이라는 단어를 굴려보았다.
정보가 너무 제한적이었기에 그게 무슨 말인지는 아직 알 길이 없었지만.
강현은 직감했다.
그들이 말한 ‘선택’은, 필시 이번 미션의 중요한 분기점이 될 거라는 걸.
그때가 된다면 비로소.
[현재 진행률 : 25%]
현재까지 25%에 머무르고 있는 진행률이 대폭 상승하게 될 터였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걸어 나가자, 어느새 코앞까지 가까워진 라우스가 보인다.
도저히 몇 년 전까지 빙인들이 살았다고는 여겨지지 않는, 잿빛의 삭막한 소도시.
‘저 안에 마인들이 잔뜩 있다 이거지.’
강현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긴가민가한 것들이 많은 지금, 그것들을 알려면 먼저 눈앞의 라우스를 되찾아야 했다.
거점들을 부수고, 악신의 분신을 조여간다면 알 수밖에 없을 터였으니까.
‘마음 같아서는 광야참이라도 크게 한 방 날려주고 싶다만…….’
아직은 그럴 때가 아니었다.
그가 이곳까지 온 이유는, 점검을 하기 위해서였으므로.
그가 짜놓았던 ‘전략’을 실행할 수 있을지에 대한 점검.
‘먼저 확인부터.’
강현은 기감을 끌어올려 근처에 마인들이 있는지 먼저 확인했다.
슈와아아-
무형의 ‘격’이 퍼져 나가며 근방에 아무도 없다는 걸 알게 해주었다.
스윽-
그 후, 강현은 날이 어둑해질 때까지 라우스를 한 바퀴 돌며 외곽 전체와 지형, 바람의 방향을 꼼꼼하게 살펴보았고.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되겠네.’
라우스는, 그가 세운 ‘전략’을 실행하기에 더없이 적합한 곳이라고.
그걸 깨달은 이상, 더 이상 이곳에 남아있을 이유는 없었다.
“……슬슬 돌아가 볼까.”
생각을 마친 그는 발걸음을 돌렸다.
이제는 숙영지로 돌아가, 본격적인 계획을 세울 때였다.
* * *
숙영지가 가까워지는데, 저 멀리 정찰대원들이 모두 둥글게 앉아 대기하고 있는 게 보인다.
빙인들의 특성상 불을 피울 수도 없었기에 뭔가 처량해 보이기까지 했다.
‘왜 다들 안 쉬고 있는 거지?’
고개를 갸웃한 강현이었으나, 잠시 후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요, 용사님!”
강현이 오는 걸 보자마자 라우가 벌떡 일어난 것이다.
황급히 일어나는 모양새가, 자신을 기다린 듯했다.
“늦게까지 오지를 않으셔서 혹시 일이 생긴 건 아닐까 하고 걱정했습니다……! 만일 해가 완전히 질 때까지 소식이 없으면 대원들을 투입시키려 했는데, 돌아오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아. 이렇게 늦을 줄 알았으면 언질이라도 해드릴 걸 그랬습니다.”
“아, 아닙니다! 돌아오신 걸로 충분합니다!”
라우가 손사래를 치며 급히 외친다.
그런 그에게 강현은 빙긋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마침 말씀드릴 게 있었는데 잘됐네요. 쉬는 걸 방해하지 않아도 되니.”
“하실 말씀이라면……?”
“내일의 계획에 대해서입니다.”
“……!”
그 말에 라우를 비롯한 정찰대원들이 긴장하는 게 느껴진다.
강현은 정찰대원들을 주욱 훑어보았다.
오늘 있었던 마인들과의 전투의 여파인지 몸은 더없이 피곤해 보였지만, 눈빛만은 강렬하게 빛내고 있었다.
‘내 전략을 수행할 수 있을지 약간 걱정되기는 했었지만…….’
괜한 기우인 걸로 보였다.
자신을 따라 이 험지까지 따라와 준 이들이라면, 그의 전략도 능히 성공시킬 수 있으리라.
강현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거점 가까이 다가가 관찰을 하고 왔는데, 나무로 되어 있는 방책이 있는 것 말고는 제대로 된 방비가 안 되어 있더군요. 날씨도 바람이 쌩쌩 잘 불고.”
“그렇습니다. 대부분의 마인이 지능이 낮아 놈들의 ‘거점’이라고 해도 제대로 된 경계 인원이 편성되어 있지 않습니다. 놈들도 저희가 바로 근처까지 왔다는 걸 알긴 할 테지만, 아마 저희가 침입하고 나서야 대처할 겁니다. 또 날씨는…… 허, 헉……! 서, 설마 바람을 말하시는 이유가……?”
강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비록 답사를 거치기는 했어도, 그의 전략의 골조 자체는 간단하기 그지없었다.
빙인들에게 분명 약점이나, 동시에 마인들에게도 치명적인 약점인 ‘불’을 이용하여.
“저는 내일 불을 쓰려고 합니다. 그리고 그러려면, 여러분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마인들에게, 화끈한 한 방을 먹여주는 것.
* * *
다음 날.
라우스의 정문 너머를 멍하니 응시하던 마인들의 눈에 이상사항이 들어왔다.
정문의 바로 앞에 일곱 명가량의 빙인들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것도.
“모두, 장전! 발사!”
정문을 향해, 화살을 마구 쏘아대면서.
푸슈슛-
방책 너머로 날아온 화살에 정면을 쳐다보던 몇몇 마인들이 허무하게 쓰러진다.
그어어……!
난데없는 화살 세례에 그들의 본능은 분노와 흥분으로 뒤덮였다.
“놈들을…… 죽여라……! 악신을 위해……!”
“그어어어!”
고위 마인만큼은 아니어도, 말을 할 정도의 지능이 있는 마인의 지휘 아래 수십 마리의 마인들이 정문을 열고 쏟아져 나간다.
그걸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 빙인들은 곧장 뒤를 돌아 온 힘을 다해 도망치기 시작했다.
“뛰어!”
“예, 옙!”
“그어어어!”
죽어라 도망가는 정찰대원들과 그들을 쫓는 마인들의 추격전이 펼쳐진다.
타타타탁-
만일 이 추격전에 고위 마인이 있었더라면, 도망가는 정찰대원들에게 이상함을 느꼈을 터였다.
굳이 모습을 드러내서 화살만 쏘고 도망을 치는, 매우 수상한 행동을 하고 있다는 걸 알 았을 테니까.
하지만 마인들로서는 안타깝게도, 이 자리에 그런 고위 마인은 없었다.
오직 본능에 사로잡혀 울부짖는 시꺼먼 마인들만이 있을 뿐.
그리고 그렇기에, 그들은 알지 못했다.
정찰대원들의 일련의 이 행동들은 모두, 처음부터 마인들의 시선을 끌기 위한 것들이었다는 걸.
이어서 마인들이 정문에서 어느 정도 멀어졌을 때였다.
콰콰콰쾅!
뒤편에서 들려오는 폭음에 마인들은 일제히 몸을 돌렸고, 볼 수 있었다.
화르르륵-
정문을 제외한 그들 거점의 나머지 삼면에서 피어오르는 거대한 불길을.
불길은 단숨에 덩치를 불려가며, 탐욕스럽게 거점의 방책들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왜…… 왜 불이…… 크어어…….”
약간의 지능이 있는 마인이 떠듬떠듬 내뱉는다.
마인들은 알지 못했으나, 저 불길은 정찰대원들이 마인들과 동귀어진을 할 경우를 대비하여 들고 다니는 기폭제를 몽땅 때려 부은 결과였다.
정문에 나타나지 않은 나머지 여섯 명의 정찰대원이, 라우스의 삼면에 균등하게 기폭제를 격발시켰던 것이다.
마인들의 시선이 뒤편의 불길에 고정되어 있던 때였다.
[스킬, 광야참[Lv.2]을 발동합니다.]
[1/5의 마력을 소모합니다.]
쿠콰콰콰-
거대한 백색 검기에 마인들이 한꺼번에 휘말려 터져나감과 함께.
“고생하셨습니다.”
뒤쪽에서 대기하고 있던 강현이 앞으로 나선 것은.
“이제부터는 저한테 맡겨주시길.”
“알겠습니다……!”
라우스 전체를 빠르게 덮어가는 화마(火魔)를 보며 강현은 씩 웃어 보였고.
[스킬, 천광의 날개[Lv.2]를 발동합니다.]
순백의 날개를 피워낸 뒤 망설임 없이 거점 안으로 뛰어들었다.
그 목적지는, 불길에 휩싸인 라우스의 내부였다.
[뛰어난 기지를 발휘하여 적의 거점에 막대한 타격을 입히고 있습니다.]
[진행률이 5%(500pt) 상승합니다.]
[현재 진행률 : 30%]
본격적인 거점 탈환의 시작이었다.
* * *
라우스의 삼면에서 피어오른 화염은 빠르게 번져나갔다.
정확히는 번져나가는 정도가 아니었다.
때마침 남서풍이 강하게 불어준 덕에, 흡사 라우스를 거대한 불의 파도가 덮치는 듯한 모양새가 된 것이다.
‘이렇게 될 줄은 몰랐지만…….’
처음의 계획은 삼면에서 불을 피워 이곳을 고립시키게 만들고자 한 것이었는데, 이런 것도 나쁘지 않았다.
-ㅗㅜㅑ 거의 연옥 수준으로 화끈해 보이는데?
-너무 뜨거워 보이네;; 방장 괜찮으려나
-흐음…….
-저기에 자발적으로 뛰어들다니;; 참가자들이 독하긴 하구나;;;
콰콰쾅!
라우스를 빼앗기기 전 빙인들이 살았을 얼음 건축물들이 무너져 내리면서 순간적으로 열기가 밀려든다.
강현은 마력을 있는 힘껏 끌어올렸다.
화르르르륵!
마력을 끌어올렸음에도 숨이 턱턱 막히고, 피부가 후끈거린다.
이대로라면 전투에 지장이 갈 듯했기에, 강현은 휘광과 아르크트 1단계를 두르기로 했다.
[스킬, 휘광[Lv.3]을 발동합니다.]
촤라라라락-
주황색 보호막이 몸을 감싸고, 칠흑의 갑주가 온몸을 덮는다.
그러자 느껴지는 열기가 확연히 줄어든다.
‘이제 좀 살겠네.’
상황이 한결 나아지자 강현은 다소 여유를 가지고 주변을 살펴보았다.
쿠쿵……!
크아아! 크아으어어어……!
수십 개의 건축물이 무너져 내리는 가운데, 사방에서 마인들의 절규가 들려온다.
끔찍하다는 말이 절로 나올 법한 환경이었다.
-불이 약점인 줄은 알았다만, 이 몸의 예상보다 훨씬 치명적이군.
