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4화 제국의 몰락 (4)
‘여기를 지키는 소드 마스터가 있었다니.’
그것도 황금 금속기를 사용하면 소드 마스터에 필적할 전투력을 발휘할 수 있는 브로칸이 당했다면 어지간한 소드 마스터보다 강한 게 분명했다.
“…침입자는 제거한다.”
그렇게 중얼거린 소드 마스터는 오러에 휘감긴 검을 휘두르며 덤벼들었다.
그 기세는 카엘이 짐작한 대로 범상치 않았다.
하지만.
현재 이곳에는 소드 마스터 중에서도 상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강해진 소피아.
황금 금속기를 쓰는 엘프 세 자매와 드워프 노익장 칼스벅.
만년설삼의 기와 빙한목의 냉기를 사진참사검으로 증폭할 수 있는 카엘마저 있었다.
뿔 투구를 쓴 소드 마스터는 카엘까지 손쓸 필요 없이 소피아와 엘프 자매들의 공격에 쓰러졌다.
소피아는 별거 아니라는 듯 말했다.
“강한 것치고는 공격이 단순하네요.”
“그런가. 어쨌든 이런 소드 마스터가 더 있다니 예상외였네.”
카엘을 그렇게 대꾸하면서 소드 마스터가 쓴 뿔 투구를 벗겼다.
“아니, 저건.”
투구 아래의 모습에 카엘을 비롯한 모든 이가 놀랐다.
* * *
한편 바스코 왕국의 소식을 들은 레오폴드가 목소리를 높였다.
“뭐?! 바스코 왕국이 제국 동부 군단을 공격하기 시작했다고?”
“네. 그렇다고 합니다.”
“아니, 기다리라고 하지 않았나. 병력으로도 열세일 텐데.”
레오폴드가 혀를 찼다.
그 말에 리온도 난처한 얼굴로 대신 변명했다.
“…그게 바스코 국왕이 직접 친정에 나선다고 합니다. 소드 마스터 오베르뉴까지 동원하니 걱정할 거 없다고요.”
확실히 각 연합국의 병력 5천은 그게 왕국별로 동원할 수 있는 전력은 아니었다.
누구도 자신만이 특별히 많은 병력을 동원한다고 불만을 품지 않도록.
거기에 제국도 어느 한쪽으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도록 숫자를 맞춘 거였다.
“리온, 자네 생각은 어떤가?”
“5천을 동원할 때는 다른 연합군에게 밀리지 않도록 선별한 강병인 데다가, 젊은 피인 오베르뉴 소드 마스터의 제자에게 황금 금속기를 주고 활약시켰죠. 하지만, 병력이 두 배가 된다고 해서 지금의 전력의 배만큼의 효과를 낼 거 같진 않군요.”
“나도 동감이다. 그런데 왜 나서는 걸까.”
“아무래도 승리 후 전의가 높을 때 승부를 보려는 것도 있을 테고, 최대한 많은 제국 땅을 확보하려는 저의도 있을 겁니다.”
그 말에 레오폴드가 혀를 찼다.
“쯧. 어차피 제국을 무너트린 후에는 동서남북으로 나눌 작정이었거늘.”
“하지만 멋대로 움직였다고 해도 이미 나선 이상, 어쩔 수 없지 않습니까. 잘 싸울 수 있도록 지원해 주는 수밖에.”
프리지의 말에 프레데릭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자신들의 전력을 스스로 꺼내겠다는데 어떻게 말릴 수 있겠나. 용맹에 경의를 표한다고 하며 바스코 왕국에 장비나 더 지원해 주도록.”
레오폴드가 지시를 내리고 나니 이번에는 서부의 캘리컨 왕국의 소식이 도착했다.
“뭐라고?! 캘리컨 왕국도 제국 서부 군단을 공격하기 시작했다고? 설마 바스코 왕국의 소식을 듣고 움직인 건가?”
레오폴드가 가볍게 대꾸했지만, 리온은 부정적이었다.
“아무래도 거리상 불가능할 겁니다.”
