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8화 제국의 몰락 (8)
소드 마스터의 요람.
제국 북서쪽의 산꼭대기에 있는 이 비밀 시설에는 수많은 인원이 침대에 줄지어 누워 있었다.
이들은 황제의 명령에 따라 선별한 제국군 내 재능 있는 기사와 병사들.
그 밖에도 강해질 수 있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온, 떠돌이 기사나 용병도 더러 있었다.
위자르샤는 이들의 이마에 마석을 부착한 다음, 마석을 활성화했다.
마석의 마력이 갑작스레 인간의 신체에 스며들면, 범인은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고통스러웠지만.
약에 취하게 해서 기절시킨 덕분에 그나마 마석 부착에 성공한 생존자가 제법 됐다.
하지만 이번 생존자들은 금방 죽을 위기에 처했다.
“불이다! 불이다!”
요람에 화재가 발생한 거였다.
불길이 치솟는 걸 본 경비병들은 깜짝 놀라 소리쳤다.
하지만 요람에 누워 있는 사람들은 꼼짝도 하지 않는 듯 한 명도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아 씨, 왜 안 나와!”
“약에 취해 기절해 있잖아. 한번 잠들면 일주일 정도 잔다니까, 아직 며칠은 더 있어야 깨어날 거야.”
“뭐?! 그걸 알면 가만있을 게 아니라, 물이라도 가져와! 물을 끼얹어도 가만있나 보자. 나는 일단 들어가서 몇 명이라도 구할게.”
“어, 어.”
‘젠장, 위자르샤 님은 어디로 갔지.’
동료를 보낸 경비병은 투덜대면서 건물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근데 그 안에는 웬 뿔 투구를 쓴 기사가 서 있는 게 아닌가?
“뭐 해? 깨어났으면 도망칠 것이지.”
그렇게 말한 경비병은 기사의 손에 횃불이 들려 있는 걸 발견했다.
정황상 저 기사가 불을 붙인 게 틀림없었다.
“야! 이 자식아! 여기다 불을 지르면 어떻게… 앗!”
경비병이 소리쳤다가 아차 싶었다.
뿔 투구를 썼다는 건 소드 마스터라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거였다.
그런 자에게 겁도 없이 소리쳤다니.
다만 뿔 투구 기사는 이쪽을 휙 돌아보더니 쫓아와서 해치는 대신 반대편으로 뛰어갔다.
“어. 저건…….”
경비병은 안도하면서도 뿔 투구 기사의 정체를 알 거 같았다.
분명 갑옷을 입었지만, 조금이나마 곡선이 드러나는 몸매는 여성이 분명했다.
그리고 이 실험에서 여자는 딱 한 명뿐이었다.
“분명 니제르 왕국의 공주라고…….”
* * *
‘대체 어떻게 알고 찾아오는 거지?’
세이비는 숨을 헐떡이며 자신이 쓰러트린 뿔 투구 소드 마스터를 내려다봤다.
소드 마스터의 요람을 불태워 버린 것까지는 좋았다.
마침 지키는 것도 일반 병사밖에 없었기에 방해받지도 않은 데다가 추격해 오는 이도 없었다.
세이비는 당장은 서쪽으로 향했다.
섬이 많은 서부에 몸을 숨긴 다음, 다시 남쪽의 니제르 왕국으로 돌아가 어머니를 보고 싶었다.
용서를 바라는 건 아니었다.
용서를 받아도 계속 남을 염치도 없었다.
그저 마지막으로 어머니의 얼굴을 보고 싶었다.
그러고 나서 자취를 감추고 평생 속죄하며 살 계획이었다.
그렇게 서부의 작은 섬에 몸을 숨기고 있을 때.
뿔 투구를 쓴 소드 마스터가 쫓아온 게 아닌가?
세이비는 깜짝 놀랐다.
항구에서 배를 타고 온 것도 아니고, 야밤에 몰래 섬에 들어왔는데도 찾아온 거였다.
그것도 아주 빠르게.
처음에는 우연인 줄 알았다.
