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 주목
DBC의 편집실.
거대한 화면에 원형경기장에서 벌어지는 싸움이 비추어진다.
어느 조는 오브를 두고 각축전을 벌이기도 했고.
또 어느 조는 압도적인 강자를 상대하고자 나머지 참가자들이 힘을 모으기도 했다.
그리고 그 광경을.
[호오…….]
로독은 눈을 반짝이며 지켜보고 있었다.
아삭-
팝콘이 곁들여져서인지 오늘따라 더욱 흥미진진했다.
비슷한 양상으로 흘러간 조가 단 하나도 없어서인지도 몰랐다.
개싸움, 독주, 반전, 언더독의 반란…….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는 것만 같았지, 그 양상은 각기 달랐던 것이다.
하나 아쉽게도 시간은 한정되어 있었고, 각 조의 미니 게임이 하나둘 끝나간다.
[1조의 미니 게임이 종료되었습니다.]
[5조의 미니 게임이 종료되었습니다.]
…….
[4조의 미니 게임이 종료되었습니다.]
…….
[쩝. 할 수 없죠.]
로독은 입맛을 다셨다.
미니 게임이 끝나간다는 게 아쉽긴 했어도 이 정도면 만족스러웠다.
-벌써 끝난 거?
-아쉽다 미션 마렵다
-DBC에다가 후원하면 더 보여주는 거임?
-후원 ㄱㄱㄱ
…….
쉴 새 없이 올라오는 시청자들의 채팅을 보면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로독은 입을 주욱 찢으며 외쳤다.
[시청자님들, 저도 너무 아쉬운 일이나, 어쩔 수 없답니다. 그럼 저희가 놓친 게 있을지도 모르니, 순위를 확인해 볼까요?]
로독과 시청자들이 관전한 화면은 각 조의 미니 게임을 하이라이트 형식으로 송출한 것이었다.
때문에 그들이 미처 파악하지 못한 반전이 있을 수도 있었다.
팟-
로독이 손을 휘젓자 화면에 미니 게임을 마친 각 조의 순위가 출력된다.
[1조]
1. 남궁강룡
2. 자니스 라르케치
…….
[2조]
1. 란 레이센
2. 아이작
…….
[5조]
1. 사도천
2. 연청
3. 이사크
…….
[역시…… 본선진출조의 강세가 두드러지긴 하군요.]
미니 게임의 1등을 차지한 본선진출조들을 본 로독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퍼포먼스적인 측면이 강했던 이전 미션과는 달리, 앞으로는 점차 개인의 강함이 중시된다.
남다른 무력과 ‘격’을 지닌 주요 차원 출신의 강세가 두드러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때.
[7조]
1. 이강현
2. 이현
3. 카로크 살리스
4. 백청
5. 이립
[흐음?]
7조의 순위를 확인한 로독이 눈매를 좁혔다.
[분명 이현이 1등을 할 거로 보였었는데……?]
마지막에 봤을 때 분명 이강현은 이현에게 일방적으로 밀리고 있었다.
그런데 1등을 차지한 게 이강현이라니.
당연하게도 그 사실에 놀란 건 로독만이 아니었다.
-다시 봅시다!
-돌려보면 안 됨?
…….
리플레이를 원하는 시청자들의 요구가 폭증했다.
[하하, 알겠습니다. 바로 돌려보도록 하죠!]
로독도 같은 생각이었기에 그는 망설이지 않고 7조의 미니 게임을 돌려보았고.
잠시 후.
[하하하하! 동귀어진이라니! 하하하!]
박수를 쳐대며 웃음을 터뜨렸다.
‘본인의 몸’, 즉 살을 내주고 ‘기여도’라는 뼈를 취한 이강현과 깔끔하게 패배를 인정하며 자결한 이현의 모습은 그 정도로 그를 기쁘게 했다.
-와…….
-진짜 독하네……. 저걸 의도한 건가?
-지난번부터 느꼈던 건데 이강현은 악으로 깡으로 하는 느낌임. 그게 지금까지 잘 먹히고 있고.
-좋은 승부였다…….
…….
시청자들도 제각기 감상을 내뱉으며 흠뻑 빠져든 모양새였다.
-잘 몰랐는데, 이현은 ㄹㅇ로 남궁강룡이랑 싸워볼 만하겠는데?
-솔직히 실력은 이현이 훨 강함. 방심만 하지 말지
-그래도 결과적으론 방심했자나요. 이강현이 더 전략을 잘 짰음.
-이현이 여유 부리면서 느긋하게 가서 진 거임 ㅇㅇ 이강현은 잘 노렸고
분위기가 과열되려는 낌새를 보이자 로독은 시청자들을 진정시켰다.
[자, 자. 그렇게 싸우실 것 없습니다! 둘 모두 훌륭한 승부를 펼쳤으니 말이죠! 갑론을박보다는, 박수를 받아 마땅하지 않겠어요?]
-그건 ㅇㅈ
-인정합니다
-그건 맞지ㅇㅇ
시청자들이 가라앉는 걸 확인하며 로독은 화면을 주시했다.
‘이번 미니 게임도 그럭저럭 잘 뽑혔군.’
사실 인간종 예선은 예상보다 더 순항하는 중이었다.
언제나 최고의 인기를 누리는 악마나 요괴, 용에 비할 수는 없었지만, 당초 예상되던 하위권을 벗어나 꾸준히 중위권에 머무르고 있던 것이다.
로독은 그 이유를 뚜렷한 개성을 가진 참가자들이 나타났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지금 시청률은 나쁘지 않지만…….’
더 많은 흥행을 위해서는 시청자들이 몰입하면서 응원할 참가자가 필요했다.
압도적인 힘을 가지며 쓸어버리는 참가자가 아닌, 고군분투하면서도 악착같이 살아남는 참가자가.
거기에 그 참가자가 군소차원 출신이기까지 한다면 더할 나위 없으리라.
‘지난 미션까지만 해도 긴가민가했는데, 두 번째 미션에서도 이강현이 이런 퍼포먼스를 보여준다면…….’
여러 생각을 하며 로독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럼 오늘의 중계는 여기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진행된 미니 게임은 편집을 거쳐 DBC 게시판에 업로드될 예정이니, 많은 시청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러나 말을 하면서도, 로독의 시선은 이강현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이강현의 이름이, 본격적으로 로독에게 각인되는 순간이었다.
* * *
강현이 다시 눈을 떴을 때는.
[---!]
[---!]
[---…….]
눈앞에서 메시지들이 번쩍이고 있었다.
“으음…… 아!”
순간 미니 게임이 생각난 강현은 벌떡 일어났다.
빠르게 정신을 차린 그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그가 미니 게임의 원형경기장이 아닌 숙소의 침대에 누워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끝났구나.”
아무래도 정신을 잃은 사이 미니 게임이 종료된 듯했다.
강현은 이현과의 싸움을 되새겨보았다.
‘더럽게 강했지.’
이현은 강했다.
오브와 가호로 레벨이 4 이상 뻥튀기되어 있었음에도 근접전에선 상대가 안 되었을 만큼.
아마 레벨 40은 넘어야 해볼 만할 것 같았다.
‘그나마 바꾼 전략이 먹혔기에 망정이지.’
원래는 이현과 정면에서 부딪치려 한 강현이었으나, 전투가 시작되자마자 깨달았다.
지금의 그로서는 이기지 못한다는 걸.
그래서 바로 전략을 바꾸어 동귀어진을 노렸는데, 다행히 먹혀들었다.
굳이 하체를 노린 건.
‘내가 캐치한 빈틈을 녀석이 몰랐을 리가 없다.’
상체는 이현이 최소한의 대비를 하고 있을 게 뻔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기습적인 섬광이 이현에게 제대로 적중하면서 그의 예상은 맞아떨어졌다.
‘그 뒤로 어떻게 됐는지는 모르겠다만.’
한 방 먹이고 순보로 최대한 뒤로 물러났던 것까지는 기억이 났지만, 그게 마지막 기억이었다.
‘메시지들을 보면 알겠지.’
강현은 쌓인 메시지들을 확인했다.
[정신을 잃은 참가자분들이 많아, 일단 숙소로 이동시킨 뒤 메시지로 대체합니다!]
첫 줄을 읽자마자 누가 보냈는지를 알 수 있었다.
[하하, 다들 미니 게임에 대한 개념이 잡히신 것 같아 이 로독은 기쁘기 그지없답니다! 참가자분들의 미니 게임은 아주 재미있게 보았어요!]
[하지만 여러분들이 알아두셔야 할 게 있답니다! 지금부터 그걸 말씀드릴 테니, 부디 집중해 주시길!]
[첫 번째, 본 미션은 미니 게임에서보다 오브의 중요성이 더욱 강화됩니다! 더 많은 기여도를 줄뿐더러, 얻는 힘 또한 대폭 강화될 예정이랍니다!]
[두 번째, 참가자들을 쓰러뜨려도 기여도를 얻지 못했던 미니 게임과는 달리, 본 게임에서는 참가자를 쓰러뜨리는 걸로도 기여도를 얻을 수 있답니다!]
[마지막으로, 다음 미션은 이틀 뒤! 탈락자가 몇 명일지는 당일 발표할 예정이오니, 그때까지 오늘의 바탕으로 최선을 다해 준비해 주시길 바랍니다! 여기까지 로독이었습니다!]
로독의 공지사항은 거기까지였다.
메시지들이 더 있었으나, 강현은 나머지 메시지들은 나중에 확인하기로 했다.
그도 그럴 게.
