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서울 남부 게이트
이름 : 이강현
종족 : 인간
차원 : 제3 군소
등급 : F
상태창과는 또 다른 창이 나타났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F라니.
‘아마 A부터 F까지 있을 테니까…….’
현재 그의 등급은 최하위라는 소리였다.
강현은 예전에 유행하던 서바이벌 오디션과 그 프로그램의 F등급 연습생들이 어땠는지를 떠올려보았다.
‘춤이고 노래고 간에 몽땅 엉망이었는데.’
기본기도 갖추어지지 않은 연습생들이 F등급을 부여받았었다.
F등급을 받은 연습생들은 항의하기도 하고 뭔가 잘못됐다며 부정하기도 했지만, 시청자들이 보기에는 F등급을 받을 만한 이들이 부지기수였다.
그런데 자신도 ‘그’ F등급이란다.
외부에서 봤을 때는 제대로 된 기본조차 갖추어지지 않았다는 말이었다.
‘어쩔 수 없나.’
어차피 등급이 높지 않으리라는 건 대강 짐작하고 있었다.
다름 아닌 그의 [종족 특성], 즉 각성 때문이었다.
‘종족 특성을 깨닫지 못한 참가자는 거의 없었겠지.’
처음 인어 전사가 나타난 순간 메시지는 말했다. [종족 특성]을 이용해서 싸우라고.
[종족 특성]을 깨닫지도 못한 이들에게 [종족 특성]으로 싸우라는 말을 하지는 않았을 테니, 스튜디오에 소환된 참가자들은 이미 [종족 특성]을 깨달은 이들이 대부분이라는 소리였다.
‘나만 해도 각성한 상태였으면 오래 안 걸렸을 거야.’
당장 튜토리얼을 시작할 때 광검과 섬광을 가지고 있었다면, 그가 튜토리얼을 클리어하는 속도는 훨씬 빨랐을 터였다.
하지만 튜토리얼을 수행할 때의 그는 각성을 하지 못했고, 죽기 직전까지 두들겨 맞고 나서야 겨우 각성을 해냈다.
그러니 처음부터 [종족 특성]을 사용했을 다른 참가자들보다 클리어 속도가 늦을 수밖에 없었고.
지금의 F급은 그걸 반영한 거겠지.
때문에 강현은 크게 낙담하지 않았다.
‘기분은 더럽네.’
짜증이 나기는 했다.
등급을 측정했다는 트레이너들의 낯짝을 보고 싶을 만큼.
하나 강현은 감정을 빠르게 가라앉혔다.
“후우…….”
그가 약자로 분류된 건 명백한 현실이었고.
[다음 소환까지 남은 시간 : 23시간 53분]
시간이 넉넉한 것도 아니었다.
등급을 몰랐을 때는 샤워 같은 과분한 계획을 세웠으나, 현실을 직시하자 마음이 금세 식었다.
“……돌려보내 줘서 다행이네.”
계획대로라면, 하루 동안 그는 더 강해질 수 있을 것이다.
“상태창.”
이름 : 이강현
레벨 : 6
고유 특성 : <광검제>
보유 스킬 : 광검[Lv.2], 섬광[Lv.1]
능력치 : 근력[Lv.2], 민첩[Lv.6], 체력[Lv.4], 마력[Lv.2]
“능력치는 그렇다 치고…….”
어차피 레벨이 오르면 능력치는 오른다.
가장 많이 활용한 능력치가 우선적으로 상승하게 되는데, 지금 신경 쓸 건 아니었다.
그것보다는 새로이 습득한 섬광이 눈에 띄었다.
섬광[Lv.1]
-광(光) 속성의 빛을 응집시켜 강한 관통력을 가진 찌르기를 내지릅니다.
역시 그가 리얼에서 사용했던 섬광과 설명이 똑같았다.
‘이제는 확실해.’
여태까지는 약간 긴가민가한 부분이 있었는데 이걸로 확실해졌다.
앞으로도 레벨이 오를 때마다 그가 아는 스킬들을 배워나갈 것이다.
그렇다면 더더욱 성장할 필요가 있었다.
튜토리얼은 비교적 어렵지 않게 클리어했다지만, 그건 말 그대로 튜토리얼.
본격적인 미션에 대응하려면 더 많은 스킬이 필요했다.
‘10레벨에 배울 건 아마 순보겠지.’
그가 리얼에서 섬광 다음으로 배웠던 스킬은 회피기인 순보(瞬歩).
직선적인 움직임을 가진 섬광에 부드러움을 더해줄 유용한 스킬이었다.
어떤 미션이 나올지는 몰라도 순보가 있다면 큰 도움이 될 것이었다.
‘하루 내로 10을 찍는다.’
꽤나 빡빡한, 아니, 원래라면 불가능한 목표였지만.
다행히 상황이 따라주었다.
이 일대에 E급 게이트 주의보가 내려진 덕이었다.
강현은 때마침 터져준 게이트 주의보에 감사했다.
‘게이트 주의보가 없었으면 꼼짝없이 아카데미에 등록했어야 했겠어.’
막 각성한 각성자가 헌터를 직업으로 가지려면 헌터관리국에서 운영하는 아카데미에 들어가 귀찮은 절차들을 거쳐야 한다.
금방 끝나는 것도 아니다.
교육과 평가를 반복해서 진행하는데 짧게는 몇 주, 길게는 몇 달이 소요된다.
그럼에도 모든 헌터들은 기꺼이 이 과정을 거쳐 헌터로서의 등급과 함께 자격증을 수여받는다.
보통의 게이트는 헌터관리국에서 엄중히 관리하고, 헌터자격증이 없는 이들은 출입조차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원래였더라면 강현 또한 아카데미로 향했을 터였다.
레벨을 올리려면 게이트에 들어가는 게 가장 빠른 방법인데, 아카데미를 수료해야만 게이트에 들어갈 수 있으니까.
‘울며 겨자 먹기로 입소해서 이론 교육이나 받다가 소환됐겠지.’
아무런 성장도 거두지 못한 채 말이다.
“…….”
그걸 상상한 강현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피 같은 시간이 그런 식으로 낭비됐을 거라 생각하자 끔찍했다.
각성을 한 이상 언젠가 아카데미에 들어가기는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
때마침 터진 게이트 주의보가 그것을 가능하게 했다.
‘운이 좋았어.’
게이트 주의보.
특정 지역에 반나절 가까이 인스턴스 게이트를 우후죽순으로 생성시키는 현상이다.
예측할 수도, 미리 대비할 수도 없는 인스턴스 게이트 때문에 게이트 주의보는 그 등급에 상관없이 일반인들에게는 재앙 그 자체로 인식된다.
하나 D, E, F급 같은 하급 헌터들에게는 달랐다.
‘다디단 꿀이랬지.’
평상시 게이트는 헌터관리국에 의해 철저하게 출입이 통제된다.
그러나 게이트 주의보가 발생했을 때만큼은 다르다.
언제 어디서 생길지 모르는 인스턴스 게이트이기에 헌터관리국의 대처 또한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틈을 노려 하위 헌터들은 레벨 업 및 괴수의 마석과 가죽, 뼈 등을 챙기곤 했다.
온갖 호사를 누리는 잘나가는 헌터들과는 달리, 먹고살기에 급급한 그들이 게이트 주의보를 가끔 찾아오는 보너스처럼 여긴다는 건 공공연하게 알려진 사실이었다.
