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장 예선 : 세 번째 미션(1)
강현은 명단을 훑어보았다.
가장 먼저 보인 건 로독이 말했던 이립이었다.
‘저 지긋지긋한 놈.’
자니스만큼은 아니었어도, 이립도 그와 상당한 악연이 있었다.
그나마 상대 팀으로 넘어간 게 다행이었다.
해묵은 감정이 있는 상태로 같은 팀이 되어서 이득일 게 없었다.
-흠……. 그 음유시인 놈이 없구나. 알고 있었나?
명단을 봤는지, 엔딜 펠란이 나직이 말해왔다.
‘……아마 두 번째 미션이 끝나고 떨어졌을 겁니다.’
-호오, 신경은 쓰고 있었나.
‘동료였는데 당연하죠.’
두 번째 미션이 끝나고 워낙 바빴기 때문일까.
류트가 떠오른 건 지구에 복귀하고 나서였다.
인사도 순위도 확인하지 못한 채 그를 보낸 것에 대한 감정들이 뒤늦게 휘몰아쳤으나, 강현은 그 감정들에 붙잡히기보다는 앞으로 나아가기로 했다.
언젠가 <초월>의 경지에 도달하게 된다면 ‘거인’처럼 다른 차원, 이를테면 류트가 있을 음유시인들의 차원으로 갈 수도 있으리라.
[팀원들끼리 회동을 가지기 전, 마지막 설명 들어가겠습니다! 오늘을 마지막으로 참가자분들께 더 이상 설명할 일이 없다고 생각하니 감정이 북받쳐 오르지만, 제 할 일을 해야죠!]
로독이 울먹거리며 말을 꺼냈다.
[승리한 팀에게는 일괄적으로 상당량의 기여도를 지급하긴 할 겁니다! 하나 이기는 팀원들 전부가 올라가지 않는 거라는 건 잘 알고 계시겠죠? 순위를 산정하는 방식은 언제나 그래왔듯 투표와 기여도, 트레이너들의 평가를 합산하니까요!]
로독의 말을 들은 강현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역시.’
열네 명 중 일곱 명이 올라간다고 해도 이기는 팀 전원이 올라갈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높은 기여도를 쌓고, 퍼포먼스만 뛰어난다면 설령 패배하더라도 본선에 진출할 수 있는 것이다.
누군가는 이걸 보고 이럴 거면 의미가 없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
그러나 더 비욘드는 공정한 경연이 아니다.
철저하게 무력과 ‘격’이 높은 이들만 올라갈 수 있는 강자 존의 오디션, 그게 더 비욘드였다.
실제로 남은 참가자 명단에서도 그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강현을 제외하면 군소차원 출신은 단 하나도 없었으니까.
[엘프와 드워프, 두 종족의 균형은 정확하게 맞추어져 있으니 종족 간의 형평성은 의심하지 않으셔도 되겠습니다! 그러면 이제, 지난번에 드리지 못했던 상세 설명을 해볼까요?]
팟-
장엄한 협곡 아래, 세 갈래의 공격로와 엘프와 드워프의 진영이 떠올랐다.
이어서 나머지 지역을 덮고 있는 드넓은 산림이 보였다.
[이곳은 세 번째 미션의 제47 군소차원의 전장입니다! 공격로에 관련해서는 다들 아실 테니 생략하고, 저 산림 속 곳곳에 위치한 중립 오브젝트들에 대해 알려드리겠습니다! 먼저, 처치 시 버프를 제공할 버프 오브젝트입니다!]
팟-
거대한 구렁이와 해골 기사, 오우거, 골렘이 나타났는데, 어딘가 익숙한 모습들이었다.
[하핫, 지난 미션에서 말씀드렸던 던전의 수호자들입니다! 이번 미션에서도 버프 오브젝트로 투입하게 되었습니다! 개체별로 제공하는 버프는 가까이 접근하면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니, 참고해 주세요!]
협곡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생김새의 수호자들을 본 강현은 실소를 흘렸다.
‘이럴 줄 알았다.’
어쩐지 지난 미션에서 수호자가 쓰이지 않는 걸 아까워하는 것 같더니, 기어이 재활용을 시킬 줄이야.
돈을 아끼려는 점에서는 지구의 방송국들과 딱히 차이가 없어 보였다.
[또 기여도와 소소한 아티팩트를 제공하는 중립 오브젝트들도 군데군데 배치해 놓았답니다! 미션에 진입한 뒤 지도를 불러내시면 확인이 가능할 거예요!]
[엘프와 드워프의 [종족 특성]을 쓸 수 있다는 건 아실 테고…… 아! 여기에 더해 팀끼리는 상시 연락이 가능한 보이스가 오픈된다는 걸 마지막으로 제 설명은 끝났답니다!]
[자, 그럼 잠시 팀원들끼리 회동할 시간을 드릴 테니 의견을 조율할 시간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정확히 1시간 뒤, 마지막 미션을 시작하겠습니다!]
그 말이 끝남과 함께 사방에서 환한 빛무리가 올라왔다.
슈와아-
[참가자 이강현 확인, 팀별 대기실로 이동합니다.]
[미션 시작까지 남은 시간 : 0시간 60분]
몸이 이동한 걸 느낀 강현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온통 새하얀 공간이 펼쳐진 가운데, 그처럼 주변을 탐색하고 있는 여섯 명의 참가자들이 눈에 들어왔다.
오늘의 미션을 같이 할 그의 팀원들이었다.
* * *
둥글게 자리하게 된 참가자들이 서로를 살핀다.
“…….”
누군가 물꼬를 터야 할 것 같았다.
이런 상황은 익숙했기에 강현은 거리낌 없이 입을 열려 했다.
그런데 그때, 그보다 한발 앞서 나선 참가자가 있었다.
“각자 자기소개를 하는 시간을 가지는 게 어떻소? 본인부터 소개를 하자면, 나무 속성의 술법을 사용하는 선인이라오.”
[한림, 9위]
강현은 저 이름을 어디서 봤었는지 기억해 냈다.
두 번째 미션의 막바지에서 레이센 란과 그를 제외한 나머지 참가자들의 동맹을 이끌던 참가자였다.
당시 한림을 중심으로 나름 잘 뭉쳐 있는 걸 보고 구심점인 그를 우선적으로 탈락시켰었는데, 어찌어찌 살아남은 듯했다.
한림의 말에 하나둘 자기소개를 시작했다.
“이름은 루시타르, 검을 다루는 검계 출신이오.”
“연청입니다. 물을 다룰 줄 알고, 신계 출신입니다.”
“리라스테입니다. 정령을 다룹니다.”
참가자들이 순차적으로 한 명씩 스스로를 소개해 나갔다.
‘격’과 정확한 무력 수치는 공개하지 않았어도, 이 정도로도 그럭저럭 그들의 출신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이강현이고, 검을 씁니다.”
“란 레이센이에요. 알다시피 마법을 쓰구요.”
“……알렉시스 찬드라스, 신계.”
얼굴을 찌푸리며 말하는 알렉시스를 끝으로 자기소개가 종료되었다.
‘골고루 섞였네.’
선계와 마법계, 정령계, 신계가 적절히 섞인 조합이었다.
반면 상대 팀에는 남궁강룡과 이현, 로프터스, 세르반테를 필두로 한 검사들이 많았고.
그 점을 고려하면서 미션에 임해야 할 터였다.
생각을 대강 정리하는데, 한림이 말을 계속했다.
“지휘자(order)를 정해야 할 것 같소만. 혹시 자신이 하고 싶다면- 오, 넷이나 있군.”
오더를 지원한 참가자는 강현과 레이센 란, 루시타르와 리라스테였다.
하지만 강현과 레이센 란을 보자 가망이 없다고 여겼는지 루시타르와 리라스테는 손을 내렸다.
남은 건 레이센 란과 강현.
강현은 앞으로 한 발짝 나섰다.
비록 ‘구멍’ 안에 빨려 들어간 바람에 준비할 시간이 없긴 했어도, 그는 AOS 장르에 대한 이해도를 바탕으로 주도적으로 미션을 이끌어갈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러려면 반드시 오더를 맡아야 했다.
다행히 그는, 지금 같은 상황에 반드시 통할 마법의 말을 알고 있었다.
“비슷한 형식의 게임을 수백 번에 걸쳐 해본 경험이 있습니다.”
게임(game)이 다른 참가자들에게 뭐라고 번역이 될지는 알 수 없었으나.
스윽-
레이센 란이 손을 내린 걸 보면 제대로 전달이 된 모양이었다.
