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차이
[참가자 이강현 확인, 스튜디오로 이동합니다.]
스튜디오로 이동한 강현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슈우욱-
속속들이 참가자들이 소환되고 있었고.
“……!”
다양한 복장을 한 참가자들이 웅성거린다.
각종 갑옷을 비롯하여 로브, 도포, 도복…….
언제 봐도 적응이 안 되는 복장들이었다.
‘뭐, 이젠 나도 별 할 말은 없다만.’
당장 그도 수수께끼의 검과 깃털 갑옷을 고스란히 입고 온 상태였다.
백아영이 준 아공간 주머니를 챙기긴 했지만, 아예 무구를 입고 오는 게 더 편했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를 모르니.’
그가 봐온 로독은, 웃는 얼굴로 참가자들을 불러 모아놓고 바로 미션에 떨굴 프로듀서였다.
그리고 자신은 어느새 거기에 적응해 버렸다.
그는 쓰게 웃으며 참가자들을 훑어보았다.
‘확실히…… 줄긴 했네.’
첫 번째 미션이 끝나고 살아남은 참가자들은 모두 30명.
지난 미션까지만 해도 총 아흔 명 가까이 되는 참가자가 있던 걸 생각하면 확연히 줄어든 숫자였다.
자칫 스튜디오가 확 비어 보일 수도 있었으나, 그걸 옹기종기 모여 있음으로써 커버하고 있었다.
강현은 그중 한 무리에 시선을 돌려보았다.
[이사크, B등급]
[베르데, B등급]
[로우크, B등급]
…….
모두 같은 등급의 참가자들이었다.
그간 같이 생활을 하다 보니 자연스레 뭉치게 된 듯했다.
강현이 그들을 지켜보고 있을 때였다.
스르르-
[이사크, 18위]
[베르데, 21위]
[로우크, 30위]
돌연 참가자들의 머리 위에 적혀 있던 등급이 사라지더니, 순위로 대체된다.
지금쯤 자신의 머리 위에도 이렇게 적혀 있겠지.
[이강현, 7위]
“……!”
참가자들이 거의 다 소환되었는지, 슬슬 스튜디오가 열기를 띠기 시작한다.
강현은 그와 유일한 F등급 동료이자 친분이 있다고 할 수 있는 류트를 찾아보았다.
“……안 보이네.”
그와 정반대의, 스튜디오 중앙에 위치한 기둥 너머에 있는 듯했다.
‘뭐, 알아서 있겠지.’
류트의 성격을 잘 아는지라 약간 신경이 쓰이기는 했다.
하지만 이제 등급끼리 나뉘는 것도 아니겠다, 그가 챙겨줄 의무는 없었다.
‘어차피 곧 로독이 나올 거 같기도 하고.’
그렇게 류트를 찾으려고 두리번거리던 고개를 거두려는 순간이었다.
[남궁강룡, 1위]
[알렉시스 찬드라스, 3위]
눈에 들어오는 1위와 3위에 강현의 시선이 고정되었다.
‘저 참가자들이…….’
2위인 란 레이센과 함께, 현재 가장 앞서 있는 참가자들이라고 할 수 있었다.
제대로 본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으나, 그 이름만은 잘 알았다.
특히 남궁강룡은 지난 미션 때 몇몇 채팅자들이 언급하기도 했기에 더욱 기억에 남았다.
‘바위 정령들을 다 박살 내면서 바위 거인한테 갔다고 했었나.’
저들의 미션을 보지는 못했어도, 하나만은 확실했다.
지난 미션에서 강현보다 뛰어난 퍼포먼스를 보였다는 것.
마침 그들이 그다지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기에, 강현은 그들을 자세히 살펴볼 수 있었다.
[남궁강룡, 1위]
남궁강룡은 옆에 있는 참가자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키가 크고 시원하게 잘생긴 인상이었다.
눈빛은 단단하면서도 선했고, 전체적으로 호걸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깔끔한 감색 도복에 허리춤에 매어진 한 자루 검으로 보아, 그가 무림에서 왔다는 걸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이름부터가 나 무림에서 왔다는 이름이긴 하다만.’
강현은 피식 웃으며 남궁강룡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참가자에게 시선을 이동했다.
[로프터스, 4위]
로프터스도 남궁강룡과 비슷했다.
훤칠한 금발의 미공자에.
‘저쪽도 검사네.’
얇은 사슬 갑옷을 입은 데다 허리춤에 검이 매여 있다.
[알렉시스 찬드라스, 3위]
그에 반면 알렉시스 찬드라스는 갑옷도 검도 없이, 오만한 눈빛으로 스튜디오를 훑는 중이었다.
허리까지 늘어뜨린 흑발에 또렷한 이목구비를 지니고 있었으나, 남궁강룡처럼 시원해 보인다기보다는 어딘가 거만해 보인다.
‘귀한 집 자식인가?’
한눈에 봐도 범상치 않은 고귀한 아우라가 느껴졌는데, 그것 때문일지도 몰랐다.
‘또 내 위에 있던 게 란 레이센, 사도천, 세르반테였나.’
강현은 지난번 발표된 순위에서 그보다 위에 있던 참가자들의 명단을 떠올려보았다.
‘나머지 셋은 어디 있는지 모르겠군.’
남궁강룡과 로프터스, 알렉시스 찬드라스만으로도 경각심을 다지기엔 충분했다.
비단 예선에서가 아니더라도, 더 비욘드에서 끝까지 살아남으려면 언젠가 그가 뛰어넘어야 할 경쟁자들이었으니까.
그리고 그 순간.
슈우우-
공간이 갈라지며 돼지머리가 불쑥 고개를 내밀었다.
[여러분 반갑습니다-! 더 비욘드의 인간종 예선을 맡은, 프로듀서 로독입니다!]
로독의 등장이었다.
‘어떻게 등장 멘트가 맨날 똑같냐.’
강현이 복사-붙여넣기를 한 것만 같은 로독의 등장에 실소를 흘렸다.
항상 저렇게 세상 기뻐 보이는 얼굴로 등장해 놓고는 폭탄을 내던지곤 했었는데.
[하핫! 에테르를 통한 ‘진화’는 다들 체험해 보고 오셨나요?]
“……!”
어김없이, 로독이 폭탄을 내던졌다.
* * *
진화.
그 강렬한 단어에 순식간에 스튜디오가 조용해진다.
그 반응이 만족스러운지, 로독은 기괴하게 웃어 보였다.
[하하하! 깜짝 놀라실 줄 알았다니까요! 아마 이 로독이 보기에 새로 생겨난 ‘단계’가 무엇인지 정확히 아시는 참가자분은 없을 듯한데. 맞나요?!]
“…….”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역시 그렇겠죠! 물론 잘 알지 못하심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참가자분들이 에테르를 열심히 모으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럼 미션 내용으로 들어가기 전에, 잠시 모은 에테르와 관련된 내용을 설명해 드릴 테니 모두 집중해 주세요! 저희, 아니 더 비욘드 측의 서프라이즈 선물이니까요!]
입을 쩍 벌린 로독이 말을 이어나갔다.
[아실지는 모르겠지만 종족을 막론하고 모든 차원에는 ‘격’의 고하(高下)가 있습니다! 아무리 그 차원에서 <초월>을 노리기에 충분한 경지를 이루었다고 해도, ‘격’이 충족되지 않는다면 절대 <초월>하지 못하죠. 쉽게 말해서 지렁이들의 차원에서 가장 강하다고 <초월>을 할 수 있는 건 아니라는 말이랍니다!]
“……!”
백아영이 A급 헌터라는 말을 들었을 때, 그는 이상하게 생각했었다.
A급 헌터면 S급 헌터 다음으로 <초월>에 가까운 등급인데, 그가 본 백아영은 전혀 <초월>에 가까워 보이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로독은 바로 그 이유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즉 육체의 강함인 무력과 더불어, 영(靈)적 강함인 ‘격’까지 일정 이상 갖추어야 <초월>을 할 수가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말해봤자 의미가 없었기에 굳이 말하지 않았지만, 첫 번째 미션을 통과한 서른 명의 참가자분들께서는 당당히 아실 권리가 생겨났답니다!]
로독이 싱글벙글하며 말했다.