함께 보고를 받았던 프리지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보고받은 바로는 거기 소드 마스터들이 활약상을 카엘 님께 바치고 싶다고……. 아무래도 힘을 되찾은 이상 가만히 있기 힘든 모양입니다.”
“아무리 그래도 캘리컨 국왕은 휘하의 부하들이 저러는데 말렸어야지.”
“아마 야심이 많은 자라 적극적으로 이용해 먹으려고 하겠죠.”
“흠. 골치 아프군. 그러면 멋대로 하도록 내버려 두면 되는 건가.”
리온의 말에 레오폴드가 뒤통수를 긁었다.
그러자 프리지가 한마디 했다.
“그래도 캘리컨 쪽은 실전을 겪은 병사도 많은 데다가, 소드 마스터가 셋이나 되니까 해볼 만할 겁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해볼 만한 정도가 아니라 잘해 줬으면 하는군.”
레오폴드는 그렇게 정리하고 넘겼다.
그러고 나니 이번에는 니제르 왕국의 소식이 들어왔다.
“설마 제국 남부 군단을 공격했다는 소식은 아니겠지?”
“어, 어떻게 아셨습니까?”
보고하러 왔던 기사가 화들짝 놀랐다.
한편 리온은 이마를 꾹꾹 누르면서 화를 삼켰다.
“니제르 왕국마저… 멋대로 움직이다니.”
“그래도 원래 니제르 왕국과는 남북으로 공격해 가려고는 했으니까요. 너무 걱정하시지 않아도 될 겁니다.”
리온의 말에 레오폴드는 수긍한 뒤 선언했다.
“그래. 이렇게 된 이상, 제국이 정신 못 차리게 몰아치는 수밖에 없다! 그러니 우리도 힘내서 공격하자!”
그러자 막사 안의 인원들이 한목소리로 힘차게 대답했다.
“네.”
그리고 일주일 뒤.
바스코와 캘리컨, 니제르 왕국까지 하나같이 희소식을 들고 왔다.
자신들의 몇 배나 되는 제국 군단을 상대로 선전하고 있다는 거였다.
현재 브레프니 왕국군도 제국 북부 군단을 몇 번이나 격퇴해서 우세를 점하고 있었다.
보고서를 훑어본 레오폴드가 리온에게 물었다.
“우리가 너무 제국의 힘을 과대평가한 건가.”
“아무래도 병력이 많다고 한들 방어할 영역은 넓으니 집중하기 어려웠나 봅니다.”
리온의 대답에 프리지도 한마디 했다.
“게다가 지금 소드 마스터가 하나도 없는 것도 크지 않을까요? 비공식적으로는 그에 준하는 전력이 있다고는 하지만 전장에서 내세우긴 힘든가 보네요.”
소드 마스터가 전장의 승패를 좌지우지하긴 힘들지만.
전세에 큰 영향을 줄 수 있다.
아무리 강병이라도 해도 소드 마스터의 초월적인 힘에 전우가 무참히 쓰러지는 걸 보면 제자리를 지키고 있기 힘드니까.
“하긴 괜히 전략 병기라고 불리는 게 아니지.”
그리고 그런 소드 마스터에 버금가는 전력이 바스코에는 둘.
캘리컨에는 셋.
니제르 왕국에는 다수가 있었다.
“어쨌든 이대로 제국 군단을 쓰러트리는 거다. 그리고 수도를 친다!”
기분이 좋아진 레오폴드가 목소리를 높였다.
* * *
한편 제국의 지역 군단들이 열세에 처해 있다는 소식은 당연히 제국 수도에도 퍼졌다.
“이럴 수가… 제국군이 이렇게 무참히 질 수 있단 말이오?”
“다들 그동안 뭘 한 건지. 그동안 머릿수만 채우고 있었나 보오.”
“이렇게 된 이상 우리 귀족들이라도 용병을 고용하고 사병을 동원해 방어에 나섭시다.”
그때 한 대신이 비관적인 전망을 했다.
“그런다고 해서 제국의 군단을 이겨 낸 연합군을 상대할 수 있을 거 같지는 않은데.”