“수백 번의 경험을 가졌다니 믿고 따르는 수밖에 없겠군. 혹시 이강현 참가자가 오더하는 걸 반대하는 참가자가 있다면 손을 들어주길 바라오.”
“…….”
아무도 없자 한림이 할 말이 있으면 하라는 손짓을 했다.
강현은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시간이 한정되어 있으니 바로 말하겠습니다. 정해야 할 게 몇 가지 있습니다. 일단 각 공격로에 투입될 인원을 정하겠습니다.”
강현은 공격로마다 두 명의 참가자들을 배치했다.
상단 공격로
-알렉시스 찬드라스(4), 리라스테(14)
중단 공격로
-레이센 란(2), 루시타르(10)
하단 공격로
-한림(9), 연청(13)
참가자들의 전투 스타일과 순위를 적절히 고려한 배치였다.
“공격로에서 엘프들을 쓰러뜨리면서 성장, 그러니까 힘의 제약을 풀어가면 됩니다. 팀 보이스가 열렸다고 했으니 특이사항이 생기면 즉시 말해주시고요.”
모두 알겠다는 듯 고개를 까딱인다.
“그쪽은 어떻게 하려구요?”
레이센 란의 질문에, 강현은 씩 웃으며 답했다.
“저는 오브젝트를 처리하면서 성장할 겁니다. 그러다가 상황을 봐서 밀리는 곳이 있으면 돕고, 견제할 적이 있으면 견제할 겁니다.”
AOS 장르에서도 중립 오브젝트를 처리하는 정글 포지션이 존재한다.
이번 미션도 그가 아는 AOS 게임과 딱히 다른 점이 없었기에, 강현은 정글러 역할을 수행할 생각이었다.
“힘이 많이 제약되어 있을 텐데, 문제는 없겠소이까?”
“괜찮습니다.”
한림이 걱정했으나, 강현도 나름대로의 계획이 있었다.
지난 모의전을 통해 여명의 눈은 제약받지 않는 걸 확인했으니까.
광검과 섬광만 있다 해도 여명의 눈이 더해진다면 무리 없이 성장할 수 있을 듯했다.
게다가.
‘이번에 얻은 스킬도 쓸 만하고.’
40레벨을 찍으며 얻게 된 스킬 또한 정글러에 적합했다.
섬멸의 광창[Lv.1]
-마력을 응축하여 거대한 빛의 창을 투척합니다. 마력을 투입할수록 위력이 강해집니다.
최소 1/5, 최대 1/2의 마력을 투입할 수 있습니다. 레벨이 오를 때마다 투입 가능한 마력의 양이 증가합니다.
이거라면, 충분히 적들을 ‘저격’할 수 있을 것이기에.
그러나 그것은 아직 나중의 일.
강현은 팀원들을 보며 입을 열었다.
“그러면 공격로마다 서브 오더를 정하겠습니다.”
강현은 레이센 란과 알렉시스, 한림을 서브 오더로 지정했다.
각 공격로에서 상황이 발생할 시 결정권자를 정한 것이었다.
“다음은 유사시 콜에 대해서…….”
그 뒤로도 남은 시간이 다 될 때까지 강현은 팀원들과 몇 가지 사항 및 전술 패턴에 대한 논의를 거쳤고.
[미션 시작까지 남은 시간 : 0시간 0분]
슈와아-
세 번째 미션이자, 예선에서의 마지막 미션이 시작되었다.
* * *
[참가자 이강현 확인, 미션 장소로 이동합니다.]
[동전을 던져 진영을 선택합니다.]
딸랑-
[참가자 이강현의 이번 진영은 드워프입니다. 건투를 빕니다.]
스아아-
시야에 드워프들의 웅장한 진영이 나타난다.
마치 돔 야구장을 보는 듯한 ‘거점’에, 중세의 성채 같은 드높은 요새들까지.
아직 드워프들은 보지도 못했는데 압도되는 기분이었다.
그렇지만 그것들을 구경하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모두 짜둔 대로 행동해 주시길!”
그 말을 끝으로 강현은 진영을 벗어났다.
아직 드워프들이 나타나지도 않았는데, 한 박자 빨리 드넓게 펼쳐진 정글로 뛰어든 것이다.
[스킬, 광검[Lv.1]을 습득합니다.]
[스킬, 섬광[Lv.1]을 습득합니다.]
힘이 제약되었다는 메시지를 보며 강현은 지도를 불러냈다.
‘지도.’
협곡 전체 지도가 펼쳐졌다.
상부와 중부, 하부의 공격로와 그 사이사이의 정글.
오브젝트는 각 진영 정글에 다섯 곳씩 포진해 있었다.
강현은 각 진영의 오브젝트 수가 정확히 같다는 걸 알아차렸다.
똑같이 나눠놨으니 공평하게 먹으라는 거겠지.
지도를 살피고 있는데.
[실시간 채팅창 반응을 개방합니다.]
-ㅎㅇ
-강하!
-강현아! 괜찮니?
-구멍에 빨려 들어가던데 ㄱㅊ?
-다친 데 없음?
…….
채팅창이 오픈된다.
그의 안부를 물어오는 채팅이 한가득이었다.
“반갑습니다. 보다시피 미션 중이라 인사는 이 정도로 할게요.”
-당연하지
-ㅇㅈ
-ㅆㅇㅈ
-그나저나 벌써 산속으로 들어왔네?
-오브젝트 도나 보다
-힘들 거 같은데
-몹들 잘 잡을 수 있음?
크르르-
정글에 진입하면 가장 먼저 마주치는 늑대 오브젝트가 등장하자 시청자들이 왁자지껄 떠들어댄다.
하지만 강현은 그대로 늑대 오브젝트를 지나쳤다.
그러고는.
파파파팍-
늑대 오브젝트를 지나쳐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어?
-뭐야
-?
-오브젝트 안 잡음?
채팅창이 물음표로 도배됐음에도 강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게, 그의 목표는 늑대 오브젝트가 아니었으니까.
아니, 보다 정확히는 ‘드워프 쪽’ 늑대 오브젝트가 아니었다.
엘프 쪽 정글.
그는 처음부터 그쪽을 목표로 잡았다.
강현은 지도를 보며 수풀 사이와 우거진 고목들 사이를 잠시도 쉬지 않고 헤쳤다.
상대 팀도 아마 정글러를 배치하겠지만, 강현이 출발한 건 전투의 개시를 알릴 각 종족들이 모습을 보이기도 전.
AOS 장르에 생소하기까지 할 상대의 정글러가 그보다 일찍 도착할 가능성은 극히 낮았다.
크르르-
실제로 엘프 쪽 늑대 오브젝트에 도착한 강현은 아직 상대의 정글러가 도착하지 않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헉…… 헉…….”
강현은 급히 숨을 추스르며 근처 수풀 속에 몸을 숨겼다.
-와 아무것도 안 먹고 바로 여길 들어온다고?
-살벌하네;;
-진짜 과감하구나
그리고 그의 기지에 감탄한 시청자들의 메시지가 하나둘 떠오르던 순간이었다.
서벅-
[로프터스, 5위]
풀을 밟는 소리와 로프터스가 나타났고, 강현은 지체 없이 기습에 나섰다.
[스킬, 광검[Lv.1]을 발동합니다.]
[스킬, 섬광[Lv.1]을 발동합니다.]
로프터스가 강현보다 조금 더 강하다고는 해도, 서로가 제약된 지금 그 차이는 극히 미미했다.
거기에 무방비 상태이기까지 했으니, 기습이 실패할 리가 없었다.
챙! 채채챙!
푸욱!
“컥……!”
털썩.
[50pt를 획득하셨습니다.]
[참가자 이강현이 참가자 로프터스를 쓰러뜨렸습니다.]
기여도 메시지와 더불어 또 하나의 메시지가 떠올랐다.
아마 전체 메시지로 보였다.
‘뭐, 나쁘지 않지.’
적들에게 예상치 못한 동요를 안겨주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로독은 이번 미션이 최대 세 번까지 진행될 수 있다고 말했지만, 강현은 세 번까지 할 마음이 없었다.
‘두 번으로 끝낸다.’
2 대 0으로 승리한 뒤, 당당히 본선에 진출하리라.
그렇게 강현은 곧장 로프터스가 처리했어야 할 엘프 쪽의 늑대 오브젝트로 다가갔다.
크와앙-
늑대가 달려들었으나.
[스킬, 여명의 눈[Lv.3]을 발동합니다.]
여명의 눈을 켠 강현의 상대가 되지는 못했다.
서걱-
[30pt를 획득합니다.]
