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초대
느닷없이 떠오른 메시지들.
하지만 그 메시지들을 주의 깊게 보기도 전, ‘단계’의 상승에 따른 변화가 휘몰아쳤다.
[6단계 → 7단계]
[감각이 대폭 세밀해집니다.]
[에테르 감지력이 대폭 상승합니다.]
[에테르 저항력이 대폭 상승합니다.]
…….
쿠오오-
단번에 7단계에 이른 것에 따른 고양감이 온몸을 휘감는다.
단순히 기분이 좋거나 흥분이 된다는 것 정도가 아닌, 온몸이 환희에 차는 듯한 감각이었다.
‘왜 그렇게 에테르에 환장했는지 좀 알겠네.’
강현은 인어 전사들과 바위 거인 등이 에테르에 목을 맸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격’이 올라간다는 건, 그만큼 짜릿한 일이었다.
하나, 강현은 그들처럼 이성과 이지를 잃고 에테르만 갈구하며 돌아다닐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그의 목표는 더 비욘드에서 끝까지 올라가 <초월>을 하는 것.
‘격’의 상승은 어디까지나 그 목표를 위한 부차적인 일이었다.
슈우우…….
[참가자 이강현의 현재 단계는 7단계입니다.]
[다음 단계는 취할 수 있는 에테르를 모두 취한 뒤 적용됩니다.]
[현재 취한 에테르의 양(72/1,000)]
강현은 1,000이라는 숫자를 보며 혀를 내둘렀다.
‘어떻게 한 번에 2배로 늘어나냐.’
7단계를 찍으려면 500이 필요했었는데, 8단계로 가려면 1,000을 취하라니.
앞으로는 지금까지처럼 쑥쑥 단계를 올릴 수는 없을 거라 생각됐다.
‘아니다, 총 13단계까지 있다고 했었으니까 그럴 만하네.’
강현은 처음 이 같은 ‘단계’를 로독이 설명해 주었을 때를 떠올렸다.
로독은 이게 더 비욘드측에서 제공한 성장 키트라 말했었다.
13단계를 넘는다면 <초월>을 하기에 충분한 ‘격’을 쌓는 거라고도 했었고.
키트의 절반을 넘게 왔음에도 아직 <초월>과는 상당한 거리가 느껴졌으니, 그 간극을 메워야만 <초월>에 도달할 수 있을 터였다.
그러나 취해야 하는 에테르가 늘어났다고 해서 짜증이 나지는 않았다.
오히려 더 강해질 걸 생각하면 빨리 더 취하고 싶었다.
‘계속해서 강해진다면…….’
언젠가는 도달할 수 있으리라.
매 미션마다 자신의 방에 와서 없어 보이게 흐음거렸지만, 그 본신은 태고의 거인과도 같던 ‘그’처럼.
-말했잖느냐. 그 존재는 <초월자> 중에서도 상위의 존재라고. 네놈이 그 존재처럼 되려면 수천 년이 흘러도 모자랄 거다.
엔딜 펠란이 초를 쳐왔지만, 상관없었다.
‘에이, 목표가 그렇다는데 왜 초를 치고 그럽니까. 어차피 봉인을 풀려면 강해져야 되는데.’
엔딜 펠란의 말을 가볍게 흘려넘긴 강현은 헌터들이 얼마나 왔는지를 가늠했다.
아직 헌터들이 오기까지도 약간의 시간이 남아 있었다.
‘잘됐네.’
방금 떠오른 메시지들까지 확인할 수 있을 듯했다.
그는 조금 전의 메시지들로 시선을 돌렸다.
제3 군소차원과 ‘[email protected]’의 지배자에 한 걸음 가까워졌다는 메시지, 그리고.
[‘정보’를 불러내어 해당 차원의 상태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일종의 ‘차원 상태창’까지.
강현이 의문을 가진 건 하나였다.
‘왜 두 개지?’
더 비욘드의 정보창에서 몇 번이나 보았듯이, 제3 군소차원은 분명 지구를 일컫는 것일 터였다.
엔딜 펠란의 말에 의하면 <초월자>는 해당 차원의 지배자.
제3 군소차원의 지배자에 가까워진다는 메시지는 이해가 됐다.
그런데 ‘[email protected]’라는 것까지 나타난 것이다.
그것도 제대로 읽을 수조차 없는 상태로.
만약 이것들을 홀로 봤다면 한참이나 머리를 싸맸겠지만, 다행히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강현은 즉각 엔딜 펠란에게 새로운 메시지들에 대해 말했다.
-차원이 두 개라고?
“네.”
-흠…….
엔딜 펠란은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더니, 천천히 말을 꺼냈다.
-일단 한번 불러내 봐라. 어차피 차원 정보창은 적어도 10단계까지 올려야 온전히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니, 지금 할 수 있는 건 없겠다만.
강현은 그의 말을 따라 정보를 불러내 보았다.
“……차원 정보.”
팟-
[[email protected]의 정보를 불러냅니다.]
[경고 : 현재 사용자의 ‘격’으로는 온전한 정보를 불러낼 수 없습니다!]
[최소화된 정보만을 나타냅니다.]
[경고 : 현재 위치에서는 [권역]을 활성화할 수 없습니다.]
그러자 여러 메시지들이 떠올랐지만.
[[email protected]]
[인구] : ???
[에테르] : ???
[권역] : X
최종적으로는 간단한 걸 넘어 극히 정보가 제한된 창만이 띄워졌다.
[제3 군소차원의 정보를 불러냅니다.]
[경고 : 현재 사용자의 ‘격’으로는 온전한 정보를 불러낼 수 없습니다!]
[최소화된 정보만을 나타냅니다.]
[경고 : 지배자로서의 [권역]을 온전히 활성화할 수 없습니다.]
…….
이후로도 지구에 관련된 정보창이 여럿 떠올랐으나, 강현은 먼저 떠오른 것부터 살펴보기로 했다.
‘다 물음표에 X까지 쳐져 있군.’
그야말로 정체불명의 정보창이었다.
애초에 왜 떠올랐는지도 알 수 없는 창이었다.
그가 살고 있는 차원은 지구이지, ‘[email protected]’라는 차원이 아니었으니까.
그때였다.
