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침략
[미션이 종료되었습니다.]
[참가자 이강현 님의 기여도는 1,870pt입니다.]
[기여도 순위를 나타냅니다.]
1위 이강현(1,870pt)
2위 남궁강룡(1,430pt)
3위 레이센 란(1,420pt)
4위 알렉시스 찬드라스(1,400pt)
5위 한림(1,350pt)
6위 연청(1,300pt)
…….
벅차오르듯 다가온 레이센 란, 루시타르, 리라스테와 이야기를 나누고, 알렉시스 찬드라스가 쭈뼛거리며 다가왔을 때였다.
슈와아-
[스튜디오로 이동합니다.]
세상이 순식간에 빛에 잠겼다.
다음 순간 강현은 자신이 스튜디오로 이동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고생하셨습니다아-! 그야말로 엄청난 격전의 연속이었습니다! 모든 참가자 여러분들의 투지와 용기, 열정에 많은 시청자분들이 몰입하면서 보셨답니다! 저 개인적으로도 굉장히 인상 깊은 미션이었구요!]
로독은 눈을 똘망하게 뜨더니, 느닷없이 땅이 꺼지라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이제 참가자 여러분들의 미션을 진행하지 못하게 되다니, 갑자기 기분이 울적해지네요. 그렇지만 저 로독, 마지막까지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도록 하겠습니다! 투표가 거의 끝났다고 하니 잠시만 기다려 주시고…… 그동안 다시 한번 순위 산정을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이미 많이 들으셨을 테지만, 아무래도 그만큼 중요한 일이니까요! 살짝 달라진 점도 있고 말이죠!]
로독이 양팔을 쫙 펼치며 외쳤다.
[여태까지는 순위를 발표하기 전 참가자 본인이 확인하는 시간을 가졌죠? 이번에도 똑같습니다!]
로독의 입에서 순위가 나오자 스튜디오에 긴장이 빠르게 퍼져간다.
강현은 조금 전 떠올랐던 기여도 순위를 기억해 냈다.
그가 기억하기로는 5위와 6위에 한림과 연청이 떡하니 올라 있었다.
아마 상단에서 백도어를 하면서 상당히 많은 드워프들을 해치운 덕에 생각보다 훨씬 높은 기여도를 쌓은 듯했는데, 그 같은 사실은 강현과 레이센 란, 남궁강룡, 알렉시스를 제외한 나머지 본선진출조에게 경각심을 일깨울 만했다.
기여도로 봐서는 막판에 본선 진출을 하이재킹당할 가능성이 생긴 것이다.
실제로 이변의 주인공인 한림과 연청의 입가가 미세하게 씰룩이는 것이, 그들도 그 가능성을 눈치챈 걸로 보였다.
[아시겠지만 현재 열네 명의 참가자 중 단 일곱 명만이 본선에 진출하게 될 것이며, 순위는 기여도만이 아닌 시청자 투표와 트레이너 평가까지 합산하여 산정하게 됩니다……. 마침 산정이 끝났다는군요! 그럼 바로 확인해 주세요!]
‘정보.’
이름 : 이강현
차원 : 제3 군소
순위 : 1
1위.
첫 번째 세트를 거의 혼자 힘으로 승리하다시피 하고, 두 번째 세트 대역전승의 주역이었다.
거기에 기여도까지 1위인 데다가, 오더도 전담했다.
1위가 아니라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ㅊㅋㅊㅋ
-축하합니다
-축하!
-결국 1위 찍는구나;;;
-군소차원 출신으로 1위 먹은 사례는 진짜 별로 없을 텐데
-재능충 머야;;
…….
시청자들의 축하가 쏟아진다.
이어서 로독이 목청이 터지도록 소리쳤다.
[축하해 주세요! 더 비욘드 인간종 예선의 치열한 예선을 모두 통과하고 본선에 진출하게 된, 영광스러운 7인의 진출자들입니다아-!]
팟-
1위 이강현
2위 레이센 란
3위 남궁강룡
4위 알렉시스 찬드라스
5위 세르반테
6위 이현
7위 사도천
다른 본선 진출자 명단을 훑어본 강현은 알 수 있었다.
이변은 일어나지 않았다는 걸.
[하핫, 나머지 참가자분들의 순위도 알려드리겠습니다!]
8위 로프터스
9위 루시타르
10위 한림
11위 연청
12위 리라스테
13위 이바브
14위 이립
그 뒤로도 주르륵 참가자들의 순위가 나열됐으나, 의미는 없었다.
“아아…….”
“어, 어찌…….”
내심 기대한 걸로 보였던 한림과 연청은 절망한 듯 주저앉았고.
“휴우, 떨어지는 줄 알았는데!”
“…….”
세르반테와 사도천은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으며.
“음…….”
한 번도 본선진출조에 들지 못했었던 이현은 의외라는 얼굴을, 마지막 미션에서 떨어져 버린 로프터스는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여태껏 로프터스는 항상 7위 안에 들었고, 이현은 10위 안팎의 순위였다는 걸 생각해 본다면 로프터스 대신 이현이 본선에 진출하게 된 건 다소 놀라운 일이었다.
-아무래도 첫 번째 판에서 네놈에게 처참히 발린 게 반영된 듯하다만.
‘그런 것 같네요.’
엔딜 펠란의 말처럼, 첫 번째 세트에서의 부진이 크게 영향을 미친 것 같았다.
‘역시 시청자들은…….’
냉정하다.
웃으면서 채팅을 치면서도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는다.
오로지 상황의 본질만을 반영하여 표를 던진다.
기여도 순위가 각각 5위와 6위였던 한림과 연청의 최종 순위가 10위와 11위인 것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극적인 역전승의 주인공이 되긴 했어도, 애초에 남궁강룡이 적흑색 오라를 띄울 수 있는 빌미를 준 것도 그들이 솔로 킬을 당했기 때문이었다.
[자, 예선은 이걸로 끝이라고 해도, 마지막까지 보상은 준비해 드려야겠죠?!]
로독의 외침과 함께 뒤늦게 메시지가 나타난다.
[참가자 이강현의 최종 순위는 1위입니다.]
[순위에 따른 보상을 정산합니다…….]
그걸 보자 강현은 그제야 실감이 났다.
바닥부터 시작해서 결국은, 1위를 차지한 것이다.
그것도 남궁강룡까지 꺾고.
-흥, 무지개 오라 덕분에 이겨놓고선 말이 많구나.
엔딜 펠란이 이죽거렸으나, 강현은 어깨를 으쓱해 보일 뿐이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결국에는 이기는 자가 강한 거죠. 그건 그렇고, 이제는 말해줄 수 있는 겁니까?’
-뭘 말이냐?
‘정보들 말입니다.’
강현이 말하는 정보는 다른 게 아니었다.
엔딜 펠란이 알고 있을, 더 비욘드와 다른 차원들에 대한 정보들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동안은 시간이 없기도 했고, DBC에서 막아놓은 스포일러 차단 때문에 물어봐도 만족스러운 답을 얻지 못했던 그였다.
하나 이제 예선이 끝나면서 DBC도 없는 데다가 시간도 넉넉했다.
그가 알지 못했던 새로운 정보들을 접할 기회가 열린 것이다.
비록 엔딜 펠란은.
-그래 봤자 이제 시작인 놈이 무슨.
그렇게 말하며 콧방귀를 뀌었지만 말이다.
-뿐만 아니라 아직 이 몸의 에테르도 여유 있지는 않다. 상위 차원으로 완전히 이동하거나 흑마석을 더 줘야 자유롭게 말할 수가 있을 거다.
엔딜 펠란이 안 된다 말해왔음에도 강현은 딱히 아쉬워하지 않았다.
어차피 머지않아 알게 될 것들이었다.
[자, 순위도 모두 확인하신 것 같으니, 소환을 시작하겠습니다!]
슈와아-
그들을 원래 차원으로 돌려보낼 빛이 빠르게 바닥에서부터 올라오기 시작했다.