[충분한 기여도를 쌓았습니다.]
[아우라, 시작의 순백(Aura)을 획득합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
강현은 터질 듯한 활력을 느끼며 또 다른 오브젝트로 나아갔다.
곧 되살아난 로프터스가 달려오겠다만, 상관없었다.
‘다 털어주마.’
그는 이번 판으로 성장 차이의 끝을 보여줄 생각이었다.
[현재 사망 인원 : 로프터스(2팀) (0분 17초)
시야의 구석에 로프터스가 살아나기까지의 시간이 나타난다.
‘17초면…… 다시 오기까지 못 해도 3분은 걸리겠네.’
강현은 로프터스가 이곳에 도달할 시간을 계산한 뒤 지도를 띄웠다.
팟-
중립 오브젝트 목록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각 정글에 분포된 중립 오브젝트는 모두 10곳.
그중 늑대와 숲의 망령, 오염된 정령 오브젝트는 양쪽 진영에 모두 똑같이 있었다.
다만 버프를 주는 지난 던전의 수호자들, 구렁이와 해골 기사, 오우거, 골렘은 각 진영 정글에 둘씩 나누어져 있었는데, 강현은 그쪽엔 시선을 두지 않았다.
‘어차피 아직은 못 잡아.’
얼핏 봐도 잡기 힘들어 보였다.
아마 그의 모든 힘을 다 개방해야 해볼 만하겠지.
게다가 버프 오브젝트들에 신경 쓸 것도 없이, 나머지 중립 오브젝트들만으로도 충분히 기여도를 쌓을 수 있을 터였다.
-……상단에는 남궁강룡과 세르반테가 왔다.
-이현과 이립이 중단 공격로에 왔어요. 드워프랑 엘프가 싸우기 시작했고요.
-하단에는 사도천과 이바브가 왔소이다.
차례대로 알렉시스와 레이센 란, 한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본격적으로 드워프와 엘프들의 전투가 시작된 것이다.
필시 고블린과 오크들의 싸움보다는 훨씬 그 규모와 볼거리가 풍성할 터였지만, 강현의 머리를 채운 건 다른 생각이었다.
‘거의 최고 전력인 남궁강룡과 세르반테가 같이 라인을 선다고?’
찢어질 거라 예상했던 남궁강룡과 세르반테가 상단 공격로에 나타났단다.
강현은 적 팀의 의도를 대강 짐작할 수 있었다.
‘뚫어버리겠다는 건가.’
한 점에 힘을 집중시켜서 상단 요새를 박살 내려는 것 같았다.
실제로 상단 공격로 첫 번째 요새가 파괴된다면 그들의 의도대로 끌려다닐 가능성이 다분했다.
그걸 생각해 보면 아군의 최고 전력이라 할 수 있는 알렉시스가 상단에 배치된 게 다행이었다.
만약 본선진출조도 아닌 한림과 연청이 상단에 있었더라면 순식간에 밀렸으리라.
강현은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그는 팀의 오더이자 컨트롤 타워였다.
본인의 성장에만 주력해서는 안 됐다.
최상의 판단까지 내려 팀을 승리로 이끌어야 했다.
-중단과 하단 공격로는 일단 힘의 제약을 푸는 데에 집중해 주십시오. 그리고 적팀의 노림수는 상단을 빨리 무너뜨리고 그 영향력을 다른 곳에도 퍼뜨리려는 것일 테니 상단은 버티는 데에 주력하시길 바랍니다. 또 상대가 수상한 움직임을 보인다면 바로 말해주시고요.
-알겠어요.
-알겠소이다.
-……알겠다.
지시를 내리고 일어나려는데 채팅이 올라온다.
-누가 오더임?
-궁금
시청자들이 물어보는 걸 보아, 오더가 그라는 걸 시스템이 막는 걸로 보였다.
혹시 채팅으로 전략이 유출될 수도 있겠다고 여기던 강현에게는 좋은 일이었다.
[일시적으로 드워프의 [종족 특성]을 빌릴 수 있게 됩니다.]
…….
메시지들이 연달아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모의전에서도 고블린과 오크가 맞부딪칠 때쯤 고블린들의 [종족 특성]이 열렸었다.
이번에도 비슷한 모양이었다.
강현은 메시지들을 훑어 내려갔다.
[드워프의 종족 특성, [굳건한 강철]을 일시적으로 습득합니다.]
[주의 : 사용자가 온전히 습득할 수 없는 [종족 특성]입니다.]
[사용자의 [종족 특성]에 맞게 적용됩니다.]
[스킬, 꺾이지 않는 의지[Lv.1]를 일시적으로 습득합니다.]
[스킬, 불굴[Lv.1]을 일시적으로 습득합니다.]
꺾이지 않는 의지[Lv.1]
-꺾이지 않는 강철 같은 의지.
10초 동안 시전하는 스킬의 위력이 30% 상승합니다.
불굴[Lv.1]
-체력이 30% 아래로 내려가면 모든 능력치와 스킬의 위력이 20% 상승합니다.
“……와우.”
임시로 열린 드워프들의 [종족 특성]을 본 강현이 감탄을 내뱉었다.
울부짖기니, 공감이니 하던 고블린들의 [종족 특성]과는 차원이 달랐다.
‘나랑 시너지도 잘 맞고.’
불굴도 그렇고, 꺾이지 않는 의지 역시 유용하게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잠깐 빌린 것이기에 그 정도지, 실제로는 훨씬 더 까다로운 [종족 특성]이다.
엔딜 펠란이 덧붙였다.
‘드워프들을 잘 아시나 봅니다?’
-아주 옛날 놈들과 겨룬 적이 있다. 물론 이 몸이 다 짓밟아버렸지만.
결국 또 자기 자랑이었다.
‘아, 예.’
-네놈! 이 몸의 업적을 무시하는 것이냐? 손가락 하나로 산을 부수고 바다를…….
발끈한 엔딜 펠란이 무어라 쫑알댔으나, 강현은 귀담아듣지 않았다.
‘이제 슬슬 오고 있겠군.’
지금쯤, 살아난 로프터스가 다시 다가올 시간이었다.
스윽-
기척을 감춘 강현이, 천천히 수풀 안으로 사라졌다.
* * *
[하핫, 비록 저 로독만이 중계를 하게 됐지만, 오디오가 비는 일은 없을 테니 걱정은 안 하셔도 됩니다! 마침 로프터스 참가자가 이번에는 주변을 경계하며 진입하는군요!]
[하나 이강현 참가자가 이미 흰색 오라를 띄웠다는 걸 간과한 듯한데요! 로프터스 참가자의 기감이 잡아내지 못하는 곳에서 대기하고 있던 이강현 참가자, 다시 기습합니다!]
[어느 정도 대비를 하고 있었다고 해도 흰색 오라를 띄운 이강현 참가자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죠! 또 쓰러지고 맙니다!]
[또다시 1분 동안 부활을 기다려야 하니, 로프터스 참가자의 성장에 완전히 제동이 걸려버렸네요! 이거, 로프터스 참가자를 원활하게 성장시켜 상단 공격로를 일제히 압박하려 했던 2팀에게는 큰일이겠는데요!]
[반면 1팀의 경우 팀원들의 특성이 애매하다는 우려가 있었는데, 그 우려들을 말끔히 날려 버리는 안정적인 운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과연 이 오더들을 누가 하고 있는지 궁금해지는 모습입니다! 하하, 당장 공개하라구요? 시청자분들은 궁금하시겠지만, 전략 유출의 우려가 있어 1세트가 끝난 뒤에 보이스를 공개할 예정입니다!]
[그사이 이강현 참가자는 쉴 새 없이 엘프 쪽 중립 오브젝트를 털고 있군요! 늑대와 숲의 망령을 처리하고 오염된 정령에 다가가고 있습니다! 버프 오브젝트를 제외하면 오염된 정령이 마지막 오브젝트인데요! 리젠이 되려면 한참 남았는데, 로프터스 참가자는 어쩌죠?]
* * *
“큭…….”
이강현에게 두 번 연속으로 당해서일까.
되살아난 로프터스는 도저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설마 자신보다 먼저 아군 산림(Jungle)에 들어와 있었을 줄이야.
‘완전히 말렸다.’
중립 오브젝트로 이동하는 그의 마음은 더할 나위 없이 무거웠다.
-아무리 이강현이 허를 찔렀다고 해도 두 번이나 당하다니, 이건 좀 심한 거 아니오?
-생각 좀 하고 들어가지.
…….
자신을 탓하는 팀원들의 메시지가 보여서인지도 몰랐다.