스르륵-
“깨어나셨군요.”
곧게 솟은 두 뿔.
장대한 체구.
어느새 그의 옆에 루드스가 나타나 있었으니까.
안 그래도 한번 찾아가려던 와중에 루드스 쪽에서 먼저 와주다니.
강현에게는 좋은 일이었다.
“미니 게임은 잘 봤습니다. 꽤 험한 꼴을 당한 걸로 보여 와봤습니다. 아무리 현실의 일이 아니라지만, 정신적인 영향을 주는 경우가 있으니까요. 괜찮아 보이니 다행입니다.”
루드스가 운을 뗐다.
“못 보신 마지막 장면은 공동 훈련장에서 볼 수 있을 겁니다. 한번 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죠.”
“아, 감사합니다.”
강현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물었다.
“류트는 잘하고 있습니까?”
“미니 게임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지 못했지만……. 나름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도와준 보람이 느껴진달까요.”
그 말을 들은 강현은 루드스에게 들어야 할 게 있었다는 걸 떠올렸다.
첫 번째 미션이 시작되던 날, 루드스는 로독의 눈을 피하면서까지 류트를 데려가라 말해주었다.
그 덕에 첫 번째 미션에서 뛰어난 활약을 보일 수 있었다.
강현은 나직이 말을 꺼냈다.
“그날 그렇게까지 도와준 이유가 뭐죠?”
“아, 그러고 보니 그걸 말해드리기로 했었지요.”
“예.”
루드스는 짤막하게 설명을 해주었다.
“간단히 말해, 모든 정령은 드루이드의 친우이기 때문입니다.”
“친우……?”
“예, 또한 제23 정령계에서 벌어진 바위 거인의 폭주는 ‘현실’이었습니다. 따라서 최대한 강한 참가자들이 미션에 참가하길 원했습니다.”
강현은 눈을 크게 떴다.
로독은 말했었다.
인어와 싸웠던 튜토리얼은 과거의 일을 재생한 것이라고.
해서 첫 번째 미션도 비슷한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란다.
“그럼 만약 바위 거인을 물리치지 못했다면…….”
“그 피해는 고스란히 제23 정령계가 감당해야 했겠죠.”
루드스가 씁쓸하게 말했다.
“물론 결과적으로는 잘 풀렸습니다만, 더 비욘드를 너무 전능하게 생각하지는 않는 게 좋을 겁니다. 이번에 새로 받았다는 ‘단계’도 마찬가지이고요.”
“거기에 문제가 있습니까?”
루드스가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잘 들으십시오. 진정으로 신경 써야 할 건 본인의 무력입니다. 정확히는 무력과 ‘격’의 조화라고 해야겠군요. 무력과 함께 ‘격’을 올려야 하지, ‘단계’가 선행되어서는 안 됩니다.”
“음…….”
이해가 잘 가지 않는 말이었다.
루드스가 설명을 이어갔다.
“많은 참가자들이 ‘단계’를 올리기에 급급해하고 있습니다. 많은 땀과 노력을 동반해야 하는 무력과는 달리, ‘격’은 에테르를 흡수하기만 되는 것처럼 보이니 말입니다. 하지만 그게 바로 함정입니다.”
“……!”
“겉으로 보기에만 그럴 뿐이죠. ‘격’이 무력을 웃돌게 되면……. 인어들과 바위 거인의 모습을 떠올려 보면 제 말의 의미를 알 수 있을 겁니다.”
인어들과 바위 거인은 이성과 이지를 잃은 채 에테르에 매몰되었다.
여기에 루드스는, 무력을 등한시하고 ‘단계’를 올리는 데에만 집착한다면 참가자들도 그렇게 될 수 있다고 말하고 있었다.
“음…….”
강현이 심각한 기색을 내보이자 루드스가 표정을 풀었다.
“아직 당신이 거기까지 신경 쓸 필요는 없습니다만, 잊지는 말아주십시오. 한계를 넘어서면서까지 취한 ‘격’은 본인을 파멸시킬 뿐이라는 걸.”
그 말을 끝으로 루드스가 자리에서 일어나 문으로 다가갔다.
강현은 급히 말했다.
“그 한계는 어떻게 알 수 있죠?”
“……아마 때가 되면 알 수 있을 겁니다.”
싱긋 웃은 루드스가 문을 닫으며 덧붙였다.
“보아하니 보상을 수령 안 하신 것 같은데, 말했다시피 당분간은 상관없을 겁니다. 걱정 말고 취하시길.”
탁-
루드스가 나가고, 강현은 방금의 대화를 되짚어보았다.
“무력과 ‘격’의 조화라…….”
강현은 본능적으로 루드스가 그 말을 해주기 위해 왔다는 걸 직감했다.
인어들과 바위 거인의 모습을 생각하면 절대 등한시할 문제는 아니었다.
“……그전에 미션부터 통과해야겠지만.”
이번 미니 게임은 어찌어찌 잘 넘겼다만, 더 강해져야 했다.
그래야 보다 확실하게 생존할 수 있을 터였다.
남은 시간은 이틀.
그 시간 동안 최선을 다해야 했다.
그러려면 강현이 속했던 7조만이 아니라, 다른 조의 미니 게임이 어땠는지도 파악할 필요가 있었다.
‘훈련장에 가 봐야겠군.’
물론, 그전에 할 일이 존재했다.
강현은 밀린 메시지를 주욱 내렸다.
[보상을 지금 수령하시겠습니까? (Yes/No)]
Yes를 누르자.
[보상으로 소환단 1정이 지급됩니다.]
툭-
허공에서 콩알만 한 단약이 튀어나온다.
[소환단]
-무림에 속한 소림의 영약이다.
내공 증진과 더불어 정신을 맑게 해주는 효과가 있다.
동시에.
[취할 수 있는 에테르가 감지되었습니다. 에테르를 취하시겠습니까?]
[현재 취한 에테르의 양(18/150)]
메시지가 나타난다.
안 그래도 소환단을 보고 어떻게 섭취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는데, 때마침 떠올라 주다니.
소환단 한 알로 ‘단계’가 오를 것 같지는 않았으나, 유의미한 에테르 수치의 상승은 기대해 볼 만했다.
‘그래도 소환단인데 적게 오르지는 않겠지.’
강현은 소환단을 향해 손을 가져갔다.
스아아-
소환단으로부터 반짝이는 빛이 흘러나와 강현의 몸에 깃들어간다.
“…….”
강현은 눈을 감고 에테르를 받아들였다.
방이 반짝이는 빛으로 물들어가는 가운데.
[@#$을 일부 충족했습니다.]
짤막한 메시지가 떠올랐다 사라졌지만, 눈을 감은 강현은 보지 못했다.
…….
[[email protected]#에 한 걸음 가까워집니다.]
* * *
그로부터 몇 시간 뒤, 강현은 눈을 떴다.
[현재 취한 에테르의 양(118/150)]
앞을 보자, 취한 에테르의 양이 일렁이는 중이었다.
강현은 에테르의 양을 확인했다.
“나쁘지 않네.”
예상했던 대로 ‘단계’를 올리지는 못했지만, 소환단 한 알로 무려 100이나 되는 에테르가 채워졌다.
이 정도면 괄목할 만한 성과라고 할 수 있었다.
‘이제 공동 훈련장에 가 볼까.’
미니 게임이 어떻게 끝났는지를 확인해야 했다.
강현이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때였다.
“우웩.”
느닷없이 코를 찌르는 악취가 풍겨 나오는 게 아닌가.
정화시설로 가기 직전의 오수를 냅다 끼얹은 듯한, 구역질이 반사적으로 나오는 냄새였다.
“뭔 냄새야?”
눈살을 잔뜩 찌푸린 그는 코를 틀어막은 채 주변을 둘러보았고.
“뭐, 뭐야.”
당황한 얼굴을 해 보였다.
그도 그럴 게, 그 악취의 근원은 그 자신이었으니까.
정확히는.
“……이게 웬 구정물이지?”
자신에게서 나온 걸로 추정되는 시꺼먼 물이, 입고 있던 옷은 물론이요, 침대보까지 적셔놓은 상태였다.
찝찝함에 강현은 얼굴을 구겼다.
‘이것도 소환단의 효과인가?’
소환단의 효과인지, 다음 ‘단계’를 위한 준비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몸에서 구정물을 나오게 하다니.
체내의 노폐물이라도 배출한 걸까.
‘구정물을 내보낸 게 무슨 이점이 있는지는 모르겠다만…….’
썩 유쾌한 기분은 아니라고 생각하려던 찰나.
“어?”
그는 몸 상태가 평소와 다르다는 걸 깨달았다.
몸이 훨씬 가벼워진 데다, 단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상쾌함이 전해져 온 것이다.
마치 막혀 있던 몸 구석구석의 숨구멍이 뚫린 느낌이랄까.
‘단계’가 상승하면서 감각이 확장되는 것과는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몸 안의 노폐물이 빠져나옴으로써 이런 개운함을 느끼게 된 거라면, 충분히 납득이 된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읏차.”
강현은 달라진 몸을 만끽하며 일어났다.
그리고 화장실로 이동하여 몸을 깨끗이 씻어냈다.
샤워를 하고 다시 몸의 냄새를 맡아보았다.
살짝 악취가 남아 있었으나 참을 만했다.
‘방은 어떡하지?’
순간 자신의 노폐물로 오염이 된 침대가 떠올랐지만.
‘에이 씨, 몰라.’
그건 나중에 생각하기로 했다.
만약 자신이 치워야 하는 거라면 끔찍할 것 같았다.