빠르게 스튜디오를 덮어가는 빛을 본 강현이 의아하다는 얼굴을 해 보였다.
‘……마지막인데 이렇게 끝낸다고? 인사도 못 했는데.’
지금까지는 비교적 충분히 시간을 주고 소환시켰는데, 이번에는 이토록 급하게 돌려보내다니.
빛이 스튜디오를 덮는 시간도 평소와 달랐다.
여태까지는 소환되는 데에 3~5분 정도 걸렸었는데, 지금은 벌써 빛이 허리까지 왔다.
[DBC의 사정상 일찍 소환이 이루어지는 거라, 참가자 여러분들의 너른 양해 부탁드리겠습니다!]
방송국 차원에서 이러는 거라는데 별수 없긴 했어도 뭔가 찜찜했다.
다른 참가자들은 그렇다 쳐도, 루드스와도 만나지 못하고 바로 소환될 거라니.
[하하, 당연하지만 이게 마지막은 절대 아닙니다! 다른 참가자들 및 트레이너들과 인사는 따로 해야죠! 갑작스럽게 느껴지시겠지만, 조만간 따로 뵙겠으니 그때까지 모두 안녕하시길! 그래도 저희가 정 없는 방송국은 아니랍니다!]
‘뭔가 이유가 있는 건가.’
로독이 저렇게까지 말하는 걸 보면 그들을 빨리 보내야 하는 이유가 있는 듯했다.
루드스 및 다른 참가자들과도 만날 수 있을 거라는 말에 안심한 강현은 채팅창에 인사를 건넸다.
“잘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강바(강현 바이라는 뜻 ㅎ)
-ㅃㅇ
-ㄱㅂ~
-예선하느라 고생 많았다
-본선에서는 더 고생해 보자!
-가즈아!!!!
-아 언제 또 기다려
-흐음.
…….
쉼 없이 올라오는 시청자들의 채팅을 읽고 있는데.
슈와아아-
올라오던 빛이 채팅창을 가려 버렸다.
그리고.
[아마 돌아가면 정신없으실 겁니다! ‘적응’을 하고 계시면 적당한 때에 뵙도록 하겠습니다! 여기까지 프로듀서, 로독이었습니다!]
로독의 의미심장한 말을 끝으로, 세상이 빛으로 완전히 잠겼다.
더 비욘드 예선의 끝이었다.
* * *
돌아온 강현은 눈을 부릅떴다.
“이, 이게…….”
거실의 창문이 박살 나 있는 것도 모자라, 아예 지붕이 날아간 것처럼 일부 천장에는 구멍이 뚫려 하늘이 훤히 보이기까지 한 것이다.
즉, 집이 난장판이었다.
그가 없는 사이 포탄이나 폭격이라도 맞은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강현은 즉시 TV를 틀고 휴대폰을 확인해 보았다.
부재중 전화 : 98통
확인하지 않은 메시지 : 43개
“…….”
부재중 폭탄을 본 강현이 문자를 눌러보려는데, TV에서 소리가 흘러나왔다.
[이틀 전부터 서울과 경기 지역에서 발생하기 시작한 대규모 게이트 주의보는 진정될 기미가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현재 정부는 국가재난상태를 선포한 뒤 게이트 역전 현상이 일어난 지역을 최우선시하겠다는 입장을 발표했으며…….]
‘게이트 역전 현상?’
강현이 미간을 찌푸렸다.
게이트 주의보는 그렇다 치더라도, 게이트 역전 현상은 거의 발생하지 않는 현상이었기 때문이다.
게이트 역전 현상.
발생한 게이트를 일정 이상 해결하지 않고 두면 게이트 내부의 괴수들이 바깥으로 쏟아져 나오는 현상을 일컬었다.
당연하게도 게이트에서 괴수들이 튀어나오는 건 재앙이나 다름없었고, 헌터들이 게이트를 처리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거기까지 파악한 강현은 집이 엉망이 된 이유를 대강 짐작할 수 있었다.
“……게이트에서 튀어나온 괴수들 때문에 이 난리가 난 거라고?”
스마트폰으로 인터넷에 접속해 보자, 그가 사는 지역이 근원지로서 가장 큰 피해를 입고 있다고 적혀 있었다.
“이런 미친.”
강현이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하고 많은 지역 중에 하필 자신의 거주지에서 게이트 역전 현상과 게이트 주의보가 발생했다니.
재수가 없어도 너무 없었다.
그때였다.
-멍청한 놈, 그게 우연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엔딜 펠란이 이상한 소리를 해왔다.
“예? 이게 우연이 아니라는 말입니까?”
-그 돼지가 마지막에 했던 말을 떠올려 봐라.
“로독이 마지막에 했던 말……?”
그러고 보니 소환되기 직전, 로독은 이렇게 말했었다.
다시 복귀하면, 당분간 정신이 없을 거라고.
‘적응’을 하고 있으면 알아서 찾아갈 거라고.
설마 그것과 관련이 있는 걸까?
“로독이 했던 말이…… 이 상황과 관련이 있는 겁니까?”
-물론이다.
엔딜 펠란이 클클댔다.
-이제부터 네놈은 본격적으로 <초월자>가 된다는 것의 의미를 알아갈 거다. 그 첫 번째가 지금과 같은 ‘침략’을 막아내는 것이고.
“침략? 무슨 침략을 말하는 겁니까?”
강현이 그렇게 말한 순간이었다.
[순위에 따른 보상의 정산을 완료했습니다.]
[보상을 지금 수령하시겠습니까? (Yes/No)]
떠오르는 메시지에 강현은 그대로 손을 가져갔다.
상황을 파악하는 것도 중요하나, 보상은 언제나 옳았으니까.
‘에테르 아니면 수련의 방 같은 거겠지.’
다만 마지막 예선을 끝내긴 했어도 강현은 큰 기대를 하지는 않았다.
기대를 하지 않는다고는 해도, 에테르나 레벨 업에 도움이 될 게 나온다면 충분히 만족이었고.
그런데.
[참가자 이강현, 1위 확인.]
[보상으로 무영신투의 모방(模倣)의 가호가 지급됩니다.]
“어?”
모방(模倣)의 가호
제1 무림의 전설적인 도둑, 무영신투(無影神偸)의 능력이 담긴 가호입니다.
인간종의 가장 큰 특징이자, 무영신투의 특기였던 모방의 힘이 깃들어 있습니다.
-하루에 한 번, 동격(同格) 이하 존재의 [종족 특성]을 모방할 수 있습니다.
보자마자 알 수 있었다.
“이건…….”
그의 예상을 가볍게 뛰어넘는, 1위에 걸맞은 보상이 지급되었다는 걸.
[원하는 [종족 특성]을 모방하고자 상상하는 것으로 가호를 발동시킬 수 있습니다.]
[다른 존재의 [종족 특성]을 모방하려면 그에 따른 마력 소모가 수반됩니다.]
[만약 마력이 부족하여 온전히 모방할 수 없다면, 잔여 마력만으로 해당 [종족 특성]을 모방합니다.]
이어지는 메시지들까지 꼼꼼하게 읽은 강현이 나직이 탄성을 내질렀다.
“와.”
다른 [종족 특성]을 모방할 수 있다니.
다양한 상황에서 요긴하게 활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가호를 받은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첫 번째 미션이 끝나고, 모든 능력치를 2 상승시켜 주는 ‘에덴투니크(ádentunik)의 미약한 가호’를 받았던 것이다.
그때도 대박이라고 여기면서 받았던 기억이 있었는데, 세 번째 미션 보상으로 지급된 모방의 가호는 그것과는 궤를 달리했다.
-모방이라……. 아무래도 인간종의 특성도 나타낼 겸, 본선에 올라가서도 쓸 만한 걸 준 것 같군. 에테르나 무력을 올리는 것보단 훨씬 나은 보상이다.
엔딜 펠란도 괜찮다는 평을 내린다.
그런데 그의 말에 걸리는 게 있었다.
“인간종의 특성이요?”
그것까지 신경을 써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이었다.
