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본선 : 모의차원전쟁(3)
강현의 발언이 일으킨 파장은 금세 폭발적인 반응으로 돌아왔다.
-??? 다른 차원을 먼저 공격한다고???
-말도 안 되게 하이리스크 하이리턴인데ㅋㅋㅋㅋ
-어떻게 인간종이 이런 도박을 계속 던지지??? 대박이다! 가즈아-!
-차원탑 짓는 거 보고 설마 하기는 했는데ㅋㅋㅋㅋ
-차원 탐색 존버 갑니다
…….
하나씩 읽기도 힘들 정도로 엄청난 수의 채팅이 올라온 것이다.
다만 모두 신나 하는 건 아니었고.
-근데 너무 무모한 거 아님? 군소종족이랑 다른 참가자 종족은 아예 다름
-까딱하다간 격차 벌린 거 싹 다 날릴 텐데;;
일부 우려 섞인 채팅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럴 만하지.’
강현은 몇몇 시청자들이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이유를 잘 알고 있었다.
군소종족과 다른 참가자들이 다스리는 종족의 차이를 잘 알아서겠지.
그가 생각하기에도 대륙의 군소종족과 다른 참가자들의 종족은 그 수준이 다를 거라 여겨지기는 했다.
종족의 ‘격’이 다르고, 그들을 지휘하는 참가자는 군소종족의 수장보다 훨씬 똑똑할 것이며, 적 참가자 본연의 강함도 무시할 수 없을 터였다.
그러나 그걸 반대로 말하면, 성공만 하면 대륙을 통일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걸 얻을 수 있다는 말이 된다.
게다가.
“저도 근거 없이 차원탑을 지은 건 아닙니다.”
당연하게도, 강현이 아무런 계획 없이 이 같은 계획을 추진했을 리는 만무했다.
“만약, 제가 남들과 비슷하게 성장해가던 상태에서 차원탑을 지었다면 분명 바보 같은 짓이었겠죠.”
비슷한 에테르를 획득하던 두 참가자 중 A는 내실을 단단하게 다지고, B는 내실을 포기하면서 차원탑을 짓는다고 가정해 보자.
B가 차원 등급을 올리자마자 A에게 쳐들어간다고 쳐도, 막상 붙으면 내실을 다진 A의 전력이 더 강할 수밖에 없다.
즉 아무리 차원탑을 빨리 지었다고 해도 정작 싸워서 이기지를 못하니, 정복을 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그건 맞지
-ㅇㅈ
-확실히 여유 없이 지었다가 실패하면 쌉손해이긴 한데……. 설마 나는 아니다 이런 건가?
채팅창을 보고선 빙긋 웃어 보인 강현은 누적 에테르 순위를 불러냈다.
“하지만, 이 차이를 보시죠.”
팟-
1위 이강현(1,892)
2위 바이토넬(625)
3위 모리아스(611)
4위 라크리셀 셀라토리온(580)
-…….
-…….
-…….
그러자 순위표를 본 채팅창이 일순간 조용해지더니.
-와……. 차이가 이렇게 났어?
-많이 나는 줄은 알았어도 이 정도일 줄은…….
-거의 3배 차이 나는데……?ㅋㅋㅋ
-ㅋㅋㅋㅋ 어이가 없어지는 격차네
새삼 강현과 다른 참가자들의 차이를 실감하는 채팅들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이 정도면 할 만하겠는데? ㅋㅋㅋㅋ
-ㅇㅇ 걱정했는데 실패해도 망하지는 않겠네
그렇게 시청자들의 우려를 해소한 강현은 루루가 마련해 준 그의 집으로 들어갔다.
부드러운 갈색의 동글동글한 침대, 의자 등이 그를 반겨주었다.
‘아기자기하네.’
다행히 생긴 건 아기자기해도 청인족들보다 큰 그의 체구를 반영했는지 사용하기에 불편함은 없어 보였다.
그때, 구석의 책상을 둘러보던 강현의 시선이 멈추었다.
‘저건…….’
스아아-
책상에는, 익숙한 구슬이 놓여 있었으니까.
영롱한 빛을 내뿜고 있는 그것은, 이 ‘블루 빌리지’의 핵이 틀림없었다.
스윽-
강현은 핵을 들어 쥐어보았다.
슈와아아-
몸이 개운해지는 듯한 기운이 전해져 온다.
그 기운을 느끼고 있는데, 문득 이런 의문이 들었다.
“시청자님들, 제가 핵을 파괴하거나 참가자를 쓰러뜨리면 해당 참가자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남겨진 종족은 어떻게 되고요?”
미션이 진행되다 보면 자연스럽게 나올 상황에 대한 의문이었다.
답은 금방 돌아왔다.
-참가자는 죽으면 대기실로 돌아감
-안 죽더라도 핵이 파괴되면 그 시점에서 미션 종료고
-마즘. 남은 종족은 미션 끝날 때까지 지들끼리 살아가는 걸로 알고 있음
“알아서 살아간다라…….”
강현은 만약 자신이 탈락한다면 청인족들이 어떻게 살아갈지를 상상해 봤다.
자신이라는 지배자가 없다면 청인족들은 각종 위협에 노출될 거고, 그건 강현이 바라는 바가 아니었다.
그렇기에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뭘 하려는 거지? 어차피 차원탑이라는 게 지어지기까지도 하루가 남지 않았나.
엔딜 펠란이 물어왔다.
‘차원탑 관련해서 뭘 하려는 건 아닙니다.’
-그럼, 다시 혼자 남은 활잡이들한테 쳐들어가기라도 할 건가?
‘그것도 해야 되기는 한데……. 그보다 먼저 할 게 있습니다.’
이틀 동안 청인족은 그가 처음에 계획했던 대로 폭발적으로 성장했고, 이제 다른 차원의 탐색을 눈앞에 두고 있는 건 분명한 사실이었다.
하나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 있었다.
‘청인족이 얼마나 잘 싸우는지 한 번 확인해야죠.’
바로, 청인족들의 무력을 확인해야 했던 것이다.
초반에는 그의 원맨쇼로 이득을 취했다고는 해도, 언제까지 그 혼자 다 해결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어차피 차원탑이 지어지기까지는 하루라는 시간이 걸리니, 그동안 확인하면 될 듯했다.
-확실히 필요가 있긴 하겠군. 다만, 어떻게 확인하려는 거지?
‘그건 지금부터 고민해 봐야…… 음?’
그런데 그때였다.
-블루 빌리지! 블루 빌리지!
-푸르고 푸른, 푸르디푸른 마을이라고~
밖에서 청인족들의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강현이 창밖을 내다보자, 무장을 갖춘 오십여 명의 청인족 병사들이 어딘가로 바쁘게 이동하는 게 눈에 들어왔다.
‘무장까지 하고 어딜 가는 거지?’
그걸 본 강현은 즉각 루루를 불러냈다.
뿅!
그러자 뿅 소리와 함께.
“부르셨습니까, 지배자님!”
허공에서 흰색 고깔모자를 덜렁거리며 루루가 뚝 떨어진다.
“별 건 아닌데, 저 무장한 청인족들은 어딜 가는 건지 궁금해서.”
“아~ 저 친구들은 밖으로 나가는 중이에요!”
“밖?”
강현의 물음에 루루가 명랑하게 외쳤다.
“넷! 근처에 블루 빌리지를 노리는 약탈자들이 나타났다고 해서요!”
“약탈자들?”
이 미션에서 약탈자 같은 게 있다는 말은 들은 적이 없어 잠깐 고개를 갸웃거리던 강현이었지만.
-군소종족이라고 보면 됨
-대신 규모도 작고 여러 종족이 섞여 있음
채팅을 보자 머릿속에 형광등이 켜지는 느낌이었다.
청인족들의 무력을 측정해보고 싶었는데, 마침 적이 나타나 주다니.
“잘됐네, 혹시 나도 같이 가도 될까?
“물론이죠! 지배자님이 직접 가주신다면 모두 힘이 날 거예요!”
루루가 감격스럽다는 얼굴을 하며 외쳤다.
“뭘. 별것도 아닌데.”
거기에 강현은 마주 웃어준 뒤, 곧장 집을 나와 블루 빌리지를 나가던 청인족들의 대열에 합류했다.
“"안녕하십니까, 지배자님!"”
루루에게 말을 들었는지, 강현을 본 청인족 병사들이 씩씩하게 인사해 온다.
기분 좋게 손을 내밀어 인사를 받는데, 반짝이는 흰 별을 투구에 단 청인족이 다가와 고개를 꾸벅 숙여 보였다.
“안녕하세요, 지배자님! 저는 이 병력들을 이끌게 된 백인대장 도도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현재 저희 오십하고 두 명의 병력은 근방에 있는 약탈자들의 근거지로 향하고 있습니닷!”
-오, 백인대장~
-벌써부터 체계가 잡혔는데ㅋㅋㅋ
-우리 루루 일 잘한다!
백인대장이라는 말에 시청자들의 감탄 섞인 채팅이 올라온다.
강현도 마찬가지였다.
‘벌써 백인대장 같은 체계가 잡혔을 줄은 몰랐는데.’
뭐, 그만큼 루루가 잘해주고 있다는 말이었으니 그로서는 나쁠 게 없는 일이었다.
가는 동안 강현의 옆에 착 달라붙은 도도의 입은 멈추지 않았다.
“약탈자들의 근거지는 그리 멀지 않으니 금세 도착할 겁니다. 지배자님이 내려주신 은총으로 단련한 병력의 힘을 보여드리겠습니다! 또…….”
그렇게 청인족들과 이동하는 길.
도도가 말한 것처럼, 약탈자들의 근거지는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는 듯했다.
저 앞에, 요새 많이 봤었던 나무 방책이 둥글게 늘어져 있는 게 보였으니까.
‘방책에 뭐 저리 구멍이 많이 뚫려 있냐.’
멀리서 봐도 방책의 상태가 그리 좋지 않은 것이, 임시로 만들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다들 놈들이 나오면 바로 싸울 수 있게 준비를 해두어랏!”
“넷!”
도도의 말에 청인족 병사들이 우렁차게 답했다.
스윽-
고함을 듣고선 청인족이 쳐들어왔다는 걸 파악했는지, 방책 내에 종소리가 울려 퍼짐과 동시에 한바탕 소란이 일어났다.
“적이다! 적이야!”
“파란 난쟁이 놈들이 쳐들어왔다!”
