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 균형의 탑
팟-
정신을 차린 강현은 조금 전의 어둠을 벗어났다는 걸 알게 되었다.
여전히 혼자이기는 했어도, 고급스러운 호텔 객실 같은 곳이 눈에 들어온 것이다.
더 비욘드에서 중세풍 방도 아니고 호텔 객실을 주다니.
의아해하고 있는데, 메시지가 나타났다.
[붉은 악마님, 균형의 탑의 대기실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각 참가자가 생각하는, 최대한의 편안함을 느낄 수 있는 휴식 환경이 대기실로 발현됩니다.]
“아.”
요컨대 강현의 무의식에서 이 객실을 가장 편안하게 여겼다는 말로 보였다.
[현 시간부터 균형의 탑 1층부터 9층까지, 매 층을 오르기 위한 행위를 ‘시험’이라 명명합니다.]
[시험을 통해 참가자들은 더 비욘드의 본선에서 필요한 소양들을 확인하고 기르게 됩니다.]
[대기실에서는 휴식과 치유가 이루어지며, 하나의 시험을 통과한 참가자들은 다음 시험이 시작되기 전까지 대기실에 머무르게 됩니다.]
[시험이 진행되는 동안 타 참가자들과 만날 수는 없지만, 메시지로 대화를 나눌 수는 있습니다.]
[메시지 기능은 두 번째 시험이 끝난 뒤 개방됩니다.]
[잠시 후, 첫 번째 시험이 시작됩니다.]
[첫 번째 시험의 주제는 ‘측정’입니다.]
[첫 번째 시험까지 남은 시간 : 0시간 30분]
메시지가 끝났다.
메시지를 꼼꼼하게 읽어내린 강현은 이 같은 상황을 미리 언질해 주었던 로독에게 다시금 감사를 표했다.
‘이상한 게 나와도 당황하지 말라고 했었지. 딱 이상한 게 나왔네.’
느닷없이 시험을 본다니.
만약 로독이 언질해 주지 않았더라면, 이 뜬금없는 서브 미션에 대한 쓸데없는 고찰을 하고 있었을지도 몰랐지만.
로독 덕분에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그건 그렇고 메시지 기능?’
강현은 ‘메시지 기능’이라 적힌 부분을 주목했다.
역시 다른 참가자들과는 만나지 않는 모양이었다.
웬 칭호를 정하라는 데에서 짐작한 거긴 했다.
아무리 이름이 붉은 악마여도, 빛을 흩뿌리는 걸 타 참가자에게 보이면 바로 들통날 터였다.
‘칭호와 점수로 종족에 대한 편견을 없애겠다는 건가.’
즉, 서브 미션을 하는 동안에는 혼자라는 소리였다.
-네놈은 혼자 덩그러니 있다고 느낄 수도 있겠다만, 본선을 관장하는 놈들은 분명 네놈의 일거수일투족을 빠짐없이 보고 있을 거다. 알고 있겠지?
‘당연하죠.’
그는 소환되는 순간부터 자신의 행동을 언제나 더 비욘드에서 보고 있다고 상정했다.
아니, 벌레들의 ‘침략’이 끝나자마자 로독이 자신을 데리러 왔던 걸 보면, 어쩌면 그들은 지구에서의 그까지 지켜보고 있을지도 모른다.
소환된 이후로 엔딜 펠란과 머리로 대화를 나누는 것도 그걸 생각해서였다.
‘보는 걸 넘어서 아예 중계까지 하고 있을지도.’
강현은 고개를 흔들어 상념을 털어냈다.
궁금하긴 했어도, 시험까지 한 시간이 채 남지 않은 지금 생각할 건 아니었다.
‘이 시험에 대해 뭔가 알고 있는 거 없습니까?’
수수께끼의 검을 내려다보며 강현이 물었다.
엔딜 펠란은 처음부터 더 비욘드를 알고 있었다.
그라면 혹시 이 시험의 의미를 파악하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물어본 것이었다.
-모른다.
‘쩝.’
단호한 대답에 강현이 아쉬움을 삼키려는데.
-물론, 짚이는 건 있지만.
역시, 대악마는 대악마였다.
-네놈들을 평가하는 거지. 그러니까…… 일종의 예선에서 했었던 등급 평가라고 보면 될 거다. 겸사겸사 네놈들의 수준도 한 번 보고.
‘등급 평가라…….’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다만 엔딜 펠란의 말대로 이 서브 미션의 의도가 참가자들의 등급을 평가하기 위해서라면, 경쟁이 상당히 치열할 것 같았다.
높은 등급을 받을수록 시청자들의 관심은 몰린다.
시청자들에게 투표권이 있는 이상 높은 등급을 받아서 나쁠 게 없었다.
게다가 층을 올라갈 때마다 보상도 주는 걸로 보였고.
다른 참가자들과 만나든 만나지 못하든 간에, 모두가 죽어라 하지 않을까.
‘박 터지겠네.’
그런 예상을 했을 때였다.
-흠……. 글쎄. 다른 참가자들은 기본적으로 이 서브 미션이 등급 평가라는 것도 모르겠지만, 설령 그걸 눈치챈다고 해도 열심히 하는 종족은 별로 없을 거다.
엔딜 펠란이 그의 예상을 부정했다.
‘왜 그렇습니까? 보상도 준다는데.’
-인간의 잣대로 다른 종족을 판단하지 마라. 인간의 잣대로 그들의 성향을 잴 수 없기에 그들은 인간이 아닌 것이니 말이다.
‘…….’
-뭐, 다른 놈들이 열심히 하지 않는 건 오히려 네놈에게 좋은 일이라고 생각되는군. 시험의 내용이 무엇일지는 모르겠다만, 열심히 해서 손해 볼 건 없을 거다.
깔끔하게 결론을 내려버리는 엔딜 펠란이었다.
곰곰이 생각해 본 강현도 그 말에 동의했다.
엔딜 펠란의 말처럼 열심히 해서 손해 볼 건 없었다.
그러는 동안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고.
[첫 번째 시험이 시작됩니다.]
슈와악-
빛이 사방을 덮어갔다.
* * *
[1층의 주제는 ‘측정’, 다른 종족과의 결투를 거치며 참가자는 스스로의 현 수준을 측정하게 될 것입니다.]
[균형의 탑 1층에는 아무도 거주하고 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균형의 탑에 거주하는 종족 가운데, 무작위로 다섯 종족을 선별합니다.]
[상대를 쓰러뜨릴 때마다 업적 점수를 얻을 수 있으며, 모든 상대를 쓰러뜨리면 시험이 종료됩니다.]
슈와아-
눈을 뜬 강현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석벽으로 되어 있는 결투장으로 보이는 곳이 그를 반겨주었고…….
[Lv. 30 켄타우로스 정예병]
인간의 상반신을, 말의 하반신을 하고 있는 켄타우로스가 창과 방패를 든 채 용맹한 눈을 하고 있었다.
“그대가 만만치 않은 상대라는 건 한눈에 알아보았다! 하지만 이로타스 부족의 하우리드,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싸워낼 것을 엄숙하게 선언한다!”
굳건한 마음가짐이 느껴지는 선언이었다.
[10초 후 시험이 시작됩니다…….]
하나 강현은 켄타우로스가 그러거나 말거나, 담담하게 스킬을 발동시켜나갔다.
[스킬, 여명의 눈[Lv.4]을 발동합니다.]
지이잉-
켄타우로스의 곳곳이 황금빛으로 반짝이기 시작하고.
[스킬, 광검[Lv.9]을 발동합니다.]
슈와아-
수수께끼의 검에 백광이 깃든다.
여기까지가 바로, 지금까지의 전투에서 강현이 발동하던 기본적인 스킬들.
“호오, 검에 하얀 오러가 깃들다니! 그것참 신기하구나! 어서 붙어보고 싶군!”
그 모습을 본 켄타우로스가 호승심을 내보였다.
강현은 대꾸하지 않았다.
이번의 그는, ‘기본’에서 그칠 생각이 없었으니까.
강현은 지체 없이 ‘나머지’ 스킬들을 발동했다.
[스킬, 천광의 날개[Lv.2]를 발동합니다.]
쿠오오-
순백의 날개를 영롱하게 피워올린 것에 더하여.
[스킬, 강림[Lv.1]을 발동합니다.]
강림[Lv.1]
-빛을 끌어와 신체를 강화시킵니다. 스킬을 지속하는 동안 모든 능력치가 5 증가합니다. 레벨을 올릴수록 이 수치는 늘어납니다.
이번에 노가다로 레벨을 올려 습득한 버프 스킬, ‘강림’까지 발동한 것이다.
피칭-
하늘에서 떨어져 내린 한 줄기의 새하얀 빛살이 강현을 관통한다.
빛살은 강현의 주변에 마구 소용돌이치더니, 이내 강현의 신체에 깃들어 은은한 빛을 내뿜었다.
그리고.
“…….”
강현이 스킬을 꺼낼 때마다 켄타우로스의 표정도 시시각각 변해갔다.
광검을 보고 호기심을 보이던 것도 잠시, 천광의 날개를 꺼내자 심히 당황한 듯하더니, 강림을 보고는 말을 더듬더듬 흘려댄 것이다.
“나, 나를 상대로 그렇게까지 할 이유가…….”
말을 해오는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다.
‘하긴.’
고작 30레벨인 그로서는 그리 생각할 만도 했다.
강현으로서는 단순히 스킬을 내보인 것뿐이었음에도.
콰콰콰-
천광의 날개에 강림이 더해지자, 처음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기세가 장내를 휩쓸고 있었으므로.
“크, 크윽…….”
이윽고 약한 모습을 보여서 좋을 게 없다는 걸 깨달았는지, 이를 악문 켄타우로스가 창을 내민다.
[3초 뒤 시험이 시작됩니다…….]
확실히, 켄타우로스를 상대로 꺼낼 필요가 없는 스킬까지 꺼낸 건 맞았다.
따라서 이 같은 모습을 누군가 본다면, 굳이 전력을 다해야 하냐고 물어올 수도 있겠지만.
강현도 이유 없이 천광의 날개와 강림을 발동한 건 아니었다.
[2초 뒤 시험이 시작됩니다…….]
엔딜 펠란의 말처럼 이 서브 미션으로 등급이 정해지는 거라면, 가급적 높은 등급을 받아두는 게 앞으로의 미션에서 유리했을뿐더러.
[1초 뒤 시험이 시작됩니다…….]
‘내가 생각하는 게 맞다면…… 1초라도 빨리 끝내야 돼.’
이처럼 전력을 다하는 것은, 그에게 또 다른 ‘이득’을 가져다줄 것이었기에.
[시험을 시작하세요!]
파팟-
메시지가 뜨자마자 강현은 땅을 박차 돌진하여 검을 휘둘렀고.
쾅!
켄타우로스의 창을 박살 내며 그대로 결투를 끝냈다.
[첫 번째 종족을 쓰러뜨리셨습니다.]
이어지는 결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Lv. 40 새끼 오우거]
“그토록…… 강하면서…… 왜…….”
퍽!
집채만 한 오우거도.
[Lv. 50 땅코끼리]
“이, 이놈! 네놈은 도전자로서의 품위도 없는 거냐!”
푹-
말을 하는 기묘한 코끼리도.
[Lv. 55 하급 리치]
“기필코 네놈을 찾아 나의 연구 재료로-”
서걱-
시꺼먼 로브를 두른 해골 마법사도 그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Lv. 60 사왕의 오른팔]
“흠……. 내가 나타나기도 전부터 이런 기세를 뿌리고 있다니……. 재밌구나!”
마지막에 나타난 거대한 거인은 조금 힘들었지만.
콰콰쾅! 콰쾅!
끝내 쓰러뜨릴 수 있었다.
쿠웅-!
거인의 거체가 쓰러지며 땅을 진동시킨다.
[첫 번째 시험을 통과하셨습니다.]
[500pt가 지급됩니다.]
[시험을 일곱 번째로 빨리 통과하셨습니다.]
[100pt가 추가 지급됩니다.]
[추가 보상을 준비 중입니다…….]
강현의 입가에 기분 좋은 미소가 감돌았다.
‘전력을 다한 보람이 있군.’
시험이 시작되기 전, 그는 시험을 빨리 통과할수록 더 나은 보상을 줄 거라고 예상했었다.
그리고 일곱 번째로 빨리 통과했다는 말과 함께 추가 보상이 준비되는 걸로 보아, 그 예상은 그대로 들어맞은 듯했다.
[순위에 따른 보상의 정산을 완료했습니다.]
[보상을 지금 수령하시겠습니까? (Yes/No)]
강현은 떠오른 메시지를 향해 손을 가져갔다.
[질풍(疾風)의 가호를 습득합니다.]
질풍(疾風)의 가호
-첫 번째 시험을 7등 이내로 통과한 참가자들에게 주어지는 가호입니다.
-민첩 능력치가 영구적으로 2 상승합니다.
보상을 본 강현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고작 서브 미션의 첫 번째 시험을 통과한 것치고는 상당한 보상이었다.
‘역시…….’
이건 기회였다.
다른 종족들과의 간극을 좁힐 기회.
[붉은 악마님의 현재 순위는 7위입니다.]
[대기실로 이동합니다…….]
슈와아-
빠르게 올라오는 새하얀 빛을 보며 강현은 다짐했다.
‘무조건 상위권에 든다.’
* * *
-오우, 쟤 좀 화끈하다.
-붉은 악마? 인간인데 칭호가 이상하네
-뭐 어떰. 오히려 인간 같은 걸로 안 해서 좋은데
-이름 외우기도 귀찮은데 칭호는 왜 정하라고 해가지고;;
-안 그러면 애들끼리 차별 쩔잖슴.
-그건 ㅇㅈ인데…….
-이름이 튀긴 하네
-저 이름 땜에 낚여서 메시지 보내는 애들은 없겠지?
-ㅋㅋㅋㅋ설마
-왜ㅋㅋ 방금 열심히 해서 순위도 7등인데
-더럽게 약해 보이는데 7등?
-ㄴㄴ 빨리 깼자너
-그리고 저 붉은 악마가 인간종 예선 전체 1위임
-????
-……?
-??
-구라 ㄴ
-진짜임;; 예선에서도 꼴찌였는데 정신 차려보니까 어느새 1등 계속 먹었음
-ㄹㅇ?
-ㄹㅇㅋㅋ
-올
-아무리 그래도 그건 예선이니까 그런 거고, 본선에서는 안 통하지;;
-당장 2층에서 죽을 수도 있음
-ㅇㅇ 다른 층은 몰라도 2층이 난관일걸
-흐음…….
-그건 그런데 지켜볼 가치는…… 어? 용종 애들 시작한다
-하루 종일 결투장만 둘러보더니 드디어?
-ㅇㅇㅇ 빨리 ㄱ
-바로 간다
-나도
…….
* * *
[2층의 주제는 ‘파악’, 참가자가 가진 것들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는지를 확인합니다.]
[균형의 탑의 2층에는 도전자들을 따라 하는 도플갱어들이 살고 있습니다.]
[도플갱어와의 싸움에서 승리하면 시험이 종료됩니다.]
[10초 후 시험이 시작됩니다…….]
메시지를 본 강현은 눈을 크게 떴다.
“내가 아는 도플갱어라면…….”
그의 머릿속에 있는 도플갱어에 대한 상식이 떠오른 순간이었다.
꾸물-
그로부터 조금 떨어진 곳에 점토 같은 것들이 꾸물거리며 모여가는 게 아닌가.
이어서 그 점토들은 빠르게 하나의 형상을 만들어가기 시작했고.
“……!”
형상을 본 강현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도 그럴 게.
‘똑같잖아……?’
순식간에 또 다른 자신이 눈앞에 생겨났으니까.
마치 거울을 보는 것처럼,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똑같았다.
씩-
또 다른 이강현이 씩 웃어오는 가운데, 카운트가 0이 되었다.
[시험을 시작하세요!]
첫 번째 시험과는 다르게, 강현은 바로 공격에 나서지 않았다.
섣불리 접근한다면 낭패를 볼 거라는 직감이 강하게 들었기 때문이다.
메시지의 설명대로 저게 자신의 도플갱어라면, 어디까지 똑같은 건지 확인하는 게 먼저였다.
물론 이미 시험이 시작된 만큼 그 확인은 신속하게 해야 했으며.
[스킬, 광검[Lv.9]을 발동합니다.]
[스킬, 여명의 눈[Lv.4]을 발동합니다.]
그러는 와중에도 그는 ‘기본 세트’, 즉 광검과 여명의 눈을 발동하는 걸 잊지 않았다.
슈와아-
검에 백광이 깃드는 걸 느끼면서, 그는 눈앞의 또 다른 자신의 ‘약점’들을 살펴보았다.
정수리, 관자놀이, 미간, 명치……. 약점은 보통의 사람과 다를 게 없었다.
‘여명의 눈의 레벨이 오른 게 좋긴 하네.’
지난 세 번째 미션의 마지막 한타에서, 남궁강룡과 싸우는 도중 여명의 눈의 레벨이 오르면서 그의 ‘약점’을 볼 수 있게 됐었다.