‘……그러게 말입니다. 아예 정신을 못 차리는 수준인데요.’
불에 직접적으로 닿은 마인들뿐만 아니라 그렇지 않은 마인들도 비슷하게 괴로워하는 걸 보아, 거의 절대적인 약점이라고 봐도 될 듯했다.
어찌나 약해졌는지.
[스킬, 섬광[Lv.8]을 발동합니다.]
강현이 앞을 가로막는 마인에게 검을 내쩔러감에도 저항조차 하지 못할 정도였다.
‘아예 힘을 제대로 못 쓰나 본데.’
그어어어!
마인들이 본능적으로 유일하게 불길이 덜한 정문 쪽으로 우르르 도망친다.
그 수가 자그마치 수백 마리에 달했으나, 강현은 딱히 걱정하지 않았다.
지금쯤이면 왕성에서 지원을 나온 병력들이 정문 앞에서 빼곡히 대기하고 있는 중일 테니까.
[적의 거점에 막대한 타격을 입히고 있습니다.]
[진행률이 3%(300pt) 상승합니다.]
[현재 진행률 : 33%]
…….
[진행률이 3%(300pt) 상승합니다.]
[현재 진행률 : 36%]
…….
강현은 끊임없이 오르는 진행률을 주시했다.
1, 2%도 아니고, 3%씩 오르는 걸로 봐서는 상당한 마인들이 죽고 있는 걸로 보였다.
‘하긴, 라우스가 깡그리 불타게 생겼으니 말 다 했지.’
[스킬, 섬멸의 광창[Lv.1]을 발동합니다.]
[1/5의 마력을 소모합니다.]
강현은 도망치는 마인들을 향해 광창을 한 방 날려주고는, 기감을 끌어올리며 계속해서 이동했다.
[스킬, 질주[Lv.3]를 발동합니다.]
어차피 보통의 마인들은 이 불지옥을 벗어나지도 못할 터.
그가 굳이 나서지 않아도 결국에는 정리가 될 것이었다.
그렇기에 잔챙이들을 처리하는 것보다는, 이 거점 어딘가에 있을 고위 마인들을 찾는 게 우선이었다.
라우의 말에 의하면 다섯의 고위 마인이 라우스에 자리하고 있다고 하니, 부지런히 움직인다면 적지 않은 성과를 낼 수 있으리라.
‘이곳을 벗어나는 기척은 안 느껴지니까 아직 라우스 안 어딘가에 있을 텐…… 저기다!’
강현이 눈을 빛냈다.
100m 가량 떨어진 곳에서 고위 마인의 강한 ‘격’을 느낀 것이다.
[스킬, 순보[Lv.5]를 발동합니다.]
그는 곧장 순보를 연달아 발동하여 고위 마인의 ‘격’이 느껴지는 곳으로 향했고.
“시, 신이시여……. 왜 저희를 버리시나이까……!”
멍하니 서서 영문 모를 소리를 중얼거리는 고위 마인을 찾아낼 수 있었다.
[스킬, 광명의 눈[Lv.1]을 발동합니다.]
[스킬, 참격[Lv.5]을 발동합니다.]
강현이 날린 백색 검기를 맞은 뒤에야 고위 마인은 강현을 알아차렸다.
“네놈은……! 그래, 네놈이 불을 지른 거였구나……! 크으…… 다음에 만난다면 가만 두지 않겠다!”
“글쎄, 다음은 없을 거 같은데.”
“크아아아! 이놈!”
처음에는 도망가려던 고위 마인은 강현이 도주로를 차단해 버리자 먼저 달려들어 왔지만.
쾅! 콰콰쾅! 푸욱-!
“크아아아악!”
불의 영향 때문인지, 놀라울 만큼 약했다.
별다른 수싸움을 할 필요도 없이, 광명의 눈이 알려주는 ‘약점’들을 공략하는 것으로 끝났던 것이다.
“크어어…… 신이시여……. 원통합니다……. 왜 저희에게 이런 잔혹한 시련을…… 커헉.”
고위 마인이 알 수 없는 소리를 지껄이며 죽어간다.
강현이 잠시 의아한 얼굴을 해 보였다.
‘지원이 안 와서 저러는 건가.’
그런 거라면 원통해하는 것도 이해가 됐다.
그로서도 라우스를 기습한다면 틀림없이 옆의 거점, ‘비라크’에서 지원이 올 거라 예측했었는데, 아직까지 그 어떤 지원도 없었으니 말이다.
-네놈에게는 잘된 일 아니겠느냐?
‘생각보다 훨씬 쉽기는 한데…… 그거야 그렇죠.’
덕분에 일이 싱거울 정도로 쉽게 진행되고 있으니 그와 빙인들에게는 좋은 일이었다.
빙인들은 가급적 많은 수의 마인들을, 강현은 고위 마인을 처리할 기회였으므로.
그리고 판이 깔린 이상, 더 머뭇거릴 이유는 없었다.
“크으으…….”
푸욱-
강현은 고위 마인의 숨을 끊은 뒤, 날개를 펼쳐 하늘로 날아올랐고.
[악신의 수족, ‘난폭한 카르케’를 쓰러뜨리셨습니다.]
[진행률이 4%(400pt) 상승합니다.]
[현재 진행률 : 40%]
또 다른 고위 마인을 찾아 쓰러뜨리기 위해 라우스의 상공을 질주하기 시작했다.
‘이번에 여기 있는 고위 마인을 몽땅 정리했으면 좋겠군.’
* * *
[아, 이강현 참가자! 또 하나의 고위 마인을 처리하면서, 거침없이 진행률을 올려 갑니다! 이걸로 벌써 세 명째네요! 지금 속도로 봐서는 남은 둘도 충분히 처리할 수 있겠는데요? 사방에서 뿜어지는 열기가 상당히 뜨거울 텐데도 전혀 지장이 없어 보입니다! 단체로 탈진 상태에 빠진 마인들과 대비되네요!]
[예에, 불지옥이 된 거점을 탈출하기 위해 애를 쓰는 마인들이지만 어림도 없죠! 정문에는, 왕성에서 파견된 병사들이 화살을 장전하고 대기 중이니까요! 바깥은 병사들이, 내부는 이강현 참가자가 꽉 잡고 있는 모습입니다! 이강현 참가자, 결국 남은 두 고위 마인들까지 처리하면서…… 첫 번째 거점을 성공적으로 탈환합니다! 이어서 바로 두 번째 거점 공략을 준비하기까지 하네요!]
[조금 전 악신의 분신이 위치한 숲에 진입한 라크리셀 참가자, 첫 번째 거점을 공략해 낸 바이토넬 참가자의 대열에 이강현 참가자도 합류하는군요! 최상위권 세 참가자의 미션이 중반부를 넘어섰음에도 불구하고, 차이가 벌어지는 일 없이 더더욱 치열해지고 있습니다!]
[과연 이 치열함을 끝까지 가지고 갈지, 혹은 도중에 한 참가자가 치고나갈지! 정말 궁금해집니다! 이번 미션을 기점으로 몇몇 ‘연합’의 스카웃 제의가 뿌려질 것이기에 더욱 그러네요! 물론, ‘진짜’ 미션은 이제 곧 시작할 테지만요!]
* * *
어두운 루크 산맥의 중앙.
스윽.
악신의 분신은 눈을 떴다.
예상대로 경연의 참가자는 두 번째 거점 근처에 진입했다.
아마 두 번째 거점을 단번에 탈환한 뒤, 머지않아 이곳까지 올 생각이겠지만.
참가자는 모를 것이다.
악신의 분신은, 그가 두 번째 거점에 접근하기만을 기다렸다는 것을.
바로 지금을 위해 드래곤과 거래를 나누고, 첫 번째 거점을 버리다시피 했다는 것을.
참가자가 두 번째 거점 가까이 접근한 걸 느끼며 악신의 분신은 마기를 끌어올렸다.
쿠구구구-
막대한 양의 마기가 모여가며, 루크 산맥 전체에 사이하고 음울한 기운이 퍼져나간다.
이제, ‘부활의 여지’를 남겨놓을 시간이었다.
* * *
두 번째 거점인 비라크의 앞.
[오오……! 거의 전소(全燒)되기는 했지만, 라우스를 탈환하고 비라크를 앞에 두고 있다니. 감축드립니다, 폐하!]
[아니에요, 다 용사님과 정찰대 덕이죠. 그리고 라우스가 불에 탄 것도 어쩔 수 없었다고 생각해요. 중요한 건 마인들을 몰아냈다는 거니까요.]
서로의 얼굴을 볼 수 있게 해주는 통신구를 통해 대신들과 여왕 폐하의 반응이 전해져 온다.
라우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울상이 아닌 화기애애한 얼굴들을 얼마 만에 보는 건지 기억도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머, 시즈! 누가 여기까지 들어오…… 아니다, 오늘은 좋은 날이니까 봐줄게.]
무릎에 검은 고양이를 앉힌 그들의 작은 여왕이 입을 열었다.
기쁜 날이어서일까. 오늘은 참으로 오랜만에 공주였을 적의 밝은 모습을 내보이시는 듯했다.
[비라크 침공을 눈앞에 두고 있다고 들었어요.]
“넵! 정찰을 가신 용사님이 돌아오신다면 바로 출발할 예정입니다! 비라크까지 탈환한다면 악신이 있는 루크 산맥까지 단박에 나아갈 수 있기에, 악신과 싸우는 데에 큰 진척이 있을 거라 여겨집니다!”
[잘됐네요. 요즘 백성들 사이에 점점 활기가 돌고 있는 것 아시나요? 이게 다 그대들 덕분이에요. 저 역시 마찬가지랍니다.]
“감사합니다……!”
그들의 작은 여왕의 말에 라우를 비롯한 정찰대원들이 감격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그걸 본 여왕께서 싱긋 웃어 보였다.
[그럼, 건투를 빌게요. 부디 무사히 돌아와 주시길.]
팟-
통신이 끝났으나, 정찰대원들의 고양된 얼굴은 변함이 없었다.
‘만약 이 기세를 몰아 한 번에 비라크까지 탈환한다면…….’
그야말로 역사적인 장면에 함께 자리하는 것일 터였기에.
그때, 마침 그들의 용사가 돌아오는 게 눈에 들어온다.
라우는 곧장 출진을 준비시키겠다는 생각을 하며 용사에게 다가갔다.
“용사님!”
한데.
“텅 비어 있습니다.”
“옙! 그럼 출진을…… 예?”
그들의 용사가 이상한 말을 해온다.
“경계 병력은커녕 유령 도시인 것마냥 완전히 비었더군요.”
“그, 그럴 리가 없는데…….”