그러더니 백이 조금 안 되는 수의 종족들이 우르르 튀어나온다.
수인을 필두로 한 인간종이 주력이긴 했어도, 중간중간 갑각류로 보이는 종족들도 있었다.
아까 채팅이 말했던 대로, 여러 종족이 섞여 있는 구성인 것 같았다.
다만.
“크흐흐, 저 난쟁이 놈들이 정신이 나갔구나! 마을 안에 처박혀 있어도 모자랄 판에 제 발로 찾아와 주다니!”
“으하하하!”
놈들의 대장으로 추정되는 선두에 선 수인을 본 강현이 눈살을 찌푸렸다.
분명 약탈자들이라 들었는데, 그런 것치고는 그 ‘격’이 예상보다 훨씬 강했던 것이다.
비단 대장을 제외한 남은 약탈자들 역시, 적인족 이상으로 강해 보였다.
‘생각보다 훨씬 강해 보이는데.”
하지만, 그렇다고 검을 뽑아 들거나 도도에게 지시를 내리지는 않았다.
애초에 그는 이번에 청인족들에게 모든 걸 다 맡길 생각이었다.
그래야 청인족들의 전력을 객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을 터였으니 말이다.
물론 걱정이 안 되는 건 아니었기에, 그는 약탈자들에게 눈을 떼지 않으며 시청자들에게 조용히 물어보았다.
“……지금 보니까 전체적으로 다 강해 보이는데, 원래 약탈자들이 저렇게 강한 겁니까?”
-ㄴㄴ 약탈자들치고 센 편인 듯
-그래도 두 번 강화하긴 했으니까 이기긴 할 거임
-근데 진짜 세 보이긴 하네. 피해 클 수도 있겠는데
‘하필 첫 전투에서 저런 놈들을 만나다니.’
채팅을 본 강현이 미간을 찌푸렸을 때였다.
“검을 뽑아라!”
촤촤촤촹!
도도의 외침에 청인족들이 일제히 검을 뽑아 들었고.
“백검, 발동!”
“발동!”
이어지는 명령에, 검에 순백의 빛을 띄워냈다.
지이잉-
지이잉-
…….
한데 오십여 명에 이르는 청인족이 동시에 순백의 빛을 피워내자 그 기세가 예사롭지 않았다.
약탈자들보다 덩치가 훨씬 작았어도, 기세에서는 전혀 밀리는 느낌이 들지 않을 정도였다.
“흥, 난쟁이들이 ‘자연의 힘’을 담아봤자지!”
약탈자들의 대장이 냉소했다.
하나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자세를 바로 하는 것이, 경시하지 않는 기색이었다.
“…….”
청인족과 약탈자들 사이에 잠깐의 정적이 맴돈다.
그냥 정적이 아닌, 톡 건드리면 터질 것처럼 팽팽한 긴장이 섞인 정적이었다.
‘쉽지 않아 보여.’
약탈자들을 훑으며 강현은 냉철하게 진단했다.
어쩌면 상당한 피해를 받을 수도 있을 듯했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참가자들끼리 얽힐 걸 고려한다면 감수해야 하는 일이었다.
항상 그가 작전을 내리고 병력을 배치할 수는 없으니, 청인족들도 경험을 쌓을 필요가 있었다.
이윽고.
“지배자님을 위해! 블루 빌리지를 위해!”
“와아아아-!”
“난쟁이들을 죽이자!”
“죽어라!”
청인족들과 약탈자들이 맞붙기 시작했다.
그런데.
푸욱!
“커헉!”
푹!
“끄아악!”
전개되는 전투를 본 강현이 눈을 크게 떴다.
“……?”
그도 그럴 게.
“크아악! 대장! 이, 이놈들 대체 뭡니까!”
“나, 나도 모른다!”
약탈자들 중 하나가 그들의 대장에게 소리친 것처럼, 청인족들이 예상보다 강했던 것이다.
그것도 매우.
푸욱-!
서걱!
‘압도하고 있잖아…….’
그랬다.
그저 밀어붙이고 있는 것도 아니고, 청인족들은 말 그대로 약탈자들을 쓸어버리는 중이었다.
“밀리면 안 된다! 어떻게든 밀어내!”
“으…… 이익!”
삽시간에 전황이 불리해졌다는 걸 알게 된 약탈자들은 어떻게든 발악하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챙! 채챙!
파삭!
청인족의 백검에 몇 번 부딪치기도 전에 무기가 박살 나버렸으니까.
-……?
-이게 끝……?
-비등비등하게 갈 줄 알았는데 이게 머지;;;
강현도, 보는 시청자들도 어리둥절할 정도의 우세였다.
그리고 강현과 시청자들이 그러거나 말거나 그 기세는 끝까지 이어져.
“끄흑……. 이럴 수가…….”
약탈자들의 대장이 쓰러지는 것으로 그대로 전투가 끝났다.
“와아아! 지배자님 만세!”
“만세에-!”
피해가 거의 없는 청인족들이 서로를 얼싸안으며 기뻐한다.
“이게 다 지배자님의 은총 덕분입니다! 감사합니닷!”
도도가 허리를 꾸벅 숙여온다.
강현은 그런 도도를 잠깐 멍하니 바라보다가.
“그래, 훌륭했네. 잘했어.”
이내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만만치 않아 보인 약탈자들을 압도적으로 이겼다는 게 의미하는 바는 하나였으니까.
강현이 선택했던 길들이 맞아떨어졌다는 것.
그걸 알았기에 강현은 웃을 수 있었다.
“……하하, 보셨습니까, 시청자님들? 제가 설계한 청인족들의 강함을.”
-……자기도 예상 못 했으면서
-그니깐;; 선 넘네
-;;
시청자들이 비난해 왔으나, 강현은 개의치 않고 정면의 청인족들을 바라보았다.
“지배자님께 이 영광을!”
“영광을!”
자신을 보고 기뻐하는 이들을 더 높은 곳까지 데려가고 싶었다.
‘그러려면…… 더 열심히 해야지.’
때문에 강현은 블루 빌리지로 복귀한 뒤에도 앞으로의 전략을 세우는 데에 몰두하고, 할 일들을 하나씩 점검했다.
그리고 그가 그러는 동안 시간은 쏜살같이 흘러가.
[차원탑 건설이 완료되었습니다.]
차원 등급 : D
마침내, 차원탑이 완성되었다.
* * *
[이강현 참가자의 블루 빌리지! 끝내 차원탑을 완성해 내고야 맙니다!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직 차원 등급이 E급인 참가자조차 몇 없는 상황에서 혼자 D급이라니요! 블루 빌리지! 멈출 기세를 보이지 않으면서 단독으로 질주해 나갑니다!]
[더 비욘드 측은 분명 고마워하고 있을 겁니다. 극 초반부터 이강현 참가자가 모두의 시선을 끌어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을 테니까요!]
[예에, 저도 똑같은 심정입니다! 벌써부터 C급을 달성했을 때 이강현 참가자가 내릴 결단이 기대가 돼요!]
[그렇습니다! 가뜩이나 두 번의 [종족 특성] 강화를 거친 청인족의 압도적인 힘까지 본 상황이니까요!]
[말씀드리는 순간 이강현 참가자의 차원을 조그마한 비행물체가 빠져나갑니다! 차원탑을 건설하면 생성할 수 있는 차원 탐색기가 출발한 거죠!]
[예, 인근 차원의 참가자들이 알아차릴 수단도 없으니, 자유로운 탐색이 될 것 같습니다!]
지이이잉-
차원과 차원 사이의, 마치 우주를 보는 것만 같은 ‘통로’.
곳곳이 신비로운 무지갯빛 안개로 덮인 가운데, 집채만 한 바위들이 자유로이 날아다닌다.
그리고 그러한 ‘통로’를, 한 비행물체가 둥둥 유영하며 나아간다.
SF에 나올 법한 정찰기처럼 생긴 비행물체였다.
차원탑 내부의 강현은, 비행물체가 전해주는 광경을 화면을 통해 신기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신기하네.”
직접 ‘통로’를 가 본 적도 있다지만, 화면 너머로 보는 건 또 달랐던 것이다.
차원탑이 지어지자 ‘차원 탐색기’를 생성할 수 있게 됐는데, 그게 바로 저것이었다.
비록 아무 데서나 차원 탐색기의 화면을 볼 수 있는 건 아니고 차원탑 내부에 있어야 한다는 조건이 있긴 했지만, 신기한 건 매한가지였다.
[인근 차원 탐색을 시작합니다.]
[모든 참가자 가운데 최초로 차원 탐색을 시작하셨습니다. 업적 보상을 획득합니다.]
[보상으로 200 에테르를 획득합니다.]
차원 탐색기가 ‘인근 차원 탐색’을 시작하자, 연달아 메시지가 떠오른다.
-오오 최초 보상~
-업적 ㅊㅋㅊㅋ
“원래 업적 보상이라는 게 있는 겁니까?”
-ㅇㅇ 근데 아무 업적이나 주는 건 아님
-미션에서 상징적인 것들만
-200 에테르 개꿀!
메시지를 확인한 강현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업적 보상까지 주고. 좋네.’
어제 하루 동안 청인족인 생산한 에테르는 약 200가량.
지금 200을 또 받았으니, 100만 더 모은다면 500이 모인다.
500 에테르면 제약을 하나 더 해제할 수 있게 되는 양이었다.
이런 류의 게임이 그렇듯이, 시간이 지나 인구가 ‘일정 이상’ 쌓이게 되면 자원이 모이는 속도는 빨라진다.
다른 참가자들은 아직 그 ‘일정 이상’에 도달하지 못했지만, 초반에 특급 부스터를 단 강현은 이미 그 지점에 진입했다.
‘지금이 다른 참가자들과의 차이를 쭉쭉 벌릴 적기지.’
그러니 안주하지 말고 격차를 더 벌리는 데에 집중해야 했다.
그러려면 지금의 ‘차원 탐색’에서 유의미한 성과를 거두어야 했고.
우우우웅-
강현이 쏘아 보낸 차원 탐색기가 독특한 울림을 발산하여 ‘통로’를 나아간다.
무작정 기다리기는 게 지루한지, 시청자들이 쉬지 않고 쫑알댄다.
-차원 근처에 다가가면 균열 같은 게 보일 거임
-원래 차원이랑 차원 사이는 드럽게 먼데, 아마 미션이니까 붙여놨을 거예요
…….