그 덕에 남궁강룡을 이기기는 했으나, 여태까지 격하의 존재만 꿰뚫어 볼 수 있던 여명의 눈이었기에 ‘왜 볼 수 있게 된 거지?’라는 의문이 들었었다.
해서 수련의 방에 들어가 노가다를 하면서 여명의 눈을 다시 한번 살펴보았고, 그 결과 여명의 눈의 설명이 ‘격하의 존재’에서 ‘동격의 존재’로 바뀌었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다만, 도플갱어의 시선 또한 자신의 머리와 명치 등에 머물러 있는 걸로 보아 저쪽도 여명의 눈을 사용할 수 있는 듯했다.
상대를 파악하려는 자신의 성향까지 닮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도플갱어도 자신을 살피고 있다.
스윽-
강현이 도플갱어의 차림새를 훑었다.
수수께끼의 검과 깃털 갑옷이 눈에 들어왔다.
‘아티팩트가 똑같은 정도라면…….’
레벨도 같다고 봐야 하겠지.
며칠 동안 수련의 방을 통한 노가다로 현재 그의 레벨은 52.
강현은 도플갱어도 그와 같은 레벨일 거라 상정했다.
“하.”
재빨리 정리를 마친 강현이 어이없다는 헛웃음을 흘렸다.
자신과 아예 똑같은 도플갱어를 상대하라니.
하지만 이미 주어진 시험이다.
불평하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너를 죽여 이곳을 벗어나겠다!”
파팟-
도플갱어가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온다.
강현이 시험의 일환으로 도플갱어를 쓰러뜨려야 하듯, 도플갱어에게는 본모습인 강현을 쓰러뜨리면 이곳에서 나갈 수 있는 걸로 인식이 되는 모양이었다.
쾅! 콰쾅!
강현과 도플갱어의 광검이 맞부딪친다.
처음에는 서로 참격과 섬광 정도만 사용했으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차 고급 스킬들이 난무했다.
[스킬, 섬멸의 광창[Lv.2]을 발동합니다.]
[스킬, 광야참[Lv.2]을 발동합니다.]
…….
콰콰콰쾅!
그 같은 과정을 거치면서, 강현은 도플갱어의 전투 스타일에 대해 자세히 알게 되었다.
아무리 같은 생김새를 하고 같은 스킬을 사용한다고 해도, 도플갱어가 그와 싸우는 스타일까지 똑같지는 않았던 것이다.
싸움이 계속될수록 사용하는 스킬이 갈리기 시작했고, 강현은 도플갱어가 주력으로 쓰는 스킬들로 그의 성향을 파악해 냈다.
‘파괴적이네.’
강현이 가급적 큰 스킬들을 사용하지 않고 순보와 섬광, 여명의 눈을 기본으로 하는 낭비 없는 전투를 지향했다면, 도플갱어는 패도적이었다.
쿠콰콰콰-
한참 전에 천광의 날개를 발동한 뒤, 이곳저곳 날아다니면서 섬멸의 광창과 광야참을 끊임없이 날려대는 것만 봐도 잘 알 수 있었다.
마력이 닳는 건 고려하지도 않는 건지, 스킬들을 발동함에 있어 거침이 없었다.
하나 그 사실은, 되려 강현에게 승리를 위한 한 가지 전제를 만들어줄 뿐이었다.
‘버티면 알아서 자멸하겠는데.’
시간만 끈다면 도플갱어의 마력은 머지않아 바닥날 거고, 그때까지만 버틴다면 이긴다는 전제를.
그렇게 생각한 순간이었다.
콰콰콰-
큼직한 초승달 모양의 백색 검기가 파도처럼 밀려들어온다.
[스킬, 천광의 날개[Lv.2]를 발동합니다.]
날개를 펼친 강현이 아슬아슬하게 광야참을 피해냈다.
그러나, 도플갱어의 노림수는 광야참에서 끝나지 않았다.
광야참 뒤에 바짝 붙어오도록 시간차를 두고 날렸는지, 거대한 순백의 그물망이 어느새 눈앞까지 다가와 있던 것이다.
하늘을 덮는 빛의 그물[Lv.1]
-빛의 힘으로 그물을 엮어 쏘아냅니다. 대상에 닿으면 폭발한 뒤 대상을 속박합니다.
45레벨을 달성하며 배운 포박형 스킬, 하늘을 덮는 빛의 그물이었다.
“……!”
바로 앞까지 다가와 있는 그물을 본 강현의 손이 재빨리 움직였다.
[스킬, 하늘을 덮는 빛의 그물[Lv.1]을 발동합니다.]
그러자 강현의 손에서도 그물이 내쏘아졌다.
두 그물은 서로 엉켜붙으며 폭발을 일으켰다.
콰콰쾅!
그물들이 폭발을 일으키며 굉음과 함께 자욱한 먼지로 사방을 덮었다.
폭발의 여파로 한참을 날아간 강현은 빙글 뒤돌아 가볍게 착지했다.
-생각보다 지능적이군.
‘그러게 말입니다.’
아무런 계획 없이 닥치는 대로 스킬을 발동하는 줄 알았더니, 나름 의도하는 바가 있는 듯했다.
마력이 다 떨어지기 전에 이 전투를 끝낼 자신이 있는 걸까.
‘그러고 보니 2층 시험의 주제는 파악이었지.’
1층의 주제는 ‘측정’이었다.
잠시 먼지가 걷히길 기다리며, 강현은 1, 2층의 주제들에 대해 생각했다.
“측정과 파악이라…….”
점점 강해지는 상대들과의 대련을 했던 1층은 대강 짐작이 갔다.
시험을 통해 현 상태나 강함을 측정하겠다는 거겠지.
그렇다면 ‘파악’은 뭘 의미하는 것일까.
‘내 강함을 제대로 알고 있냐…… 아니, 제대로 활용하고 있냐는 건가?’
도플갱어는 그와 가진 건 똑같아도 전혀 다른 스타일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승패를 가르는 건, 누가 더 가진 것에 걸맞은 최적의 전투 스타일을 가졌느냐일 것이다.
그리고 그 점이야말로, 리얼에서 수없이 전투를 치르면서 전투 스타일을 만들어간 강현이 이 싸움의 승리를 장담하는 이유였다…….
……라고 생각했었는데.
쿠오오-
먼지가 걷히고, 코앞에서 비릿하게 웃어보이는 도플갱어를 본 강현의 얼굴이 굳어졌다.
보다 정확히는, 도플갱어가 아닌 그의 손에 들린 채 자신을 가리키는 혈룡검을 보고서였다.
이어서 다음 순간.
쿠콰콰콰-
혈룡검의 비기, 참룡섬의 터질듯한 핏빛 강기가 그대로 내쏘아졌고.
“……이런 썅.”
콰콰콰콰쾅!
새빨간 강기의 폭풍이 전방을 휩쓸었다.
* * *
“…….”
고오오-
폭풍이 몰아친 것처럼, 온통 엉망이 된 결투장.
조금 전과는 비교가 안 되는 먼지가 뿌옇게 자리했으며, 바닥은 난도질이라도 당한 듯 엉망이었다.
그런 가운데.
투둑……. 툭……. 파삭!
“커헉……!”
먼지와 흙투성이가 된 강현의 손이 바닥에서 튀어나왔다.
손을 시작으로 겨우 파묻혔던 몸을 빼낸 강현이 피가 섞인 침을 뱉었다.
“퉤.”
다행히 참룡섬에 가격당하기 직전 천광의 날개에 강림, 휘광, 수수께끼의 검의 보호막까지 발동한 덕분에 치명상을 피하긴 했어도, 워낙 가까이에서 맞는 바람에 타격이 상당했다.
강현은 상태를 점검했다.
이마에서는 피가 흐르고 있었고, 귀는 잘 들리지도 않았다.
강기를 맞고 땅에 처박히는 과정에서 내장이 진탕되어 내상도 제대로 입은 것 같았다.
‘꼴이 말이 아니군.’
시간만 끌었으면 이긴 거라 여기고 있었는데, 제대로 얻어맞았다.
설마 혈룡검을 꺼내 들 줄이야.
그나마 도플갱어가 그가 쓰러진 틈을 노려오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었다.
-참룡섬을 발동하자마자 잠깐 난리가 났었다. 지금쯤 진정하긴 했을 거다.
‘아.’
엔딜 펠란의 설명을 들은 강현은 도플갱어도 멀쩡하지 않다는 걸 알게 되었다.
‘페널티까지 공유한 건가.’
두 번째 미션에서 두 번의 참룡섬을 사용한 뒤, 앞으로 자신이 쓸 수 있는 참룡섬의 횟수는 한 번, 아니면 두 번이라는 걸 느꼈던 그였다.
다행히 도플갱어도 고통스러워했다는 걸로 보아, 사용할 때마다 피를 두 배로 먹는 참룡섬의 페널티까지 복사한 걸로 보였다.
‘세 번째 참룡섬에 안 죽었으니까……. 네 번째 참룡섬을 쓰면 진짜 죽겠네.’
그러니 도플갱어도 머리가 있다면 참룡섬을 봉인할 거라고 생각됐다.
스아아-
아직도 먼지가 자욱했기에, 강현은 기감을 확장시켜 도플갱어의 위치를 파악해 나갔다.
-그 검을 쓰지 않을 생각이냐?
엔딜 펠란의 물음에 강현은 고개를 저었다.
‘도저히 못 이기겠다 싶으면 써야죠.’
하나 도플갱어의 반응을 보아 그가 사용할 수 있는 남은 참룡섬의 횟수는 한 번이라 생각됐다.
필살기에 가까운 위력을 고려했을 때, 서브 미션에서 쓰기는 아까웠다.
뒤 없이 일단 갈기고 본 도플갱어와는 달리, 강현은 이후의 일도 생각해야 했으니 말이다.
게다가.
‘안 써도 할 만할 거 같거든요.’
그렇게 말하며.
툭-
강현은 ‘무언가’를 품에서 꺼내 들었다.
-그건 왜 꺼낸 거지?
강현이 꺼낸 ‘무언가’를 본 엔딜 펠란이 질문해 왔지만, 강현은 짤막하게 답할 뿐이었다.
“……보면 알 겁니다.”
볼품없어 보이는 데다, 도박성이 짙긴 했어도.
의도대로만 된다면, 이건 그에게 승리를 가져다줄 ‘승부수’가 되어줄 것이었기에.
* * *
먼지가 걷혀간다.
“허억…… 허억…….”
도플갱어는 겨우 몸을 추슬렀다.
더 이상 참룡섬을 쓰면 죽을 수도 있겠다는 감각이 몸을 휘감았다.
“아, 안 돼…….”
그는 죽을 마음이 없었다.
나가고 싶었고, 나가야 했다.
그리고, 나가려면 ‘진짜’를 죽여야 했다.
“…….”
장내의 먼지가 거의 걷혀간다.
이어서 자신을 향해 천천히 다가오는 ‘진짜’의 위치를 느끼자마자.
팟-
강림과 날개를 발동한 도플갱어는 놈에게 짓쳐 들어갔다.
쾅! 콰콰쾅!
그는 지체 없이 스킬을 퍼부으며 ‘진짜’를 몰아붙여갔다.
쾅!
“큭!”
그저 검만 부딪쳤는데도, ‘진짜’의 입에서 침음이 새어 나온다.
그러더니 안 되겠는지 순보로 거리를 벌린다.
도플갱어는 지금이 몰아칠 때라는 걸 깨달았다.
도플갱어는 ‘진짜’와의 거리를 좁히며 검을 휘두르려 했다.
그런데.
“……?”
‘진짜’의 자세가 이상했다.
자신이 쇄도하고 있는데도 막을 준비를 하기는커녕, 뜬금없이 하늘을 향해 검을 치켜드는 게 아닌가.
‘뭘 하는 건지는 모르겠다만……. 그만 죽어라.’
‘진짜’의 지척까지 다가간 도플갱어가 검을 휘두르려던 순간이었다.
푸욱-
돌연 세상이 한 바퀴 빙글 돌더니, 가슴에 격통이 느껴졌다.
“컥……?”
텅그렁-
힘이 빠진 손에서 검이 빠져나가며 시야가 흐려진다.
흐릿해지는 시야 속에서도 그는 상황을 파악하려 애썼고.
자신이 꼬치구이처럼 ‘진짜’의 검에 꿰뚫려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어, 어떻게……?’
분명 ‘진짜’는 검을 하늘에 치켜들고 움직이지도 않았다.
그런데 자신이 빨려 들어간 듯이 당해버리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커, 컥…….”
생존을 위한 몸부림일까, 혹은 죽음을 거부하려는 발버둥일까.
필사적으로 주변을 둘러본 도플갱어는 간신히 볼 수 있었다.
‘진짜’의 품에 삐죽 튀어나와 있는, 조그마한 나무토막을.
그걸 보자 나무토막의 효과가 머리에 떠오르면서, 전후 상황이 파악됐다.
“그랬…… 군……. 놈이 온 게 아니라…… 내가 끌려간 거였나…….’
도플갱어가 허탈하게 내뱉었다.
그리고, 그게 그의 마지막 말이었다.
[스킬, 광야참[Lv.2]을 발동합니다.]
* * *
[두 번째 시험을 통과하셨습니다.]
[500pt가 지급됩니다.]
[시험을 여섯 번째로 빨리 통과하셨습니다.]
[200pt가 추가 지급됩니다.]
[추가 보상을 준비 중입니다…….]
메시지를 보며 강현은 털썩 주저앉았다.
‘???의 나무토막’으로 미리 선포 스킬을 발동해 둔 덕에, 도플갱어가 반경 1m 안에 들어오자마자 수수께끼의 검에 ‘소환’할 수 있었다.
무방비로 소환된 도플갱어가 수수께끼의 검에 꿰뚫리면서 계획은 먹혀들어 갔다.
도플갱어의 입장에서는 꼬챙이에 찍힌 물고기처럼 당한 셈이었으니 억울할 만도 하겠지만, 싸움은 끝났다.
-머리 하나는 잘 굴러가는구나.
‘있는 건 활용해야죠.’
강현은 몸을 일으키며 대답했다.
힘들었던 싸움이었기에 당장에라도 퍼질러 자고 싶었지만, 해야 할 일이 남아 있었다.
[순위에 따른 보상의 정산을 완료했습니다.]
[보상을 지금 수령하시겠습니까? (Yes/No)]
강현은 Yes를 눌렀다.
[불굴(不屈)의 가호를 습득합니다.]
불굴(疾風)의 가호
-두 번째 시험을 7등 이내로 통과한 참가자들에게 주어지는 가호입니다.
-체력 능력치가 영구적으로 2 상승합니다.
[붉은 악마님의 현재 순위는 6위입니다.]
[대기실로 이동합니다…….]
주변을 덮어가는 빛을 본 강현이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이제 시작이다.’
두 번째 시험에서도 6등에 들면서, 상위권에 들 최소한의 조건은 갖춰졌다.
남은 건, 그 조건을 발판삼아 상위권에 드는 것뿐.
* * *
-저기서 저렇게 끝내버리네ㅋㅋ
-ㅋㅋㅋㅋ잔머리보소
-인간종 생각보다 꿀잼인 듯?
-ㅇㅇ쟤 말고도 몇 명 더 괜찮음
-심지어 붉은 악마 이번에 6등임
-그렇다고 쟤가 계속 6등에 있을 거라는 건 아니겠지? 내가 장담하는데, 다음 시험에서 10등 밖으로 밀려난다
-흐음…….
…….
-어? 세 번째 시험 끝났는데도 6등이네?
-장담한다는 분 어디 갔죠.
-ㅇㄷ 감
-……네 번째 시험에선 무조건 밀려남. 진짜임.
…….
-네 번째 시험 끝났는데 이번엔 5등인데요?
-…….
-저기요?
-…….
* * *
숲의 한복판 공터에 위치한, 통나무로 지어진 목재 창고.
평화로운 주변 풍경과는 다르게, 가히 백 마리가 훌쩍 넘는 오크들의 사체가 널려 있었다.
피 칠갑을 한, 마지막 한 마리를 제외하고서는.
“크아아! 빌어먹을 인간! 네놈을 죽여 이곳을 빠져나가리라!”
고함을 내지르며 오크가 달려들었지만.
[스킬, 섬광[Lv.6]을 발동합니다.]
그의 속도보다 월등히 빠르게 찔러오는 빛살을 어찌하지는 못했다.
“커헉……!”
쿠웅…….
마지막 오크가 쓰러지자, 메시지가 나타났다.
[다섯 번째 시험을 통과하셨습니다.]
[500pt가 지급됩니다.]
[시험을 여섯 번째로 빨리 통과하셨습니다.]
[200pt가 추가 지급됩니다.]
[추가 보상을 준비 중입니다…….]
“하아.”
보상이 준비되는 걸 기다리며 강현은 한숨을 내쉬었다.
5층의 시험은 ‘단련’.
말은 단련이었으나, 그 내용은 단련과는 딱히 연관이 없었다.
웬 굶주린 오크들로부터 식량 창고를 지키는 게 그 내용이었으니까.