강현은 로독의 말을 이렇게 해석했다.
‘여태까지는 수준이 안돼서 말 안 했는데, 이제부터는 ‘격’도 챙기지 않으면 도태될 거다?’
결국, 신경 쓸 게 늘었다는 말이었다.
[만약 여러분들이 더 비욘드에 참가하지 않고, 스스로 ‘격’을 올려야 했다면 굉장히 힘드셨을 겁니다! 괜히 이무기나 늙은 신선들이 몇백 년 동안 고행을 하는 게 아니거든요! 그러나 더 비욘드라는, <초월>을 향한 고속열차를 타신 여러분들은 특혜를 얻으셨습니다! 무려 더 비욘드 측에서 직접! <초월>을 위한 진화 키트(Kit)를 보내주었다는 사실! 그게 ‘단계’입니다!]
[이 ‘단계’는 모두 13단계로 이루어져 있으며, 에테르를 모을수록 상승합니다! 단계가 높아질수록 <초월>에 맞게 심신의 최적화가 이루어질 거구요! ‘단계’를 올리신 분들은 제가 말하는 게 뭔지 아실 겁니다!]
‘그런 거였나.’
강현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1단계에서 2단계로 상승하면서 감각이 발달하고, 에테르를 느낄 수 있게 되었는데 그것들을 말하는 모양이었다.
[당연히 ‘격’의 출발지점은 같지 않습니다. 여기 있는 참가자들끼리도 모두 ‘격’이 다를 거예요! 앞으로는 그 점도 고려하셔야 할 겁니다! 한두 단계 차이나는 ‘격’은 극복할 수 있어도, 지나치게 차이나는 ‘격’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알아두세요!]
“괴수를 잡는 것 말고 에테르를 취할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까?”
누군가 묻자, 로독의 입이 주욱 찢어진다.
[으하하! 좋은 질문입니다! 방법은 몇 가지 있죠! 가령 공동 훈련장의 에테르 연공실을 이용하거나…… 아니지.]
로독이 말을 하다말고 비릿한 미소를 짓는다.
[더 설명해 드리고 싶지만, 제가 다 알려드리면 직접 알아보는 재미가 없겠죠? ‘진화’에 대한 건 여기서 넘어가겠습니다!]
말을 하려다가 마는 로독에게 원성의 눈빛이 쏘아졌으나, 로독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럼 두 번째 미션에 대해…… 어? 자,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별도의 통신 장치로 뭔가 들었는지, 로독이 허둥댄다.
허둥대는 로독이라니.
처음 보이는 모습이었기에 강현은 흥미롭게 로독을 지켜보았다.
그런데.
[차, 참가자 여러분! 죄송합니다만 미션 준비가 착오가 생겨 설명을 다음으로 미뤄야 될 것 같습니다! 일단 미리 지정해 두었던 순위별 숙소로 이동시켜 드릴 테니, 자유행동을 하며 기다려 주시면 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딱!
슈와아아-
정말로 예상에 없던 상황이 발생했는지, 자세한 설명도 없이 황급히 참가자들을 이동시키는 게 아닌가.
“갑자기?”
강현은 빠르게 몸을 뒤덮는 환한 빛을 보며 황당하다는 얼굴을 해 보였지만.
그가 그러거나 말거나 주변의 풍경이 순식간에 바뀌어 갔다.
광장처럼 생긴 스튜디오가 사라지고, 드넓은 방이 나타난 것이다.
“…….”
중세 귀족이 살 법한 고풍스러운 양식의 방이었는데, 가구들이 하나씩밖에 없는 걸로 보아 혼자 쓰는 방인 것 같았다.
‘이게 본선진출조의 숙소인가.’
숲에서 노숙을 하는 거나 마찬가지였던 지난 미션에 비하면 천지 차이였다.
침대에 눕는다면 더할 나위 없이 푹 쉴 수 있으리라.
하나 강현은 숙소에서 잠시 벗어나기로 했다.
‘에테르 연공실에 가봐야겠어.’
로독은 공동 훈련장의 에테르 연공실에서 에테르를 취할 수 있다고 말했다.
‘격’을 올리는 것도 <초월>의 필수요소인 걸 알게 된 이상, 그걸 게을리할 마음은 없었다.
현재 그가 모은 에테르는 91.
‘9만 모으면 딱 100.’
에테르 연공실에서 얼마나 모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한 번쯤 가서 나쁠 게 없었다.
공동 훈련장에 가 본 적은 없지만, 어떻게 가는지는 루드스에게 들어 알고 있었다.
“공동 훈련장으로 이동한다.”
[공동 훈련장으로 이동하시겠습니까? (Yes/No)]
강현은 Yes를 눌렀다.
[참가자 이강현 확인, 공동 훈련장으로 이동합니다.]
또다시 주위의 달라진다.
고풍스러운 방에서 헬스장을 연상케 하는 곳으로.
그가 아는 헬스장보다 수십 배는 널찍하다는 것, 그리고 쓰임새를 알 수 없는 특이한 기구들이 사방에 널려 있다는 것만 빼면 헬스장과 흡사했다.
[기록열람실]
[설정훈련실]
…….
군데군데 위치한 토굴들의 이름을 본 강현이 신기하다는 표정을 짓는 가운데.
[에테르 연공실]
50m 정도 떨어진 곳에 그가 찾던 에테르 연공실이 보였다.
‘벌써 잔뜩 몰려왔네.’
그보다 먼저 에테르 연공실에 온 몇몇 참가자들이 있었다.
필시 ‘단계’를 올리려는 거겠지.
[이립, 19위]
[카에, 26위]
[루시타르, 27위]
도복을 입은 참가자와 기사, 마법사가 무언가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강현은 에테르 연공실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며 생각했다.
‘미션의 내용이 뭔지는 몰라도 이제부터가 중요해.’
지난 미션에서의 활약을 통해 7위에 들긴 했어도, 앞으로 어떤 모습을 보이냐가 매우 중요했다.
시청자들은 분명 지금도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보고 있을 터였다.
그들의 이목을 확 끌어야 했다.
다행히 그는 리얼에서의 경험으로 잘 알고 있었다.
어떻게 하면 시청자들의 눈에 더 띌 수 있는지.
또 그들이 무엇을 좋아하는지를.
그런데 그때였다.
이야기를 나누던 이들에게서 커다란 고함 소리가 들려온 것은.
“먼저 온 건 우리인데, 왜 당신들이 먼저 들어간단 말이오!”
“푸하하하! 선인들이 연공 좀 하겠다는데 뭐가 문제인가. 어차피 자네들은 1단계일 것 아닌가? 먼저 들어간 내 동료와 나는 3단계를 눈앞에 두고 있어 꼭 연공을 해야 한다네.”
“단계가 무슨 상관인지 모르겠군. 먼저 온 우리는 들어가야겠으니 비키시오!”
“어허, 안 되지. 내 친구 다음은 나니까 그런 줄 아시게나.”
“그러면 남은 하나의 연공실이라도 내어주시오! 총 두 개 아니오!”
“어허, 한꺼번에 여러 개의 연공실을 쓰면 효과가 극대화된다네. 대략…… 한 시간만 참아주시게.”
“망할 놈들……!”
“우리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정당한 결투로 우리를 나오게 하는 방법도 있네만. 트레이너에게 듣자니 허락을 받고 싸우는 건 괜찮다고 하니 말이네. 하하하!”
“이, 이놈들이……!”
듣자 하니 먼저 온 참가자들을 무시하고 도포의 동료가 들어가 버린 듯했다.
선인 쪽의 순위가 더 높아서인지, 기사와 마법사는 머리끝까지 화가 남에도 참는 눈치였다.
‘이거다.’
누가 봐도 불공평한 모습에 강현의 눈이 빛났다.
아무래도 예상보다 일찍 기회가 찾아온 것 같았으니까.
‘권선징악에 환호를 보내는 건 만고불변의 진리지.’
강현은 한 발짝 나서며 입을 열었다.
“거기, 개소리하지 말고 꺼져.”
* * *
조금 전, 로독은 이제부터는 ‘격’도 신경써야 할 거라고 말했었다.
그리고 그 말을 들은 순간, 선인 이립은 확신했다.