마음 같아서는 나 대신 한번 해보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서 그런 말을 한다면 적반하장이 따로 없을 터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공격로에 가는 건데.’
뒤늦게 후회가 밀려왔으나, 그는 애써 채팅창과 팀 보이스를 의식하지 않으면서 아군 정글로 나아갔다.
스윽-
로프터스는 이번에도 놈이 대기하고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정말 꼼꼼하게 주변을 살폈다.
만약 또 당한다면 그때는 돌이킬 수 없을 터였다.
다행히 이강현의 흔적은 없었기에 그는 정글 안으로 무사히 진입했다.
하지만 이내.
“……하.”
그는 제자리에 멈춰 서야만 했다.
늑대에 숲의 망령, 오염된 정령에 이르기까지.
남은 오브젝트가 단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오브젝트들을 누가 쓸어갔을지는 명백했다.
“이강현…….”
그 사실을 깨달은 순간, 뇌리에 위기감이 흐르면서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그도 그럴 게, 이건 모의전이 아닌 마지막 예선 미션의 무대였다.
여태까지 아무리 잘했어도, 이번에 미끄러진다면 본선에 올라갈 수 없는 미션의 무대.
“……기여도.”
1위 이강현(250pt)
2위 사도천(100pt)
3위 남궁강룡(90pt)
…….
14위 로프터스(0pt)
기여도를 불러낸 그는 처참한 현실을 마주했다.
팀원인 사도천과 남궁강룡이 분전하고 있었음에도 전혀 위로가 되지 않았다.
“250…….”
그와 대척점에 선 이강현이 질풍처럼 돌아다니며 기여도를 쌓는 중이었으니까.
그에 반해 자신은 어떠한가.
아직도 그 어떤 오라조차 얻지 못한 채 기본 검술만 달랑 익히고 있을 따름이었다.
‘이대로 간다면…… 위험하다.’
그러나 그가 할 수 있는 건 달리 없었다.
그저 손가락을 빨면서 오브젝트들의 리젠을 기다리는 것밖에는.
턱-
잠시 후.
드디어 늑대 오브젝트가 리젠되었고, 로프터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늑대에게 달려들었다.
아니, 달려들려 했다.
하지만.
쐐애액-
뒤에서 쇄도해 오는 이강현은 본 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참가자 이강현이 참가자 로프터스를 쓰러뜨렸습니다.]
* * *
[50pt를 획득하셨습니다.]
[충분한 기여도를 쌓았습니다.]
[아우라, 내쏘아지는 자주(Aura)를 획득합니다.]
쿠오오오-
보랏빛 오라가 몸에 감돌아간다.
힘의 7할을 회복한 강현은 만족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두 번째인 청록의 오라도 아니고 세 번째인 자줏빛 오라다.
이걸로 스킬의 레벨만 낮을 뿐, 모든 스킬을 되찾았다.
방금 다른 참가자들이 흰색 오라를 띄웠다는 보고를 들은 참이었다.
그것으로 미루어볼 때 압도적인 성장을 이룩한 셈이었다.
‘로프터스한테는 재수 없는 일이겠다만.’
아군 정글을 싹 정리하고 엘프 쪽 늑대가 리젠될 때를 맞춰 도착했는데, 거기서 로프터스가 딱 기다리고 있었을 줄은 몰랐다.
아무것도 못 하고 두 번이나 죽었으니, 죽으라 자신을 원망하고 있겠지만.
당연하게도 시청자들에게는 아니었다.
-ㅋㅋㅋㅋㅋ개웃기네
-ㄹㅇㅋㅋ 아직까지 기여도 0인 거 실화냐?
-진짜 이강현 죽이고 싶겠다
-ㅋㅋ내가 봐도 얄미운데 상대 입장에서는 어떨까
-기다렸다가 또 죽이자!
-한 번 더!
…….
한 번 더를 원하는 시청자들의 채팅이 빗발친다.
그들로서는 아쉽게도 강현은 그럴 마음이 없었다.
‘더 말려봤자 시간만 아까워.’
세 번이나 죽였으면 로프터스는 이제 끝났다고 봐도 무방했다.
부랴부랴 성장을 한다고 쳐도 나머지 참가자들의 성장을 따라잡지 못할 터였다.
그런 로프터스를 찾아서 죽이느니, 그 시간에 다른 공격로에 영향력을 확대하는 게 나았다.
물론 오브젝트는 챙겨야 했기에, 강현은 그 길로 리젠되는 엘프 쪽의 오브젝트를 다 정리해 나갔다.
-그래도 나름 예선 마지막 미션인데, 신기할 정도로 쉽게 진행되는군.
엔딜 펠란이 말해왔다.
‘슬슬 본선에 갈 준비를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본선에서도 활약하려면 인간종 예선에서 묻혀선 안 되죠.’
-흥.
강현의 자신감 넘치는 발언에도 엔딜 펠란은 별다른 반박을 하지 않았다.
강현의 내면을 훑어봤으니, 그의 자신감에 근거가 있다는 걸 아는 것이다.
다만.
‘적팀도 뭔가 수를 내긴 하겠죠.’
이렇게까지 로프터스가 망했는데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을 리가 없다.
가만히 있는다면 그들의 패배는 기정사실화되어 있는 거나 마찬가지였으니 말이다.
-수를 안 내면?
‘그러면 뭐……. 이대로 끝나는 거고요.’
강현이 간단하게 대답했을 때였다.
[참가자 사도천이 참가자 연청을 쓰러뜨렸습니다.]
메시지와 함께 한림이 다급히 외쳐왔다.
-사도천에게 연청이 당하는 바람에 요새가 공격당하고 있소!
-알겠습니다. 제가 갈 테니 최대한 버티는 데에 주력해 주시길.
한림이 있는 곳은 하단 공격로.
강현의 위치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다.
‘사도천의 기여도가…… 3위였었나.’
사이한 술법을 쓰는 사도천의 특성상, 무난하게 힘을 되찾아간다면 무슨 술수를 부릴지 몰랐다.
이쯤에서 성장세를 한 번 꺾을 필요가 있었다.
팟-
[스킬, 질주[Lv.1]를 발동합니다.]
강현은 즉각 이동했다.
와아아-
하단 공격로가 가까워지면서, 엘프의 뾰족한 고함과 드워프의 거친 함성이 귓가를 울린다.
그런 가운데 강현은 촉수를 움직여 편하게 요새를 공격 중인 사도천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리고 사도천을 본 순간, 강현은 행동에 나섰다.
‘각성하고는 처음 써보는 거지만…….’
이 상황에서 이보다 적합한 스킬은 없었다.
[스킬, 섬멸의 광창[Lv.1]을 발동합니다.]
[1/2의 마력을 소모합니다.]
최대 1/2까지 집어넣을 수 있는 마력을 한계까지 밀어 넣었다.
강현의 오른팔에 순백의 입자가 모였고, 이내 입자들은 2m 길이의 백색 창으로 화했다.
키이잉-
그에 따라 대기가 미세하게 떨림과 함께, 무언가 뒤틀리는 소리가 퍼져 나갔다.
여기에.
[스킬, 꺾이지 않는 의지[Lv.1]를 발동합니다.]
[10초 동안 시전하는 스킬의 위력이 30% 상승합니다.]
드워프들의 [종족 특성]까지.
꺾이지 않는 의지가 더해지자 백색 창이 터질 듯 부풀어 올랐고, 강현은 지체 없이 그것을 내던졌다.
쿠콰콰-
미사일이 발사되는 듯한 굉음을 흩뿌리며 백창이 나아간다.
“……!”
창이 지척까지 날아간 뒤에야 사도천이 알아차렸으나, 그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아직 힘을 완전히 되찾지 못해 반응속도도 느린 데다가, 이강현의 빛은 그에게 있어 극상성이었으니까.
콰콰콰쾅!
[참가자 이강현이 참가자 사도천을 쓰러뜨렸습니다.]
기분 좋은 메시지가 이어진다.
하나 강현은 투창에 그치지 않고, 곧장 전장으로 뛰어들었다.
[스킬, 광검[Lv.5]을 발동합니다.]
편하게 성장하던 적팀에게, 성장의 차이를 보여줄 시간이었다.
* * *
[사도천 참가자! 이강현 참가자의 저격에 바로 사망하고 맙니다!]
[수월하게 힘을 회복해 가고 있던 사도천 참가자의 사망! 2팀에게 있어서는 중상을 입은 거나 다름이 없겠는데요!]