오크들이 광견병에 걸린 개처럼 침을 질질 흘리면서 달려드는 바람에, 강현의 미간은 시험을 치르는 내내 찌푸려져 있어야 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왜 이번 시험의 주제가 단련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 더러운 오크들한테 버티면서 적응이라도 하라는 건가.’
모를 일이었다.
[순위에 따른 보상의 정산을 완료했습니다.]
[보상을 지금 수령하시겠습니까? (Yes/No)]
기다리던 메시지에, 강현은 즉각 Yes를 눌렀다.
[근성(性質)의 가호를 습득합니다.]
근성(性質)의 가호
-다섯 번째 시험을 7등 이내로 통과한 참가자들에게 주어지는 가호입니다.
-모든 능력치가 영구적으로 1 상승합니다.
보상까지 받았으니, 이제는 쉬러 갈 시간이었다.
[붉은 악마님의 현재 순위는 6위입니다.]
[대기실로 이동합니다…….]
* * *
[잠시 후, 여섯 번째 시험이 시작됩니다.]
[여섯 번째 시험의 주제는 ‘격퇴’입니다.]
[여섯 번째 시험까지 남은 시간 : 2시간 00분]
슈와아-
힘든 시험이었던 만큼, 강현은 떠오른 메시지를 간단히 훑은 뒤 침대에 쓰러지듯 누웠다.
‘여섯 번째 시험이라.’
이번 서브 미션은 균형의 탑의 10층까지 오르는 것.
벌써 여섯 번째 시험을 목전에 두고 있으니, 이걸로 절반도 넘는 시험을 통과한 셈이었다.
하지만 조금 전의 시험으로 지친 강현에게는 아직도 절반이나 남았다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도 망할 3, 4층보단 낫지 않느냐. 이 몸은 그때 지루해 죽는 줄 알았다.
‘그건…… 그렇죠.’
5층의 시험이 불쾌했다면, 3층과 4층은 짜증이 났다.
3층에서는 ‘극한’을 시험한답시고 2주 동안 망망대해를 표류해야 했으며, 4층에선 ‘극복’이라는 이름으로 흉악한 괴수들만 있는 무인도에서 노숙을 해야 했으니까.
4층 시험의 기간도 3층과 마찬가지로 2주였으니, 무려 한 달이라는 시간을 바다와 무인도에서 보낸 것이었다.
군대를 갔다 온 이후로 캠핑이라면 지긋지긋해하던 강현에게는 끔찍하기 그지없는 시간이었다.
‘그나마 말 못 하는 괴수들이 없어서 다행이었지.’
자칫 엔딜 펠란과만 말하며 한 달을 보낼 뻔했지만, 다행히 괴수들의 말을 들으며 외로움을 달랠 수 있었다.
처음 균형의 탑에 입성할 때 나온 메시지처럼 층마다 다른 환경과 다른 종족들이 살고 있었던 것이다.
3층에서는 크고 작은 생선들을 비롯한 인어, 세이렌 등을, 4층에서는 다양한 수인족을 볼 수 있었다.
물론 짜기라도 했는지 마주치는 종족마다 2층의 도플갱어처럼 ‘널 죽이고 나가겠다!’, 이런 말들을 해오기는 했으나, 그것들도 목소리는 목소리였다.
다만 그들이 종종 ‘널 죽이겠다!’가 아닌 다른 말을 해오기도 했는데, 스포일러 처리가 되어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때를 떠올리자 기분이 살짝 묘해졌다.
왜 탑의 종족들은 자신을 그렇게 적대하는 걸까.
“음…….”
잠시 고민해 봤지만, 짐작이 가는 건 없었다.
“상태창.”
이름 : 이강현
레벨 : 53
고유 특성 : <광검제>
보유 스킬 : 광검[Lv.9], 섬광[Lv.6], 순보[Lv.4], 질주[Lv.2], 참격[Lv.3], 휘광[Lv.3], 광야참[Lv.2], 섬멸의 광창[Lv.2], 하늘을 덮는 빛의 그물[Lv.1], 강림[Lv.1], 여명의 눈[Lv.4]
능력치 : 근력[Lv.25], 민첩[Lv.41], 체력[Lv.28], 마력[Lv.24]
5층까지 올라오면서 레벨은 1이 더 올라 53.
스킬 레벨도 꾸준히 오르고 있었고, 균형의 탑에 올라오면서 가호들을 받은 덕에 원래 좋았던 능력치는 더 좋아졌다.
‘이젠 맨몸으로 남궁강룡이랑 붙어도 해볼 만하겠는데.’
1층부터 4층까지 올라오면서 받은 질풍, 불굴, 집념, 근면의 가호가 각각 민첩, 체력, 근력, 마력을 2씩, 방금 받은 근성의 가호가 모든 능력치를 1씩 올려준 덕이었다.
모두 7등 안에 들면서 받은 가호들이었기에, 본선에서도 예선처럼 7위 안에 들면 <초월>을 시켜주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상태창을 훑어본 강현이 눈을 감았다.
아직도 순위권을 벗어나지 않았으니, 순항하고 있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아직 시험은 끝난 게 아니었고, 다음 시험을 만전의 상태로 맞이하려면 충분히 쉬어주어야 했…….
띠링.
들려오는 메시지에 강현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3층 대기실에 진입하면서 메시지 기능이 개방되었는데, 바로 그 메시지가 오는 소리였다.
강현은 수신함을 확인했다.
어둠의 사령술사(54위) : 기여도가 또 오르신 걸 보니 5층 시험을 통과하신 거 같군요. 축하드립니다.
메시지 기능이 열리자마자 꾸준히 보내오는 참가자였다.
‘귀찮은 놈.’
강현은 혀를 찼다.
다만 메시지를 보낸 건 ‘어둠의 사령술사’만이 아니었다.
나는 악마군단장이다(12위) : 악마 맞나? 라시드? 지에토? 누구지?
신성한 날개(13위) : 정말 악마인가요? 그렇다면 각오하세요, 신성한 라엘의 이름으로 회개시켜드릴 테니!
방랑기사(66위) : 6위에 오래 머물러 있군! 이름이 뭐지? 나중에 대련이라도 한번…….
…….
칭호에 ‘악마’가 들어가서인지 주기적으로 메시지를 보내오는 상위권 참가자들이 있었던 것이다.
어찌나 귀찮게 굴어대는지, 칭호를 ‘붉은 악마’라고 지은 게 후회될 정도였다.
“……괜히 붉은 악마로 해가지고.”
별생각 없이 지은 거였는데 이렇게 귀찮은 메시지들이 올 줄은 몰랐다.
띠링-
어둠의 사령술사(54위) : 저는 이제 4층에 진입합니다. 간단한 팁이라도…….
뚝-
“에이 씨, 몰라.”
다음 시험까지 얼마 남지 않았기에 강현은 메시지들을 뒤로 한 채 애써 잠을 청했다.
그러는 사이 시간은 빠르게 흘러가.
[여섯 번째 시험이 시작됩니다.]
빛이 대기실을 휘감았다.
* * *
[6층의 주제는 ‘격퇴’입니다.]
[균형의 탑의 6층부터 9층에는 다양한 종족이 층을 왕래하며 공존하고 있습니다. 하나 최근, 일부 요괴들이 연합을 맺어 나머지 종족을 탄압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 중 일부가 현재 온건한 제3 요괴촌(妖怪村)을 침략 중입니다. 서둘러 제3 요괴촌으로 이동하여 사악한 요괴들을 물리치세요.]
[여섯 번째부터 아홉 번째 시험은 모두 연결되어 있으며, 하나의 시험을 통과할 때마다 새 시험이 주어집니다.]
[제3 요괴촌을 침략 중인 사악한 요괴들을 처리하면 여섯 번째 시험이 종료됩니다.]
강현은 꼼꼼하게 메시지를 읽어내려갔다.
아무래도 6층부터 9층까지는 이어져 있는 모양이었다.
‘일종의 연계 퀘스트 같은 건가.’
살짝 복잡한 감이 있었어도, 그거야 직접 몸으로 부딪치면서 알아가면 될 일이었다.
강현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해가 져서인지, 아니면 이 층의 특성상 원래 이런 건지는 몰라도 날은 어둑하기 그지없었다.
그래도 길을 따라 호롱불들로 보이는 것들이 드문드문 놓여 있어 주변을 파악하는 데엔 지장이 없을 듯했지만.
대기에서 전해져 오는 끈적한 에테르들이 그의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었다.
-흠, 요사스러운 기운이 느껴지는 걸로 보아 확실히 요괴들이 살기 좋은 환경이다.
‘요사스러운 기운? 그럼, 지금 느껴지는 게 요기라는 겁니까?’
-그래, 이 정도면 상당히 짙은 편이다. 고작 시험 따위에 이런 환경을 구현할 리가 없으니, 아마 실제 상황에 네놈들을 밀어 넣은 듯하군.
“실제 상황…….”
강현은 엔딜 펠란의 말을 이해했다.
예선처럼 방송국에서 세팅한 게 아닌, 실제 탑 안에서 일어난 일을 해결하기 위해 참가자들을 움직이는 듯했다.
[‘지도’를 불러 위치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떠오른 메시지에 강현은 소리 내어 지도를 말해보았다.
“지도.”
팟-
그러자 근처를 나타내는 큼지막한 지도가 떠올랐다.
지도를 살펴본 강현의 눈이 반짝였다.
사악한 요괴들의 침략을 한시라도 빨리 막아달라는 건지, 그가 가야 할 제3 요괴촌이 바로 코앞이었던 것이다.
‘빨리 갈수록 순위에 유리하겠군.’
그렇다면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스킬, 천광의 날개[Lv.2]를 발동합니다.]
[스킬, 질주[Lv.2]를 발동합니다.]
순백의 날개가, 어둠을 가르며 날아올랐다.
* * *
쾅, 하는 굉음이 연이어 울려 퍼지는 가운데, 짙은 청록빛과 밝은 푸른빛 덩어리들이 정신없이 오고 간다.
퍼퍼퍼펑! 퍼펑!
그에 따라 오랜 세월 이 땅에서 굳건히 버텨온 마을이 하나둘 파괴되어갔다.
그리고 꼬마 도깨비 유각은, 마루 밑에 숨어 그 모든 과정들을 벌벌 떨며 듣고 있었다.
“으으…….”
조금 전, 언제나처럼 망태 할아버지의 무릎에 누워 옛이야기들을 듣고 있을 때였다.
-노, 놈들이 쳐들어왔다!
누군가의 다급한 외침과 함께 마을이 소란스러워졌다.
근래 다른 요괴촌을 공포에 떨게 만든, 요괴왕의 수족들이 쳐들어왔다는 말이었으니까.
한데 하필 유각과 할아버지가 있던 곳이 놈들이 쳐들어오고 있는 마을 입구였기에, 다른 곳으로 이동할 시간이 없었다.
“유각아, 절대 나오면 안 된다!”
때문에 망태 할아버지는 황급히 유각을 마루 밑으로 숨겼고, 유각이 숨자마자 싸움이 시작된 것이었다.
‘제발…….’
유각은 손이 발이 되도록 빌며 기원했다.
제발 마을 어르신들이 적들을 물리치기를.
그것도 몸 성히 물리쳐서, 오래오래 자신이 볼 수 있기를.
그렇지만.
퍼펑! 펑…….
천천히, 소음이 멎어 든다.
멎어 들던 소음은 빠르게 가라앉아, 이내 고요해졌다.
“…….”
유각은 직감했다.
마을의 어르신들이, 놈들에게 당했다는 걸.
그리고 낄낄대는 소리가 들려오면서, 그 예감은 맞아떨어졌다.
“그러게 왜 협력을 거절해가지고……. 나갈 수 있는 방법을 찾았다는데 왜 이러는 거야?”
“그니까. 이 지긋지긋한 감옥이 싫지도 않나? 왜 협력을 안 하는지 모르겠네.”
마루 밑 사이로, 가지각색의 요괴 수십 마리가 대화를 나누는 소리가 들려왔다.
“몇 살았냐?”
“어디 보자……. 둘, 넷, 여섯, 여덟…… 열……. 열 살았네.”
“딱 적당하네. 얘들아, 얼른 데리고 가자! 두령님이 기다리시겠다.”
“옛!”
이후로 잠시 부스럭대는 소리가 들리더니, 어르신들이 마을 밖으로 줄지어 끌려가는 게 눈에 들어왔다.
‘누구라도 좋으니까 제발 좀…….’
누군가 구해주기를.
아랫마을의 짜증 나는 아줌마든 건너편의 욕쟁이 할머니든 상관없으니까, 저놈들로부터 마을 사람들을 구해주기를.
그러나 현실은 냉혹했다.
어르신들을 구할 수 있는 건 아무도 없었다.
오직 한 명, 유각을 제외하고는.
그 순간이었다.
유각의 제한된 시야에 익숙한 얼굴이 들어왔다.
“마, 망태 할아버지……?”
피투성이가 된 채 기절한 망태 할아버지가 끌려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 광경을 보자마자.
“아, 안 돼!”
팟-
유각은 저도 모르게 뛰쳐나가려 했다.
만약.
슈와아아-
저 먼 하늘에서부터, 환한 형체가 다가오지 않았더라면.
“어……?”
처음에는 잘못 본 줄 알았다.
형체는, 유각이 이곳에서 사는 평생 본 적 없는 밝은 색깔을 하고 있었으니까.
빛.
그것은 눈이 부실 만큼 찬란한 순백의 빛이었다.
형체를 본 건 유각만이 아닌지.
“잠깐 멈춰봐!”
“정지, 정지!”
어르신들을 끌고 가던 요괴들의 시선도 일제히 하늘을 향했다.
그러기를 잠시.
‘나, 날아오고 있어…….’
유각은 날개를 단 형체가 빠르게 가까워져 온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렇게 모두의 시선이 집중된 가운데, 날아온 형체는 적들의 선두에 착지했다.
“네놈은 뭐냐? 근방에선 못 보던 놈인데.”
선두에 자리한 요괴가 묻는다.
하나 강현은 그러거나 말거나 주변을 훑었다.
‘벌써 끝났나.’
수십 마리의 요괴가 십여 마리의 요괴들을 질질 끌고 가고 있었다.
전투가 끝난 모양이었다.
“어이! 네놈은 뭐냐니까? 안 되겠다. 얘들아! 포위해라!”
하지만, 그렇기에 상황은 명료해졌다.
이번 시험은 사악한 요괴들을 처리하는 것이었고, 마침 그 요괴들은 눈앞에 있었다.
[스킬, 광검[Lv.9]을 발동합니다.]
강현은 광검을 발동하며 요괴들 사이로 뛰어들었다.
팟-
요괴들에게 뛰어드는 찰나.
[스킬, 여명의 눈[Lv.4]을 발동합니다.]
강현은 재빨리 요괴들의 약점과 진영을 파악했다.
근방이 어둡긴 했어도, 호롱불과 더불어 천광의 날개와 광검에서 뿜어지는 빛까지 합치니 문제가 되진 않았다.
크기와 색깔이 제각각인 요괴들을 훑어보자, 딱히 훈련을 받거나 한 건 아닌지 제멋대로 자신에게 일렬로 달려들고 있다.
게다가.
‘대부분 나보다 한참 ‘격’이 낮아.’
섣불리 다가오지 않고 자신을 파악하고 있는 몇몇을 제외한다면, 40레벨을 넘는 요괴가 없었다.
그렇다면, 초장이긴 해도 기세를 확 잡는 게 나았다.
[스킬, 광야참[Lv.2]을 발동합니다.]
[1/10의 마력을 소모합니다.]
쿠콰콰콰-
강현이 검을 크게 가로 베자, 순백의 검기가 뿜어져 주욱 늘어선 요괴들을 강타했다.
콰콰쾅!
“크어억!”
“끼아악-!”
광야참에 직격당한 요괴들 중 몇몇이 단박에 피를 흩뿌리며 나가떨어졌고.
“……!”
달려들려던 나머지 요괴들이 주춤거린다.
강현은 그 틈을 노려 파고들었다.
[스킬, 섬광[Lv.6]을 발동합니다.]
푸욱!
섬광은 눈이 여러 개 달린 개 요괴를 관통하여 그 옆에 있던 큼직한 소 요괴의 가슴팍까지 꿰뚫었다.
모두 여명의 눈이 보여주는 약점들이었다.
“끼오오!”
“크어어억!”
쿠웅…….
피를 흩뿌린 두 요괴가 그대로 절명한다.
한 번의 공격으로 두 마리의 요괴를 쓰러뜨린 셈이었건만, 강현은 거기서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스킬, 참격[Lv.3]을 발동합니다.]
슈슈슉-
강현이 검을 털자, 화살과도 같은 세 개의 백광이 전방으로 쏘아졌다.
그 목표는, 코앞에서 우왕좌왕하고 있는 세 마리의 요괴들.
그 순간, 저 뒤에서부터 시퍼런 불덩이 세 개가 날아와 참격과 맞부딪쳤다.
퍼퍼펑!
참격이 상쇄된다.