그 의문에.
-예선이든 본선이든 간에, 경연이라는 것만은 똑같다. 자신들 종족의 특징을 나타내서 손해 볼 건 없지. 물론 단순히 그 이유만은 아니겠지만.
엔딜 펠란은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아마 1위로 올라가는 네놈이 인간종 예선의 얼굴이 될 가능성이 높으니, 좀 더 얹어준 거겠지. 본선에 가면 네놈이 인간종을 대표할 일은 분명 생길 거고, 그런 네놈이 잘될수록 방송국의 체면도 사는 것일 테니까.
“아…….”
-그런 의미에서 모방 능력이 담긴 가호가 내려진 건 나쁘지 않다. 어차피 인간은 허구한 날 베끼기만 하지 않느냐.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라는 격언도 있을 정도이니 대충 맞는 말이긴 했다.
그건 그렇고.
‘인간종 예선의 얼굴이라.’
그 말을 들으니 예선이 끝났다는 게 다시 한번 와닿았다.
그 사실을 실감하고 있을 때였다.
‘아, 맞다.’
아까 엔딜 펠란이 말을 하다 말았다는 게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침략’이 정확히 뭡니까? 마저 설명해 주시죠.”
-그러려면 흑마석이 더 필요하다. 하위 차원에서 말을 계속해서인지 에테르가 빠르게 소진되고 있다.
강현이 흑옥을 꺼내 던져주자 수수께끼의 검, 아니 엔딜 펠란이 번쩍 뛰어올라 흑옥을 낚아채더니.
-으하하! 바로 이 에테르다!
검은 기운을 방출하여 흑옥을 덮어간다.
‘흑옥만 흡수하면 저러네.’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강현은 스마트폰을 집어 들었다.
지난번 엔딜 펠란에게 흑옥을 주었을 때, 흡수하는 데에 적지 않은 시간이 걸렸었다.
우거걱-
정신없이 우걱거리는 소리가 들려오는 걸 보면 이번에도 마찬가지일 터였다.
강현은 메시지를 확인했다.
몇몇 안부 연락을 제외한다면 대부분이 헌터관리국, 그중에서도 백아영의 연락이 가장 많았다.
‘일단 관리국으로 가야겠군.’
게이트 주의보든, 역전 현상이든 관리국에 가야 정확한 상황을 파악할 수 있을 듯했다.
강현은 수수께끼의 검을 아공간에 넣은 뒤 관리국으로 출발했다.
* * *
불행인지 다행인지, 관리국으로 가는 동안 끊임없이 튀어나오고 있다는 괴수들을 마주치는 일은 없었다.
대신 폐허가 된 건물들과 혼비백산하여 지방으로 내려가는 수천 명의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그들로 말미암아 이 사태가 심각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관리국 남부지부 건물 최상층으로 올라간 그는 백아영을 만날 수 있었다.
“이 난리가 나는 동안 대체 어디 있었던 거예요?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가 없던데.”
이번에 그가 더 비욘드에서 보낸 시간은 일주일 정도.
지구의 시간으로 대략 하루 동안 잠수를 탄 셈이었다.
“오지에서 수련을 좀…….”
“핸드폰도 안 들고 가요? 큰일이라도 난 줄 알았다구요!”
말해오는 백아영의 머리와 옷매무새가 흐트러져 있다.
차림을 정돈할 시간도 없을 만큼 정신없다는 거겠지.
“하아……. 그래도 이제라도 왔으면 됐어요. 헌터 한 명 한 명이 절실한 판국이었는데.”
“상황이 그렇게 심각합니까?”
“……아무리 오지에서 수련하셨다지만 오면서 뉴스는 보셨겠죠?”
“보긴 했는데, 정확히는 모릅니다.”
뉴스에 나온 것들은 단편적이었다.
보다 정확하게 이 상황을 파악할 필요가 있었다.
백아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이 없으니까 간단하게 설명해 드릴게요.”
백아영이 뒤편의 프로젝터를 켜자, 현재 발생한 수도권의 게이트 주의보들이 지도에 파란색 원으로 나타났다.
얼핏 봐도 4~50개는 되어 보이는, 재앙이라 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수였다.
“이틀 전 오전 3시부터, 아무런 조짐도 없이 서울과 경기 지역에 수십 개의 게이트들이 나타났어요. 정확히는 강현 씨가 사는 곳을 시작으로 퍼져 나갔고, 여태까지 관측된 적이 없는 대규모 게이트 주의보예요. 게다가 몇 시간 동안만 게이트를 만들어내던 다른 게이트 주의보들과는 다르게, 이틀이 지난 지금까지도 만들어내는 게이트 개수가 전혀 줄어들 기미가 안 보이고 있고요.”
팟-
말을 마친 백아영이 버튼을 누르자, 열 개 정도의 게이트가 붉게 표시된다.
“빨갛게 변한 게 역전 현상이 일어난 게이트들이에요. 공통점은, 게이트 역전 현상으로 튀어나오는 것들이 몽땅 곤충계 괴수들이라는 거예요.”
“저곳들이 다요?”
강현은 진심으로 놀랐다.
국가재난사태가 선포됐다는 뉴스는 봤지만, 저렇게 많을 줄은 예상치 못했다.
“게이트를 진압하는 속도보다 나타나는 속도가 더 빨라서 그래요. 돌연변이 기억하시죠?”
“예.”
강현은 처음 관리국에 들어가기 위해 솔로 클리어했던 D등급 게이트를 떠올렸다.
리자드맨이 나오는 게이트였는데, 광견병에 걸린 것처럼 달려드는 리자드맨과 충격파를 쏘는 리자드맨 킹이 나왔었다.
“혹시 지금 생겨나는 게이트들이…….”
“맞아요. 대부분 다 돌연변이에요. 헌터들의 클리어가 늦는 원인이기도 하고요. 게이트가 이렇게나 폭증하는 원인이라도 알면 될 텐데 그것도 모르니…….”
백아영이 땅이 꺼지라 한숨을 내쉬었다.
강현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전 어디에 투입되면 됩니까? 당장 게이트에 진입하고 싶은데요.”
“네? 그러면 선택권을-”
“선택권은 안 써도 좋습니다.”
강현이 그리 말할 줄 몰랐는지 백아영이 눈을 크게 떴다.
‘어디 들어갈지 고르고 있을 시간은 없어.’
엔딜 펠란의 말에 의하면 이 재앙이 그 때문에 생긴 거라고 하니, 그가 나서야 한다고 생각됐다.
게다가 게이트 주의보가 생겨난 근원지는 다름 아닌 그의 거주지였다.
그가 나서지 않는다면 누가 나서겠는가.
잠시 얼떨떨한 표정을 지어 보이던 그녀가 이내 물었다.
“어……. 바로 준비 가능하세요?”
그녀의 물음에 강현이 할 말은 하나였다.
“물론입니다.”
그렇게 강현의 투입이 결정되었다.
* * *
상황이 상황인지라 강현은 곧바로 게이트를 배정받았다.
B급 게이트였는데, 그의 집 근처 번화가에 위치한 게이트였기에 찾아가는 데에 지장은 없었다.
도착하니 슬슬 해가 지는 중이었다.
“다 피난이라도 간 건가.”
평소 상당한 유동인구가 다니고 있을 시간임에도 근방에 관계자들을 제외한 다른 인기척은 찾아볼 수 없었다.
장비를 갖춰 게이트 앞으로 다가간 강현은 관리국을 떠나기 전 백아영이 했던 말을 되새겼다.
“강현 씨는 A급 헌터이다 보니 솔로 팀을 맡길 거예요. 인력이 부족해서 혼자 게이트를 클리어할 수 있는 헌터들은 모조리 솔로로 들여보내는 중이거든요. 그래도 출구에 요원들을 두긴 할 거라서, 자잘한 뒤처리를 하실 필요는 없어요.”
즉, 여기서부터 혼자라는 말이었다.
‘오히려 좋네.’
주변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강현의 마음을 편하게 만들었다.
