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2화 최후의 수단 (1)
몬스터들은 그 종류도 참으로 다양했다.
회색 산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놀과 오크에 오거와 트롤은 기본.
원래 놀과 오크가 자리 잡고 있어 보기 힘든, 고블린과 코볼트부터 각종 야수까지 잔뜩 있었다.
심지어 그 사이에 스켈레톤과 좀비, 데스나이트 같은 언데드 몬스터도 끼어 있었다.
무엇보다 카엘과 우호적인 관계인 라이칸스로프와 하피, 리저드맨까지 보였다.
놀랍게도 그 몬스터들은 서로 뒤섞여 있었음에도 다투지 않았다.
그저 천천히 클리페우스 성을 지키는 장벽으로 다가올 뿐이었다.
그걸 보며 브란이 식은땀을 흘리며 티겔을 돌아봤다.
“아버지.”
“나는 좀 더 상황을 봐야겠다. 일단 네가 지휘하도록.”
“알겠습니다.”
브란은 고개를 끄덕이며 부하들에게 소리쳤다.
“다들 침착하고 공격 준비한 채 대기하라! 내 신호에 맞춰서 공격을 시작한다!”
그때 몬스터들은 그 소리를 듣기라도 한 듯 갑자기 각종 포효를 내뱉는 게 아닌가?
그러고 나서 하나둘 장벽을 향해 달려오기 시작하는데, 눈빛이 붉게 물든 게 제정신이 아닌 듯했다.
그때였다.
“큭.”
장벽 위에 있던 라이칸스로프들이 머리를 부여잡고 괴로워하는 게 아닌가.
주위에 있던 병사와 레인저들이 걱정했다.
“괜찮나?”
“왜 그래?”
“이봐, 정신 차려.”
그걸 본 티겔과 브란은 긴장했다.
‘설마 저 몬스터들처럼 되는 건가.’
아무리 친하게 지냈다고 해도 이성을 잃고 공격하면 별수 없었다.
‘이대로 광폭화하기 전에 가둬 두는 수밖에…….’
그때 뒤에서 침통한 목소리가 들렸다.
“짐작하신 바가 맞습니다.”
라이칸스로프 촌장이었다.
“우리 라이칸스로프는 그 근원이 어찌 됐든 본질에서 마력의 영향을 받는 몬스터지요.”
“하지만 저 동족과 달리 우리는 마법사의 구속에서 벗어나 자유를 되찾은 역사가 있습니다.”
“무엇보다 은인에게 이곳을 지키겠다고 맹세했습니다.”
차분히 말하는 것과 동시에 라이칸스로프 촌장은 서서히 본모습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완전히 라이칸스로프의 본모습을 되찾았을 때 소리쳤다.
“다들 카엘 님을 생각하며 마력의 지배를 이겨 내라! 우리에게는 그만한 힘과 의지가 있다!”
그러고는 늑대 울음소리를 힘껏 내뱉었다.
“아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
“아우우우우우우!”
“아우우우우우우우!”
거기에 장벽 위의 라이칸스로프들도 동조하며 울면서 본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그 눈빛만은 달려오는 라이칸스로프들과 달리 맑고 또렷했다.
모두 마력의 지배를 이겨 내고 제정신을 유지하는 데 성공한 거였다.
동시에 전의를 불태웠다.
라이칸스로프 촌장은 동족들의 상태를 확인한 다음, 티겔에게 말했다.
“이곳을 지키기 위해서 온 힘을 다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든든하군요.”
미소를 지으며 말한 티겔이 라이칸스로프 족장에게 물었다.
“그런데 저것들은 어디서 나타난 건지 아십니까?”
“글쎄요. 저도 전혀 맡아 보지 못한 냄새를 풍기고 있어서…….”
“아마 마계에서 온 몬스터들일 겁니다.”
그렇게 말하는 건 엘프 중 최고 연장자인 모이라였다.
“마계 말입니까?”
“네, 정령들이 비명을 지르고 있습니다. 마계에서 온 존재 때문에 괴롭다고요.”
“저게 마계의 냄새인가, 어쩐지 지독하다 했더니…….”