강현은 시청자들이 알려주는 정보를 습득하며 화면을 지켜보았다.
그렇게 얼마나 나아갔을까.
저 구석을 본 강현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
저 멀리, 조금 전 채팅에서 말했던 번개 모양 같은 균열이 떡하니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그 순간이었다.
파앗-
[차원을 발견했습니다. 차원 정보를 확인하시겠습니까?]
기다리던 메시지가 떠오른다.
강현은 즉각 확인을 눌러보았다.
그러자.
[해당 차원의 정보를 확인합니다.]
[해당 차원에 대한 정보가 부족합니다. 간략한 정보만을 확인합니다.]
[심층 탐색을 실시하여 추가적인 정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름 : 르라프
차원 : 제28-5 차원
차원 등급 : E
종족 : 화마족
종족 특성 : ???
인구 : ???
보유 에테르 : ???
사기 : 중
[심층 탐색을 실시하겠습니까? (Yes/No)]
[Yes를 누르면 해당 차원으로 진입해 추가적인 정보를 탐색합니다. 24시간이 소요됩니다.]
[No를 누르면 인근의 다른 차원을 탐색합니다.]
“으음…….”
Yes나 No 중 하나를 고르기에 앞서, 강현은 누적 에테르 순위를 띄워 르라프라는 이름을 찾아보았다.
“르라프, 르라프…… 여기 있다.”
44위 그락크(460)
45위 르라프(444)
…….
중간 순위인 참가자였고, 다스리는 종족이 화마족인 걸로 보아 마족이나 악마종일 수도 있겠다고 추정됐다.
잠시 고민을 거듭하던 강현이 채팅창을 향해 입을 열었다.
“시청자님들, 다른 차원을 침략하는 과정이 정확히 어떻게 되는 겁니까?”
미션이 시작되기 전, 엘이 설명해 주지 않은 부분이었기에 이러한 의문이 드는 건 당연했다.
-지금처럼 상대 차원 정보 확인하면 좌표가 남음. 그러고 C등급 찍으면 바로 그 좌표로 게이트 만들 수 있고
강현의 물음에 시청자 몇몇이 친절하게 대답해 주었다.
“아, 한 번 이렇게 확인해 놓으면 심층 탐색을 안 해도 좌표가 남는 겁니까?”
-ㅖ 대신 세부 정보를 잘 모르니까 쳐들어가기 꺼려지긴 하겠쥬?
-ㅇㅇ 그래서 보통은 심층 탐색으로 확 들여다보면서 전력을 가늠하지
강현은 그제야 대략적인 차원 침략의 과정을 파악했다.
‘이리저리 좌표를 찍어놓고 C등급을 달성하면 원하는 곳으로 게이트를 생성할 수 있다는 거구나.’
그렇다면 최대한 많은 좌표를 확보해 놓는 게 유리할 듯했다.
생각을 마친 강현은 바로 No를 눌렀다.
[인근의 다른 차원을 탐색합니다…….]
우우웅-
다시금 차원 탐색기가 ‘통로’를 가르며 차원을 탐색해 나간다.
-아 안 둘러보네 까비;;
-그러게;; 다른 애들 머 하는지 궁금했는데
-그럼 이강현 방 나가서 딴 애들 거 보면 되잔슴
-알지. 근데 여기 나가기는 또 싫음
-ㅋㅋㅋ뭔 마음인지 알겠다
-ㅇㅈㅋㅋㅋㅋ
강현이 심층 탐색을 하지 않는 것에 몇몇 시청자들이 아쉬움을 표했다.
강현도 한번 들여다보고 싶긴 했으나,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24시간이나 걸리는 게 너무 커.’
잠깐도 아니고 지금 같은 상황에서의 24시간은 매우 컸다.
또한, 24시간을 투자하기에 저 차원의 수준이 다소 높다는 것도 No를 누른 이유 중 하나였다.
‘이건 미션이지. 게임이 아니라.’
아무리 그가 다른 참가자들과 격차가 난다지만, 만약 첫 침략을 실패한다면 그 피해는 그가 고스란히 입을 것이었다.
첫 침략은 반드시 성공해야 했다.
그리고 성공하려면 무리 없이 공략할 만한 종족을 찾을 필요가 있었고.
‘적당한 차원이 정 없다면 르라프한테 쳐들어가야겠지만…….’
현재 44위인 르라프보다 더 낮은 순위인 참가자가 인근에 없으리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우우우웅-
강현은 ‘통로’를 보며 계획을 점검했다.
‘이제 관건은 얼마나 빨리 차원 등급을 C로 올리냐는 건데.’
차원 등급을 높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알고 있었다.
아까 시청자들이 쫑알거리던 것들 가운데, 차원 등급과 관련된 내용이 있었던 것이다.
‘차원탑을 지어야 달성할 수 있는 D등급이 특이한 거고, 나머지 등급은 에테르를 일정 이상 얻게 되면 자연스럽게 달성할 거라고 했었지.’
즉, 종족의 덩치가 커지고 근방의 군소종족을 통합해 나가는 과정에서 저절로 달성할 거라는 말이었다.
‘앞으로 인구가 더 늘어날수록 누적 에테르가 늘어나는 데에 가속이 붙을 테니까…….’
C등급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렇다면 남은 건 반드시 이길 수 있는 차원을 물색하는 것뿐이었다.
그 이후 강현은 적절한 차원을 물색했고, 몇 개의 차원을 더 발견할 수 있었다.
천족과 환상종, 엘프가 참가자로 있을 거라 예상되는 차원들이었다.
그러나 그가 보기에 르라프와 크게 차이나지 않는 애매한 차원들이었기에, 좌표만 얻어내고 새로이 인근을 탐색하는 일이 반복됐다.
‘다른 인간종들은 멀리 있는 건가.’
자신의 근처에 없는 걸 불행이라고 해야 할지 행운이라고 해야 할지는 모르겠어도, 충분히 본선에서도 통할 거라 로독이 호언장담했듯이 다들 괜찮게 하고 있을 거라 생각됐다.
당장 자신만 해도 현재까지 단독 1위를 달리고 있지 않은가.
-다른 놈들은 몰라도, 나중에라도 사도천은 꼭 봤으면 좋겠군.
엔딜 펠란의 말에 강현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러게 말입니다.’
사도천이 ‘붉은 악마’라는 칭호를 썼던 자신에게 서브 미션 내내 악마님, 악마님 거리면서 메시지를 보냈던 걸 언급한다면, 녀석이 무슨 표정을 지을지 참으로 궁금했다.
그때였다.
[150 에테르를 획득하셨습니다.]
돌연, 메시지가 들려왔다.
갑작스러운 메시지였지만, 강현은 메시지가 나타난 이유를 잘 알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게…….
-지배자님! 도도가 이끄는 병사들이 군소종족 연합을 이겼다고 합니다! 피해 규모도 극히 적습니닷!
메시지가 뜨자마자 연락을 해온 루루가 기쁘게 외친 것처럼, 이 150 에테르는 그가 도도에게 지시했던 군소종족 연합의 정리가 끝났다는 걸 의미했으니까.
-이게 다 지배자님이 친히 명령을 내려주신 덕분입니다!
루루의 목소리를 듣는 강현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나중을 기약하며 물러났었던 군소종족들을 정리해야 하긴 했는데, 그는 차원탑에 들어가야 했기에 움직일 수 없었다.
해서 그는 도도를 비롯한 청인족 병사들에게 지시를 내렸고, 그들은 군소종족 연합을 격파하는 데에 성공했다.
-아니, 그럼 지금 근방은 통합했다는 건가?
-그런 듯;;;
-지난번 그 활잡이들 세 보였는데 걔들을 별 피해도 없이 깼다고? 와;;
-강화 한 번 더 한 게 저런 차이가 날 정도로 큰 거임? 너무 쉽잖아
-당연히 크지;; 1,000 에테르가 누구 코에 붙일 양은 아니잖슴
-거의 하늘과 땅 차이라고 봐도 됨
…….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파앗-
[차원을 발견했습니다. 차원 정보를 확인하시겠습니까?]
새로운 차원을 발견했다는 메시지가 나타났고.
이름 : 구릭토프
차원 : 제29-2 차원
차원 등급 : F
종족 : 인랑족
종족 특성 : ???
인구 : ???
보유 에테르 : ???
사기 : 최하
“……!”
차원의 정보를 본 강현이 눈을 부릅떴다.
차원 등급이 F에다 사기까지 최하인 차원이라니.
첫 침략의 대상으로 이보다 더 적합할 순 없었다.
84위 세르반테(314)
85위 구릭토프(312)
…….
이어서 구릭토르의 현 순위까지 확인한 강현은 직감했다.
‘여기다.’
구릭토프의 차원만큼 조건이 좋은 곳은 앞으로도 드물 거라는 걸.
그렇기에 그는.
[심층 탐색을 실시하겠습니까? (Yes/No)]
곧장 Yes를 눌렀다.
[심층 탐색을 시작합니다.]
[투명화를 발동합니다.]
‘투명화’라는 단어로 보아, 다른 참가자들에게 보일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듯했다.
슈우우우-
차원 탐색기가 갈라진 균열 안으로 진입하자 어두컴컴한 차원이 펼쳐졌다.
수풀과 나무가 있는 걸로 봐서는 숲과 다를 게 없었지만, 해가 뜨지 않아서인지 음침한 분위기가 맴도는 차원이었다.
지이잉-
차원 탐색기가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자, 이족보행을 하는 늑대처럼 생긴 종족들이 줄지어 뭔가를 나르는 게 보였다.
저 종족이 인랑족인 것 같았다.
한데.
“음?”
강현의 얼굴이 찌푸려지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빨리빨리 움직여! 지배자님께서 재촉하신다!”
“또 죽고 싶나? 살고 싶다면 죽을힘을 다해서 움직엿!”
짜악-!
“끄흑…… 아, 알겠습니다!”
관리자로 보이는 인랑족의 채찍질에 고통받는 인랑족들이 보인 것이다.
‘범죄를 저지른 인랑족들인가?’
그런 생각에 인랑족의 마을을 자세히 살펴봤으나, 어딜 가도 저 광경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크아악! 죄, 죄송합니다!”
“제발 채찍만은…… 끄학!”
마을 어디를 봐도 인랑족들의 곡소리와 채찍을 쉽게 볼 수 있었다.
-어우, 저건 좀…….
-왜 저렇게까지 괴롭히는 거임?