스윽-
그는 아공간에서 수수께끼의 검을 꺼냈다.
흡수를 마쳤는지 시꺼먼 기운은 어느새 갈무리된 상태였다.
“흡수는 다 끝난 겁니까?”
엔딜 펠란에게 말을 걸자, 금세 답이 돌아왔다.
-그래, 이걸로 일주일 이상은 걱정 없다.
“잘됐네요.”
강현은 그에게 백아영이 해주었던 설명을 그대로 해주었다.
“……그렇게 됐답니다. 이제 흑옥도 섭취했겠다, ‘침략’에 대해서 마저 설명해 주시죠.”
-좋다.
흔쾌히 말한 엔딜 펠란이 설명을 시작했다.
-쉽게 말해서, 지금 네놈의 차원은 타 차원과 일종의 전쟁을 하고 있는 거라고 볼 수 있다.
“……전쟁 말입니까?”
-그래, 전쟁. 네놈 차원의 단어들을 사용해 보자면…… 그래, 아무 조짐도 없이 게이트가 이토록 많이 생길 리가 없지 않나? 상대 차원에서 다량의 게이트를 풀어 공격하는 거다. 역전 현상을 일으켜 자신들의 종족을 이 차원에 어떻게든 들여보내려는 게 목적이고.
폭탄과도 같은 엔딜 펠란의 발언에 강현이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이 게이트 주의보가 지구를 공격하려는 다른 차원의 공격이라니.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난 겁니까?”
-간단하게 말하면, 네놈이 본선에 진출했기 때문이다. <초월자>는 차원의 문을 여닫을 수 있는 존재. 네놈이 <초월>을 하기 전, 일종의 예행연습 차원에서 더 비욘드 측이 임시로 지구의 차원문을 연 거겠지.
“예행연습……? 그걸 왜 멋대로 연답니까? 허락을 구한 것도 아니고?”
그러자 엔딜 펠란이 코웃음을 쳤다.
-다른 차원으로부터의 ‘침략’을 아예 모르는 상태로 <초월>을 했다간 다른 <초월자>들의 먹잇감이 될 뿐이다. 그것보다는 낫지 않나? 이 같은 차원간의 전쟁은 미리 겪어서 나쁠 게 없다. 네놈이 <초월>에 관심이 없다면 몰라도.
“…….”
-대신 네놈의 차원에 비해 훨씬 격이 낮은 차원을 잡아준 듯하니 물리치는 데에 무리는 없을 거다. 더 이상은 말로 알려줘 봐야 의미가 없으니 직접 겪어보도록.
그렇게까지 말하는데 달리 할 말이 있을 턱이 없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그가 <초월>을 목표로 하고 있는 건 명확한 사실이었으니까.
‘일단 클리어하고 봐야겠네.’
생각이 복잡해졌지만, 강현은 일단 눈앞의 게이트를 클리어하기로 했다…… 가.
“아.”
-또 뭐냐.
“설마 생겨나는 게이트들을 몽땅 클리어해야 되는 겁니까? 백아영한테 듣기로는 계속 생긴다던데.”
-에테르를 잔뜩 품고 지구와 자신들의 차원의 연결부 역할을 하는 대장 격이 있을 거다. 그놈이 있는 게이트를 정리하면 된다.
“그나마 다행이군요.”
강현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안으로 진입했다.
스윽-
‘아까 곤충계 괴수들이 나왔다고 했지.’
조금 전 백아영은 역전 현상으로 튀어나오는 괴수들은 모두 곤충계라고 했었다.
그렇다면 이 게이트에도 곤충계 괴수가 있을 확률이 매우 높았다.
‘동남아 같은 곳이 나오려나.’
곤충이 살기 적합한 기후를 예상하며 게이트에 들어간 강현의 입에서 의문사가 나왔다.
“음?”
그가 여태껏 봐왔던 게이트와는 구조가 달랐다.
끝에서 끝까지 100m도 돼 보이지 않는 공간이었을뿐더러, 풍경도 괴상하기 그지없었다.
온 세상이 잿빛을 띠고 있는 가운데 나무와 풀들이 있긴 했으나, 하나도 빠짐없이 말라비틀어져 있었다.
모든 나무와 풀들이 말라비틀어진 숲에 잿빛 물감을 뿌린 느낌이랄까.
기형이고 기괴한 구조의 게이트를 보자 이 상황이 ‘침략’이라는 게 더욱 실감 났다.
‘뭐 이래?’
조금 더 걸어간 강현은 볼 수 있었다.
게이트의 끝에서, 머리를 푹 숙인 채 우두커니 서 있는 흉측하고 거대한 사마귀를.
키는 그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커 보였고, 갈색을 띠고 있는 몸은 근육으로 부풀어 있어 위협적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쿠오오-
언뜻 봤음에도 상당한 ‘격’이 느껴졌다.
‘5단계는 넘어 보이는데.’
강현은 사마귀가 만만치 않은 상대라는 걸 직감했다.
엔딜 펠란도 그걸 느낀 듯했다.
-B등급 게이트라 했나? 과연, 본격적으로 ‘침략’이 시작되면 투입될 정예 병력인 것 같군.
그 순간이었다.
파파파파파팟-
사마귀 인간도 강현을 인식했는지 고개를 번쩍 들더니, 더듬이를 미친 듯이 움직여 댄다.
무의식적으로 눈살을 찌푸릴 만큼 징그러운 광경이었다.
“……아깝네요. 처음부터 그 대장 놈이었으면 좋았을 것을.”
다시 저런 징그러운 광경을 볼 필요도 없이 한 번에 끝낼 수 있었을 텐데, 하고 강현이 입맛을 다셨을 때였다.
-아니, 오히려 잘됐다. 마침 수준도 적당해 보이는군.
엔딜 펠란이 뜬금없는 말을 해오는 게 아닌가.
잠시 고개를 갸웃한 강현이었지만, 이어지는 엔딜 펠란의 말에 눈을 크게 떴다.
-알려주마. 인간이 아닌 다른 종족과 어떻게 싸워야 하는지를.
“……!”
인간이 아닌 종족과의 싸움법.
한때 마계를 지배하며 수십만의 악마를 거느렸던 대악마는, 선언하듯 그것을 입에 올렸다.
“인간이 아닌 다른 종족과 싸우는 방법? 그런 게 따로 있는 겁니까?”
스멀거리며 다가오는 사마귀를 주시하며 강현이 물었다.
-물론이지. 딱히 거창한 건 아니다만, 짚고 넘어가지 않는다면 언젠가 된통 한번 당할 거다. 그 대가는 네놈의 죽음이겠고.
“그러면…… 알아야겠네요. 어떻게 하면 됩니까?”
-간단하다. 네놈은 지금까지의 미션에서 다른 애송이들과 싸울 때 어떻게 했지?
“그거야…….”
강현은 예선을 치르며 무림인, 마법사, 선인 등과 싸웠던 걸 떠올렸다.
“무기를 확인하고 주공격 패턴이 뭔지를 파악했었죠.”
-그래, 무기를 파악함으로써 사거리를 가늠했지. 여태까지는 그 정도면 됐지만, 앞으로는 그보다 먼저 [종족 특성]을 파악해야 한다. 한마디로, 탐색전을 훨씬 조심스럽게 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종족 특성]을 말입니까? 그런 건 그냥 싸우다 보면 아는 거 아닙니까?”
-흥, 물론 네놈이 압도적인 무력과 ‘격’을 가지고만 있다면 다른 인간들과 싸우듯이 싸워도 되겠다만, 네놈은 아직 햇병아리나 다름없다. 잔말 말고 이 몸이 시키는 대로 해라.
“…….”
그의 말을 들은 강현은 검을 고쳐잡았다.
‘하긴.’
엔딜 펠란은 <초월자>까지 올라갔었던 대악마이자 강현의 <초월>까지 도움을 주기로 계약한 관계다.
그에게 손해가 되는 말은 하지 않을 터였다.
푸르르-
사마귀가 등 뒤의 날개를 떨어대며 다가온다.