라이칸스로프 촌장이 혀를 찼다.
“마계의 몬스터가 저렇게 나타났다면 마왕이 부활했다는 뜻이겠네요. 그렇다는 건…….”
브란이 말하다가 말꼬리를 흐렸다.
카엘이 마왕의 부활을 막는 데 실패했다는 소리였기 때문이다.
어쩌면 다치거나 죽었을 수도 있었다.
그때 어느새 나타난 드워프 칼스벅이 말했다.
“다들 무슨 걱정을 그리하나? 카엘은 무사할 거야.”
“맞습니다. 은인은 괜찮을 거요.”
“제 예감에도 그렇답니다.”
라이칸스로프 족장과 모이라가 동의했다.
그저 당장 위안을 위해서 하는 소리는 아니었다.
그동안 카엘과 함께하며 그가 해낸 일들을 직접 보고 겪고 얻은 신뢰를 바탕으로 하는 소리였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니 다들 힘을 합쳐서 카엘이 오기 전까지 이곳을 지켜 냅시다!”
티겔의 말에 다들 손을 들며 호응했다.
그와 동시에 사정거리에 접근한 몬스터들을 보며 브란이 소리쳤다.
“공격!”
그렇게 클리페우스 성의 전투가 시작됐다.
* * *
‘하필이면 회색산맥에 마왕이 부활하다니.’
카엘은 라 키레아스에게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지체하지 않고 돌아가기로 했다.
레오폴드에게 이 소식을 전하고 소드마스터급 전력만을 데리고 라 키레아스와 함께 돌아가는 중이었다.
나머지는 다시 클리페우스 성으로 돌아오는 데 몇 주가 걸릴 상황이라 레오폴드의 판단하에 움직이기로 했다.
‘다들 내가 갈 때까지만 제발 버텨 줘.’
카엘은 엄청난 속도로 날아가는 라 키레아를 꽉 붙잡은 채 속으로 중얼거렸다.
* * *
한편 클리페우스 성에서는 모두 필사적으로 싸우는 중이었다.
드워프들은 그동안 만들어 놓은 온갖 무기를 마음껏 퍼부었다.
그중에서도 니제르 왕국에서 가져온 마력을 품은 황금으로 만든 무기들의 위력이 대단했다.
엘프들은 세계수 주위에서 정령의 힘을 최대로 끄집어내서 몬스터들을 공격했다.
각양각색의 정령들이 총출동한 모습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본모습을 드러내고 거대화 포션을 먹은 라이칸스로프들은 거대월도를 거침없이 휘두르며 몬스터들을 닥치는 대로 쓸어버렸다.
클리페우스 성의 기사와 레인저, 병사들도 힘껏 싸웠다.
그중 제일 힘을 낸 건 티겔 브리운이었다.
장벽 위에 당당히 서서 오러를 한껏 발휘해서 몬스터들이 장벽을 넘어오려는 걸 저지했다.
그러나 이런 분투도 한계에 부딪혔다.
몬스터들은 그 숫자도 많았지만, 하나같이 광폭화한 붉은 눈빛으로 무작정 덤비는 데다.
오크들이 쳐들어왔을 때와는 달리 교대하거나 휴식을 취하지도 않았다.
그렇게 끝도 없이 쳐들어오니 방어하는 처지에서는 몸도 마음도 지쳐 갈 수밖에 없었다.
피로와 절망이 스멀스멀 기어들어 오니 검을 쥔 손에 힘이 빠지고, 활을 당기는 속도가 느려졌다.
몸도 가누기 힘들어 드러눕고만 싶었다.
그나마 단숨에 무너지지 않은 건 그동안 전력을 끊임없이 강화한 덕분.
예전의 클리페우스 성이었다면 진작에 함락돼도 이상하지 않았다.
버티는 것도 카엘이 만들어 둔 각성 포션과 회복 포션 덕분이었다.
‘그래도 이대로는 위험해.’
티겔은 전장을 둘러보며 냉정하게 판단을 내렸다.
전사들은 지쳤고, 각종 무기는 하나둘 망가져 갔다.