몇몇 시청자들이 불쾌감을 표했다.
강현도 마찬가지였다.
자신과는 별로 상관없는 일이긴 했어도, 썩 보기 좋은 광경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렇게 인랑족의 마을을 둘러볼수록 안 좋아지던 그와 시청자들의 반응은.
[구릭토프, 39위]
마지막으로 마을 한가운데의 화려한 처소에 드러누워 과일을 뜯어 먹고 있는, 인랑족보다 몇 배는 큰 거구의 하이에나 괴수인 놀(Gnoll)을 보자 극에 달했다.
그리고 그 순간, 강현은 결정을 내렸다.
그의 첫 침략의 대상을.
* * *
39위 참가자, 구릭토프는 포도를 잘근잘근 씹으며 분통을 터뜨렸다.
“이런 멍청한……. 아직까지 80등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게 말이 돼!”
분을 토하는 그의 시선은 허공의 순위표에 향해 있었다.
백성들을 굴리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80등대를 벗어나지 못한 탓이었다.
서브 미션을 39위로 통과한 것에 비해 훨씬 미치지 못하는 순위였다.
“이 모자란 놈들!”
구릭토프가 짓씹듯 내뱉자, 보통 놀보다 몇 배는 거대한 몸집이 흔들렸다.
이번 미션에서 인랑족을 다스리게 된 그는, 현실에서도 놀들의 왕이었다.
그냥 왕도 아니고, 주변국들의 조공을 받는 강국의 왕.
따라서 약간 다르다고는 해도 비슷한 류의 백성들을 다스린 경험이 있는 만큼, 이번 미션은 순조롭게 나아갈 줄 알았다.
그런데 이런 낮은 순위라니.
절대 받아들일 수 없었다.
아무리 종족이 약간 다르다고는 해도 현실에서 하던 것과 똑같이 하는데, 왜 현실에서는 강국이고 이곳에서는 하위권이란 말인가.
차이가 나도 이건 심했다.
그는 그 차이가 무엇인지 잠깐 따져보았고.
“열심히 하지 않은 게야……. 그게 틀림없다……!”
이내, 지금의 백성들이 농땡이를 피우고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오늘 밥은 없다!”
그가 창 너머로 신경질적인 외침을 토해냈을 때였다.
스윽-
왠지 모를 오싹한 느낌에 벌떡 일어난 그가 급히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
언제나의 처소 그대로였으며, 특이사항 또한 발견되지 않았다.
“……뭐야?”
구릭토프는 눈살을 찌푸리며 자리에 누웠고, 잠시 후 처소에는 다시 과일을 으적으적 씹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하지만 그는 알지 못했다.
그에게는 보이지 않는 조그마한 비행물체가, 처소를 비롯한 마을 전체를 샅샅이 훑고 사라졌다는 걸.
그렇게 하루가 지나고.
[심층 탐색이 종료되었습니다.]
[추가 정보를 확인하시겠습니까?]
심층 탐색이 끝나자, 강현은 곧바로 정보를 확인해 보았다.
팟-
이름 : 구릭토프
차원 : 제29-2 차원
차원 등급 : F
종족 : 인랑족
종족 특성 : 짐승화(열화)
인구 : 2,555
보유 에테르 : 105
사기 : 최하
어제는 가려졌었던 인랑족의 [종족 특성]과 인구, 보유 에테르가 눈에 띄었다.
‘인구가 좀 많네.’
-놀의 특성이다. 각각의 개체가 가지는 절대적인 힘은 크지 않다만, 대신 숫자가 많지. 다만 그 참가자 놈은 이 몸이 아는 일반적인 놀보다 훨씬 크더군. 분명 강하기도 몇 배는 강할 거다.
‘일종의 규격 외라는 거군요.’
-그러니까 놀 주제에 여기까지 올라올 수 있었겠지.
엔딜 펠란의 설명을 들으며 강현은 추가 정보를 읽어나갔다.
‘가진 에테르는…… 105고.’
비록 정보에는 쥐꼬리만 한 105가 적혀 있었지만, 그게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어차피 그가 에테르 결정체를 부숨으로써 얻는 건 보유 에테르가 아니라 누적 에테르였기에.
-근데 어제 순위 확인했을 땐 300 몇이었는데 왜 지금은 105밖에 안 됨?
-그러게? 하루 만에 200을 쓴 건가?
-ㄴㄴ 그 순위는 누적 에테르를 기준으로 보여주는 거고, 저건 지금 갖고 있는 에테르잖슴.
-ㅇㅇ 둘이 다름.
-그럼 그 놀 쓰러뜨리면 누적 에테르를 준다는 거임? 아니면 보유 에테르?
-누적 에테르요
-아 ㅇㅋ 이해했음
보유 에테르와 누적 에테르가 헷갈리는지 일부 시청자들이 의문을 표했으나, 다른 시청자들이 바로잡아주었다.
강현은 나머지 항목들도 훑어보았다.
‘짐승화는 이름 그대로겠지.’
인랑족의 [종족 특성]인 짐승화는, 아마 신체 일부를 수인처럼 변형시키는 류의 특성으로 보였다.
-짐승 같은 놈 아니랄까 봐 종족 특성도 짐승이네;;
-그니깐;; 채찍질하는 거 보고 진심 깜놀했자너
-권선징악! 인과응보!
…….
어제의 참상을 떠올린 시청자들의 채팅으로 채팅창이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충격적이긴 했어.’
강현도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어제 봤던 구릭토프의 차원은, ‘리얼’을 거치며 웬만한 상황은 다 겪었다고 자부하는 그로서도 상상하지 못했던 참극이었다.
말 그대로, 자신이 다스리는 종족을 갈아내면서 차원을 키우고 있었던 것이다.
강현은 놈의 차원에 깃들어 있던 암울하기 그지없는 분위기를 떠올렸다.
꿈도 희망도 없는, 온통 절망뿐이던 그 끔찍한 분위기를.
하루 종일 활기차게 노래를 불러대는 청인족들의 블루 빌리지와는 너무나도 다른 분위기였고, 그게 뜻하는 바는 하나였다.
‘……구릭토프한테는 이 미션이 그런 식으로 받아들여진 거군.’
자신이 맡은 종족을 희생하면서 차원을 성장시켜야 한다고 상정한 게 틀림없었다.
인랑족을 그리 다루는 건, 다른 누구도 아닌 구릭토프가 선택한 것일 테니까.
-말했잖느냐, 인간의 잣대로 다른 종족을 평가하지 말라고. 그놈한테는 그게 삶의 방식이었을 터고, 앞으로도 바뀌지 않겠지.
엔딜 펠란이 싸늘하게 말해왔다.
“예선을 그런 식으로 통과했다는 건가…….”
-ㅇㅇ 나 쟤 누군지 앎. 성정은 포악해도 아무도 못 건드렸던 게, [email protected]가 압도적…… 이런, 스포일러자너
[email protected]#[email protected]…… 그러네.
강현의 중얼거림에 몇몇 시청자들이 반응해 왔다.
스포일러 처리가 되기는 했어도, 강현은 시청자들이 하려는 말을 알 것 같았다.
‘무력으로 다 박살 내고 올라왔다는 거겠지.’
머리를 굴려서 전략을 짜는 타입은 절대 아닌 듯했으니, 예선의 모두를 찍어누를 만한 무력을 갖추었을 가능성이 컸다.
거기에 더해, 비스름한 종족들과 경쟁한 것도 감안해야 할 터였고.
물론 어찌 됐든.
‘첫 상대로는 좋아.’
적에게 잡음이 많다는 건 강현에게 잘된 일이었다.
그는 가만히 블루 빌리지와 구릭토프의 차원의 전력을 가늠해 보았다.
‘어디 보자…….’
자신은 제약을 하나 해제하기까지 한 데다가, [종족 특성] 또한 두 번 강화했다.
그에 반해 구릭토프는 여태껏 모은 에테르가 고작 300대.
처음 제공되는 무료 [종족 특성] 강화를 제외한다면, 그 어떤 추가적인 전력 강화도 할 수 없는 양이다.
즉, 꿇릴 건 전혀 없다는 말이었다.
“……그럼 이제 남은 건 전략인데.”
강현이 중얼거렸다.
항상 그래왔듯이, 전략은 언제나 중요했다.
더욱이, 여태껏 쓰러뜨렸던 군소종족들과는 그 경우가 다른 구릭토프의 차원이라면 더 그랬다.
그도 그럴 게 차원 탐색기로 훑어본 결과, 노동을 하는 인랑족들을 단속하기 위해서인지 관리자들의 경비가 철저하다는 걸 알게 된 것이다.
그 수는 못해도 100명 이상.
군소종족들도 경비가 없던 건 아니었으나, 인랑족만큼은 결코 아니었다.
그리고 혹여 그들에게 청인족들을 대비할 시간을 주기라도 한다면, 일이 귀찮아질 건 자명했다.
‘유리하다고 해도 정면에서 대놓고 들어가 줄 이유는 없지.’
아무리 청인족들이 앞선다고는 해도, 괜히 정직하게 접근했다가는 입지 않아도 될 피해를 받을 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그 방비에 균열을 조금 내어, 다소간의 혼란을 야기할 필요가 있었다.
그런데 생각을 마친 강현이 고개를 들었을 때였다.
-…….
-…….
평소라면 정신없이 채팅을 쳐댔을 시청자들이, 꿀이라도 먹은 것처럼 가만히 있는 게 아닌가.
‘뭐지……?’
강현이 채팅창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는데, 엔딜 펠란이 코웃음을 쳤다.
-흥, 네놈이 뭐라고 할지를 기다리기라도 하는지, 네놈이 턱을 괴자마자 쥐 죽은 듯 조용해지더군.
‘……!’
강현이 듣고 보니 정말 그런 듯했다.
설마 더 비욘드의 시청자들이 자신의 언행을 주목하게 될 줄이야.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기에, 강현의 표정이 묘해졌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나쁘지 않네.’
그는 빙긋 미소를 지어 보였다.
많은 시청자들이 자신의 행동을 좋아하고 기대할수록, 그로서는 나쁠 게 없었다.
“그럼, 이렇게 하죠.”
* * *
[슬슬 미션이 극 초반을 넘어 초중반에 진입하기 시작하면서, 많은 참가자들이 활발한 움직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근방의 군소종족을 하나둘씩 통합해 나가면서 종족의 몸집을 불리는 시기라고 보시면 될 거 같습니다. 다만 원래라면 지금쯤부터 시청자분들이 마음에 드는 참가자를 찾아 분산을 하시는데…… 이번에는 그럴 기미가 보이지 않네요!]