-마침 다가오는군. 조심스럽게 접근해 보도록. 아주 천천히, 놈과의 간격을 재는 거다.
[스킬, 광검[Lv.8]을 발동합니다.]
광검을 발동한 강현도 조금씩 사마귀에게 다가가기 시작했다.
[스킬, 여명의 눈[Lv.4]을 발동합니다.]
지이잉-
본격적으로 사마귀를 눈에 담자 여명의 눈이 발동하면서, 놈의 머리 전체와 그나마 살이 연해 보이는 복부가 반짝였다.
강현은 머리에서 상념을 지웠다.
이제는 눈앞의 사마귀에 집중해야 했다.
츠츠츠츳-
강현이 자신에게 집중한다는 걸 느껴서인지는 몰라도, 사마귀가 더듬이를 강현 쪽으로 기울였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거리를 좁히고 싶었지만, 그는 일단 엔딜 펠란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스킬, 참격[Lv.3]을 발동합니다.]
그가 검을 휘두르자 사마귀의 약점들을 겨냥한 세 개의 백광이 쏘아진다.
웬만한 괴수들에게는 항상 유효타를 먹였던 참격이었으나.
텅- 터텅-
사마귀의 갑옷 같은 피부를 뚫지 못하고 튕겨 나갔다.
‘피부가 꽤 두껍군.’
강현이 그렇게 생각했을 때였다.
푸드드드득!
사마귀가 날개를 미친 듯이 떨어대며 달려들었다.
‘뭐야?’
달려오는 사마귀를 본 강현은 미간을 찌푸렸다.
강현의 반격은 생각도 안 하는지, 약점인 복부를 훤히 드러낸 채 거리를 좁혀왔기 때문이다.
강현은 섬광을 발동하려다가, 먼저 상대를 살피라는 엔딜 펠란의 경고를 떠올리고는 한 발짝 물러나기로 했다.
[스킬, 순보[Lv.3]를 발동합니다.]
슈슉-
강현이 순보를 발동해 뒤로 물러나자.
푸화아악-!
돌연 사마귀의 가슴팍이 열리더니, 끔찍한 악취를 풍기는 갈색 액체가 쏘아졌다.
“윽!”
방금까지 자신이 있던 자리에 쏟아지는 갈색 액체를 본 강현의 안색이 급변했다.
치이이익-!
액체가 바닥에 쏟아지자 그 즉시 바닥이 녹아내린다.
얼핏 봐도 엄청난 산성을 지니고 있는 듯했고, 그중 몇 방울은 그가 물러난 곳까지 튕겨오는 중이었다.
[스킬, 휘광[Lv.2]을 발동합니다.]
강현의 손에서 주황빛이 뿜어져 그를 둥글게 둘러싸는 보호막을 형성했다.
그런데.
치익…….
보호막에 액체가 닿자마자 녹아내리는 게 보였다.
“……!”
겨우 몇 방울이었기에 휘광을 뚫지는 못했지만, 가공할 위력임은 틀림없었다.
그걸 본 강현은 모공이 송연해지는 걸 느꼈다.
‘만약 냅다 ‘약점’을 찌르러 들어갔으면…….’
사마귀가 뿜은 갈색 액체를 한가득 뒤집어썼을 터였다.
치이이익-
강현이 물러나는 걸 본 사마귀가 득달같이 달려들며 액체를 발사한다.
입꼬리가 기이하게 휘어 있는 걸로 봐서는, ‘너, 대응할 방법 없지?’라고 여기는 것 같았다.
하나.
‘덩치가 커도 사마귀는 사마귀네.’
덩치가 커졌어도 지능은 그대로인지, 모르는 모양이었다.
이미 사마귀가 가진 비장의 무기를 파악한 이상 강현에게는 거리 재기를 할 이유가 없어졌다는 걸.
[스킬, 순보[Lv.3]를 발동합니다.]
강현은 순보를 발동하여 사마귀의 뒤로 돌아간 뒤, 곧장 황금빛으로 반짝이는 사마귀의 뒤통수에 검을 내찔렀다.
[스킬, 섬광[Lv.6]을 발동합니다.]
푸욱-
키에에에에엑!
‘약점’에 제대로 검이 틀어박힌 사마귀가 몸을 쉴 새 없이 비틀어댄다.
놈이 뒤를 돌아 액체를 쏘려 한다는 걸 간파한 강현은 검을 붙잡고 끝까지 놓아주지 않았다.
그러기를 잠시.
쿠우웅-
부르르 경련하며 사마귀가 쓰러진다.
푹.
한 번 더 검을 내려찍어 확인사살까지 마친 그는 그 끔찍한 외양에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취할 수 있는 에테르가 감지되었습니다. 취하시겠습니까?]
[현재 취한 에테르의 양(72/500)]
오랜만에 에테르 메시지가 나타난다.
강현은 손을 내밀었다.
스아아-
[현재 취한 에테르의 양(172/500)]
‘100이면…… 상당한데.’
거의 레이센 란이 주었던 에테르와 비슷한 양이었다.
강현이 흡수되는 에테르를 느끼며 검을 갈무리하는데, 엔딜 펠란이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보았느냐? 네놈이 평소대로 들어갔으면 어떻게 됐을 거라 생각하지?
“……코앞에서 액체를 뒤집어쓰고 녹아버렸겠죠.”
-그래, 보다시피 겉으로 보기에는 더없이 하찮아 보여도 전혀 뜬금없는 한 수가 숨겨져 있을 수도 있다는 걸 유념하도록.
강현은 사마귀를 가리키며 물었다.
“갈색 액체를 발사하는 게 저 사마귀의 [종족 특성]이었던 겁니까?”
-확실하진 않다만…… 아마 그렇겠지.
대답을 들은 강현이 얼굴을 구겼다.
‘[종족 특성]이 뭐 저래?’
고작 배를 열어 액체를 쏟는 [종족 특성]이라니.
더 비욘드 인간종 예선에서 최하위권이었던 류트의 [종족 특성]도 저러지는 않았다.
-말했잖느냐, 지구보다 하등한 차원이라고.
그런 그에게 엔딜 펠란이 보충 설명을 해주었다.
-차원의 ‘격’이 높아질수록 해당 종족의 특성 또한 그 격이 높아진다. 반대로 하등한 종족일수록 단순해지지.
“…….”
-가령 이 몸이 이끌었던 악마들을 예로 들자면, 같은 악마여도 세부적으로 들어가면 수백 개의 종으로 나뉜다. 그중 ‘격’이 낮은 악마 종은 신체에 관련된 [종족 특성]을 가진 경우가 많지. 그러나 일정 이상의 ‘격’을 갖춘 악마 종은 다르다. 그딴 것보다는 에테르를 다루는 [종족 특성]이 발달해 있다.
그러니까, 같은 류의 종족일지라도 그 ‘격’에 따라 [종족 특성]이 달라진다는 말이었다.
“그럼, 저 사마귀는 종족 자체의 ‘격’이 낮아서 [종족 특성]도 저따위라는 거군요.”
-그렇다고 할 수 있지. 대신 그게 저 종족이 아예 에테르를 다루지 못한다는 말은 아니다. 필시 저 차원에서도 어느 정도 ‘격’을 쌓은 놈들은 에테르를 다룰 수 있겠지.
거기까지 듣자 ‘종족’에 대한 대강의 이해가 되는 기분이었다.
“그러면…… 아니다.”
강현은 하려던 질문을 삼켰다.
몇 가지 더 궁금한 게 있었으나, 그러기에는 시간이 넉넉하지 않았다.
아직도 바깥은 재난사태고, 클리어해야 하는 게이트는 쌓여 있다.
질문은 나중에 해도 충분했다.
‘슬슬 마무리를 지어야겠군.’
사마귀도 해치웠겠다, 이 게이트의 핵을 지킬 괴수는 더 이상 없었다.
강현은 저 멀리, 게이트 끝부분에 위치한 핵을 향해 다가갔다.