[거기에 1팀은 사도천 참가자를 쓰러뜨린 것에 그치지 않고, 기세를 몰아 사도천과 이바브가 지키던 하단 1차 요새까지 파괴하는 데에 성공합니다!]
[연청 참가자가 먼저 당한 걸 생각하면 완벽한 반격이었네요!]
[오더가 누구냐구요? 1세트가 끝나고 확인해 보세요!]
* * *
[하단 1차 요새를 파괴했습니다.]
[아군 전체에게 150pt가 적립됩니다.]
[드워프들의 [종족 특성]이 10% 강화됩니다.]
1차 요새를 성공적으로 파괴하자 연달아 메시지가 떠오른다.
내용을 보아 아군 전체에게 나타난 메시지로 보였다.
‘요새만 많이 깨도 쉽게 이기겠군.’
요새 파괴의 중요성을 알게 된 강현은 한림에게 하단 2차 요새의 공략을 맡겼다.
다시 정글로 들어가 리젠되었을 오브젝트들을 처리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그때였다.
-로프터스가 상단으로 올라왔다. 요새의 내구도도 거의 절반이 까였고. 지원은 없나?
알렉시스의 떫은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게 그 애송이들의 노림수인 듯하군. 키워주겠다는 건가.
‘그런 것 같네요.’
엔딜 펠란의 말이었다.
강현은 정글로 가려던 발걸음을 중단 공격로로 틀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무언가 조치를 취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로프터스를 상단으로 불러들인다는 수를 내놓았다.
상단에 있는 건 남궁강룡과 세르반테.
자신들은 어느 정도 성장을 이루었으니, 자신들의 보호 아래 천천히 로프터스를 키우겠다는 거겠지.
이번 세트에서 쫄딱 망했다고는 해도, 본래의 로프터스는 본선진출조에 들 정도의 참가자다.
‘날 부르는 건가.’
누가 오더를 맡고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강현은 적의 전략을 파악해 냈다.
적은 지금 그에게 전하는 것이었다.
로프터스가 크는 걸 막고 싶다면 상단으로 올라오라고.
이대로 올라오지 않은 채 상단을 방치한다면, 끝까지 뚫어버리겠다고.
그런 전략을 세운 의도는 뻔했다.
‘시간 끌기.’
상단에서 어떻게든 강현을 붙잡고 버텨볼 테니, 그동안 나머지 참가자들에게 성장하라고 종용하는 것일 터.
이 전략은 스플릿 푸시(Split push)라는 이름으로 AOS 장르에서도 많은 사랑을 받은 전략이었다.
확실히, 지금 같은 상황에 처한 적팀에게는 괜찮은 대처법이었고.
하지만.
-지원은 가지 않을 예정이다.
강현은 거기에 끌려다닐 생각이 전혀 없었다.
-……뭐라고?
-요새를 내주는 한이 있더라도 최대한 버티는 쪽으로 하도록. 단 남궁강룡이나 세르반테 중 한 명이 자리를 비울 수도 있다고 판단되니, 만약 그런 움직임을 보인다면 바로 보고해 주고.
알렉시스는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하더니, 이내 짤막하게 말했다.
-거의 삼 대 일이나 마찬가지라는 것만 알아둬라.
거기까지 말한 알렉시스는 팀 보이스를 중단했다.
“크억……!”
“컥…….”
“후퇴! 요새로 후퇴하라!”
어느새 엘프들과 맞부딪치던 드워프들이 모두 쓰러졌고, 적들이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쿠오오-
흰색 오라를 몸에 두른 알렉시스의 손에서 날카로운 바람의 칼날이 쏘아진다.
활을 들고 전진해 오는 십여 명의 엘프들의 공세를 늦추기 위한 공격이었다.
그러나 바람의 칼날이 엘프들에게 닿기 직전.
콰쾅!
푸른 검기가 끼어들어 그 바람들을 모조리 쳐낸다.
휙-
공격이 막힘과 동시에 요새로 물러난 알렉시스는 그 검기의 주인을 노려보았다.
[남궁강룡, 3위]
남궁강룡이 덤덤하게 검을 거두어들이는 가운데, 그 옆으로 상대 참가자들이 나란히 선다.
[세르반테, 8위]
[로프터스, 5위]
파파팍-
그들의 보호 아래 엘프들이 요새를 향해 화살을 쏘아대기 시작했다.
“지원은 안 부르나? 옆에 있는 참가자만으로는 부족할 듯싶은데.”
알렉시스의 옆에 서 있는 리라스테를 가리키며 남궁강룡이 물었다.
“불렀다.”
“그러면 오기를 기다려야겠-”
“안 온다더군.”
“……?”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말하는 알렉시스였으나, 그 입가에는 비릿한 미소가 걸려있었다.
“……상관없다.”
지원은 없다는 이강현의 말을 듣고도 그가 그 이유를 묻지 않은 건, 이강현의 생각을 파악했기 때문이었다.
그가 겪었던 이강현이라면 지금쯤 이렇게 말하고 있을 터였다.
‘상단? 터뜨려. 대신 나는 중립 오브젝트부터 중단, 하단까지 싹 다 터뜨릴 테니까.’
즉 올 거면 너희들이 오라는 말이었고, 어디 한번 ‘거점’까지 뚫리고도 거기 있나 보자는 통보였다.
그리고 그 대응은 알렉시스의 마음에 들었다.
광오한 그의 성정 상 개처럼 질질 끌려다니는 것보다는 이게 훨씬 나았다.
푸슈슛!
알렉시스가 리라스테, 드워프 수비병들과 함께 요새를 공격하는 엘프들을 처리해나가던 순간이었다.
[중단 1차 요새를 파괴했습니다.]
[아군 전체에게 150pt가 적립됩니다.]
[드워프들의 [종족 특성]이 10% 강화됩니다.]
기분 좋은 메시지가 나타난다.
“……!”
그제야 이강현의 의도를 알게 된 남궁강룡과 세르반테의 얼굴이 굳어졌다.
“이거 안 되겠군.”
“로프터스! 시간이 없으니 빨리 저 요새를 치워야겠네!”
팟-
그러더니 진지한 얼굴을 하고 요새의 성벽을 타고 올라오기 시작한다.
그걸 본 알렉시스는 싸늘하게 웃으며 영롱한 노란빛의 지팡이를 꺼내 들었다.
아직 흰색 오라긴 하나, 최소한의 번개는 부릴 수 있을 것이리라.
“잘할 수 있을까요……?”
“괜히 죽지 말고 뒤에서 엘프나 잡아라. 아니면 로프터스를 견제하든가.”
“네, 넵……!”
옆에 있는 리라스테는 쥐뿔도 도움이 되지 않겠다만, 없으면 없는 대로 하면 된다.
쐐액-
요새의 위에서, 푸른빛과 노란빛이 얽히고설켜 나갔다.
콰쾅! 꽈르르릉-!
버티려는 자와, 밀어내려는 자의 싸움이 시작된 것이다.
* * *
[알렉시스 찬드라스 참가자와 남궁강룡, 세르반테 참가자의 한판 승부! 어떻게 보면 많은 시청자분들이 가장 기대하던 매치라고 할 수 있는데요!]
[무려 두 명의 강자들을 상대로 알렉시스 참가자, 오히려 웃어 보입니다! 기세에서 전혀 밀리지 않네요! 검기에 맞서 번개로 대응합니다!]
[지난 미션에 이어 이제 두 번째 보는 거긴 하나, 저 번개를 다루는 지팡이는 알렉시스 참가자와 참으로 잘 어울리는 듯합니다! 아, 말씀드리는 순간, 격돌합니다!]
[원래는 로프터스 참가자도 참가해서 이 기대감을 더욱 증폭시켜야 했겠지만, 현재 그는 드워프들과 투덕거리느라 바쁘군요! 아마 리라스테 참가자가 그의 상대가 될 듯합니다!]
[2팀의 맹공에도 불구하고 벌써 5분도 넘게 1팀이 버티고 있네요! 2팀이 점점 다급해집니다!]
[치열한 승부 끝에 리라스테 참가자가 쓰러졌습니다! 이렇게 되면 3 대 1이죠?]
[그래서인지 결국 요새에서 물러나는 알렉시스 참가자입니다! 2팀, 드디어 첫 요새를 파괴하네요!]
[그럼에도 남궁강룡, 세르반테 참가자의 얼굴에는 조급함이 가득한데요! 아마 그들의 예상보다 1팀 상단 참가자들이 훨씬 오래 버틴 것과 관련이 있겠죠!]
[즉각 1팀의 상단 2차 요새로 진격하고는 있지만…… 어떻게 할지 의견을 나누는 것 같습니다!]
