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장 본선 스튜디오
‘문’ 안으로 들어간 강현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눈을 뜨기 힘들 만큼의 새하얀 빛들이었다.
파파파파파팟-
십수 개의 빛이 동시에 터졌다 사그라들기를 반복한다.
빛 하나하나가 어찌나 강렬한지, 주변이 제대로 보이지도 않을 지경이었다.
그 빛에, 강현은 눈을 미세하게 찌푸렸다.
마음 같아서는 잔뜩 찌푸리고 싶었으나, 그래서는 안 된다는 직감이 들었다.
그도 그럴 게, 그는 저 빛들이 뭔지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웬 카메라들이…….’
리얼을 하면서 수없이 접했던, 카메라의 플래시였다.
그리고 플래시 앞에서 얼굴을 구기는 것은, 적어도 지구에서는 그리 추천되지 않는 행동이었다.
더 비욘드에서도 추천되지 않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강현은 그의 경험을 따라 얼굴을 구기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때였다.
[‘붉은 악마’ 참가자가 서브 미션을 마쳤군요! 아니, 다시 소개해야겠군요. 제3 군소차원의 인간종 출신, 이강현 참가자가 전체 3위를 달성하며 당당히 10층으로 올라섰습니다. 모두 환영해 주시길 바랍니다!]
로독의 명랑한 목소리와 비슷하면서도 다른 외침이 들려왔다.
그러자 플래시를 터뜨려대던 자들이 손뼉이라도 치는지, 플래시가 멎음과 동시에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
강현은 플래시가 잠잠해진 틈을 타 그제야 주변을 둘러볼 수 있었다.
샹들리에와 화려한 조명 아래 기다란 테이블들이 줄지어 있었고, 바로 앞에 길게 깔린 레드카펫이 눈에 들어왔다.
레드카펫은 한참을 더 나아가 무대로 보이는 곳에까지 이르러 있었는데, 신기하게도 무슨 조화인지 무대의 위는 그림자로 덮이기라도 한 것처럼 보이지가 않았다.
‘여기가 본선의 스튜디오인 건가?’
새하얀 공간에 우뚝 기둥이 솟아 있을 뿐이던 DBC의 스튜디오와 대비되는 고급스러운 분위기였다.
거기에 귓가에는 경쾌한 클래식 음악이 들려오기까지 했으니, 얼핏 보면 지구의 파티에 왔다고 생각될 정도였다.
“…….”
강현은 기분이 묘해지는 것을 느꼈다.
방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어둡고 피 냄새가 흩날리는 얼음성채에서 요괴들과 목숨을 건 사투를 벌였던 그였다.
한데 10층에 올라오자마자 이런 정반대의 광경을 마주하다니.
적응이 잘 되지 않았다.
예선에서도 미션을 마치고 스튜디오로 돌아왔을 때 종종 느끼던 기분이긴 했으나, 이번에는 특히 더 그러했다.
-방금 전까지 전쟁터에 있어서 그런가, 뭔가 찝찝하긴 하다만 10층에 오니 확실히 살 것 같군. ‘격’이 상당히 높은 공간이다.
찜찜한 기색으로 말하는 걸 보아, 엔딜 펠란도 적응이 안 되기는 매한가지인 듯했다.
그렇게 레드카펫이 이끄는 대로 무대를 향해 걸어가는데.
파팟- 팟-
박수가 잦아들면서, 다시금 플래시가 드문드문 터지기 시작한다.
플래시가 어디서 터지는지 유심히 바라본 결과, 강현은 플래시가 어둠에 가려져 있는 무대에서 터지는 중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카메라로 찍어대는 놈들도 저기 있나 본데.’
무대에 올라서면 카메라를 누가 들고 있는지도 알 수 있을 듯했다.
그런 생각을 하며 계단을 올라 무대로 진입한 그는 볼 수 있었다.
“……!”
어둠이 걷히면서 드러난 넓디넓은 무대와, 그 무대의 한가운데에 우두커니 서 있는 인영을.