-그건 아마도…….
엔딜 펠란이 무언가 말하려 했다.
[email protected]#$가 &$^서일…… 이런 빌어먹을. 제약을 걸었나.
하지만 도중에 잡음 같은 게 섞여 제대로 들을 수가 없었다.
원하는 바를 말하지 못한 엔딜 펠란이 툴툴댔다.
-아무래도 이 몸이 말해줄 수 있는 건 없는 듯하다. 나중에 이 제약이 없어진다면 말해주지.
그 모습이 강현의 의문을 자극했다.
“스튜디오도 아닌데 왜 말을 못 하는 겁니까?”
여태까지 시청자들이나 엔딜 펠란이 말할 수 없었던 건 모두 강현이 DBC의 스튜디오에 있을 때뿐이었다.
그런데 지구에서도 제약이 있다니,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email protected]#$가…….
엔딜 펠란이 무어라 또다시 말하려 했으나, 다시금 잡음이 섞인다.
아무래도 엔딜 펠란은 뭔가 짚이는 게 있지만 제약을 뚫을 수는 없는 것 같았다.
‘누가 막고 있는 건가?’
돌이켜보면 그의 시스템은 다른 헌터들과는 달랐다.
그렇다면 이 시스템을 만들었거나 혹은 그의 시스템을 특별하게 한 누군가가 이것들을 조절하는 걸까.
“…….”
알 수 없었다.
-지구의 정보나 살펴보는 게 나을 것 같군.
“하아.”
엔딜 펠란도 그렇게 말해왔겠다, 한숨을 쉰 강현은 그냥 [email protected]차원의 정보를 건너뛰고 지구의 것을 보기로 했다.
제3 군소
[인구] : 7,920,056,423명
[에테르] : 측정 불가
[권역] : 반경 1m
강현의 눈이 항목들을 훑었다.
인구, 에테르, 권역.
깔끔한 걸 넘어, 미니멀리즘을 추구하는 듯한 항목들이었다.
‘인구는 글자 그대로 인구겠고……. 에테르는 뭐지?’
-제3 군소, 그러니까 지구에 분포되어 있는 에테르를 말하는 거다. 차원의 지배자라는 건 해당 차원의 종족들과 더불어 에테르까지 지배하에 둔다는 말이니까. 이 몸의 경우에는 악마들에게서 에테르를 조공 받았지.
‘아…….’
엔딜 펠란의 말에 강현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대충 중세시대 영주가 백성들에게 세금을 걷는 것과 비슷하게 보면 될 것 같았다.
항목이 너무 부실하긴 했어도, 아직 정식으로 쓸 수 없는 것들이었으니 어쩔 수 없었다.
‘다음은 권역인데.’
강현은 권역에 대해 알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게 지난번 ‘거인’을 만났을 때, 엔딜 펠란이 말했던 것이다.
<초월자>들은 자신의 권역 안에서 절대적인 힘을 행사할 수 있다고.
그 말을 곱씹으며 강현은 [권역]의 상세설명을 확인해 보았고.
[권역]
-사용자는 제3 군소차원의 [권역] 내에서 다음과 같은 스킬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강화 : [권역] 내에서는 에테르의 위력이 대폭 증가합니다.
소환 : [권역] 내의 물체를 소환할 수 있습니다.
순간이동 : [권역] 내에서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습니다.
@#$ : 아직 개방되지 않은 스킬입니다.
^#$% : 아직 개방되지 않은 스킬입니다.
“와……. 이게 다 뭐야?”
입을 떡 벌렸다.
아직 개방되지 않은 것들이 있긴 했어도, 오픈된 스킬들만 해도 엄청났다.
‘한번 해봐야겠다.’
강현은 손바닥을 쫙 뻗고, 바닥에 떨어져 있는 자그마한 돌멩이를 소환해 보고 싶다고 상상해 보았다.
그러자.
슈슉-
어느 순간 돌멩이가 손에 올라와 있다.
“오……!”
강현이 탄성을 내질렀다.
물체를 마음대로 소환할 수가 있다니.
‘권역이라는 게 대단하긴 하네.’
아직은 반경 1m이라는 조건이 붙어 있었으나, 그 범위가 차츰 넓어진다면 신기에 가까운 스킬로 변모할 터였다.
강현은 스스로가 <초월>에 다가가고 있다는 걸 실감했다.
한참 멀긴 했어도, 조금씩 다가가고 있다는 건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타타타탁-
마음 같아서는 더 알아보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그럴 수는 없을 듯했다.
“이강현 씨, 괜찮습니까?!”
“그놈은……?”
뒤늦게 온 헌터들로 주변이 소란스러워졌으니까.
방해를 받은 셈이 됐지만, 강현은 만족했다.
‘나쁘지 않아.’
가장 정순한 에테르를 취했고 ‘단계’도 올렸다.
이 자리에서 당장 해야 하는 일들은 다 마친 셈이다.
[권역]의 다른 스킬들을 확인하는 거야 나중에 해도 되는 일이었다.
파팟-
스무 명 정도의 헌터들이 강현을 엄호하듯 둘러쌌다.
B급 헌터팀이 전멸당했다는 걸 들어서인지, 그 분위기가 사뭇 진지한 걸 넘어 비장했다.
“그놈은 어딨습니까?! 먼저 와서 수색하고 있던 겁니까?”
그중 하나가 다급하게 물어오자 강현은 천천히 입을 열었고.
“제가 쓰러뜨렸습니다. 잘 찾아보면 그 개미의 사체가 흩어져 있을 겁니다.”
“예, 예?”
“뭐라구요?!”
경악에 휩싸인 헌터들의 목소리가 폐허를 가득 메웠다.
* * *
그 뒤.
게이트 주의보는 빠르게 그 확산세를 늦추기 시작했다.
헌터들은 총력을 다해 남은 게이트들을 클리어했고, 역전 현상이 일어난 곳의 괴수들을 쓸어버렸다.
물론 폐허가 된 시내를 복구하는 등, 이번 재난으로 인해 피해를 복구하는 일이 산처럼 쌓여 있었지만, 사태가 진정되어 가는 건 사실이었다.
그리고 사태가 진정되어가자, 기사가 하나둘씩 올라오기 시작했다.