“……공동 훈련장으로 이동한다.”
[공동 훈련장으로 이동하시겠습니까? (Yes/No)]
‘그래도 귀족이 쓸 법한 방인데 청소부 한 명은 있겠지.’
강현은 작은 기대를 하며 Yes를 눌렀다.
* * *
공동 훈련장으로 이동한 강현은 곧장 기록열람실을 찾았다.
기록열람실에서 지난 미션들을 돌려볼 수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기록열람실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걸어가면서 주변을 둘러보는데, 남아 있는 참가자들 대부분이 온 듯 바글바글했다.
강현은 그 이유를 쉽게 짐작했다.
‘두 번째 미션의 규칙이 바뀌어서 그런 거겠지.’
미니 게임이 끝나고 로독은 몇 개의 공지사항을 남겼고, 그중 다가올 미션에 직접적으로 적용되는 건 두 가지였다.
첫째, 오브를 더욱 강화하겠다.
둘째, 본 미션에서는 참가자들을 쓰러뜨려도 기여도를 얻을 수 있도록 하겠다.
명백히 의도가 보이는 조치들이었다.
‘오브 걸고 죽어라 싸워봐라 이건가.’
더 비욘드는 던전의 괴수와 함정으로 착실하게 기여도를 올리는 게 아니라, 참가자들이 벌이는 치고받는 싸움을 원하는 게 분명했다.
이해가 가지 않는 건 아니었다.
‘더 자극적일수록 더 많은 시청자가 볼 테니까.’
당연하게도, 거기에 참가자들을 위한 배려는 없다.
더 비욘드는 약한 참가자를 키워주는 프로그램이 아니다.
스스로 강해지지 못하면 그대로 죽거나, 탈락할 뿐이다.
다들 그걸 알기에 훈련에 매진하는 것이리라.
‘에테르 연공실도 꽉 찼네.’
기록열람실로 가는 길에 에테르 연공실을 볼 수 있었는데, 열 명 가까이 되는 참가자들이 줄지어 있었다.
무력보다는 에테르로 ‘단계’를 올리는 게 더 빠르다고 판단한 듯했다.
만약 루드스의 말을 듣지 못했다면, 그도 에테르를 취하려는 목적으로 줄을 서 있었을지도 몰랐다.
그렇지만 루드스의 말 덕분에 무력을 절대 외면해선 안 된다는 걸 알게 되었다.
비록 무력을 올리는 건 ‘단계’를 올리는 것보다는 확실히 지루할 터였지만, 강현은 마음을 굳게 먹었다.
‘다음 ‘단계’까지 몇 안 남은 게 아니라면 무조건 무력을 올린다.’
옛말에 인내는 쓰나, 그 열매는 달다고 했다.
루드스의 말을 되새긴 강현은 기록열람실로 들어섰다.
몇 자리는 이미 주인이 있었으나, 다행히 빈자리가 있었다.
[제3 기록열람실, 이강현]
강현은 명단을 작성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1인 독서실처럼 생긴 곳이었는데, 책상에 주먹만 한 구슬이 놓여 있었다.
‘어떻게 쓰는 거지?’
그렇게 생각한 순간.
[기록열람실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메시지가 떠오른다.
[기록구에 손을 갖다 댄 뒤, 재생하고자 하는 미션과 시점을 말씀해 주십시오.]
“어……. 미니 게임 7조의 끝나기 직전 부분을 재생해줘.”
이내 기록구에 영상이 재생되기 시작한다.
강현은 영상에 집중했다.
지이잉-
중상을 입고 순보로 간신히 물러나 쓰러진 자신을 향해, 하반신을 다친 이현이 기어오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그렇게 종료되는 미니 게임.
“…….”
싸움의 끝을 확인한 강현의 얼굴은 좋지 않았다.
“대충 예상은 했다만…… 내가 거의 진 거였군.”
운이 따라주지 않았더라면, 결국 진 건 자신이었을 터였다.
‘역시…….’
상위권 참가자들과의 ‘격차’는 존재한다.
현재의 그는 약하고, 모자란 부분도 많았으니 말이다.
하지만.
‘충분히 따라잡을 수 있어.’
그 격차를 상쇄할 만한 절대적인 강점이 강현에게는 있었다.
‘나는 배우는 스킬을 따로 연마할 필요가 없다.’
시스템은 5레벨마다 새로운 스킬을 준다.
그리고 이는 강현의 <고유 특성>인 <광검제>와 더불어, 단순하면서도 절대적인 성장을 가능하게 했다.
다른 헌터들은 새로운 스킬을 익히더라도 그 스킬에 적응하는 시간이 필요했지만, 이미 다 아는 스킬을 배우는 강현에게는 상관없는 이야기였으니까.
‘무림인으로 치면 화경의 고수가 다시 삼재검법을 배우는 격이겠지.’
한 번 가 본 길을 다시 간다는 것.
이 점이야말로 강현이 가진 압도적인 강점이었다.
다만, 이 강점을 극대화하려면 정보가 필요했다.
지피지기 백전불태(知彼知己百戰不殆)라 했다.
자신은 잘 아는 강현이었지만, 다른 참가자들의 정보가 부족했던 것이다.
차원에 따른 성향의 차이와 전투 패턴, [종족 특성]…….
이것들에 소홀한다면, 언젠가 자신의 발목을 잡을 게 분명했다.
따라서 강현은 미션이 시작하기 전까지 정보를 모아볼 생각이었다.
‘어차피 시간은 이틀뿐이다. 성장하는 데에 한계가 있어.’
레벨은 분명 중요했지만, 유의미한 성장을 거두기에는 시간이 여의치 않았다.
현 레벨은 딱 25.
다음 스킬을 배울 30까지는 5나 남았다.
‘격’도 마찬가지로 다음 ‘단계’로 상승하기 위해 요구되는 에테르가 32나 되었고.
차라리 정보를 얻는 게 나았다.
그리고 그 정보를 얻을 최적의 수단이 눈앞에 있었다.
“모든 조의 미니 게임을 확인하고 싶다.”
[1조의 미니 게임부터 재생합니다.]
그렇게 그는, 재생되는 영상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 * *
-지루하다.
-지루하고 밍밍하다
-싸우라고 불러놨더니 하나같이 수련만 하고 있네
-개~~~노잼
-다른 예선이나 보러 갈까. 다른 데는 다르죠?
-ㄴㄴ 다른 종도 다 똑같음. 다 미션만 준비하는 중
-하. 강룡이 싸우는 거 함 보고 싶은데
-난 우리 란.
-난 도천이.
-그 돼지 새끼가 생각이 있으면 지금 팍 치고 나가야 되는데
-ㄹㅇ 괜히 돼지대가리 달고 있는 게 아닌 듯.
-예선 끝날라면 얼마 남지도 않았는데 콘텐츠가 부실하긴 하네;;
-게시판에 글 남기면 되지 않을까여?
-그거 좋다
-내가 보는 예선들 게시판에 싹 남기고 와야겠다. 하차하기 전에 뭐라도 좀 하라고.
-저도 동참할게요.
-나 하고 왔다!
-나도
-ㄴㄷ
-흐음.
-아, 위에 흐음좌 뭐임. 딱 기세 좋았는데. 다시 시작합니다 ㄴㄷ
-ㄴㄷ
-ㄴㄷ
-흐음.
-아, 이 새끼. 거슬리네.
…….
-님들! 이벤트 한대여!
-오! 무슨 이벤트인데요?
-그건 말 안 해줬음. 오늘 내로 한다니까 그때 보면 될 듯
-아 그럼 이따 와야겠네. 잠깐 ㅂㅂ요
-ㅃ
* * *
잠시 후.
“……아직 멀었구나.”
기록구로 모든 미니 게임을 돌려본 강현이 한숨을 내쉬었다.
다른 조를 확인해 본 결과, 자신보다 강해 보이는 참가자가 적어도 열 명은 되어 보였다.
‘그나마 다행인 건 이현이 거기서도 상위권이라는 거지.’
강현이 생각하기에 이현은 상위권 참가자 중에서도 강한 편이었다.
그를 제외한 나머지 여섯 명의 본선진출조와 싸운다고 해도 일방적으로 지지는 않을 듯했다.
이현보다 강한 참가자들이 잔뜩 있을 걸 걱정하던 강현으로서는 가뭄의 단비와 같은 소식이었지만.
‘좋아할 일은 아니야.’
본선에 진출하는 건 오직 일곱.
첫 번째 미션을 통해 7위에 올라서긴 했어도, 더 강해지지 않으면 순위를 유지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강현의 얼굴은 나쁘지 않았다.
현재의 위치와 참가자들의 정보를 얻을 수 있었으니, 어느 정도의 수확은 거둔 셈이었다.
강현은 몸을 일으켰다.
‘슬슬 연무장으로 가 볼까.’
아직도 이현과의 싸움은 생생했다.
그 과정을 복기한다면 큰 도움이 될 터였다.
끼익-
그런데 그가 기록열람실의 문을 열었을 때였다.
“드디어 나왔네.”
“……?”
얼굴을 시꺼먼 두건으로 푹 덮은 참가자가 바로 앞에 서 있는 게 아닌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다가오는 참가자를 본 강현의 눈에 경계심이 서렸다.
더욱이 그 참가자가.
[사도천, 5위]
사도천이라면 더 그래야만 했다.
강현의 경계심을 느꼈는지, 사도천이 두 손을 들어 보인다.