* * *
인영은 정중한 신사가 연상되는 깔끔한 정장을 입고 있었는데, 달걀 귀신을 보는 듯한 새하얀 가면을 쓰고 있었기에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그저 건장한 체격을 통해 남자라는 것만 짐작할 수 있을 따름이었다.
[환영합니다, 이강현 참가자. 저는 이번 더 비욘드 본선의 진행자를 맡은 엘사드라고 합니다. 편하게 엘이라고 불러주시면 되겠습니다.]
자신을 ‘엘’이라 소개한 인영이 담담하게 말을 건네왔다.
로독처럼 마이크를 들고 소리를 지르는 것도 것도 아닌데, 목소리가 무대 전체에 울려 퍼졌다.
[설마 했는데 서브 미션을 세 번째로 통과하시다니……. 마음 같아서는 따로 길게 이야기라도 나누고 싶지만, 안타깝게도 방송국들이 있는 이상 다음을 기약해야 할 것 같군요.]
엘이 손가락을 들어 위를 가리켰다.
그 손가락을 따라 위를 본 강현은 그제야 볼 수 있었다.
지이잉-
허공에 떠올라 있는 큼지막한 직사각형의 화면 수십 개를.
팟- 파팟-
화면에서 드문드문 플래시가 터지는 걸 보니, 아무래도 플래시를 터뜨린 건 저 화면들인 듯했다.
‘저 화면들은 뭐지? 기자인가?’
강현이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을 때였다.
[저 화면들이 궁금하신 모양이군요. 다음 참가자가 오기까지는 아직 시간이 남아 있는 듯하니, 간단하게 설명을 드려보도록 할까요.]
엘이 차분하게 말했다.
[짐작하셨을는지는 모르겠지만, 예선과는 다르게 더 비욘드 본선을 주최하는 건 일개 방송국이 아닙니다. 더 비욘드는 그저 더 비욘드일 뿐이니까요.]
“……?”
[따라서 더 비욘드의 주최 측만으로는 본선을 중계할 수 없기에, 예선을 중계하던 방송국들을 불러 중계를 분담하게 한 거라고 보시면 됩니다. 저 방송국들이 찍은 장면들은 저희의 검수를 거쳐, 그들의 방송국과 <초월자>들의 커뮤니티인 디멘션넷에 퍼져 나갈 예정입니다.]
“아.”
강현은 엘의 말을 이해했다.
더 비욘드의 인간종 예선을 방송국인 DBC에서 주관하던 것과는 달리, 본선의 주최는 방송국이 아니라는 말이었다.
그렇지만 경연은 진행해야 하니 방송국들을 불렀다는 거고.
즉, 저 화면들을 방송국들의 카메라로 보면 될 것 같았다.
‘DBC도 있으려나.’
강현이 화면들을 올려다보던 때였다.
<네 번째 참가자가 입장합니다.>
지잉-
눈앞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아, 이제 네 번째 참가자가 서브 미션을 마쳤군요. 그럼,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다시 뵙겠습니다. 대기실에서 잠깐 기다려 주시길. 지금부터 9층까지의 시간을 가속시킬 테니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겁니다.]
엘이 손가락을 튕겼다.
딱.
그러자 빛이 삽시간에 강현을 휘감았고.
슈와아아-
[참가자 이강현 확인, 대기실로 이동합니다.]
다음 순간, 강현은 자신이 대기실로 보이는 곳으로 이동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런데 그냥 대기실이 아니었다.
중앙에 위치한 큼직한 화면에 엘의 모습이 내려다보이는 가운데, 그 뒤로 수십 개의 의자가 자리해 있던 것이다.
그것도 그냥 의자도 아니고, 피라미드를 보듯 층층이 나누어진 의자였다.
그리고 맨 아래에 99가 적혀 있는 걸 시작으로 숫자들은 순차적으로 올라가, 피라미드 꼭대기에는 1이 적힌 화려한 왕좌가 위치해 있었다.
1의 아래 칸에는 2와 3이, 그 아래 칸에는 4, 5, 6이 적혀 있는 걸로 보아 먼저 서브 미션을 통과한 참가자들은 그 순서대로 의자에 앉아서 다른 참가자들을 관전할 수 있게 해주는 듯했다.
[3번 좌석에 착석해 주십시오.]