‘모양은 똑같네.’
주먹만 한 구슬을 보는 듯한 외양은 다른 게이트의 핵과 똑같았다.
쿠오오-
지금까지 봤던 게이트들의 핵과는 다른 점이 있다면, 새카맣고 요사스러운 기운이 뿜어진다는 점이었다.
푹!
검을 내리꽂아 핵을 꿰뚫은 강현은 백아영에게 전화를 걸었다.
게이트를 클리어했음을 보고하고, 다음 게이트를 배정받기 위해서였다.
달칵.
“이강현입니다. 게이트를 클리어했는데-”
그런데 그때였다.
-전멸을 당했다고요?! B등급 헌터팀이?
수화기 너머에서 다급한 외침이 들려온다.
자신이 아닌, 다른 이와 통화를 하는 소리였다.
-겨우 한 마리한테 당한 것도 모자라서 역전 현상으로 탈출까지 했다니……. 상황을 다시 한번 말해보세요.
‘한 마리? 역전 현상?’
그 말을 들은 강현이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연결 고리 역할의 놈인 것 같군.
강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적 차원의 대장 격인 개체를 발견한 듯했다.
* * *
-그, 그게…….
간신히 살아남았다는 헌터가 떠듬떠듬 말해왔다.
-노, 놈은 우리를 기다렸다는 것처럼 기습해 왔습니다……. 외양은 개미처럼 보였고, 사람처럼 이족보행을 했습니다……. 또 도저히 눈으로 따라잡을 수 없을 만큼 빠르고 단단했습니다. 놈에게 접근하려던 종수가 즉사 당한 걸 시작으로 하나씩…… 크흑……!
백아영은 수화기를 내려놓고 싶은 심정이었다.
‘한 마리한테 다 당해버리다니…….’
그 안에 들어간 게 베테랑급 B급 헌터 5명이라는 걸 생각하면 믿기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헌터의 떨리는 목소리는 그 일이 사실이라는 걸 알려왔다.
그렇다면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지금 어디쯤 있을지 짚어줄 수 있겠어요?”
-아, 아직은 최초 위치에서 그리 못 벗어났을 겁니다…….
헌터가 짚어준 대략적인 위치를 받아적은 백아영은 통화를 종료했다.
‘보통 일이 아니야.’
단신으로 B급 헌터팀을 전멸시킬 만큼의 강함을 가진 괴수가 밖으로 나와버렸다.
모든 인력을 동원하는 일이 있더라도 최우선적으로 처치해야 했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이었다.
“……아.”
그녀는 뒤늦게 이강현과 통화가 연결되었다는 걸 알아차렸다.
“……강현 씨?”
그녀가 입을 열자, 이내 이강현이 대답해 왔다.
-아, 들립니까? 게이트는 클리어했습니다.
“고생하셨어요. 잠깐 쉬셔도-”
그녀가 ‘잠깐 쉬셔도 될 것 같아요’라는 말을 하려던 때였다.
-방금 괴수 하나가 바깥에 나왔다는 말을 들었는데, 위치를 알 수 있겠습니까?
“네?”
되묻는 백아영에게, 강현이 단호하게 말했다.
-그 괴수를 처리할 인원에, 저도 편성되고 싶습니다.
* * *
강현의 말을 들은 백아영은 처음에는 머뭇거렸지만, 곧 허락했다.
대신, B급 헌터들이 전멸했다는 보고를 들어서인지 조건을 걸었다.
-단독진입하지는 말고, 다른 헌터들과 맞춰서 가주시겠어요?
“다른 헌터들 말입니까?”
-네. 아, 어차피 거리상으로 비슷한 시간대에 모일 거 같긴 하네요. 알려드린 위치로 20분 정도 가면 해당 괴수가 있을 거라 예상되는 지점이에요. 다른 헌터들도 비슷하게 도착할 테니, 같이 진입하시면 돼요.
“아…… 예.”
말은 그렇게 했지만, 강현은 다른 헌터들과 함께 할 마음은 없었다.
‘20분 내로 끝내야겠군.’
이야기를 들어보니 상당한 ‘격’을 가진 놈일 거라 추측이 됐는데, 그런 놈을 ‘격’이 동반되지 않은 헌터들이 상대한다면 더 큰 피해가 초래될 수 있었다.
그럴 바에는 다른 헌터들이 오기 전에 처리하는 게 나았다.
[스킬, 천광의 날개[Lv.1]를 발동합니다.]
펄럭-
순백의 날개를 펼쳐 비상한 강현은 쏜살같이 쇄도했다.
노을이 지는 가운데 드문드문 폐허가 된 건물과 시가지가 눈에 들어왔다.
그걸 보며 강현은 속도를 더욱 높였다.
‘놈만 처리하면 다 끝나는 겁니까?’
-아마 놈을 처리하면, 차원을 잇기 위해 응축해 놓았던 에테르가 흩어질 거다. 그리되면 이 게이트 주의보도 차츰 사라지겠지.
‘그거면 됐습니다.’
슈우우-
전력을 다해서인지 약 5분 뒤, 강현은 백아영이 알려준 지역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그때였다.
쿠콰콰콰-
“……!”
위협적인 기파가 느껴졌고, 강현은 즉시 기파가 느껴지는 곳으로 향했다.
터벅-
그리고 강현이 얼마 전까지 번화가였을, 이제는 박살이 난 거리에 들어선 순간이었다.
쐐애액-
무언가 어마어마한 속도로 짓쳐 들어오는 걸 감지한 강현은 즉각 검을 휘둘렀다.
[스킬, 광검[Lv.8]을 발동합니다.]
콰아-앙!
귀가 찢어질 듯한 굉음이 터져 나왔다.
기습을 막고 순보로 물러난 강현은 적을 확인했다.
개미처럼 생긴 괴수가, 광검과 충돌한 손목을 빙글 돌리는 중이었다.
‘저놈이군.’
개미의 외양을 한, 매우 빠른 괴수.
백아영에게 들은 것과 일치했다.
쿠콰콰콰-
개미에게서 뿜어지는 ‘격’에 강현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
‘이 정도면 나보다 한 단계 낮거나, 거의 동급인데.’
적 차원의 대장 격인 놈이라더니, 역시 보통이 아니었다.
“…….”
검을 치켜든 강현은 놈을 가만히 응시했고, 개미도 그를 뚫어지라 쳐다보았다.
그러다 어느 순간.
팟-
두 인영이 사라졌다.
쾅! 콰쾅!
강현은 순보와 천광의 날개로, 개미는 타고난 속도로 이동하며 격돌했다.
콰콰쾅! 쾅!
놈과 맞붙는 강현은 볼 수 있었다.
싸움이 지속됨에 따라 갈색이던 개미의 피부색이 짙은 고동색으로 바뀌는 것을.
피부색이 진해지자, 놈의 손과 부딪친 검에서 엄청난 반발력이 전해져왔다.
쾅!
뒤로 물러난 강현이 얼굴을 찌푸리며 손을 털었다.
‘오러도 안 쓰는 게 더럽게 단단하네.’
남궁강룡의 검강에 부딪친 것처럼 손아귀가 찢어질 듯 아파왔다.
키득-
놈을 보자 입꼬리가 비스듬하게 올라가 있는 것이, 누가 봐도 비웃는 모양새였다.
놈을 응시하면서, 강현이 천천히 말을 꺼냈다.
‘저놈의 [종족 특성]은 몸을 단단하게 하는 거겠죠?’
-당연한 말을……. 뻔한 걸 왜 물어보는 거지?
엔딜 펠란의 힐난에도 강현은 히죽 웃어 보였다.
그도 그럴 게.
‘그냥 확인만 한번 해본 겁니다.’
저놈의 피부를 보자 괜찮은 생각이 떠올랐으니까.
“한번 와봐라, 이 개미 새끼야.”
개미에게 손가락을 까닥이며, 강현은 나직이 읊조렸다.
“……모방의 가호, 발동.”
[모방의 가호를 발동합니다.]