헌터관리국의 입장에서도 게이트 주의보로 인한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기에 눈감아주는 편이었고.
강현의 계획은 거기서 착안되었다.
‘분명 팀 단위로 하급 헌터들이 몰려들 거야.’
E급 게이트 주의보에 달려드는 하이에나들 사이에 끼어드는 것.
게이트를 통제할 헌터관리국은 한참 뒤에나 올 테니, 자격증이 없는 것도 문제가 안 될 가능성이 컸다.
게다가.
‘E급 게이트라고 해봐야 인어 전사들이랑 비슷한 수준일 거 같은데.’
그가 생각하기에 튜토리얼에서 상대했던 인어 전사들은 E급에서 F급.
그놈들을 무난히 상대했던 걸 되돌아보면, E급 게이트에 들어가기에는 충분하다고 판단됐다.
“어디 보자…….”
강현은 스마트폰을 집어 들어 헌터관리국에서 운영하는 한국 헌터 공식 사이트에 접속했다.
헌터자격증이 있는 이들만 접속할 수 있었으나, 강현은 예전에 총을 들고 게이트에 뛰어들었을 때 이미 아이디를 구해놓은 상태였다.
‘그 멍청했던 짓이 도움이 다 되네.’
씁쓸하게 웃으며 검색창에 게이트 주의보를 입력하자 구인 글이 주르륵 떴다.
[유틸이나 회복계 헌터 급구. 현재 5인 팀이 대기 중이고 레벨 10 이상만. 등급은 무관.]
[‘골드러시’ 팀 : 공격계 E급 이상 헌터 한 명 구함. 레벨 15 이상일 것. 비율은 따로 상의.]
…….
즉석에서 팀을 구해 게이트에 진입하려는 이들이나, 이미 결성된 팀에 결원이 생겨 인원을 보충하려는 팀의 글들이 대부분이었다.
[‘가늘고 길게’ 팀 : 사냥을 보조해 줄 헌터 구합니다. 레벨이나 등급은 상관없습니다. 총 네 명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현재 결원이 생겨…….]
‘가늘고 길게?’
당연하게도 들어본 적 없는 팀이었다.
그래도 레벨과 등급에 상관없이 공격계 헌터를 구한다는 점과 합을 맞춰왔던 팀이라는 게 마음에 들었다.
‘글만 봤는데 존중이 느껴지기도 하고.’
강현은 바로 ‘가늘고 길게’ 팀의 팀장에게 전화했다.
역시 한시가 급한지 최대한 빨리 와달라는 말을 들었다.
그 또한 시간이 없었으니 잘된 일이었다.
강현은 만날 장소를 정한 뒤 전화를 끊었다.
“그럼 가 볼…… 아.”
곧장 나가려던 강현은 멈칫했다.
생각해 보니 무기가 없었다.
“으음…….”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강현의 시선이 부엌으로 향했고, 이내 한 곳에 닿았다.
“저거면 되려나.”
길이는 짧고, 끝은 뭉툭하면서도 분명한 예리함을 가지고 있는 그것은.
식칼이었다.
* * *
게이트 주의보가 발생한 지 두 시간째.
-전달합니다. 거리에 나와 계시는 시민 여러분들은 실내로 들어가 주시고…….
일반인들은 진작 실내로 들어가 코빼기도 모습을 비추지 않았으나, 게이트가 밀집된 부근만은 인적이 바글바글했다.
코스프레를 보듯 가지각색의 장비를 착용한 무리.
이번 게이트 주의보를 노리고 각지에서 달려온 헌터들이었다.
적어도 오십 명 이상이었는데, 뒤늦게 도착하는 헌터들이 많았기에 그 수는 계속해서 늘어났다.
그에 따라 자연스럽게 게이트에 들어가려는 경쟁도 치열해졌다.
생겨난 게이트는 모두 다섯 개.
팀원들을 모두 데리고 온 팀들은 문제없이 들어갔지만, 팀원의 수가 모자란 팀장들은 저마다의 방법으로 팀원을 충원하기 위해 노력했다.
“방어 특성, E급 이상 두 명만!”
목청껏 소리를 지르는 이들부터, 인터넷에 글을 올려 구인을 하는 팀까지.
‘가늘고 길게’ 팀의 팀장, 고석현은 인터넷에 글을 올린 쪽이었다.
평소였다면 ‘가늘고 길게’ 팀도 바로 게이트에 진입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결원이 있었다.
‘하필 오늘 배탈이 나냐.’
고석현은 전날 뭘 잘못 먹었는지 응급실로 직행한 동생을 생각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히 ‘가늘고 길게’ 팀은 오랜 시간 합을 맞춰왔다.
사냥을 보조해 줄 헌터 한 명만 있다면 충분히 사냥을 할 수 있으리라 판단이 됐기에, 최대한 빨리 인원을 충원하는 데에 집중했다.
어쭙잖게 조건을 따지다가 발만 동동 구르는 것보다는 그게 낫다는 생각이었고, 실제로 금세 용병을 구할 수 있었다.
‘빨리 구해져서 다행이야.’
그는 곧 도착할 용병의 정보를 떠올렸다.
‘F급에 공격계, 레벨은 6이라고 했지.’
그 수준이면 사냥을 이끌어가지는 못하더라도 보조는 해줄 만했다.
짐을 들고, 가끔 페이스를 잃어 밀리는 팀원이 있으면 지원해 주는 정도의 보조.
그런데 잠시 후.
“가늘고 길게 팀 맞습니까?”
“……이강우 씨?”
도착한 용병의 차림새를 본 고석현은 눈살을 미세하게 찌푸렸다.
그도 그럴 게.
‘무기도 없고, 방어구도 없고.’
후드에 청바지를 입고 모자에 마스크를 써서 얼굴을 가린, 썩 미덥지 않은 차림이었다.
아무리 E급 게이트 주의보라고 해도 F급 헌터가 저런 차림으로 오다니.
“저기요, 아무리 그래도…….”
한마디 하려던 고석현은 어떻게든 인원을 구하려고 애를 쓰는 주위를 둘러보고는 말을 삼켰다.
1분 1초가 급한 상황에 눈앞의 청년을 거절했다가는 괜한 시간만 더 날릴 수도 있었다.
“게이트는 들어가 보셨죠?”
“아니요, 처음인데요.”
“…….”
가관 그 자체인 청년의 대답에 고석현은 진지하게 보조를 다시 구할까 고민했지만.
‘어차피 보조 역할인데 내가 설명해 주면 되지, 뭐.’
이내 마음을 정했다.
팀원들이 불만을 터뜨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문제가 있으면 그때 가서 해결하면 된다는 마음가짐이었다.
“게이트 정보도 하나도 모르시겠네……. 일단 가시죠, 자세한 건 가면서 설명할 테니까.”
그는 기다리고 있을 팀원들에게로 청년을 이끌어갔다.
이강우, 아니, 강현의 튜토리얼 이후 첫 실전이었다.
게이트.
‘시스템’과 더불어 지금으로부터 오 년 전, 세상을 ‘헌터와 게이트의 시대’로 뒤바꾼 현상.
밖에서 볼 때는 그저 공간을 가르는 한 줄기 균열로 보일 뿐이지만, 그 안으로 들어가면 아예 다른 세상이 펼쳐진다.