‘이건 우리를 밀어주려는 거다!’
나머지 차원들보다 월등한 무력과 ‘격’을 가진 차원들을 위한 조치라고.
여기서 ‘우리’란, 그가 확인한 몇몇 차원을 의미했다.
무림, 마법계, 검계, 신계, 선계…….
지금까지의 미션에서 남다른 활약을 선보이던 참가자들의 차원이었다.
당장 현재 1위인 남궁강룡은 무림에서, 2위인 란 레이센은 마법계에서 왔고, 3위인 알렉시스 찬드라스도 신계 출신이었다.
그 밖에 4위와 5위, 6위도 모두 검계와 선계 출신이었으며, 나머지 참가자들과는 궤를 달리하는 강함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등장한 ‘격’은, 이 같은 격차를 더 벌릴 게 분명했다.
이 차원들, 일명 주요차원 출신은 다른 차원들에 비해 무력뿐만 아니라 더 높은 ‘격’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이 경연은 강한 자만이 살아남을 수 있다!’
이립이 겪은 더 비욘드는 철저한 강자생존의 세계였다.
강자라면 무슨 행동을 해도(물론 일부 시청자들에게 밉상이 될 수는 있겠지만) 용인되고, 약자들이 얼마나 죽어 나가든 간에 로독은 히죽거리며 웃어댄다.
이립은 그 강자생존의 법칙을 재빨리 간파해 냈고, 그게 바로 눈앞의 아해들을 무시하고 에테르 연공실을 차지하게 된 배경이었다.
[카에, 26위]
[루시타르, 27위]
선인들은 누구보다도 강함에 민감한 자들이었다.
그리고 자신들은 억울함을 호소하는 이 아해들보다 명백히 강했다.
비록 이립의 현재 경지는 그의 차원에서의 <초월계>, 즉 영계(靈界)로 가기 위한 아홉 단계 중 네 번째 단계인 영선(靈仙)에 불과했음에도 말이다.
‘흐흐, 3단계로 올라가기만 하면……!’
저자들과의 차이는 더욱 벌어질 거고, 그 차이는 더 큰 차이를 낳게 될 터였다.
그 사실에, 이립은 흐뭇하게 미소를 지었다.
“거기, 개소리하지 말고 꺼져.”
느닷없이, 툭 튀어나온 누군가가 끼어들기 전까지는.
“누가 감히…… 윽?”
끼어든 건 깔끔한 인상의 청년이었는데, 놈에게 눈을 부라리려던 이립은 당황했다.
[이강현, 7위]
19위에 해당하는 자신보다 명백히 높은 순위를 차지하고 있었으니까.
‘이강현이라면 그때 그……?’
주요차원 출신은 아니었지만, 지난번 미션에서 바위거인을 산산조각내버리던 참가자였다.
그 활약으로 단번에 F등급에서 본선진출조로 올라간 대반전의 주인공이기도 했고.
당시 이립 또한 이강현의 활약을 경악해가며 감상했었기에,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하필 이놈이…….’
이립이 침음을 흘렸다.
그가 본 이강현의 [종족 특성]은 주요차원의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아무리 주요차원 출신이 아니라고는 해도, 7위라는 숫자는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악행을 저지른 쪽은 그들이었기에 더욱 그랬다.
“안 꺼질 거면, 네가 말한 것처럼 당당하게 결투로 정해도 상관없는데.”
그걸 잘 아는지, 이강현이 천천히 다가온다.
이립은 침을 꿀꺽 삼켰다.
‘결투에서 지기라도 한다면 끝장이다.’
신체 내부에 축기(縮氣)를 하는 선인들의 [종족 특성] 상, 자칫하다간 수십 년 동안 쌓아온 경지를 한 번에 다 날릴 수가 있었다.
그런데 그때.
[참가자 이강현과 결투를 진행하시겠습니까?]
어떻게 알았는지 빌어먹을 문구가 떠오르기까지 한다.
“크윽!”
일이 이렇게 된 이상 남은 선택지는 하나밖에 없었다.
쾅쾅쾅!
“백 형! 아무래도 물러나야 할 것 같소!”
에테르 연공실의 문을 두드리며 동료를 부르는 것뿐.
그 순간 강현의 아쉬움이 스쳐 지나갔으나, 그는 그것을 파악하지 못했다.
그저.
“이 형! 이게 갑자기 무슨 일로-?”
“돼, 됐고! 어서 출발하지!”
어리둥절한 얼굴로 나타난 동료의 옷깃을 잡아끌어, 그와 함께 서둘러 빠져나간다.
“……우리가 가만있을 거라 생각하지 마시오!”
[이립, 19위]
[백청, 17위]
강현은 큰소리 한 번 치고 멀어지는 그들의 뒷모습을 보며 혀를 찼다.
‘눈치는 쓸데없이 빨라 가지고.’
선선히 결투를 받아들이면 말 그대로 박살을 내주려고 했는데, 순식간에 빠져 버렸다.
‘뭐, 이 정도만 해도 충분하긴 하겠지만.’
더 이상 시청자들의 반응이 보이진 않았으나, 지금까지 그가 봐왔던 시청자들이라면 방금의 장면을 필시 봤을 것이다.
그렇다면 소기의 성과는 거둔 셈이었다.
“고, 고맙소이다.”
“정말 고맙소…….”
들려오는 감사 인사에 고개를 돌리자, 어느새 기사와 마법사가 코앞까지 다가온 상태였다.
“아, 별거 아닙니다. 저렇게 막무가내로 나오는 놈들한테는 똑같이 막무가내로 나가서 느끼게 해줘야죠.”
강현이 그렇게 말했지만, 기사와 마법사는 연신 감사를 표하며 그들이 사용할 두 개의 에테르 연공실 중 하나를 내어주기까지 했다.
여기까지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강현으로서는 좋은 일이었다.
끼익-
한 시간 동안 에테르 연공실을 대여하기로 한 강현은 내부를 둘러보았다.
‘불가마처럼 생겼네.’
5평 정도의 좁은 공간이었는데, 기이한 열기가 연공실 전체를 채우고 있었다.
스아아-
영롱하게 반짝거리는 열기.
‘격’이 2단계로 상승하면서 마력 감응력을 얻은 강현은 열기의 정체를 깨달았다.
‘에테르구나.’
연공실을 에테르가 그득히 채우고 있었던 것이다.
얼핏 봐도 결코 적지 않은 양이었다.
‘어떻게 사용하는지 대충 알겠군.’
강현은 주저앉아 정신을 집중해 보았다.
“…….”
그로부터 약 10분 뒤.
[취할 수 있는 에테르가 감지되었습니다. 에테르를 취하시겠습니까?]
[현재 취한 에테르의 양(91/100)]
메시지가 떠오른다.
강현이 살짝 고개를 끄덕이자.
스아아-
[현재 취한 에테르의 양(92/100)]
손쉽게 에테르가 늘어났다.
‘10분에 에테르 1이면…….’
강현은 곰곰이 계산해 보았다.
그에게 주어진 건 한 시간.
이런 속도면 남은 시간 내로 3단계로 올리지는 못하더라도, 97이나 98까지는 올릴 수 있을 것 같았다.
괴수를 사냥하는 것보다는 훨씬 적긴 하지만, 앉아 있는 것만으로 에테르를 취할 수 있다니.
‘그놈들은 이 좋은 걸 지들끼리 먹으려고 했단 말이야?’
강현은 선인들이 벌였던 추태를 떠올렸다.
기사와 마법사가 자신들보다 약하다고 새치기나 하고 있다니. 어이가 없었다.
‘그렇지만…… 곳곳에서 이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을 수도.’
선인들만이 아니라, 지금쯤 여러 곳에서 충돌이 벌어지고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무력, ‘격’이 높은 차원과 그렇지 못한 차원의 대립.
어쩌면 그런 그림이야말로 더 비욘드가 바라는 걸지도 모른다.
‘내 할 일은 정해져 있지만.’
하나 강현은 그런 것에 신경 쓰기보다는, 조금이라도 더 강해지는 데에 집중하기로 했다.
무력과 ‘격’을 올려 더 비욘드의 끝까지 올라가는 것.
그것만이 강현의 목표였다.