“하하, 그렇게 노려볼 것 없어. 난 그냥 우리가 서로 이득을 볼 제안을 하러 온 것뿐이야.”
“제안?”
여전히 경계심을 풀지 않는 강현을 본 사도천은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그래. 미니 게임에서 네가 쓰던 검에 관심이 생겼거든. 그래서 너만 괜찮으면 내가 가진 검과 바꾸는 게 어떻…….”
“넌 검을 안 쓰는 걸로 알고 있는데.”
강현은 사도천의 말을 끊었다.
조금 전 미니 게임을 돌려보면서 확인한 사도천은 선인이었다.
그것도 형언하기 힘들 만큼 사이한 술법을 쓰는.
한데 그런 그가 수수께끼의 검을 탐낸다?
뭔가 찝찝했다.
“그러지 말고 일단 보기라도 하는 게 어때? 나보단 네가 더 요긴하게 쓸 거 같아서 그래.”
사도천이 품에서 검붉은 검을 건넸다.
수수께끼의 검도 귀한 티가 제법 났으나, 그것과는 비교가 안 될 만큼 화려했다.
[혈룡검]
-천년 묵은 이무기를 벤 전설의 보검이다. 피를 먹일수록 강한 위력을 내뿜는다.
특수 기능 : 참룡섬, 용살자(상시 발동)
참룡섬 : 광범위한 찌르기를 시전한다.
용살자(상시 발동) : ‘용종’에게 두 배의 피해를 입힌다.
특수 기능 역시, 보호막 하나 딸랑 있는 수수께끼의 검에 비해 엄청난 기능들이었다.
“설명이 부실해서 그렇지, 참룡섬 한 방이면 웬만한 마을 하나는 날아가.”
“…….”
“괜찮지? 이거면 바꾸기에는 충분하지 않아?”
이미 바꾸는 건 확정이라고 여기는지, 온통 두건에 가려진 사도천의 얼굴에서 유일하게 보이는 입가가 위로 솟는다.
그때였다.
[긴급 공지! 긴급 공지!]
사방에서 로독의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참가자분들의 원활한 트레이닝을 위해, 방송국 차원에서 이벤트 매치를 열 예정입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로독의 목소리를 들은 사도천이 얼굴을 구겼다.
“……하필 지금 방해가 들어오다니. 빌어먹을 돼지 놈.”
중요한 교환의 순간에 방해를 받은 셈이었으니 짜증이 날 만도 했다.
그러나 그것과의 별개로, 애초에 강현의 고민은 길지 않았다.
강현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는…….”
강현이 말을 하려던 순간이었다.
“잠깐.”
돌연, 뒤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강현이 뒤를 돌아보자, 웬 아저씨 같은 인상의 기사가 다가와 있었다.
피부는 거칠었고, 얼굴 곳곳에 수염이 듬성듬성 나 있었다.
거기에 낡고 녹슨 검과 갑옷까지.
겉모습만 본다면 떠돌이 기사를 연상케 했다.
만약 눈빛에서 맑은 정광이 뿜어 나오지 않았더라면, 정말로 그렇게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방금 미니 게임을 돌려본 강현은 잘 알고 있었다.
눈앞의 기사를 결코 무시해선 안 된다는 걸.
[세르반테, 6위]
사도천과 마찬가지로 자신보다 높은 순위의 참가자인 데다, 순위에 걸맞은 강함을 갖추고 있다는 걸 확인했기 때문이다.
다만.
‘갑자기 왜 끼어든 거지?’
그와 별개로 왜 자신과 사도천의 대화에 끼어들었는지에 대한 의문은 존재했지만.
그 의문은 금세 해소되었다.
“이…… 대가리 텅텅 빈 늙다리 같으니라고! 왜 또 와서 방해질이냐!”
사도천이 불같이 화를 내기 시작한 것이다.
하나 사도천이 화를 내든 말든, 세르반테는 아랑곳하지 않고 강현만을 응시했다.
“사도천의 말을 듣지 말게. 놈의 감언이설에 속아 낭패를 본 참가자들이 한둘이 아니니.”
“그…….”
강현이 말을 하려는데.
“빌어먹을 늙은이! 가만두지 않겠다!”
강현의 얼굴을 본 사도천은 이미 원활한 물물교환은 물 건너갔다고 여겼는지, 욕을 퍼부으며 사라져 갔다.
멀어지는 사도천을 확인한 세르반테가 미안한 표정을 해 보였다.
“갑자기 끼어들어 미안하네. 그렇지만 가만히 두고 볼 수 없었어. 사도천이 준다는 걸 덥석 물다가는 큰일 나는 수가 있네. 이미 몇 명 당했고.”
“……어차피 거절하려고 했습니다만.”
강현이 딱딱하게 대답했다.
자신보다 훨씬 나이가 들어 보이는 세르반테여서 그런지, 저절로 존대가 나왔다.
그럼에도 딱딱하게 답한 건 세르반테의 의중을 파악할 수 없어서였다.
‘사도천이랑 사이가 안 좋아 보이기는 하다만…….’
강현을 순수하게 도와주려고 했던 건지, 아니면 단순히 사도천이 싫어서 끼어들었던 건지.
그로서는 세르반테의 진의를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아니, 거절했으면 사도천의 원한을 샀을걸세. 놈은 아주 속이 좁으니까 말이야. 그리고 그렇게 됐다면 피곤해졌을 거고.”
“원한 말입니까?”
“그래, 원한.”
세르반테가 고개를 끄덕였다.
“놈은 생긴 것처럼 지독하고 음침하기까지 하지. 원한을 품은 상대는 악착같이 방해하니 가급적 얽히는 것 자체를 피하는 게 좋네.”
그 말을 듣자 세르반테의 행동을 다시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사도천이 싫기도 하고, 놈이 하려는 게 좋은 짓이 아니라는 걸 알기에 끼어들었다는 거군.’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자칫 사도천의 원한을 살 수도 있었던 순간을 막아준 셈이었다.
“아……. 감사합니다. 그런데 방금 일로 사도천이 저 대신 당신한테 원한을 품은 거 같은데요.”
“그건 걱정 말게나. 아까 놈과 대화한 걸 봐서 알겠지만 난 이미 밉보였으니까.”
세르반테가 껄껄 웃었다.
“그건 그렇고, 놈의 제안을 거절하려 했다니 촉이 좋군. 웬만한 참가자들이 홀라당 넘어가는 걸 본 게 한두 번이 아닌데 말일세.”
“아, 그건…….”
강현이 사도천의 제안을 거절하려 한 이유는 간단했다.
사도천이 내민 혈룡검은 틀림없는 명검이긴 했으나, 그런 명검을 선뜻 준다는 게 수상쩍었다.
‘피를 먹일수록 강한 위력을 내뿜는다는 것도 좀 그렇고.’
그뿐만이 아니었다.
사도천 정도의 참가자가 수수께끼의 검을 노리는 이유가 있을 터였다.
‘내가 모르는 뭔가를 알고 있는 게 분명해.’
강현은 수수께끼의 검에 대한 정보를 떠올려 보았다.
‘천마대전의 유물이고, 하위 차원에서는 부러지지 않는다고 했었지. 보호막은 하루에 한 번 쓸 수 있었고.’
사도천은 여기서 강현이 알지 못하는 진가를 본 것이리라.
그리고 ‘천마대전’, ‘밝혀진 게 없다’ 같은 문구를 보았을 때, 수수께끼의 검에 밝혀지지 않은 무언가가 남았다는 건 거의 확실했다.
물론 이걸 다 설명할 필요는 없었기에, 강현은 짤막하게 답했다.
“딱 봐도 찜찜했거든요.”
“잘 생각했네. 겉으로 보기에 훌륭한 검이긴 했어도, 놈이 다른 참가자에게 주려던 이유가 있었을 게야.”
세르반테가 강현의 어깨를 팡팡 두드렸다.
“으하하! 괜히 본선진출조가 아니군그래!”
“아, 예…….”
강현으로서는 친한 척을 하는 세르반테가 당황스러웠으나, 이내 그가 진중하게 말해왔다.
“놈도 완전히 간 듯하니, 다시 소개하도록 하겠네. 내 이름은 세르반테 아르몰리우. 제3 검계에서 온 기사지.”
“이강현입니다. 제3 군소에서 왔고요.”
강현은 손을 마주 잡았다.
“자네에게 궁금한 게 많았는데, 이렇게 만나게 되는군.”
“궁금한 거라면……?”
“으하하! 당연히 자네의 무력이지! 그것 말고 이 경연에서 궁금한 게 달리 뭐가 있겠나! 설마 친목 도모라도 하자고 할 줄 알았나?”
세르반테가 배를 잡고 웃더니, 이내 진중하게 말했다.
“자네와 대련 한번 하고 싶은데, 어떤가?”
“……!”
강현은 눈을 크게 떴다.
안 그래도 다른 참가자들의 정보가 필요하던 참이었는데, 세르반테 정도 되는 참가자가 먼저 제안해 오다니.
‘정말 날 선의로 도와준 건지 알 수는 없어도, 실력은 진짜다.’
미니 게임에서 확인한 세르반테의 차원은 검계였다.
무림에서 온 이현과는 다른 종류의 검술을 썼었고.
‘4위도 검계 출신이었지.’
4위인 로프터스 역시 검계에서 왔다는 걸 생각하면, 강현으로서는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강현이 입을 열려던 때였다.
[자, 이벤트 매치의 상세 설명을 보내드리겠습니다아-! 모두 읽어주시길 바랍니다!]
눈앞에 메시지가 나타난다.