[모방하고자 하는 [종족 특성]을 떠올려 주십시오.]
강현은 그가 원하는 [종족 특성]을 떠올렸다.
그때였다.
파팟-
개미가 순식간에 거리를 좁히며 주먹을 휘둘러 왔다.
쐐애애액-
만약 ‘격’이 모자란다면 제대로 보이지도 않을 만큼 빠른 주먹이었지만.
‘격’이 6단계에 이른 강현은 그 주먹질을 눈으로 따라갈 수 있었다.
[스킬, 질주[Lv.2]를 발동합니다.]
[스킬, 섬광[Lv.6]을 발동합니다.]
개미의 주먹에 맞서 강현은 질주와 섬광으로 맞서나갔다.
콰쾅! 쾅!
짙은 고동색의 주먹과 백광이 연이어 충돌한다.
그 형세는 조금 전과는 확연히 달랐다.
개미와 합을 나누면서도 통증에 손을 털던 방금 전과는 다르게, 지금의 강현에게는 전혀 그런 기색이 없었던 것이다.
퓻-
도리어 강현의 검격에 개미의 피부가 상하기 시작하자, 흠칫 놀란 개미가 다급히 뒤로 빠지려고 했다.
하지만 개미가 물러나는 걸 가만히 두고 볼 강현이 아니었다.
[스킬, 광야참[Lv.1]을 발동합니다.]
[1/5의 마력을 소모합니다.]
콰아아-
강현의 검에서 방출된 거대한 검기가 물러나려는 개미를 그대로 덮쳤다.
콰콰쾅!
검기에 적중당한 개미가 뒤편의 폐건물들을 박살 내며 처박혔다.
피어오른 자욱한 먼지를 보며 강현이 몸 구석구석을 훑어보았다.
“이거 괜찮네.”
그와 싸우던 개미가 놀란 건, 어찌 보면 당연하다고 할 수 있었다.
강현의 피부색은 지금, 개미의 그것과 똑같은 고동색이었으니까.
[해당 [종족 특성]의 80%를 모방합니다.]
비록 100%를 모방할 수는 없는 듯했어도, 80%로도 개미를 상대하기에는 무리가 없었다.
80%로도 충분했는지, 개미에게서 전해져 오던 반발력이 거의 느껴지지 않았던 것이다.
다만.
‘마력은 꽤 드는군.’
아무리 천광의 날개를 꺼내 들었다고는 해도 전투가 벌어진 지 몇 분 되지도 않았다.
한데 모방의 가호를 발동하자마자 벌써 마력의 2할이 넘게 소진되었다.
‘빨리 끝내야겠어.’
쾅!
땅을 발판 삼아 날아오른 강현은 먼지를 가르며 개미가 처박혔던 곳으로 쇄도했다.
천광의 날개에 먼지가 걷힌다.
말끔해진 시야에 허우적대며 일어나는 개미가 눈에 들어왔다.
“……!”
강현을 본 개미가 대경실색하며 벌떡 일어났지만, 강현은 이미 들이닥친 뒤였다.
개미가 자세를 제대로 잡기도 전 강현의 검이 길게 그어졌다.
서걱.
키아아-!
그에 따라 가슴을 깊게 베이며 녹색 진물을 한가득 흘린 개미였지만, 이내 이를 악물고 반격해 왔다.
쉬이익-
개미가 복서처럼 발을 현란하게 움직이며 강현의 어깨, 복부, 목, 미간을 노리고 연신 주먹을 내지른다.
방금 상대했던 것보다 훨씬 빠른, 전력을 다했으리라 생각되는 속도였다.
그리고 개미의 노림수는 통하는 듯했다.
어깨를 노리는 왼쪽 주먹을 막아낸 강현의 검이 채 거두어지기도 전, 개미의 오른쪽 주먹이 강현의 복부에 도달한 것이다.
지이잉-
강현이 재빨리 발동한 휘광까지 무참히 깨버리면서, 그렇게 개미의 주먹은 강현의 복부에 꽂히는 걸로 보였다.
그러나 복부에 주먹이 닿기 직전, 강현은 개미의 복부를 다시 한번 베면서 순보를 발동하여 뒤로 빠졌다.
부우웅!
개미의 주먹이 허망하게 허공에 꽂혔고, 강현은 개미에게 입꼬리를 비스듬히 올려 보였다.
도발의 의미가 가득 담긴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파르르르…….
그걸 본 개미는 더듬이를 부들부들 떨면서 강현에게 달려들었다.
강현 또한 물러서지 않고 마주 검을 맞댔다.
하지만 더듬이를 떨어대며 달려든 게 무색하게도.
쾅! 콰쾅!
이후에도 비슷한 양상이 전개될 뿐이었다.
퓻-
강현은 위기의 순간마다 순보로 빠져나가면서도 날카로운 반격을 잊지 않았고, 그 탓에 개미의 상처만 늘어갔다.
분명 개미의 속도가 매섭기는 했다.
하나.
‘어설퍼.’
더 비욘드에서 상대했던 남궁강룡과 이현 등, 진짜 무림인들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그에게는 여명의 눈이 있었다.
개미가 얼마나 빠르든, 얼마나 단단하든 간에 여명의 눈은 유효했다.
반짝-
현란하게 움직이는 개미에게서 보이는 허점과 공세의 맥을 정확히 짚어준 것이다.
따라서 개미의 공세가 탄력을 받으려 할 때마다 공세는커녕 도리어 역공만 맞는 일이 반복되었다.
물론 강현도 만만치 않게 마력을 소모하고 있었으나, 개미가 그것을 알 턱이 없었다.
서걱-
또 한 번 복부를 베인 개미에게서 다시 진물이 새어 나왔다.
“드르르르르……!”
파파팟-
이번에는 상당한 타격을 입었는지 끔찍한 소리를 낸 개미가 다급히 뒤로 물러난다.
강현이 곧장 쫓으려는데.
쿠콰콰콰-
돌연 강현이 밀려날 만큼의 기세가 개미에게서 뿜어졌다.
“큭!”
강현은 날아가 버릴 뻔한 몸의 중심을 다잡으면서도 개미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고, 놈이 왜 기세를 방출했는지를 알게 되었다.
“…….”
쿠오오…….
강현이 주춤한 사이, 어느새 개미의 몸이 번데기에 덮여 있었던 것이다.
누가 봐도 변신을 하려는 모양새였다.
“허, 참.”
그걸 본 강현은 어이가 없다는 듯 웃으며 스킬을 발동했다.
[스킬, 섬멸의 광창[Lv.1]을 발동합니다.]
[1/2의 마력을 소모합니다.]
키이잉-
순백의 입자가 빠르게 모이며 거대한 창을 형성한다.
마력이 여유롭진 않았지만, 저 개미에게 줄 선물이라 생각하며 아낌없이 꾹꾹 눌러 담았다.
“변신을 할 거면, 진즉 하고 왔어야지.”
순백의 창이 터질 듯 부풀어 오르자, 강현은 지체 없이 창을 번데기에 내던졌다.
푹-
날아간 창은 시원하게 번데기를 꿰뚫으면서.
콰콰콰콰쾅!
엄청난 폭발을 일으켰다.
개미, 아니, 개미‘였던’ 살점들이 폭죽처럼 후두둑 터져 나가는 걸 보며 강현이 중얼거렸다.
“……X신도 아니고.”
* * *
그렇게 전투를 마친 강현이 검을 털어내던 때였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민첩이 1 상승합니다.]
[체력이 1 상승합니다.]
[스킬, 광검[Lv.9]을 습득합니다.]
[스킬, 섬광[Lv.7]을 습득합니다.]
오랜만에 레벨이 올랐음을 알리는 메시지가 나타났다.
이걸로 레벨은 43.
시간이 모자라서 다 쓰지 못했던 하급, 중하급 수련의 방을 사용한다면 레벨 50은 찍을 수 있을 듯했다.
-푸하하하! 방금 그 말, 이 몸의 마음에 쏙 들었다!