피로하고 다친 것도 카엘이 만든 회복 포션으로 간신히 버텼지만, 이제는 그걸 마실 여유도 없었다.
당장 자신만 해도 최대한 힘을 끌어내느라 전신에 핏줄이 솟아 있었다.
사실 진작에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았지만, 다들 클리페우스 성을 지키겠다는 마음과 근성으로 견디는 중.
그렇게 팽팽한 실처럼 불안하게 이어지던 전황은 장벽의 좌측이 무너지는 것과 동시에 급속도로 기울기 시작했다.
그 광경을 보며 티겔이 이를 악물었다.
‘이제 정말 끝인가……. 카엘이 오기 전까지는 지키려고 했건만, 내 힘으로는 무리였나 보군.’
‘은인이 올 때까지만이라도 버티고 싶었거늘.’
‘정령들도 더 못 도와줘서 미안하다고 울고 있어.’
‘젠장, 이럴 줄 알았으면 무기를 더 만들어 둘걸.’
티겔뿐만 아니라, 다들 자신을 탓하며 안타까워했다.
그렇게 절망이 깊어지는 가운데 먹구름이 햇빛을 가렸는지 하늘마저 어둑해졌다.
마치 클리페우스 성의 어두운 미래를 나타내는 것만 같았다.
다들 불안해하는 와중에 막시마가 하늘을 봤다가 소리쳤다.
“드래곤이다 드래곤!”
‘마계의 드래곤이라도 나타난 건가?!’
티겔은 그 말에 미간을 모았지만, 문득 아들의 목소리가 다소 밝았던 걸 깨달았다.
‘설마? 우리 편인 드래곤이 나타났나?’
고개를 들어 보니 설마가 사실이었다.
붉은 비늘의 드래곤 라 키레아스가 나타난 거였다.
‘그렇다는 건…….’
그때 함께 무너진 좌측의 장벽을 향해 얼음 폭풍이 몰아쳤다.
장벽을 넘으려던 몬스터들은 그대로 얼어붙었다.
그리고 강렬한 검기가 얼어붙은 몬스터들을 박살 낸 후 장벽 위에 섰다.
카엘이 빙한목의 냉기를 내뿜은 뒤 사진참사검을 휘두른 거였다.
“앗, 카엘이다!”
“은인이다. 역시 무사히 돌아오실 줄 알았어.”
“카엘님이 돌아오셨다.”
카엘이 나타나자 클리페우스 성의 사기가 순식간에 치솟았다.
거기에 카엘과 함께 온 소피아와 엘프 자매들, 브로칸 등도 라 키레아스에게서 뛰어내려 곧바로 적을 물리치기 시작했다.
덕분에 무너진 장벽을 완전히 틀어막는 데 성공했다.
그거로 끝이 아니었다.
라 키레아스가 몬스터 위를 날아다니면서 드래곤 브레스는 내뿜어 몬스터들을 마구잡이로 불태웠다.
거기에 카엘은 만파식적으로 영노를 소환해 벼락을 내려치게 했다.
그런데도 넓은 장벽 전부를 보호하기 힘든 데다가, 방어 병력들이 언제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지쳐 있었다.
‘이럴 때를 대비해서 만들어 뒀지.’
카엘은 주머니를 꺼내 허공에 흩뿌리며 소리쳤다.
“나와라! 병사들이여!”
그러자 펑 하는 소리와 함께 하얀 갑옷과 검은 갑옷을 입은 병사들이 나타났다.
금갑장군에게 받은 백갑신병과 흑갑신병으로 변하는 콩을 마력수와 성수로 재배해서 만든.
성갑신병과 마갑신병이었다.
성갑신병은 백갑신병일 때보다 더 두꺼워진 갑옷에 신성력을 내뿜었고.
마갑신병은 갑옷 끝이 칼날같이 날카로워지며 사악한 기운을 풍겼다.
무엇보다 이들은 지치지 않았다.
카엘이 장벽 곳곳을 다니면서 성갑신병과 마갑신병을 잔뜩 소환했다.
그러자 금방이라도 함락될 거 같았던 클리페우스 성의 방어가 여유를 되찾았다.