[그때, 이강현 참가자가 또다시 어딘가로 달려갑니다! 이미 넘치는 활약을 보였는데도 전혀 만족하지 않는 듯합니다!]
[중립 오브젝트 구역으로 들어가서…… 버프 오브젝트가 목표였네요! 2팀 구역에 위치한 버프 오브젝트, 해골 기사를 사냥해 나갑니다!]
[이러다가 다 빼앗기겠는데요? 남궁강룡과 세르반테 참가자, 잘 판단해야 할 겁니다!]
[이렇게 계속 휘둘리다가는, 자칫 이도 저도 안 되는 수가 있어요!]
* * *
쿠웅-
해골 기사가 쓰러진다.
[버프 오브젝트를 처치하셨습니다.]
[100pt를 획득합니다.]
[가호, ‘죽음을 끌어들이는 자’가 지급됩니다.]
[첫 번째 세트에 한해 모든 능력치가 10% 증가합니다.]
쿠오오-
온몸을 휘감는 활력을 느끼며 강현은 지체 없이 중단 공격로로 이동했다.
팟-
-꽤 유리한 거 같은데도 발에 불이라도 떨어지는 것처럼 움직이는군. 그러는 이유가 있나?
‘있죠.’
강현은 정글을 헤치면서 답했다.
방금 아군 상단 1차 요새가 부서지긴 했어도, 아직 상황은 극히 유리하다.
그가 생각하기에도 소위 말하는, ‘게임이 터진’ 상태라 봐도 무방했으니까.
하나 유리하다고 느긋하게 해서는 안 된다.
그랬다가는 벌려놓은 성장 차이를 따라 잡히기만 할 뿐이다.
고삐를 한 번 쥐었을 때 절대 놓치지 말고 목을 죄어야 했다.
물론 그것 말고도 다른 이유가 있었지만, 어차피 곧 알게 될 일이었다.
수풀을 헤치고 몇 개의 강을 가로지르자 중단 공격로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채챙! 챙!
조그맣고 두툼한 드워프들과 길고 얇은 엘프들이 한데 엉켜있다.
그 옆에서 아군인 레이센 란과 루시타르, 적군인 이현과 이립이 교전 중이었으나, 강현은 곧장 엘프들 사이로 뛰어들었다.
-음? 왜 아군 애송이들을 내버려 두고 뾰족귀들에게 먼저 가는 거지?
엔딜 펠란이 질문했지만, 여유롭게 답할 시간은 없었다.
[스킬, 여명의 눈[Lv.3]을 발동합니다.]
[스킬, 광검[Lv.6]을 발동합니다.]
여명의 눈에 더해 힘의 7할까지 회복한 강현은 종횡무진 엘프들을 쓸어나갔다.
“세계수여, 부디 저 악마를 막아주소서!”
슈와아-
엘프들이 비명을 지르며 화염의 새를 날리고, 나무줄기로 그를 묶으려고도 시도했지만.
[스킬, 순보[Lv.2]를 발동합니다.]
순보 앞에서는 무용지물이었다.
[20pt를 획득합니다.]
[20pt를 획득합니다.]
…….
순식간에 절반도 넘는 엘프들을 처리했을 때였다.
[충분한 기여도를 쌓았습니다.]
[아우라, 휘몰아치는 적흑(Aura)을 획득합니다.]
쿠오오-
이걸로 모든 힘을 되찾은 강현이 씩 웃었다.
-엘프를 때려잡다 보면 적흑색이 될 걸 대충 예상하고 있었던 건가. 얄미운 놈.
혀를 차는 엔딜 펠란과는 달리, 시청자들의 분위기는 아주 좋았다.
-와
-오우;
-벌써 적흑 오라를 띄웠다고? 자줏빛 띄운 애도 없는데?
-성장 속도 미쳤네;;
-ㅋㅋㅋ그 와중에 로프터스 이제 흰색 띄우기 일보 직전이다
-그쪽도 미친 성장 속도긴 하네ㅋㅋㅋ
놀란 건 그들만이 아니었다.
강현은 그 길로 한창 싸우고 있는 참가자들에게 달려들었다.
흰색 오라를 띄운 이현이 강현의 오라를 보고는 눈을 부릅뜬다.
“적흑색이라고? 어떻게 벌써……?”
그리고 그게 그의 마지막 말이 되었다.
[참가자 이강현이 참가자 이현을 쓰러뜨렸습니다.]
[50pt를 획득합니다.]
“으, 으아악! 이 괴물 같은 놈!”
이현이 한 큐에 당하는 걸 본 이립이 몸을 내빼려 했다.
강현은 그를 쫓지 않았다.
그저.
[스킬, 섬멸의 광창[Lv.1]을 발동합니다.]
[1/2의 마력을 소모합니다.]
쿠오오-
[스킬, 꺾이지 않는 의지[Lv.1]를 발동합니다.]
[10초 동안 시전하는 스킬의 위력이 30% 상승합니다.]
따끔한 주사 한 방을 날려주었을 뿐.
[참가자 이강현이 참가자 이립을 쓰러뜨렸습니다.]
[50pt를 획득합니다.]
손쉽게 이현과 이립을 쓰러뜨린 걸 본 레이센 란이 혀를 내둘렀다.
“어디서 그런 괴물같은 성장을 하고 온 거예요?”
“말했잖습니까. 이런 게임을 해본 경험이 많다고. 갑시다.”
그 길로 전진한 그들은 적의 1, 2차 요새를 무난하게 파괴할 수 있었다.
3차 요새까지 나아가자 남궁강룡과 세르반테가 급히 모습을 드러낸다.
결국 강현이 저들을 불러내는 데에 성공한 것이다.
남궁강룡과 세르반테에, 이현과 이립이 중단을 지키듯 서 있다.
‘나머지 셋은 없네.’
로프터스, 사도천, 이바브는 보이지 않았다.
“3대 4인데 물러나는 게 좋지 않겠어요……? 시간만 끌어도 우리가 이길 텐데.”
레이센 란이 잠깐 물러나는 게 어떻냐고 말해왔다.
적팀이 중단에 네 명을 배치한 만큼, 나머지 두 개의 공격로는 비어 있을 수밖에 없다.
반면 아군은 지금 이 순간에도 착실히 성장하고 있으니, 시간만 끌면 되겠다는 계산이겠지.
“…….”
강현은 대답하는 것 대신 적들의 면면을 훑어보았다.
남궁강룡과 세르반테가 청록의 오라였고, 이현과 이립은 아직도 흰색 오라를 두르고 있었다.
그에 반해 자신은 어떠한가.
적흑 오라에, 요새도 세 개나 부쉈다.
여기에 해골기사를 잡으면서 얻은 버프까지 있다.
물러날 이유가 없었다.
[스킬, 천광의 날개[Lv.1]를 발동합니다.]
* * *
[갑자기 벌어진 한타(Team fight)죠! 1팀이 수적으로 불리한데도 불구하고 이강현 참가자, 뛰어듭니다!]
[란 레이센 참가자의 화염과 루시타르 참가자의 엄호가 뒷받침되기는 해도, 혼자 남궁강룡, 세르반테 참가자를 상대해야 하는데요! 2팀도 여기서 더 밀렸다가는 ‘거점’까지 밀릴 판이니 결사적으로 싸워나갑니다!]
[눈치 빠른 시청자 분들은 2팀이 불리한 와중에도 세 명의 참가자를 부르지 않은 걸 아셨겠죠? 그들 나름의 도박 수를 건 겁니다…… 만! 남궁강룡 참가자 이강현 참가자에게 몇 수 나눠보지도 못한 채 쓰러지고 맙니다! 이어서 세르반테 참가자까지!]
[아아, 3차 요새가 밀리면서 뒤늦게 나머지 참가자들이 왔지만, 그대로 ‘거점’이 파괴되면서 1세트가 종료됩니다! 자리에 없던 참가자들은 얼떨떨하겠어요! 한 것도 없는데 이강현 참가자가 혼자 세트를 끝내다시피 했으니까요!]
8킬 0데스.
기여도 560pt.
그렇게 압도적인 이강현의 원맨쇼로 1세트가 종료되었다.
[첫 번째 세트에서 승리하셨습니다.]
[승리 보상으로 200pt를 획득합니다.]
[획득한 기여도는 미션이 종료될 때까지 누적됩니다.]
[현재 참가자 이강현의 기여도는 560pt, 순위는 1위입니다.]
[일시적으로 실시간 시청자 반응을 회수합니다. 회수한 시청자 반응은 두 번째 세트 시작 시 다시 개방됩니다.]