“우리가 싸우자는 게 아니라, 중앙군에 힘을 실어 주자는 취지죠.”
“장군! 우리 중앙군은 다른 지역 군단과는 달리 정예 중의 정예지요?”
고위 귀족의 울음에 장군이 식은땀을 수건으로 닦으며 대답했다.
“그야 당연하오. 하지만…….”
“하지만?”
“만약 모든 군단이 괴멸하고 적들이 일시에 쳐들어오면 중앙군으로서도 감당할 수 있을지…….”
“아니, 장군이 약한 소리를 하면 어떡하오!”
“이거야 원 불안해서 안 되겠네.”
회의장 내에서 장군을 성토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을 때였다.
“다들 조용.”
“…….”
황제가 나직이 말하자 장군 때와 달리 다들 일시에 입을 다물었다.
오랜만에 황제가 회의장에 나타났기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던 참이었기 때문이다.
“너무 걱정할 거 없다. 이미 증원을 보냈으니까.”
“…증원 말입니까?”
장군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되물었다.
자신이 파악하기로는 수도에서 따로 근위대나 대규모 병력이 움직인다는 걸 보고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 소드 마스터들을 각 지역에 파견했으니 조만간 좋은 소식이 들려올 거다.”
“소드 마스터?!”
그 말에 회의장 안이 술렁였다.
“여기서 소드 마스터들을 지원 보내다니 절묘합니다.”
“하긴 황제께서 비밀리에 데리고 있었던 인재들이 많다는 소문은 있었죠.”
“황제 폐하께서 보내신 증원이면 이제 걱정할 게 없겠군요.”
다들 적을 벌써 패퇴시킨 듯 안도하고 기뻐했다.
* * *
현재 바스코군은 제국 동부 군단에 시비를 걸어 싸우고는 있지만, 아직 전면전을 벌이고 있진 않았다.
넓은 동부에 퍼져 있는 군단의 요새를 습격하거나.
혹은 매복해 놓고 유인에 성공해 추격해 오는 제국군을 공격하는 식으로 성과를 거뒀다.
이런 뛰어난 전술은 전투 경험이 많은 소드 마스터 오베르뉴 덕분에 펼칠 수 있었다.
“오늘도 이겼다고. 잘했군, 잘했어.”
작전을 마치고 오자 바스코 국왕이 환대했다.
그러다가 오베르뉴의 제자인 미하일의 표정이 굳어 있는 걸 발견했다.
‘자네 표정이 왜 그런가?’
“솔직히 조금 답답해서 그렇습니다. 언제까지 이렇게 쪼잔하게 싸워야 하는지…….”
제자가 투덜대는 걸 보며 오베르뉴가 자상하게 타일렀다.
“그래도 할 수 없다. 전면전을 벌이기 전에 적의 병력을 줄이는 건 정석 중의 정석이니까.”
미하일은 오베르뉴의 손주뻘.
제자긴 해도 너무 오냐오냐해서 다소 버릇이 없었지만. 그마저도 귀엽게 보고 넘어갔다.
“그래. 이 기회에 스승에게 실전을 배운다고 생각하게.”
“알겠습니다.”
미하일은 순순히 대답은 했지만, 영 불만스러웠다.
그러면서 이번에 받은 황금 금속기를 만지작거렸다.
‘이제 스승한테 더 배울 게 있나. 배우지 않아도 이것만 있으면 되는걸.’
스승 밑에서 몇 년을 배웠어도 소드 마스터도 못 됐는데. 이걸 받자마자 그에 버금가는 힘을 얻게 됐다.
오히려 늙은 스승보다 더 강해진 것만 같았다.
실제로 스승이 오기 전에 제국의 국경 경비대를 멋지게 격파해 냈지 않은가?
그러다 스승이 오자마자 그 그늘에 가리어진 거였다.
“안 되겠어. 내일은 어떻게든 활약을 해야지.”
그런데 다음 날.
미하일이 원하는 기회가 딱 찾아오는 게 아닌가?