강현의 생각이 서서히 멎어 들어가며, 에테르와 함께 어우러졌다.
스아아-
…….
[현재 취한 에테르의 양(97/100)]
그리고 취한 에테르의 양이 97이 되었을 때, 환한 빛이 강현을 감싸 갔다.
[참가자 이강현 확인, 스튜디오로 이동합니다.]
스튜디오로의 소환이었다.
* * *
스튜디오에 도착한 강현은 자신들이 이렇게 재소환된 이유를 쉽게 짐작했다.
‘미션 내용을 설명해 주려는 거겠지.’
급하게 갔던 일이 해결된 모양이었다.
주위의 참가자들도 대충 예상했는지, 덤덤한 얼굴들이었다.
그때였다.
“……!”
강현은 자신을 발견하고는 고개를 홱 돌리는 두 명의 선인을 볼 수 있었다.
[이립, 19위]
[백청, 17위]
아까 만났던 선인들이었다.
‘가만두지 않을 거라면서 쫄기는.’
마음 같아서는 다가가서 말이라도 건네고 싶었으나 이내 관두었다.
슈우욱-
[허억…… 허억…… 여, 여러분……! 번거롭게 해드려 죄송합니다! 로독입니다……!]
때마침 로독이 등장했으니까.
한데 방금까지 뛰다 오기라도 했는지, 숨을 헐떡이는 데다가 온 얼굴이 땀투성이였다.
‘진짜 뭔 일 있었나 보네.’
처음 보는 로독의 지친 모습에 강현이 흥미롭다는 얼굴을 해 보였다.
물론 그것도 잠시.
짝-!
로독이 손뼉을 치자, 그의 얼굴이 마법처럼 말끔해지면서 끝났다.
[하핫! 잠시 못난 모습을 보여드린 것에 사과드립니다!]
[급한 일은 잘 마무리되었답니다! 원래는 천천히 여러분을 부르려고 했지만, 일정상 어쩔 수 없게 되었으니 양해 부탁드려요!]
평소 모습 그대로 로독이 외쳤다.
[자! 그럼 두 번째 미션에 대해 보도록 할까요?]
딱!
거대한 화면에 어두컴컴한 지하가 비추어졌다.
미로처럼 길이 복잡하고, 괴수로 보이는 것들이 득실거리는 곳이었다.
[지금 보시는 곳이 바로 이틀 뒤에 있을 두 번째 미션의 무대입니다! 엄청난 악명을 쌓았던 리치의 던전이죠! 메시지와 함께 보실까요?]
팟-
[미션]
-주제 : 경쟁
-내용 : ‘더 비욘드’의 인간종 예선, 그 두 번째 무대입니다.
멸망한 고대의 마법계에서 리치의 던전이 발견되었습니다. 던전 안에 남아 있는 리치의 수하들과 함정을 돌파하고, 다른 참가자들과의 경쟁에서 이겨 던전의 오브(Orb)를 손에 넣으세요!
-성공 시 : 다음 미션 진출
-실패 시 : 탈락
[지난 미션이 팀적인 움직임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이번 미션은 보다 개인적인 면을 강조해 보았습니다!]
‘팀적인 움직임은 개뿔.’
강현은 코웃음을 쳤다.
말만 팀이지 개인별로 경쟁하게 만들어놓고서는 그런 말을 하다니.
어처구니가 없는 말이었다.
언제나 그랬듯이, 로독은 전혀 개의치 않았지만.
[미션이 시작되면, 참가자분들은 각기 던전의 입구에 진입하게 될 겁니다. 그리고 제한 시간 동안 최대한 많은 기여도를 모으시면 되겠습니다!]
화면에 함정과 스켈레톤, 좀비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 던전에서 기여도를 얻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저기 보이는 던전 내의 함정을 파괴하거나, 남아 있는 리치의 수하들을 쓰러뜨려도 됩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가장 많은 기여도를 얻을 방법은…….]
던전의 중앙으로 이동한 화면이 주먹만 한 붉은 구 모양 보석을 비추었다.
가만히 보고 있으면 빨려 들어갈 것만 같은 보석이었다.
[메시지에 나와 있듯 저 중앙의 오브를 가지고 있는 거구요! 오래 가지고 있을수록 더 많은 기여도를 획득하겠지만, 다른 참가자분들이 가만히 보고만 있지는 않겠죠?]
로독이 씨익 웃었다.
[하핫, 복잡하다고 생각하실 수도 있겠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여러분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미니 게임을 마련했으니까요!]
화면이 음침한 던전에서 벗어나, 원형경기장처럼 생긴 곳을 보여준다.
[엄밀히 말해서 이 미니 게임 때문에 여러분을 다시 부른 것이기도 합니다! 꼭 오늘 중으로 해야 한다는 말을 들었거든요.]
[이곳에서는 죽어도 현실에서는 죽지 않으며, 모든 참가자가 한꺼번에 들어갈 미션과는 달리 네 명에서 다섯 명이 경쟁하게 됩니다. 다만 던전과 똑같이 각종 함정과 괴수, 중앙에 오브가 있으니 한번 잘 체험해보시면 되겠습니다! 여기에 하나 더!]
[이 미니 게임 각 조 1등에게는, ‘단계’의 증진에 도움이 될 영약을 드리겠습니다아-!]
“……!”
그 말을 들은 참가자들이 자세를 곧추세우며, 집중하는 기색을 보인다.
강현도 마찬가지였다.
네다섯 명으로 이루어진 조에서 1등을 하기만 하면 영약을 준다니.
‘설마 본선진출조를 한 조에 때려 박진 않을 테니까…….’
충분히 해볼 만했다.
[에테르 관련해서 이미 몇 건의 충돌이 일어난 걸로 알고 있습니다! 이번 미니 게임의 경품이면 한 단계는 올라서실 수 있을 거예요! 하핫! 미니 게임에 대한 의욕이 뿅뿅 솟아나시죠? 그럼, 기세를 이어나가 조 명단을 발표하겠습니다!]
그 찰나.
“…….”
강현은 로독의 시선이 아주 잠깐 자신에게 향하는 걸 놓치지 않았다.
그리고 곧,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7조]
[이강현, 7위]
[이현, 11위]
[백청, 17위]
[이립, 19위]
[카로크 살리스, 26위]
방금 자신과 다툼이 있었던 두 선인과 자신이 한 조가 되었다는 걸 알 수 있었으니까.
명단을 보자마자 강현은 반사적으로 이립을 보았고.
피식 웃고 말았다.
이립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이, 이건 부당하오!”
미니 게임 명단을 본 어느 참가자가 외친 말이었다.
지금까지 팀이나 조 편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경우는 없었다.
자연스레 모두의 시선은 그 참가자에게로 집중되었다.
[이사크, 18위]
말을 꺼낸 건 이사크라는 참가자였다.
그는 휘황찬란한 비단을 몸에 두르고 있었는데, 강현으로서는 그 출신 차원을 알 수 없는 복식이었다.
이사크는 참가자들의 시선에 잠시 움찔하는 듯했지만, 꿋꿋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방금 전 나와 충돌이 있었던 참가자를 같은 조에 집어넣다니! 불난 집에 부채질하는 거요, 뭐요! 당장 바꿔주시오!”
이사크의 말에, 강현은 다시 화면으로 고개를 돌려 그의 이름을 찾아보았다.
‘이사크……. 여기 있네.’
[5조]
[사도천, 5위]
[연청, 12위]
[이사크, 18위]
[로우크, 30위]
이사크보다 순위가 높은 참가자는 두 명이었지만, 강현은 이사크와 충돌을 빚은 참가자를 알 것 같았다.
‘사도천이라는 참가자겠지.’
주변을 둘러본 강현은 이내 사도천을 발견할 수 있었다.
시꺼먼 로브로 몸을 둘둘 만 참가자였는데, 단지 보는 것만으로도 알 수 없는 사이(邪異)함이 전해져 왔다.
그 기운을 느끼는 건 강현만이 아닌지, 사도천의 주변에는 참가자가 없었다.
모두 멀찍이 물러난 상태였다.
“저 악독한 놈과 나를 일부러 붙여놓다니, 가당치도 않은 짓거리요! 지금 당장…….”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요.]