초원이나 고원, 평야를 연상시키는 게이트부터 폐 도시, 던전, 미로를 떠올리게 하는 게이트까지.
내부가 똑같은 게이트는 하나도 없을 정도로 가지각색이었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게이트에 통용되는 몇 가지 격언은 존재했다.
‘자고로 헌터라면 게이트의 괴수들을 피하지 말아야 한다’도 그중 하나였다.
괴수를 최대한 피하면서도 핵을 부술 수 있기는 하다.
하지만 괴수를 다 잡지 않은 상태에서 핵을 파괴하게 된다면 레벨을 올릴 경험치를 모두 얻지 못한다.
그뿐만 아니라 괴수에게서 나오는 마석이나 뼈, 가죽과 같은 부산물도 덜 챙길 수밖에 없다.
사냥을 나서는 대부분 헌터들의 목적이 경험치를 얻어 레벨을 올리고, 부산물들을 판매하여 이익을 얻기 위함이라는 걸 생각하면 아까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니 가급적 모든 괴수를 쓸어버리고 핵을 파괴하는 게 일종의 관행이었다.
그 관행은 E급 게이트 주의보가 내린 서울 남부의 근교에서도 착실하게 이행되고 있었다.
“그쪽으로 불도룡뇽 한 마리 간다! 잡아!”
“후딱 처리하고 가야 되니까 다들 집중해!”
헌터관리국이 도착하기 전까지 최대한 게이트를 즐기려는 하급 헌터들의 몸부림이 있었으니까.
그건 ‘가늘고 길게’ 팀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적당한 때에 진입한 그들은 괴수를 찾아 안쪽으로 이동하는 중이었다.
그리고 가는 동안.
“일단 우리가 들어온 게이트는 4번 게이트예요. 자, 주변을 보세요. 아카데미에서 교육받으셨다면 알겠지만 무지 넓은 평야에 밀림이 살짝 섞인 무난한 지형이죠? 게이트에 처음 들어와 보셨다니까 알려드리는 건데 이런 지형이 제일 꿀이에요.”
“……오는 길에 보니까 불도룡뇽이 대부분이던데 그놈들이 불을 뿜는다는 거랑 다시 쏘려면 시간이 필요하다는 건 아실 테고……. 보통은 서너 마리가 뭉쳐 다니는데, 가끔 그 이상이 다니는 경우도 있다네요.”
“……참고로 강우 씨는 보조로 합류한 거라 비율은 1이 정산될 거고……. 헌터관리국이 대여섯 시간 내로는 올 거거든요? 그러니까 최대한 빨리 털고 가야 해요. 아공간 주머니가…… 여기 있구나. 지금 드릴 테니까 저희가 사냥한 괴수들 넣어주시면 돼요. 아, 참. 관리국이 오면 하늘에 신호탄을 날리니까 그거 기억해 두시고요.”
게이트에 처음 진입해 봤다는 보조를 위한 고석현의 설명이 이어졌다.
그런 그들을 나머지 팀원 둘은 탐탁지 않은 눈으로 바라보았다.
“……F급한테 저렇게 잘 대해주는 D급은 형님밖에 없을 거야.”
큼직한 메이스를 메고 있는 김진우가 투덜거렸다.
그는 12레벨의 E급 헌터로, 팀에서 메인 딜러를 맡고 있었다.
“그러니까. 어차피 아무 도움 안 될 텐데.”
그 말을 받은 건 팀의 힐러이자 13레벨의 E급 헌터인 이성현이었다.
서브 딜러인 정범식이 배탈로 이탈한 상황.
그들은 처음 고석현이 데려왔다는 보조에게 쏠쏠한 기여를 기대했었다.
하나 그들의 기대는 빠르게 식었다.
게이트에 처음 들어와 본다는 것도 그랬고, 후드에 청바지, 모자에 마스크를 쓰고 있는 것도 말이 안 됐다.
무기랍시고 꺼낸 식칼을 보고는 기대감이 완전히 사라졌다.
그렇다고 그들이 새 보조를 미워하거나 한 건 또 아니었다.
“우리가 더 잘하면 돼.”
“그래, 비율이 아깝긴 해도…….
‘가늘고 길게’는 가장 나이가 많은 형님이자 탱커인 고석현을 중심으로 똘똘 뭉친 팀이었고, 심성이 착한 고석현과 마찬가지로 나머지 팀원들 역시 기본적으로 선했다.
그저 한 명이 없는 거나 다름이 없으니 자신들이 더 열심히 해야 한다고 굳게 다짐할 뿐.
따라서 잠시 후.
“불도룡뇽이다! 준비해!”
그들은 전투의 시작을 알리는 고석현의 외침에 일사불란하게 자세를 취했다.
“키에엑…….”
발견한 불도룡뇽은 모두 네 마리.
도룡뇽이 아니라 하마라고 불러도 무방할 크기였다.
불도룡뇽 무리 또한 적의 존재를 감지했는지, 이글거리는 불꽃을 토해내며 달려들었다.
그걸 본 고석현이 앞으로 나섰다.
“내가 막을게!”
[스킬, 철벽[Lv.4]을 발동합니다.]
그의 몸이 회색빛으로 빛나며 단단해졌고.
[스킬, 공격 유도[Lv.2]를 발동합니다.]
이어서 발동한 스킬로 인해 불도룡뇽들에게서 뿜어지는 불꽃이 한꺼번에 고석현을 덮쳤다.
푸화악-
회색빛이 된 고석현이 불꽃을 분쇄시켜 간다.
원래였다면 다른 팀원들에게 향했을 불꽃까지 뒤집어쓴 상황.
“크윽…….”
고석현의 입에서 침음이 새어 나왔다.
그때 이성현이 움직였다.
[스킬, 치유[Lv.2]를 발동합니다.]
이성현이 내민 손에서 녹색 빛이 흘러나가 고석현에게 닿자 그의 표정이 확연히 나아졌다.
슈우우-
불도룡뇽들의 불꽃 세례가 끝나고 찾아온 소강상태.
메이스를 든 김진우가 나섰다.
[스킬, 찍어누르기[Lv.3]를 발동합니다.]
그가 휘두르는 묵직한 일격이 불도룡뇽의 머리에 작렬하자, 불도룡뇽이 울부짖으며 쓰러진다.
“하압!”
김진우의 메이스가 다시 휘둘러졌고, 또 하나의 불도룡뇽의 괴성이 울려 퍼졌다.
화르륵-
남은 불도룡뇽들이 다시금 불을 내뿜어봤지만, 고석현과 이성현의 콤비에 막힐 뿐이었다.
몇 번의 교환 끝에 모든 불도룡뇽이 정리되었다.
“후욱…… 후욱…….”
직접 놈들과 맞상대한 고석현이 숨을 골랐다.
느낌이 나쁘지 않았다.
‘이 정도 컨디션이면…….’
현재 그의 레벨은 18.
잘하면, 오늘 20을 찍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오늘 사냥을 나서길 잘했다고 생각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성현과 김진우 또한 자신과 같은 느낌을 받았는지 신이 나 보였다.
‘아, 이강우 씨.’
고석현은 뒤늦게 보조의 존재를 떠올리고 시선을 돌렸다.
그는 불도룡뇽의 사체를 수거하고 있었다.
‘뭐, 처음이니까…….’
이대로라면 나설 기회가 없어 경험치를 나누어 받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나 1의 비율이 주어지고, 헌터로서의 삶이 어떤지 느낄 수는 있을 테니 나쁘지 않을 거라 생각됐다.