터벅-
강현은 3이 적힌 좌석으로 이동했다.
위로는 1, 바로 옆으로는 2가 적힌 좌석이 있었기에, 좌석에 도달한 그는 1등과 2등 참가자를 확인할 수 있었다.
[라크리셀 셀라토리온, 1위]
1위인 라크리셀 셀라토리온은 고귀함이 느껴지는 은발의 미청년이었는데, 무료하기라도 한지 턱걸이에 턱을 괴고 앉아 있었다.
실제로 강현이 오는 걸 봤음에도 힐끔 그를 쳐다봤을 뿐,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바이토넬, 2위]
반면 2위인 바이토넬은 새까만 머리를 한 활기차 보이는 미소년이었다.
그 역시 강현에게 딱히 말을 걸거나 한 건 아니었으나, 그를 보고 흥미롭다는 듯 눈을 빛냈다.
여기서 신기한 점은, 둘 다 인간과 다를 바 없는 외양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뭐지?’
본선에 진출한 만큼 인간과는 전혀 다른 종족들이 있을 거라 여겼는데, 1, 2위의 생김새는 예선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였다.
그 사실에 강현이 의아해하고 있는데.
-용과 악마군.
돌연, 엔딜 펠란이 놀라운 말을 해오는 게 아닌가.
‘예? 용과 악마요? 저 둘이 말입니까?’
그 말에 강현이 급히 되물었다.
-그래. 용 특유의 도마뱀 냄새가 저 은발한테서 난다. 아직 해츨링인 것 같긴 하다만…… 용은 용이지. 그리고 악마는…… 설명하긴 귀찮군. 아무튼 악마라는 것만 알아두면 된다.
‘아…… 예.’
강현은 엔딜 펠란이 설명을 하다가 말자 떨떠름하게 답했다.
강현의 어조를 느낀 엔딜 펠란이 발끈했다.
-네놈, 설마 이 몸이 악마를 알아보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진 않겠지?
‘그건…… 그렇죠.’
강현은 고개를 미약하게 끄덕였다.
설명하기 귀찮아하는 듯했지만, 엔딜 펠란은 <초월>의 경지에 올라 있던 대악마다.
같은 악마를 못 알아볼 리가 없었다.
‘……용과 악마면 상위 종족입니까?’
-당연하지. 더 비욘드 전체를 통틀어도, 아니, 더 비욘드가 아닌 전체 차원을 대상으로 해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최상위종일 거다.
‘최상위종이라…….’
강현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1위와 2위를 쳐다보았다.
처음에도 신기하게 보기는 했지만, 엔딜 펠란의 말을 듣고 보니 또 달리 보이는 기분이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인간과 다를 게 없는 저들이 최상위 종족인 용과 악마라니.
그때, 화면에 변화가 생겼다.
지잉-
4위로 추정되는 참가자가 무대에 올라선 것이다.
[아륵크락타크, 4위]
“……음?”
4위 참가자를 본 강현은 눈을 크게 떴다.
그도 그럴 게, 시퍼런 점액이 둥글게 뭉친 것만 같은 생물이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얼굴도 없는 듯했기에 얼핏 보기에는 풍선이 떠다니는 걸로 보였는데, 그 크기가 웬만한 사람보다 훨씬 커서인지 기괴하기 그지없었다.
‘저건 무슨 종족입니까?’
-모른다.
묻자마자 엔딜 펠란이 답했다.
한 번쯤 기억을 뒤져보는 척이라도 할 법한데, 그러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그래도 식견이 있으시지 않습니까?’
-모른다고 하지 않았느냐. 굳이 종족을 따지자면…… 외계 종이나 되겠지.
그런 말을 주고받는 사이, 엘과의 인터뷰(?)를 마친 4위 참가자가 대기실에 나타났다.
그러더니 둥둥거리며 강현과 악마의 밑 칸에 자리했다.
‘으.’
화면에서는 느끼지 못했던 은은한 비린내에 강현은 얼굴을 구겼다.
완전히 처음 보는 괴생명체가 참가자랍시고 등장하자, 이제야 이곳이 더 비욘드라는 게 실감됐다.