열변을 토하던 이사크의 말을 로독이 잘라냈다.
로독의 눈을 본 강현은 흠칫 놀랐다.
‘무슨 저런 눈을…….’
여태껏 보아오던 생기발랄한 눈이 아닌, 더없이 차갑고 싸늘한 눈이었기 때문이다.
[참가자분께서 뭘 말하는지는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만……. 저희 DBC의 형평성을 타박하는 것 같아 썩 기분이 좋지는 않군요.]
“아, 아니. 타박하는 것이 아니라…….”
로독의 눈을 본 이사크가 뒤늦게 수습하려 내뱉는다.
하나 그것도 잠시.
[미니 게임에서 죽어도 실제로 죽는 건 아니라고까지 말씀드렸는데도 그토록 다른 참가자와의 싸움을 피하시다니. 참가자님의 차원에서 이 소식을 듣는다면 화를 낼지도 모르겠는데요? 하핫!]
이내 로독의 눈이 평상시대로 돌아온다.
[안 그래도 말해야 할 게 하나 더 있어서 언제 말씀을 드릴까 고민하고 있었는데, 마침 이사크 참가자께서 그 타이밍을 주셨네요.]
로독이 양팔을 쫙 벌리며 소리쳤다.
[싸우지 않고 오브를 취하는 것도 좋지만, 가급적 한 번쯤 참가자들과 겨루어보길 권합니다! 제가 프로듀서 자리를 걸고 장담하건대, 절대 손해 볼 일이 아닐 테니까요!]
“……!”
평소 한 번쯤 권하기만 하던 로독이 저렇게까지 말하다니.
‘일이 이렇게 된다면…….’
가급적 싸우지 않고 미니 게임에 집중하려던 참가자들도 마음을 달리 먹을 게 틀림없었다.
미니 게임에서 죽어도 죽지 않는 데다, 로독의 말을 확인해서 나쁠 게 없었으니까.
“이, 이런…….”
그 일을 자초한 이사크의 얼굴이 썩어 들어간다.
싸움을 피하려다가 도리어 싸울 이유를 만들어버린 꼴이니 그럴 만도 했다.
[하하하! 이제야 다들 제대로 해볼 마음이 생기신 듯하군요!]
강현은 기쁘게 웃는 로독을 바라보았다.
‘일부러 다 붙여놓고선 잡아떼기는.’
사도천과 이사크가 한 조에, 자신과 이립이 한 조에 되었는데 제작진의 개입이 없다?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로독은 자신들과는 상관없다는 듯 은근슬쩍 넘어가려 했다.
그러다 화가 난 이사크에게 발목을 잡힐 뻔했지만, 능청스럽게 자신의 페이스로 끌어들이며 참가자들의 적극성을 끌어내기까지 했다.
‘시청자들은 좋아하겠군.’
참가자들의 ‘스토리’에 웃음과 울음을 터뜨리는 시청자들의 흥미를 돋우기에는 더없이 적절한 조치였다.
물론, 비단 시청자들에게만이 아니라 강현에게도 좋은 일이기는 했다.
이틀 뒤에 있을 본 미션을 미리 체험해 볼 수도 있을뿐더러, 레벨도 올릴 수 있을 듯했다.
현재 그의 레벨은 24.
1만 더 올리면 새로운 스킬을 배운다.
‘25에 배웠던 게…… 방어 스킬인 휘광(輝光)이었나.’
이미 수수께끼의 검에 달린 보호막이 있긴 했으나, 스스로를 보호할 수단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또, 레벨만이 아니라 ‘단계’의 상승도 기대해 봄 직했다.
‘잘하면 3단계로 올라갈 수도 있겠고.’
현재 그가 취한 에테르는 97이니, 잘만 하면 3단계, 어쩌면 그 이상으로 올라설 수도 있으리라.
게다가 7조에서 가장 고 순위 참가자는 다름 아닌 강현이었다.
함께 외눈거인을 상대했었던 무림인, 이현이 위협적이긴 했어도 충분히 1위를 노려볼 만했다.
[자, 슬슬 준비해 주시기 바랍니다! 곧 전송을 시작할 테니까요!]
슈와아-
스멀거리며 바닥에서 환한 빛이 새어 나온다.
이 빛이 스튜디오를 덮을 때쯤이면, 여느 때처럼 이동하겠지.
‘그 양아치들은 뭐 하고 있으려나.’
강현이 이립을 쳐다보자, 아까 봤던 백청이라는 참가자와 무언가를 쑥덕이는 중이었다.
그런데 그 눈빛이, 화가 나 있거나 억울해하는 류가 아니었다.
무언가를 결연하게 꾸미고 있는, 그런 눈빛.
“음.”
강현이 그들의 모습을 눈에 담아두던 때였다.
[그럼, 미니 게임을 시작하겠습니다아-!]
로독이 외쳤고.
화아악-
빛이 스튜디오를 가득 채웠다.
[참가자 이강현 확인, 원형경기장으로 이동합니다.]
* * *
눈을 뜬 강현은 자신이 미니 게임장, 즉 원형경기장에 왔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양옆과 뒤가 막힌 가운데, 색이 바래 누레진 벽돌들로 이루어진 통로가 눈앞에 보였다.
‘직진하라는 건가?’
그런 생각을 했을 때였다.
띠링-
청량한 효과음과 함께 허공에 지도로 보이는 게 나타난다.
총 다섯 갈래로 이루어진 각기 다른 통로를 따라가면, 원형의 탁 트인 공간으로 도달하는 구조였다.
‘200m 정도인가. 길지는 않네.’
강현은 다섯 갈래 중 하나에서 반짝이는 점을 볼 수 있었다.
‘나머지 네 갈래에 한 명씩 있는 건가.’
그리고 그런 그의 생각을 뒷받침하듯, 메시지가 떠오른다.
[복잡한 미궁과도 같은 본 미션의 던전과는 달리, 미니 게임의 원형경기장은 그 구조가 매우 단순하답니다!]
[그냥 통로를 주욱 따라가면 다른 참가자분들을 만날 수 있을 테니까요!]
‘로독이구만.’
메시지에서 음성이 나오거나 하지 않았음에도, 바로 앞에서 로독의 말을 듣는 것 같았다.
[하하! 물론 통로를 지나는 동안 함정과 괴수들을 만나게 되니, 선택을 잘하셔야 될 겁니다!]
[중앙의 오브를 획득하여 기여도를 올릴 수도 있겠지만, 함정과 괴수를 처치하면서 기여도를 올릴 수도 있으니까요! 부디 최선의 수를 향해 노력해 주시길!]
로독의 메시지가 끝나고, 새로운 메시지가 떠올랐다.
[남은 시간 : 3시간]
이 미니 게임의 제한 시간을 알리는 메시지였다.
동시에.
쿠구구-
“크아아-”
땅에서 구울과 스켈레톤으로 보이는 것들이 솟아올랐다.
낡아빠진 검과 방패를 들고 있었는데, 그다지 상태가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간단하네.’
이것들을 돌파하며 중앙으로 나아가, 오브를 걸고 참가자들과 싸우라는 말이었다.
그렇다면 더 생각할 건 없었다.
[스킬, 광검[Lv.6]을 발동합니다.]
저 괴수들을 치우고 박살 내면서, 중앙을 향해 나아갈 뿐.
서걱-
[10pt를 획득합니다.]
푸욱!
[10pt를 획득합니다.]
순식간에 스켈레톤과 구울을 해치운 그는 잠시 가만히 있었다.
“…….”
아쉽게도 에테르 관련 메시지는 나타나지 않았다.
“1등을 해서 영약을 타는 수밖에 없나.”
다음 단계로 가기까지 딱 3이 모자란 강현으로서는 아쉬운 일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쿠구구-
레벨을 올릴 수는 있겠다는 점이었다.
“크아아악-!”
한눈에 봐도 적지 않은 수의 괴수가 앞을 가로막고 있었으니까.
‘아예 레벨을 올리고 가는 게 낫겠어.’
강현은 빠르게 중앙으로 가서 오브를 취하는 것보다 25를 찍고 가는 게 낫겠다는 판단을 내렸다.
따라서 그는 괴수들을 상대하지 않고 지나칠 수 있음에도 꼼꼼하게 사냥에 임했다.