“자, 가자!”
적당한 휴식을 취한 뒤, 고석현은 힘차게 소리쳤다.
다시 사냥에 나선 그들은 두 번째와 세 번째 불도룡뇽 무리도 잘 상대해 나갔다.
“형님! 오늘 15 찍겠는데요?”
“저도요!”
불도룡뇽들은 순조롭게 잡혀갔고, 김진우와 이성현의 레벨이 1씩 올랐다.
그렇게 이번 사냥은 대성공으로 끝날 것만 같았다.
“케엑…….”
“키아악-!”
무려 열 마리의 불도룡뇽 무리가 몰려오기 전까지는.
보통 서너 마리, 많아 봤자 다섯 마리였던 지금까지와는 두 배 넘게 차이나는 규모.
“형님! 어떡하죠? 아슬아슬하게 될 거 같기도 한데…….”
“한번 해보자!”
자신감이 올라 있던 그들은, 처음에는 맞서 싸워 나갔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오판이라는 걸 깨달았다.
화르르륵-
푸화악-
“크윽!”
불꽃 세례에 휩싸인 고석현이 고통스러운 몸부림을 치기 시작하면서, 힐을 주는 이성현도 안색이 창백해져 간 것이다.
“제길! 너무 많아서 정타를 먹이기가 힘들어요!”
거기에 뭉쳐 있는 불도룡뇽들을 김진우가 제대로 공격하지 못하자 고석현은 빠르게 결정을 내렸다.
“일단 물러나서 정비하자!”
지금이 모두가 몸 성히 빠질 수 있는 마지막 타이밍이었다.
더 결정이 늦어진다면 누구 하나 크게 다칠 수도 있었다.
그때였다.
“이강우 씨도 어서…… 어? 이강우 씨?”
줄곧 뒤에만 있던 보조가 앞으로 나선 것은.
그것도.
“할 수 있을 거 같은데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면서 말이다.
“그게 무슨…….”
“뭐라고요? 무슨 말을…….”
이성현과 김진우가 아연실색하는 사이.
스윽-
어느새 식칼을 꺼낸 보조가 그들을 스쳐 지나갔다.
“어…….”
그런 그를 멍청하게 바라보던 고석현이 소리를 질렀다.
그도 그럴 게.
“뭐 하는 거야! 죽고 싶어?!”
가장 가까이 있는 불도룡뇽이 불을 뿜으려 하고 있었다.
나머지 불도룡뇽들도 입을 쩍 벌리고 있는 것이, 이제 곧 다시 한번 불꽃 세례가 시작될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목표가 불도룡뇽 무리에게로 접근하고 있는 보조가 되리라는 건 자명한 일이었다.
“제길! 성현아! 힐!”
고석현은 욕지거리를 내지르며 스킬을 발동했다.
보조가 말도 안 되는 짓거리를 하고 있기는 해도 죽게 놔둘 수는 없었다.
[스킬, 철벽[Lv.4]을 발동합니다.]
그는 이 위기를 넘긴다면 손해배상이라도 청구해야겠다고 다짐하며 앞으로 뛰쳐나갔다.
하지만 그의 몸이 불에 달궈지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푸슛-
불을 쏘려는 불도룡뇽에게 쇄도한 보조가 놈의 목구멍에 식칼을 내찔렀으니까.
“어……?”
“쿠에엑…….”
불도룡뇽의 목구멍에서 피가 치솟았고, 고석현은 눈을 부릅뜬 채 순간 멍해졌다.
그런 그에게, 보조가 식칼을 뽑으며 말했다.
“거들어도 될까요? 제가 좀 급해서.”
푸확-
뽑아낸 식칼엔 은은한 백광이 자리하고 있었다.
“…….”
그 은은한 빛 때문일까.
혹은 그가 믿을 수 없을 만큼 깔끔하게 불도룡뇽을 해치웠기 때문일까.
정신을 차렸을 때, 고석현은 저도 모르게 대답하는 중이었다.
“예에…….”
“좋네요.”
그 말에 보조, 아니, 강현이 씩 웃었다.
[다음 소환까지 남은 시간 : 18시간 20분]
시간이 많지는 않았다.
그의 경쟁자들 역시 준비를 하고 있을 테고,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할 수 있는 건 남은 시간 동안 최선을 다하는 것뿐.
푸화악-
따라서, 불도룡뇽들이 차례대로 불을 뿜어냈음에도 강현은 달려 나갔다.
[스킬, 광검[Lv.2]을 발동합니다.]
그의 손에 들린 찬란한 백광과 함께.
푸화악-
불도룡뇽의 목구멍에서 뿜어져 나오는 불꽃 세례.
그 각각의 불꽃 세례는 한 번이라도 닿는다면 치명상을 입을 위력을 품고 있었다.
그러나.
타탓-
강현은 춤을 추는 것처럼 불꽃 세례를 피해 나갔다.
어떤 불꽃들은 형편없이, 또 어떤 불꽃들은 아슬아슬하게 강현을 지나갔다.
그 불꽃들의 공통점이라면, 끝내는 강현에게 닿지 못했다는 것.
강현에게 닿지 못한 불꽃 세례는 애꿎은 수풀만을 불태웠고, 서서히 잦아들어 갔다.
그리고 불도룡뇽들의 불꽃 세례가 끝난 그 순간, 흐름이 바뀌었다.
불도룡뇽들에서, 강현에게로.
불꽃 세례를 피해내던 강현의 움직임이 달라졌다.
아니, 정확히는 단순해졌다고 봐야 할 것이다.
방금의 강현이 불꽃 세례를 피하고자 이리저리 움직였다면.
타타타탁-
지금은 그저, 일직선으로 주욱 달릴 뿐이었으니까.
어느덧 불도룡뇽들 중 하나의 지척에 다다르자 식칼의 광채가 한층 더 짙어졌다.
[스킬, 섬광[Lv.1]을 발동합니다.]
그대로 이어지는 섬광을 불도룡뇽은 견뎌내지 못했다.
“키에엑…….”
피를 흩뿌리며 쓰러진 것이다.
단 한 번의 공격으로 한 마리를 쓰러뜨린 상황.
강현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다시 다음 표적을 향해 나아갔고.
[스킬, 섬광[Lv.1]을 발동합니다.]
“쿠웨에엑-!”
또 한 마리의 불도룡뇽을 해치우는 데에 성공했다.
단 한 번의 동선 낭비도 없이 부드럽고 자연스러운 일련의 과정.
그 모든 과정을, 고석현은 눈을 부릅뜬 채 지켜보는 중이었다.
‘내, 내가 뭘 보고 있는 거지?’
느닷없이 나선 것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충격의 연속이었다.
‘말도 안 돼. 저게 F급이라고?’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단신으로 불도룡뇽 사이에 뛰어들어 순식간에 두 마리를 해치우는 것?
가능은 할 것 같았다.
서서히 헌터계에 이름을 알려가는, 유망한 공격계 특성을 지닌 D급 이상의 헌터가 나선다면 말이다.
하나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은 그의 생각을 근간부터 뒤흔들었다.
“이럴 수가…….”
고석현이 쥐어짜듯이 중얼거렸다.
마땅한 장비도 없는 F급 헌터가 식칼만으로 E급 게이트에서 날뛰고 있다니.