[그락크, 5위]
5위는 강현이 아는 오크보다 머리 두 개는 더 큰 우락부락한 오크였고, 그를 시작으로 나머지 참가자들이 줄지어 도착하기 시작했다.
6위, 7위, 8위…….
한 참가자를 보내면 곧바로 다음 참가자가 오는 상황이 이어졌다.
그걸 본 강현은 각기 다른 시험을 보고 있을 참가자들이 어떻게 다닥다닥 도착하나 싶었으나.
‘아, 맞다.’
이내 조금 전 엘이 했던 말을 기억해 냈다.
‘시간을 가속한다고 했었나.’
무슨 수를 쓴 건지는 몰라도, 시험을 보고 있는 참가자들의 시간을 조정하면서 불러들이는 듯했다.
그게 아니라면 설명이 되질 않았다.
그렇게 잠시, 다른 종족으로 이루어진 참가자들이 무대 위에 올라왔다 대기실로 이동하기를 반복했다.
[오색조, 10위]
-환상 종이군. 전설 속에 나오는 동물이라고 보면 된다.
[비월, 13위]
-요괴 신선이다. 요괴의 ‘격’이 일정 단계에 이르면 도달하는 경지 중 하나다.
[시르드, 33위]
-저건 엘프 중 귀족이라 불리는 하이엘프고…….
…….
그렇게 강현은 엔딜 펠란의 설명을 들으며 참가자들을 구경했고.
[알렉시스 찬드라스, 35위]
[레이센 란, 43위]
…….
[남궁강룡, 51위]
[사도천, 54위]
…….
[세르반테, 64위]
[이현, 77위]
…….
중간중간 반가운 얼굴들도 볼 수 있었다.
순위는 비교적 낮았어도, 인간종 참가자들은 한 명도 떨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가리우투, 97위]
거대한 전갈인 97등 참가자를 끝으로 모든 참가자가 자리에 착석한 순간이었다.
파앗-
[참가자 여러분, 더 비욘드의 본선에 오신 것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더 비욘드의 진행자, 엘이 화면 앞에 나타났고.
[사실 여러분들을 처음 모신 만큼, 해야 할 말이 참 많습니다. 저희의 각오, 앞으로의 일정, 최종적으로 남게 될 참가자의 숫자…….]
“…….”
[하지만 그 모든 것보다 우선되어야 할 것은, 언제나 미션이겠지요.]
그렇게 말하며, 엘은 담담하게 팔을 휘저었다.
[지금부터, 곧 진행될 첫 번째 미션에 대해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메시지부터 먼저 보시죠.]
팟-
[미션]
-주제 : 전략, 확장, 대립
-내용 : ‘더 비욘드’의 본선, 그 첫 번째 무대입니다.
<초월자>는 무력과 ‘격’을 단련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자신의 차원을 다스리는 방법을 아는 것 또한 중요합니다. 참가자들은 첫 번째 미션을 통해 차원을 다스리는 게 어떤 의미인지 그 희로애락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무작위로 선택된 참가자만의 종족을 성장시켜 마지막까지 그들을 이끄세요.
-성공 시 : 다음 미션 진출
-실패 시 : 탈락
갑작스러운 미션 메시지에 참가자들이 웅성거리는 가운데, 엘이 담담하게 선언했다.
[이번 미션의 이름은, ‘모의차원전쟁’입니다.]
“---!”
참가자들이 술렁였다.
모의차원전쟁.
아직 제대로 된 설명이 나온 건 아니나, 확실히 이름만 봤을 때는 본선에 걸맞은 미션으로 보였다.
하나, 참가자들이 술렁이는 건 단지 그 때문만은 아니었다.
“빌어먹을. 전사는 쉬는 시간이 필요하다! 피로를 날릴 틈도 없이 바로 다음 미션을 한다니!”
“u……. a…….”
강현의 밑에 앉은 오크가 고함을 내질렀고, 그에 동조하듯 푸른 풍선이 괴상한 소리를 낸다.
비단 그들만이 아니라, 그 밑 순위의 참가자들도 한두 마디씩 불평불만을 내뱉는 중이었다.