[이벤트 매치]
-주제 : 대련
-내용 : 더 비욘드 예선의 이벤트 매치입니다.
더 많은 참가자들의 활약을 원하는 시청자분들의 요청으로 급히 이벤트 매치가 열렸습니다!
참가자들의 현 위치를 기준으로 다섯 개의 그룹을 구성했습니다!
각 그룹마다 대진표가 만들어질 것이며, 참가자들은 대진표에 적힌 순서대로 그룹별 대련장에 소환됩니다.
같은 그룹 참가자들과의 대련을 통해, 한층 풍부한 경험을 쌓아보세요!
-보상 : 차등 지급
-탈락 시 : -
메시지를 다 읽었을 때 즈음, 로독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하하! 메시지는 다 읽어보셨나요?]
[메시지에 적힌 대로 각 그룹은 여섯 명씩 구성되며, 최종 순위에 따라 각기 다른 보상이 지급됩니다! 이벤트 매치이긴 해도 푸짐한 상품이 준비되어 있으니 모두 열심히 임해주시기 바랍니다!]
로독의 말이 이어졌다.
[단, 본 미션을 이틀 남기고 참가자분들이 크게 다치기라도 하면 곤란하겠죠? 따라서 이벤트 매치에서는 지나친 살상기가 제한되며, 일정 이상의 부상을 받았거나 받게 될 참가자는 자동으로 기권 처리 이후 회복실로 이동하게 됩니다!]
[아! 물론 본 미션이 아닌 이벤트 매치이니만큼 기권하거나 설렁설렁 임해도 별다른 불이익은 없습니다! 다만 이 이벤트 매치는 시청자분들의 요청으로 벌어진 것이니, 많은 시청자분들이 보고 계시겠죠?]
‘대충하면 그만큼 투표에서 손해를 볼 거라 이건가.’
결국 시청자들이 잔뜩 볼 터이니, 알아서 잘하라는 말이었다.
[그럼, 대진표를 발표하겠습니다아-!]
팟-
[3그룹]
[<이강현 vs 티그리스 아그리파>, <카로크 살리스 vs 콰살린>, <세르반테 vs 로우크>(승자 부전승 처리)]
대진표가 떠올랐다.
참가자들을 위치별로 묶었다고 했으니, 그의 주변에 있는 참가자들일 터였다.
강현은 그의 상대를 확인했다.
낯설지 않은 이름이었다.
‘티그리스 아그리파라…….’
실전 훈련에서 함께 외눈박이 거인을 상대했던 여마법사였다.
무슨 마법을 썼었는지는 기억나는 게 없었다.
그만큼 평범했다는 뜻이겠지.
“……내 쪽이 부전승이군.”
세르반테가 중얼거렸다.
그의 말대로 세르반테는 한 번만 이겨도 결승에 가지만, 강현은 두 번을 이겨야 결승에 올라갈 수 있었다.
“결승에서 보죠.”
“흣, 먼저 가 있게나.”
강현의 말에 세르반테가 씩 웃었다.
[그럼 이제, 순서대로 대련을 진행하겠습니다아-!]
슈와아아-
[참가자 이강현 확인, 대련장으로 이동합니다.]
빛이 강현을 감싸간다.
예상하지 못한 이벤트 매치였지만, 그는 오히려 좋게 여겼다.
‘기회다.’
조금 전 타 참가자들의 정보를 얻기 위해 미니 게임까지 돌려본 그였다.
아쉽게도 몸으로 부딪쳐가며 파악하는 것보다는 못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다소 갑작스럽긴 했어도 그 기회가 온 것이다.
[준비하세요, 대련이 시작됩니다!]
메시지에 이어 운동장 같은 공간이 나왔고, 강현은 눈앞의 참가자를 마주할 수 있었다.
[티그리스 아그리파, 25위]
수수한 인상에, 칙칙한 남색의 로브.
그의 기억과 똑같았다.
굳이 지난번과 다른 점을 꼽자면, 두 눈에 독기가 서려 있다는 점이랄까.
‘죽어라 달려들 거 같은 눈이군.’
그의 생각은 현실이 되었다.
[스킬, 광검[Lv.6]을 발동합니다.]
강현이 광검을 킨 순간이었다.
“-iatonas!”
그녀가 주문을 외우자 그녀 주위의 땅이 갈라지며 암석 파편들이 둥실 떠오르더니.
쿠구구-
강현이 서 있던 땅이 움푹 꺼지는 게 아닌가.
“……!”
미처 자세를 바로잡기도 전, 암석 파편들이 날아든다.
슈슈슉-
지반을 무너뜨림으로써 암석 파편을 막아내기 어렵게 만든, 나쁘지 않은 구성의 공격이었다.
하나.
‘어중간해.’
파괴력이 강한 것도, 속도가 빠른 것도 아니었다.
[스킬, 순보[Lv.2]를 발동합니다.]
파팟-
강현은 순보를 이용하여 무너지는 지대에서 벗어나면서 암석 파편까지 피해냈다.
“그, 그런!”
티그리스 아그리파가 급히 주문을 외우며 무언가를 하려 했다.
그러나.
[스킬, 질주[Lv.1]를 발동합니다.]
강현은 순식간에 접근해 갔다.
그가 거의 다 다다랐을 때였다.
티그리스 아그리파가 거대한 바위를 소환했다.
쿵-
“죽어!”
바위가 산산 조각나며 파편이 쏘아진다.
그러나.
[스킬, 순보[Lv.2]를 발동합니다.]
강현은 그녀의 뒤로 이동한 상태였다.
[스킬, 섬광[Lv.4]를 발동합니다.]
그렇게 찌르기가 그녀의 등에 들어가려는데.
[티그리스 아그리파의 패배.]
[대련에서 승리하셨습니다.]
슈와아-
메시지와 함께 그녀의 몸이 사라진다.
‘이렇게 기권패 한다는 거였구만.’
그 바람에 허공을 찌른 강현이었지만, 얼굴은 나쁘지 않았다.
‘쉽다.’
비록 25위이긴 했어도, 티그리스 아그리파를 그야말로 압살해 버렸으니까.
그녀와의 대련으로 강현은 20위권 참가자의 수준을 대강 파악할 수 있었다.
‘다음 상대는…….’
콰살린과 카로크 살리스 중 승리자였다.
슈와아-
잠시 기다리자, 조금 떨어진 곳에 참가자가 나타났다.
[콰살린, 15위]
콰살린은 늑대와 인간을 합친 걸로 보이는 수인족이었다.
‘15위라. 좋은데.’
순위도 적당했고, 티그리스 아그리파와는 달리 무투파로 보이는 것도 마음에 들었다.
[준비하세요, 대련이 시작됩니다!]
메시지를 본 강현이 달려들려던 때였다.
[@#$이 일부 충족됩니다.]
[스킬, 여명의 눈[Lv.2]을 습득합니다.]
“……?”
뜬금없이 시스템 메시지가 떠오른다.
[스킬, 여명의 눈[Lv.2]을 발동합니다.]
“어?”
동시에, 콰살린의 ‘약점’이 보이기 시작했다.
목, 미간, 명치, 고간 등, 덩치 큰 콰살린의 곳곳이 황금빛으로 반짝인다.
모두 콰살린의 ‘약점’이 분명했다.
강현이 대강 짐작하고 있는 곳들이긴 했으나,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왜 보이는 거지?’
그보다는 뭐가 달라졌길래 여명의 눈의 레벨이 올랐는지를 파악해야 했다.
‘무력…… 은 아니겠고.’
콰살린은 15위, 티그리스 아그리파는 25위다.
무력의 차이가 여명의 눈 레벨 업의 열쇠라면, 티그리스 아그리파를 봤을 때 여명의 눈의 레벨이 올랐어야 했다.
“음.”
달려들 것만 같던 강현이 가만히 보고만 있자, 콰살린이 눈살을 찌푸린다.
“지금 뭐하는 거지? 왜 가만히 있는…….”
“너, ‘단계’가 어떻게 되지?”
강현이 물었다.
여명의 눈에 관련된 단서를 찾는 건 그에게 무척 중대한 일이었다.
무력의 차이가 아니라면, ‘격’의 차이가 유력했기 때문이다.
해서 질문을 한 것이었는데, 콰살린은 다르게 받아들인 듯했다.
“하. 순위가 낮다고 무시하는 건가? 어이가 없군.”
크르르…….
그르렁거리며 자세를 낮추더니.
“그딴 시답잖은 질문은…… 날 쓰러뜨리고 나서나 물어봐라!”
쾅!
엄청난 속도로 날아든 것이다.
[스킬, 순보[Lv.2]를 발동합니다.]
강현은 그 즉시 순보를 이용하여 훌쩍 물러났다.
콰우욱!
콰살린의 손톱이 강현이 있던 허공을 벤다.
섬뜩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걸 본 강현이 흠칫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손톱 길이가…….’
방금까지만 해도 딱히 길지 않았는데, 어느새 20㎝는 훌쩍 넘어 보이는 길이가 됐다.
‘달려들면서 꺼낸 건가.’
날카로움도 날카로움이었지만, 안쪽이 갈고리처럼 파여 있었다.
긁히기라도 하면 고통이 극심할 거로 보였다.
강현은 여명의 눈에 대해서는 나중에 생각하기로 했다.
단 한 번의 공세였음에도 느낄 수 있었다.
눈앞의 콰살린은, 조금 전 쉽게 이겼던 티그리스 아그리파와는 아예 수준이 다르다는 걸.
‘대충 짐작은 했다만…….’