푹!
[10pt를 획득합니다.]
에테르는 소량이긴 해도 연공실에서 취할 수 있지만, 레벨은 올릴 수 있을 때 올려두는 게 나았다.
푸슈슈슛-!
언데드 괴수들과 더불어 중간중간 튀어나오는 함정들이 있긴 했으나, 그를 막지는 못했다.
[10pt를 획득합니다.]
…….
그렇게 통로를 거의 다 지나 중앙에 진입할 때쯤.
[레벨이 올랐습니다.]
…….
그는 레벨 업 메시지를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슈슈슈슉-
보이지 않는 바람의 칼날이 강현을 덮쳤다.
“……!”
강현으로서는 피할 수 없는 급습이었다.
콰콰콰쾅-!
바람의 칼날은 강현이 있는 곳을 폭격하듯 퍼부어졌고.
“…….”
그가 나오던 통로의 입구까지 무너뜨린 후에야 잠잠해졌다.
* * *
수북이 쌓인 통로의 잔해를 앞에 두고.
“허억…… 헉……. 죽었나?”
이립은 진땀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오직 놈보다 먼저 도착하여 기습을 하겠다는 일념하에 백청과 사전에 계획을 짰고, 괴수들과 함정을 건너뛰었다.
중앙에 도착한 뒤에도, 오브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주력 법보를 꺼내 나머지 세 갈래 통로에 조준해 놓았다.
바람의 칼날을 쏘아 보내는 이립의 법보인 풍검선(風劍扇)을 세 갈래 가운데 한 곳에, 모든 것을 불사르는 백청의 청염구(靑炎球)를 나머지 두 곳에 배치해 놓은 것이다.
실제로 조금 전 모습을 드러낸 카로크 살리스라는 놈이 아무런 저항도 못 하고 푸른 불꽃에 삼켜지면서, 이 전략은 효과가 있는 걸로 보였다.
‘그래서 이강현이라는 게 식별되자마자 풍우선을 사용하긴 했다만…….’
폭삭 무너진 통로의 잔해와 자욱하게 피어오른 먼지만 보일 뿐, 이강현은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으음.”
“잘된 걸세!”
이강현이 있던 통로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이립에게 동료 선인, 백청이 말했다.
“아무리 놈의 기지가 뛰어나다고 해도 방금의 기습은 치명적이었을 걸세! 비록 놈에게 보호막이 있긴 하나, 애초에 그것까지 계산해서 공격을 한 것 아닌가!”
그들은 이강현이 바위 거인을 잡으면서 사용했던 보호막을 기억하고 있었고, 그것까지 감안하여 공격했다.
“그건 그렇다만…….”
머뭇거리는 이립에게 백청이 질타를 가했다.
“이제 그만 저쪽에서는 눈을 떼게나! 남은 통로에서 나올 이현만 처리하면 1등은 우리라는 걸 명심하고!”
“……알겠네. 내 풍검선을 자네의 청염구와 맞추도록 하지.”
계속된 백청의 설득에 이립은 법보의 방향을 남은 한 개의 통로로 조절했고, 백청은 난적을 처치했다는 것에 기분이 좋아졌는지 큰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으하하하! 순위가 무슨 상관인가! 오로지 개인의 강함만이 생과 사를 가르는 척도가 되는 이곳에서!”
“잘 아네.”
“음? 이 형, 지금 뭐라고 했나?”
“난 아무 말도…….”
백청의 물음에 이립이 고개를 저은 순간이었다.
푸욱-
느닷없이 백청의 뒤에 이강현이 나타나, 백청의 목에 검을 꽂는다.
“크허억……!”
백청은 그대로 고꾸라졌고.
“어, 어떻게?!”
이립의 경악에도 강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스킬, 순보[Lv.2]를 발동합니다.]
그저 이립의 뒤로 이동하여, 검을 휘두를 뿐이었다.
“크윽!”
재빨리 검을 피해낸 이립이 바람의 칼날을 쏘아냈지만.
[스킬, 순보[Lv.2]를 발동합니다.]
[스킬, 섬광[Lv.4]를 발동합니다.]
연이은 강현의 공격을 피해내지는 못했다.
털썩-
이립까지 쓰러뜨리고 나자, 그제야 강현이 한숨을 내쉬었다.
‘뒈지는 줄 알았네.’
미니 게임이 시작하기 직전, 뭔가를 꾸미는 듯한 이립의 눈빛을 본 그였다.
해서 레벨을 올리고 간다는 결정을 내렸는데, 결과적으로 신의 한 수가 되었다.
휘광(輝光)
-외부의 충격을 막아주는 빛을 일으킵니다.
빛을 한곳에 모을 수도, 퍼뜨릴 수도 있습니다.
레벨이 오르며 습득한 휘광을 통해 이립의 기습을 무마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수수께끼의 검에 달린 보호막만 가지고 있으면 진짜 죽었을 거야.’
그가 가진 보호막의 지속시간을 예측했는지, 이립의 공격은 한참이나 이어졌다.
다행히 휘광으로 한 차례 더 버틴 뒤, 잔해 안에서 기회를 엿보다가 역습을 가하는 데에 성공했지만 말이다.
“하아, 힘들다.”
주저앉고 싶은 욕구를 꾹 억누른 강현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오브를 찾기 위해서였다.
‘저기 있네.’
광장 중앙에서 번쩍이는 붉은 보석을 발견한 그는 곧장 다가가려다가…….
“……?”
그 자리에 멈추었다.
반짝-
쓰러진 이립과 백청의 시신에서, 익숙한 빛이 보였다.
반사적으로 다가간 그는 알 수 있었다.
[취할 수 있는 에테르가 감지되었습니다. 에테르를 취하시겠습니까?]
[현재 취한 에테르의 양(97/100)]
로독이 왜 참가자들끼리 싸워보라고 했던 건지.
‘괴수만이 아니라 참가자들한테서도 취할 수 있는 거였군.’
강현은 손을 가져갔다.
스아아-
[현재 취한 에테르의 양(100/100)]
[취한 에테르가 일정 수치를 넘어섰습니다. 다음 단계가 적용됩니다…….]
강현의 몸에, 또 한 번의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2단계 → 3단계]
[감각이 더욱 세밀해집니다.]
지난번과 같은 문구였지만, 강현은 미세한 차이를 느낄 수 있었다.
1단계에서 2단계로 올라섰을 때보다 기감의 범위가 더욱 늘어난 것이다.
그 범위는 못 해도 15m 이상.
강현은 이 범위 내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손바닥 보듯 알 수 있었다.
딱히 보거나 듣지 않더라도,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3단계가 이럴진대, 12, 13단계까지 간다면 얼마나 늘어날지 상상도 되지 않았다.
‘이러다가 판타지 소설에서나 보던 것처럼 되겠는데.’
터무니없는 말이었으나, 사실이 될 가능성이 높았다.
강현은 지구와 타 차원의 차이를 다시 한번 실감했다.
무력만 냅다 올려대던 지구의 헌터들과는 달리, 상당수의 차원들은 ‘격’도 함께 올리고 있었을 터였다.
로독의 말처럼 1, 2단계 차이는 별거 아닐지 몰라도, 그게 쌓이면 절대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당장 기감의 범위부터가 달라졌으니까.’
만약 박상철과 다시 붙는다면, 지난번보다 훨씬 쉽고 빠르게 이길 자신이 있었다.
시각, 청각, 반응속도 등, 박상철이 아무리 노력한다고 해도 극복할 수 없는 차이가 생겨났으니 말이다.
‘격’의 중요성을 되새긴 강현은 다음 변화를 주시했다.
[에테르 감지력이 소폭 상승합니다.]
강현이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자, 꿈틀대는 마력이 보다 확실하게 파악된다.
[에테르 저항력이 소폭 상승합니다.]
‘이건 뭔지 모르겠지만…….’
에테르에 대한 내구력이 증가했다는 걸로 이해하기로 했다.
스아아-
변화가 마무리되며, 메시지가 우르르 나타난다.
[참가자 이강현의 현재 단계는 3단계입니다.]
[다음 단계는 취할 수 있는 에테르를 모두 취한 뒤 적용됩니다.]