다른 곳도 아니고, 거점이 비어 있다니?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같이 가시죠.”
용사를 따라 비라크로 이동한 그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비라크는 애초부터 아무도 살지 않았다는듯, 텅텅 비어 있었던 것이다.
“진짜 마인 놈들이 없잖아……. 이게 대체……?”
“말도 안 돼…….”
정찰대원들의 당혹스러운 말들이 울려 퍼진다.
당혹스러운 건 비단 정찰대원들만이 아니었다.
그들을 여기까지 데려온 강현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가 엔딜 펠란에게 물었다.
‘어떻게 된 걸까요?’
-흠……. 아무래도 네놈들이 쳐들어오는 걸 알아서 뺀 것 아니겠느냐?
‘놈들 입장에서는 비라크를 내주면 악신의 분신이 있는 루크 산맥까지 고속도로가 뚫리는 셈인데, 그럴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그리고 이어지는 엔딜 펠란의 말을 들은 강현이 눈을 크게 떴다.
-뭐, 네놈 입장에서는 잘된 일 아니겠느냐. 이 기회에 아예 악신의 분신을 처리해 버리는 것도 시도해 봄 직하겠군.
“……!”
그 말대로였다.
어떻게 된 건지는 몰라도, 악신의 분신을 처리하기에는 최적의 조건이 탄생한 것이다.
약간 찜찜하기는 해도, 악신의 분신에게 가는 걸 가로막던 거점들을 모두 공략한 셈이었으니 루크 산맥에 가 보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그러면 일단, 루크 산맥으로 진격을 해보-”
강현이 입을 열었을 때였다.
콰콰콰콰콰-
돌연 저 앞에 있는 루크 산맥의 한가운데에서부터 거대한 마기의 기둥이 터져나온다.
재빨리 방향을 파악한 정찰대원이 소리친다.
“루, 루크 산맥 방향입니다!”
“악신이 뭔가를 하고 있는 건가! 요, 용사님!”
라우의 물음에 강현은 빠르게 판단을 내렸다.
악신의 분신이 뭘 하는 건지는 몰라도, 내버려 뒀다가는 심각한 일이 벌어질 가능성이 있었다.
“잘 들어주십시오. 일단 비라크는 내버려 두고 루크 산맥을 탐색해야 할 것 같습니다.”
“아, 알겠습니다!”
“진정하시고, 천천히-”
그런데 그 순간.
콰콰콰콰-
뒤편에서도 거대한 마기의 기둥이 치솟는 게 아닌가.
“이번에는 왕궁 쪽입니다!”
라우의 외침을 들은 강현은 뭔가 잘못됐다는 걸 깨달았다.
팟-
그는 즉시 ‘핵’을 쥐어 일시적으로 ‘격’을 10단계까지 끌어올려 기감을 집중했고.
‘저건…….’
이내, 두 기둥의 차이점을 알게 되었다.
위협적인 마기의 기둥을 제외하고는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루크 산맥과는 달리, 왕궁 쪽의 마기 기둥에서부터는 엄청난 수의 마인들이 생겨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게 의미하는 바는 명확했다.
‘루크 산맥을 지키는 게 아니라…… 역으로 왕성을 공격한다고?’
그들, 아니 악신의 분신의 목표는, 거점 탈환을 방해하는 게 아니었다는 것.
거점과 루크 산맥을 버리고, 처음부터 왕성을 공격하려던 게 틀림없었다.
“악신이 코앞에 있는데 왕궁 쪽에 마기가 터져 나오다니……. 요, 용사님! 어디로 가야 합니까?!”
이어서 정찰대원들의 외침을 들은 강현은 직감했다.
이게 바로 엘과 아디스가 말했던, ‘선택’이라는 걸.
악신의 분신이 있을 루크 산맥으로 갈 것이냐, 마인들이 진격하고 있는 왕성으로 돌아갈 것이냐.
결정을 내리기에 앞서, 강현은 라우를 돌아보았다.
“왕궁과 연결되어 있는 통신구가 있다고 했는데, 다른 곳과 연결되는 것도 있습니까?”
“성벽과 연결되어 있는 통신구가 하나 더 있습니다……!”
라우가 급히 통신구를 연결한다.
팟-
성벽의 조장으로 보이는 지휘관의 턱이 눈앞에 보인다.
통신구를 받아 들었음에도 얼굴이 아닌 턱이 보인 이유는, 그가 급박하게 지시를 내리고 있었기 때문인 듯했다.
-뜨거운 물! 뜨거운 물 준비해!
-예, 옙!
-개인 무장 끝내고 화살 챙겨!
-아, 알겠습니다!
지휘관이 지시를 내림에 따라 통신구 밖의 주변에서 전투를 준비하는 부산스러운 소리들이 전해져 온다.
이내 지휘관의 다급한 얼굴이 화면에 나타난다.
[라, 라우! 지금 엄청난 수의 마인들이 침략해 오고 있네!]
“대체 어디서부터 쳐들어온 건가? 우리가 거점들을 다 탈환했는데!”
[마기의 기둥! 왕성 근처에서 터져 나온 마기의 기둥에서부터일세! 곧 전투가 시작될 거 같네!]
지휘관이 통신구를 돌려, 성벽 바깥을 비춘다.
강현의 얼굴이 굳어졌다.
‘뭐야, 저 숫자는…….’
확장시킨 기감으로도 느낀 거였지만, 마인들의 수가 말도 안 되는 수준이었던 것이다.
온몸에 짙은 마기를 두른 고위 마인만 해도 열이 훌쩍 넘어 보였고, 시뻘건 눈을 부라리는 일반 마인들은 수만에 달했다.
[크윽! 전투를 준비해야 해서 가보도록 하겠네! 어서 돌아오게나! 왕국의 존망이 걸린 일이니!]
뚝-
연결이 끊어졌다.
“…….”
마인들의 기습적인 왕성 침략.
갑작스럽게 닥친 끔찍한 상황에 잠시 자리에 정적이 감돈다.
그 속에서, 강현은 냉철한 결론을 내렸다.
‘내가 합류해도 감당하기 힘들 거 같은데.’
어디서 저 정도의 마인이 나왔는지는 몰라도, 자신의 현재 능력으로는 어찌할 수가 없는 숫자였다.
고위 마인들은 자신이 막아낸다고 해도, 그동안 일반 마인들에 의해 왕성이 짓밟히겠지.
-그 나무토막이 있으니 전투가 시작되기 전에는 도착하지 않겠느냐?
엔딜 펠란이 ???의 나무토막을 언급했으나, 강현은 고개를 저었다.
‘안 됩니다.’
-왜지?
‘마력이 모자라요.’
외곽의 성채에서 왕성까지 오는 것도 마력을 거의 다 써야만 했는데, 이곳 비라크에서 왕성까지의 거리는 그보다 더 멀다.
만약 ???의 나무토막의 순간이동을 사용한다면 눈 깜짝할 사이에 왕성에 도착할 수는 있겠다만, 마력이 텅 빌 터였다.
‘결국 직접 이동해야 한다는 말인데…….’
아무리 빨리 가더라도 적어도 두세 시간은 걸릴 터.
마인들의 수로 봐서는 왕성이 그때까지 버틸 확률은 그다지 높지 않았다.
‘반면 루크 산맥으로 바로 간다면…….’
강현은 정면의 루크 산맥을 응시했다.
산맥 중앙에서 솟구친 거대한 마기의 기둥은 끊임없이 마기를 분출하는 중이었다.
그 때문인지 산맥에는 아까보다 몇 배는 음울하고 음산한 분위기가 풍겼다.
그러나.
‘아무 기척도 안 느껴져.’
지금도 마인들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나는 왕성 쪽 마기의 기둥과는 달리, 그 어떤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즉, 루크 산맥은 비어 있는 거나 다름없었다.
만약 강현이 쳐들어간다면 별다른 방해없이 악신의 분신을 마주할 수 있으리라.
그 대신 악신의 분신과 얼마나 싸우게 될지는 알 수 없었기에 왕성은 포기한다고 봐야 했다.
‘어차피 루크 산맥은 비어 있으니까 먼저 왕궁에 들렀다가 루크 산맥에 가는 건……. 안 되겠군.’
강현은 떠오른 가정을 머리에서 지웠다.
자신이 가봤자 왕성이 엉망이 되는 건 기정사실이다.
그리고 왕성을 초토화시킨 마인들이 루크 산맥을 지키기 위해 유유히 돌아간다면 자신은 루크 산맥에 있는 악신의 분신을 처치하지도, 왕성을 지키지도 못하게 된다.
[악신의 분신을 처치하는 순간 현재 진행률에 상관없이 미션은 종료됩니다.]
[미션을 클리어한 순서를 기반으로 순위를 산정합니다.]
설상가상으로 메시지까지 떠오르자 강현이 쓴웃음을 머금었다.
‘이 정도면 대놓고 왕성에 가지 말라는 건가.’
그게 아니라면 이런 메시지까지 나올 리가 만무했다.
‘선택을 잘하라는 말이 쓸데없는 정에 휘둘리지 말고 미션에나 집중하라는 뜻이었나.’
어쩐지 미션 설명에서부터 ‘선택에 따른 책임’을 운운하더니, 처음부터 이 같은 상황이 설계되어 있었던 듯했다.
-이 몸이 보기에는 왕성은 내버려 두고 악신의 분신을 처리하는 게 맞다고 본다만. 어떻게 할 셈이냐?
엔딜 펠란의 물음에 강현은 정찰대원들을 훑어보았다.
자신을 바라보는 정찰대원들의 눈에는 모두 같은 감정이 깃들어 있었다.
어떻게든 도와주길 바라는 간절함.
그것뿐이었다.
-흥, 어차피 이 미션이 끝나면 볼 일 없는 놈들이지 않느냐. 왕성에 대책 없이 갔다가는 이 몸이 보기에 네놈은 죽는다.
그들에게서 시선을 돌린 강현은 엔딜 펠란의 이죽거림을 들으며 고민을 거듭했고.
이내, 결정을 내렸다.
* * *
[아, 드디어 이강현 참가자도 선택의 갈림길에 섰네요! 사실 말이 갈림길이지, 일방통행이나 다름없지만요!]
[예에, 거의 모든 참가자들이 왕성이 아닌, 악신의 분신을 처치하는 걸 고르니까요!]
[외람된 이야기입니다만, 저는 그게 맞다고 생각합니다. 당장은 동고동락한 종족들을 두고 간다는 죄책감이 들 테지만, 그렇다고 같이 죽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악신의 분신이 온 힘을 다한 침공이기에, 참가자의 수준에서는 막아내기가 불가능에 가깝…… 말씀드리는 순간 라크리셀 셀라토리온 참가자, 악신의 분신과의 전투를 시작합니다!]