그런 헌터는 듣도 보도 못했다.
이제는 불도룡뇽들도 보통 상대가 아니라는 걸 느꼈는지 조금씩 물러나고 있다.
D급 헌터 한 명과 E급 헌터 두 명이 한꺼번에 덤벼도 안 되던 걸, 혼자 힘으로 만들어내다니.
“…….”
옆을 보자 이성현과 김진우도 입을 쩍 벌리고 있었다.
그럴 만도 했다.
보조가 보여준 것은 그 정도로 상식 밖의 일이었다.
이어서 세 번째 불도룡뇽이 쓰러졌을 때였다.
쿠쿵- 쿵-
남은 불도룡뇽들이 땅을 마구 흔들며 도망가기 시작했다.
전투의 끝을 알리는 승전보였다.
그리고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
모두의 시선이 강현에게 향했다.
* * *
식칼에 서려 있던 찬란한 빛이 꺼짐과 동시에 메시지가 떠오른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민첩이 1 상승합니다.]
[마력이 1 상승합니다.]
[스킬, 섬광[Lv.2]을 습득합니다.]
이걸로 레벨은 7.
‘갑자기 나선 것치고는 괜찮았어.’
예상한 것보다는 늦었으나, 늦게라도 나설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가늘고 길게’ 팀은 합이 좋았다.
그냥 좋은 것도 아니다. 꽤나 좋았다.
처음엔 적당한 시기에 나서서 돋보이려 했는데, 그의 예상보다 ‘가늘고 길게’ 팀이 훨씬 잘 싸웠다.
자칫하다간 뒤에서 사체나 치우다가 사냥을 종료했을 수도 있을 만큼.
만약 저들이 계속 잘 싸워서 그가 끼어들 여지를 주지 않았더라면 곤란했을 터였다.
‘불도룡뇽들이 잔뜩 몰려와 줬기에 망정이지.’
놈들이 ‘가늘고 길게’ 팀을 밀어붙여 주었기에 기회가 온 셈이니, 어찌 보면 불도룡뇽들이 도와준 거나 다름없었다.
게다가 자신이 한계에 달했을 즈음 알아서 물러나 주기까지.
덕분에 괜찮은 활약을 선보이게 됐다.
그리고 그 활약은.
“이, 이강우 씨? 몸은 괜찮으십니까?”
‘가늘고 길게’ 팀으로 하여금 강현을 달리 보게 한 듯했다.
“정말 감사합니다. 이강우 씨가 아니었다면 대처가 늦을 뻔했습니다.”
고석현이 진심 어린 표정으로 고마움을 표했다.
이성현과 김진우도 마찬가지였다.
“진짜 잘 싸우시던데요.”
“몰라봬서 죄송합니다.”
한 번의 뛰어난 활약으로 좋은 인상을 남기면 이게 좋다.
보는 시각이 달라진다.
새삼 오랜만에 받는 느낌이었다.
물론 이 활약에는 팀원들이 알지 못하는 비밀이 있었다.
이들은 강현을 단순한 F급으로 알고 있겠지만, 강현은 보통의 F급에 속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강현은 리얼을 갓 시작했을 때를 떠올려 보았다.
지금처럼 몬스터들에게 달려들어 사냥을 해야 했다.
처음부터 잘 싸웠느냐?
절대 아니었다.
‘엉망진창이었지.’
처음에는 버벅대다 못해 한심했지만, 수없이 노력한 끝에 동 레벨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강함을 갖추어갔다.
레벨이 낮고 스킬이 적더라도 적을 잘 파악하기만 하면 얼마든지 활약할 수 있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그때의 경험은, 비록 리얼은 아니었으나 이곳 게이트에서도 큰 도움이 되었다.
‘뭐, 리얼의 몬스터였으면 짝다리로도 다 쓸어버렸겠다만.’
그걸 알지 못하는 ‘가늘고 길게’ 팀원들에게 방금의 모습은 마치 정체를 숨긴 C, D급처럼 보였겠지.
“진짜 F급 맞으신지…….”
지금 고석현이 물은 것처럼.
거기에 강현은 난처한 웃음을 보였고, 고석현도 그걸 느꼈는지 더 묻지 않았다.
대신 다른 말을 꺼냈다.
“저, 혹시 관리국이 오기 전까지 게이트 내에서 같이 사냥하실 생각이 있으신지요? 비율 문제는 다시 논의해 봐야겠지만…….”
그건 현재 강현이 원하는 바와 일치하는 제안이었기에.
“비율은 그냥 인원수로만 나눠도 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강현은 깔끔하게 수락하며 손을 내밀었다.
고석현의 얼굴이 환해졌다.
F급? 레벨 6? 얼굴을 꽁꽁 싸맨 거?
괴물 같은 실력을 본 이상 그런 것들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만약 절반의 비율을 원했다고 해도 고석현은 기쁘게 받아들였을 것이다.
눈앞에 있는 수준의 실력자와 함께 사냥하는 건 그만큼 흔치 않은 기회였다.
“그, 그럼 잘 부탁합니다!”
고석현이 놓칠세라 그 손을 붙들었다.
“그, 그럼 앞으로도 강우 씨라고 부르면 될까요?”
“네, 그래 주시면 됩니다. 그런데 궁금한 게 있는데요.”
“예? 얼마든지 물어보시죠!”
“제가 맡았던 사체 수거는 어떻게…….”
강현의 말이 끝나기도 전이었다.
“아공간 주머니 주시면 제가 하겠습니다!”
“아뇨! 제가 할게요!”
이성현과 김진우가 후다닥 튀어 나갔고.
씨익-
조용히 아공간 주머니를 건넨 강현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역시, 활약한다는 건 좋은 일이다.
* * *
이후의 사냥은 거침없이 진행됐다.
원체 뛰어난 합을 자랑하던 ‘가늘고 길게’ 팀이다.
여기에 본격적으로 강현이 합류하자 단순 인원이 한 명 늘어난 걸 넘어서는 시너지가 생겼다.
오죽했으면.
“뭐, 뭐야. 저 팀 뭐야?”
“몇 마리를 잡는 거야?”
지나가다 종종 마주친 다른 팀들이 자리를 피했을까.
“키에엑…….”
“키엑…….”
다섯 마리가 넘는 불도룡뇽들이 다가왔음에도 일행은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간다!”
고석현과 이성현이 든든하게 받쳐주는 가운데 강현의 식칼이 빛났고, 김진우의 메이스가 휘둘러진다.
쿵- 쿠쿵-
마지막 남은 불도룡뇽이 꽁무니가 빠지도록 도망가는 걸 끝으로 종료되는 전투.
이걸로 벌써 네 무리째.
여태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속도였고, 불도룡뇽들을 말 그대로 쓸어가다시피 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속도에 ‘가늘고 길게’ 팀이 함박웃음을 지었다.
“와아, 진짜 대박인데?”
“미쳤어……! 너무 쉽잖아?”
승부수를 던질 필요도, 울상을 지으며 공격을 막거나 돌진할 필요도 없다.
그저 시선만 끌어주면 그사이에 강현이 불도룡뇽들을 처리했다.
사냥이 이렇게 편할 수가 없었다.
“이러다가 오늘 내로 진짜 15 찍겠는데요?!”
“저도요!”
“하하하! 관리국이 오기 전까지 한번 해보자!”