그와 동시에 얄팍한 고함이 울려 퍼졌다.
“뭐, 뭣들 하는 거냐아-!”
강현이 살짝 혀를 찼다.
“……쯧.”
참격이야 다시 쓰면 된다지만.
쿠오오-
방금의 고함 이후로 대기의 요기가 더욱 농밀해져 갔다.
그에 따라 쭈뼛거리던 요괴들의 눈에 붉은 기가 감돌았다.
호통이 들려온 곳을 보자 홀쭉하게 생긴 초록 피부의 인간형 요괴가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대는 중이었다.
저놈이 이 요괴 무리를 이끄는 대장으로 보였다.
“이놈들아-! 당장 놈을 죽여라아! 못 죽이면 네놈들이 죽는다아!”
대장 요괴은 말끝마다 기이한 음율을 넣었는데, 그때마다 요기가 조금씩 진해져 갔다.
그라라라!
크르르…….
두려움이 사라진 듯, 눈이 시뻘게진 요괴들이 천천히 다가온다.
놈들을 주시하며 강현은 물었다.
‘저 이상한 말투가 요괴들의 [종족 특성]인 건 아니죠?’
-그럴 리가. 요괴들의 [종족 특성]은 인간들과 비슷하다. 인간이 에테르를 저들의 형식으로 소화하는 것처럼, 요기를 다루는 거지.
‘그럼 이상한 수를 쓸 가능성은-’
-흠……. 그럴 가능성은 낮을 듯하군. 네놈도 이 자리에 있는 요괴 놈들의 ‘격’이 하찮다는 걸 느꼈지 않나? 방금의 시퍼런 불덩이나, 저 듣기 싫은 추임새가 그나마 위협적일 거다.
‘그러면 뭐…….’
강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 추임새에 요괴들이 이성을 잃는 걸 보고 혹시 더 귀찮은 능력을 가진 놈이 있나 싶어서 물어봤는데, 요괴의 [종족 특성]을 따로 파악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그렇다면 남은 건 하나였다.
[스킬, 강림[Lv.1]을 발동합니다.]
쿠오오-
이 자리를 정리하는 것뿐.
순백의 빛을 온몸에 휘감은 강현이, 요괴들을 휩쓸어가기 시작했다.
* * *
소탕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끄허억……! 네, 네놈을 두령님이 가만두지 않으실-”
“두령은 지옥에 가서나 찾으시고.”
푹.
홀쭉한 초록 요괴를 끝으로 모든 요괴를 쓰러뜨린 강현은 검을 털었다.
그때였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
[취할 수 있는 에테르가 감지되었습니다. 취하시겠습니까?]
[현재 취한 에테르의 양(205/1,000)]
자잘한 메시지들과 함께, 기다리던 메시지가 떠올랐다.
[여섯 번째 시험을 통과하셨습니다.]
[500pt가 지급됩니다.]
[시험을 여섯 번째로 빨리 통과하셨습니다.]
[300pt가 추가 지급됩니다.]
[추가 보상을 준비 중입니다…….]
[순위에 따른 보상의 정산을 완료했습니다.]
[보상을 지금 수령하시겠습니까? (Yes/No)]
여섯 번째로 통과했다는 문구에 강현의 입가에 미소가 깃들었다.
‘서두른 보람이 있군.’
스아아-
그는 손을 뻗어 에테르를 흡수하는 한편, 보상을 확인했다.
[신의 열매를 습득합니다.]
신의 열매
-진귀한 신계의 영약입니다. ‘격’의 상승에 도움을 주는 신력이 다량 함유되어 있습니다.
이번에는 가호 대신 에테르가 나왔지만,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좋아.’
‘격’이 1,000에 도달하기까지 요원했었는데, 도움이 되어줄 듯했다.
강현은 즉각 손을 내밀어 에테르를 흡수했다.
스아아…….
[현재 취한 에테르의 양(510/1,000)]
“오.”
무려 300가량 늘어난 에테르를 본 강현의 미소가 더욱 진해졌다.
‘절반이나 채웠네.’
과연, 본선답게 화끈한 보상이었다.
지금과 같은 영약을 한 번만 더 받을 수 있다면, 까마득하게 느껴졌던 8단계도 머지않을 것 같았다.
-흥, 신의 열매는 신계에서도 없어서 못 먹는 영약이다. 그런 귀한 걸 이딴 서브 미션에서 또 줄 거라고 여기는 건 아니겠지?
그의 성장 속도에 심통이라도 난 듯한 엔딜 펠란의 말을 들으니 더욱 그러했다.
[잠시 후, 일곱 번째 시험이 시작됩니다.]
[참가자의 행동에 따른 시험의 주제를 구성하고 있습니다…….]
[일곱 번째 시험까지 남은 시간 : 0시간 05분]
보상을 확인하자 기다렸다는 듯 안내 메시지가 나타난다.
“……5분밖에 안 준다니.”
강현의 입에서 볼멘소리가 나왔다.
시간이 너무 적다고 느껴졌다.
그러나 이내, 지금의 이게 연속적인 상황이라는 걸 상기하자 그럴 만하다고 생각됐다.
부스럭-
“마, 망태 할아버지!”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뒤를 돌아보자, 웬 조그마한 꼬마 도깨비가 포로로 끌려가던 요괴 중 하나의 포박을 풀고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요기가 새어 나올 뿐, 평범한 노인과 다를 것 없어 보이는 요괴였다.
‘그러고 보니 포로들이 있었군.’
사악한 요괴들이 수를 쓴 건지, 다들 정신을 잃은 상태였다.
하지만 꼬마 도깨비는 아랑곳 않고 일단 노요괴의 포박을 풀더니, 다시 쪼르르 이동하여 다른 요괴의 포박을 풀기 시작했다.
“…….”
강현은 잠시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만약 자신이 조금만 더 늦게 왔더라면 저 포로들은 구출되지 못했을지도 몰랐다.
그렇게 생각하자 기분이 묘해졌다.
그는 검을 빼 들며 포로들에게 다가갔다.
서걱-
가볍게 검을 내리긋는 것만으로 포로들의 포박이 삽시간에 풀려 간다.
꼬마 도깨비가 붙잡은 포로를 제외한 나머지 포로들을 풀어준 강현은 꼬마 도깨비에게 다가갔다.
꼬마 도깨비는 아직도 낑낑대며 포박을 푸는 중이었다.
“꼬마야, 비켜봐. 풀어줄 테니까.”
“……!”
뒤를 본 꼬마가 흠칫 놀랐고, 강현은 꼬마 도깨비를 자세히 살펴볼 수 있었다.
언뜻 보기에는, 5살 정도의 사내아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 아담한 체구였다.
그렇지만 연녹색 피부와 이마에 난 두 개의 짤막한 뿔이 꼬마가 도깨비라는 걸 말해주었다.
강현을 올려다보던 꼬마 도깨비는 꼬깃거리며 자리를 피해주었고.
서걱-
강현은 마지막 포로의 포박까지 잘라내 주었다.
‘이걸로 됐고……. 이제 슬슬 다음 안내 메시지가 뜰 때가 됐는데.’
나름의 선행을 마친 강현이 돌아서는데.
“저, 저는 유각인데요……. 누, 누구세요?”
뒤에서 꼬마 도깨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유각.
꼬마 도깨비의 이름인 듯했다.
강현이 가만히 있자 유각이 재차 물어왔다.
“혹시…… 어디서 오셨는지 알려주실 수 있나요? 아랫마을…… 은 아닐 테고. 대수림? 설원? 아니면-”
“그건 왜 묻는 거지?”
강현의 말에, 유각이 똘망똘망하게 답했다.
“으…… 은혜를 갚고 싶어요!”
은혜라.
피식 웃은 강현이 고개를 저었다.
“은혜는 안 갚아도 돼. 갚을 수도 없을 거고.”
“왜, 왜 그렇죠?”
“그야, 난 밖에서 왔으니까.”
강현은 밖이라고 말하면 유각이 이해할 거라 여겼다.
그런데.
“밖? 무슨 밖을 말하는 거죠?”
의아하다는 얼굴을 하며 고개를 갸웃거리는 게 아닌가.
“탑의 밖 말이야. 탑 몰라?”
“탑……?”
강현이 ‘탑’이라는 것까지 말해주어도 모르는 눈치였다.
‘여기가 탑 안이라는 걸 모르는 건가?’
그 모습에 강현이 이상함을 느낀 순간이었다.
팟-
[일곱 번째 시험이 시작됩니다.]
[일곱 번째 시험의 주제는 ‘파괴’입니다.]
[제3 요괴촌을 노리던 사악한 요괴들을 물리치는 데에는 성공했으나, 그들의 6층 근거지를 파괴하지 않는다면 제3 요괴촌의 위기는 다시 재래할 것입니다. 또한, 최근 수상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기도 합니다. 그들의 근거지를 파괴하고, 탑의 균형을 깨려는 그들의 야욕에 대해 알아내세요.]
[사악한 요괴들의 6층 근거지를 파괴하면 일곱 번째 시험이 종료됩니다.]
메시지를 훑어 내려간 강현은 곧장 지도를 불러냈다.
지잉-
조금 멀긴 했어도, 바로 간다면 지금의 클리어 속도를 이어나갈 수 있을 듯했다.
[스킬, 천광의 날개[Lv.2]를 발동합니다.]
슈와아아-
강현의 등 뒤에서 다시금 날개가 나타난다.
이 안이 탑이라는 걸 모르는 유각이 기이하기는 했어도, 지금은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자, 잠깐만요!”
유각이 무어라 말하려 했지만.
“그럼 꼬마야, 저 요괴들이랑 잘 있어라.”
펄럭-
그대로 날아오른 강현은, 한 점의 빛이 되어 빠르게 멀어져갔다.
“…….”
그리고 멀어지는 그를, 유각은 계속해서 바라보았다.
한 점의 빛이 된 그가 보이지 않게 된 이후에도, 하염없이.
* * *
쿠오오-
지도에 표시된 요괴들의 근거지가 가까워져 온다.
띠링.
메시지 수신음에 강현은 슬쩍 내용을 확인했다.
어둠의 사령술사(54위) : 하아……. 어떻게 무인도에서 버티신 겁니까. 역시, 악마라는 종족의 힘 덕분인지요. 부러울 따름…….
“……또 시작이네.”
사령술사의 메시지를 본 강현의 표정이 와락 구겨졌다.
보낸 지 얼마나 됐다고 또 메시지를 보내오는 건지.
귀찮기도 했지만, 저 한없이 자신을 낮추는 듯한 말투가 거슬렸다.
-아무래도 칭호도 그렇고, 악마를 추종하는 놈인 듯하군.
‘그러게 말입니다.’
묘하게 뿌듯해 보이는 엔딜 펠란의 말에 대충 동의한 강현은 메시지창을 꺼버렸다.
쿠오오-
놈들의 근거지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깅현은 사악한 요괴들의 근거지를 내려다보았다.
중앙에 웬만한 건물만 한 목탑이 떡하니 자리한 걸 제외한다면, 민속촌을 보는 듯했던 제3 요괴촌과 크게 다를 게 없어 보였다.
‘저기에 그 두령이란 놈이 있는 건가.’
홀쭉한 초록 요괴는 분명 ‘두령’이 자신을 혼내줄 거라 말했었다.
지휘관으로 추측됐고, 그 지휘관이 있을 만한 곳이 바로 저 목탑이었다.
목탑을 유심히 살핀 강현의 시선이 나머지를 마저 훑었다.
초가집으로 보이는 것들이 드문드문 놓여 있는 가운데, 그리 높지 않은 담벼락이 둥글게 세워져 있었다.
기감을 확장시켜 보아도 딱히 경계를 서는 인원이 느껴지지 않았기에, 그는 천광의 날개와 광검을 해제한 뒤 그대로 담벼락을 넘었다.
그런데.
“---!”
우당탕탕!
근거지 내부에서부터 요란스러운 소음이 들려온다.
-다 끝났나?
-아, 아직 안 됐습니다요.
-빨리 준비해! 시간이 없다!
-예, 옛!
이 같은 소리들이 각지에서 들려오고 있던 것이다.
뭔 일인지는 몰라도 한창 바쁜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걸 깨달은 순간, 강현은 슬쩍 웃어 보였다.
털어야 할 곳이 소란스럽다는 건, 그에게는 좋은 일이었으니까.
‘최대한 빨리 정리하고 넘어간다.’
소란스러운 근거지 사이로, 강현의 신형이 사라져 갔다.
* * *
-오우 쒯, 진행 빠른 거 보소?
-붉은 악마 시원시원하고 좋은데?
-ㅇㅇ 처음 예상했던 것보다 잘하고 있긴 함
-다른 상위 종족들도 3, 4층에서 개고생했는데 쟤는 어떻게 수루룩 지나간 거지? 안 믿겨;;
-수루룩 지나갔으니까 아직도 6등이지ㅋㅋㅋ
-그나저나 아까 붉은 악마가 꼬마한테 말한 거 왜 스포일러 처리 안 된 거? 원래 막혀야 되잖슴
-모름. 더 비욘드도 생각 없는 듯. 저 꼬마가 알기라도 하면 어떡하려고.
-뭔 상관? 이미 %[email protected]$ 신세라는 걸 알아서 저 난리가 난 건데.
-그니깐ㅋㅋㅋ 저거 해결하라고 참가자들 집어넣은 건데 저딴 꼬마가 알면 뭐 어떰ㅋㅋ
-얘들아 잠깐만. 지금 5등 미끄러졌다
-5등? 녹빛 군주?
-ㅇㅇㅇ 지금 어두워서 눈도 잘 안 보이고 답답하다고 난리임
-아직도 요괴촌에 진입 못 하고 있음
-어이가 없네ㅋㅋㅋㅋ
-ㅋㅋㅋㅋ 누가 오크 아니랄까 봐 레전드네
-어? 잠깐만. 그럼 이거…… 잘하면 붉은 악마가 5등 먹는 거 아님?
-어……?
-혹시……?
“서둘러 움직여라! 두령께서 시간이 없으시단다!”
붉은 갑주를 걸친 중급 요괴, 야차들의 불호령이 곳곳에서 울려 퍼진다.
“옛!”
“예이!”
그 명령을 따라 하급 요괴들이 바삐 물자를 나른다.
재물과 요기가 깃든 잡동사니들이었다.
물자들을 날라 마을 중앙의 요탑(妖塔)에 가져다 놓고 다시 물자를 가지러 돌아가는 수백 마리 요괴들의 행렬이 마을 전체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끄응……!”
큼지막한 장롱 하나를 등에 지고 이동하는 하급 도마뱀 요괴, 바롱도 그중 하나였다.
“오늘이 가기 전까지 넘어가야 하니 빨리빨리 이동햇!”
“예, 예이, 고생하십니다요!”
자신에게 무섭게 눈을 부라리는 야차에게 그가 헤헤 웃어 보인다.
그러던 것도 잠시, 야차를 지나치자마자 그는 표정을 잔뜩 일그러뜨렸다.
‘망할 야차 놈들, 망할 두령.’
평소라면 휴식에 들어갔어야 할 시간인데, 쉬기는커녕 이 밤중에 물자들을 나르고 있다니.
이게 다 최대한 빨리 채비를 갖추라는 명령이 급작스럽게 내려와서였다.
‘개 같은. 요력 단련도 포기하고 야밤에 어딜 간다는 거야?’
요괴들의 힘의 원천, 요기는 밤이 깊어질수록 그 밀도가 짙어진다.
따라서 거의 모든 요괴들은 새벽까지 요력을 단련하는 데에 집중한다.
바롱도 그중 하나였다.
한데 난데없이 물자를 나르는 바람에 요력 단련을 강제로 포기하게 되자 짜증이 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아니야.’
이내 그는 마음을 고쳐먹었다.
두령과 야차들도 요괴다.
그들도 요력 단련을 포기하면서까지 이렇게 하는 이유가 있을 터였다.
또한 그 같은 판단에는, 바롱이 얼마 전 ‘탈출’을 위한 이 세력에 합류한 이후로 점점 강해지고 있다는 것도 한몫했다.
계속해서 다른 요괴촌을 공격하여 그들의 요력을 빼앗음으로써 강해져 온 것이다.
그걸 고려한다면 지금은 매우 화가 나긴 해도, 길게 봤을 땐 더 강해질 수 있을 거라 예상됐다.
‘뭘 탈출한다는 건지는 모르겠다만…….’
사실 ‘탈출’을 위한 이 거사에 동참하고는 있으나, 그는 정확한 건 잘 몰랐다.
그저 강해질 수 있다고 꼬드기길래 들어온 것일 뿐이었다.
다만 소문에는 그처럼 모인 요괴들이 무려 수만 마리나 된다고 하니, 들어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모든 요괴들이 뭉친다면 대수림을 넘어 설원까지 정복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골목을 하나 돌았을 때였다.
스윽.
“……?”
뭔가 기이한 느낌에 그는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그 순간.
푸욱!
날카로운 검이 그를 덮쳤다.
* * *
잠시 후.
강현은 바닥에 쓰러져 숨을 헐떡이는 청록빛의 도마뱀 요괴를 내려다보았다.