[이강현 참가자보다 조금 더 일찍 선택의 갈림길에 섰던 바이토넬 참가자도 악신의 분신에게 진격하네요! 이제 최상위권 참가자 중에서는 이강현 참가자만이 남은 셈입니다!]
[악신의 분신을 단번에 제압할 수는 없기에 누가 이길지 흥미진진해지네요! 여기에 이강현 참가자까지 합세한다면…… 아, 마침 이강현 참가자도 발걸음을 뗍니다! 그 발걸음이 향한 곳은 당연히 루크…… 어, 어엇?! 이럴 수가……. 이, 이강현 참가자, 놀라운 선택을 내립니다!]
[악신의 분신이 있는 산맥이 아닌, 왕성으로 가고 있어요! 텅텅 빈 산맥이 아니라, 마인들이 득실거리는 왕성으로요! 대체 무슨 생각인 걸까요?!]
* * *
크어어어어!
캬아아악!
마인들이 길게 늘어진 왕성의 성벽을 올라오기 위해 미친듯이 발버둥을 쳐댄다.
“큭! 화살이 다 떨어졌습니다!”
“뜨거운 물은!”
“이게 마지막입니다!”
“빌어먹을!”
성벽의 곳곳에서 지휘관들의 노성이 터져 나오며, 마인들을 막고자 고군분투하는 병사들이 보인다.
그 혈투를, 아르윈은 임시로 마련된 내성벽의 대전에서 보고 있었다.
‘너무……. 너무 많아…….’
전투가 개시된 지 고작 두 시간밖에 지나지 않았음에도, 외성벽이 뚫리기 직전이었다.
외성벽이 뚫린다면 남은 건 내성벽과 왕궁 뿐.
외성벽을 지키면서 소비될 물자를 고려한다면, 내성벽으로 물러난다고 해도 승산은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왕성의 함락.
지독한 악몽에나 나오던, 끔찍한 상상이 현실로 일어나고 있었다.
“고위 마인 하나가 서쪽 외성벽에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2진을 펼쳐라! 병력을 둘로 나누어 이동한다!”
한편에서는 왕국의 최정예인 왕궁기사단의 외침이 들려온다.
그들이 고위 마인들을 가까스로 막아내고는 있었으나, 그 또한 오래가지 못할 터였다…….
마음 같아서는 울고 싶은 아르윈이었지만, 꾹 눌러 참았다.
주변에 있는 대신들 때문이었다.
아롤디스를 이끌어야 하는 여왕으로서 그들에게 꼴사나운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다.
냐옹-
분명 침실 안에 있어야 할 시즈가 어느새 이곳까지 따라와 그녀의 작은 손을 부드럽게 핥아대고 있었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그다지 위안이 되지 못했다.
“크아악!”
“자, 자크! 안 돼!”
그녀가 상황을 파악하는 지금 이 순간에도, 수십의 병사들이 죽어 나가고 있었으므로
“폐하, 결단을!”
“폐하!”
외무대신 조리스를 비롯한 대신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향한다.
아르윈은 작은 두 주먹을 있는 힘껏 움켜쥐었다.
‘정신을 차려야 해.’
그녀는 아롤디스의 모든 결정권을 지닌, 이곳의 여왕이었다.
“외성벽을…… 불태우세요.”
“……!”
“그 말씀은!”
“네, 외성벽을 불태우고 내성벽으로 물러나 항전을 펼칩니다.”
“알겠습니다……!”
대신들이 바쁘게 움직이자, 외성벽이 불타오르기 시작한다.
화르르르륵!
빙인들에게 치명적인 ‘불’에 의해, 수백 년의 전통이 쌓인 아롤디스의 외성벽이 무너져 내린다.
“크흑!”
누군가는 눈물을 흘렸고, 누군가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주먹을 부르르 떨었다.
외성벽은 단순히 왕성을 든든하게 보호해 주던 방벽이 아닌, 백성들의 마지막 보루였던 것이다.
크어어어!
‘불’이 외성벽을 집어삼키며 성벽에 매달려 있던 수백의 마인들이 재가 되고, 나머지 마인들 또한 바깥으로 물러난다.
일시적이나마 불을 붙인 효과를 발휘하는 것이었다.
“이 틈에 재빨리 정비를 시키세요. 사상자를 파악해서 제대를 재편성하고-”
그녀가 재빨리 지시를 내리던 중이었다.
“크하하하하!”
저 위에서 난데없이 들려오는 광소에 하늘을 올려다보자, 웬 고위 마인 하나가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빙인들이여……. 어리석은 수를 두는구나! 얌전히 항복하면 될 것을, 멍청한 짓거리를 하는군! 설마 용사를 기다리기라도 하는 것이냐?”
“…….”
“크흐흐……. 어차피 그놈은 안 온다! 악신께서 친히 미끼가 되셨거늘 이곳에 올 리가 있나! 하나 네놈들이 헛된 희망을 품고 발악할 수도 있으니…….”
말을 하던 고위 마인이 움직임을 뚝 멈춘다.
“와라! 내 동족들이여!”
쿠오오오오-
그가 소리치자 여러 고위 마인들이 하늘로 솟아오르더니, 검은 마기를 뿜으며 몸을 하나로 합치기 시작한 것이다.
합쳐진 고위 마인들은 잠시 풍선처럼 몸을 부풀리더니, 빠르게 가라앉아 원래대로의 크기를 이루었다.
하지만.
“저, 저게 대체…….”
그 결과물을 본 왕궁기사단장이 침음을 흘렸다.
떨리는 그 목소리에는, 숨길 수 없는 두려움이 깃들어 있었다.
아르윈도 마찬가지였다.
크기는 일반적인 고위 마인들과 다를 게 없었다.
그러나 그에게선 느껴지는 무시무시한 마기는, 고위 마인을 뛰어넘은 무언가를 연상케 만들었다.
[흐흐흐……. 아예 불타는 성벽채로 박살을 내, 희망을 꺾어주마!]
여러 명 마인들의 목소리가 겹쳐들린다.
쿠오오오오-
이어서 집채만 한 마기의 구체가 내성을 향해 날아온다.
“폐하! 어서 자리를!”
“피하십시오!”
대신들의 외침에도 아르윈은 그 구체를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되찾은 줄 알았던 희망은 물거품처럼 꺼져 버렸고, 그들의 용기는 짓밟혔다.
그렇다면, 차라리 포기하는 게 낫지 않을까.
그녀는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검은 구체를 마주보았다.
아마 대신들도, 옆의 왕궁기사단장도 막지 못하겠지.
저 구체에 휩쓸린다고 생각한다면 두려움이 치솟았지만, 동시에 후련하기도 했다.
‘아바마마…… 죄송해요……. 그렇지만 너무 힘들었어요……. 이제 그만…… 쉴게요.’
그녀는 눈을 감은 채, 곧 닥쳐올 마기의 구체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쿠콰콰-
저 뒤에서부터 ‘무언가’가 쏘아져.
콰콰콰쾅!
“……!”
검은 구체와 충돌한 것은.
쿠오오오-
근방을 휩쓰는 엄청난 기파에 아르윈은 눈을 떴고, 볼 수 있었다.
검은 구체를 꿰뚫고 땅에 박혀 있는, 큼직한 순백의 창을.
그녀가 알기로 저런 순백의 창을 날려댈 수 있는 존재는 하나밖에 없었다.
창이 날아온 방향으로 그녀는 급히 고개를 돌렸고.
날개를 접으며 그들의 앞에 내려선, 그들의 용사님을 마주할 수 있었다.
* * *
“---!”
뒤편의 빙인들이 무어라 소리를 쳐댔으나, 강현은 신경쓰지 않았다.
[호오……. 루크 산맥으로 갈 줄 알았는데 이곳에 온다니. 전혀 뜻밖의 행동이군.]
쿠오오오오-
그들을 거만하게 내려다보는 고위 마인에게서 뿜어지는, 강대한 ‘격’을 느낄 수 있었다.
-아니……. 대체 여길 왜 온 거임?
-그니깐;; 진짜 죽고 싶어서 환장했네
-참가자 수준으로는 진짜 죽어도 이기기 힘들 텐데
-이래서 정에 휩쓸리면 안 된다니까
-이제 얘도 끝인 듯ㅇㅇ
채팅을 보자, 시청자들의 걱정과 비꼼으로 채팅창이 폭발하고 있었지만.
“……제3의 길이 있는데, 그러지 않을 이유는 없잖습니까.”
강현은 짤막하게 대꾸할 뿐이었다.
그는 지금 빙인들 때문에 대의를 버리거나 무리하는 게 아니었으니까.
그가 루크 산맥이 아닌 왕성으로 온 이유는 오직 하나.
수호룡 아디스가 자신에게 ‘무엇을’ 원하는지를 깨달아서였다.
다만 그러려면 먼저 눈앞의 괴물을 쓰러뜨리는 게 선행되어야 했고.
“후우……. 간다.”
그렇기에, 그는 거침없이 꺼내 들었다.
스윽-
근래 들어 단 한 번도 발휘하지 않았던.
자신의 ‘전력’을.
[크하하하하하!]
강현을 잠시 보던 고위 마인, 아니, 고위 마인의 집합체가 비웃음을 터뜨린다.
[의외의 행동을 보여주긴 했다만, 여기 온다고 네놈이 뭘 할 수 있을 것 같으냐?]
“…….”
[네놈이 아무리 잘났어도 전능하신 악신과 직접 연결되어 있는 나를 이기는 건 불가능하다!]
그 말을 들은 강현은 고위 마인들이 뭉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악신의 분신이 간접적으로 힘을 빌려준 건가.’
과연, 처음 만나 비교적 쉽게 이겼던 일명 ‘광소하는 아르프’와는 궤가 다른 강함이 느껴졌다.
전해져 오는 ‘격’만 해도 최소 11단계, 어쩌면 그 이상으로 파악됐던 것이다.
하지만 그걸 알게 된 순간, 강현의 입가에는 묘한 미소가 떠올랐다.
악신의 분신과 직접 연결됐다니, 그가 생각하고 있는 ‘전략’에는 호재인 일이었다.
물론 그 ‘전략’을 실행시키기 위해서는.
쿠오오오오-
끔찍한 마기를 쉬지도 않고 뿜어대는 고위 마인을 몰아붙이는 게 먼저겠지만 말이다.
어찌나 그 마기의 농도가 짙은지, 놈이 가만히 있음에도 무형의 압박감이 그를 짓누른다.
몸이 저릿해지고, 숨이 가빠져오는 압박감이.
-저런 수준의 마기와 ‘격’이면…… 이 몸의 차원에서도 한 자리 차지했겠군. 괜찮겠느냐? 아무리 네놈이 아껴두었던 것들을 몽땅 꺼낸다고 해도 장담할 수 없는 상대다.