하지만 다른 섬으로 옮겨 간 뒤에도 추격자가 나타난 걸 보고는 이대로 숨어 지낼 수만은 없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계획을 당겨 어머니를 만나기 위해 남쪽으로 향했다.
그런데도 추격자가 계속해서 오는 게 아닌가?
다행히 원래부터 검술에 능한 데다가 황금 금속기까지 가진 세이비는 갓 소드 마스터가 된 추격자들보다 강했다.
그래도 둘 이상을 상대로는 불리했기에 추격자가 혼자 있을 때 되도록 빨리 해치워야 했다.
지금처럼 다소 다치더라도 말이다.
“큭!”
세이비는 팔에 난 상처를 확인하고는 붕대로 질끈 동여맸다.
지금까지 뿔 투구 소드 마스터 여럿을 상대하느라 몸 곳곳은 이미 상처투성이였다.
“저기다, 저기.”
“거기서!”
저 멀리서 뿔 투구를 쓴 추격자 둘이 나타났다.
원래 셋이었지만, 셋을 동시에 상대하는 건 무리였기에 세이비가 하나를 따돌려서 해치운 거였다.
“치.”
세이비는 혀를 차며 다시 도망치기 시작했다.
어쨌든 저 둘을 상대로 이길 도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죽는 건 두렵지 않았다.
그저.
‘마지막으로 엄마 얼굴 한 번만이라도 봤으면…….’
그 바람만으로 상처투성이의 몸으로 필사적으로 도망쳤다.
* * *
한편 브레프니 왕국군은 북부 제국군을 격파했다.
카엘이 예상한 대로, 카엘이 다른 연합군을 지원하기 위해 빠졌어도 충분히 이긴 거였다.
동부, 서부의 전황도 아군이 유리하다는 보고를 받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제국의 수도로 진군해 나갔다.
보급에 신경 써 제국의 마을을 지나갈 때도 약탈, 납치 같은 짓을 벌이지 않게 단속했다.
덕분에 두려워하던 마을 주민들도 그리 걱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다들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했다.
“후, 괜히 잘사는데 깽판 치러 왔네.”
“저것들 때문에 황제 폐하의 근심,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겠어.”
“이번 황제 폐하께서 그렇게 백성들이 잘 먹고 잘살도록 애를 쓰셨는데 앞으로가 걱정이야.”
클리페우스성의 병력들은 주민들이 하는 말을 듣고 의아했다.
레인저 중대장 옥스도 놀라며 물었다.
“황제의 평판이 생각보다 안 나쁘네요?”
“음. 확실히 이번 황제가 즉위하고 살기 나아졌다는 평이 많지. 세금도 적어졌고.”
리온이 쓴웃음을 지으며 설명했다.
“그런가요? 이거 괜히 우리가 악당같이 느껴지는 거 같네요.”
“악당은 무슨.”
그 말에 프리지가 나타나 발끈했다.
“제국이 한 짓을 잊었어? 우리 가문은 멸문당하다시피 하고, 리온네 가문도 피해가 컸단 말이야.”
“맞아. 어떻게 두 분 앞에서 그렇게 태연한 소리를 할 수 있어? 얼른 사과해.”
“아, 죄송합니다.”
뒤에서 듣고 있던 네먼이 나무라는 말에 옥스가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얼른 사과했다.
“괜찮습니다. 사실 제국 주민들은 살기 좋을 수도 있으니까요. 하지만 비대한 제국을 유지하면서도 세금을 적게 걷어도 되는 건 타국에 그만큼 뜯어내서 그런 거기도 해서요.”
리온의 설명에 네먼이 고개를 끄덕이며 옥스를 째려봤다.
“아. 역시 단순하게 생각하면 안 되겠군요.”
“높으신 분들의 일이란 너무 복잡해서 모르겠단 말이야.”
옥스가 머쓱해하며 뒤통수를 긁었다.
그때 레오폴드가 슬쩍 끼어들었다.
“너무 걱정할 거 없어. 제국을 무너트린 뒤에도 변함없이 지낼게 해 줄 테니까. 그러면 다들 황제가 특별히 잘한 게 아니라고 여길 거야.”
“벌써 그 이후까지 고려하고 있나 보네요.”