[비상식적인 게이트 주의보가 발생한 원인은?]
[수도권에 난데없이 마석의 비가 내리다.]
가장 먼저 올라온 건 기이할 정도의 게이트 주의보가 생겨난 것과 수천억 원 상당의 마석의 비에 관련된 기사들이었다.
그건 분명 유례없는 현상들이었기에 상당한 사람들의 관심을 모았다.
그러나 그 이상으로 사람들의 시선이 쏠린 곳은 따로 있었다.
[B급 헌터팀을 전멸시킬 만큼의 강함을 가진 괴수를 해치운 건 이강현.]
-헌터관리국은 금일(18일), 이강현이 제3 역전 현상으로 나타난 괴수를 사냥한 게 맞다고 발표했다. 처음 이강현의 말을 들은 이십여 명의 헌터들은 반신반의했지만, 이내 괴수의 사체 조각이 발견되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으며…….
바로, 놀라운 강현의 활약이었다.
일개 괴수가 헌터 팀을 전멸시켰다는 것도 놀라운데, 그런 괴수를 이강현이 없앴다.
더욱이 강현이 각성한 지 몇 달 되지도 않았다는 걸 감안해 본다면 말이 안 되는 강함이었다.
그래서일까, A급 헌터가 되었을 때보다 더한 관심이 강현에게 쏠렸다.
[이강현, 최단기 S급 헌터가 될 수 있을까? S급 헌터가 되기 위한 조건 집중 탐구!]
[최근 이강현이 보였던 퍼포먼스 정리!]
[이강현의 압도적인 성장과 활약 조명]
[[단독]헌터관리국의 백아영 남부총괄팀장, ‘이강현은 지금 당장 S급 평가를 신청해도 될 것’.]
…….
기사들을 보며 강현은 흐뭇하게 웃었다.
이미 헌터를 뛰어넘은 강함을 가진 그로서는 더 이상 등급에 목을 매달 필요는 없었지만, 그래도 최대한 높여놓는 편이 나았다.
적어도 등급 때문에 해야 하는 일을 하지 못하고 발목 잡히는 일은 없어야 했으니 말이다.
다만 백아영이 그의 S급 평가에 대한 긍정적인 말을 해주기는 했다지만.
“쩝.”
지금은 볼 수 없었다.
이유는 딱 하나.
[???까지 남은 시간 : 0시간 02분]
어제 개미를 쓰러뜨리고 나타난 정체불명의 시간이 다 소진되어 가기 직전이었으니까.
강현은 불만 가득한 눈으로 시간을 노려보았다.
세계 각국에서부터의 초청부터 언론의 인터뷰 등, 그를 원하는 요청이 산더미인데 이놈의 시간 때문에 뭘 하지를 못하고 있었다.
몰락해 버린 광검제의 명예를 되찾고자 기꺼이 몇몇 요청을 수락할 마음이 있던 그로서는 짜증 나는 일이었다.
‘벌써 본선으로 소환될 리는 없으니까……. 선물이나 보상을 주려는 건가?’
남은 시간은 어느새 1분이 되었다.
‘빨리 받고 어디에 나갈지 골라야겠군.’
그는 어디에 얼굴을 비출지를 고민하면서 1분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그러니, 계획대로였다면 그는 뭔지 모르는 보상을 재빨리 받은 뒤, 쏟아지는 요청 중 몇 개를 골라 기분 좋게 출연했을 것이다.
만약.
[???까지 남은 시간 : 0시간 00분]
슈와아악-
0분이 되자마자 공간이 갈라지며.
빼꼼.
익숙한 돼지머리가 고개를 내밀지 않았더라면.
“하핫, 저를 잊지는 않으셨죠?”
“어…….”
난데없는 로독의 등장에 강현이 말을 잃어버린 가운데, 로독이 크게 외쳤다.
“모시러 왔습니다! 본선의 무대인 중립 차원에서 열리는, 인간종 진출자들의 연회로!”
간단한 보상이나 던져줄 줄 알았는데, 로독이 직접 오다니.
그가 말한 인간종 진출자들의 ‘연회’는 차치하고서라도 당혹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언제나 그랬듯이 로독은 전혀 개의치 않는 모습이었다.
그저.
“그럼, 바로 가실까요? 다들 기다리고 있답니다!”
부우우욱-
손을 내리그어 정면의 공간을 가르며.
휙.
앙증맞은 손으로 강현의 손목을 낚아채어 그대로 이끌었던 것이다.
강현으로서는 두 번째 ‘구멍’ 안으로의 진입이었다.
머리와 몸에 이어 두 발까지 지구를 ‘벗어나자’, 세상이 바뀌었다.
다시금 광활한 우주로 나온 것만 같은 광경이 펼쳐진다.
어두운 세상에 신비로운 안개들이 펼쳐진 가운데 무중력 상태인 것처럼 몸이 부유하는 것도, 거대한 암석들이 슝슝 날아다니는 것도 지난번과 똑같았다.
그런 와중, 즐거운 듯 팔다리를 마구 휘젓던 로독이 몸을 돌려온다.
“하핫, 혹시 바쁜 일이 있었던 건 아니죠?”
“딱히…….”
이미 안으로 데려와 놓고선 뒤늦게 묻는 로독이 어처구니가 없긴 했지만, 달리 할 말은 없었다.
그에게 곳곳에서 출연 요청이 쏟아지고 있긴 했어도 그건 지구의 일.
차원 단위가 휙휙 바뀌는 더 비욘드의 일에 비할 바는 아니었으니 말이다.
“하긴, 본선이 벌어질 곳을 미리 체험하는 것보다 중요한 건 없겠죠! 별다른 일도 없다는 걸 알았으니, 이제 본격적으로 가 볼게요!”
로독이 손을 가볍게 저었다.
지이이잉-
정면에 마치 레드카펫을 펼친 것처럼, 그들의 발에서부터 붉은 길이 위로 솟구쳤다.
어찌나 빠르게 생겨나는지 거의 수직에 가깝게 위로 솟구친다는 것만 알 수 있을 뿐, 순식간에 시야에서 보이지 않게 되었다.