[그럴 만도 하죠! 현재 모든 참가자 중 단연코 눈에 띄는 건, 누가 뭐라 하건 차원 등급 C등급을 달성한 이강현 참가자의 차원이니까요!]
[예에, 압도적으로 빠른 시간대에 다른 참가자의 차원에 게이트를 생성할 수 있게 됐는데요! 어떤 전략으로 구릭토프 참가자의 차원을 공략할지 궁금해지는…… 어엇! 이강현 참가자, 단독으로 구릭토프 참가자의 차원으로 향하는 게이트에 올라섭니다! 이건 예상외의 행동인데요! 어떤 의도일까요?!]
[어…… 조금 더 지켜봐야 되겠습니다만…… 아직 구릭토프 참가자가 차원탑을 만들지 못했지 않습니까? 적의 게이트 건설을 막는 ‘차원 방책’을 만들지 못하니, 굳이 한 번에 왔다가 일을 그르칠 필요 없이 나누어서 진입해도 될 거라는 판단을 내린 게 아닐까 싶습니다!]
[아, 그렇군요. 실제로 청인족들이 집결하는 걸로 보아, 2차로 그들이 오는 걸로 보입니다! 과연 이강현 참가자가 뭘 하려고 먼저 투입된 건지가 궁금해지네요!]
[혼자 넘어간 게 무모해 보이기는 하나, 저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거라고 보고 있습니다! 제 눈으로 똑똑히 봤으니까요! 이강현 참가자의 과감한 결단들이 어떤 결과를 불러일으켰는지를요!]
* * *
[제29-2 차원으로 이동합니다.]
슈와아아-
더 비욘드의 스튜디오에 소환될 때마다 으레 느끼던 감각이 온몸을 휘감았다.
눈을 뜬 강현은 자신이 구릭토프의 차원에 왔다는 걸 알게 되었다.
사방이 어두침침한 가운데, 물이 고여 썩은 듯한 냄새가 코끝을 맴돌고, 습하기 짝이 없는 공기가 피부에 느껴졌으니까.
“윽.’
그 불쾌함에 강현의 얼굴이 구겨졌다.
지구의 환경과 흡사한 청인족들의 차원에 있던 그에게는 더없이 불쾌한 환경이었던 것이다.
하나 그가 그러거나 말거나.
-역시 단독 작전은 이강현이지!
-ㅋㅋㅋ 오랜만에 밖에 나오니까 좋네!
신이 난 시청자들은 저들끼리 떠들기에 여념이 없었다.
며칠 동안 블루 빌리지만 보다 보니 알게 모르게 좀이 쑤신 모양이었다.
‘어차피 눈으로 보기만 하는 거면서.’
어이가 없긴 했지만, 그는 넘어가기로 했다.
“지도.”
팟-
‘지도’를 말하자 근처에 있는 인랑족의 마을이 표시되었고, 그는 지체 없이 나아갔다.
그렇게 인랑족의 마을을 향해 가는 길.
-근데 강현이가 나서서 좋긴 좋은데 걱정도 된다…….
-글게;; 괜히 잘못되면 어떡함? 너무 도박인 거 같음
-까딱하다간 그 하이에나한테 잡혀서 죽을 수도…….
-으……! 강현이 붙잡은 그놈이 거들먹거릴 거 상상하니까 극혐
-으으;;
그의 판단을 걱정하는 시청자들의 채팅이 눈에 들어왔다.
그 걱정이 이해가 되기는 했지만, 그가 단독으로 인랑족의 마을로 향하는 이유는 명확했다.
먼저, 청인족들이 강하다고는 해도 가장 날렵한 건 그 자신이었다.
첫 번째 제약을 해제하면서 순보와 질주가 풀렸고, 그 스킬들은 그에게 운신의 자유를 보장해 줄 터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놈들의 영웅도 봐야 돼.’
구릭토프가 만들었을 영웅을 확인해야 했다.
어딜 간 건지는 몰라도, 지난번의 심층 탐색에서 찾아볼 수 없었던 것이다.
만일 적의 영웅이 마을에 돌아왔다면 한번 훑어보고, 어떤 능력치를 가졌는지도 파악해야 했다.
‘무력에 몰빵 했을 거라 예상되기는 하다만……. 한 번 더 확인해서 안 좋을 건 없지.’
그리고 그가 할 일을 성공적으로 끝마친다면, 이후에는 그의 지시를 기다리며 대기 중인 청인족 병사들이 투입될 것이었다.
스윽-
‘지도’를 보며 얼마나 걸었을까.
인랑족의 마을이 점차 가까워진다.
‘차원 탐색기로 볼 때는 몰랐는데 방책이 꽤 높군.’
어림잡아 3m는 되어 보이는 방책이 위압적으로 늘어져 있었다.
하지만, 곧 벌어질 전쟁으로 인해 어쩌면 불에 탈 수도 있는 방책들이기도 했다.
방책만 불타는 게 아니라, 마을 전체에서 피와 비명이 들어찰 수도 있겠지.
“…….”
이 미션을 하는 이상, 언젠가는 블루 빌리지에서 벌어질 수도 있을 터였다.
‘블루 빌리지가 불탄다라…….’
강현은 자신이 아직 청인족들과 엄청난 애착이 생겼다거나, 정이 깊게 들었다고 여기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블루 빌리지를 노래하는 청인족들의 노래가 끊긴다면 기분이 이상할 것 같았다.
그것이 비명이나 울음으로 인한 거라면 더욱더.
그러니, 적어도 자신이 그들을 맡은 동안은 더 많은 활기를 띄워주고 싶었다.
‘가급적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갈 수 있다면 더 좋고.’
스릉-
[스킬, 광검[Lv.1]을 발동합니다.]
슈와아아-
수수께끼의 검에 백광이 감돌았다.
“……그럼, 갑니다.”
나직이 읊은 강현은 즉각 순보를 발동해 방책을 통과했다.
팟-
“음? 네놈은 뭐-”
방책 너머, 그보다 덩치가 조금 작은 인랑족이 눈을 부릅떴다.
“치, 침입-!”
이어서 인랑족이 크게 침입자의 존재를 외치려 했지만.
서걱-
강현의 검이 한발 빨랐다.
털썩.
거침없이 관리자를 베어 넘긴 강현이 빠르게 전진했다.
“이, 인간……?! 컥……!”
서걱-
“여, 여봐라……! 침입……!”
푹!
그 뒤로도 몇 명의 관리자들을 만났지만, 그들의 외침이 입 밖을 벗어나는 일은 없었다.
털썩.
또 한 명의 관리자를 쓰러뜨린 강현이 방비가 삼엄한 마을 입구를 주시했다.
‘일단 입구를 뚫어놓고, 걸리기 전까지 최대한 숫자를 줄여야겠군.’
강현의 신형이, 은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아, 이강현 참가자가 저 선택을 한 이유를 이제 알겠네요! 단단한 인랑족들의 방비에 흠집을 내려는 목적으로 보입니다!]
[예, 벌써 여덟이나 되는 관리자를 조용히 베어버린 데에서 알 수 있듯이요! 이강현 참가자, 순식간에 마을 입구의 방비를 뚫어버립니다!]
[구릭토프 참가자에게 있어 불행은, 그를 포함한 인랑족이 아직도 이강현 참가자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했다는 겁니다! 이미 상당한 타격을 입은 상황인데 이대로 계속된다면- 말씀드리는 순간, 뒤늦게 댕댕거리는 소리가 마을 전체에 울려 퍼집니다! 이제야 뭔가 이상이 벌어졌다는 걸 눈치챈 거죠!]
[하지만 입구가 뚫리기 직전이라는 것까지는 모르는 눈치인데요! 만약 청인족들이 게이트를 타고 넘어오고 있다는 사실을 구릭토프 참가자가 알게 된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를 알고 싶네요! 이강현 참가자, 오늘도 엄청난 활약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 * *
댕댕댕댕댕-!
마을 전체에 귀가 찢어질 듯한 종소리가 울려 퍼진다.
“침입자! 침입자다-!”
“모두 밖으로 나왓! 나와서 마을을 샅샅이 뒤져라!”
“빌어먹을, 관리자들이 비었잖아! 다 찾아와!”
인랑족 관리자들이 사방에서 고함을 질러댄다.
그들의 시선을 피해 마을 입구 근처의 어느 골목에 들어선 강현은 검을 털어냈다.
팍-
그가 처리한 인랑족 관리자들의 핏방울이 점점이 땅에 흩뿌려진다.
-너무 입구를 빨리 연 것 아니냐? 놈들이 다시 대비를 할 것 같다만.
엔딜 펠란이 말했다.
확실히 입구의 방비가 다 뚫렸다는 걸 인랑족들이 알게 된다면 다시 보강을 하긴 할 것이었지만.
‘문제없을 겁니다. 이제 슬슬 돌아다닐 테니까요.’
그는 지금부터,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헤집을 생각이었으니까.
놈들이 입구에만 신경을 쓸 수 없도록 말이다.
“침입자는 한 명이다! 가스토 님께서 놈을 찾으시란다! 최대한 빨리 놈을 찾아! 지배자님께서 움직이시기 전에!”
“예, 예엣……!”
탁탁탁탁-
인랑족 관리자로 추정되는 목소리와 더불어, 빠르게 골목으로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가스토? 영웅인가?’
강현은 기감을 끌어올려 발소리가 몇 명인지를 가늠했다.
‘넷에…… 하나가 나머지 셋을 이끌고 있는 거 같은데.’
발소리 하나가 의욕적으로 앞서나가고 있었고, 나머지 셋이 그 뒤를 일정한 간격으로 따라오는 형국이었다.
‘그러면…….’
스윽-
강현은 선두에 선 인랑족의 발걸음이 골목에 가까이 다가오기를 기다렸다가.
[스킬, 섬광[Lv.1]을 발동합니다.]
쐐애액-
번개같이 뛰쳐나가며 놈의 관자놀이를 그대로 꿰뚫어버렸다.
푸욱-!
“끄허…….”
관자놀이를 관통당한 선두의 인랑족이 감전이라도 당한 듯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허물어진다.
“주, 죽엇!”
“으아아아!”
나머지 인랑족들이 손발을 짐승처럼 변형시키며 달려들었다.