제국군의 요새 앞에서 도발했더니 한 기사가 싸우겠다고 뛰쳐나온 거였다.
“특이한 뿔 투구를 쓰고 있던 터라 표정은 알 수 없었지만. 잔뜩 화가 난 게 분명했다.”
심지어.
우웅!
제국 기사의 검에 오러까지 둘러싸여 있었다.
“소드 엑스퍼트치고는 제법인데. 잘됐군. 상대해 주지.”
얼핏 봐서는 스승의 오러에 버금갔지만, 제국에는 현재 소드 마스터가 없다고 알고 있었다.
“어쨌든 저 녀석을 이기면 인정받을 수 있겠지.”
그때 뒤편에서 매복하고 있던 스승이 쫓아 나오면서 소리치는 게 아닌가.
“미하일! 도망쳐야지. 유인하기로 하지 않았느냐.”
“저 녀석 혼자 나왔지 않습니까. 쓰러트리면 요새 안의 녀석들도 쫓아 나오겠죠.”
그러면서 제국의 기사를 상대하기 위해 황금 금속기를 작동했다.
“어디 한번 싸워 보자고!”
그때 달려온 제국의 기사가 검을 휘둘렀다.
아주 단순한 휘두르기였기에 미하일을 피하며 반격할 수도 있었지만.
미하일은 힘으로도 이길 자신이 넘쳤다.
소드 엑스퍼트인 자신이 황금 금속기까지 사용했을 때는 그 위력이 한층 강화됐기 때문이다.
소드 마스터를 능가할 정도로.
“이대로 힘으로 눌러 주마!”
캉!
두 사람의 검이 부딪치자 엄청난 소리가 튀어나왔다.
그것만으로는 서로를 해치기는 어려웠지만, 미하일은 버티지 못하고 바닥에 나뒹굴었다.
힘겨루기에서 밀린 거였다.
‘왜, 왜 이렇게 세.’
오랜만에 손끝이 떨리는 걸 느끼며 미하일이 일어서려는 사이.
이미 제국 기사는 다시 달려들고 있었다.
그것도 매서운 찌르기와 함께.
‘피할 수는 없다. 쳐 내야 해. 쳐 낼 수 있을까?’
미하일은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리며 제국 기사의 공격을 막아 내려고 했지만, 자세가 너무 안 좋았다.
이대로라면 끝장이었다.
‘오만하게 굴다가 이렇게 허무하게 당하다니.’
미하일이 자책하며 눈을 감는 순간.
푹 하는 소리와 함께 터져 나온 피가 미하일을 덮쳤다.
“……?!”
찔린 줄 알았지만, 찔린 건 스승이었다.
순식간에 다가온 스승, 소드 마스터 오베르뉴가 미하일의 앞을 막아서며 적의 공격에 대신 찔린 거였다.
“스, 스승님!”
“어서 도망치거라!”
오베르뉴가 외치면서 제국 기사를 밀쳐 냈다.
아무래도 소드 마스터인만큼 단순히 검에 찔렸다고 해서 단번에 숨이 끊어진 건 아닌 모양이었다.
“안 됩니다. 끝까지 함께 싸우겠습니다. 둘이서 힘을 합치면 이길 수 있을지도 몰라요!”
미하일이 스승을 부축하며 외쳤다. 그때였다.
요새에서 기사 셋이 더 나오는 게 아닌가?
하나같이 뿔 투구를 쓰고, 검에는 오러를 두르고 있었다.
“아, 안 되겠다. 일단은 도망이다, 도망!”
스승의 명령에 미하일은 점령한 요새로 도망쳐 문을 걸어 잠갔다.
그러면서 내심 걱정했다.
‘설마 이 정도의 고수를 잔뜩 내보낼 줄이야.’
우리 쪽에만 있는 거면 다행이지만. 다른 연합군에게도 소드 마스터들을 보냈다면 끝장이었다.
그리고.
그 우려는 현실이 됐다.
서쪽과 남쪽, 북쪽까지 뿔 투구를 쓴 제국의 소드 마스터들이 차례로 나타난 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