“끄으으……. 이, 이제 말할 것도 없습니다! 제가 아는 건 그게 다란 말입니다……!”
“조용히 해.”
강현이 검으로 쿡쿡 찌르자, 요괴가 급격히 조용해진다.
“으으……. 아, 아무튼 아는 건 다 말했습니다. 더 이상은 정말 모릅니다요…….”
“…….”
부들부들 떠는 요괴에게서 눈을 떼지 않으며 강현은 대강의 정보를 정리했다.
‘기다리고 있길 잘했네.’
요괴들의 근거지에 숨어든 그는 일단 정보를 파악하는 게 가장 먼저라고 판단했다.
해서 그나마 요괴들이 없는 곳을 찾아 잠복한 끝에 이 도마뱀 요괴를 붙잡아 심문할 수 있었다.
중간중간 스포일러 처리가 되긴 했지만, 문맥상 이해하는 데에는 무리가 없었다.
‘얼마 전부터 하급 요괴들에게 ‘탈출’하지 않겠냐는 제안이 들어왔고, 저놈을 포함한 상당수 요괴들이 거기에 넘어갔다는 거군. 이런 근거지가 이곳만이 아니라 수십 개가 더 있기까지 한다라…….’
여기서 도마뱀이 말한 ‘탈출’이란, 필시 균형의 탑에서의 탈출을 의미하는 것일 터였다.
어떻게 ‘탈출’한다는 건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사태가 보통이 아니라는 건 바로 느껴졌다.
탑 밖으로 나가고자 자그마치 수만에 달하는 요괴들이 뭉친 것이다.
‘탈출’이라는 명목하에 그들이 부릴 패악질을 생각해 보면 심각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남은 건 이 밤중에 소란을 피우면서 뭘 하려느냐는 건데…….’
-아마 저놈은 모를 거다.
엔딜 펠란이 끼어들었다.
-느껴지는 요기를 보면 하급 요괴인 듯한데, 요괴는 ‘격’이 낮을수록 참을성이 없고 본능적이다. 저렇게까지 모른다고 하는 걸 보면 정말 모를 가능성이 크지.
일리가 있는 말이었기에 강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도 벌벌 떨면서 그의 눈치만 보고 있다.
놈에게서 느껴지는 ‘격’의 수준이 지극히 낮다는 걸 생각한다면, 연기일 리가 없었다.
하나, 다행히 도마뱀 요괴가 그걸 모른다는 게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두령은 어디 있지?”
강현이 물었다.
두령이 이 근거지의 책임자라면, 놈에게서 들으면 될 일이었다.
다수를 상대할 때 대장을 먼저 처리하는 건 상식 중의 상식인 데다가, 두령이라는 놈이 어디로 이동하는 건지도 모를 리는 없었으니까.
대답은 즉각 돌아왔다.
“요력구를 지켜야 된다고 잘 나오지도 않으니까 아마 요탑 꼭대기에 있을 겁니다요……!”
“요탑은 목탑을 말하는 거겠고……. 요력구? 그건 뭐지?”
“요, 요력구는 요력이 든 구슬입죠! 그게 없으면 이곳이 안 돌아간다고, 그래서 그 옆을 한시도 떨어지지 않는다고 들었습니다요…….”
“흐음.”
강현이 턱을 괴었다.
요력구라는 단어만 보면 마정석에 마력이 든 것과 비슷하다고 느껴졌는데, 두령이란 놈이 그게 없으면 이 근거지가 돌아가지 않는다고 말했다는 걸로 보아 일종의 게이트의 핵 역할을 하는 모양이었다.
‘그럼 요력구를 박살 내는 게 이 시험의 목표일 수도 있겠는데.’
안 그래도 근거지를 파괴하라는 시험의 내용에 의문이 들던 참이었다.
이 근거지를 다 박살 내라는 말이 지나치게 추상적이었던 것이다.
혼자 부수기에 이 근거지는 지나치게 넓었다.
그런데 요력구라는 걸 듣자 대충 감이 왔다.
‘요탑으로 가야겠네.’
강현이 떠날 기색을 보이자 도마뱀 요괴의 얼굴이 환해졌다.
“저, 저는 이렇게 바닥에 있는 게 편하니까 갈 길 가시면-”
도마뱀 요괴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푸욱-
“컥……왜, 왜…….”
부르르…….
약점인 목을 꿰뚫린 채 경련하던 도마뱀 요괴가 엎어진다.
강현은 검을 흔들어 샛노란 피를 털어냈다.
-호오, 살려주지 않는 것이냐?
‘어차피 이 순간을 모면하려고 협조한 걸 텐데, 제가 가면 뭔 짓을 할 줄 알고 살려줍니까.’
짤막하게 대꾸한 강현이 자리를 벗어났다.
[스킬, 질주[Lv.3]를 발동합니다.]
* * *
팟-
워낙 요탑의 존재감이 컸기에 길을 찾기는 쉬웠다.
그 대신, 들어가기까지가 문제였다.
도마뱀 요괴가 말했듯 요괴들은 어딘가로 이동할 준비를 부산스럽게 하고 있었는데, 그 수가 무려 수백 마리에 달했던 것이다.
아무리 강현이라 할지라도 저 정도 수의 요괴들을 한꺼번에 상대한다면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으리라는 보장이 없었다.
때문에 그는 빨리 진입하려는 마음을 접은 채 조심스럽게 접근했고, 그나마 요괴들이 없는 곳을 골라 이동한 끝에 요탑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다.
[스킬, 순보[Lv.4]를 발동합니다.]
순보를 발동하여 내부로 진입한 강현은 기감을 끌어올렸다.
“…….”
원래 내부에는 경계가 없는 건지, 준비를 하느라 다들 외부로 나간 건지는 몰라도, 이렇다 할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뭐가 됐든, 소란을 일으킬 그에게는 잘된 일이었다.
‘가볼까.’
도마뱀 요괴가 말하길 두령은 최상층에 있다고 했다.
다른 요괴들의 기척도 없겠다, 강현은 곧장 최상층으로 이동했고.
[스킬, 순보[Lv.4]를 발동합니다.]
[스킬, 순보[Lv.4]를 발동합니다.]
…….
슈욱-
볼 수 있었다.
“네놈은 뭐지? 어떻게 여길 올라온 거냐!”
느닷없이 나타난 강현을 보며 눈을 끔뻑이는, 거대한 두꺼비 요괴를.
[Lv. 60 오오가마]
레벨과 더불어 뿜어지는 요기가 상당한 걸로 보아 이 근거지의 두령이 확실했다.
이어서 두꺼비의 뒤에 놓인, 주먹만 한 샛노란 구슬을 본 강현의 눈이 가늘어졌다.
‘저건…….’
쿠오오-
매우 짙은 요기가 새어 나오는 걸로 보아, 저게 바로 요력구인 듯했다.
“네놈은 뭐냐니까? 내 말이 들리지 않는 거냐?”
쿠웅.
처음에는 그렇게 말하며 다가오던 두꺼비 요괴였지만.
[스킬, 광검[Lv.9]을 발동합니다.]
쿠콰콰-
강현이 광검을 발동함과 함께 기세를 방출하자 안색이 급변했다.
“이 기세는……! 네놈은 설마…… 참가자?”
“……!”
강현의 눈에 이채가 깃들었다.
‘참가자의 존재를 알고 있어?’
유각과 도마뱀 요괴가 모르고 있던 걸 눈앞의 두꺼비는 알고 있다니.
역시 두령은 뭐가 달라도 다른 모양이었다.
물론, 그런다고 이 상황에서 바뀔 건 없었다.
[스킬, 순보[Lv.4]를 발동합니다.]
팟-
강현이 달려들려던 때였다.
크라아아악!
돌연, 두꺼비의 입에서 어마어마한 외침이 터져 나왔다.
“……!”
놈이 요괴들을 부르는 건가 싶어 강현은 기감을 최대로 확장시켰지만.
‘오히려 멀어지고 있잖아?’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 괴상한 외침이 들리자마자 빠르게 요괴들이 이곳을 벗어나기 시작한다는 게 느껴진 것이다.
“요괴들을 어디로 보내는 거지?”
“크흐흐……. 그걸 말해줄 것 같으냐.”
“…….”
“이 자리에서 내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거사는 기필코 치르겠다!”
두꺼비의 말을 들은 강현은 깨달았다.
아무래도 자신을 막지 못할 수도 있으리라는 판단하에 저렇게 나온 걸로 보였다.
‘만약 나를 못 잡는다면 괜히 요괴들의 숫자만 줄어드는 셈이니까 차라리 상대를 안 하겠다는 건가.’
멀어지는 요괴들을 어떻게 할지 잠깐 고민이 됐으나, 일단 눈앞의 상대에 집중해야 할 듯했다.
쾅!
“방해하지 말고 썩 꺼져라, 참가자!”
두꺼비의 육중한 몸이 포탄처럼 쏘아져 오고 있었으니까.
쿠오오-
스치기라도 한다면 최소 중상을 입을, 위협적인 공격.
그러나 강현은 간단하게 몸통박치기를 피해냈다.
비록 두꺼비의 레벨이 60이긴 했어도, 강현의 능력치는 60을 한참 뛰어넘은 상태.
[스킬, 여명의 눈[Lv.4]을 발동합니다.]
여명의 눈까지 발동한 데에서 알 수 있듯이, 두꺼비는 강현의 상대가 아니었다.
쾅! 콰콰쾅!
“크윽! 이놈!”
그 뒤 두꺼비는 독을 뱉고, 작은 두꺼비들을 소환하는 등 적극적으로 저항했으나 승패는 금방 갈렸다.
푸욱!
광검이 두꺼비의 이마를 파고 들어가면서, 두꺼비가 그대로 쓰러졌다.
“크악! 가만두지 않겠-”
서걱-
두꺼비를 조용하게 만든 강현은 뒤에 놓인 요력구로 다가갔다.
-그 요력구를 깨면 요력이 새어 나갈 거다.
파삭-
엔딜 펠란의 말대로 요력구를 깨자 요력구로부터 엄청난 요력이 폭증했고.
[일곱 번째 시험을 통과하셨습니다.]
[500pt가 지급됩니다.]
[시험을 다섯 번째로 빨리 통과하셨습니다.]
[300pt가 추가 지급됩니다.]
[추가 보상을 준비 중입니다…….]
일곱 번째 시험이 종료되었음을 알리는 메시지가 떠올랐다.
다행스럽게도 도망간 요괴들까지 처리할 필요는 없는 것 같았다.
‘다섯 번째라.’
순위를 본 강현이 눈을 반짝였다.
드디어 5위권에 진입한 것이다.
“크으……. 원통하다!”
하나 무어라 감흥을 내뱉기도 전, 두꺼비의 속삭임이 들려왔다.
“……끈질기군.”
강현이 확실히 숨통을 끊으려는데.
“크흐흑…… 망할 @#$ 때문에 갇혀 있던 걸 탈출할 기회였는데……! 커허어엉-!”
죽어가면서도 뭐가 그리 억울한지, 두꺼비가 엉엉 우는 게 아닌가.
그러더니.
“크흐흐, 네놈, 그 경연에서 &@하지 않는 게 좋을 거다……. 우리처럼 #$%고 싶지 않다면……. 크흐…….”
울음을 마지막으로 두꺼비의 숨소리가 그대로 끊어졌다.
[잠시 후, 여덟 번째 시험이 시작됩니다.]
[참가자의 행동에 따른 시험의 주제를 구성하고 있습니다…….]
[여덟 번째 시험까지 남은 시간 : 0시간 5분]
찝찝한 말을 남긴 두꺼비의 영향일까.
다음 시험을 알리는 메시지가 떠올랐음에도 강현은 얼굴을 구겼다.
두꺼비의 말이 계속 뇌리를 맴돌았다.
요괴들이 여태까지는 왜 나가지 못했는지, 또 왜 나가려고 하는지에 대한 의문이 솟아올랐다.
이상한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두꺼비는 마지막에 더 비욘드로 추정되는 단어를 언급하기까지 했다.
‘이 탑에서는 더 비욘드 본선이 이루어진다. 그 말은, 더 비욘드가 이 요괴들을 가두었다는 건가? 왜?’
그 후로도 몇 가지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생겨났지만, 명확한 답은 내려지지 않았다.
“후우.”
강현이 한숨을 내쉬었을 때였다.
[순위에 따른 보상의 정산을 완료했습니다.]
[보상을 지금 수령하시겠습니까? (Yes/No)]
나타난 메시지에 강현의 표정이 살짝 풀어졌다.
그도 그럴 게, 보상은 언제나 옳았으니까.
그것이.
[역행의 모래시계를 습득합니다.]
무엇인지 알 수 없는, 그러나 딱 봐도 귀해 보이는 거라면 더더욱.
여태까지 보상으로 받았었던 가호도, 영약도 아닌 ‘아티팩트’.
강현은 즉각 상세 설명을 확인했다.
역행의 모래시계
-<초월계>의 괴짜 장인이 손수 제작한 모래시계의 편린입니다. 단 두 번에 한해, ‘역행’을 사용할 수 있게 됩니다.
역행 : 사용자의 신체 상태를 30분 전으로 되돌립니다. 사망한 이에게는 사용할 수 없습니다(0/2).
“오…….”
얼핏 보기에도 엄청난 효과에 강현이 나직이 탄성을 내뱉었다.
사용자의 몸 상태를 되돌릴 수 있다니.
팔다리가 잘려도, 마력이 고갈되어도 두 번에 한해 회복이 된다는 말로 보였다.
그때였다.
-흐음. 진품은 아니군.
엔딜 펠란이 아는 척을 한 것은.
‘아는 아티팩트입니까?’
-그래, 괴짜 장인이라는 걸 보니 누군지 알 것 같군. 어차피 스포일러 처리가 될 테니 이름은 말하지 않겠다만, 아마 난쟁이 놈일 거다.
‘난쟁이? 난쟁이면…… 드워프를 말하는 겁니까?’
난쟁이라는 종족은 세 번째 미션을 하면서 마주했던 적이 있었다.
-그렇다고 봐도 될 거다.
‘…….’
강현은 수수께끼의 검을 새삼스러운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엔딜 펠란이 이 모래시계를 만든 주인을 직접적으로 알고 있다니 뭔가 신기했다.
어쩌면, 엔딜 펠란은 그의 상상 이상으로 강대한 존재였을지도 모른다.
-갑자기 뭐지? 흑마석이라도 주려는 건가? 아직은 필요 없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물론, 그걸 입 밖으로 꺼냈다가는 엔딜 펠란의 거들먹거림을 들어야 할 게 분명했기에 언급하지는 않았다.
-아무튼 쓸 만한 아티팩트를 보상으로 받았군.
‘그런 것 같네요’
강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생각해 봐도 역행의 모래시계의 ‘역행’ 스킬은 말도 안 되는 것이었다.
이번 시험뿐만 아니라 앞으로의 미션에서도 두고두고 유용하게 쓸 수 있으리라.
스윽-
강현이 아공간 주머니에 모래시계를 집어넣었을 때였다.
팟-
[여덟 번째 시험이 시작됩니다.]
[여덟 번째 시험의 주제는 ‘추월’입니다.]
메시지가 떠올랐다.
[사악한 요괴들의 6층 근거지 중 하나를 파괴했지만, 상당수의 요괴들이 현재 7층과 8층을 가로질러 9층을 총공격하기 위해 이동하고 있습니다. 그들을 막지 않는다면 탑에 크나큰 위기를 초래할 것입니다. 그들보다 먼저 이동하여 요괴들의 거사를 경고하세요. 참가자 ‘붉은 악마’가 가야 할 곳은 9층의 제7 얼음성채입니다.]
“음?”
강현의 눈에 의아함이 깃들었다.
“……총공격이라고?”
분명 두꺼비가 이렇게 말하기는 했다.
-이 자리에서 죽는 한이 있더라도 기필코 거사를 치르겠다!
하나 그 이상은 끝까지 말해주지 않았기에, 거사의 내용이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런데 이 메시지에서는 거사의 내용을 아예 총공격이라고 상정하고 있는 듯했으니, 의문이 생기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래도 다른 놈들이 얻어낸 정보를 취합한 정보 같군.
‘다른 놈들?’
-다른 참가자들 말이다. 네놈이 요괴들을 소탕한 것처럼, 다른 놈들도 요괴들을 소탕했을 것 아니냐.
‘아.’
강현은 엔딜 펠란의 말의 의미를 깨달았다.
도마뱀 요괴는 이 같은 근거지가 수십 개에 달한다고 말했었다.
즉, 근거지들을 모두 파괴하려면 자신만이 아니라 나머지 참가자들도 모조리 투입되어야 했을 거고…….
‘누군가 근거지를 박살 내면서 ‘거사’가 뭘 뜻하는 건지 알아냈다는 거군요.’
-그렇지.
일종의 집단지성이라고 봐도 될 듯했다.
-이 몸이 보기에, 이미 이 서브 미션의 내용은 정상이 아니다. 정상적이라기엔 5층까지의 시험과 6층 이후의 시험 내용이 너무 다르지 않나?