신기하긴 했어도 로독의 의도를 알 수 없어 강현이 고개를 갸웃거리던 순간이었다.
쿠콰콰콰!
뒤에서 태풍이 불기라도 한 것처럼, 엄청난 풍압이 그들을 밀기 시작했다.
슈우웅-
그렇게 붉은 길을 따라 쭉 하늘로 올라가는데, 거의 수직에 가깝게 올라가는 롤러코스터를 탄 기분이었다.
“끼얏호!”
“윽!”
신이 나는지 어쩔 줄 몰라 하는 로독과는 다르게, 강현은 혹여 튕겨 나가기라도 하는 게 아닐까 식겁했다.
하나.
‘그건…… 아닌 거 같네.’
이내 착실하게 붉은 길을 따라 이동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자 마음이 놓였다.
그럼에도 눈 깜짝할 사이 수 ㎞가 멀어지는 듯했기에 적응은 필요했다.
대강의 적응이 끝나자 강현은 천천히 물었다.
“지금 어디로 가는 겁니까?”
로독이 처음 등장하고 지금까지, 본선의 무대에서 벌어질 연회에 초대한다는 말을 했던 것 외에는 추가적인 설명이 없었던 것이다.
“아, 그걸 설명 안 드렸군요!”
로독이 양팔을 쫙 펼쳤다.
“말씀드렸다시피 저희가 가는 곳은 본선 무대가 펼쳐질 중립 차원입니다! 하위 차원과 <초월계>의 중간에 위치하면서도 그 어떤 <초월자>의 지배도 받지 않는, 전 차원을 통틀어 몇 되지 않는 아주 드문 차원이죠! 어떻게 생겼냐면…… 아! 마침 가까워지네요!”
로독이 위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강현은 그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움직였고.
슈와악-
또 다른 ‘구멍’을 통과했음을 앎과 동시에 볼 수 있었다.
바닥이 온통 구름으로 뒤덮인 세상 속, 저 멀리 부유해 있는 거대한 섬을.
* * *
“와…….”
가장 먼저 나온 건 감탄이었다.
구름 위에 떠 있는 섬이라니.
만화나 애니메이션에서 보던 하늘섬을 연상케 했다.
그러나 붉은 길이 계속해서 위로 올라감에 따라 섬을 내려다볼 수 있게 되자.
“……와.”
다른 의미의 ‘와’가 나오게 되었다.
그도 그럴 게, 섬의 크기가 생각보다 훨씬 컸던 것이다.
‘이 정도면…… 대체 얼마나 큰 거야?’
분명히 허공에 떠 있는 섬이라는 걸 알고 있는데도 끝에서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거대했다.
또한, 위에서 내려다보자 특이한 점들이 눈에 들어왔다.
가장 먼저 보이는 건 중앙에 위치한, 끝을 모르고 치솟은 새하얀 ‘탑’이었다.
‘어디까지 솟아 있는 거야?’
위를 봐도 그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높았다.
얼핏 본다면 두께는 그리 두꺼워 보이지 않았으나, 현재 그가 있는 곳과 섬이 상당히 떨어져 있는 걸 감안한다면 실제로는 훨씬 클 듯했다.
특이한 점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중앙의 ‘탑’을 기준으로, 섬이 정확히 다섯 개의 부채꼴 모양으로 오 등분이 되어 있던 것이다.
대지가 아예 청색과 백색, 적색, 흑색, 황색의 다섯 개의 색깔로 확연히 구분되어 있어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난생처음 보는 광경에 입을 떡 벌리고 있는데, 마침 설명이 들려왔다.
“저 섬의 이름은 균형의 섬으로, 저곳에서 본선이 진행됩니다! 또 이름에서 알 수 있듯, 다른 <초월자>의 지배를 받지 않는 대신 오행의 균형이 잡혀 있는 섬이구요! 청색 지역은 목(木), 백색 지역은 금(金), 적색 지역은 화(火), 흑색 지역은 수(水), 마지막으로 황색 지역은 토(土)의 성질을 띠고 있죠!”
“…….”
“참고로 본선은 저 탑 안에서 진행될 것이며, 참가자들은 탈락할 때까지 저 구역들 중 하나에서 생활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받게 됩니다! 각 구역에는 속성에 걸맞은 종족들이 거주하고 있으니 적적하지는 않으실 거예요!”
강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말을 들어보니 저 탑은 일종의 스튜디오인 것 같았고, 오행으로 나뉜 구역들은 일종의 숙소라고 보면 될 듯했다.
다만, 로독의 설명에서 걸리는 게 있었다.
“방금 ‘권리’라는 말을 썼는데, 저기서 사는 게 왜 권리인 겁니까?”
“기감을 집중해 보시면 알 수 있을 겁니다!”
강현은 로독의 말을 따라보았고.
“……!”
알게 되었다.
왜 ‘권리’라는 단어를 사용했던 건지를.
스아아-
공기 중에 농밀하게 분포된 에테르가 느껴졌다.
대기에 마력이 거의 없는 지구는 물론이요, 참가자들이 줄을 서던 DBC의 에테르 연공실보다도 훨씬 짙은 밀도의 에테르였다.
“균형의 섬은 하위 차원들보다는 훨씬 <초월계>에 가깝답니다! 때문에 원래는 거주하기 아주 어려우나, 더 비욘드 본선 진출자라면 말이 달라지죠! 본선이 진행되는 동안에는 저 섬에서 거주하면서, 숨을 쉬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에테르를 취할 수 있을 거랍니다!”
섬에 가까워질수록 더욱 진해지고 있어, 섬에서 에테르를 취한다면 정말로 도움이 될 것 같았다.
“마음 같아서는 깡그리 한 바퀴 돌고 싶지만…… 다들 기다리고 있는 관계로 이제 그만 연회장으로 이동하겠습니다!”
거기까지 말한 로독은 손가락을 맞부딪쳤다.
딱!
다음 순간, 샹들리에와 기다란 테이블들이 주르륵 늘어진 화려한 연회장이 눈앞에 나타났다.
샹들리에가 주는 고급스러운 느낌과 더불어 테이블에 놓인 먹음직스러운 진수성찬들이 연회의 분위기를 돋우었다.
이어서 모여 있는 나머지 본선 진출자들과 트레이너들이 눈에 들어왔고.