[팀별 대기실로 이동합니다.]
[두 번째 세트까지 남은 시간 : 0시간 30분]
슈와아-
빛무리가 사라지고 다시 새하얀 공간이 나타난다.
채팅창을 회수한 걸로 보아 일종의 작전 타임이라고 봐도 될 듯했다.
강현은 팀원들을 둘러보았다.
-몇몇 애송이들은 얼빠진 얼굴들을 하고 있군.
엔딜 펠란의 말처럼, 몇몇 참가자들은 어안이 벙벙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뭐야……. 벌써 이긴 거야?”
“별로 한 것도 없는데…….”
[연청, 13위]
[리라스테, 14위]
다소 묻혀간 감이 있던 참가자들이었다.
물론, 서서히 미소가 차오르는 걸 보면 승리가 실감은 나는 모양이었다.
그들을 포함한 다른 팀원들도 잠시 첫 번째 세트의 여운을 느끼고 싶어 하는 듯했지만, 그러기에는 남은 시간이 충분하지 않았다.
강현은 바로 본론을 꺼냈다.
“다음 세트도 1세트랑 똑같이 갑시다.”
“똑같이……? 이번에도 그쪽이 중립 오브젝트를 처리하겠다는 말인가요?”
레이센 란의 말에 강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는 게 모두에게 나을 겁니다. 한 번 해봤던 걸 또 하는 셈이니까요.”
게다가 엘프 혹은 드워프, 그리고 적 참가자들과 싸우기만 하면 되는 공격로와는 달리, 정글에 대한 이해도가 없이 정글러 역할을 맡는다면 뭘 해야 할지 몰라서 어버버 할 수도 있었다.
-이번에도 상대 지역에 들어갈 것이냐?
‘그건 첫 번째 세트여서 먹혔던 거고, 다음 세트에선 아마 안 통할 겁니다.’
그가 드워프와 엘프 간의 교전이 시작되기도 전 상대 정글에 들어가 대기를 탔던 건 엄밀히 말해 도박 수였다.
‘성공 확률이 매우 높은 도박이긴 했어도 도박은 도박이지.’
지난 세트를 패배하면서 상대도 대충 감을 잡았을 거고, 2세트에서는 아군 정글을 철저히 보호할 거라 예상됐다.
그렇다면 무난한 정글러의 역할을 수행하면 된다.
중립 오브젝트로 힘의 제약을 풀어나가면서 다른 공격로에 개입하는 정글러의 역할을.
무난하게 간다고 해도 그는 AOS 장르를 잘 안다는 걸 활용하여 상대 정글러와의 차이를 벌릴 자신이 있었다.
팀원들도 하나둘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좋아요.”
“좋소. 전 판으로 소형제의 지휘능력은 입증이 되었으니 믿고 따라야겠지.”
“……알겠다.”
레이센 란과 한림, 알렉시스를 시작으로 나머지 세 명도 동의했다.
지난 세트를 통해 강현에게 충분한 신뢰가 쌓였기에 딱히 우려하지 않는 것이리라.
“그럼, 다음은 공격로를 정하겠습니다. 혹시 함께 공격로를 서는 파트너를 바꾸고 싶다거나 다른 공격로에 서고 싶다는 참가자 있습니까?”
그 뒤 남은 시간 동안 강현의 주도하에 공격로 배치에 관한 의견들이 조율되었고.
[두 번째 세트까지 남은 시간 : 0시간 0분]
[참가자 이강현 확인, 미션 장소로 이동합니다.]
[참가자 이강현의 이번 진영은 엘프입니다. 건투를 빕니다.]
두 번째 세트가 시작되었다.
* * *
스아아-
시야에 엘프들의 진영이 나타난다.
‘아까 봤던 건데 지금 보니까 다르네.’
조금 전 엘프들의 ‘거점’인 신목의 핵을 파괴할 때는 몰랐는데, 전란에 휘말리지 않은 지금은 느낌이 또 달랐다.
1세트에서 봤던 드워프들의 진영이 웅장했다면, 엘프들의 진영은 신비롭고 아름답달까.
중앙에 신목이 드높이 드리운 가운데, 그 아래로 수십 채의 가옥들이 고루 분포되어 있었다.
나무와 풀로만 이루어진 가옥들이었는데도 불구하고 기품이 느껴지는 게 신기했다.
여러모로 톱나바퀴 기관들로 시끄럽던 드워프들의 진영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엘프들이 나타나면 말했던 대로 이동하길 바랍니다.
강현이 말했다.
이번에는 상대 정글에 들어가지 않기로 했으니, 다른 참가자들이 공격로에 진입하는 것과 맞추어서 이동할 생각이었다.
잠시 후, 신목의 뿌리 사이에서 엘프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낸다.
뾰족한 귀에 하얀 피부, 호리호리한 체형을 하고 있는 그들은 결의에 찬 눈빛으로 각 공격로로 흩어져 갔다.
그에 따라 팀원들 또한 사전에 합의한 공격로로 나아갔다.
[상단]
-한림, 연청
[중단]
-레이센 란, 루시타르
[하단]
-알렉시스, 리라스테
파트너는 똑같이 두고 공격로만 조금씩 수정한 배치였다.
[스킬, 광검[Lv.1]을 습득합니다.]
[스킬, 섬광[Lv.1]을 습득합니다.]
제약된 스킬들을 보며 강현도 발걸음을 옮겼다.
[일시적으로 엘프의 [종족 특성]을 빌릴 수 있게 됩니다.]
[엘프의 종족 특성, [고귀한 신념]을 일시적으로 습득합니다.]
[주의 : 사용자가 온전히 습득할 수 없는 [종족 특성]입니다.]
[사용자의 [종족 특성]에 맞게 적용됩니다.]
[스킬, 잔잔한 호수[Lv.1]를 일시적으로 습득합니다.]
[스킬, 신실한 기도[Lv.1]를 일시적으로 습득합니다.]
잔잔한 호수[Lv.1]
-결코 타협하지 않음으로써 생겨나는 부동의 마음.
-시전하는 스킬의 위력이 10% 상승합니다(상시 발동).
신실한 기도[Lv.1]
-신목에게 기도하여 힘을 일부 전해 받습니다. 체력이 40% 아래로 내려갈 시 30%의 체력을 자동으로 회복합니다.
‘드워프들 [종족 특성]이랑은 방향이 다르구나.’
10초 동안 시전하는 스킬의 위력을 30% 상승시켜 주는 ‘꺾이지 않는 의지’보다는 상승 폭이 낮아도 상시 발동을 시켜주는 ‘잔잔한 호수’.
체력이 30% 아래로 내려가면 모든 능력치와 스킬의 위력이 20% 올려주는 ‘불굴’과는 다르게 회복을 시켜주는 ‘신실한 기도’.
[종족 특성]만 보고도 두 종족의 성향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었다.
강현이 정글에 거의 도달했을 때쯤, 보고들이 들려온다.
-상단 쪽 교전이 벌어졌소이다. 남궁강룡과 이현이 이쪽에 있소.
-중단도 싸우기 시작됐어요. 로프터스와 이바브가 이쪽에 있고요.
-하단도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군. 사도천 하나만 달랑 있다.
“……!”
알렉시스의 말을 듣자마자 강현은 걸음을 멈추었다.
상대의 정글러를 맡고 있을 한 명만이 보이지 않아야 하는데, 두 명이 안 보인단다.
느낌이 싸했다.
‘설마 이건…….’
그 순간이었다.
쐐애액-
앞의 수풀을 가르며 갑작스럽게 검이 날아들었다.
[스킬, 광검[Lv.1]을 발동합니다.]
강현은 급히 검을 빼 들며 광검을 발동했다.
챙! 채챙!
강현은 날아드는 검을 맞받아치며 상대를 확인했다.
[세르반테, 8위]
‘세르반테는 여기 있고. 그러면 이립은?’
그의 시선이 급히 주변을 훑는데.
-뒤다!
엔딜 펠란의 경고에 그는 즉시 몸을 비틀며 옆으로 물러났다.
쿠오오-
그가 완전히 물러나기 전, 푸른 화염이 그의 허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큭!”
[이립, 15위]
강현이 옆으로 빠져나가는 걸 본 도복의 선인, 이립이 아쉽다는 얼굴로 푸른 구슬을 거두어들인다.
“오호. 그걸 피하다니 역시 자네는 감이 좋아.”
세르반테가 소리 내어 웃었다.