문제는 그 와중에도 계속해서 몬스터가 쳐들어온다는 거였다.
‘정말이지 끝이 없군.’
그나마 지치지 않는 성갑신병과 마갑신병이 나서자 그동안 싸우느라 지쳤던 병사들이 겨우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거기다가 소드마스터급 실력자들도 3교대로 나뉘어 돌아가면서 장벽을 오가며 지켰다.
그러고 나서야 겨우 현상 유지할 수 있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쉴 겨를이 없었다.
앞으로 어떻게 할 건지 대책을 논의하기로 한 거였다.
* * *
대책 회의를 주도한 건 마왕과 예전에도 싸워 본 라 키레아스였다.
“복잡할 거 없이 이 난리를 끝내려면 마왕을 해치워야 해.”
“아무래도 그렇겠죠.”
카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회의에 참석한 다른 이들도 공감하는 듯 보였다.
“그리고 몬스터가 많을수록 더 강해지니까 최대한 일찍 해치워야 한다. 아마 전 세계 곳곳에 마계의 통로가 열려 몬스터들이 튀어나오고 있을 게 분명하거든.”
그 말에 모두 침음성을 냈다.
이게 전부가 아니라, 전 세계에 이렇게 몬스터들이 나오고 있다니.
실제로 카엘은 알 수 없지만, 솔국, 니제르 왕국, 하피들까지 몬스터와 싸우느라 정신이 없었다.
“근데 몬스터가 많아도 너무 많던데요. 과거에는 어떻게 싸운 겁니까?”
“원래 이 정도는 아니야. 아무래도 마왕성의 코앞에 인간의 성이 있으니까 없애 버리고 싶은가 봐. 몬스터들이 저러는 건 마왕이 직접 조종해서 그런 거고.”
“근데 저 몬스터들을 어떻게 뚫고 가죠?”
“내가 데리고 날아가면 되니까 괜찮아.”
브로칸의 걱정에 라 키레아스가 걱정하지 말라는 듯 말했다.
“그럼, 이제 누가 싸우러 갈지 정해야겠네요.”
“제가 가겠습니다.”
“저도 갈 거예요!”
“내가 이런 자리에 빠질 수 없지.”
“우리도 함께하겠습니다.”
카엘이 그 말을 꺼내자마자 소피아부터, 브로칸, 엘프 세 자매 등 모두가 함께 싸우겠다고 나섰다.
무서운 마왕을 상대로도 두려워하지 않고 나서는 모습에 카엘은 가슴이 뿌듯했다.
하지만 모두 데려갈 수는 없었다.
“이곳을 지킬 분도 필요합니다. 마왕을 쓰러트리고 왔는데 이곳이 짓밟혀 있으면 안 되니까요.”
그렇게 남을 인원과 마왕과 싸울 인원을 정하기 시작했다.
이곳을 총지휘할 티겔과 드워프 칼스벅, 엘프 모이라, 라이칸스로프 촌장과 황금 금속기를 가진 전사들.
그리고 성갑신병과 마갑신병을 대부분 남겨 두기로 했다.
아쉽게도 성기사 프레데릭과 파나틱 신전 기사들과 소드마스터 루크, 성녀 아네스는 아직 클리페우스 성으로 복귀조차 못 한 상황이었다.
‘여기 있었어도 이곳의 방어를 맡겼을 테지만.’
그때 티겔이 무거운 표정으로 물었다.“
“카엘, 마왕을 이길 자신 있느냐.”
“네, 비장의 수가 있습니다.”
그 말에 다들 표정이 조금이나마 밝아졌다.
이번에도 카엘이 뭔가 준비해 뒀으리라 믿은 거였다.
그리고 실제로 있긴 했다.
‘통할지는 모르지만…….’
그길로 회의를 마치고 다들 나름대로 준비하기 위해 흩어졌다.
카엘도 일단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는데, 마침 애타게 찾던 인물이 방 안에서 기다리고 있는 게 아닌가?
“스승님…….”
회귀 전부터 카엘에게 약제술을 가르쳐 줬던 엘프 스승 디오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