[현재 취한 에테르의 양(18/150)]
이립과 백청에게서 취한 에테르가 상당했는지, 3단계로 상승한 뒤에도 18이나 더 채워진 상태였다.
‘대신…… 취해야 하는 에테르가 150으로 늘어났군.’
레벨을 올리는 데에 필요한 경험치가 점점 늘어나는 것과 흡사한 듯했다.
‘구경은 이 정도면 됐고.’
3단계로 올라가면서 생겨난 변화를 관조한 강현은 중앙에 있는 오브를 향해 다가갔다.
붉은빛의 오브는 원형경기장의 중앙에 박힌 불쑥 솟아 나온 기괴한 손 모양 장식물에 붙잡혀 있었다.
장식물은 강현의 허리까지 오는 높이였기에 오브를 뽑는 데에 지장은 없었다.
푹-
오브를 뽑아 든 순간이었다.
[축하합니다, 오브를 취하셨습니다!]
[오브를 지니고 있는 동안, 지속적으로 기여도를 획득하게 됩니다.]
[거대한 활력이 당신의 몸을 감쌉니다.]
에덴투니크의 가호를 받았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 듦과 함께, 여러 메시지들이 떠올랐다.
[5pt를 획득합니다.]
[5pt를 획득합니다.]
[5pt를 획득합니다.]
…….
아무것도 하지 않고 오브를 쥐고 있는 것만으로도 기여도가 계속해서 높아진다.
그 빈도는, 대략 10초.
‘10초에 5pt라. 1분이면 30pt? 거의 사기네.’
그뿐만 아니라 몸에 깃든 활력 역시 무시할 수준이 아니었다.
“상태창.”
이름 : 이강현
레벨 : 25
고유 특성 : <광검제>
보유 스킬 : 광검[Lv.6], 섬광[Lv.4], 순보[Lv.2], 질주[Lv.1], 참격[Lv.2], 여명의 눈[Lv.1], 휘광[Lv.1]
능력치 : 근력[Lv.10 +5], 민첩[Lv.20 +5], 체력[Lv.16 +5], 마력[Lv.12 +5]
“……와우.”
모든 능력치에 +5가 붙은 걸 확인한 강현의 입에서 짤막한 감탄이 새어 나왔다.
5라는 능력치는 결코 적은 차이가 아니었다.
오브로 얻을 수 있는 건 거기서 끝난 게 아니었다.
‘기여도.’
1. 이강현(400pt)
2. 이현(310pt)
3. 카로크 살리스(60pt)(탈락)
4. 백청(30pt)(탈락)
5. 이립(20pt)(탈락)
이현의 기여도를 확인한 강현은 눈매를 좁혔다.
2. 이현(320pt)
…….
2. 이현(330pt)
…….
괴수와 함정을 꼼꼼하면서도 느긋하게 처리하며 오는지, 기여도가 조금씩 상승하는 중이었다.
‘나머지는…… 형편없고.’
아무래도 카로크 살리스와 이립, 백청은 괴수와 함정을 처리하기보단 중앙으로 오는 데에 집중했는지 기여도가 현저하게 낮았다.
‘하긴, 그래서 그런 기습을 할 수 있었던 거겠지.’
기여도를 내버리면서까지 기습을 준비한 선인들의 준비성에 강현은 진저리를 치며 자신의 기여도를 확인했다.
400, 405, 410…….
그가 기여도를 보는 지금도 조금씩 늘어나고 있다.
‘이 정도면 아무리 집중견제가 있다고 해도…….’
미니 게임에서만이 아니라 다가올 본 미션에서도 오브를 반드시 노려야 했다.
오브를 품에 집어넣은 강현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립과 백청의 시신은 어느새 사라져 있었고, 그들의 무기로 추정되던 구슬과 부채도 보이지 않았다.
‘가상현실게임처럼 죽는 건가.’
이곳에서 죽어도 실제로는 죽지 않는다고 했으니, 지금쯤 멀쩡하게 현실에서 깨어났을 공산이 컸다.
“후우.”
강현은 자신이 나온 통로를 제외한 네 개의 통로를 살펴보았고, 이립과 백청, 카로크 살리스가 나온 통로를 발견해 냈다.
‘이현은 저기서 나오겠네.’
그가 나왔던 통로와 반대 방향의 통로에서, 머지않아 이현이 나타날 터였다.
철컥-
강현은 무구들을 정비하며 이현에 대한 정보를 생각해 보았다.
실전 훈련에서 함께 외눈박이 거인을 상대했던 기억이 있다.
‘유려한 검술을 썼었지.’
목소리를 들은 기억이 없을 만큼 과묵했지만, 행동 하나하나에서 여유가 느껴졌었다.
무려 란 레이센과 비슷한 속도로 외눈 거인에게 도착한 것으로 보아, 그 여유에 걸맞은 실력도 갖추고 있었고.
빨리 올수록 유리한 이 미니 게임에서조차 이토록 느릿하게 오고 있는 걸 보면, 그 여유는 사라지지 않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남은 시간 : 1시간 48분]
미니 게임이 끝날 때까지 남은 시간도 충분하겠다, 누가 됐든 다 이기고 오브를 손에 넣으면 된다고 판단한 거겠지.
‘이길 수 있을까?’
강현은 그 어느 때보다 냉정하게 자신과 이현을 비교해 보았다.
그가 기억하기로 이현의 순위는 11위.
순위는 자신이 높았지만, 순위가 높다고 더 강하다는 건 아니다.
순위는 기여도와 트레이너, 시청자들의 투표를 합산한 결과물이었으니까.
물론 그때에 비해 훨씬 강해졌다는 것.
그건 확실했다.
레벨이 올랐고, 그에 따른 스킬의 개수도 늘어났으며, 가호와 오브까지 들고 있다.
‘만약 못 이기더라도…….’
이 미니 게임은 그에게 있어 좋은 기회가 되어주리라.
무림인과 자신의 격차를 확인할 기회가.
……터벅.
그때였다.
강현의 발달한 기감에 발소리가 들려온다.
[스킬, 광검[Lv.6]을 발동합니다.]
그는 검을 빼 들어 이현을 기다렸고.
터벅-
그로부터 얼마 뒤, 마찬가지로 검을 빼 든 이현을 마주했다.
부드러운 인상의 이현이었으나, 한 치의 빈틈도 찾을 수 없었다.
“……직접 얼굴을 마주하는 건 오랜만이군.”
침묵을 깬 이현이 허공을 응시하며 물었다.
“네 기여도가 계속 오르고 있는데……. 오브를 가지고 있으면 알아서 오르는 건가?”
“그래.”
강현이 고개를 끄덕이자.
“부디 좋은 승부가 되었으면 좋겠군.”
이현 또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음 순간.
팟-
이현은 강현의 지척까지 쇄도해 있었다.
쐐액-!
푸른 검기를 머금은 이현의 검이 짓쳐들어왔고.
[스킬, 섬광[Lv.4]을 발동합니다.]
강현은 섬광으로 맞서 나갔다.
콰쾅!
텅 빈 원형경기장에, 폭음이 울려 퍼져갔다.
* * *
이현의 검과 강현의 검.
두 검이 몇 번 부딪치기도 전.
쉬아악-
이현의 검이 부드럽게 강현의 검을 떨쳐내며 휘어져 들어온다.
“……!”
[스킬, 순보[Lv.2]를 발동합니다.]
강현은 일단 뒤로 물러나 거리를 벌리려 했지만.
쐐애액-!
이현은 어느새 코앞에 당도해 있었다.
[스킬, 참격[Lv.1]을 발동합니다.]
[스킬, 순보[Lv.2]를 발동합니다.]
참격을 흩뿌려 이현의 발을 묶은 뒤에야 거리를 벌리는 데에 성공한 강현이 속으로 욕을 내뱉었다.
‘이런 빌어먹을. 이놈이 왜 11위야?’
단 한 번의 교환으로도 뼈저리게 느껴졌다.
이현과 그는, 기본 체급부터 다르다는 걸.
“이현, 대체 몇 단계지?”
강현의 물음에 이현이 천천히 다가오며 입을 열었다.
“5단계더군. 아마 6, 7단계인 참가자도 있으니 그다지 높진 않은 경지이다만.”