[스킬, 섬광[Lv.1]을 발동합니다.]
털썩.
인랑족들을 처리한 강현이 재빨리 자리를 벗어나려던 때였다.
쿠오오오!
돌연, 상당한 기세를 내뿜는 누군가가 엄청난 속도로 자신에게 달려드는 게 느껴졌다.
“……!”
강현은 그 즉시 상대가 다가오는 방향으로 검을 휘둘렀다.
상대도 타이밍을 맞추어 날카로운 검, 아니, 손톱을 휘둘러 온다.
쩌-엉!
검과 손톱이 부딪쳤다고는 믿기 힘든 소리가 울려 퍼졌다.
주르륵 밀려난 강현은 마찬가지로 밀려난 손톱의 주인을 바라보았다.
대다수 인랑족들이 칙칙한 갈색 계열의 털을 가진 것과는 다르게, 눈에 확 띄는 은빛의 털을 지닌 거구의 인랑족이었다.
구릭토프만큼은 아니었으나, 적어도 자신보다는 훨씬 컸다.
-쟤가 영웅인가 본데
-ㅇㅇ 딱 봐도 무력 몰빵 한 듯
시청자들의 말대로 저 인랑족이 영웅이라면, 무력에 온 능력치를 투자한 게 확실했다.
[스킬, 여명의 눈[Lv.4]을 발동합니다.]
여명의 눈이 발동하기는 했어도, 현재의 강현과 크게 차이나지 않는 기세가 느껴졌다.
“크르르르…….”
잠시 강현을 노려보던 인랑족이 하늘을 보며 사납게 울부짖었다.
아우우우우!
그러자 이곳저곳에서 금세 답신들이 들려온다.
아우우-!
아우우우!
-가스토 님의 울음소리다! 빨리 이동햇!
-네, 넷!
타타타탁!
그에 호응하는 듯한 울음소리와 함께, 몰려드는 십여 개의 발소리들이 들린 것이다.
‘저놈이 가스토가 맞나 보군.’
이걸로 저놈이 인랑족의 영웅이며, 이름이 가스토라는 게 확실해졌다.
“흐흐, 요 쥐새끼. 여기가 어딘 줄 알고 소란을 일으켜? 옴짝달싹 못 하게 몰아서 뼛속까지 씹어 먹어주마!”
가스토가 이를 허옇게 드러내 보인다.
-이대로라면 포위를 당할 것 같다만, 괜찮은 것이냐?
신경이 쓰이는지 엔딜 펠란이 물어온다.
하긴, 포위당하기 직전인 것 같았으니 그럴 만도 했다.
거기에 강현은.
‘문제없습니다.’
고개를 살짝 저을 뿐이었다.
약간 수정을 가할 필요는 있었어도, 큰 틀은 여전히 같았다.
어차피 자신이 본격적으로 활개 친다면 인랑족에게 걸리는 건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때 가서 쫓기거나 지금 쫓기거나 딱히 다를 건 없었다.
하나 가스토는 그를 궁지에 몰았다 확신했는지.
“흐흐.”
거들먹거리며 양팔을 변형시키기 시작했다.
꾸드드득.
흉측한 소리와 함께 팔이 두꺼워지고, 가뜩이나 날카로웠던 손톱이 더 예리해진다.
‘진짜 짐승 같네.’
조금 전 쓰러뜨렸던 인랑족들의 짐승화와는 이름만 같았지 전혀 다른 짐승화였다.
타타타탁!
“크흐흐…….”
몰려오는 인랑족들의 기척이 가까워지자, 짐승화를 마무리하는 가스토가 허옇게 웃어 보였다.
그 순간이었다.
팟-
강현이 기습적으로 뛰어나간 것은.
갑작스레 달려드는 가스토가 자세를 취했지만.
“음?”
슈욱-
강현은 그대로 가스토를 지나쳤다.
이어서 강현이 향하는 곳을 본 가스토의 표정이 급변했다.
“어, 어엇?!”
“가스토 님! 이, 인간이 이쪽으로 옵니다!”
강현이 노리는 건 그가 아닌, 몰려드는 인랑족들이었으니까.
[스킬, 참격[Lv.1]을 발동합니다.]
슈슈슉-
세 개의 예리한 백광이 뿜어져 각기 다른 인랑족들을 덮쳤다.
“끄어억!”
갑작스러운 백광에 인랑족 중 하나가 쓰러졌다.
챙!
채챙!
남은 둘은 손을 허겁지겁 휘둘러 간신히 백광을 막아냈으나, 이어지는 강현의 검은 막지 못했다.
서걱-
푹.
그렇게 인랑족 세 명을 처리한 강현은 미친 듯이 인랑족들 사이를 헤집어나갔다.
“이놈!”
뒤늦게 가스토가 부랴부랴 쫓아왔지만, 순보와 질주를 연이어 발동하는 강현을 따라잡을 수는 없었다.
“커헉!”
“끄아악……!”
강현은 인랑족들을 빠르게 정리하며 입구를 벗어나 마을 외곽으로 이동해 나갔다.
-또 무슨 생각이냐.
또 강현이 뭔가 꿍꿍이가 있다고 여기는지 엔딜 펠란이 물었다.
‘별건 아니고, 딱 하나만 막으면 돼서요.’
-뭐?
강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가 의도하는 건 다른 게 아니었다.
저들이 승리하거나 비빌 수 있는 단 하나의 경우의 수.
그걸 막을 생각이었다.
다만 그러려면, 더 큰 소란이 필요했다.
모든 인랑족의 시선이 자신에게 쏠리도록.
그래서, 영웅 가스토와 지배자 구릭토프가 딴 길로 새지 않고 자신에게 오도록.
그가 지금 보이는 이 움직임은, 바로 그걸 위한 것이었다.
“몰아! 몰아라!”
“어쩔 수 없다! 지배자님을 불럿!”
사방에서 들려오는 인랑족들의 외침을 들으면서, 강현은 땅을 박찼다.
* * *
“지, 지배자님! 큰일 났습니다! 침입자가……!”
처음 백성의 보고를 들은 구릭토프는 자신이 잘못 들은 줄 알았다.
“인간? 인간이 마을을 헤집고 있다고?”
“그, 그렇습니다!”
있을 리가 없는 종족이 마을에 들어와 있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내 여러 명의 백성들이 연달아 인간의 존재를 알리자, 그는 인간의 침입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마을이 시끄럽길래 뭔가 소란이 일어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은 했지만, 설마 그게 인간이 벌이고 있는 일이었다니.
그리고 그걸 알게 된 순간 그는.
“크하하하하하! 하늘이 나를 돕는구나!”
하늘이 떠나가라 광소를 터뜨렸다.
이 차원에 인간 따위는 없으니, 소란을 피우고 있다는 인간은 참가자가 분명했다.
놀의 차원에서 인간들은 노예로 부려 먹히는 하등한 종족이었기에, 구릭토프는 거리낌 없이 외쳤다.
“……참가자가 확실하다. 안내해라!”
“네, 넷!”
해서 그는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인간이 있다는 곳으로 이동했고.
“……!”
볼 수 있었다.
수십 명에 달하는 백성들의 시체가 널려 있는 가운데, 가스토와 연신 충돌하고 있는 인간을.
“허억……!”
그를 이곳까지 안내한 인랑족이 백성들의 시체를 보고는 구역질을 했다.
그러나 구릭토프는 그곳으로 눈길도 주지 않았다.
[이강현, 3위]
1위 이강현(2,355)
인간의 순위와 놈이 가진 에테르를 본 순간, 그는 재빨리 인간의 기세를 재보았다.
그 결과 도저히 최상위권의 기세라고 느껴지지 않자, 그의 머릿속을 빠르게 하나의 생각이 채워갔다.
‘보물이 굴러들어왔구나!’
그렇기에 그는 자신이 이기기 크게 어렵지 않을 거라는 결론을 내렸고.
꾸욱…… 쾅!
땅을 박살 내며 스프링처럼 튀어 나갔다.
쐐애애애액!
이어서 휘둘러지는 거대한 주먹.
“……!”
그걸 본 인간이 급히 순간이동하여 뒤로 물러났으나, 구릭토프는 즉각 따라붙어 주먹을 휘둘렀다.
콰아앙-! 콰콰쾅! 콰쾅!
검과 주먹이 부딪치는 소리가 아닌, 천둥과도 같은 소리가 거칠게 울려 퍼졌다.
정신없이 인간을 몰아붙이며 구릭토프가 흉악한 웃음을 지었다.
“크하하하! 주제도 모르고 기어들어 오다니, 가소롭기 짝이 없구나!”
비록 지금은 80위 권을 전전하고 있다고 해도.
그는 놀의 왕이었으며, 인랑족들의 왕이기도 했다.
이놈이 어떻게 1위를 하고 있는지는 몰라도, 미개한 인간 따위는 그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이윽고.
콰콰콰쾅! 꽈앙-!
구릭토프의 주먹을 막아낸 인간이 입에서 피를 흘리며 저 멀리 날아가 민가에 처박혔다.
쾅! 후두두둑-
처박힌 인간을 견디지 못한 민가가 무너져 내리며 인간을 덮쳤다.
“여, 역시 지배자님이시다! 지배자님 만세-!”
“마, 만세!”
백성들이 자신의 이름을 연호하는 걸 들으며 구릭토프는 웃었다.
“크하하하!”
그런데 그때였다.
부스스…….
민가의 잔해가 꿈틀거리더니.
파악!
그 속에서 인간이 튀어나온 것은.
잔해를 뚫고 모습을 드러낸 인간을 본 구릭토프는 눈을 크게 떴다.
“음?”
인간의 모습은, 방금 전까지와는 달랐으니까.
* * *
칠흑의 갑옷, 아르크트를 본 구릭토프가 눈썹을 까딱였다.
놈이 보기에도 보통 갑옷이 아닌 것처럼 보여서 그런 거겠지.
“후우.”
오랜만에 아르크트를 ‘시동’한 강현은 이리저리 몸을 움직여 보았다.
에테르의 충전이 덜 되는 바람에 오래 사용하지는 못할 것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구릭토프의 무력은, 그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은 것이었기에.
-크흐, 저놈과의 부딪침으로 인간이 얼마나 약한지 깨달았겠군.
엔딜 펠란이 클클댔다.
“…….”
강현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제약을 하나 해제했는데도 불구하고 구릭토프를 당해내지 못한 건 틀림없는 사실이었으므로.