그 사실에 ‘가늘고 길게’ 팀은 더할 나위 없이 신나 했지만, 정작 사냥을 편하게 만든 당사자는 덤덤한 표정이었다.
그저 시간을 확인하고.
[다음 소환까지 남은 시간 : 17시간 22분]
상태창을 불러낼 뿐이었다.
“상태창.”
이름 : 이강현
레벨 : 9
고유 특성 : <광검제>
보유 스킬 : 광검[Lv.2], 섬광[Lv.2]
능력치 : 근력[Lv.2], 민첩[Lv.9], 체력[Lv.5], 마력[Lv.4]
7에서 9로 오른 레벨이 기쁘긴 했다.
처음 목표로 삼았던 10레벨이 한 발짝 가까워졌는데 기쁘지 않을 이유가 없다.
하지만 그는 만족하지 않았다.
‘한참 멀었어.’
모자랐다.
갈증이 일었다.
오 년 동안 겪었던 설움을 털어내려면 이걸로는 턱도 없었다.
‘더 강해지고 싶다.’
아직 웃기에는 일렀다.
“가시죠.”
“옙!”
“옙!”
강현의 말에 ‘가늘고 길게’ 팀이 우렁차게 대답했다.
그렇게 재개된 사냥.
강현은 누구보다도 더 적극적으로 전투에 임했다.
서걱-
쿵-
불도룡뇽을 베어 넘기는 손끝이 슬슬 떨려온다.
계속된 사냥으로 피로가 극에 달한 탓이다.
그럼에도 강현은 몸에 조금의 사정도 두지 않았다.
아무리 힘들더라도 만전이었을 때와 똑같이 행동했다.
서걱-
“키에엑!”
연이은 공격에 삽시간에 불도룡뇽들이 나가떨어진다.
‘확실히 나는 헌터계에서 초보다.’
따지고 보면 각성한 지 하루도 되지 않은 그다.
어떤 요인이 상급 헌터와 하급 헌터를 가르는지 그는 모른다. 모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리얼에서는 달랐다.
상위 랭커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이 중요했는지 똑똑히 알고 있었다.
‘도전.’
아득히 높을지라도 목표를 정하고, 그 목표를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자만이 위로 올라갔다.
자신의 한계에 끝없이 부딪치면서 그 한계를 돌파하려 발버둥 치는 자만이 기어코 한계를 뚫어냈다.
그는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비슷해.’
지금 그가 처해 있는 상황이 리얼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리얼과 크게 다르지도 않다는 걸.
때문에 강현은, 어떻게든 앞으로 나아가려 애썼다.
서걱-
“키에엑-!”
베어내고.
푸슛-
“키켁켁!”
또 베어내면서.
“헉, 헉…… 강우 씨……. 불도룡뇽들이 보이지도 않아요. 거짓말 안 하고 삼 분의 일은 우리가 잡은 거 같은데…….”
“이, 이제 그만 물러나야 할 거 같은데요?”
“으악! 사체가 안 들어가요!”
계속되는 사냥에 지친 ‘가늘고 길게’ 팀이 그만 빠지자고 말하고, 아공간 주머니가 불도룡뇽들의 사체로 그득히 들어찼음에도 그는 사냥을 강행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레벨 10을 달성하자, 그제야 표정이 풀어졌다.
‘드디어.’
처음 세웠던 목표를 달성한 것이다.
“오옷! 15다!”
“오! 진짜?!”
“스킬! 스킬을 보자!”
옆을 보자 이성현도 스킬을 배웠는지 시끄러웠다.
강현은 신경 쓰지 않고 메시지를 기다렸다.
[근력이 1 상승합니다.]
[체력이 1 상승합니다.]
[스킬, 광검[Lv.3]을 습득합니다.]
[스킬, 순보[Lv.1]를 습득합니다.]
연달아 메시지가 나타났고, 거기에는 그가 고대하던 순보도 포함되어 있었다.
순보[Lv.1]
-짧은 거리를 순간적으로 이동한다.
간단한 설명이었지만, 그가 아는 그대로의 설명이기도 했다.
강현은 즉각 순보를 발동했다.
[스킬, 순보[Lv.1]를 발동합니다.]
슈슉-
그의 신형이 순간 사라지더니, 이내 조금 앞에 나타난다.
발동부터 거리까지. 그의 감각이 기억하는 그대로였다.
‘이 정도면…….’
다가올 미션을 위한 최소한의 준비는 갖춘 셈이다.
강현이 고개를 끄덕였을 때였다.
[^$#이 충족되었습니다.]
“……?”
한 박자 늦게 또 다른 메시지가 떠오르는 게 아닌가.
그것도 제대로 알아볼 수도 없는 메시지였다.
“이건 또 뭐야?”
강현은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그가 그러거나 말거나 메시지는 계속해서 떠올랐고.
[[email protected]#이 &$합니다!]
[[email protected]#가 될 자격을 얻었습니다.]
[스킬, 여명의 눈[Lv.1]을 습득합니다.]
최종적으로 또 하나의 스킬을 배웠음을 알려주었다.
여명(黎明)의 눈[Lv.1]
[email protected]#이 가져야 할 마땅한 권리. #$의 ^#를 꿰뚫어 볼 수 있다.
[경고 : 현재 사용할 수 없는 스킬입니다.]
[@#$이 충족되면 해금됩니다.]
동시에, 강현이 눈을 깜빡였다.
“……이런 스킬은 배운 적 없는데.”
그 말대로였다.
‘이건 대체 뭔 스킬이지?’
광검, 섬광, 순보.
여태껏 그가 습득했던 스킬은 하나같이 그가 누구보다 잘 알았던 스킬들이었다.
그런데 ‘여명의 눈’이라니?
리얼의 바닥부터 정상에 이르기까지,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스킬이었다.
비단 그만이 아니라, 다른 리얼의 플레이어들까지 통틀어서도.
그뿐만이 아니라, 스킬을 얻은 과정도 이상했다.
읽을 수 없는 정체불명의 문자들이 또 나타난 것이다.
‘처음 각성했을 때랑 똑같잖아.’
그는 똑똑히 기억했다.
동기화를 시작한다느니, 고유 특성을 활성화할 수 없다느니 하면서 자신에게 혼란을 주었던, 막 각성하던 순간을.
지금은 그때와 비슷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이번에는 혼란이 한층 더 가중되었다는 점이다.
여명(黎明)의 눈[Lv.1]
[email protected]#이 가져야 할 마땅한 권리. #$의 ^*#를 꿰뚫어 볼 수 있다.
“이건 뭐 제대로 읽을 수도 없네.”
강현이 혀를 찼다.
무언가를 꿰뚫어 보는 스킬이라는 것 외에는 감조차 잡기 힘들었다.
게다가.
[경고 : 현재 사용할 수 없는 스킬입니다.]
[@#$이 충족되면 해금됩니다.]
이건 또 뭐란 말인가.
‘들어본 적 있긴 한데…….’
각성자 중, 제한이 있는 스킬을 배우는 경우가 가끔 있기는 했다.
가령 수영과 관련된 스킬이라면 일정 이상의 지구력을 요구한다거나, 염동력 스킬이라면 수준 높은 공간지각 능력을 갖추지 않고는 스킬이 발동되지 않는 식이다.
하나 그런 경우는 스킬의 습득과 더불어 직접적인 힌트를 함께 제공했다.
이렇게 제대로 된 힌트도 없이 제한만 걸린 스킬은 본 적이 없었다.