“자네가 혹시 눈치챘을까 봐 이립을 뒤로 보냈는데, 그게 좋은 선택이 된 듯하구만! 으하하! 또 간다! 파해검법 제1식, [작살 던지기]!”
세르반테의 검에 맺힌 푸른빛이 내려찍듯 짓쳐 들어온다.
강현은 섬광으로 그에 대응했다.
[스킬, 섬광[Lv.1]을 발동합니다.]
쾅!
백광과 푸른빛이 충돌했으나, 푸른빛이 백광을 서서히 밀어붙여 나갔다. 세르반테의 오러가 강현의 마력보다 많아서인 듯했다.
그사이를 노린 이립이 강현에게 다시금 푸른 불꽃을 쏘려고 했지만.
팟-
강현은 세르반테의 찌르기의 위력을 반탄력 삼아 그대로 밀려나듯 뒤로 빠져나갔다.
그러고는 뒤를 돌아 재빨리 자리를 뜨기 시작했다.
타타타탁-
강현은 세르반테와 이립이 쫓아오지 않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발걸음을 멈추었다.
뒤를 돌아보자 세르반테와 이립이 아군 정글로 진입하는 게 눈에 들어왔다.
강현은 그제야 턱 끝까지 차올랐던 숨을 내쉬었다.
“후우……. 투 정글이라니.”
투 정글(Two jungle).
공격로를 한 명 비워두는 대신 또 한 명의 정글을 투입함으로써 상대 정글의 성장을 말리는 전략.
날빌성이 매우 짙기에 AOS 게임에서도 잘 쓰이지 않는 극단적인 전략이었다.
-네놈을 내버려 둬서는 안 된다는 결론을 내린 거 같은데.
엔딜 펠란의 말에 강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전 세트의 참패를 말미암아 어떻게든 그의 성장을 막기 위해 선택한 전략인 듯했다.
본선행이 결정되는 마지막 미션이어서일까.
역시 상대도 이를 악물고 덤벼온다.
그런데 그때.
[참가자 남궁강룡이 참가자 한림을 쓰러뜨렸습니다.]
[참가자 이현이 참가자 연청을 쓰러뜨렸습니다.]
설상가상으로 한림과 연청이 한꺼번에 당했다는 메시지가 떠오르는 게 아닌가.
다른 이들의 개입도 없이 두 명 다 쓰러져 버리다니.
AOS 게임에서 솔로 킬(Solo kill)이라 부르는 이것은, 팀적인 차원에서 상당한 악재라고 할 수 있었다.
-크흐흐……. 이거 제대로 한 방 먹었구나. 어떻게 할 작정이지?
강현은 생각했다.
‘안 좋긴 하네.’
정글러인 그가 아군 정글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있고, 상단에서는 솔로 킬을 당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그에게는 보였다.
‘활로는 있다.’
다소 빡세긴 하겠다만, 이 난관을 타개할 방법이.
빠르게 계획을 정리한 강현이 팀원들에게 말을 전달했다.
-일단 상단은 최대한 버티는 쪽으로 갑니다. 만약 죽을 거 같다면 요새를 내주는 한이 있더라도 몸을 피하십시오.
-아, 알겠네.
-그리고 중단이 중요합니다. 레이센 란, 지금 바로 하단 공격로로 가십시오. 단 레이센 란이 도착하기 전까지 하단 공격로는 반드시 드워프를 다 처리해서 엘프들을 상대 요새에 밀어 넣어야 합니다. 그 상태에서 레이센 란이 도착하면…….
그렇게 강현의 지시가 끝나자, 1팀 전체가 긴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서걱-
쿠웅…….
[15pt를 획득합니다.]
세르반테는 망령을 해치운 검을 늘어뜨렸다.
이걸로 엘프 쪽 숲의 망령과 오염된 정령을 처리했다.
남은 건 늑대 오브젝트뿐.
다만.
“……생각보다 오래 걸리는군.”
오브젝트를 처리하는 속도가 예측했던 것보다 훨씬 느렸다.
계획대로라면 이미 아군 오브젝트를 정리하고 있어야 했다.
“헉…… 헉……. 그러게 말이오.”
숨을 고르며 이립이 거들었다.
15위라는 순위에, 그리 뛰어나지 않은 대인전 능력을 가진 그로서는 정글과도 같은 산림을 다니면서 오브젝트를 처리하는 게 힘들 만도 할 터였다.
힘까지 제약돼 있는 상태에서 잡으려니 더욱 그랬다.
‘이강현은 어떻게 그리 빨리 처리했던 거지?’
의문이 자연스레 들었지만, 세르반테는 개의치 않았다.
이전 세트에서는 이강현이 말도 안 되는 활약을 보이는 바람에 패배했으나, 2세트는 아직까지 잘 풀리고 있었다.
‘3세트에서도 이 전략으로 가자고 해야겠는데.’
그가 이번 세트를 승리한다면 3세트에서도 이 전략을 쓰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 순간이었다.
[참가자 알렉시스 찬드라스가 참가자 사도천을 쓰러뜨렸습니다.]
-이런 X팔!
되살아나자마자 불같이 욕을 해대는 사도천과는 달리, 세르반테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한 번 죽는 것 정도야.’
사도천 혼자 하단 공격로에 설 때부터 예상했던 일이었다.
그가 죽는 동안 그걸 넘어서는 이득을 볼 테니 문제는 없었다.
실제로 이강현을 말리고, 상단 공격로를 박살 내고 있지 않나.
따라서 세르반테는 간단하게 말할 수 있었다.
-조금만 버텨라.
그러나.
[참가자 란 레이센이 참가자 사도천을 쓰러뜨렸습니다.]
…….
[참가자 알렉시스 찬드라스가 참가자 사도천을 쓰러뜨렸습니다.]
무려 세 번이나 연이어 죽자, 사도천의 불만이 폭주했다.
-으아아악! 이 개같은 중단 새끼들아! 대체 뭘 하길래 란 레이센이 틈만 나면 내려오는 거냐! 내가 요새에 처박혀 있는데도 그 연놈들이 밀고 들어와서 날 죽이고 빠져나갔단 말이다!
중단에게 화풀이를 하더니.
-세르반테! 멀뚱히 오브젝트만 쳐 잡지 말고 이쪽으로 와라!
세르반테에게 그 화살을 돌린 것이다.
하단 공격로로 오라니.
사도천을 싫어하던 세르반테에게는 께름칙한 말이었다.
-나 말고 이립을 보내겠…….
-지랄하지 말고! 그딴 약한 놈이 와봤자 나랑 같이 휩쓸릴 뿐이다! 네놈을 죽도록 미워하는 내가 굳이 부르는 이유를 모르겠나? 아니면 남궁강룡! 네놈이 내려오든가!
-…….
사도천이 막무가내로 나오자 남궁강룡이 한숨을 쉬며 말해왔다.
-세르반테, 아무래도 가줘야 할 것 같소. 우리는 상단을 최대한 빨리 밀 터이니, 더 이상 죽지 않게만 부탁하오.
-으음…….
상황이 이렇게 되자 세르반테도 어쩔 수 없었다.
“이립, 나는 가 볼 테니 오브젝트를 잘 처리하고 있길 바라오.”
“알겠소.”
스윽-
세르반테가 사라진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망할 사도천. 사람을 너무 무시하는군.”
팟-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늑대를 향해 이동하던 이립의 뒤에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참가자 이강현이 참가자 이립을 쓰러뜨렸습니다.]
* * *
[이강현 참가자! 결국 이립 참가자를 찾아내어 쓰러뜨리는 데에 성공합니다!]
[비록 세르반테와 이립 참가자의 견제에 의해 오브젝트를 하나도 못 먹긴 했어도, 세르반테 참가자가 떠난 이상 해볼 만하다는 거죠! 세르반테 참가자를 하단으로 보내기 위해 하단 다이브를 계속해서 시도한 것 같은데 그 전략이 그대로 맞아떨어졌습니다!]
[이강현 참가자가 흰색 오라조차 없긴 했어도, 세르반테 참가자와 기여도를 나누는 바람에 이립 참가자 역시 아직 흰색 오라를 띄우지 못한 상태였으니까요! 날카로운 판단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말씀드리는 순간 1팀, 끝내 사도천 참가자를 밀어내고 하단 1차 요새를 파괴하는 데에 성공합니다! 동시에 2팀이 상단 1차 요새를 부수기는 했지만 남궁강룡 참가자의 표정이 밝지 않습니다! 그들도 아는 거죠. 까딱하다간 비벼질 수도 있겠다는 걸요!]
반격의 시작이었다.
-각성으로 차원최강 4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