‘확실히…….’
강현은 1층부터 5층까지의 시험을 되짚어보았다.
1층부터 5층까지는 층마다 시험하고자 하는 자질이 있었고, 시험의 내용도 그와 대강 부합했다.
반면 6층부터는 그런 것 없이, ‘탈출’하려는 요괴들을 저지하는 시험을 수행하게 됐다.
‘요괴들이 뭉쳐서 탈출하려는 이 상황이, 돌발적으로 일어났을 가능성이 크군요.’
-그래, 그걸 해결하고자 네놈들을 밀어 넣은 걸 거다. 어째서 더 비욘드가 직접 뛰어들지 않았는지는 이 몸도 모르겠다만, 요괴들이 말썽을 부리지 않았다면 미션의 내용도 달라졌겠지.
‘…….’
그 말을 듣자 기분이 묘해졌다.
요괴들이 왜 탑 밖으로 나오지 못하는 건지, 왜 요괴들의 거사에 더 비욘드가 직접 개입하지 않는 건지, 또 두꺼비가 마지막에 더 비욘드를 언급했던 의도가 뭔지 그는 모른다.
한데도 단지 시험이라는 이유만으로 그들의 일에 직접적으로 개입하고 있다.
기분이 묘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지도’를 불러 위치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강현은 지금은 깊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풀리지 않은 정보가 잔뜩이긴 했어도 이건 미션의 일환이었다.
그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건 더 비욘드에서 끝까지 살아남는 것.
그걸 고려한다면, 최선의 결과를 이루어낸 뒤에 의문을 고민해 봐도 늦지 않을 터였…… 는데.
지잉-
지도를 펼쳐본 강현이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뭐가 이렇게 넓어? 아……. 6층부터 9층까지 합쳐져 있어서 그런 거구나.”
1층부터 5층까지가 수직적으로 층이 나누어져 있던 것과 달리, 6층부터 9층은 평면적으로 합쳐져 있었다.
그런데 구역마다 색깔이 칠해져 있어 마치 눕힌 무지개떡을 연상케 했다.
지도상에 요계는 붉은색, 7층 대수림은 녹색, 8층 설원은 푸른색, 9층 얼음성은 청록색으로 나타나 있었다.
문제는 여기서 발생했다.
네 개의 층이 합쳐져 있어서인지, 지도의 너비가 말도 안 되게 방대했던 것이다.
게다가 그가 가야 하는 곳인 9층의 제7 얼음성채는, 그의 현 위치에서 한참 대각선에 자리해 있었다.
가뜩이나 현재 위치를 나타내 주는 붉은 점도 없거니와 이정표로 삼을 지형지물도 마땅치 않았기에, 어림짐작으로 막 갔다가는 자칫 엉뚱한 곳에 착지하거나 길을 잃고 헤맬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랬다가는 요괴들을 ‘추월’하기는커녕, 한참 늦게 도착할 것이었다.
“하……. 그래도 일단 가 보기는 해야겠는데.”
한숨을 내쉰 강현이 출발하려는데.
부스럭-
누군가의 기척이 느껴졌다.
‘요괴가 남아 있었나?’
그 순간 강현의 신형이 꺼지듯 사라졌다.
[스킬, 광검[Lv.9]을 발동합니다.]
[스킬, 순보[Lv.4]를 발동합니다.]
사악한 요괴가 숨어 있는 거라면, 바로 처단할 준비를 마치고서.
팟-
“……!”
소리의 원인을 찾아낸 그는 멈칫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어, 어…… 으…….”
소리를 낸 게 요괴는 맞았으나, 거사를 치르려는 요괴는 아니었기에.
“…….”
강현이 눈을 깜빡이는 가운데 눈을 질끈 감은 꼬마 도깨비, 유각이 크게 외쳤다.
“요, 요괴들을 쫓으시려는 거면 제가 길을 알아요! 대수림부터 설원, 얼음성까지 다요!”
유각의 외침을 들은 순간이었다.
-허, 떡이 제 발로 굴러들어온 격이군.
엔딜 펠란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중얼거렸고.
‘그러게 말입니다.’
강현은 씩 웃으며 스킬을 발동했다.
[스킬, 천광의 날개[Lv.2]를 발동합니다.]
“내 등에 탈래? 아니면, 양팔로 들고 갈까?”
* * *
-아니, 저게 저렇게 된다고?
-하다 하다 현지인한테 도움을 받넼ㅋㅋ
-저거 치트키 아님? 걍 노잼으로 싱겁게 끝날 거 같은데
-그니까. 먼저 가서 대비 다 해버리면 무슨 재미임
-본대 말고도 먼저 가는 요괴들 있어서 노잼은 안 될 듯
-본대 말고도 더 있음? 어? 그러네?
-ㅇㅇㅇ 선발대 있음
-나도 찾았다. 근데 선발대가 뭐 저리 많지? 몇백은 되겠는데
-까딱하다간 도착하기도 전에 무너지겠는데
-아닠ㅋㅋ 현지인 도움받으면서 빨리 가도 아슬아슬하다고?ㅋㅋㅋ 다른 애들이 가는 성채도 다 그럼?
-ㄴㄴ 쟤 포함 몇 명만 그런 듯?
-뭐야 그게ㅋㅋㅋㅋㅋ 더 비욘드 이 XX들 시험 제대로 안 만드네
-ㅋㅋㅋ 지금 이 정도로 대규모 반란 일어난 적 없어서 바쁠 거임
-근데 그럼 붉은 악마 같은 애들한테 손해 아닌가요? 저러다 시험 실패하면 누가 책임지나요
-모름ㅋㅋ 대신 클리어하면 그만큼 보상은 해줄 듯?
-그러면 그나마 다행이네…….
-ㅋㅋ 하여간 개판이라니까
-ㄹㅇㅋㅋ
…….
* * *
쿠오오-
상공을 가르며 날아가는 길.
“여기서부턴 쭉 직진하면 돼요! 그러면 곧 도착할 거예요.”
“그래, 고맙다.”
강현은 유각의 말을 따라 방향을 틀었다.
슈와아-
그로서는 다행히도, 유각은 길을 제대로 알고 있었다.
-출발하기 직전까지도 이상한 곳으로 안내할까 봐 불안해하지 않았느냐.
‘그건…… 넘어갑시다.’
엔딜 펠란이 툴툴댄 것처럼, 요괴촌에 살던 유각이 7층의 대수림과 8층의 설원, 9층의 얼음성을 가 보기나 했을까 긴가민가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유각이 말하길 요괴들이 거사를 도모하기 전까지는 자주 왕래가 있었고, 자연스레 길을 익혔다고 한다.
실제로 저 멀리 제7 얼음성채가 가까워져 오는 걸로 보아 정말인 듯했다.
띠링.
어둠의 사령술사(54위) : 저는 이제 지긋지긋한 4층에서 벗어나 5층에 진입할 것 같습니다…….
‘……바빠죽겠는데 또 시작이네. 차단 기능 없나?’
사령술사의 메시지를 본 강현이 인상을 팍 썼다.
자신은 시험을 치르는 것만으로도 벅찬데, 이놈은 54위인 주제에 쉬지도 않고 메시지를 찔러보기나 하고 있다.
친목을 다지려는 건지는 몰라도, 그가 보기에는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어둠의 사령술사(54위) : 힘내시길 바라고 본선에 무사히 간다면 계약이라도…….
사령술사의 메시지를 가만히 보는 강현의 머리에 이상한 생각이 떠올랐다.
‘……혹시 사도천은 아니겠지.’
사령술사의 정체가 사도천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하나.
‘에이, 설마.’
그는 고개를 흔들어 그 생각을 털어냈다.
‘어둠의 사령술사’라는 칭호가 미심쩍기는 했으나, 사령술사의 말투는 사도천이라 하기에는 지나치게 공손했다.
뿐만 아니라, 사도천도 치열한 예선을 뚫고 올라온 참가자다.
멍청하게 ‘사령술사’라고 자신을 드러낼 리가 없었다.
“어딜 보고 계세요?”
“아, 별거 아니야.”
강현은 사령술사에게 대충 답신을 하고는 메시지 창에서 눈을 뗐다.
활짝 웃은 유각이 입을 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오면서 유각은 대수림과 설원에 대해 간단한 설명을 해주었고, 이제는 얼음성에 대해 말할 차례였다.
얼음성은 이번 시험의 목적지이기도 했기에 그는 귀를 바짝 세웠다.
“얼음성은 설인들로 이루어져 있어요! 뭔가를 지키고 있는 설인들이요!”
“지킨다고? 뭘?”
“그건…… 저도 몰라요. 엄청나게 오랫동안, 망태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때부터 얼음성을 지키고 있다는 것만 알고 있어요……!”
“아, 망태 할아버지.”
강현은 아까 요괴촌에서 유각이 망태 할아버지를 부르며 나타났던 걸 기억해 냈다.
“그 할아버지가 얼마나 사셨는데?”
“음……. 하나, 둘, 셋…….”
손가락을 접던 유각이 고개를 기울이며 말했다.
“사백 년 정도요!”
사백 년을 묵은 요괴의 할아버지 때부터 탑 안에서 살아왔다니.
적어도 천 년은 넘을 터였다.
‘요괴들이 천 년도 넘게 탑에 갇혀 있었다고……?’
상상만 해도 정신이 아득해졌다.
그런 생각을 했을 때였다.
뿌우우우우-
둥- 두둥-!
바람의 끝자락에, 뿔나팔과 북소리 같은 게 들려왔다.
아까 유각이 거의 다 왔다더니, 코앞까지 온 것 같았다.
그런데.
-노, 놈들을 막아!
-빌어먹을! 대체 어디서 튀어나온 거야?
캉! 카캉!
뿔나팔과 북소리만이 아닌, 희미한 고함과 무기들이 부딪치는 듯한 소리까지 들려오는 게 아닌가.
‘이건…….’
뭔가 일이 벌어졌다는 걸 직감한 강현은 더욱 속도를 높였고.
“……!”
볼 수 있었다.
-키아아! 설인을 죽여!
-성채를 뚫자! 성채를! 밖으로 나가는 거다!
-크어어! 막아라! 죽어도 막아야 한다!
길게 늘어진 성벽을 오르려는 수백 마리의 요괴와.
마구 창을 휘둘러 그걸 저지하려는, 온몸이 하얀 털로 덮인 거구의 설인들을.
동시에, 메시지가 나타났다.
[사악한 요괴들의 선발대가 제7 얼음성채를 공격하고 있습니다. 서두르세요.]
메시지를 읽은 강현은 어이가 없어졌다.
‘아니, 유각한테 안내까지 받았는데도 약간 늦었다고?’
그렇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그가 할 일은 정해져 있었다.
성채의 상황은, 당장 그가 합류해야 할 정도로 위태했으니까.
아무래도 즉각적인 조치가 필요해 보였다.
“안 떨어지게 꽉 잡아.”
“네, 넷!”
유각에게 경고한 강현이 선택한 조치는.
[스킬, 섬멸의 광창[Lv.2]을 발동합니다.]
[1/5의 마력을 소모합니다.]
키이이잉-
‘선물’이었다.
너무나도 귀중하여 눈이 멀어버릴 만큼의, 귀중한 선물.
쿠콰콰콰-
강현이 내쏜 광창은 요괴들의 한가운데에 떨어져.
콰콰콰쾅!
폭발을 일으켰다.
-끼에에엑!
-기, 기습이다!
-적을 파악해라아-!
그에 따라 요괴 진영에서 적지 않은 혼란이 터져 나왔지만, 강현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광검을 발동한 채, 요괴들 사이로 강하했다.
* * *
그 시각, 해가 쨍쨍하다 못해 뜨거운 망망대해.
“에, 에, 에취!”
조각배에 퍼질러 누워 있던 로브의 인영이 뜬금없이 재채기를 내뱉었다.
“……누가 내 욕이라도 하나?”
하지만 재채기를 하면서도 그의 눈은 메시지 창에 고정되어 있었다.
드디어, 악마종으로 추측되는 최상위권 참가자인 ‘붉은 악마’가 그의 연락을 받아주었으니까.
붉은 악마(5위) : 그래, 힘내라.
“그래, 힘내라…….”
인영은 ‘붉은 악마’의 메시지를 소리 내어 읽어보았다.
메시지는 짤막했지만, 그는 그 속에 숨겨진 깊은 연대감을 느낄 수 있었다.
“으흐흐……. 줄곧 연락을 시도한 보람이 있구나……!!”
그렇게 망망대해에, 한쪽 소매를 펄럭이는 ‘어둠의 사령술사’의 광소가 울려 퍼졌다.
“놈들을 막아라! 절대 뚫리면 안 된다!”
중상급 설인이자 제7 얼음성채의 책임자, 아롱가는 목이 터지라 소리를 질렀다.
-키야아!
-죽여라, 설인을 죽여!
그의 고함은, 수백 마리에 달하는 요괴들의 괴이한 외침을 뚫고 성채 전체에 퍼져 나갔다.
“알았다-!”
“성채, 지킨다!”
그에 따라 성벽을 따라 주욱 늘어져 있는 수십에 달하는 부하 설인들이 용맹하게 응답해 온다.
그렇지만 용맹하기 그지없는 응답에도 아롱가의 표정은 어두웠다.
‘요괴들이 너무 많아.’
제7 얼음성채를 지키는 설인들은 많아야 오십이 조금 넘는데, 요괴들은 수백에 달했다.
게다가 조짐도 없이 갑자기 들이닥치는 바람에, 놈들을 맞을 준비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대체 어디서 이 요괴들이 온 거지?’
그가 제7 얼음성채를 관리하던 오십 년 동안, 종종 얼음성을 넘어가려는 요괴들이 있기는 했다.
그러나 보통은 혼자, 많아야 서넛이 뭉쳐 있었지, 이렇게나 한꺼번에 몰려온 적은 없었다.
‘하필 ‘해방’까지 코앞인 지금……!’
아롱가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들 설인종이 수천 년 전부터 얼음성을 지키고 있던 이유는 단 하나, 약속 때문이었다.
[약속의 날까지 얼음성을 지켜라. 무사히 지켜낸다면, ‘해방’을 시켜주리라.]
해서 그들은 사명감을 가지고 대에서 대를 이어가며 얼음성을 지켜왔고, 약속의 날이 코앞까지 다가오면서 그 대가를 손에 쥐기까지 정말로 얼마 남지 않은 상태였다.
그런데 난데없는 요괴들의 침략이라니.
“큭…….”
아롱가는 이를 악물었다.
어떻게 요괴들이 저런 무리를 결성했는지는 몰라도, 놈들에게 성채를 내줄 수는 없었다.
만일 놈들에게 성채를 내주고, 본성까지 뚫리게 되어 약속을 지키지 못하게 된다면 어찌 선조들을 볼까.
“우오오오-!”
그렇기에 그는 치열하게 싸웠다.
입으로는 지시를 멈추지 않으면서도 창을 휘두르고 또 휘둘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는 역부족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크어어어어!
거대한 황소 요괴들의 돌진에 의해 성벽이 차츰 무너져 내리고, 수십 마리의 요괴들이 무너진 성벽으로 돌진한다.
-끼아아!
-뚫린다, 뚫린다!
수백 마리의 요괴들이 내뱉는, 요기가 가득 섞인 사이한 속삭임이 지천을 맴돈다.
자신들의 팔다리가 잘려도, 옆 요괴의 머리가 터져나가도 낄낄대며 기어 올라온다.
“크윽……!”
아무리 설인들이 용맹하다고 해도 지나치게 숫자가 차이 났다.
조금 전 본성에 지원 요청을 보내기는 했으나, 아직 전령이 본성에 도착하지도 않았을 시간이었다.
‘어쩔 수 없나.’
아롱가의 시선이 재빨리 주변을 훑었다.
퍽!
푸욱!
“커헉!”
“그어어……!”
지금 이 순간에도 부하들은 죽어 나가고 있었다.
그는 선택해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성채를 끝까지 지키다가 전멸할 것인지, 성채를 내주고 부하들을 살릴 것인지를.
상황이 급박한 만큼 고민은 길지 않았다.
전력의 차이가 극심했다.
일단 물러나는 게 맞았다.
“전군! 후…….”
그가 후퇴를 입에 올리려 할 때였다.
피칭-
저 하늘에서부터, 빛나는 무언가가 쏜살같이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그걸 본 아롱가가 눈을 부릅떴다.
‘창……?’
그것은 분명 거대한 창이었다.
하나 그가 아는 창과는 달랐다.
탑의 10층에서 내려오는 미약한 햇빛보다.
타닥거리며 타오르는 횃불보다 밝은, 순백으로 이루어져 있던 것이다.
쿠오오-
그렇게 순백의 창은 요괴들의 한가운데에 그대로 떨어져 내려, 엄청난 폭발을 일으켰다.
콰콰콰쾅!
어찌나 큰 폭음이었는지, 일선에서 싸우던 설인과 요괴들조차 무의식적으로 뒤를 돌아볼 정도였다.
아롱가도 마찬가지였다.