강현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 기껏 배운 추가 스킬이 이러냐.’
추가 스킬.
각성을 한 각성자는 5레벨마다 스킬을 습득하게 되는데, 대부분은 하나의 스킬을 얻지만 가끔 그 이상의 스킬을 얻게 되는 경우가 있다.
그걸 세간에서는 추가 스킬이라 부른다.
이번에 그가 순보와 여명의 눈, 두 개의 스킬을 획득한 것처럼.
“우아앗! 버, 버프 스킬이에요! 그것도 근력 강화!”
“지, 진짜냐?”
“대박이다! 한번 써보면 안 돼?!”
옆에서는 이성현의 스킬을 확인하느라 시끌벅적했다.
버프 스킬을 얻은 것 같았는데, 그래서인지 ‘가늘고 길게’ 팀은 매우 들떠 있었다.
추가 스킬을 얻어놓고도 떨떠름한 강현과는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흐음.”
잠시 ‘여명의 눈’의 설명을 노려보던 강현은.
스륵-
이내 눈에 힘을 풀었다.
힘껏 노려봤자 저 정체불명의 문자들을 읽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 대신, 나직이 말을 꺼냈다.
“……여명의 눈.”
[스킬, 여명의 눈[Lv.1]을 발동합니다.]
그러자 마력이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면서, 눈 주위가 시원해진다.
“오, 설마 되나?”
그에 따라 혹시 스킬이 발동될지도 모른다는, 강현의 기대감 또한 한껏 올라갔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오류 : @#$가 충족되지 않았습니다. 스킬이 취소됩니다.]
슈우우-
처음 보는 메시지가 나타나더니, 스킬이 취소된다.
“이런 미친.”
강현은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그 순간이었다.
피유우우-
퍼퍼퍼퍼펑-!
돌연 맑은 하늘에 쉴 새 없이 붉은색의 신호탄이 쏘아졌다.
헌터관리국이 당도한 것이다.
“관리국이다!”
“제길! 조금만 더 사냥했으면 나도 15인데!”
희희낙락하던 이성현과 김진우가 부산스럽게 움직였고, 고석현이 소리쳤다.
“얘들아! 아공간 주머니 챙겼냐!”
“넵! 챙겼습니다!”
이성현이 아공간 주머니를 들어 보였다.
“가자!”
일행은 재빨리 게이트의 입구로 달려가기 시작했고, 강현도 그들을 뒤따랐다.
막판에 이상한 스킬을 배우는 바람에 좀 흐트러지긴 했지만, 성과는 나쁘지 않았다.
레벨 10을 달성했으며, 아공간 주머니에 사체가 더 들어가지 않을 만큼 사냥을 했다.
모르긴 몰라도, 이 게이트를 파괴할 헌터관리국의 일이 조금이나마 편해지지 않았을까.
‘아, 맞다.’
그리고 또 하나.
광검부터 섬광까지, 리얼에서의 그를 나타내던 스킬들을 여러 번 사용했는데도 ‘가늘고 길게’ 팀이 전혀 그를 의심하지 않았다는 것도 성과 중 하나였다.
언제까지고 각성자라는 걸 숨길 생각은 없었으나, 당분간은 피해야 했다.
‘내가 바닥에서 빌빌대는 줄 알고 가만히 있는 놈들인데…….’
리얼에서의 그와 악연을 맺었던 헌터들이 그의 각성 사실을 알게 된다면 귀찮은 일이 일어날 수도 있었다.
‘찾아오기라도 하면 곤란하지.’
든든한 뒷배라도 생기지 않는 한, 스스로를 지킬 수 있을 때까지는 모습을 숨겨야 했다.
물론, ‘몇몇’ 그의 극성팬들은 광검
만 보고 그의 정체를 알아챌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을 제외한 나머지에게 들킬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만으로도 한시름 놓은 기분이었다.
[다음 소환까지 남은 시간 : 17시간 10분]
그렇게 첫 번째 실전이 끝나고, 새로운 실전이 다가오고 있었다.
* * *
그 시각, 게이트 밀집 지역.
-1팀입니다! 1번 게이트, 핵 파괴 완료! 4번 게이트로 이동 중!
-2팀입니다! 2번 게이트 심층부 진입했습니다! 신속히 핵을 파괴하겠습니다!
-3팀입니다! 3번 게이트, 진입합니다!
“네, 진행해 주세요.”
헌터관리국의 서울지부 남부총괄팀장을 맡은 백아영은 속속들이 들어오는 보고를 받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이번에도 어찌어찌 잘 넘기겠네.”
다섯 개의 게이트 중 세 개가 빠르게 진압되는 중이었다.
게이트 주의보가 생겨날 때마다 새삼 느끼는 거지만, 급작스러운 재앙에 대처하기에 헌터관리국의 인력은 너무나 부족했다.
‘싹수가 보이는 헌터들은 아카데미에서부터 길드들이 다 쓸어가고, 싹수없는 헌터들은 들어와 봤자 도움이 안 되니…….’
절대적인 인력난.
A급 헌터에 20대 중반이라는 어린 나이, 타고난 미모까지, 완벽한 삼박자를 갖춘 그녀의 큰 고민이었다.
“하아.”
헌터들이야 돈을 더 주는 길드로 가는 건 당연하므로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했다.
우르르-
1번 게이트를 파괴한 1팀이 4번 게이트로 들어가려는데, 게이트 내부에 있던 헌터들이 허겁지겁 쏟아져 나온다.
‘저 사람들이라도 모아볼까.’
지금처럼 깔짝이는 정도가 아니라, 게이트 내의 괴수를 상당수 줄여준다면 차후 게이트 주의보를 관리하는 게 훨씬 수월해질 텐데.
그때였다.
-팀장님!
들려오는 무전에 그녀는 발신자를 확인했다.
1번 게이트를 파괴하고 4번 게이트로 넘어간 1팀의 무전이었다.
“듣고 있어요.”
-4번 게이트가 이상합니다.
“그게 무슨 말이죠?”
-그…… 1번 게이트에 비해 괴수가 절반도 안 됩니다.
“네? 괴수가 절반도 안 된다고요?”
백아영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보통은 같은 등급의 게이트라면 괴수의 등급부터 숫자까지 비슷하다.
그런데 1번 게이트와 4번 게이트의 괴수 수에 차이가 있다?
이게 의미하는 바는 하나였다.
“누군가 줄여놨다는 거군요.”
-아무래도 그런 것 같습니다. 반쯤 싹쓸이한 수준이라……. 일단 심층부로 곧장 진입하겠습니다!
“아, 네. 부탁드려요.”
무전을 마친 그녀는 고개를 갸웃했다.
‘잘된 일이기는 한데…….’
정황상 그들보다 앞서 4번 게이트에 들어간 누군가, 혹은 어느 헌터 팀이 무지막지한 사냥을 한 건 분명해 보였다.
그렇기에 그녀는 더 갸우뚱했다.
E급 게이트에서 학살할 정도의 실력을 가진 헌터는 길드에서 마련한 전용 게이트나 첨단 시설로 훈련하지, 이런 시장바닥 같은 하급 게이트에는 오지도 않는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백아영의 머리가 번뜩였다.
‘혹시 사정이 있어서 길드에 안 들어간 게 아닐까?’
4번 게이트를 반쯤 청소해 놓은 누군가에게 길드에 들어가지 못하는 사정이 있다면.