로독이 튀어 나가며 크게 외쳤다.
“이걸로 인간종 본선 진출자들이 모두 모였네요! 오직 여러분들만을 위한 연회에 오신 것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연회를 시작하겠습니다!”
* * *
연회의 시작을 알리는 로독의 외침.
“다만 그전에!”
로독이 다시 소리쳤다.
“테이블에 놓인 음식들을 드셔보시겠어요?”
로독의 말에 모두는 의아해하면서도 그의 말을 따랐다.
강현도 마찬가지였다.
군침이 도는 통닭 한 마리를 잡았다.
그리고 통닭을 뜯는 순간.
[취할 수 있는 에테르가 감지되었습니다. 취하시겠습니까?]
[현재 취한 에테르의 양(72/1,000)]
눈을 크게 떴다.
스아아-
[현재 취한 에테르의 양(75/1,000)]
단지 통닭을 먹었을 뿐인데 에테르가 늘다니.
강현이 음식들을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설마 이 음식들이 다……?”
연회장의 인원들도 놀랐는지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그 의문을 로독이 해소해 주었다.
“에테르가 늘어나는 걸 느끼셨나요? 특히 이 음식들은 몇몇 시청자분들이 직접 후원해 주신 것들이니, 마음껏 즐겨주세요!”
그 이후로는, 잠시 연회장에 음식을 먹고 마시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을 만큼 다들 먹는 데에 집중했다.
강현도 열심히 먹어치웠고, 그 결과 유의미한 에테르를 취할 수 있었다.
[현재 취한 에테르의 양(102/1,000)]
‘겨우 10분 먹은 걸로 이 정도라니.’
10분 동안 게이트를 죽어라 돌아도 이 만큼의 에테르는 취할 수 없을 것이었다.
‘엔딜 펠란이 없어서 다행이군.’
아공간에 넣어뒀기에 망정이지, 만약 엔딜 펠란이 나와 있었다면 빨리 음식을 안 주고 뭐 하냐고 난리를 쳤으리라.
조금 더 시간이 지나 슬슬 배가 부를 만큼 잔뜩 음식을 먹고 마시자 참가자들과 트레이너들이 삼삼오오 모이기 시작했다.
강현에게는 여느 때처럼 세르반테가 다가왔다.
“으하하! 그래서 말이야, 그 괴물들을 내가 싹! 쓸어버렸지!”
“아…… 네.”
강현은 얼굴이 빨개진 세르반테의 말에 대충 대답했다.
그는 잔뜩 술에 취한 채 이번 ‘침략’에서의 일을 떠벌이고 있었는데, 겨우 어제 괴수들과 싸운 강현으로서는 흥미가 가지 않는 이야기였다.
다행히.
“이 아저씨는 혼자 무슨 말을 그렇게 해대는 거야? 저리 안 가요?”
-내 검…… 내 검을 내놓아라……!
“으윽! 이, 이것들이!”
또각거리며 다가온 레이센 란과 파리를 보내온 사도천에게 연달아 방해를 받자, 그는 성을 내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모습에 레이센 란이 입꼬리를 올리고, 사도천의 파리가 제자리에서 춤을 췄지만, 그들이 예상치 못한 게 있었다.
“오냐, 내 활약을 다 듣기 전까지는 못 벗어날 줄 알아라!”
바로, 세르반테가 혼자 떠나지 않았다는 것.
“이, 이거 안 놔? 미쳤나 봐!”
-이 개같은 놈! 당장 날 놔라!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면서, 레이센 란과 사도천의 팔다리를 끌고 함께 떠난 것이다.
연회장 저 구석으로 사라져가는 덩어리(?)들을 보며 강현은 눈을 깜빡였다.
“……뭐야?”
졸지에 혼자가 돼버렸다.
혼자가 된 김에 잠시 왁자지껄한 연회장을 바라보는데, 누군가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오랜만이군요.”
다가온 이의 거대한 체구와 이마의 두 뿔을 본 강현이 반가운 얼굴을 해 보였다.
“루드스!”
그가 F등급이었을 시절 그의 트레이너이자, 이후에도 여러 도움을 주었던 루드스였던 것이다.
강현의 옆으로 다가온 루드스가 포도주를 홀짝였다.
“결국 본선에 올라가셨군요. 혹시 했지만, 정말로 본선에 갈 줄은 몰랐습니다…….”
이런저런 이야기들이 오고 갔다.
처음 만났던 때부터 지난 미션들, 앞으로의 본선까지.
그러다 보니 류트의 이름이 나오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류트가 아쉽네요. 마지막에 인사라도 했어야 하는데…….”
강현이 나직이 읊조렸다.
그런데.
“……?”
루드스가 웬 구슬을 꺼내며 웃는 게 아닌가.
“그럴 줄 알고 준비했지요. 짧긴 해도, 좋은 시간이 되어줄 겁니다.”
머리에 의문부호를 띄운 강현은 이내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가, 강현!
목소리의 주인은 그의 유일한 F등급 동기, 류트였으니까.
“류트가 탈락하기 직전 통신구를 건네주었었지요. 한두 마디씩은 전할 수 있을 겁니다.”
한두 마디씩이라.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구슬이 진동하며 류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윽! 하, 한마디요? 어, 얼른 말할게! 응원할게!지지 마!
“……고맙다.”
-나, 나중에 또 연락…….
뚝.
서로 다른 차원이었기 때문인지, 아쉽게도 연결은 거기서 끊어졌다.
“이건 이제 저보다는 당신에게 더 필요하겠군요. 에테르를 충전하면 몇 초씩이긴 해도, 종종 연락할 수 있을 겁니다.”
루드스가 통신구를 건네주며 말했다.
‘짧긴 해도…….’
지난날의 아쉬움을 완전히 털어낼 수는 없었어도, 종종 연락할 수 있다면 나쁘지 않았다.
“그럼, 이만 전 가 봐야겠군요. 당신에게 숲의 힘이 깃들기를 빌면서, 안녕히.”
강현과 만나는 게 목적이었는지 그 말을 끝으로 루드스가 연회장을 벗어났다.
그가 멀어지는 루드스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때였다.