그들을 따라 소리를 지르거나 하지는 않았으나, 강현도 비슷한 생각이었다.
‘이럴 거면 균형의 섬 입주권은 왜 준 거야?’
지난번 인간종 진출자들이 참석하는 연회에서, 그는 로독에게 ‘???의 나무토막’과 함께 균형의 섬의 오행 중 토(土)의 구역에서 살 수 있는 목걸이를 받았었다.
한데 서브 미션이 끝나자마자 본 미션에 투입한다니.
서브 미션도 말이 서브 미션이지, 무려 아홉 개씩이나 되는 시험을 봐야 됐던 걸 감안하면 이렇게 일정이 빡빡할 수가 없었다.
“…….”
하지만 참가자들이 그러거나 말거나 엘은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참가자들을 응시할 뿐이었다.
조용히 하지 않는다면 다음 설명을 해주지 않겠다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 엘의 기세를 느껴서일까.
참가자들은 서서히 진정되어 갔다.
“크흠…….”
“음, 잠시 흥분했군.”
…….
그럴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초월>을 원하는 건 참가자들이요, 그 <초월>을 시켜주는 건 더 비욘드였다.
엄밀히 따지면 참가자들이 아닌, 더 비욘드가 갑의 위치에 있는 것이다.
그러니 그들의 말에 따르는 것 외에는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강현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감수해야 되는 일이지.’
더 비욘드는 아이돌이나 가수를 뽑는 경연이 아니다.
종족의 한계를 뛰어넘어, 해당 차원을 지배하고 군림하는 <초월자>를 만드는 경연이었다.
-흐흐, 짜증 날 만도 할 텐데 제법 수용적인 자세군.
‘원래 아쉬운 쪽의 허리가 더 굽어지는 법 아니겠습니까. 어쩔 수 없죠.’
다소 피곤하긴 했다만, 못할 것도 아니었다.
다른 참가자들도 그걸 자각했는지, 이윽고 대기실에 정적이 맴돌았다.
[불평이 있으신 걸로 압니다. 필시 참가자분들의 예상보다는 힘든 일정일 테니까요.]
엘의 말이 천천히 울려 퍼졌다.
[그렇지만 언제까지나 같은 템포로 경연을 진행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그래도 이건 알려드리고 싶군요. 이번 미션이 끝난다면, 그 이후의 미션부터는 여유롭게 진행할 예정입니다.]
저렇게까지 말하는데 더 할 말이 있을 턱이 없었다.
[그럼 자세한 설명에 들어가기 전에, 대략적인 미션의 개요를 보여드리도록 하죠.]
엘이 부드럽게 손을 휘젓자 뒤편의 화면에 영상이 떠올랐다.
팟-
그곳은 드넓은 대륙이었다.
숲과 강, 평야와 산이 고루 섞인 대륙.
지형지물을 구경하는데, 화면이 비추어주는 대륙에 꼬물거리는 무언가가 생겨나는 게 눈에 들어왔다.
‘저건…….’
고블린으로 보이는 종족이 대륙에 등장한 것이다.
고블린들은 착실히 뭉쳐, 마치 인간의 중세를 보듯 발전해 나가기 시작했다.
[많은 종족이 있지만, 예시를 위해 참가자들에게 가장 익숙할 아인종(亞人種)을 보여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고블린들이 대륙을 일구면서, 여러 장면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들이 곡식을 재배하고, 군대를 꾸려 근처의 야만인을 물리치는 장면.
여러 고블린 왕국이 충돌한 끝에 통일제국의 황제가 탄생하고, 오러와 마법을 부리기까지.
그때였다.
돌연, 대륙 중앙에 거대한 ‘구멍’이 뚫리기 시작한 것은.
“……!”
‘구멍’에서 쏟아져 나온 건 수천 마리의 오크들이었다.
오크들에 맞서 고블린들은 평야에 결집하여 치열하게 맞서 싸워 나갔다.
그들에게서 흘러나온 피가 평야를 적시고 고함이 진동했다.
칼과 화살, 오러가 난무했고, 마법의 폭풍이 전장을 휩쓸었다.