예선에서 싸울 때와는 아예 느낌이 달랐다.
‘이게 본선인가.’
구릭토프와의 명백한 ‘종족의 차이’에, 강현은 새삼 실감했다.
누누이 들었던 대로, 더 비욘드 본선에서의 인간은 명백히 최하위종이라는 걸.
눈앞의 구릭타프도 그걸 알기에 조소를 머금으며 여유를 부리고 있는 것일 터였다.
아우우우!
그를 둘러싼 인랑족들의 수가 점점 늘어나면서, 사방에서 인랑족들의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100? 200? 아니면 그 이상?
많다는 것만 느껴질 뿐, 정확하게는 알 수 없었다.
그리고 그제야.
“……드디어 됐구만.”
강현은 씩 웃어 보였다.
-이 철두철미한 놈.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었거늘.
그의 중얼거림을 들은 엔딜 펠란이 불만스럽게 말한다.
‘그거야…… 혹시 모르는 거였으니까요.’
-……독한 놈.
강현이 웃어 보인 이유는 간단했다.
저 많은 인랑족들이 자신을 둘러싸고 있다는 것과 가스토와 구릭토프가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어 보이고 있다는 것.
그것들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였으니까.
바로 저놈들이 이길 수 있는 단 하나의 수인, 병력을 분산시켜 마을로 다가오고 있는 청인족들을 막아서는 것.
그 가능성이 사라졌다는 걸 의미했다.
‘일부러 어그로를 끈 보람이 있군.’
혹여 구릭토프가 자신의 전략을 눈치채고 병력을 나눌까 봐 걱정했었는데, 다행히 기우였다.
그리고 그때, 기다리던 소리가 들려왔다.
-지배자님! 도도가 왔습니다!
-블루 빌리지! 블루 빌리지!
마을의 입구에서부터, 노랫소리와 함께 푸른 물결이 들이닥치기 시작한 것이다.
“뭐, 뭐야!”
“웬 난쟁이들이!”
푸른 물결을 본 인랑족들이 혼비백산하는 가운데.
“어이, 하이에나.”
강현이 말했다.
“가스토! 백성들을 이끌고 입구로…… 뭐? 하이에나?”
지시를 내리던 구릭토프가 얼굴을 일그러뜨린다.
“방금 누구의 손에 날아간 건지 기억이 안 나는 것이냐? 그딴 갑옷 하나 걸쳤다고?”
쿠오오오-
말을 마친 구릭토프의 전신이 울긋불긋해지며, 몸이 부풀어 오른다.
짐승화(열화)가 아닌, ‘진짜’ 짐승화가 발동하는 것일 터.
하나 그럼에도 강현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래, 이 하이에나 새끼야.”
그도 그럴 게.
보유 에테르 : 501
조금 전, 가진 에테르가 500을 넘어선 것이다.
그리고 그건, 강현이 또 하나의 제약을 해제할 수 있게 되었다는 걸 뜻했다.
[제약 해제 : 500 에테르]
[500 에테르를 사용하여 제약을 해제하시겠습니까? (Yes/No)]
강현이 Yes를 누르자.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
메시지들이 연달아 떠오르고, 막대한 활력이 전신을 휘감는다.
하지만 강현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흉측한 괴물이 된 구르토프를 보며, 나직이 읊조렸다.
“……모방의 가호, 발동.”
그러자 그 순간.
슈와아아-
강현의 몸에, 또 하나의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블루 빌리지! 블루 빌리지!
청인족 병사들의 노랫소리가 가까워지자, 구릭토프를 제외한 인랑족들이 허겁지겁 앞으로 튀어 나간다.
자신이 시선을 끄는 동안 청인족들을 마을로 불러들인다는 계획이 완벽하게 성공한 셈이었지만, 강현의 눈은 그곳에 있지 않았다.
[모방의 가호를 발동합니다.]
[모방하고자 하는 [종족 특성]을 떠올려 주십시오.]
그의 눈앞에 메시지가 떠올라 있었기에.
강현이 떠올린 건 당연하게도, 구릭토프의 ‘짐승화’였다.
변화는 금세 체감되었다.
쿠드드득-
전신이 털에 덮이는 느낌이 듦과 함께, 온몸의 근육이 크게 증가한 것이다.
다만, ‘모방의 가호’의 효과는 어디까지나 [종족 특성]의 ‘모방’.
따라서 신체 능력이 크게 상승했다는 게 느껴지기는 했어도, 겉으로 보기에 구릭토프가 보인 것 수준의 극적인 변화는 없었다.
-약간 기세가 바뀐 거 같은데
-그러게. 머임?
-뭐한 거?
…….
물론 지금 강현의 몸은 ‘시동’한 아르크트를 착용한 상태였기에, 시청자들은 변화 자체를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지만.
“……상태창.”
강현은 구릭토프에게서 눈을 떼지 않으며 상태창을 띄웠다.
두 번째 제약을 해제함으로써 얼마나 힘이 돌아왔는지를 확인해야 했다.
팟-
이름 : 이강현
레벨 : 25
고유 특성 : <광검제>
보유 스킬 : 광검[Lv.6], 섬광[Lv.4], 순보[Lv.2], 질주[Lv.1], 참격[Lv.2], 여명의 눈[Lv.4], 휘광[Lv.1]
능력치 : 근력[Lv.10 +10], 민첩[Lv.20 +10], 체력[Lv.16 +10], 마력[Lv.12 +10]
“……25레벨로 돌아갔다고 보면 되나.”
강현은 내심 혀를 찼다.
미션에 들어가기 전 그의 레벨은 55였으니, 얼핏 봐서는 거의 절반가량의 힘을 되찾은 게 아니냐고 할 수도 있을 터였다.
하지만 30레벨부터 폭발적으로 성장했던 능력치와 더불어 그 이후 배웠던 위력적인 스킬들을 생각해 본다면 전혀 절반이 아니었다.
‘그나마 +10이 붙어 있어서 다행이군.’
강현의 시선이 10씩 늘어 있는 능력치로 향했다.
‘모방의 가호’를 제외하고는 발동한 게 없었으니, ‘짐승화의 모방’으로 인한 증가로 보였다.
‘이제 ‘단계’만 확인하면…….’
마지막으로 강현이 자신의 ‘단계’를 확인했을 때였다.
쾅!
구릭토프가 땅을 박살 내며 짓쳐 들어온다.
“……!”
3m가 훌쩍 넘는 구릭토프를 본 강현은 등에 소름이 쭈뼛 돋는 걸 느꼈다.
아까도 그랬지만, ‘짐승화’를 발동해서인지 이제는 흡사 집채만 한 괴물을 보는 것 같았던 것이다.
쐐애애액-
다가온 구릭토프가 큼직한 주먹을 휘둘러 오는데, 가히 돌진해 오는 트럭을 보는 듯했다.
그러나 강현은 물러서지 않았다.
꽈악-
이를 악물고, 손잡이를 굳세게 움켜쥔 채 마주 검을 내찔렀다.
꽈-앙!
이어진 결과는 놀라웠다.
“뭣?! 버텨냈다고?”
강현의 검과 주먹을 맞댄 구릭토프가 외친 것처럼, 강현은 조금도 밀리지 않은 것이다.
“후우.”
참았던 숨을 토해낸 강현은 그제야 뒤로 물러났다.
물러나는 그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통한다.’
그가 구릭토프의 돌진을 피하지 않은 이유는 간단했다.
그도 그럴 것이, 놈이 달려들기 직전 볼 수 있었던 것이다.
[스킬, 여명의 눈[Lv.4]을 발동합니다.]
지이잉-
아까는 발동하지 않았던 여명의 눈이 발동했다는 메시지를.
그 덕에 구릭토프의 돌진에서 보이는 미세한 자세의 무너짐을 간파할 수 있었다.
아무래도 제약을 해제함에 따라 ‘격’이 일부 상승하면서, 구릭토프의 ‘격’과 같아진 걸로 보였다.
그리고 ‘약점’이 보이는 이상, 구릭토프는 더 이상 감당할 수 없는 괴물이 아니었다.
‘적이지.’
팟-
검을 꼬나쥔 강현의 신형이 빠르게 튀어 나간다.
[스킬, 섬광[Lv.4]을 발동합니다.]
그 검 끝은 구릭토프의 ‘약점’ 중 하나인 목젖을 노리고 있었다.
“이놈이!”
설마 강현이 먼저 들어올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는지, 구릭토프가 격분하며 거리를 좁혀왔다.
쾅! 콰쾅!
강현과 구릭토프가 연달아 충돌했다 떨어졌다를 반복한다.
쐐애액-!
구릭토프가 팔을 채찍처럼 휘둘렀다.
자칫 함부로 맞섰다가는 팔에 담긴 힘을 제대로 받아내지 못할 것이 분명한 그 일격을.
‘팔 안쪽.’
[스킬, 섬광[Lv.4]을 발동합니다.]
강현은 여명의 눈이 가리키는 ‘약점’을 공략함으로써 상쇄했다.
본능적으로 위험하다는 걸 직감한 구릭토프로 하여금 공격 경로를 틀게 만든 것이다.
다만, 그럼에도 구릭토프의 공격은 괴랄한 위력을 품고 있었다.
쾅!
검과 구릭토프의 팔이 부딪치며 폭발음을 터뜨렸다.
“큭!”
바위를 검으로 후려치는 듯한 느낌이 전해졌으나, 강현은 검과 팔이 부딪치는 그 순간을 지켜보지도 않았다.
아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구릭토프의 주먹을 막아내자마자.
-발이다!
후우욱!
밑에서는 늑대의 그것을 보는 것 같은 시커먼 다리가 날아들었으니까.
[스킬, 순보[Lv.2]를 발동합니다.]
다리를 본 강현은 순보를 발동하여 발의 사정거리 밖으로 물러나는 한편, 검을 길게 휘두르는 것으로 대응했다.
[스킬, 참격[Lv.2]을 발동합니다.]
구릭토프의 ‘약점’들을 노리고 쏘아진 세 개의 예리한 백광들.
“어딜 감히!”
카카캉!
그걸 본 구릭토프는 백광들을 쳐내버리더니.
콰우우욱!
손을 내리그어 오러로 보이는 수기(手氣)를 역으로 날려왔다.
“……!”
[스킬, 휘광[Lv.1]을 발동합니다.]
이에 강현이 주황빛 보호막을 불러내어 수기를 막아내면서, 자욱한 먼지가 피어올랐다.