“충분히 가능하니까.”
네먼이 감탄하면서 하는 말에 레오폴드가 자신 넘치는 얼굴로 씩 웃었다.
실제로 동부와 서부는 둘째 치더라도 현재 남부 쪽은 카엘이 니제르 왕국과 함께 제국 남부군을 무찌르고 진격해 올 게 분명했다.
그렇게 남북에서 동시에 공격하면 제국을 몰락시키는 것도 시간문제였다.
* * *
한편 제국군이 패퇴했다는 소식이 연달아 황제 앞으로 도착했다.
“알아서 막으라고 해. 거기에 들어간 자금이 얼마인데, 그것도 못 막아?”
그때마다 황제는 남의 일처럼 시큰둥하게 대꾸했지만, 한 가지만은 예외였다.
“뭐, 소드 마스터를 지원해 달라고? 전령의 목을 베서 돌려 보내고 지휘관이 지금부터 수련해서 소드 마스터가 되는 게 빠를 거라고 전해라.”
소드 마스터 이야기만 나오면 흥분해서 과격하게 군 거였다.
그러고 나면 꼭 장군에게 물었다.
“그보다 아직 세이비를 못 잡았나?”
“죄송합니다. 발견은 했는데 놓쳤습니다. 이번에는 소드 마스터 셋을 보냈으니 반드시 잡아 올 겁니다.”
“지금 사망한 소드 마스터만 몇 명이냐, 진작 둘 이상을 보낼 것이지. 애꿎은 소드 마스터만 죽어 나갔잖아.”
“죄, 죄송합니다.”
장군이 진땀을 빼며 고개를 숙였다.
황제가 세이비에게 분노하는 건 사실 소드 마스터의 요람을 불태워서가 아니었다.
‘감히 원하는 대로 자신을 거둬 줬는데도 배신을 해.’
황제는 자신이 배신하는 건 몰라도, 남이 배신하는 건 절대로 용납 못 해서였다.
그때 위자르샤가 마족의 모습으로 허공에 나타났다.
“준비는 잘 되어 가나.”
-문제없습니다. 얼마나 오래 준비한 일인데요.
“그렇군.”
그제야 황제의 표정이 좀 풀렸다.
하지만 이내 잔혹한 눈빛으로 말했다.
“그보다 세이비 말인데, 네가 직접 처리해 다오.”
-위치를 알려 드리는 것만으로 부족합니까?
세이비가 계속 추적당했던 건, 활성화된 마석의 위치를 감지할 수 있는 위자르샤의 능력 때문이었다.
“부족하다. 네가 할 수 있는 최악의 형벌을 가하도록.”
-뭐, 그러죠. 안 그래도 계속 위치를 알려 주는 것도 귀찮았으니까요.
위자르샤는 잔인한 미소를 지으며 사라졌다.
* * *
“엄마! 위험해!”
세이비는 필사적으로 소리쳤다.
뿔 투구를 쓴 소드 마스터의 검에 어머니가 찔리려는 걸 본 거였다.
어머니는 그런 자신의 외침이 안 들리는 듯 피하기는커녕, 오히려 별다른 저항을 하지 않고 소드 마스터의 검에 찔렸다.
검은 얼마나 깊숙이 박혔는지 어머니의 심장을 찌르고 몸을 관통했다.
어머니는 그대로 절명했는지 몸을 가누지 못하고 자신을 찌른 소드 마스터 앞으로 무너져 내렸다.
“안 돼! 안 돼!”
필사적으로 외치던 세이비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눈앞에는 어머니도, 뿔 투구 소드 마스터도 보이지 않았다.
‘또, 꿈을 꾼 건가……. 그래도 조금만 더 가면 돼.’
세이비는 갖은 고생 끝에 제국의 추격자를 따돌리며 제국 남부로 넘어왔다.
다행히 추격자가 찾아오는 것도 아주 뜸했다.
문제는.
“윽.”
갑작스러운 두통에 시달리기 시작한 거였다.
특히 마석을 박아 넣은 이마 주위가 아주 아팠다.
이 때문에 자주 악몽을 꿨다.