이어서 화면이 수십 개로 분할되면서, 오크와 고블린이 싸우는 것처럼 전투를 벌이고 있는 수십 개의 종족들을 비추었다.
갑각 종과 환상 종이, 천사 종과 악마 종이, 용 종과 신비 종이…….
강현은 저도 모르게 자신이 빨려 들어가듯 집중하고 있다는 걸 느꼈다.
그 정도로 눈앞의 화면은 강렬했으며, 생생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스아아아-
종족들의 전투를 비추던 화면이 점차 멀어져 가며 줌 아웃(zoom out)되어갔다.
대륙들이 쥐꼬리만 해지고, 행성마저 조그맣게 되어 반짝이는 은하의 전경이 눈에 들어온 순간이었다.
화아아악!
눈을 뜨기 힘들 정도의 빛이 화면에서 터져 나오는 걸 끝으로.
고오오…….
어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짙은 어둠만이 남았다.
[더 비욘드 측에서 설정한 공간 속에서 하나의 종족이 겪는 생로병사, 이것이 모의차원전쟁입니다.]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그저.
“와…….”
“저런 규모라니…….”
참가자들의 감탄사만이 나직이 들려왔을 뿐.
강현은 그 이유를 잘 알고 있었다.
그 역시도 아직까지 화면이 주던 여운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으니까.
오직 한 명.
[그락크, 5위]
“……빌어먹을 놈들, 꼭 저딴 것에만 오크를 갖다 붙이지.”
오크 참가자인 그락크만이 굵은 목소리로 퉁명스럽게 내뱉을 따름이었다.
물론 그조차도 나직이 말했기에, 근처를 제외하고는 들리지 않았다.
[미션이 시작되면, 참가자들은 본인의 종족과 흡사한 종족을 다스리게 됩니다. 자연히 [종족 특성] 또한 참가자와 비슷할 것이나, 각 종족의 ‘격’을 고려한 형평성은 갖추었습니다. 그러니 [종족 특성]에 따른 특정 종족의 우위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참가자들은 그 종족들에게서, 혹은 근처의 군소종족들에게서 에테르를 얻을 수 있으며, 그 에테르를 통해 차원을 발전시킬 수 있습니다.]
-일종의 세금이라고 보면 될 거다.
엔딜 펠란이 덧붙였다.
‘돈이라고 봐도 된다는 겁니까?’
-엄밀히 따진다면 다르지만……. 이 자리에서 대충 이해하기에는 무리가 없을 것 같군.
앤딜 펠란과 대화를 나누는 와중에도 엘의 말은 계속됐다.
[일정 이상 차원이 성장하게 되면 근처에 있는 타 참가자들과의 게이트를 열 수 있게 되며, 마찬가지로 그들과의 협력, 또는 전쟁으로 영토와 에테르를 늘릴 수 있습니다.]
[그렇게 최후의 1인이 되는 그 순간까지 자신의 차원과 종족을 발전시키는 것. 그리고 그 과정에서 각 참가자들이 내보이는 <초월자>로서의 자질. 그게 이번 모의차원전쟁의 주안점이 될 것입니다.]
거기까지 들은 강현은 깨달았다.
여태까지 했던 미션들과는 달리, 이번 미션은…….
‘개인의 무력을 중점적으로 보는 게 아니군.’
개인의 무력보다는, 한 차원의 지배자로서의 종합적인 능력을 측정할 거라는 걸.
[짐작하셨겠지만, 모의차원전쟁은 참가자의 다양한 자질을 평가합니다. 굳이 모의차원전쟁을 첫 번째 미션으로 선택한 이유는, 이미 예선과 서브 미션을 거치며 참가자들의 무력은 대강 측정이 완료되었다고 판단되는 반면 다른 자질은 그렇지 않다고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초월자>가 되려면 틀림없이 무력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적어도 무력만큼, 어쩌면 그 이상으로 중요한 자질들도 존재합니다. 그리고 <초월자>의 자질이 없는 상태에서 <초월>을 해봐야, 얼마 지나지 않아 자멸하거나 다른 <초월자>들의 먹잇감이 될 뿐이죠.]