그 어마어마한 위력에 눈을 번쩍 떴다.
놀랄 일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슈와아아-
순백의 창에 이어, 빠르게 요괴들에게 급강하하고 있는 형체가 눈에 들어온 것이다.
안력을 집중한 그는 형체를 자세하게 볼 수 있었다.
등에는 영롱함이 절로 느껴지는 거대한 순백의 날개를, 한쪽에는 새하얗게 빛나는 검을 든 인간 사내였다.
‘참가자……!’
약속의 날이 다가왔음을 알려주는, 경연의 참가자가 분명했다.
콰콰콰!
이어서, 남자는 요괴들에게 짓쳐 들어 학살을 자행하기 시작했다.
서걱-
푹!
순백의 검이 휘둘러질 때마다 찬란한 오러가 뿜어졌고, 요괴들의 비명 소리가 뒤따랐다.
잠깐 넋을 놓고 그 광경을 바라보던 아롱가는 빠르게 정신을 차렸다.
“전군! 돌격! 돌격하라!”
누군지는 모르겠어도, 공동의 적을 둔 원군임은 분명했기에.
-와아아아!
-요괴를 몰아내자!
뜻밖 원군의 존재 덕분일까.
힘을 쥐어짠 병사들은 요괴들을 몰아내고자 진격한 끝에, 간신히 요괴들을 물리칠 수 있었다.
그리고 전투가 마무리된 직후.
아롱가는 검을 털어내고 있는 원군에게 급히 뛰어갔다.
누군지 알 수는 없었지만, 감사를 전하기 위해서였다.
“저는 제7 얼음성채의 책임자인 아롱가입니다! 누, 누구십니까?”
원군은 잠시 아롱가를 빤히 바라보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한데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답인사도, 자기소개도 아니었다.
“아직 안심해서는 안 됩니다.”
“그게 무슨……?”
“지금 이건 선발대에 불과하고, 더 몰려오고 있으니까요. 당장 대비해야 합니다.”
더 큰 위기가 다가오고 있다는, 충격적인 말이었다.
* * *
[여덟 번째 시험을 통과하셨습니다.]
[500pt가 지급됩니다.]
[시험을 다섯 번째로 빨리 통과하셨습니다.]
[300pt가 추가 지급됩니다.]
[추가 보상을 준비 중입니다…….]
강현은 여덟 번째 시험을 마쳤다는 메시지를 보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설인과 요괴의 붉고 샛노란 피만을 제외한다면, 얼음성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흰 눈으로 가득했다.
‘날씨는…… 어둡고.’
그가 지나쳐 온 요계보다는 밝았지만, 기본적으로 어둑하기는 매한가지였다.
‘해가 왜 안 뜨는…… 아, 탑 안이었지.’
그렇다면 이 탑 안에서 나고 자란 이들은 죽는 순간까지 제대로 된 햇빛을 보지 못하는 걸까.
왜 갇혔는지도 모른 채 평생 이곳에만 있다가 죽는다면 대체 어떤 기분일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저 앞에서 유각이 뽈뽈거리며 돌아다니는 게 보였다.
아까 싸울 때 울상을 짓던 건 어디 가고, 해맑은 얼굴로 눈을 가지고 노는 중이었다.
그걸 보자 왠지 모르게 답답해졌다.
[순위에 따른 보상의 정산을 완료했습니다.]
[보상을 지금 수령하시겠습니까? (Yes/No)]
“하아.”
그는 한숨을 내쉬며 보상을 확인했다.
[현자의 돌을 획득합니다.]
현자의 돌
-마법계의 귀중한 영약입니다. 취한 자의 에테르를 대폭 상승시켜줍니다.
“오.”
보상을 본 강현의 표정이 살짝 밝아졌다.
비록 역행의 모래시계 같은 아티팩트는 아니었어도, 에테르는 언제나 중요했다.
[취할 수 있는 에테르가 감지되었습니다. 취하시겠습니까?]
[현재 취한 에테르의 양(552/1,000)]
스아아-
[현재 취한 에테르의 양(952/1,000)]
400이 오른 에테르를 본 강현이 미소를 지었다.
처리한 요괴들에 영약 몇 개가 더해지자, 어느새 8단계가 머지않게 되었다.
(0/1000)이었을 때는 언제 다 채우나 싶었는데, 예상보다 훨씬 빨리 달성할 수 있을 듯했다.
물론.
-또 최상급 영약을 준다고? 정말이지 어이가 없군.
엔딜 펠란은 이 같은 성장을 마냥 기분 좋게 받아들이지만은 않았다.
툴툴대는 걸로 보아, 강현의 ‘격’이 폭풍처럼 성장하는 게 마음에 안 드는 것 같았다.
강현은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아니, 하마터면 시험에 떨어질 뻔했는데 이런 거라도 받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만약 유각에게 길을 안내받지 못했다면 그는 훨씬 늦게 도착했을 거고, 그동안 이 얼음성채는 요괴들에게 넘어갔을 것이다.
다른 참가자들도 급박한 상황에 처했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그 점을 고려한다면 충분히 난이도를 반영한 보상이라 여겨졌다.
‘어차피 제가 빨리 성장해서 <초월>하면 그쪽한테도 좋을 텐데 왜 그러십니까.’
-흥, 빠른 속도도 정도가 있지. 이 몸이 거느렸던 악마들이 네놈의 성장 속도를 봤다면 불같이 화를 냈을 거다.
엔딜 펠란은 끝까지 투덜거렸지만 말이다.
[잠시 후, 아홉 번째 시험이 시작됩니다.]
[참가자의 행동에 따른 시험의 주제를 구성하고 있습니다…….]
[아홉 번째 시험까지 남은 시간 : 0시간 05분]
강현이 메시지를 보는데, 아롱가라고 자신을 소개한 설인이 쿵쿵거리며 다가왔다.
괜히 설인이라 불리는 게 아닌지, 고릴라만 한 몸은 새하얀 털로 덮여 있었고 키는 강현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컸다.
또한 대장이라는 직함에 걸맞게 다른 설인들보다 지능이 훨씬 뛰어난 걸로 보였다.
단순한 말만 하는 나머지 설인들과는 다르게, 아롱가가 하는 말은 인간과 거의 비슷하게 들렸다.
“본성에 확인해 본 결과 몇몇 성채가 선발대의 공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렇군요.”
모든 성채가 다 선발대의 공격을 받은 건 아니라는 말에 강현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역시, 단지 그가 운이 좋지 않은 것이었다.
“그래도 본성에서 보낸 지원군이 오고 있으니까 할 만할 겁니다.”
그리 답한 아롱가는 큼지막한 주먹을 불끈 쥐어 보이며 중얼거렸다.
“……반드시, 반드시 지켜낸다.”
그 말을 들은 강현이 물었다.
“질문 하나 해도 됩니까?”
“예? 예, 하십시오.”
“뭔가를 지키고 있다고 했는데, 뭘 지키고 있는 겁니까?”
“…….”
아롱가는 원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요계, 대수림, 설원의 존재들에게 ‘약속’을 말하는 건 금기된 사항이었지만, 눈앞의 원군은 경연의 참가자이니 괜찮을 것 같았다.
“……엄밀히 말하면 무언가를 지킨다기보다는 본성을 지키는 겁니다.”
아롱가가 성채 뒤편을 가리켰다.
그쪽을 보자 저 멀리 거대한 건물의 형체가 희미하게 보였다.
“저 뒤에 있는 건물을 말하는 겁니까? 그건 왜……?”
아롱가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본 성을 넘으면 이 탑의 다음 층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되니 말입니다.”
“…….”
“다음 경연의 본선이 시작되기 전까지 다른 종족들이 나가지 못하게 하는 것. 그게 경연 측과 우리의 선조가 했던 약속입니다.”
“약속? 그럼 그 약속의 대가는…….”
“우리 종족을 탑 밖으로 꺼내주는 것입니다.”
“……!”
강현이 눈을 크게 떴다.
아롱가의 말은 그만큼 놀라웠다.
본성을 넘으면 10층으로 올라갈 수 있다는 것과 이들이 그 본성을 나머지 종족들로부터 지키고 있다는 것도 그랬지만…….
‘탑 밖으로 나가게 해준다고?’
어쩐지 죽으라 지키더니, 이들도 절실한 이유가 있던 것이다.
놀라운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설마 했는데, 설인들은 두꺼비와 마찬가지로 탑 안의 나머지 종족들보다 훨씬 많은 걸 알고 있었다.
이곳이 탑이라는 건 물론이거니와, 더 비욘드 본선의 존재까지.
그래서일까.
아롱가의 말을 듣자 의문이 생겨났다.
“당신들이 이 탑에서 나가게 된다면, 이곳은 누가 지키게 되는 겁니까?”
더 비욘드의 본선이 시작되어 설인들이 이 탑을 벗어난다면, 누가 본 성을 지키냐는 의문이었다.
“그건…… 모르겠습니다. 선조들이 그들과 했던 약속은 거기까지였으니까요…….”
아롱가가 나직이 말했을 때였다.
뿌우우우-
뿔나팔 소리와 함께.
“원군, 원군이다!”
“원군이 왔다!”
저 뒤에서 성채를 급하게 보수하고 있던 설인들로부터 환호성이 들려왔다.
본성에서 보낸 원군의 등장이었다.
“아, 원군이 온 것 같군요. 잠깐 가 봐야겠습니다.”
그렇게 아롱가는 사라졌다.
“…….”
강현이 생각을 정리하기도 전.
팟-
[아홉 번째 시험이 시작됩니다.]
[아홉 번째 시험의 주제는 ‘수성’입니다.]
마지막 시험을 알리는 메시지가 나타났다.
[얼음성을 향해 사악한 요괴들의 본대가 몰려오고 있고, 그건 제7 얼음성채도 마찬가지입니다. 제7 얼음성채의 설인들을 도와 곧 당도할 요괴들을 막아내세요. 요괴들을 막아낸다면 서브 미션이 종료되며, 10층으로 이동하게 됩니다.]
메시지를 본 강현이 얼굴을 굳혔다.
그도 그럴 게 메시지가 나타남과 동시에, 느낄 수 있던 것이다.
쿠오오오-!
저 멀리서부터 느껴지는, 어마어마한 양의 요기를.
[스킬, 천광의 날개[Lv.2]를 발동합니다.]
이어서 날아오른 그는 볼 수 있었다.
쿵- 쿠쿵-
끼야아!
크어어어……!
지평선을 가득 메운 요괴들이, 빠르게 거리를 좁혀오는 중이었다.
뿌우우우-
둥- 두둥-
그리고 그에 대응하듯 뿔나팔 소리와 북소리가 사방을 뒤흔든다.
어떻게든 뚫으려는 자와 그걸 막으려는 자의 전투가 시작된 것이다.
* * *
-허미; 요괴들 많은 거 보소
-보상 퍼줘서 할 만하려나?
-아슬아슬할 듯?
-ㅋㅋ 아까 붉은 악마 놈 눈살 찌푸리지 않았음? 재수 없게 선발대 상대했다고.
-ㄹㅇㅋㅋ 선발대 상대한 덕분에 제일 좋은 거 받았다는 걸 모르네
-다른 애들이 받은 것들 보면 해맑은 웃음 터져 나올 듯 ㅋㅋㅋㅋ
-어? 싸운다
-오우;; 서로 장난 아닌데? 완전 난장판 다 됐네
-설인들은 저기서 나가려면 지켜야 되니까 그런 걸 거고……. 요괴들도 지금 탈출 못 하면 쪽쪽 빨아 먹힐 걸 아는 거지
-근데 아직도 6층 못 올라온 애들은 무슨 미션 함?
-그러게? 저거 다 죽으면 요괴들 안 잡아도 되잖아
-몰라 알아서 하겠지ㅋㅋㅋ 우린 걍 보고 즐기면 됨
-와 근데 붉은 악마 봐. 걍 날아다니는데?
-ㅇㅇ 괜히 상위권이 아님
-흐음…….
-??
-머임?
-아, 나 얘 앎. 예선에서부터 붉은 악마 갠방에 찰거머리처럼 붙어 있던 놈임
-흐음 말고 할 줄 아는 말 없음?
…….
-……흐음.
* * *
새하얀 눈발이 피로 물들어가는 가운데, 사방에서 요괴들의 사이한 웃음소리가 울려 퍼진다.
-끼히히히히, 끼히! 죽여, 다 죽여!
-으히히, 다 죽이고 이 감옥에서 나가자!
…….
당장 눈앞에 보이는 요괴들은 천이 훌쩍 넘는 데다가, 그들 모두에게서 요기까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 요기 섞인 웃음은 상대하는 이의 정신을 멍해지게 만들고, 마음 깊숙한 곳에서부터 본능적인 공포를 일으켰다.
설인들도 가만히 있는다면 요기에 침식되리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걸 막기 위해 그들 또한 고함을 연신 내질러댔다.
-우와아아!
-놈들을 막아라! 막아야 한다!
설인들의 고함이 요괴들의 웃음을 밀어낸 것도 잠시, 전장은 다시 요기로 덮여갔다.
숫자에서 밀리는 이상 어쩔 수 없었다.
아무리 원군이 왔다고 한들 그 수는 백을 간신히 넘는 정도.
설인 하나가 못해도 대여섯 마리의 요괴들을 상대하고 있기는 했지만, 불리한 건 사실이었다.
하나 열세에도 불구하고 설인들은 용맹했다.
요기를 몰아내고자 성벽을 따라 수십 개의 큰 불을 피웠다.
-불을 피워라! 더 세게!
-요기에 침식되면 안 된다! 불을 항상 근처에 둬!
-횃불을 지켜라!
화르르륵!
날개를 펼쳐 상공에 날아오른 강현은 저 밑의 횃불들을 내려다보았다.
괜히 설인들이 불을 피운 게 아닌지, 불을 피운 이후로 불 근처의 요괴들이 주춤하는 기색이었다.
-대열을 흩뜨리지 말아라! 절대 밀려나면 안 된다!
고함을 지르는 아롱가의 한쪽 어깨에 탄 유각이 눈에 들어온다.
사정을 듣고선 어르신들을 다치게 만든 요괴들을 용서할 수 없다며 나서는 바람에 그나마 안전한 아롱가 옆에 데려다 놓은 것이었다.
자신들이 탑 안에 갇혀 있던 거라는 걸 알게 되어 혼란스러울 텐데도 먼저 나서준 게 기특하긴 했지만.
강현은 알고 있었다.
전황이 결코 밝은 건 아니라는 걸.
-흠……. 네놈이 적어도 백인분은 해줘야겠군.
오죽하면 엔딜 펠란이 터무니없는 말을 해왔을까.
‘그러게 말입니다.’
그리고 그 말에, 강현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설인들은 서서히 지쳐갈 테지만, 요괴들은 다르다.
지쳐 나가떨어진 요괴들을 대신할 놈들은 저 뒤에 수두룩했다.
그때였다.
쿠오오오-
저 밑에서부터 수십 개의 시퍼런 불덩이가 그를 노리고 날아왔다.
불덩이의 근원지를 보자 몇몇 도깨비들이 기분 나쁜 웃음을 지으며 그에게 불덩이를 던져대는 중이었다.
후웅-
강현은 크게 활강하며 불덩이들을 피하는 한편, 도깨비들이 있는 곳을 향해 검을 크게 휘둘렀다.
[스킬, 광야참[Lv.2]을 발동합니다.]
[1/5의 마력을 소모합니다.]
콰아아-
그의 검에서 뿜어진 백색 검기가 쏜살같이 도깨비들에게 떨어져 내렸다.
불덩이를 던지며 낄낄대던 놈들은 반격당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는지, 표정이 일변하여 급히 자리를 벗어나려 했다.
하지만 그보다 광야참이 한발 빨랐다.
콰콰쾅!
-끄아아악!
바람에 섞여오는 도깨비들의 비명을 들으며 강현은 요괴들의 한복판으로 강하했다.
쿠오오-
지상의 요괴들이 빠르게 가까워져 온다.
거기에 강현은.
[스킬, 광야참[Lv.2]을 발동합니다.]
[1/5의 마력을 소모합니다.]
[스킬, 섬멸의 광창[Lv.2]을 발동합니다.]
…….
그의 가장 큰 광역 스킬들을 퍼부었다.
리얼에서의 경험을 거치면서 잘 알게 되었던 것이다.
다수와 싸울 때는 무조건 큰 스킬을 쓰는 게 이득이라는 걸.
콰콰콰쾅!
섬멸의 광창과 광야참이 휩쓸자, 빽빽하게 몰려오던 요괴들이 일시적으로 사라진다.
그리고 그에 맞추어.
[현재 취한 에테르의 양(1,002/1,000)]
강현의 몸이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7단계 → 8단계]
[감각이 대폭 세밀해집니다.]
[에테르 감지력이 대폭 상승합니다.]
[에테르 저항력이 대폭 상승합니다.]
…….
미처 그 변화를 관조하기도 전, 강현은 요괴들이 다시 빼곡히 채워지는 걸 볼 수 있었다.