“슬슬 연회의 분위기가 무르익은 듯하니, 제가 한 말씀 드려도 될까요?”
어느새 중앙의 테이블에 올라선 로독이 외쳤다.
“…….”
로독의 말에 연회장이 빠르게 조용해진다.
씩 웃어 보인 로독이 말을 이어나갔다.
“다름이 아니라, 사실 이번 연회는 지금까지 고생하신 참가자분들을 위한 것도 있으나, 다른 목적도 있답니다! 그건 바로…… 여러분들의 선전을 기원하는 것이죠!”
뜬금없는 말에 강현은 영문을 모르는 얼굴을 해 보였지만.
“그도 그럴 것이, 여러분들이 뛰어난 성적을 보일수록 저희 DBC도 반사이익을 얻으니까요!”
로독의 다음 말에 납득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에 상위 종족들의 예선을 싹 훑어본 결과, 저희는 여러분들이 충분히 할 만하다는 판단을 내렸습니다. 아직 부족한 부분이 있긴 해도, 잘만 하면 괜찮은 성적을 기대할 수도 있겠다구요!”
“…….”
“남은 건 모자란 부분을 ‘어떻게’ 채울 수 있냐는 것뿐. 따라서 저희는 뭘 해드리면 인간종의 특성을 나타내면서도 참가자 여러분들이 마음껏 활약을 하실 수 있을지 고민을 거듭했답니다! 여러 의견이 오고 간 끝에 최종적으로는 두 의견으로 좁혀졌는데……. 여기서 문제가 있다면, 참가자 여러분께 드릴 선물을 도저히 하나로 통일시킬 수 없었다는 점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말하며, 로독은 꺼내 들었던 것이다.
사과처럼 생긴 작은 과실과, 낡아빠진 나무토막을.
[타락과]
-태고의 시대, 악마의 유혹에 넘어간 인간이 섭취했던 금단의 열매의 열화본입니다. 스킬, ‘선택의 대가’를 사용할 수 있게 됩니다.
선택의 대가 : 모든 능력치가 20 상승하는 대신, 받는 피해가 20% 늘어납니다.
[???의 나무토막]
-<초월계>의 위대한 <초월자>, ???의 [권역]에 박혀 있었던 울타리의 일부분입니다. 일시적으로 스킬, ‘선포’를 사용할 수 있게 됩니다.
선포 : 지배하는 차원이 아니라 할지라도, 일시적으로 [권역]을 선포할 수 있습니다.
“이중, 참가자분들께서 마음에 드는 걸 직접 골라주시면 되겠습니다!”
“헙…….”
세르반테가 숨을 참는 듯한 소리를 냈다.
설명을 보고 그런 건지, 아니면 술이 덜 깬 건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하나는 확실했다.
놀랐다는 것.
실제로 그가 워낙 유난을 떨어서 그렇지, 다른 참가자들도 적잖이 놀란 얼굴들을 하고 있었다.
“…….”
오죽하면 그 알렉시스조차 입이 살짝 벌어져 있었을까.
“하핫, 잠깐 고민할 시간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 말에 참가자들은 마음 놓고 집중하기 시작했다.
강현도 찬찬히 설명을 읽어보았다.
먼저 읽어본 건 왼쪽의 붉은 과실, 타락과였다.
‘모든 능력치를 20 올려주는 대신 받는 대미지 20% 증가라…….’
심상치 않은 이름에서도 짐작할 수 있었듯이, 정말이지 무시무시한 효과였다.
‘이십……? 하.’
수치를 입에서 굴려보는데, 헛웃음이 나왔다.
세 번째 미션의 마지막에 띄웠던 무지갯빛 오라가 능력치를 10씩을 올려주었었다.
그런데 저 과일을 먹는 것만으로도 그 두 배의 능력치를 얻을 수 있단다.
‘받는 대미지 증가가 약간 걸리기는 하는데…….’
감수할 수는 있는 수준이었다.
그의 시선이 오른쪽의 낡은 나무토막으로 넘어갔다.
어느 <초월자>의 [권역]에 박혀 있었다는 나무토막.
받는 피해가 늘어나는 건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능력치를 주는 것도 아니었다.
쓸 수 있는 거라고는 오직 하나, 지배하는 차원이 아닌 곳을 [권역]으로 지정할 수 있는 스킬인 ‘선포’뿐.
“흠…….”
옆에 선 알렉시스가 침음을 흘린다.
결정을 내리기 어려운 모양이었다.
하지만 강현의 고민은 길지 않았다.
“다들 고민해 보셨나요? 메시지를 띄워 드리겠습니다!”
팟-
[보상을 골라주십시오
(타락과 / ???의 나무토막)]
그는 망설임없이 결정을 내렸다.
[???의 나무토막을 선택하셨습니다]
턱.
허공이 갈라지며 팔뚝만 한 나무토막이 떨어진다.
‘역시 이게 낫겠지.’
타락과가 분명 말도 안 되는 능력치를 상승시켜주기는 했다.
그러나 받는 대미지 증가가 마음에 걸렸다.
그가 생각하는 스스로는 문무를 골고루 겸비한 다재다능한 스타일이었지, 적과 마구 칼을 주고받는 광전사가 아니었으니까.
뿐만 아니라 20이라는 엄청난 수치가 적혀 있긴 했어도, 능력치는 그의 레벨이 올라감에 따라 같이 오르게 되어 있다.
‘그에 반해…….’
강현이 손에 놓인 나무토막을 바라보았다.
어제 [권역]을 살펴보며 자신의 [권역]에서의 <초월자>가 얼마나 강해질 수 있는지 알게 된 그였다.
비록 아직은 반경 1m밖에 되지 않아 당장은 타락과보다 도움이 덜 된다고 해도, 나무토막에 깃든 ‘선포’는 두고두고 유용하게 써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스윽-
나무토막을 아공간에 갈무리한 강현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른 참가자들도 하나둘 선택을 마무리하고 있었다.
타락과를 고른 건 세르반테와 남궁강룡, 이현이었고, 나무토막을 선택한 건 자신과 레이센 란, 사도천, 알렉시스였다.
‘검을 쓰는 육체파는 타락과, 나머지는 나무토막인가.’