그래서 게이트 주의보나 전전하고 있는 거라면.
그렇다면, 잘만 하면 데려올 수도 있지 않을까.
‘허탕일 수도 있겠지만…….’
한 번쯤 알아볼 가치는 충분했다.
그녀는 즉각 수화기를 들어 누가 4번 게이트에 진입했는지 알 수 있는지를 요청했다.
-CCTV 영상을 확보했습니다. 확인에 들어가겠습니다.
다행히 긍정적인 답변이 돌아왔고.
‘잘하면…… 인원을 충원할 수 있을지도.’
백아영의 얼굴에 미소가 그려졌다.
* * *
게이트에서 나온 뒤에도, 강현이 집으로 돌아온 건 그로부터 몇 시간 후였다.
이것저것 준비할 게 많았기 때문이다.
“후우.”
강현이 손을 털자 두 손에 들고 있던 것들이 쏟아져 내렸다.
가벼운 가죽 갑옷, 검, 작은 가방…….
모두 ‘더 비욘드’를 대비한 준비물들이었다.
그가 손가락을 하나씩 접어갔다.
“준비는 이거면 됐고…… 사체 처리한 돈도 보내준다고 했고. 별일도 없었고.”
사실, 일이 있긴 했다.
게이트를 나오고 불도룡뇽의 사체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고석현이 진지하게 제안해 왔던 것이다.
절반 이상의 비율을 줄 테니 함께할 의향이 없느냐고.
‘나쁘지 않은 제안이긴 했어.’
듣기로 ‘가늘고 길게’ 팀은 총 넷.
그런데 자신 하나에게 무려 절반의 비율을 약속한 걸 보면 나쁘지 않은, 아니, 파격적인 제안이었다.
다시 소환되기까지 하루도 남지 않은 강현으로서는 정중하게 거절할 수밖에 없었지만 말이다.
그에게 중요한 건 더 비욘드의 준비였지, E급 괴수를 처리한 비율 같은 게 아니었다.
[다음 소환까지 남은 시간 : 10시간 02분]
힐끗 남은 시간을 확인한 강현이 중얼거렸다.
“상태창.”
이름 : 이강현
레벨 : 10
고유 특성 : <광검제>
보유 스킬 : 광검[Lv.3], 섬광[Lv.2], 순보[Lv.1], 여명의 눈[Lv.1]
능력치 : 근력[Lv.3], 민첩[Lv.9], 체력[Lv.6], 마력[Lv.4]
쓸만한 공격기에, 회피기도 얻었다.
능력치야 뭐, 일반적으로는 레벨에 비례하니 이 정도면 그럭저럭 괜찮은 수준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D급 헌터 정도인가.”
강현의 입에서 나온 건 더없이 냉정한 평가였다.
E급 게이트에서 좋은 활약을 보이긴 했어도, 매체에서 종종 접하던 B, C급 헌터들에 비하면 한참 모자랐으니까.
‘그나마 다행인 건…….’
이게 그가 짐작하는 류의 경연이라는 전제하에, 무엇이 중요할지 어렴풋이 감이 왔다는 거랄까.
물론 그것 말고도, 성장을 위한 계획이 착착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 역시 높게 살 만했다.
“이 스킬만 빼면.”
여명의 눈에 시선이 닿은 강현이 얼굴을 살짝 구겼다.
게이트를 나오고도 틈틈이 여명의 눈을 발동해 봤으나, 그러는 족족 취소가 되니 두 손을 들 수밖에 없었다.
‘에이 씨, 몰라. 언젠가는 되겠지.’
결국 될 대로 되라는 생각을 하며 강현은 침대로 몸을 던졌다.
답답하긴 했어도 할 수 있는 건 다 해서인지 속은 후련했다.
강현은 그제야 샤워를 하고, 잠을 잘 수 있었다.
제대로 된 휴식도 없이 혹사당한 몸을 위한 재충전의 시간이었다.
그러는 사이 주어진 시간이 모두 흘러갔고.
[다음 소환까지 남은 시간 : 00시간 00분]
슈와아아-
새하얀 빛이 강현을 맞이했다.
더 비욘드로의 복귀였다.
* * *
눈을 뜨자 강현은 다시 스튜디오로 이동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변함없이 드넓은 광장이 보였고.
“…….”
“……!”
어제 봤던 헌터들보다 더 번쩍번쩍한 차림의 참가자들이 각자 웅성대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그들이 만들어내는 기류가 지난번과는 묘하게 달랐다.
잠시 그들을 훑어본 강현은 바뀐 점을 발견해 냈다.
뛸 듯이 기뻐하기만 하던 지난번과는 달리, 다들 확연히 신중해진 것이다.
아무래도 강현과 마찬가지로 앞으로 어떻게 할지를 생각해 온 듯했다.
그리고 그러한 신중함은.
[여러분-! 반갑습니다! 로독입니다!]
로독이 등장하며 배가 되었다.
[튜토리얼을 통과한 아흔여섯 명의 참가자분들을 다시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오늘부터 본격적인 촬영이 시작되는데, 여러분이 어떤 멋진 모습을 보여줄지 저는 너무 기대되네요! 하핫!]
바뀐 분위기를 알지 못한 것처럼, 마이크를 꼬나쥔 로독이 너스레를 떨었다.
[으음? 얼굴이 굳은 분들이 몇몇 계시네요? 만약 그게 미션 때문이라면, 잠시 그 걱정은 접어두세요! 이번 미션은 일주일 뒤에 진행되니까요!]
“……!”
[저희도 방송인데 여러분들을 모실 때마다 미션을 수행하면 먹고살 수가 없잖아요? 또한 이번 미션은 그편이 여러분들에게도 좋을 거라 생각이 된답니다!]
그가 손을 휘젓자 허공에 큼지막한 화면이 떠올랐다.
슈우우-
무지갯빛 안개가 사방에 흩뿌려진 가운데, 수많은 가지각색의 빛들이 반짝이는 아름다운 곳이었다.
[신기한 곳이죠? 이곳은 제23 정령계입니다! 주요 정령계는 아니지만, 괜찮은 발전 가능성을 지닌 차원이죠! 따라서 평화로운 나날이 지속되어야 하는데…….]
로독이 다시 손을 움직이자, 작은 동산이라고도 해도 믿을 만큼 거대한 바위 거인이 땅을 마구 부수는 장면이 비쳤다.
[보시다시피 에테르에 매몰된 바위 거인들에 의해 차원에 크나큰 손상이 가고 있답니다! 정말 안타까운 일이에요!]
[자, 대부분 짐작하시겠지만, 이번 미션은 저 바위 거인과 관련되어 있답니다! 자세한 설명을 드리기 전에, 미션 내용을 보여드리겠습니다!]
[미션]
-주제 : 협동
-내용 : ‘더 비욘드’의 인간종 예선, 그 첫 번째 무대입니다.
아름답던 제23 정령계가 바위 거인들에 의해 신음하고 있습니다!
다른 참가자들과 팀을 구성하여 바위 거인으로부터 제23 정령계를 지켜내세요!
-성공 시 : 다음 미션 진출
-실패 시 : 탈락
메시지를 본 강현은 묘한 표정을 지었다.
로독이 제시한 미션은 그에게 너무나도 익숙한 것이었기에.
“레이드잖아?”
그가 수없이 많이 해왔던, 레이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