미니 게임을 돌려보면서 10위권이 만만하지 않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나 역시, 직접 싸워보는 것과는 천지 차이였다.
“도망치지 마라!”
쾅!
콰살린이 다시 한번 쇄도해 온다.
[스킬, 질주[Lv.1]를 발동합니다.]
이번에는 강현도 피하지 않았다.
콰살린에게 마주 달려가며 검을 휘둘렀다.
[스킬, 참격[Lv.2]을 발동합니다.]
흩뿌려진 세 개의 백광이 콰살린의 목, 명치, 고간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상단과 중단, 하단을 한꺼번에 노린 예리한 공격이었지만.
“흥!”
콰살린은 어렵지 않게 손발톱에 기이한 푸른 기를 덧씌워 그것들을 받아쳤다.
콰콰쾅!
백광과 청광이 충돌하며 폭음이 일어난다.
강현과 콰살린은 거기에 아랑곳하지 않고 검과 손발톱을 맞부딪쳐 갔다.
챙! 채챙! 쾅!
‘이건 뭐 살쾡이도 아니고.’
자신보다 덩치가 훨씬 큰 콰살린이다.
해서 둔할 수도 있겠다고 여겼는데, 그런 생각이 무색하게도 더없이 날렵했다.
치고빠지기를 정신 사납게 반복하는데, 그 모습이 한 마리의 맹수와 같았다.
양손, 양발을 모두 자유자재로 다루는 콰살린이었기에 그렇게 느끼는 건지도 몰랐다.
하지만.
‘할 만해.’
이현에 비하면 훨씬 상대할 만했다.
이현과는 다르게, 콰살린은 본능에 몸을 맡기는 스타일이었다.
그래서인지 필요 이상의 힘이 들어간 동작이 잦았고, 유려하다기보다는 단순했으며, 올곧다기보다는 투박했다.
프로 복서를 상대하다가 길거리 깡패를 상대하는 느낌이랄까.
리얼에서의 PVP로 실전 위주 싸움을 해온 강현에게 적합한 상대였다.
팟-
무게중심을 앞으로 이동시킨 콰살린이 그대로 왼손을 내찔러 온다.
쐐액!
손톱들이 위협적으로 번뜩였다.
오른팔에 잔뜩 힘이 들어가 있는 걸로 보아, 강현이 물러난다고 해도 따라붙으며 공세를 퍼부을 생각으로 보였다.
만약 얼마 전 이런 상황에 처했다면, 순보를 연속으로 발동하여 거리를 벌렸을 터였지만.
강현은 물러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게.
반짝-
그에게는 보였으니까.
무게중심이 지나치게 앞으로 쏠린 나머지, 콰살린의 왼쪽 옆구리가 텅 비어 있는 것이.
그가 미처 파악하지 못했던 콰살린의 살짝 무너진 자세를, 여명의 눈이 짚어준 것이다.
1레벨이었을 때는 이런 실시간 약점을 보여주지는 않았었는데, 2레벨이 되면서 생겨난 변화인 듯했다.
공격할 곳이 훤히 보이는데 다른 행동을 취할 이유가 없었다.
“죽어랏!”
콰살린의 쭉 뻗은 손톱이 코앞까지 다가왔을 때.
홱-
강현은 몸을 틀어 손톱을 살짝 피해내면서 콰살린의 옆구리를 베어냈다.
“크윽?!”
비록 검날이 들어가기 직전 콰살린이 급히 몸을 트는 바람에 깊게 베어내지는 못했어도, 살을 갈라내는 손맛이 전해져 왔다.
‘꽤 아플 거다.’
과연, 옆구리를 부여잡은 콰살린이 주춤거리며 뒤로 빠지려는 모습을 보인다.
강현은 재정비할 틈을 줄 마음이 없었다.
[스킬, 순보[Lv.2]를 발동합니다.]
순보로 따라붙으며 연이어 공격을 이어나갔다.
“크으윽!”
어깨, 무릎, 쇄골, 허리…….
콰살린이 크고 작은 상처들을 입어가기 시작했다.
“크르르-!”
이대로는 도저히 안 되겠다고 판단했는지, 콰살린이 짐승 같은 소리를 내며 왼팔을 휘둘러 온다.
여명의 눈을 쓰지 않아도 빈틈투성이인 자세였다.
‘자포자기했나.’
강현이 그렇게 생각한 순간이었다.
쿠드드득-
돌연, 콰살린의 양팔이 점점 커지는 게 아닌가.
비단 휘둘러 오는 왼팔뿐만이 아니라 오른팔까지 삽시간에 불어났고.
‘……거대화?’
이내 쇠창살만 해진 손톱들이 덮쳐온다.
“……!”
강현은 티그리스 아그리파를 마무리했던 것처럼 순보로 뒤를 잡는 걸 고려해 보았다.
하나 괜히 오른팔까지 거대화한 게 아닌지, 자신이 뒤로 파고들면 콰살린은 그 즉시 오른팔을 휘두를 기세였다.
‘어쩔 수 없지.’
강현은 휘광을 발동했다.
[스킬, 휘광[Lv.1]을 발동합니다.]
그의 손에서 찬란한 백광이 일어났고.
슈와아-
백광은 콰살린의 길어진 손톱을 웃도는 범위의 방어막을 형성했다.
휘광이라는 스킬은 그 특성상 좁은 범위에 빛을 집중시킬 수도 있었으나, 빛을 퍼뜨려 넓은 범위의 보호막을 형성할 수도 있었다.
‘원래는 쓰기 까다로운 스킬이지만…….’
리얼에서 마스터를 했던 스킬이기에 다루는 데에 문제는 없었다.
카가가각-!
콰살린의 손톱이 휘광의 보호막과 부딪친다.
쩍…… 쩌적…….
빛을 넓게 퍼뜨려서인지, 닿자마자 금이 가기 시작한다.
그러나 강현이 콰살린에게 파고들 시간은 충분히 벌어주었다.
퍽!
순식간에 콰살린에게 파고든 그는 검의 손잡이로 콰살린의 명치를 후려쳤다.
“컥……!”
콰살린이 가슴을 움켜쥔다.
‘역시 기권 처리가 안 되는군.’
비교적 신체가 연약한 티그리스 아그리파와는 달리, 콰살린은 이 정도 공격으로 기권패 처리되지 않았다.
‘제압해야겠어.’
그걸 확인한 강현은 멈추지 않았다.
목과 미간, 고간에 이르기까지.
아까 보였던 약점들을 적당한 세기로 가격했다.
“커거걱…….”
연신 급소를 얻어맞아서인지, 쓰러진 콰살린은 대자로 뻗은 채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했다.
“이젠 물어봐도 되겠지.”
“대, 대체 뭘…… 큭.”
콰살린이 얼굴을 와락 일그러뜨리는 가운데, 강현이 입을 열었다.
“말해, 몇 ‘단계’냐?”
* * *
-캬~ 연출 좋고! 대사 좋고!
-이강현이 콰살린까지는 이기는구나……. 걍 질 줄 알았는데
-나도 첫 번째 미션으로 거품 잔뜩 껴서 질 줄 알았는데 아니네.
-그건 그렇고 단거리 블링크를 계속 쓰는데 저거 사기 아님?
-저거라도 없었으면 상위권 참가자들한텐 비벼보지도 못할 듯
-저거 있어도 다른 본선진출조한테는 개털릴 걸요? 이현한테도 털렸는데
-이강현 잘했으면 좋겠는데 아쉽…….
-그래도 튜토리얼 하다가 [종족 특성]을 깨달은 것치고는 엄청 빠르게 성장하고 있는 거 아닌가요?
-솔직히 몇 년만 더 빨리 깨달았어도 나머지 본선진출조랑 비볐을 거임.
-그럼 이번엔 광탈임?
-그건 모름
-왜 몰라요?
-미션 들어가면 괜찮은 아티팩트들 뿌릴 테니까. 그리고 미션 자체에 워낙 변수가 많기도 하고.
-오, 그럼 본선진출조 말고 나머지 참가자들한텐 다행이네요?
-ㅇㅇ 안 그러면 너무 뻔해서 노잼임. 본선진출조가 다 학살하고 다닐 걸여
-엑? 그럼 아티팩트 못 얻은 참가자는 어떡해요?
-더 비욘드 한두 번 봄? 다 알아서 함요. 걍 관전이나 ㄱㄱ
-아, 네. 그나저나 세르반테는 힘들겠죠?
-당연.
-세르반테한테 1분 컷 안 당하면 잘한 거일 듯.
-ㅜㅜ
…….
-흐음.
-흐음좌 또 왔네
-냅 두셈. 이강현 있는 채널만 오는 거 보면 팬인 거 같은데
-;;;
* * *
[콰살린의 패배.]
[대련에서 승리하셨습니다.]
슈와아아-
강현은 사라져가는 콰살린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혹여 계속 반항하지는 않을까 싶었는데, 협조를 잘 해주었다.
덕분에 ‘단계’부터 시작해서 그의 차원에 대한 몇 가지 질문을 할 수 있었다.
각종 수인들로 구성된 그의 차원은 다들 ‘격’이 낮다고 했다.
오로지 무(武)만을 숭상하기에 정신을 수양할 시간 따위는 없었다나 뭐라나.
즉, 콰살린은 1단계였다.
‘내가 3단계니까…… 두 단계 차이나는 건가.’
강현은 하나의 가설을 세웠다.
‘일단 ‘단계’가 두 단계 이상 차이나면 같은 인간종이라도 여명의 눈이 적용된다고 봐야겠어.’