“자, 그럼 본선이 진행되는 동안 머무실 구역을 배정해 드리겠습니다!”
로독이 가지각색의 보석이 달린 목걸이를 꺼내 들었다.
각각 청색과 백색, 적색, 흑색, 황색의 보석들이었는데, 그걸 본 강현은 알 수 있었다.
조금 전 균형의 섬을 설명하면서 로독이 말해주었던 오행에 해당하는 색깔들이라는 것을.
“참가자 여러분들의 특색을 고려하여 제가 적절히 구성했으니, 가 보면 만족하실 거예요! 먼저 청색부터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로독이 손가락을 부딪치자 그의 손에 들려 있던 목걸이가 알렉시스와 사도천의 품으로 떨어졌다.
“이어서 적색과 흑색!”
적색과 흑색 목걸이가 각각 레이센 란과 세르반테에게 돌아갔다.
“다음은 백색!”
백색 목걸이의 주인은 남궁강룡과 이현이었으며.
“마지막으로…… 황색입니다!”
강현이 받게 된 건 황색 목걸이였다.
그는 목걸이를 살펴보며 로독이 해주었던 오행에 대한 설명을 떠올렸다.
‘황색이…… 토(土)속성이라고 했었지.’
과연 햇빛에 반사되는 모래알처럼 반짝이는 황색 보석을 보아, 흙 속성에 걸맞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다만 그 반짝임이 과하지도 모자라지도 않고 은은하여, 더없이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강현을 끝으로 모든 목걸이를 나누어준 로독이 후련한 표정을 지었다.
“그 목걸이를 사용하는 방법은, 본선에 올라가면 별도의 설명이 있을 거랍니다! 이제 본선까지 남은 시간을 띄워 드리는 걸 마지막으로, 예선을 함께했던 방송국으로써 할 일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팟-
[다음 소환까지 남은 시간 : 7일 0시간 0분]
로독의 말과 동시에 다음 소환을 알리는 메시지가 떠올랐지만.
강현은 그것보다는 그의 얼굴에 주목했다.
더 이상 참가자들이 자신들의 소관이 아니라는 듯한, 시원섭섭한 얼굴.
강현은 예선이 끝났다는 걸 다시 한번 실감했다.
이제 그들은 예선이 아닌 본선을 헤쳐 나가야 했고, 예선을 도맡았던 DBC와도 끝인 것이다.
시원섭섭한 표정을 지은 것도 잠시, 로독은 다시 활짝 웃어 보였고.
“하핫, 여러분들을 담당했던 프로듀서이자 한 명의 팬으로서, 이 말은 꼭 드리고 싶네요.”
순식간에 진지해졌다.
“여러분들도 아시겠지만, 본선에 참가하는 종족들 중 인간종은 명백한 하위권이죠. 인간종의 참가자들이 주요차원과 군소차원으로 나뉘었던 것 이상으로 종족의 차이가 두드러질 겁니다.”
로독이 참가자들과 하나씩 눈을 마주쳤다.
“하나 아까 말해드렸다시피, 여러분들은 충분히 활약할 수 있습니다. 단순히 입에 발린 말이 아니라, 정말로요! 다만, 하나만 명심해 주시면 됩니다.”
“…….”
“자세한 말은 못 드리겠지만, 본선에 소환된 직후에는 예상과는 다른 광경에 당황하거나, 이게 뭔가 싶을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이건 꼭 알아두세요! 더 비욘드에서 벌어지는 모든 사건에는 반드시 의도하는 바가 있을 거라는 걸!”
여기까지 말한 로독의 표정이 다시금 밝아진다.
“제가 드릴 말은 여기까지입니다! 모셔다드리는 건 제가 해드릴 터이니, 복귀는 걱정 마시고 연회를 마저 즐겨주세요!”
말을 마친 로독이 단상에서 내려오면서, 연회가 재개되었다.
‘음…… 본선 팁을 준 거 같긴 한데…….’
로독의 의미심장한 말에 강현은 고개를 기울이며 그 뜻을 파악하려 했으나, 본선에 가본 적이 없으니 파악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모르겠다, 가 보면 알게 되겠지.’
그는 나중에 생각하기로 하고 연회를 즐겼다.
루드스에게 말했듯이 아주 오랜만의, 마음을 놓고 쉴 수 있는 연회였다.
* * *
그렇게 연회가 끝나고.
슈우우…….
로독의 배웅을 받으며 집으로 돌아온 강현은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를 확인했다.
‘50분 정도 지났군.’
차원이 달라졌어도 배율은 비슷한 건지, 연회가 다섯 시간이 넘게 이어졌음에도 지구는 한 시간이 채 지나 있지 않았다.
스윽-
그는 아공간에서 수수께끼의 검을 꺼냈다.
-으……. 지겨워서 죽는 줄 알았군. 네놈, 다음부터는 이 몸을 상시 들고 다니도록 해라.
꺼내자마자 엔딜 펠란이 투덜댄다.
그러나 강현은 그 투덜거림에 응하는 대신, 로독이 주었던 ‘???의 나무토막’을 집어 들었다.
“차원 정…… 아니다, 제3 군소차원 정보.”
굳이 ‘[email protected]’차원의 정보창까지 부를 필요가 없었기에 혹시 따로 부를 수 있는지를 시험해 봤는데.
[제3 군소차원의 정보를 불러냅니다.]
[경고 : 현재 사용자의 ‘격’으로는 온전한 정보를 불러낼 수 없습니다!]
다행히 되는 걸로 보였다.
제3 군소
[인구] : 7,920,056,501명
[에테르] : 측정 불가
[권역] : 반경 1m
반경이 고작 1m이긴 했어도, [권역]에 딸린 소환과 순간이동 스킬을 사용하는 데에는 문제가 없었다.
슈슉-
강현의 신형이 1m 단위로 불쑥 나타나고, 집안의 잡동사니들이 닥치는 대로 손에 올랐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권역]의 스킬들을 점검한 강현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앞으로 ‘단계’를 올려서 [권역]의 반경을 늘리고, 이 나무토막까지 더해지면…….’
무궁무진하게 써먹을 수 있을 터였다.
-음? 그 나무토막은 무엇이냐.
“이게 뭐냐면 말이죠…….”