‘길고 짧은 건 대봐야죠.’
짧게 대답한 강현은 외성벽 밖의 마인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불타는 외성벽을 피해, 저 멀리 떨어져 멍하니 이쪽을 바라보고만 있다.
‘반면 빙인들은…….’
살짝 뒤를 보자, 울먹이는 빙인들이 눈에 들어온다.
저들이 저 성벽에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는 그로서는 알 길이 없었으나, 상당히 큰 마음을 먹고 내린 결정인 것 같았다.
다만 일시적으로 마인들의 접근을 막아내기는 했어도, 이번 전투로 마인들이 싸그리 없어지지 않는 한 외성벽이 없는 그들은 더 큰 위험에 노출될 터였다.
물론 아직은 불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기에, 그가 전투를 하는 동안 마인들이 다시 쳐들어올 일은 없을 듯했다.
‘당장 내성벽이 함락되지는 않겠지.’
강현이 날개를 펼치며 날아올랐다.
[스킬, 광검[Lv.9]을 발동합니다.]
광검을 보는 그의 눈에 한 줄기 아쉬움이 깃든다.
여명의 눈이 광명의 눈으로 진화했듯이, 광검도 진화를 한 상태였다면 일이 한결 수월해졌을 터였기에.
목숨을 건 전투에 ‘만약’이라는 건 없고, 지금 가지고 있지 않은 걸 아쉬워할 여유 또한 없었다.
그나마 고위 마인과 자신이 상극이라는 게 다행이었다.
그의 빛은 고위 마인이 뿜는 마기에 치명적이다.
상성에서 먹고 들어갈 수 있다는 건 분명 상당한 이점이었다.
[스킬, 광명의 눈[Lv.1]을 발동합니다.]
자그마치 십여 명에 달하는 고위 마인들이 합쳐졌음에도, 광명의 눈은 멀쩡히 그 ‘약점’들을 비추어주었다.
가까워지는 고위 마인에게서 눈을 떼지 않으며.
그는 품에서 ‘[email protected]차원의 핵’을 꺼내 에테르를 불어넣는 한편, 강림을 발동했다.
[[email protected]차원의 지배자 인식 완료.]
[‘핵’을 지니고 있을 때에 한해, 일시적으로 ‘격의 상승’을 이끌어냅니다.]
…….
일시적으로 ‘격’이 10단계로 상승하고.
[스킬, 강림[Lv.1]을 발동합니다.]
슈와아아-
하늘에서부터 떨어져 내린 순백의 빛이 그를 휘감는다.
‘여기에…….’
‘???의 나무토막’이 가진 ‘강화’와, 아르크트의 1단계를 ‘시동’하기까지.
촤라라라라락-
주변에는 찬란한 빛무리를, 온몸에는 칠흑의 갑주를 두른 강현이 고위 마인을 향해 검을 내찔렀다.
[스킬, 섬광[Lv.8]을 발동합니다.]
쐐애애액-
한 줄기 빛이, 무거운 중압감을 가르며 고위 마인에게 쏘아진다.
[가소롭구나!]
그 빛에, 고위 마인은 마기를 두른 주먹을 휘두름으로써 응수했다.
콰쾅!
순백의 빛과 짙은 어둠이 충돌했고, 이내 인영 하나가 빠르게 지상으로 떨어져 내렸다.
어찌 보면 당연하게도, 밀려난 건 강현이었다.
“큭!”
추락하던 그는 몸을 한 바퀴 빙글 돌려 지상에 착지했다.
안전하게 착지하기는 했지만, 그 얼굴은 잔뜩 찌푸려져 있었다.
‘예상보다 훨씬 강하군.’
고위 마인의 힘을 탐색하고자 섬광을 내지른 것이었는데, 놈의 어둠에 닿자마자 마치 강철을 맨손으로 때리는 듯한 반발력이 전해져 왔다.
그와 달리 놈의 어둠은 삽시간에 섬광을 뚫고 역습을 해왔고.
[크하하하! 네놈과 나의 차이를 이제 알겠느냐!]
저 높은 상공에서 고위 마인이 사악한 웃음을 터뜨린다.
강현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리 온갖 아티팩트로 스킬을 강화했다고 하더라도 고위 마인이 두른 어둠을 뚫고 놈에게 직접적인 타격을 입히기에는 역부족인 것이다.
하나 강현은 거기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고위 마인에게 재차 달려들었다.
‘길게 가면 승산이 없어.’
놈과의 격차를 가늠한 강현이 냉정하게 내린 결론이었다.
그렇다면 남은 수는 하나밖에 없었다.
강현은 여태까지 분석한 고위 마인의 성정을 머릿속에 집어넣으며 더욱 속도를 높였다.
[오냐, 얼마든지 와봐라! 네놈을 죽이고 빙인들까지 죽여줄 테니!]
듣기만 해도 소름이 끼치는 목소리가 들려왔으나, 강현은 묵묵히 검을 내리긋는 걸로 응수할 뿐이었다.
[스킬, 광야참[Lv.2]을 발동합니다.]
[1/5의 마력을 소모합니다.]
고위 마인에게 날아드는 거대한 초승달 모양의 백색 검기.
[크흐흐흐! 나를 상대로 고작 이런 걸 날려오다니,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군!]
비릿한 미소를 잔뜩 미검은 고위 마인이 큼직한 어둠의 구체를 날려온다.
지름이 5m는 넘어 보이는 칠흑의 구체였다.
여태까지의 경과로 보아, 광야참이 저 흑색 구체와 부딪친다면 흔적도 없이 소멸할 게 틀림없었지만.
강현의 공격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스킬, 섬멸의 광창[Lv.1]을 발동합니다.]
[1/5의 마력을 소모합니다.]
[스킬, 하늘을 덮는 빛의 그물[Lv.1]을 발동합니다.]
[1/5의 마력을 소모합니다.]
…….
빛의 광창, 거대한 빛의 그물…….
그가 현재까지 터득한, 모든 광역 스킬들을 퍼붓기 시작한 것이다.
콰우우욱!
강현의 스킬들은 순식간에 검은 구체를 뚫어버리며 자욱한 먼지구름을 일으켰고, 그러고도 기세를 잃지 않은 채 고위 마인에을 노려갔다.
[흥, 그런 무늬만 화려한 공격을 한다고 되는 줄 아느냐!]
고위 마인은 또 하나의 흑색 구체를 날림으로써 그 스킬들을 단박에 상쇄해 버렸다.
그러나 그가 알지 못하는 두 가지가 있었으니.
첫째.
“……일부러 한 건데.”
강현이 ‘그 같은 사실을 모를 리가’ 없다는 것.
그리고 두 번째.
[스킬, 순보[Lv.5]를 발동합니다.]
[스킬, 순보[Lv.5]를 발동합니다.]
[스킬, 순보[Lv.5]를 발동합니다.]
…….
강현이 먼지구름을 틈타 고위 마인의 시야 바깥으로 벗어나.
‘진짜 공격’을 준비하고 있었다는 것.
[크하하하! 어디 한번 더 해보거라!]
시야가 제한됐음에도 상관없다는 듯 고위 마인이 여전히 비웃음을 터뜨리는 가운데, 순간적으로 위치를 바꾼 강현이 검지를 내민다.
[스킬, 광살포[Lv.1]을 발동합니다.]
[1/4의 마력을 소모합니다.]
키이이이잉-
강현이 내민 검지에 모여가는 빛을.
[스킬, 빛의 인도[Lv.1]를 발동합니다.]
[1/5의 마력을 소모해, 하늘을 덮는 빛의 그물[Lv.1]을 강화합니다.]
또 다른 순백의 빛이 부드럽게 감싼다.
지이잉-
이어서 내쏘아지는, 한 줄기의 벼락과도 같은 빛살.
이걸로 마력을 다 쓴 그였으나, 상관없었다.
고작 동전만 한 직경의 빛살은 정확히 고위 마인의 가슴팍을 꿰뚫었고.
[크아아아아악!]
비명과 더불어, 놈의 몸에서부터 사이한 기운이 느껴지는 그림자 두 개를 뽑아냄으로써 그 소명을 다했으니까.
-합쳐졌던 고위 마인들이 떨어져나오는 거다. 제대로 한 방 먹인 듯하군. 상당히 열을 받았을 거다.
실제로 정면을 보자, 분노한 고위 마인이 짓쳐 들어오는 중이었다.
빠르게 거리를 좁혀오는 고위 마인의 가슴팍에는 주먹만 한 구멍이 뻥 뚫려 있었다.
광살포의 흔적이 선명하게 남아 있는 것이었다.
쿠콰콰콰콰-
고위 마인의 주먹에 막대한 마기가 깃든다.
지금까지의 경험상, 어설픈 스킬로 맞선다면 최소 중상이겠지.
그걸 알고 있음에도 강현은 피하지 않았다.
자신보다 강한 적을 상대할 때 언제나 그래왔듯이, 눈앞의 고위 마인과의 전략도 마찬가지였다.
놈이 스스로의 힘을 과신하고, 강현을 무시하고 있을 때 승부를 보는 것.
그의 전략은 항상 거기에서부터 비롯되었다.
고위 마인의 주먹에 맞서, 강현은 아껴두었던 아르크트의 2단계를 ‘시동’했다.
쾅!
거대한 암흑의 기운이 강현을 뒤덮으며 날개와 소용돌이, 파도 문양 장식이 달린 칠흑의 갑주가 모습을 드러냈고.
콰콰쾅!
그와 동시에 갑주에서 터져나온 날카로운 마기가 고위 마인을 밀어냈다.
아르크트 2단계에 달려있는 기능 중 하나인 ‘마기 폭발’이었다.
[큭?!]
밀려난 고위 마인이 자세를 다잡기 전.
[스킬, 질주[Lv.5]를 발동합니다.]
고위 마인에게 바싹 붙은 강현은 공격을 계속해 나갔다.
마력이 바닥이었지만, 문제는 전혀 없었다.
광살포를 날리면서 미리 피를 듬뿍 먹여놓았던 혈룡검을 오랜만에 꺼내어.
고위 마인에게 겨누면 그만이었으니까.
“……참룡섬.”
강현이 나직이 속삭이자.
콰콰콰콰쾅!
혈룡검에서 뿜어진 핏빛 검기의 소용돌이가, 드넓은 상공을 휩쓸었다.
* * *
“허억…… 헉…….”
혈룡검을 품에 집어넣는데, 저 밑에 처박혔던 고위 마인이 그를 죽일 듯이 응시한다.
[커, 커헉……!]
참룡섬에 제대로 직격당해서인지, 고위 마인에게서 더이상 압박감이 느껴지거나 하지는 않았다.