고오오-
그 먼지의 한가운데에서, 강현이 침을 내뱉었다.
“퉤!”
구릭토프와 나눈 공방의 여파 때문인지 새빨간 피가 섞여 나왔으나, 강현의 입가에는 희미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아까처럼 일방적으로 밀리다가 형편없이 처박히는 게 아닌 제대로 된 공방을 나누었다는 것.
그게 의미하는 바는 하나였으니까.
‘할 만해.’
강현과 구릭토프의 무력이, 최소한 동일 선상에 이르렀다는 말이었다.
‘하긴,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밀리면 말이 안 되긴 하지.’
아르크트를 ‘시동’하고 여명의 눈을 켠 데다가, 모방의 가호까지 발동한 그였다.
아무리 구릭토프가 짐승화를 발동했다고는 해도, 밀린다는 건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물론 구릭토프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 받아들였는지.
“크으윽……! 인간 따위와 이 내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지고 있었지만 말이다.
구릭토프가 흥분하는 걸 봐서일까.
강현은 도리어 차분해졌다.
“…….”
머리가 차갑게 식으면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명확하게 눈에 들어왔다.
‘포악하면서 급하고, 참을성이 없어.’
자신이 파악한 구릭토프의 성정을 떠올린 강현이 뒤편의 전선을 살폈다.
-블루 빌리지! 블루 빌리지!
-지배자님을 위해! 싸우자!
-와아아아아!
“크으윽!”
“마, 막아! 대열을 유지해!”
인랑족들이 밀려드는 청인족들을 막아내지 못하고 있는 게 보였다.
아마 그가 구릭토프를 막아주기만 해도 승리를 차지할 수 있겠지.
그런데 그때였다.
‘잠깐만.’
놈의 성정과 전선의 상황이 맞물리자, 어떤 생각이 그의 등줄기를 번개처럼 훑고 지나갔다.
‘잘하면…… 이길 각이 나오겠는데.’
그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고, 이내 결론을 내렸다.
놈을 쓰러뜨리기 위해서는 단 한 순간이 필요할 뿐이라고.
‘앞으로 전황은 저 구도가 계속될 거다. 그럼 나는 일단 단단하게 버티다가 때가 되면…….’
생각을 하던 강현의 눈매가 좁혀졌다.
“인간 따위가!”
구릭토프의 거구가 돌진해 오고 있었다.
파앗-
거기에 강현 또한 구릭토프에게 파고들면서, 다시금 폭발음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콰쾅! 쾅!
* * *
청인족과 인랑족이 벌이는 전쟁은 이번 미션에서 최초로 벌어지는 참가자들 간의 전쟁이었고, 따라서 많은 관심을 끌었다.
[아, 시청자분들이 물밀 듯이 몰려오고 계시는군요! 다만 혹시 치열한 전투를 기대하시고 오신 분이 계시다면,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려야겠습니다! 현재 벌어지는 전투는 흥미진진과는 거리가 아주 먼, 오히려 일방적이라고 할 수 있는 전투이니까요!]
해설의 말대로였다.
수많은 시청자들이 고대하던 전투가 벌어지고는 있었으나, 그 기세는 일방적이었다.
[확실히 청인족과 인랑족들의 [종족 특성]인 백검과 백경화, 짐승화가 흥을 돋우어준다고는 해도, 다소 이른 시간에 승리의 여신이 청인족에게 손을 내밀었다는 건 분명합니다!]
[그렇습니다만, 개인적으로는 아쉽네요! 청인족들의 스킬인 백검과 백경화가 뛰어나 보이기는 해도, 인랑족들이 저렇게나 밀릴 건 아닌 것 같은데 말이죠! 구릭토프 참가자의 가혹한 통치가 영향을 미친 걸까요? 사기가 최하이니만큼 짐작은 했지만, 단합이 전혀 안 되는 모습이에요!]
[그에 반해 이강현 참가자의 청인족은 여느 때처럼 용맹한 모습입니다! 노래도 그렇고, 서로가 서로를 아주 잘 북돋아주고 있어요! 바로 이것 덕분에 청인족들이 밀어붙일 수가 있는 거겠죠! 기본적으로 병력의 결속력, 즉 단단함에서 차이가 나니까요! 괜히 이강현 참가자가 이른 공격을 나선 게 아닌 듯합니다!]
와아아아-!
마치 거대한 파도를 보는 것만 같은 푸르고 흰 물결에, 인랑족들이 속수무책으로 나가떨어진다.
“빌어먹을! 자리를 지키란 말이다! 크아아아악!”
가스토가 몇몇 청인족들을 쓰러뜨리며 분전하고는 있었어도, 이미 기울어진 형세를 뒤집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아……. 전황이 급격히 안 좋아지네요! 한시라도 빨리 구릭토프 참가자는 알아차려야 할 텐데, 그는 지금 이강현 참가자와의 전투에 정신이 쏠려 있네요! 심지어 딱히 우세를 점하지도 못하고 있고요!]
[예선에서 압도적인 무력을 보이며 올라온 그이지만, 이강현 참가자가 수비에 치중하자 딱히 손을 쓰지 못하고 있네요! 이 시점에서 저는 이강현 참가자를 칭찬하고 싶습니다! 제약을 하나 더 풀긴 했어도, 정말 대단합니다! 종족의 차이를 훌륭하게 극복해 내고 있어요!]
[아, 인랑족의 병력이 절반도 남지 않게 돼서야 구릭토프 참가자의 눈이 전선을 향하네요! 이어서 붕괴되는 아군 진영을 보고는 표정을 굳힙니다! 빨리 무언가 이 상황을 뒤집기 위한 결단을 내려야 할 텐데요!]
* * *
“커헉……!”
“지, 지배자님! 도움을…… 컥!”
구릭토프의 눈이 쓰러져 가는 백성들에게 향했다.
하나 그가 달리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이런 빌어 처먹을……!”
눈앞의 이강현이, 그를 보내주지 않고 있었기에.
‘고작 제약 한두 개 더 해제했다고, 이 내가 밀어붙이지 못하고 있다고……?’
그가 아는 하등한 인간이라면 절대 불가능할 일이었으나, 이강현은 그걸 해내고 있었다.
도중부터 수비에 치중하기 시작했는데, 그런 놈을 뚫어낼 수가 없었다.
구릭토프의 눈이 조급하게 전선을 훑었다.
이대로 그와 이강현이 호각을 이룬다고 해도, 저 난쟁이들이 백성들을 모두 처리한다면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러자.
‘후일을 도모해야 하나?’
슬며시 이 자리를 벗어나 훗날을 도모해야 하는 게 아니냐는 생각이 들었다.
그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건 그 자신의 안위였지, 백성들이 아니었으니까.
그렇지만 그것도 잠시, 혼자 살아봤자 미션을 이어나가는 데에는 아무 도움이 되지 않을 거라는 걸 깨달았다.
에테르를 벌어줄 백성이 없다면, 그가 이 미션에 발을 붙이고 있는 의미가 없어지므로.
그렇다면 남은 건 하나밖에 없었다.
‘이강현을 죽이고, 이 싸움을 어떻게든 승리로 끌고 간다.’
쿠오오오-
구릭토프가 기운을 아끼지 않고 내뿜었다.
여력을 남기지 않겠다는 듯, 지금까지보다 한층 강해진 기운이었다.
그 사실이 뜻하는 바는 간단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강현을 쓰러뜨리겠다는 것.
그것만이 그가 살길이었고, 그러려면 무리를 해서라도 더 강하게 놈을 밀어붙여야 했다.
“죽여주마!”
구릭토프가 주먹을 내질렀다.
쐐애애액-
어떻게든 이강현을 밀어붙여야 된다는 결정을 내려서일까.
여태껏 날리던 것보다 주먹에 힘이 들어가면서, 자연스레 동작이 커진다.
온 힘을 다하지 않는다면 결코 이강현을 뚫을 수 없겠다는 예감이 든 것이다.
그러나 구릭토프는 알지 못했다.
그의 동작이 커짐으로써, 그의 몸에 여러 개의 ‘틈’이 생겨났다는 걸.
그리고 한참 전부터, 강현이 바로 이 순간만을 기다려왔다는 걸.
정확히는, 놈이 밀리는 전선에 합류하기 위해 무리를 해서라도 자신을 쓰러뜨리려는 지금을 노렸었다.
조급해진 놈이 무리를 한다면.
그래서 자세가 무너진다면.
여명의 눈을 통한 결정적인 역공을 할 수 있을 것이었기에.
‘지금!’
촤라라라라락-
에테르가 떨어졌는지 아르크트의 ‘시동’이 풀려버렸지만, 상관없었다.
후욱!
구릭토프의 주먹을 아슬아슬하게 피한 강현은 역으로 파고들어.
[스킬, 섬광[Lv.4]을 발동합니다.]
푸욱!
그대로 구릭토프의 심장에 검을 박아넣었다.
“크아아악!”
구릭토프가 세상이 떠나가라 비명을 지른다.
“……그러게 무시 좀 작작 했어야지.”
만약 처음 자신이 침투했을 때 구릭토프가 자신의 의도를 파악하고 청인족들을 막아섰다면, 이번 전투는 이것보다 몇 배는 힘들어졌을 터였다.
하지만 구릭토프는 자신을 굴러들어온 떡 정도로 여겼고, 그 판단이 인랑족을 대패로 이끌었다.
“……뭐, 이미 다 끝난 일이다만.”
그렇게 중얼거린 강현은 그의 심장에서 검을 뽑아.
휘익-
가볍게 휘둘렀다.
서걱-
구릭토프의 머리가, 허공으로 치솟았다.
* * *
[이강현 참가자! 참을성 있게 기다린 끝에, 결국 구릭토프 참가자를 쓰러뜨립니다!]
[예! 멋진 노림수였…… 말씀드리는 순간, 끝까지 버티던 가스토도 쓰러집니다! 자신들의 지배자와 영웅을 모두 잃은 인랑족들이 도망치기 시작하네요! 청인족들이 승리를 거머쥐는 모습입니다!]
[예, 이강현 참가자, 이걸로 나머지 참가자들과의 차이를 더욱 벌리네요! 앞으로 얼마나 더 앞서나갈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이것만은 확실합니다. 대륙 통일이 아닌 다른 차원을 공략한다는 이강현 참가자 전략이, 이번에도 제대로 먹혔다는 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