[참가자들은 모의차원전쟁을 통해, <초월자>로서의 자질을 본격적으로 다져 나가게 될 것입니다.]
말을 마친 엘은 잠시 받아들일 시간을 주려는 건지, 가만히 참가자들을 응시했다.
‘일종의 제왕학인가.’
이상적인 왕을 만들고자 어려서부터 왕자에게 제왕학을 가르치는 것처럼, 이상적인 <초월자>를 만들기 위해 모의차원전쟁을 미션으로 내건 걸로 보였다.
‘형식은…… 영지전이라고 보면 되나.’
-그것과는 다르다.
엔딜 펠란이 말했다.
‘예?’
-네놈이 알는지는 모르겠다만, 쥐꼬리만 하다고는 해도 차원은 차원이다. 하나의 차원을 완전히 컨트롤하는 건 개인으로서는 불가능하다 볼 수 있지. 괜히 대부분의 <초월자>들이 방관하면서 에테르만 받아먹는 게 아니다.
‘<초월자>들이 방관한다는 건 몰랐지만…… 확실히 그건 그렇겠네요.’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마을 하나도 아니고, 차원 전체의 행정을 혼자 할 수는 없을 터였다.
-아마 극 초반을 제외한다면 네놈이 건드리지 않아도 알아서 잘 돌아갈 거다. 신경 써야 할 건 그게 아니라는 말이지.
‘그럼…….’
-지배자로서 내리는 판단의 방향을 보겠다는 거겠지. 그러니 자잘한 건 버리고 대국적으로 전략을 세울 필요가 있다. 재미있는 걸 만들었군.
‘……!’
그 말을 들은 강현은 직감했다.
엔딜 펠란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는 시작부터 웬만한 참가자들보다 한 발짝 앞서나가는 것일 터였다.
다른 참가자들은 아직 깨닫지 못했을 미션의 팁을 시작도 하기 전에 알고 들어가는 셈이었으니 말이다.
[지형은 각 종족에 최적화된 지형이 제공될 것이며, 미션이 시작됨과 함께 참가자들의 힘은 일정 부분 제약받게 됩니다. 이 제약은 차후 에테르를 모아 풀어나갈 수 있습니다.]
[참가자가 사망하거나 차원의 핵이 파괴된다면 탈락하게 되며, 최후의 1인 또는 최후의 동맹 세력이 남게 된다면 미션은 종료됩니다. 미션이 종료된 후에는 누적 에테르와 시청자들의 투표를 합산하여 순위를 매길 것이며, 생존자는…….]
엘이 말을 잠깐 끊었다가 이어나갔다.
[48명입니다. 현재 97명의 참가자가 있으니, 49명은 탈락하게 되겠습니다.]
49명.
분명 대다수 참가자들의 예상보다 훨씬 많이 떨어뜨리는 것이었겠으나, 의외로 동요는 일어나지 않았다.
미션이 코앞까지 닥침에 따른 묘한 긴장감만이 감돌 뿐이었다.
딱!
엘이 손가락을 튕기자 익숙한 흰 빛이 대기실을 덮어갔다.
슈와아아-
[아, ‘순위 확인’이라 말하면 전체 순위를 볼 수 있을 겁니다. 또 서브 미션의 최종 보상이 지급될 예정입니다. 미션에 진입한 이후 수령할 수 있을 터이니 참고해 주시길 바랍니다.]
대기실 곳곳에서 ‘순위 확인’이라는 단어가 들려왔다.
강현도 순위를 불러냈다.
1위 라크리셀 셀라토리온
2위 바이토넬
3위 이강현
4위 아륵크락타크
5위 그락크
…….
그러고 있는데.
“이런 미친! 말도 안 돼!”
“……?”
저 아래서부터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강현은 안력을 끌어올려 목소리의 주인을 확인했고…….
“음?”
[사도천, 54위]
저 아래, 허공을 바라보며 부들부들 떨고 있는 사도천의 뒷모습을 볼 수 있었다.
고개가 상단을 보고 있는 걸로 보아 최상위권 참가자의 이름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부, 붉은 악마님이 이강현이었다고?”
“큭……!”