한데 그때였다.
돌연.
[크억……! 크, 크흐…… 크하하!]
정신없이 신음을 토하던 고위 마인이 미친 것처럼 웃어대는 게 아닌가.
[크으……. 네놈, 이런 맹공이라면 필시 모든 걸 다 쏟아부었겠지.]
“…….”
[네놈에게는 더는 싸움을 지속할 힘이 남지 않았을 텐데도 내가 죽지 않았으니, 이제 끝이다.]
입가에서 피를 흘리며 말하는 고위 마인이었지만, 놈의 말은 정확했다.
방금의 맹공으로 모든 마력을 소진한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흐흐…… 두렵겠지. 걱정하지 말아라. 내가 친히 네놈을 갈기갈기 찢어 마인들에게-]
“……알고 있었는데.”
[-뭐라고?]
고위 마인이 되물었으나, 강현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처럼, 조금 전의 공격들로 고위 마인이 죽지 않을 거라는 건 예상했었다.
“안 죽을 줄 알고 있었다고. 그러니까-”
그렇게 말하며, 그는 지금껏 아껴두었던 마지막 ‘승부수’를 꺼내들었다.
역행의 모래시계
-<초월계>의 괴짜 장인이 손수 제작한 모래시계의 편린입니다. 단 두 번에 한해, ‘역행’을 사용할 수 있게 됩니다.
역행 : 사용자의 신체 상태를 30분 전으로 되돌립니다. 사망한 이에게는 사용할 수 없습니다(1/2).
균형의 탑에서 얻었던 역행의 모래시계였다.
“……역행, 발동.”
[두 번의 역행을 수행해냄에 따라, 역행의 모래시계가 사라집니다.]
파삭-
두 번의 기회를 모두 소모하자 모래시계가 깨져간다.
다만 그 효과만큼은 더없이 확실했다.
슈와아아-
소진되었던 마력이 채워지면서, 강현의 몸을 만전에 가까운 상태로 되돌려주었으므로.
경직된 고위 마인의 얼굴을 마주하며, 강현은 씨익 웃어보였다.
“그러니까, 다시 해보자고.”
[@#를 %$하고 있습니다.]
[진행률이 7%…… #$%^#]
[경고 : 오류가 발생했습니다.]
[$%되지 않은 경우의 수입니다.]
…….
[진행률이 20%(2000pt) 상승합니다.]
[현재 진행률 : 60%]
* * *
왕성 외성벽의 상공.
쿠구구구구-
빙인들이 가만히 올려다볼 수밖에 없는 드높은 하늘 위에서, 칠흑의 어둠이 끊임없이 그 위세를 확장해 나간다.
가만히 둔다면 이 왕국, 아니, 이 차원 전체를 파멸로 몰아갈 게 분명할 정도의 마기.
일반적으로 알려진 고위 마인의 범주를 명백히 뛰어넘은 위력의 마기였다.
순식간에 상공을 잠식하는 마기에, 적지 않은 수의 빙인들이 두려움을 이기지 못하고 몸을 수그린다.
“아, 악신이 직접 나서기라도 한 것인가…….”
“수호룡 아디스이시여……. 부디 저희들을 굽어살펴 주시옵소서…….”
몸을 수그린 빙인들 중에는 일반 백성들만 있는 게 아니었다.
아롤디스를 이끌어가는 대신들과 아롤디스의 왕성을 지키던 병사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보통의 빙인들보다 훨씬 강인한 마음가짐을 가진 그들이라고 해도, 지금의 마기로부터 멀쩡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마기가 차원 전역을 뒤덮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슈와아아아-
보는 것만으로도 감탄이 나오는 영롱한 빛이, 칠흑의 마기와 끊임없이 얽히고설키는 중이었으니까.
쾅! 콰쾅!
구름처럼 퍼져나가는 어둠에 맞서 수십 줄기 순백의 빛들이 하늘을 수놓는다.
압도적인 빛의 창이, 위압적인 백색의 검기가, 파괴적인 한 줄기의 빛이.
쉬지 않고 어둠을 꿰뚫어 점차 그 세력을 약화시키는 중이었다.
말할 것도 없이 그들의 용사가 발하는 찬란한 광휘(光輝)였다.
“오오…….”
그 신위에 대다수 빙인들이 고개를 조아린다.
고위 마인의 어둠에 맞서는 용사의 빛.
그들에게는 마치 신화에 나올 법한 존재들의 전투로 보였다.
심지어 용사가 고위 마인을 상대로 전혀 밀리지 않고, 오히려 조금씩 밀어붙이는 걸로 보여서인지도 몰랐다.
“…….”
아롤디스의 어린 여왕, 아르윈도 마찬가지였다.
숨소리를 내는 것조차 죽이며 하늘 위의 전투에 집중했다.
당연하게도 그녀의 고양이, 시즈가 묘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다는 것도 알아채지 못했다.
‘용사님…….’
그녀가 그들의 용사님에 대해 아는 건 거의 없었다.
믿을 수 없을 만큼 강하고, 신탁을 통해 오게 됐으며, 악신을 위해서 싸워주고 있다는 것 정도.
정작 그가 왜, 무엇을 위해 그들을 돕는지는 알지 못했다.
그래서일까.
그녀는 자신들을 위해 고위 마인과 맞서 싸워주는 용사님에 대해 이루 말할 수 없는 고마움을 느꼈다.
저 용사님이 나타나 주지 않았더라면, 자신들은 고위 마인이 날린 검은 구체를 막지 못했을 터였다.
그리고 일국의 여왕과 모든 대신들이 죽은 이상, 아롤디스 왕국 역시 더 견디지 못하고 스러지고 말았겠지.
하나 용사님 덕분에 그들은 살아남을 수 있었다.
아직까지도 이 땅에 발을 붙이고 서 있을 수 있었다.
그 말은 아롤디스 왕국 또한 아직 살아 있다는 뜻이었으며, 그녀는 용사님을 지켜보며 무언가 벅차오르는 감정이 솟아나는 걸 느꼈다.
그 감정은, 그녀가 아는 대로라면 ‘희망’이었다.
즉, 용사님이 하고 있는 건 단순히 고위 마인을 막아주고 있는 것만이 아니라.
잃어버렸던 빙인들의 희망을 되찾아주고, 다시 살아갈 의지를 부여해 준 것이다.
스윽.
아르윈의 시선이 잠시 처참히 불타고 있는 외성벽을 향했다.
“……할 수 있어.”
그녀는 외성벽에 불을 붙이라 지시하며 무너져 내릴 뻔했던, 하마터면 포기할 뻔했던 마음을 부여잡았다.
“할 수…… 있어.”
어떻게든 왕국을 이끌어나가겠다는 각오와 의지를 다시 한번 다졌다.
쾅! 콰콰쾅…… 슈우우…….
치열하게 맞부딪치던 빛과 어둠이 갑작스레 잦아든 것은 그때였다.
무슨 일인가 싶어 고개를 갸웃거리던 것도 잠시.
다음 순간, 전투를 지켜보던 빙인들은 승부의 추가 기울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자, 잠깐! 그만! 그만하자!]
끝내 빛에 다시 한번 몸을 꿰뚫린 고위 마인이, 목이 부르터지도록 외쳐왔기에.
* * *
고위 마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아티팩트들만 아니었어도! 이런 빌어먹을, 대체 어떻게 그런 것들을 구해온 거냐!’
그로서는 분노와 억울한 것을 넘어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처음 용사가 달려들 때만 하더라도 어처구니없는 치기라고만 여겼는데, 놈이 꺼낸 아티팩트들이 예사롭지가 않았다.
핏빛 강기를 발사하는 것과 마기가 잔뜩 서린 칠흑의 갑옷을 꺼낸 것까지는 괜찮았다.
다수의 고위 마인들이 합쳐진 집합체인 그는 용사가 꺼낸 것들을 충분히 감당할 수 있었기에.
문제는 놈이 마지막에 꺼낸 아티팩트였다.
‘시간을 되돌리다니……!’
웬 모래시계가 깨지며 용사의 상태가 만전에 가까워진 걸 봤을 때의 끔찍함이란.
전력을 쏟아부은 놈의 공격에 타격을 입기는 했어도, 놈 역시 지쳤을 거라 여기던 고위 마인으로서는 치명적인 악재였다.
이후 만전에 가까운 몸상태가 된 채 다시 달려드는 놈을 상대로 전투를 치렀으나, 이미 타격을 입은 고위 마인으로서는 한계가 있었다.
네 개의 영혼이 추가적으로 더 이탈해 버린 것이다.
고위 마인의 몸에 남은 영혼은 이제 고작 서넛.
그것들만으로는 용사를 당해낼 수가 없었기에, 어쩔 수 없이 먼저 입을 연 것이었다.
[왜, 왜 이렇게까지 무리하는 것이냐! 그냥 서로서로 갈 길을 가면 될 것을!]
그 외침에 용사, 강현이 멈칫한다.
그걸 본 고위 마인이 눈을 번뜩였다.
[네놈도 힘든가 보군! 인간인 이상 이런 강도의 전투를 치렀는데 힘든 게 정상이겠지! 길게 말하지 않겠다!]
“뭘 말하려는 거지?”
[이 자리에서 물러갈 테니, 보내만 다오! 네놈이 악신 님을 쓰러뜨리는 것도 기꺼이 방관하도록 하겠다!]
고위 마인의 말에 강현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악신을 쓰러뜨리는 것도 방관하겠다라……. 그렇게까지 해서 남는 게 뭐지?”
이어지는 고위 마인의 답에 강현은 눈매를 더욱더 좁혔다.
[여지다.]
“여지?”
[그래, 네놈이 알는지는 모르겠다만, 고위 마인들이 모인 나는 악신 님보다 강하다. 정확히는, 악신께서 일부러 힘을 몰아주셨지.]
“…….”
[당신께서 루크 산맥에서 죽임을 당하는 걸 감수하고서라도 어떻게든 이곳의 빙인들을 쓸어버려야 하기 때문이지. 이 땅을 초토화시켜 버린 뒤, 한 줌의 마(魔)를 심어야 했다. 그래야 여지를 남길 수 있었으니까.]
“……?”
[악신께서 쓰러지시는 걸 감수하면서까지 이곳으로 왔는데, 네놈이 다 망쳐버렸다……!]
“음…….”
강현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고위 마인이 말하는 게 악신의 분신이 강현에게 ‘선택’을 강요한 비사(祕史)라는 건 알겠는데, 명확하게 알아듣기는 힘들어서였다.
물론 그에게는 설명을 해줄 이가 존재했기에, 이내 그건 중요치 않게 됐다.
-저놈이 말하는 그 여지라는 게 뭔지 알 것 같군.