조금 전과 다른 게 있다면, 이번에는 놈들이 강현에게 명확하게 적의를 드러내고 있다는 것.
-크르르……. 저놈부터 죽여라!
-사지를 잡아 찢자!
…….
성채로 몰려가던 요괴 중 상당수가 강현에게 돌진해 온다.
-크흐, 요괴들의 시선이 확실히 네놈에게 쏠렸군. 대신 그만큼 힘들어질 텐데, 막을 수 있겠느냐?
‘해야죠. 올라가려면.’
짧게 대꾸한 강현은 요괴들을 향해 마주 달려나갔다.
[스킬, 강림[Lv.1]을 발동합니다.]
[스킬, 참격[Lv.4]을 발동합니다.]
…….
그렇게 요괴들의 한복판에서, 백광이 연이어 번쩍이기 시작했다.
* * *
푸욱!
“꽤액……!”
아롱가의 매서운 창날에, 성벽을 오르려던 개구리 요괴가 나가떨어진다.
“키아악!”
개구리 요괴에 이어 어인처럼 생긴 요괴가 짓쳐 들었으나.
“이잇!”
유각이 조그마한 방망이를 휘둘러 불러낸 강풍을 이기지 못하고 저 아래로 떨어졌다.
“잘했다!”
“네! 힘낼게요!”
짐짓 결연한 얼굴을 해 보이는 유각에게 아롱가는 빙긋 웃어주었다.
귓가에 부하들의 보고가 들려온다.
“1구역, 안정됐다!”
“3구역도 끝났다!”
“4구역…….”
…….
정신없이 몰려드는 요괴들을 밀어내던 조금 전과는 다르게, 각 구역이 차츰 안정되어 간 것이다.
실제로 성채 앞에 요괴들이 몰려와도, 급박하게 처리하기보다는 한결 안정적으로 막아내고 있었다.
하지만 아롱가는 낙관하지 않았다.
그는 상황이 이렇게 된 이유를 잘 알고 있었다.
스윽-
아롱가의 시선이 정면을 향했다.
저 멀리, 요괴들에 둘러싸여 무시무시한 강함을 뽐내는 참가자가 보인다.
-끼에에에!
-크아아아……!
참가자의 검이 휘둘러질 때마다 요괴들이 추풍낙엽처럼 나가떨어진다.
참가자의 저런 신위야말로 성채가 안정된 결정적인 원인이었다.
‘조금만 더……!’
전장을 살핀 아롱가가 눈을 빛냈다.
처음 놈들을 맞이할 때만 하더라도 마음 한편에 절망감이 있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끝이 보이지 않던 요괴들의 끝이 보이기 시작했으니까.
부하들도 그걸 느낀 듯했다.
“막는다!”
“와아아아아!”
요괴를 처치하면서도 커다란 함성을 내뱉는다.
오랜 전투로 몸에 성한 곳이 없었으나, 그 눈에는 기필코 성채를 지키고야 말겠다는 강렬한 빛이 담겨있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몰려오는 요괴들의 끝에서부터, 느닷없이 엄청난 요기의 폭풍이 일어나는 게 아닌가.
“……?”
잠시 그 요기의 폭풍을 바라보던 아롱가는, 이내 경악했다.
‘요괴들이…… 서로 몸을 합치고 있어?’
남은 요괴들이 꿀렁거리며 서로를 흡수하고 있었던 것이다.
성채에 오던 요괴들부터 참가자가 상대하던 요괴들까지.
그 생김새와 크기를 가리지 않고, 모두 합쳐져 갔다.
쿠구구구-
잠시 후, 마구 합쳐지던 요괴들은 하나의 거대한 ‘덩어리’로 화했다.
색깔도, 질감도 제각각인 ‘덩어리’.
자그마치 수백 마리의 요괴들이 합쳐져서인지, 하나의 산을 보는 것 같았다.
그래서일까.
이렇다 할 형체조차 만들지 못한 덩어리였음에도 말도 안 되는 존재감이 밀려왔다.
크어어어어어!
합체를 마친 요괴들의 집합체가 내뱉은 끔찍한 굉음이 전장을 휩쓸었다.
“크윽!”
“큭……!”
굉음에 섞인 강대한 요기에 부하들이 몸을 움츠렸다.
쿠웅…… 쿵.
이어서 요괴들의 집합체가 질척거리며 참가자에게 다가가기 시작했다.
그걸 보자마자 아롱가는 벌떡 일어났다.
지금도 무리하고 있는 참가자다.
저 괴물까지 혼자 상대하게 둘 수는 없었다.
“어서 도와주러 가요!”
때마침 어깨 위의 유각도 말해왔다.
고개를 끄덕인 아롱가가 횃불을 움켜쥐었다.
“돌격! 돌격하라! 놈들을 밀어낸다!”
* * *
-와아아아!
성채에서부터 설인들이 쏟아져 나온다.
자신을 도와주려는 건지, 몸이 성한 이가 없었음에도 그 돌진에선 조금의 망설임도 느껴지지 않았다.
쿠웅-
“후우.”
강현은 정면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크아아아아아!
끔찍한 굉음.
“하, 뭐 저런 게 다 있냐.”
남은 요괴들이 한데 모여 저런 ‘덩어리’가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Lv. 150 ???]
레벨을 보니 괜히 저런 모습을 한 건 아닌 듯했다.
150.
여태껏 그가 봐온 그 어떤 괴수보다 높은 레벨이었다.
“…….”
‘저런 모습이 되어서라도 어떻게든 본성으로 가고 싶은 건가.’
저런 ‘덩어리’가 되어 이 탑을 나간다 한들, 거기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잠시 생각해 보던 강현은 고개를 저었다.
이미 저렇게 되어버린 ‘덩어리’에게서는 답을 들을 수 없는 질문이었다.
다만.
쿠웅……!
저 ‘덩어리’의 발걸음이 성채가 아닌 그에게 향해 있는 걸로 봐서는, 걸리적거리는 그를 먼저 치우겠다는 걸로 보였다.
-네놈만……! 네놈만 죽이면……!
높낮이가 각기 다른 수백 마리 요괴들의 목소리가 겹쳐 들려온다.
이어서.
키이이잉-
‘덩어리’의 입으로 추정되는 부분에서 샛노란 광선이 발사된다.
콰콰콰콰-
[스킬, 순보[Lv.4]를 발동합니다.]
다가오는 광선을 본 강현은 즉시 멀찍이 옆으로 물러났고.
콰콰콰콰쾅!
바닥을 강타한 광선의 흔적을 볼 수 있었다.
“……살벌하네.”
광선이 쓸고 지나간 바닥이 패 있었는데, 그 길이가 장장 수백 미터에 달했다.
‘스치기라도 한다면 바로 사망이겠군.’
지이이잉-
‘덩어리’는 지치지도 않는지 다시 광선을 준비한다.
“물러나십시오! 위험합니다!”
뒤편에서 아롱가의 외침이 들려온다.
저 ‘덩어리’ 앞에 우두커니 서 있으니, 그가 보기에는 더없이 위험해 보이겠지.
하지만.
“괜찮습니다.”
강현은 담담하게 읊조렸다.
그건 정말 사실이기도 했다.
-아마 ‘격’을 합쳐 네놈에게 대항하려고 한 것 같다만…….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긴 격이로군.
엔딜 펠란의 말대로였다.
‘덩어리’에게서 막대한 요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으며, 저 광선이 위협적인 건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저런 모습이 된 게 의도한 건지는 몰라도, 저 강함은 요괴들이 의도한 것일 터였다.
그렇지만 놈들은, ‘덩어리’는 알지 못할 것이다.
크기를 키운 것이, 강현에게 좋은 일만 시켜준 꼴이라는 걸.
그도 그럴 게 크기가 커질수록 둔해지게 마련이고, 둔해질수록…….
‘움직임은 느려지지.’
[스킬, 여명의 눈[Lv.4]을 발동합니다.]
그리고 크기만 크고 둔한 건, 그게 무엇이든 간에 이 눈의 먹잇감이 될 뿐이었다.
지이잉-
‘덩어리’의 곳곳에 수백 개에 달하는 반짝임이 생겨난다.
그 반짝임이 비추는 것은, ‘덩어리’의 명백한 ‘약점’.
하나 강현은 ‘약점’을 들여다보는 것에서 그치지 않았다.
선명하게 약점을 보면서, ‘역행의 모래시계’를 꺼내 들었다.
“……역행, 발동.”
슈와아아-
말랐던 마력이 일부 채워지고, 다리의 떨림이 멎어간다.
세 번에 걸쳐 사용자의 신체를 30분 전으로 돌려주는 아티팩트, ‘역행의 모래시계’가 발동한 것이다.
“그르르르르……?”
그 변화를 감지했는지 광선을 장전하던 요괴가 멈칫한다.
강현은 그 반응에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선포, 발동.”
나무토막을 꺼내, 이곳이 그의 [권역]임을 조용히 선포했을 뿐.
지난번 도플갱어와 싸웠을 때 1m밖에 되지 않은 [권역]이었기에, 원래라면 그가 이 나무토막을 발동할 리는 없었을 것이다.
만약.
[권역] : 반경 10m
조금 전 7단계에서 8단계로 ‘단계’가 상승하면서, [권역]의 범위가 늘어나지 않았다면.
[권역]이 반경 10m가 되면서, 지금 같은 상황에서 활용할 여지가 생겼다.
‘강화 발동.’
강화 : [권역] 내에서는 에테르의 위력이 대폭 증가합니다.
쿠오오오-
강림을 또 한 번 발동한 것만 같은 활력이 몸을 휘감는다.
천광의 날개, 여명의 눈, 강림, 역행, [권역]의 ‘강화’…….
발동할 수 있는 모든 걸 발동한 지금이야말로, 강현의 전력이라 할 수 있었다.
팟-
강현은 그대로 뛰어올랐다.
키이이이잉-
‘덩어리’가 광선을 발사했으나.
슈슉-
강현은 순보와 [권역]의 스킬, 순간이동을 번갈아 가며 발동함으로써 광선을 손쉽게 피해냈다.
그러고는 ‘덩어리’의 코앞까지 날아가, ‘약점’을 향해 길게 검을 내리그었다.
서걱-
강현의 검을 따라 갈라진 틈에서부터 어마어마한 요기가 터져 나온다.
그어어어어어!
그에 따라 ‘덩어리’가 지천을 뒤흔드는 굉음을 토해낸다.
강현은 그 굉음에서 느낄 수 있었다.
‘덩어리’가 느끼고 있는 감정을.
갈망과 분노, 억울함, 답답함…….
한없이 긴 시간 동안 탑 안에 갇혀 있어야만 했던 요괴들의 울분이, 생생하게 전해져 왔다.
‘오냐, 나가고 싶겠지.’
분명 이 탑 안에만 있던 요괴들에게, ‘자유’란 선망할 수밖에 없는 것일 터였다.
그들이 가져보지 못한 것일 테니까.
언제까지고 어둑한 요계에 있기는 싫었을 테니까.
그럼에도 강현은, 묵묵히 검을 휘둘렀다.
휘두르고 또 휘둘렀다.
더 비욘드에 임하는 그의 마음은 ‘자유’를 원하는 요괴들에 못지않았다.
아니, 어떤 면에서는 요괴들보다 더하다고 할 수 있었다.
‘덩어리’가 가져보지 못했던 걸 선망했다면, 그는 한 번 잃었던 걸 다시 찾고자 했으니까.
가졌던 모든 걸 잃으며 느꼈던 공허함은, 가져보지 못한 걸 선망하는 마음에 절대 뒤지지 않았다.
그리고 공허함의 구렁텅이에 빠져 있던 그가 다시 올라설 수 있었던 건, 더 비욘드 덕분이었다.
더 비욘드를 통해 그는 잃었던 것들을 되찾아가고 있었고, 이제 잃었던 걸 다시 가지는 것에 그치지 않고 더 비욘드의 끝을 보고 싶었다.
서걱-
강현이 끊임없이 ‘덩어리’의 ‘약점’을 찌르자, 어느 순간부터 살점들이 후두둑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크어어어……!”
그에 당황한 듯, ‘덩어리’가 몸을 꿈틀거리며 무언가 하려 했다.
꿀렁-
날아다니는 강현이 쉽게 공격하지 못하도록 ‘덩어리’의 아랫부분을 분열시켜, 요괴들을 내보내려던 것이다.
‘저것들이 성채로 다가가면 귀찮아질 수도 있겠어.’
강현이 광야참을 써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데.
“지금부터 우리는, 놈이 분열을 못 하게 막는다!”
귀에 익은 목소리에 강현의 눈이 아래를 향했다.
우르르 몰려나온 설인들이 ‘덩어리’의 밑부분을 공격하는 게 보였다.
‘덩어리’가 분열되는 족족, 이를 악문 설인들이 그것들을 제거해 나간다.
-저 설인들이 대신 처리해 주고 있다. 하던 걸 계속하면 될 듯하군.
강현은 엔딜 펠란의 말에 대꾸하기보다는 ‘덩어리’를 공격하는 데에 집중했다.
대꾸할 힘까지 아껴서 ‘약점’을 가르고, 또 갈랐다.
서걱-
서걱-
…….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그어어어어어어!”
고통에 몸부림치던 ‘덩어리’에게서 뿜어져 나온, 사념이 되어가는 감정들이 사방에 퍼졌고.
[레벨이 올랐습니다.]
…….
연달아 메시지가 떠올랐다.
[아홉 번째 시험을 통과하셨습니다.]
[1,000pt가 지급됩니다.]
[시험을 세 번째로 빨리 통과하셨습니다.]
[500pt가 추가 지급됩니다.]
[추가 보상을 준비 중입니다…….]
아홉 번째 시험의 종료를 알리는 메시지였다.
슈와아아-
동시에, 강현의 몸을 흰빛이 감싸갔다.
-바로 이동하는 모양이군.
‘……그러게 말입니다.’
강현이 얼굴을 구겼다.
쉴 시간도 없이 부르다니, 야박하기 그지없었다.
“감사합니다!”
“이 은혜, 평생 잊지 않겠다!”
강현이 곧 떠난다는 걸 눈치챈 설인들이 단체로 몰려와 고개를 숙였다.
아롱가가 눈물을 글썽거렸다.
“은인이시여, 감사합니다……! 조만간 나가게 된다면 꼭 뵙겠습니다!”
호칭이 ‘참가자’에서 ‘은인’으로 격상되었다.
하긴, 마지막에 생겨난 ‘덩어리’는 설인들이 해결하기 거의 불가능한 난적이었다.
저런 극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도 이해가 갔다.
“나중에 올 수 있으면 오시죠. 제 이름은 이강현입니다.”
이름을 알려주는 걸 끝으로 설인들을 보내는데, 이번에는 유각이 호다닥 다가온다.
“이, 이제…… 가시는 건가요?”
“그래. 고생했다.”
강현은 몸을 낮추어 유각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저…….”
유각이 무어라 말하려는 듯, 입을 달싹인다.
“…….”
‘탑’에 대해 알게 된 유각이다.
강현은 유각이 어떤 말을 할지 예상해 보며 조그마한 입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왜 요괴들이 탑에서 살게 됐는지에 대한 궁금증?
아니면, ‘탑 밖’의 세상에 나가지 못하는 것에 대한 아쉬움?
어느 쪽이든 간에 강현은 그에 맞는 대답을 해줄 생각이었다.
그런데 유각의 입에서 나온 건 의외의 말이었다.
“저기 저 설인 아저씨한테 들었어요! 아저씨는 계속해서 강해질 거라구요!”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강현이 고개를 갸웃한 순간이었다.
“계속 강해져서 우리를 꺼내줄 수도 있을 만큼 강해지면, 저랑 어르신들을 꺼내주시면 안 돼요? 은혜는 꼭 갚을게요!”
“……!”
꼭 은혜를 갚겠다는 듯, 유각이 두 주먹을 불끈 쥐어 보인다.
강현은 잠깐 멍한 표정을 짓다가, 천천히 말을 꺼냈다.
“……그래. 꼭 꺼내줄게.”
그에게 있어 변하지 않을 목표는 하나였다.
더 비욘드에서 끝까지 올라가는 것.
하지만 그 목표에, 이 꼬마 도깨비를 탑에서 꺼내는 것 정도는 더해도 되지 않을까.
슈와아아아-
강현을 감싸던 빛이 번쩍이더니, 하나의 형체를 만들어갔다.
스아아아…….
빛으로 이루어진 ‘문’의 형체로.
강현은 유각과 설인들에게 인사를 건넨 뒤, ‘문’으로 다가갔다.
이번 서브 미션을 거치면서 더 비욘드에 대한 몇몇 의문이 생겨났지만.
올라가다 보면.
끝까지 살아남는다면.
언젠가는 그 의문의 답을 알 수 있으리라.
[‘붉은 악마’님의 서브 미션이 종료되었습니다.]
[최종 순위는 3위입니다.]
[균형의 탑의 10층으로 이동합니다.]
강현은 문을 향해 발걸음을 내디뎠다.
어둑한 탑 안과는 대비되는 화려한 조명이 그를 맞아주었다.
서브 미션의 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