5단계.
강현보다 두 단계나 높았다.
‘하아, 어쩔 수 없나.’
이현의 말을 들은 강현은 무언가를 결심한 얼굴을 해 보였고.
팟-
이현이 달려듦으로써 검의 경합이 다시 시작되었다.
챙! 채채챙!
정면으로 부딪쳤던 종전과는 달리, 강현은 깔짝이면서 맞서 나갔다.
여기서 깔짝이라 함은, 검의 경합을 최대한 피하면서 참격으로 대응하는 것을 의미했다.
10초, 아니, 5초 이상 맞붙어 있으면 위험했기 때문이다.
채챙! 쾅!
“크윽!”
저 멀리 튕겨 나가던 강현은 땅에 처박히기 직전 몸을 뒤집어 착지했다.
“허억…… 헉…….”
숨은 턱 끝까지 차올랐다.
검을 쥔 손은 피투성이였다.
‘흘리기’로 공격을 흘려내고, 그의 숨소리 하나에까지 집중하고 있었음에도 이현의 검은 더없이 위협적이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저 유려한 춤사위일 뿐이었지만, 그 안에는 구렁이 한 마리가 들어 있었다.
강현은 무림인과 자신의 검술 실력 차이를 절실히 깨달았다.
그때였다.
“계속 그런 식으로 도망만 다닐 건가?”
이현의 무덤덤한 목소리가 귀에 꽂힌다.
강현은 어깨를 으쓱였다.
“남은 시간 동안 버티면 내가 이기는 거 아니겠어? 기여도는 지금도 오르고 있는데.”
다분히 허세가 가득한 말이었지만.
[남은 시간 : 1시간 40분]
“……확실히, 일리가 있는 말이군.”
이현은 고개를 주억거린다.
“그렇다면, 도망칠 수 없게 만들어야겠어.”
그 말이 끝나자마자.
쿠오오오-
그의 몸에서 뿜어지는 기세가 달라졌다.
이현 근처의 바닥이 천천히 바스러지고, 검에 서린 검기가 검신이 보이지도 않을 만큼 짙어진다.
‘아껴두고 싶었든, 길게 유지를 못 하든 간에 안 쓰고 싶었던 걸 꺼낸 게 틀림없다.’
강현은 이현이 일종의 승부수를 꺼내 들었다는 걸 직감했다.
저 상태를 길게 유지할 수 있다면, 처음부터 꺼내 들지 않을 이유가 없다.
쾅!
이현이 발로 땅을 밀어냄과 동시에 땅이 터져 나간다.
3단계로 올라선 강현의 시각으로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 속도였다.
“큭!”
이현이 가까이 다가오는 것만으로도 몸이 저릿해진다.
아마 한 호흡으로 끝낼 생각이겠지.
그러나 이현은 알지 못할 것이다.
그가 이렇게 나오기를, 즉 급해지기만을 강현이 기다렸다는 걸.
콰우욱-!
이현의 검이 강현의 허리를 향해 날아든다.
어디로 가도 절대 피할 수 없는 각도와 빠르기.
거기에 강현은.
[스킬, 휘광[Lv.1]을 발동합니다.]
피하기보다는 막는 걸 선택했다.
정확히는, 휘광을 집중시켜 치명상을 피하는 쪽이었다.
슈와아-
강현의 손에서 일어난 찬란한 백광이 이현의 검을 막아갔으나, 완전히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콰직-!
새파란 검기에 닿자마자 휘광이 스러져간다.
그렇지만 이현의 검의 경로를 아주 살짝 비트는 데엔 성공했다.
덕분에 이현의 검이 처음과 3㎝가량 멀어지면서, 강현은 치명상을 피해내는 것처럼 보였다.
“어딜!”
푸화악-
이현이 억지로 검의 경로를 비틀어, 강현의 전면을 크게 베어내기 전까지는.
“크악!”
복부에서 가슴에 이르는 긴 자상을 입은 강현의 입에서 침음이 터졌다.
하나, 강현도 가만히 있던 건 아니었다.
이현의 검이 자신을 베면서 생긴 찰나의 빈틈.
바로 그 빈틈을 노려.
[스킬, 섬광[Lv.4]을 발동합니다.]
모든 힘을 다해 이현의 양 다리를 찍어버렸다.
“큽!”
격통을 느낀 이현에게서 비명이 새어 나왔고.
강현은 온몸에서 피를 철철 흘리면서도.
[스킬, 순보[Lv.2]를 발동합니다.]
뒤로 물러났다.
철푸덕-
그러고는 그대로 엎어져 일어나지 못했다.
흐르는 침묵.
“…….”
역시 쓰러진 이현은 기감을 확장시켜 이강현의 몸 상태를 확인했다.
정신을 잃은 걸로 보이는 데다 피를 많이 흘리고 있긴 했어도, 호흡은 비교적 안정적이었다.
‘거리는…… 10장(30m) 정도인가.’
이강현은 아예 미동조차 못 하고 있고, 이현은 멀쩡히 생각할 수가 있었으니 승패는 명확했다.
그대로 이강현에게 다가가 오브를 빼앗을 수만 있다면, 1등이 되는 건 이현일 터였다.
하지만.
“……당했군.”
이현은 쓰게 웃었다.
쓰러진 이후로 다리가 움직이지 않았다.
두 눈을 멀쩡히 뜨고 있음에도, 일어설 수가 없게 되었다.
‘언제부터 이걸 노린 거지?’
이현은 이강현의 기지에 감탄했다.
자신의 실력이 현격히 밀린다는 걸 깨닫자마자 동귀어진으로 노선을 바꾸다니.
이현은 이강현이 이런 판단을 내린 이유를 잘 알고 있었다.
1. 이강현(760pt)
2. 이현(330pt)
3. 카로크 살리스(60pt)(탈락)
…….
1. 이강현(765pt)
…….
1. 이강현(770pt)
그가 기여도를 보는 지금도 이강현의 기여도는 올라가는 중이었으니까.
이게 현실이었다면 이강현은 살아남더라도 불구가 됐겠지만, 이곳에서는 죽어도 다시 멀쩡히 살아난다.
이강현은 바로 그 점을 이용한 게 분명했다.
이강현이 과다출혈로 죽는다고 해도 이현은 오브를 빼앗을 수 없다.
검을 던져 이강현을 맞춘다는 방안도 있긴 했다.
하나 일어설 수가 없으니 조준부터 힘들었고, 만약 빗나가기라도 한다면 꼼짝없이 남은 시간이 흘러가기를 기다려야만 했다.
중원 최고의 명가인 이씨세가의 차남, 이현은 그런 불확실성에 기대는 무인이 아니었다.
‘기어가는 수밖에 없나.’
이현은 검과 손으로 바닥을 밀어내며 이강현에게 기어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상체에 힘을 실을 때마다.
콸콸-
하체의 상처 부위에서 피가 걷잡을 수 없을 만큼 쏟아져 나왔다.
그럼에도 이현은 포기하지 않고.
1장.
또 1장.
이강현이 있는 곳까지 나아갔다.
하지만 3장(10m)쯤 왔을 때.
“이런.”
이현은 정신이 혼미해져 가는 걸 느꼈다.
피를 지나치게 많이 흘린 것이다.
이대로라면 이강현에게 다가가기도 전에 그가 죽을 게 뻔했다.
이강현을 죽일 수도, 다가갈 수도 없다.
‘살아 있을 의미가 없어졌군.’
남은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스르릉-
이현은 검의 방향을 돌렸고.
“……이번엔 내 패배를 인정하지.”
푸욱!
스스로를 찔렀다.
시간을 끌어봐야 가망이 없다는 걸 알고 빠르게 판단을 내린 것이다.
스아아…….
스스로 목숨을 끊어낸 이현의 시체가, 서서히 사라져 간다.
“…….”
그렇게 이현이 완전히 사라진 순간.
[미니 게임이 종료되었습니다.]
[기여도를 정산합니다.]
혼자 남게 된 강현에게 메시지가 연달아 떠올랐다.
[축하합니다! 미니 게임에서 1등을 차지하셨습니다.]
[보상을 지금 수령하시겠습니까? (Yes/N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