‘그게 대체 뭐죠?’
강현이 물었다.
-마(魔)는 단 한 줌만 남아 있다고 해도, 부활의 여지를 남길 수 있다. 또한 한 줌의 마(魔)일지라도 언젠가 다시 극에 달할 수 있는 가능성을 품고 있지.
‘그 말은…….’
-당장은 하찮은 마물이라고 해도, 경우에 따라 언젠가는 다시 악신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는 뜻이다. 악신의 분신이 노린 건 바로 그 점인 듯하군.
‘그럼 저 고위 마인이 말하는 여지라는 게…… 악신의 ‘부활’을 위한 여지라는 겁니까? 여지를 만드는 데에 빙인들은 왜 쓸어버리려는 거죠?
-뻔하지. 방해가 된다고 보는 거다.
‘방해?’
-자신이 네놈에게 당한 상황에서, 빙인들이 멀쩡히 이 차원에 있다면 뿌려놓은 마에 방해가 될 거라고 본 걸 거다. 자신의 여지가 담긴 마인을 빙인들이 공격해 버리면 모든 게 끝장날 수가 있으니.
‘아…….’
-다만 그 자신은 드래곤과 나눈 거래 때문에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기에, 남은 힘을 고위 마인에게 모두 전한 거겠지. 고위 마인을 시키면 그만이니까.
강현은 그제야 악신의 분신의 수를 대강 이해했다.
아디스가 차원을 침략해 오는 ‘무언가’를 막느라 움직이지 못하는 틈을 타, 빙인들을 싹 정리한 뒤 이 차원을 마(魔)로 득세하게 만들려는 계획이었던 것이다.
계획에 방해가 되는 용사에게는 ‘약해진’ 악신의 분신이라는, 경연에서 앞서 나갈 수 있는 당근을 주기로 한 것일 테고.
‘그 계획이 나 때문에 어그러졌다는 거군.’
이 상황이 경연인 이상, 그 같은 계획은 모든 참가자들에게 적용되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엘과 미션 설명에서 ‘선택’을 언급했을 리가 없었다.
그 선택의 갈림길에서, 이런 속사정을 알 리가 없는 대부분의 참가자들은 약해진 악신의 분신을 노렸을 터였지만.
‘난 아니지.’
강현은 달랐다.
아디스를 만난 덕에 비교적 자세한 정황을 파악할 수 있었고, 그의 의도를 잴 수 있었으며, 그 끝에 다른 이들이 제시한 ‘선택’이 아닌 자신만의 ‘전략’을 수립해 내어 이곳으로 발걸음을 옮길 수 있었다.
그의 그런 행동은 더 비욘드도 미처 예측하지 못한 듯했다.
[@#를 %$하고 있습니다.]
[진행률이…… #$%^#]
[경고 : 오류가 발생했습니다.]
[$%되지 않은 경우의 수입니다.]
…….
[진행률이 5%(500pt) 상승합니다.]
[진행률이 6%(600pt) 상승합니다.]
[진행률이 7%(700pt) 상승합니다.]
…….
[현재 진행률 : 78%]
고위 마인에게 피해를 입힐 때마다 괴상한 문자로 덮인 메시지들과 함께, 진행률이 큰 폭으로 올랐으므로.
괴문자를 읽을 수는 없었으나, 강현은 대폭 상승해대는 진행률을 통해 자신의 ‘선택’이 맞아떨어졌음을 직감했다.
그러나 모든 궁금증이 가신 건 아니었다.
가령.
“왜 악신은 미리 여지를 남기려는 거지? 마인들이 몽땅 덤벼들었다면 아무리 나라고 해도 힘들었을 텐데.”
악신의 분신이, 어째서 스스로 숙이고 들어가는지에 대한 의문이라든가.
그도 그럴 게 수호룡 아디스는 움직이지 못하며, 아롤디스 왕국은 점차 쇠퇴해 가고 있었다.
강현이 오기 전부터, 전황은 이미 마인들에게 훨씬 유리했던 것이다.
악신의 분신으로서는 가만히 이 상황을 유지시키기만 해도 될 텐데, 왜 먼저 부활의 여지를 심으려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흐흐……. 네놈 같은 용사들이 계속 올 걸 모를 줄 아느냐? 악신께서 처음 이곳에 오시던 그 날처럼 #$%들이 들이닥칠 거라는 걸 모를 줄 아느냔 말이다!]
고위 마인이 광소한다.
‘용사들이 더 온다는 건게 다음 경연을 말하는 건지는 몰라도…….’
차후에도 참가자들이 귀찮게 할 확률이 크니, 아예 초장부터 해결을 해놓으려는 것 같았다.
[자, 이제 납득이 됐겠지? 쉽게 가는 길을 두고 목숨을 걸고 싶지 않다면, 그만 날 보내줘라!]
이제 알겠냐는 듯, 다소 의기양양하게 말한 고위 마인이었지만.
“왜 목숨을 걸어야 하지?”
[뭐?]
“이미 네놈을 벼랑까지 몰아놨는데, 왜 목숨을 걸어야 하냐고.”
그 말처럼 괜히 고위 마인이 먼저 대화를 청해온 게 아니었다.
각종 아티팩트를 총동원한 덕에 강현은 고위 마인에게 상당한 우세를 점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굳이 놈을 보내줄 이유는 없었을뿐더러.
설령 고위 마인을 몰아놓지 못했다고 한들 강현은 애초에 놈을 보내줄 마음이 없었다.
자신이 돌아간다면 언제고 다시 왕성으로 쳐들어와 초토화를 시켜버릴 텐데, 그래서야 루크 산맥이 아니라 왕성으로 돌아온 의미가 없었다.
[이, 이놈이……!]
“욕은 지옥에나 가서 해라.”
슈와아아아-
검에 빛을 띄운 강현이 고위 마인에게 쇄도했다.
그런데 강현이 놈의 지척까지 다다른 순간이었다.
[안…… 되겠…… 구나…….]
돌연 저 멀리서부터, 음울한 목소리가 들려온 것과 동시에.
쿠콰콰콰콰-
[악…… 악신이시여-! 크아아아아!]
고위 마인에게서부터, 짙은 마기의 구름이 끝도 없이 퍼져나갔다.
* * *
난데없는 이상현상에 강현이 눈을 깜빡이는데, 엔딜 펠란이 외쳐온다.
-악신의 분신이 직접 강림하려고 하는 거다! 네놈이 보내주지 않으리라는 걸 눈치챘나 보군!
“……!”
강현은 그 말이 사실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이 마기는…….’
만전인 고위 마인의 집합체에게서도 느끼지 못했던 막대한 ‘격’이었다.
엔딜 펠란의 말마따나, ‘부활’의 여지가 사라지게 생긴 악신의 분신이 강림하려는 게 분명했다.
이대로 가다가는 죽도 밥도 되지 않으리라는 걸 예감하고 나선 것이겠지.
쿠콰콰콰콰-
고위 마인을 집어삼킨 칠흑의 마기가, 구름처럼 상공 전체에 번져나간다.
겨우 ‘분신’에 불과하다고는 해도, 그 본체는 <초월자>였던 존재.
그런 악신의 분신의 ‘격’을, 강현이 감당할 수 없음은 자명했다.
“꺄아-!”
“아, 악신이 강림한다!”
“…….”
빙인들의 비명을 들으며, 강현은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짙은 마기의 구름을 응시했다.
저대로 두었다가는 금세 자신과 빙인, 왕성을 덮을 테고, 마기의 구름은 머지않아 이 차원 전체로 퍼져나가겠지.
하지만.
“……이제 움직이겠네.”
강현은 그렇게 중얼거릴 뿐이었다.
지금 악신의 분신이 나선 일련의 이 행동은 ‘선’을 넘은 거였고.
놈이 ‘선’을 넘어버린 이상, 강현의 ‘믿는 구석’이 나설 수 있게 되었으니까.
잠시 후.
[어리석은…… 먼저 거래를 깨다니.]
수호룡 아디스의 목소리와 더불어.
슈와아아아아-
왕성 전체를, 아득하면서도 따사로운 ‘격’이 덮어가기 시작했다.
왕성 전역을 덮어간 아득한 ‘격’이, 구름처럼 그 세력을 넓혀가던 짙은 마기를 부드럽게 밀어낸다.
“오오…… 이건……!”
“아디스이시여……!”
밑을 보자, 그 ‘격’의 출처를 알아챈 빙인들이 쉴 새 없이 고개를 조아리는 중이었다.
-어쩐지 텅 빈 루크 산맥이 아니라 마인이 득실거리는 왕성으로 돌아가더라니. 처음부터 이걸 노렸던 거였나?
‘그런 셈이죠.’
-……약삭빠른 놈.
‘눈치가 빠르다고 해주시죠.’
강현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예상을 크게 벗어나지 않아서 다행이군.’
그가 악신의 분신과 아디스를 불러낸다는 ‘전략’을 세울 수 있었던 계기는 간단했다.
‘선택’의 갈림길에서 고민하던 와중 문득 아디스와의 문답을 되짚어보게 됐고, 아디스가 그에게 악신의 분신과 나누었던 거래를 상세하게 알려준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던 것이다.
혹시, 아디스는 악신의 분신이 ‘선’을 넘는 걸 원하는 게 아닐까? 하는 짐작이었다.
그 짐작을 확신으로 바꾸고자 모든 아티팩트를 다 쓰면서까지 고위 마인들의 집합체를 밀어붙인 끝에, 결국 악신의 분신을 불러내는 데에 성공할 수 있었다.
그리고 ‘선’을 넘어버린 악신의 분신에 맞서 아디스의 ‘격’이 근방을 휩쓸면서, 그 짐작은 확신이 되었다.
그때, 부드러운 기운이 의해 몰리는 마기의 중심부에서 뭉게뭉게 피어오르던 마기가 어떠한 형상을 이루어간다.
스르르-
생겨난 건 집채만 한 눈이었다.
흰 자가 있어야 할 곳은 핏빛으로, 검은 동공이 있어야 하는 곳은 온통 샛노란 눈동자.
[네……놈만…… 아니었어도…….]
“…….”
[그 도마뱀이 아직…… 오지 않았으니…… 네놈만은 처리하겠다……!]
번뜩이는 샛노란 눈동자가 강현을 똑바로 응시하자, 감당하기 힘든 마기가 쏘아져 온다.
-놈이 남은 마기를 모조리 응축시킨 거다! 동귀어진을 하려고 하는 것이니 당장 피해라!
엔딜 펠란이 외쳐왔지만, 강현은 피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게, 어디선가 불쑥 튀어나와 마기를 막아서는 강대한 ‘격’을 느낄 수 있었으니까.