만약 이 가설이 틀렸다면, 그때 수정하면 된다.
‘그래도 최대한 ‘단계’를 올려야겠어.’
강현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넓은 대련장에는 그밖에 없었다.
다만 콰살린과의 대련이 끝났으니, 머지않아 세르반테가 나타나긴 할 터였다.
‘이벤트 매치라고 했으면서 다른 참가자들은 보지도 못하게 해놨구만.’
흡사 우리에 갇힌 투견들처럼 싸움만 하라고 종용하는 꼴이었다.
두 번째 미션이 이틀 뒤임에도 그 어떤 배려도 양해도 없었다.
보상이 있다지만, 그야말로 철저히 시청자들의 유희를 위한 이벤트 매치였다.
“…….”
누군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듯한 느낌에 그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시청자들은…… 아마 초월자들이겠지.’
딱히 누군가 말해준 건 아니었지만, 강현은 시청자들을 <초월자>라 예측했다.
딱히 대단한 건 아니었다.
전지전능에 가까운 더 비욘드와 DBC.
그런 DBC의 프로듀서면서 시청자들에게는 꼼짝 못 하는 로독.
머리를 달고 있다면 누구라도 예상할 만한 것이었다.
‘초월자라…….’
강현은 자신이 <초월자>가 되어 더 비욘드를 시청한다 생각해 보았다.
“재밌긴 하겠네.”
필멸자들이 어떻게든 올라와 보겠다고 아등바등 싸우는 걸 보면 흥미로울 것 같긴 했다.
한낱 유희에 불과할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그 사실에 누군가는 불쾌하게 여길 수도 있겠지만, 강현은 고깝게 여기지 않았다.
더 비욘드 덕에 시청자들은 흥미를 채우고, 자신은 강해질 수 있다.
그는 강해질 수만 있다면, 다시 신화를 쓸 수만 있다면 기꺼이 투견이 되어줄 의향이 있었다.
‘그리고 언젠가는…….’
강현이 주먹을 움켜쥐었을 때였다.
슈와아-
환한 빛이 감돌며 그의 대련 상대가 나타났다.
[세르반테, 6위]
“여어. 결국 대련을 하게 됐군.”
세르반테가 손을 들어 보인다.
듬성듬성 난 털에 낡아빠진 무구들.
아까 만났던 그대로의 모습이었으나.
“그러게…… 말입니다.”
쿠오오-
강현은 그의 기세가 달라졌음을 느꼈다.
친근한 동네 아저씨 같은 모습은 온데간데없어졌고, 저 지저분한 차림새마저 산전수전 다 겪은 베테랑처럼 보인다.
그러나 여기까지 온 이상 허무하게 패배할 마음은 없었다.
‘그나마 수수께끼의 검의 보호막을 아껴놓아서 다행이군.’
강현은 쓰게 웃었다.
[준비하세요, 대련이 시작됩니다!]
그러고는 땅을 박찼다.
강현이 달려 나갔다.
[스킬, 질주[Lv.1]를 발동합니다.]
각성한 각성자의 신체에 질주까지 더해진, 일반인의 범주를 아득히 벗어난 속도로.
타타타탁-
그 목표는, 대련이 시작되었음에도 긴장은커녕 살짝 웃고 있기까지 한 세르반테.
‘역시 여명의 눈은 안 켜지나.’
여명의 눈이 발동되지 않는다는 걸 확인한 강현은 더욱 속도를 높였다.
강현이 지척까지 다다랐음에도 세르반테는 검조차 뽑아 들지 않았다.
[스킬, 참격[Lv.2]을 발동합니다.]
코앞까지 접근한 강현이 세 개의 백광을 날리자 그제야 검을 뽑아 들었다.
스르릉-
별다른 장식도 없는, 그저 투박하기만 한 검.
강현이 쥔 수수께끼의 검에 비하면 초라해 보이기까지 하는 검이었지만.
카카캉!
참격을 순식간에 튕겨낸 세르반테의 검을 본 강현은 결코 무시할 수 없었다.
정확히는, 세르반테의 검이 아니라 검에 서린 푸른 검기 때문이었다.
쿠오오-
농도부터 예리함에 이르기까지.
무엇 하나 이현의 그것에 비해 꿇리는 게 없어 보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 예감은.
쐐애액-
쾅!
세르반테가 가볍게 휘두른 검을 맞댄 순간 확신이 되었다.
‘큭!’
강현은 속으로 침음을 삼켰다.
미니 게임을 하고 있던 상황이라 처음부터 전력으로 맞부딪쳐왔던 이현과는 달리, 세르반테는 탐색전을 하듯 검을 휘둘러 왔다.
그런데도 손잡이를 쥔 손에 얼얼한 통증이 전해져 왔다.
‘……이현보다 더 묵직하잖아.’
속으로 욕이 절로 나왔지만, 강현은 그걸 내색하지 않고 검을 내찔렀다.
[스킬, 섬광[Lv.4]을 발동합니다.]
광검에 서려 있던 백광이 한층 진해지며 세르반테를 노려간다.
“오, 이게 그 찌르기인가.”
여기에 세르반테는 흥미롭다는 얼굴을 해 보이더니, 검을 역수로 잡은 채 높이 치켜들었다.
그리고는, 내려찍는 듯한 찌르기로 대응해 온다.
“……제1식, [작살 던지기].”
콰아아-
강현의 순백의 섬광과 세르반테의 푸른빛이 만나 폭음을 내뿜었다.
콰쾅!
자욱한 먼지가 일어나는 가운데, 강현이 튕겨나듯 밀려났다.
‘무슨 힘이!’
최대한 버텨보려 했지만, 근력인지 검기인지 모를 무지막지한 힘에 의해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저만치 튕겨나면서도 먼지 속에서 눈을 떼지 못하던 강현이 돌연 검을 치켜들었다.
화악-
먼지를 뚫고 짓쳐 드는 세르반테를 확인했기에.
“으하하하! 좋구만!”
방랑기사의 느낌이 물씬 났어도 나름의 격식은 갖추었던 아까와는 다르게, 지금의 세르반테는 무척이나 신나 보였다.
물론.
“제2식! [파도 베어내기]!”
그의 검에서 뿜어진 초승달 모양의 거대한 검기를 마주하게 된 강현은 전혀 신나지 않았다.
‘이런 미친!’
어찌나 위협적이었는지, 세르반테가 기술명을 말하는 멍청한 짓거리를 하고 있었음에도 전혀 경시할 수가 없었다.
콰우욱-!
집채만 한 초승달 검기가 덮쳐온다.
만약 정면에서 저 검기를 막아서야 했다면 강현은 대경실색을 했을 것이다.
다행히 순보로 피하기에는 무리가 없는 거리였다.
[스킬, 순보[Lv.2]를 발동합니다.]
슈욱-
강현의 신형이 사라지며 조금 떨어진 곳에 나타난다.
그런데 그때였다.
“예상하고 있었다!”
기다렸다는 듯, 번개처럼 몸을 돌린 세르반테가 또 하나의 초승달 검기를 날려오는 게 아닌가.
[스킬, 순보[Lv.2]를 발동합니다.]
[스킬, 순보[Lv.2]를 발동합니다.]
…….
강현은 연이어 순보를 사용하여 피해냈으나, 세르반테도 포기하지 않았다.
“하하! 언제까지 피하나 보자!”
세르반테는 집요하게 초승달 검기를 날려왔다.
그것도 단순히 강현이 이동하고 나서 그곳으로 검기를 날리는 게 아니라, 강현이 도망갈 곳을 예측하며 미리 날려댔다.
후웅-
‘점점 타이밍이 아슬아슬해지고 있어……!’
간신히 검기를 피해낸 강현이 이를 악물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순보만 쓰다가 대련에서 질 것 같았다.
‘어차피 마력이 다 떨어지면 끝이다.’
순보가 마력을 많이 먹는 스킬은 아니나, 쉬지도 않고 사용한다면 언젠가는 마력이 다 떨어질 수밖에 없다.
세르반테가 빈틈을 보일 때까지 기회를 엿보려 했는데, 도저히 그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강현 쪽에서 승부수를 던져야 한다는 말이었지만.
“…….”
그 승부수조차도 마땅치가 않았다.
조금 전 세르반테가 내지른 찌르기를 받아본 결과, 그에 비해 자신의 능력치와 스킬 레벨이 현저히 낮다는 걸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30만 찍었어도…….’
지금 상황에 도움 될 만한 스킬들을 배운다.
그랬더라면 충분히 반격할 여지가 있었을 텐데.
‘……이렇게까지 차이가 날 줄이야.’
세르반테는 6위.
7위인 그와는 고작 한 단계 차이나는 순위였지만, 강함의 차이는 절대 한 단계가 아니었다.
강현은 검을 있는 힘껏 쥐었다.
세르반테는 강하다.
현재의 강현으로서는 이길 수 없겠지.
하나 이길 수 없다고 물러설 수는 없었다.
오히려, 그렇기에 더더욱 부딪쳐야 했다.
부딪쳐서 설령 깨지는 한이 있더라도, 한 줌의 가능성이라도 확인해야 했다.
“후우.”
심호흡을 한 강현은 지난 싸움들을 돌아보았다.
자신보다 약한 상대와 싸운 것보다 그 반대의 경우가 더 많았다.
그 싸움들을 잘 돌이켜보면 활로를…….
“아.”
그러다 문득, 이현과의 싸움을 되새기던 강현의 눈에 이채가 깃들었다.
‘이거라면…….’