엔딜 펠란의 광소가 들려온다.
뭐가 그리 웃긴지, 배꼽이 빠진 것처럼 웃어댄다.
강현은 엔딜 펠란의 웃음이 멎기를 기다렸다가 물었다.
“대장 격인 놈을 해치웠는데, 이제 된 겁니까?”
-정면을 봐라.
엔딜 펠란의 말에 앞을 보자, 개미가 있던 자리에 생겨난 거대한 적흑색 구체로부터 에테르가 새어 나오는 중이었다.
게이트들의 핵과 비슷한 느낌이었으나, 그보다 훨씬 크기가 컸다.
구체에서부터 새어 나오는 상당한 양의 에테르에 강현은 눈살을 찌푸렸다.
“가만히 둬도 되는 겁니까? 위험한 건 아니죠?”
-잠깐 놔두면 알아서 진정될 거다. 한…… 5분 정도 걸리겠군.
“5분이라…….”
강현은 대략적인 시간을 계산해 보았다.
여기까지 오는 데에 5분이 걸렸고, 그와 개미가 겨룬 건 10분 정도.
백아영은 20분에 맞추어 함께 투입할 거라 말했으니, 5분이면 다른 헌터들이 오기 직전 딱 해결이 될 거로 보였다.
쿠오오오-
잠시 기다리자, 과연 엔딜 펠란이 말했던 것처럼 새어 나오는 에테르의 양이 점점 많아지기 시작했다.
“저 현상이 정확히 왜 일어나는 겁니까?”
-저 적흑색 구체는 적 차원에서 다리를 놓고자 투자했던 에테르다. 적 차원에서 지구를 침략하기 위해 투자한 일종의 기회비용이라 볼 수 있지. 침략에 실패했으니, 응당 지구에 귀속될 것이다.
“저 에테르가 몽땅요?”
-그래, 지금은 불순한 에테르가 먼저 빠져나가고 있으니, 기다리면 정순한 에테르만 남을 거다.
“……와우.”
강현의 입에서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저 적흑색 구체가 모두 에테르로 이루어져 있다면, 그야말로 엄청난 양일 터였다.
저 정도 기회비용까지 투자하면서 침략하려 했다는 걸 알게 되자, 만약 저들의 공세를 막아내지 못했더라면 어떻게 됐을지 궁금해졌다.
“만약 우리가 졌다면 어떻게 됐던 겁니까?”
-그건 승리한 차원의 종족에 따라 다르다만……. 이번 상대가 벌레들인 걸 감안하면 지구의 모든 에테르는 수탈당하고, 인간들은 잡아먹혔을 것 같군.
“…….”
요컨대, 벌레들이 지구의 주인이 된다는 말이었다.
벌레 천국이 된 지구를 상상한 강현은 몸을 떨었다.
“원래 이렇게 차원끼리의 싸움이 많습니까?”
-그럴 리가. 만만해 보이는 차원만 수탈하는 거라 보면 된다. 그러므로 <초월>을 한다고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행동하면 곤란해지겠지. 분명 해당 차원의 지배자나 다름없게 되지만, 얻게 되는 힘만큼이나 신경 써야 할 것도 늘어나니 말이다.
“지배자 말입니까?”
강현은 예상외의 말에 되물었다.
“그러면 만약 더 비욘드에서 우승한다면…….”
-아마 이 지구의 지배자로서 이곳을 지배하게 되겠지. 오늘의 침략도 그걸 위한 예행연습이라 하지 않았느냐.
“……!”
강현은 눈을 부릅떴다.
<초월>을 하고 싶어 하기만 했지, 막상 <초월자>가 되어 지구를 다스린다고 생각하니 실감이 안 났던 것이다.
‘차원의 지배자라…….’
다만 엔딜 펠란이 말해준 걸 종합해 보면, <초월자>는 지배자라는 말이 딱 어울리기는 했다.
다른 차원과의 문을 여닫는 것도 해당 차원의 <초월자>인 듯했으니까.
즉 밖으로는 다른 차원과의 문을 여닫고, 안으로는 자신의 차원을 지배하는 지배자.
그게 바로 <초월자>였다.
하지만.
‘아직 아니야.’
그건 아직 먼 미래의 일이었기에, 강현은 그 같은 상념을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본격적으로 이런 생각을 하는 건 우승권에 진입한 뒤에 해도 충분했다.
그 대신 그는 수수께끼의 검을 내려다보았다.
그걸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엔딜 펠란 또한 한때 <초월자>로서 마계를 이끌었다는 걸 다시 한번 깨닫게 된 것이다.
그래서일까.
강현은 평소에 묻지 않던 걸 물었다.
“제가 <초월>을 해서, 그 검의 봉인을 풀어줄 수 있게 된다면 나갈 겁니까?”
-당연한 소리를 하는군. 설령 형태도 없이 유령처럼 떠돈다고 해도 이딴 검에 처박혀 있는 것보다는 나을 거다.
“그럼, 나가게 되면 뭘 할 생각입니까?”
-……그런 건 왜 묻는 거지?
“그냥요.”
-…….
강현의 말에 엔딜 펠란은 잠시 침묵하더니.
-다시 세울 거다. 이 몸의 왕국을.
나직이 말해왔다.
“왕국이라……. 그러려면 제가 더 강해져야겠네요.”
-잘 아는군. 한참 멀었으니 자만하지나 말도록 해라.
그렇게 엔딜 펠란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는데.
[???까지 남은 시간 : 24시간 00분]
뜬금없이 메시지가 떠올랐다.
“음?”
메시지의 형식으로 보아 더 비욘드측에서 보낸 거 같긴 한데, ‘???’가 무얼 의미하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강현이 메시지를 더 자세히 살피려던 순간이었다.
푸콰콰콰콰!
구체로부터 폭발음이 터져 나오더니, 구체가 쪼개지며 그 조각들이 사방으로 내쏘아지기 시작했다.
내쏘아진 구체들은 적흑색 유성우가 되어 동서남북으로 흩어져 갔다.
“저게 다 에테르라고요?”
-그래, 아마도 마석의 형태일 거다.
“……그나마 다행이네.”
가뜩이나 수도권에만 게이트 주의보가 생겨나 피해를 받았는데, 저렇게 많은 마석이라면 그 피해를 메울 수 있을 듯했다.
슈우우…….
구체가 거의 다 쪼개져 흩어졌을 때였다.
“---!”
강현의 기감에 수십 명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개미를 상대하기 위해 모인 헌터들이 도착한 것 같았다.
주변이 삽시간에 소란스러워졌지만, 강현은 그들을 마중 나가기보다는 구체가 있던 곳으로 다가갔다.
헌터들이 오기 전, 챙겨놓아야 할 게 있었으니까.
스아아…….
불순물이 섞인 에테르들을 모두 걸러낸, 차원과 차원을 잇던 구체의 가장 정순한 에테르 결정체가 그곳에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에테르 결정체의 누구일지는 명확했다.
[취할 수 있는 에테르가 감지되었습니다. 취하시겠습니까?]
[현재 취한 에테르의 양(172/500)]
강현이 가만히 손을 내밀자 에테르가 흡수되며.
[현재 취한 에테르의 양(572/500)]
단숨에 ‘단계’를 뛰어넘었음을 알리는 메시지가 나타났다.
‘역시.’
에테르의 양을 본 강현의 입가에 미소가 깃들었다.
두 차원을 이을 정도면 보통 양이 아닐 거라 예상했는데, 과연 말도 안 되는 양의 에테르가 흘러들어 오고 있었다.
그때였다.
[제3 군소차원의 지배자에 한 걸음 가까워집니다.]
[[email protected]의 지배자에 한 걸음 가까워집니다.]
“어?”
연이어 떠오르는 메시지들에 강현은 가만히 눈을 깜빡였다.
그런데, 메시지는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차원 정보’를 말하여 해당 차원의 정보를 불러낼 수 있습니다.]
대미를 장식하듯 나타난 메시지에, 강현은 툭 내뱉었다.
“……이건 또 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