이내 그 ‘격’은 마기를 부드럽게 받아침과 동시에.
[잘 들리나?]
바로 얼마 전에 들었던 중후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수호룡 아디스, 그의 목소리였다.
‘예, 잘 들리기는 하는데…… 직접 오시는 게 아니었습니까?’
의아한 기색의 강현이 물었다.
그로서는 아디스가 직접 나타날 줄 알았기 때문이다.
[내가 직접 나서지는 않을 것이다.]
‘왜죠?’
[사정이 있기는 했어도, 어쨌거나 마인들이 창궐한 이후 내가 빙인들에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건 사실이다. 이제 와서 그들의 구원자처럼 등장하고 싶지는 않군.]
“……!”
강현이 눈을 크게 떴다.
설마 아디스가 그런 걸 생각하고 있었을 줄이야.
‘그래도…… 계속 그 ‘무언가’와 싸우고 계시지 않았습니까? 어쩔 수 없었다는 걸 설명한다면 빙인들도-‘
[됐다. 그들을 위해 직접적으로 내가 한 건 없는 거나 마찬가지다. 유일하게 했던 게 울음소리를 토해내어 그들의 경각심을 되찾아주었을 뿐이니, 말 다 했지.]
‘울음소리가 들렸던 게…… 그래서였군요.’
강현은 그제서야 처음 왕성에 도착했을 때 들렸던 울음소리의 뜻을 알게 되었다.
당시에는 왜 아디스가 울음소리를 내는지 알지 못했는데, 경각심을 되찾아주기 위해서였다니.
‘무언가’와 싸우느라, 또 악신의 분신과의 거래 때문에 직접 나서지는 못했어도, 아디스는 항상 빙인들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미 악신의 조각이 먼저 거래를 깬 이상, 결과는 결정된 거나 다름없다. 뒤늦게 자신이 실책을 저질렀음을 깨닫고 발악을 하겠지만.]
‘발악이라면……?’
[어떻게든 그대와 빙인들을 쓰러뜨리려 한다는 거지. 정면을 보아라.]
앞을 본 강현은 볼 수 있었다.
악신의 분신이 사악한 마기의 구체를 준비하기 시작하는 걸.
모든 힘을 쏟아부었는지, 그 크기가 마치 하나의 운석을 보는 듯했다.
‘저게 쏘아진다면…….’
이 상공을 넘어 왕성 전체가 초토화될 수도 있으리라.
[지금부터 힘을 빌려줄 테니, 준비해야 한다.]
‘힘이라니 그게 무슨…… 아.’
뜬금없는 아디스의 말에 되물은 강현이었으나, 묻던 도중 그 말의 의미를 깨닫게 되었다.
항거할 수 없을 만큼 높은 ‘격’이, 수수께끼의 검에 한가득 스며들었던 것이다.
[그대의 검에 내 ‘격’을 흘려보내 주었다. 원하는 형상을 떠올리며 검을 휘두른다면 내 ‘격’이 그 형상에 깃들 터이니, 참고하도록. 어딜 노려야 할지는 알고 있겠지?]
여태껏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격’에, 광검이 터질 것처럼 부풀어 오른다.
그 ‘격’을 느끼며, 강현이 입꼬리를 올렸다.
“……물론입니다.”
콰아아아아-
이내 악신의 분신이 내쏜 마기의 구체가 빠르게 다가왔지만, 강현은 물러서지 않았다.
“후우.”
그저 숨을 크게 내뱉은 뒤. ‘어떠한 형상’을 떠올렸을 뿐.
지금 상황에서는 더없이 적절한 형상이었다.
저 구체를 상대하기에 적합한 형태를 갖추었을 뿐만 아니라, 밑의 빙인들도 똑똑히 알 수 있을 터였으므로.
그들의 수호룡이 아롤디스를 버린 게 아니라는 걸.
언제나 그들을 살피고 있었다는 걸 말이다.
강현이 가볍게 검을 휘두르자.
쿠콰콰콰콰콰-
빛과 아디스의 ‘격’이 어우러진 어떠한 형상이 검에서부터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다.
“저, 저건!”
“아디스 님……!”
“수호룡께서 도와주신다……!”
빙인들의 말처럼 모습을 드러낸 건 거대한 ‘드래곤’의 형상이었다.
그것도 아디스의 영롱하리만치 빛나는 비늘까지 구현한 형상.
[……쓸데없는 짓을.]
‘이것밖에 생각나는 게 없더군요.’
중얼거리는 아디스에게 강현이 씩 웃어 보이는 가운데.
콰아아아아-
빙룡, 아니, 광룡파라고 해야 할까.
찬란한 빛을 발하는 용의 기파가, 칠흑의 구체와 그 뒤에 있는 악신의 분신을 그대로 갈라 버렸다.
[크아아아아아……!]
끔찍한 비명과 함께 악신의 분신이 사라졌고, 메시지가 연이어 나타났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민첩이 1 상승합니다.]
…….
[취할 수 있는 에테르가 감지되었습니다. 취하시겠습니까?]
[현재 취한 에테르의 양(2,021/4,000)]
…….
[현재 취한 에테르의 양(3,821/4,000)]
사르르…….
칠흑의 뭉게구름이 푸른 눈꽃이 되어, 왕성 전체에 산산이 떨어져 내렸다.
[악신의 분신을 쓰러뜨리셨습니다.]
[진행률이 13%(1,300pt) 상승합니다.]
[현재 진행률 : 100%]
[미션 종료까지 남은 시간 : 0일 1시간 59분]
…….
[제3의 ‘선택’을 통해 제115 군소차원을 온전히 구해내셨습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업적을 세우셨습니다.]
[진행률을 초과 달성합니다.]
[현재 진행률 : Max]
* * *
그렇게 악신의 분신이 사라진 뒤.
강현을 필두로 빙인들은 왕성 바깥의 마인들을 몰아냈다.
이미 고위 마인과 악신의 분신이라는 구심점들을 잃은 마인들은 그들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이어서 전투가 끝난 뒤에는 빙인들의 연회가 열렸다.
외성벽이 폐허가 되기는 했어도, 악신의 분신을 처치한 걸 가만히 넘어갈 수는 없었던 것이다.
“하하하하!
얼음장 같은 술을 정신없이 마시며 웃고 떠드는 빙인들.
“하하하! 용사님, 한 잔 받아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
잠시 정찰대원들과 술잔을 주고받던 강현은 자리를 피해 연회장 구석으로 이동했다.
[미션 종료까지 남은 시간 : 0일 0시간 12분]
이제 슬슬 돌아갈 시간이 됐기 때문이다.
턱-
난간 한편에 앉자, 연회장 전체가 훤히 내려다보인다.
그때, 향기로운 냄새와 더불어 바로 옆에서 목소리가 들려온다.
“용사님도 쉬러 오신 거군요.”
“아, 네.”
아롤디스 왕국의 어린 여왕, 아르윈이었다.
웬 검은 고양이를 껴안고 있었는데, 그녀도 잠깐 자리에서 벗어나 쉬러 온 듯했다.
“…….”
그렇게 그들은 잠시 연회장을 바라보았다.
-흠…… 퍽 기뻐 보이는군.
빙인들을 보며 엔딜 펠란이 말했다.
‘글쎄요……. 꼭 그렇지만은 않을 겁니다.’
-왜지?
‘아직 마인들이 꽤 남지 않았습니까. 아디스도 그 ‘무언가’랑 싸우느라 항상 도와줄 수는 없을 테고요.’
악신의 분신이 사라졌다고는 해도, 마인들은 차원 곳곳에 자리하고 있다.
빙인들은 앞으로도 남은 마인들과 힘겨운 싸움을 해나가야 할 터였다.
조금 전의 전투로 외성벽까지 불타버렸으니, 필시 긴 고난의 시간들이 눈앞에 기다리고 있겠지.
‘잘해보라고 격려라도 해줘야 되나.’
그러나 고개를 슬쩍 돌린 강현은 그런 말을 할 필요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
“저희를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용사님. 이 은혜, 절대 잊지 않을게요.”
그와 눈을 마주친 꼬마 여왕이, 그 모든 것들을 함축하는 미소를 지어 보였으니까.
얼음을 연상시키는 투명한 피부에, 공기가 더없이 차가웠음에도 불구하고.
그 미소에는 분명 따스한 온기가 느껴졌다.
온기를 느낀 그는 하려던 말을 멈추고 마주 웃어주었다.
빙인들이 그 고난의 시간들을 견뎌내기만 한다면.
그들은 이미 무너진 외성벽 대신, 새로운 외성벽을 가지게 될 것이다.
서로에 대한 믿음과 끈기라는 이름의, 오직 오랜 시간 외세에 맞서 결속해온 이들만이 가질 수 있는 외성벽을.
[미션 종료까지 남은 시간 : 0일 0시간 1분]
슈와아아-
남은 시간이 1분이 되자, 새하얀 빛이 강현을 휘감아간다.
“이제…… 돌아가시는 거군요.”
“네, 굳이 다른 이들을 불러올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용사님의 뜻이 그러시다면…… 그렇게 할게요.”
아직 소녀의 티를 벗지 못하기는 했는지, 아르윈의 눈에 감출 수 없는 아쉬움이 깃든다.
그 모습에 다시 한번 빙긋 웃어 보였을 때였다.
[괜찮은 일격이었다.]
아르윈의 품에 있는 고양이에게서부터 익숙한 목소리가 전해져온다.
‘아디스?’
[쉿, 티 내지 마라.]
눈을 깜빡이려는 강현에게 고양이, 아디스가 일갈한다.
그러더니,
[험, 이걸 받아라.]
스아아아아-
영롱하게 빛나는 카드 한 장을 건네온다.
아르윈이 가만히 있는 걸로 보아 자신에게만 보이는 듯했다.
[<초월>의 경지에 다다르지 못한 이라도 <초월계>로 갈 수 있는 일회용 입장권이다.]
“……!”
[그걸 들고 <초월계>로 가보도록. 그대를 쓸 만한 아티팩트도 준비해놓았으니까.]
‘아…… 감사합니다.’
[또, ‘황금향’과 이곳 빙설계에 대한 정보의 연장선도.]
아디스의 말에 눈을 부릅뜬 순간이었다.
슈와아아-
빛이 완전히 주변을 휘감았다.
“감사했습니다, 용사님!”
“꼭 다시 뵙겠습니다!”
귓가에는 뒤늦게 그가 떠난다는 걸 알게 된 빙인들의 외침이, 눈앞에는 눈물을 글썽거리는 아르윈이 보이는 가운데.
[미션이 종료되었습니다. 대기실로 이동합니다.]
주변을 휘감은 빛이, 그를 대기실로 인도했다.
두 번째 미션의 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