호기심을 보이는 엔딜 펠란에게 강현은 연회에서 있었던 일을 간단하게 설명해 주었다.
-흐음…… 타락과라면 이 몸도 알고 있다만……. 누가 쓰던 건지는 몰라도 저 나무토막이 더 나은 것 같긴 하군.
“저도 그리 여기던 참입니다.”
-타락과가 아깝지는 않나? 그것만 있다면 당분간 편하게 강해질 수 있을 터인데.
“아뇨. 나무토막이 낫습니다.”
강현은 고개를 저었다.
꼭 타락과가 아니어도 능력치를 올릴 수 있는 방법은 많았다.
당장 그가 첫 번째 미션의 보상으로 받았었던 에덴투니크(ádentunik)의 미약한 가호만 하더라도 모든 능력치를 2씩 올려주지 않았던가.
앞으로도 그 같은 가호를 받을 기회는 또 올 것이다.
게다가.
‘50레벨에는 ‘강림’을 배우지.’
현재 그의 레벨은 43.
45레벨에도 스킬을 배우지만, 거기서 5레벨을 더 올려 50레벨이 된다면 리얼에서의 그를 상징하는 스킬 중 하나였던 ‘강림’을 배운다.
‘강림’은 하늘로부터 빛의 힘을 끌어와 능력치를 올려주는 버프기.
직접적으로 능력치를 올려주는 만큼, 큰 도움이 되어줄 터였다.
그러니 남은 시간 동안 그가 해야 할 일은 정해져 있는 셈이었다.
“……또 노가다인가.”
지긋지긋하게 지겹고 지루하겠지만, 해야만 했다.
“에휴…….”
강현은 한숨을 내쉬며 스마트폰을 집어 들어 백아영에게 문자를 보냈다.
-당분간 칩거할 예정입니다. 섭외 요청 관리 좀 부탁드립니다.
‘이걸로 섭외 거절은 백아영 팀장이 해줄 거고…….’
광검제의 명예를 회복할 기회를 이렇게 보내는 게 아쉽긴 했어도, 별수 없었다.
늘 그랬듯이, 그에게 가장 중요한 건 더 비욘드에서 끝까지 올라가는 것이었다.
턱.
그가 손을 휘젓자 아공간에서 목갑 두 개가 튀어 나온다.
중하급 수련의 방
-현재 내구도 : 30/50
하급 수련의 방
-현재 내구도 : 3/50
남은 시간은 6일 하고도 19시간 남짓.
그는 그 시간을, 레벨을 올리는 데에 전념할 생각이었다.
“후우.”
섭외 요청도 거절했겠다, 그의 경험치가 될 슬라임들도 목갑 안에 이미 준비되어 있다.
크게 한 번 심호흡을 하는 것 외에 다른 준비는 필요 없었다.
“갑시다.”
-……지루해 죽을지도 모르겠군.
툴툴대는 엔딜 펠란에게 짤막한 말을 건넨 그는, 슬라임이 득실거리는 수련의 방 안으로 진입하여 수련에 매진했다.
바깥에서 그가 칩거에 들어갔다는 소식에 수많은 사람들이 아쉬워했다는 것도, 수십 개에 달하는 섭외 요청을 본 백아영이 이마를 짚었다는 것도 알지 못한 채.
그러는 사이 시간은 흘러.
[다음 소환까지 남은 시간 : 0일 0시간 0분]
소환이 시작되었다.
* * *
[참가자 이강현 확인, ‘균형의 탑’ 1층으로 이동합니다.]
슈와아아-
강현은 조용히 눈을 떴다.
그러고는.
“어?”
당황했다.
그도 그럴 게, 눈을 떴는데도 주변이 온통 암흑천지였던 것이다.
스튜디오도, 다른 참가자들도, 프로듀서도.
그 무엇도 보이지 않는 깜깜한 어둠 속이었다.
그가 진지하게 소환이 잘못된 게 아닌지 고민하던 때였다.
팟-
[더 비욘드의 본선에 오신 것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돌연, 눈앞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본격적인 본선이 시작되기 전, 간단한 서브 미션을 진행하겠습니다.]
[서브 미션]
-주제 : 증명
-내용 : 균형의 탑에는 다양한 종족이 거주하고 있으며, 그들을 위한 환경이 펼쳐져 있습니다. 균형의 탑의 1층부터 9층을 거치며 스스로를 드러내고, 보상을 얻으면서, 본선이 진행될 10층까지 올라오세요!
-성공 시 : 첫 번째 미션 진출
-실패 시 : 탈락
“이런 거였나.”
강현은 그제야 로독의 저의를 깨달았다.
어쩐지 뭔가 예상과도 달라도 당황하지 말라더니.
과연, 이런 걸 할 거라고는 전혀 예측하지 못했다.
하지만.
[서브 미션이 진행되는 동안, 참가자들은 이름이나 종족이 아닌 오로지 칭호와 점수로만 자신을 드러내게 됩니다. 탑에서의 스스로를 나타낼 칭호를 지어주세요.]
이어지는 메시지에 그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이건 괜찮네.”
종족에 상관없이 오직 실력으로만 판별된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그는 잠시 칭호를 고민했다.
처음에는 ‘광검제’로 할까도 생각해봤지만…….
‘그건 남이 불러줘야 돼.’
광검제라는 칭호는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의 입에서 나와야 했다.
“으음…….”
잠깐 고민하던 그였지만, 이내 떠올렸다.
마침 한국에는 자국의 승리를 기원하는 명칭이 여러 개 있었던 것이다.
다소 뜬금없긴 했다만, 어차피 별명이니 별 상관없을 듯했다.
몇 개가 떠올랐고, 그는 그중 적당한 것을 골라 적어나갔다.
-음? 그건 무슨 뜻이지? 설마 이 몸을 존경하는…….
“그건 아니고, 우리나라에서 승리를 기원하는 마스코트입니다.”
-마스코트? 그건 또 무엇이냐.
“그게 뭐냐면-”
강현이 엔딜 펠란의 착각을 바로잡아주고 있을 때였다.
[‘붉은 악마’ 확인, 대기실로 이동합니다.]
새하얀 빛이 그를 휘감았다.
본선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