사도천의 혼잣말을 들은 강현은 하마터면 폭소를 터뜨릴 뻔했다.
‘설마…… 사령술사가 진짜 사도천이었다고?’
악마한테 그런 저자세로 나오던 게 사도천이었다니.
그 어이없을 정도의 반전된 모습에 강현은 피식 웃고 말았다.
그리고 그것도 잠시.
슈와아아아-
이내 빛이 대기실을 가득 덮으면서.
[중계는 제가 아닌 타 방송국의 중계인이 진행할 것입니다. 자, 이걸로 긴 설명이 모두 끝났군요. 바로 미션에 돌입하겠습니다. 제가 말씀드리지 않는 것들은 직접 미션을 하며 알아가 주시길…….]
본선의 첫 번째 미션이 시작되었다.
* * *
[참가자 이강현 확인, 제28 특별 차원계로 이동합니다.]
[제28-3 대륙 활성화 중…….]
[제28-3 대륙 활성화 완료.]
[근방 차원 배치 중…….]
[근방 차원 배치 완료.]
[종족 설정 중…….]
[참가자 이강현이 이끌 종족은 청인(靑人)족입니다. 건투를 빕니다.]
슈와아아-
정신을 차린 강현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좀 작긴 해도, 중세 유럽의 외진 마을을 연상케 하는 건물들이 몇 개 보였고…….
“음……?”
강현은 저도 모르게 뒤로 살짝 물러났다.
그도 그럴 게.
“지배자이시여! 기다렸나이다!”
“지배자이시여-!”
…….
그를 빙 둘러싼 수십 명의 인간들을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보통의 인간과는 다른 점이 존재했다.
‘피부가 파랗고…… 키가 작네.’
파란 페인트로 칠하기라도 한 듯 온몸이 시퍼렜을뿐더러, 마치 난쟁이를 보는 것처럼 하나같이 키가 작았다.
어림잡아 90㎝ 정도였고, 아무리 커봤자 100㎝를 넘지 않아 보였다.
‘이게 청인족인가.’
아무래도 이번 미션에서 이 꼬마들을 이끌어야 하는 듯했다.
다만 키는 작아도.
반짝-
강현을 보는 눈빛이 어찌나 반짝이는지, 청인들 개개인의 존재감은 결코 작지 않았다.
[‘차원 상태창’을 말하여 차원의 상태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차원 상태창.”
이름 : 이강현
차원 : 제28-3 차원
차원 등급 : F
종족 : 청인족
종족 특성 : 발현(열화)
인구 : 1,000
보유 에테르 : 0
…….
[최초 1회에 한정하여, 종족의 <영웅>을 만들 수 있습니다. 지금 만드시겠습니까? (Yes/No)]
[최초 1회에 한정하여, 청인족의 [종족 특성]을 강화할 수 있습니다. 지금 강화하시겠습니까? (Yes/No)]
[최초 1회에 한정하여…….]
…….
‘뭐 이리 할 게 많아?’
안내 메시지를 보자 머리가 아득해지는 기분이었다.
강현이 무엇부터 해야 하나 살피려는데.
팟-
[순위에 따른 보상의 정산을 완료했습니다.]
[보상을 지금 수령하시겠습니까? (Yes/No)]
메시지가 나타났다.
그러고 보니, 서브 미션 보상은 미션에 진입하고 지급될 예정이라고 했었다.
‘보상부터 받아야겠군.’
할 일이 많긴 했어도, 역시 가장 우선시돼야 할 건 보상이었다.
강현은 손을 움직여 Yes를 눌렀다.
[‘낡은 ???의 갑옷’을 획득합니다.]
낡은 ???의 갑옷
-<초월자> ???가 소지했던 갑옷입니다. 현재는 낡고 녹슬어 제 기능을 잃었으나, 뛰어난 장인을 찾아간다면 수리할 수 있을 것입니다.
“흠…….”
강현은 의아한 기색으로 허공에서 튀어나온 갑옷을 바라보았다.
서브 미션 최종 보상치고는 그리 뛰어나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그때였다.
-네, 네놈, 그 갑옷은……?
느닷없이, 엔딜 펠란에게서 경악성이 튀어나온 것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