가능성이 있다.
딱 한 번, 한 번의 기회만 만들어낼 수 있다면.
승산이 있을지도 모른다.
‘해보자.’
재빨리 계산을 마친 강현이,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 * *
제3 검계의 기사, 세르반테 아르몰리우는 자신에게 달려드는 이강현을 가만히 응시했다.
도망치는 건 포기한 모양이었다.
이렇게 가다간 이도 저도 되지 않을 거라는 판단을 내린 듯했다.
첫 충돌로 근접전으로는 힘들다는 걸 알았을 텐데도 저렇게 다가오다니.
세르반테는 이강현의 판단을 존중해주기로 했다.
파해보법 제2식, [물수제비].
푸른 오러로 뒤덮인 세르반테의 몸이 쏘아지듯 나아간다.
이강현의 백광과 세르반테의 오러가 만나자 폭발음이 터져 나왔다.
쾅!
‘역시 신기해.’
이강현과 검을 교환하는 세르반테가 묘한 눈을 해 보였다.
첫 번째 미션이 끝나고부터 줄곧 이강현에게 관심을 가졌던 그였다.
기록열람실에서 우연히 보게 된 이강현의 성장 속도가 말이 안 되는 수준이라는 걸 알게 되어서였다.
‘실전 훈련과 첫 번째 미션이 달랐고, 첫 번째 미션과 미니 게임에서 또 달랐다. 그리고…….’
지금도 이강현은 끊임없이 강해지고 있었다.
아니, 엄밀히 말해서는 강해지고 있다기보다는…….
팟-
세르반테의 검을 이강현이 절묘하게 흘리며 파고든다.
이강현의 갑작스러운 기습.
“……!”
도저히 얼마 전까지 F등급이라 불리며 멸시당하던 참가자라고는 생각하기 힘든 노련함이었다.
그 기습에 여유롭던 세르반테의 얼굴이 처음으로 흔들렸다.
쾅! 콰쾅!
세르반테가 검에 오러를 더욱 불어넣어 힘으로 밀어내려 했음에도, 이강현은 이를 악물고 기세를 늦추지 않았다.
그래, 바로 이 점이 신기했다.
근력이나 오러는 어딜 봐도 초보 기사의 그것인데, 저 몸뚱어리 속에는 산전수전 다 겪은 능구렁이가 들어있는 것 같았다.
쾅! 콰앙-!
피칫-
이강현의 계속되는 공격에 결국 세르반테의 어깨에 미세한 혈선이 그어졌다.
‘이거 안 되겠군. 가급적 쓰지 않으려 했건만…….’
다른 참가자들에게 노출될까 봐 아끼려고 했는데, 이강현의 끈질김은 결국 절기를 꺼내게 만들었다.
파해검법 제4식, [용오름].
쿠오오-
이강현은 절대 받아내지 못할 오러의 폭풍이 검에 깃들어 간다.
용오름은 오러를 집중시켜 쏘아내는 소용돌이.
잠시 후면, 오러의 폭풍이 전방을 휩쓸 것이다.
‘호오, 오지 않는가.’
들어오지 않는 이강현을 본 세르반테의 눈이 번뜩였다.
용오름은 분명 완성되기까지 시간이 걸리고, 도중에 발동을 취소할 수도 없다.
때문에 겉으로 보기에는 그게 빈틈으로 보일 수도 있다.
어디까지나, ‘겉으로 보기에는’.
실상은 완성되기 전에도 오러를 방출할 수 있어, 빈틈을 노리고 다가왔다가는 역공을 맞기 십상이었다.
해서 이강현이 달려들었다면 끝장을 보려 했는데, 역시나 이강현은 움직이지 않았다.
물론, 그런다고 달라지는 건 없었다.
‘뒤로 물러나는 순간 끝낸다.’
세르반테는 용오름의 발사와 함께 이강현이 몸을 뺄 거라 여겼다.
그리고 그런 그를 단숨에 따라잡아 대련을 마무리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강현은 물러나지도 않았다.
“……?”
의아해하던 세르반테는 납득했다.
지이잉-
어느새 주황빛과 백광으로 이루어진 보호막 두 겹이 이강현을 감싸고 있었다.
‘이현에게 썼던 수법인가.’
세르반테는 미니 게임에서 이강현이 이현에게 보였던 기지를 기억하고 있었다.
마지막 순간 이강현이 방어막을 이용하여 이현의 검의 궤도를 비틀어낸 건 훌륭했다.
‘하지만…….’
이 용오름은 비틀 수 없다.
만약 이강현이 그 방법을 시도한다면 말 그대로 산산이 부서지고 말 터였다.
제아무리 인간이 날고 기더라도, 대자연을 막을 수는 없는 법이었으니까.
쿠콰콰-
그런데 용오름이 완성되려던 때였다.
스윽-
이강현이 물러나기는커녕, 그의 검에 바싹 달라붙는 게 아닌가.
세르반테는 그제야 이강현의 의도를 알아챘다.
‘폭발을……!’
두 겹의 방어막이 용오름과 부딪친다면, 비록 용오름을 막을 수는 없겠으나 상당한 폭발이 일어날 건 자명했다.
바로 앞에서 폭발이 일어난다면 아무리 그라고 해도 무사할 수 없을 거라 생각한 듯했다.
‘발사되기 직전 대포의 입구를 틀어막은 격이군.’
그야말로 감탄이 나오는 판단이었지만.
감탄은 감탄이었고.
폭발은 폭발이었다.
‘고작 대련에서 이런 자폭이라니.’
콰아아-
용오름을 쏘아내며, 세르반테는 이강현의 과감함에 쓴웃음을 지었다.
콰콰콰쾅-!
여태까지와는 비교할 수조차 없는, 대련장을 뒤흔드는 엄청난 폭발이 일어났다.
* * *
슈와아-
환한 빛과 함께 강현의 몸이 투명해진다.
투명해진 몸은 폭발에도 전혀 영향을 받지 않았다.
더 비욘드는 강현이 이 폭발에 휘말린다면 중상에서 그치지 않을 거라 판단된 모양이었다.
그 사실이 신기할 법도 했건만, 강현의 눈은 오직 폭발 너머만을 주시하는 중이었다.
‘먹혔나?’
그의 느낌상, 세르반테도 소환되고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 폭발에 휘말리고도…….’
무사할 리가 없다.
그렇게 생각했을 때였다.
“……!”
온몸이 시뻘게지고 군데군데 그을리긴 했어도, 똑바로 서 있는 세르반테를 보고 강현은 눈을 부릅떴다.
강현과 다르게 세르반테는 소환되고 있지 않다는 것.
그게 의미하는 바는 하나였다.
더 비욘드는, 세르반테가 저 폭발에서도 큰 피해를 받지 않을 거라 여긴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다음에 또 보자고.’
몸이 이동하기 직전, 세르반테는 입 모양으로 말해오며 씩 웃어 보이기까지 했다.
[대련에서 패배하셨습니다.]
[참가자 이강현의 이벤트 매치 최종 순위는 2위입니다.]
[순위에 따른 보상을 정산합니다…….]
패배.
그 사실에, 강현은 얼굴을 와락 일그러뜨렸다.
* * *
-아…… 아깝다.
-센스 진짜 좋았는데 상대가 너무 안 좋았네
-세르반테가 워낙 육각형 타입이어서;;;
-그래도 이 정도면 선방했다 강현아
-흐음.
-솔직히 이강현한테 성장할 시간만 더 있었으면 진짜 몰랐다
-ㅇㅇ 시간이 너무 모자람
-ㄹㅇ루ㅜㅜ
…….
로독은 급히 채팅창을 보던 고개를 뒤로 돌렸고, 고개를 돌리자마자 입꼬리를 길게 찢으며 환하게 웃었다.
웃음을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시청자들의 성화에 어쩔 수 없이 열게 된 이벤트 매치였으나.
‘거의 본 미션급으로 잘 나왔잖아!’
대박을 쳤다.
“하하, 아주 좋아요!”
한참을 끅끅대며 웃던 로독은 겨우 웃음을 진정시키고는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화면을 보았다.
이번 이벤트 매치의 일등공신, 5그룹이 눈에 들어왔다.
본선진출조들이 압도적인 우승을 차지한 다른 그룹들과 달리, 본선진출조끼리 결승을 치른 5그룹에 대한 시청자들의 관심이 폭증했던 것이다.
그 관심은 시청률로 이어져, 로독의 기분을 매우 좋게 했다.
게다가, 기쁜 일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시청률 대박도 대박이다만…….’
이강현의 인기가 점점 높아지고 있다는 점도 고무적이었다.
-빈말 없이 이강현은 본선 가야 돼
-근데 너무 [종족 특성]을 늦게 깨달아서 힘들 듯…….
-시간만 더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
이벤트 매치가 끝난 지금도 이강현의 잠재력과 아쉬움에 대한 열띤 토론이 이어지는 중이었으니까.
“시간이라…….”
로독이 공감하는 내용이기도 했다.
그 뒤 짧은 시간 동안, 로독은 고민을 했다.
이강현에게 적절한 도움이 될 ‘보상’이 무엇일지를.
고민은 길지 않았다.
‘역시, ‘그게’ 좋겠어.’
시청자들이 토해내듯, 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탁-
로독이 손가락을 튕겼다.
스으으-
이강현에게 지급될 2위 보상에, 로독의 약소한 ‘선물’이 더해진다.
얼굴을 찌푸리고 있는 이강현을 보며 로독은 미소를 지었다.
‘부디, 이게 당신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