그것도 방금 꾼 꿈처럼 어머니가 뿔 투구를 쓴 소드 마스터의 공격에 참혹하게 살해당하는 내용을 계속해서 꾸는 거였다.
세이비는 필사적으로 말리려고 했지만, 매번 실패하고 꿈에서 깨곤 했다.
그 꿈을 꾼 세이비는 어머니를 만나고 떠난다는 계획을 바꿨다.
‘그냥 냅다 떠나 버리면 어떻게 해. 어머니를 지켜 드려야지.’
니제르 왕국군이 자신을 받아들이기 힘들 게 분명하니까.
주위를 맴돌다가 위기 순간에 어머니를 구할 작정이었다.
그러고 전쟁이 끝나면 돌아갈 작정이었다.
다음 날.
니제르 왕국군을 발견한 세이비는 거리를 두고 뒤따라갔다.
그런데 꿈에서 본 위기의 순간이 금방 찾아오는 게 아닌가?
제국 남부군이 나타나 전투가 벌어진 거였다.
어머니가 용맹하게 선두에서 서서 돌격하는데, 어느새 뿔 투구를 쓴 제국의 소드 마스터가 어머니의 곁에 나타난 거였다.
‘아니, 어머니가 왜 저러시지? 방심하셨나. 아, 안 되겠어!’
어머니가 소드 마스터의 검에 찔릴 것 같은 절체절명의 위기의 순간, 세이비는 앞뒤 가리지 않고 어머니를 향해 달려갔다.
그런데 어머니는 제국의 소드 마스터가 뒤에 있는데도 겁도 없이 이쪽을 바라보는 게 아닌가?
전처럼 뿔 투구를 썼음에도 단번에 자신인 걸 알아보셨는지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 미소에 마음의 응어리가 풀리는듯했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었다.
이대로라면 저 어머니의 미소를 더 못 보게 될지도 몰랐으니까.
“엄마! 위험해!”
세이비는 어머니를 제치고는 바로 뒤에 있는 제국의 소드 마스터를 향해 검을 찔렀다.
그런데 그 제국의 소드 마스터는 놀란 눈빛을 하더니 피하거나 막지 않고 되레 이쪽을 향해 손을 뻗는 게 아닌가?
마치 껴안으려고 하듯이.
“어.”
세이비는 순간 이질감을 느꼈지만, 이미 뻗은 검은 상대의 심장을 찌른 뒤였다.
푹.
깊숙이 박힌 검은 그대로 관통해 등 뒤로 검 끝이 보일 정도였다.
왠지 익숙한 광경에 세이비는 소름이 돋았다.
“서, 설마……. 아, 아닐 거야.”
세이비는 부정했지만, 어느새 눈앞의 소드 마스터는 니제르 국왕인 어머니 모습으로 바뀌어 있었다.
꿈속에서 어머니를 해치던 뿔 투구를 썼던 소드 마스터가 바로 자신이었던 거였다.
“이, 이거로 네가 펀해진다면 내 목숨은 얼마든지 내놓을 수 있단다…….”
“어, 엄마. 아니에요, 아니야.”
세이비는 검에 찔린 채로 자신을 품에 안은 어머니의 품에서 도리질 쳤다.
자신은 어머니를 구하고 싶었던 것뿐인데, 되레 어머니를 해치다니.
이런 자신이 더 살아서 뭘 한단 말인가.
“흑흑. 미안해요, 엄마.”
세이비는 눈물을 흘리면서 새로 단검을 뽑아 자신의 목을 그으려고 했다.
“안 돼!”
누군가 세이비의 단검을 쳐 내니 어머니의 품에 있던 세이비마저 떨어졌다.
“어, 엄마.”
세이비는 애타게 죽어 가는 어머니의 마지막을 보려고 했지만, 다른 이들의 세이비를 붙들었다.
그런 와중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진정해, 국왕님… 네 어머니는 안 죽을 테니까.”
“아…….”
카엘의 목소리였다.
‘여기 카엘이 있었구나. 카엘이라면 어머니를 살릴 수 있을 거야.’
세이비는 카엘의 말에 안도하면서 그대로 기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