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화 성녀와 성녀 (3)
“헉!”
검은 깃발 천막 안의 광경을 본 요안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사망자를 모아 둔 건 알았지만, 상상 이상으로 참혹한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이, 이렇게나 많이 죽었다니.’
병상이 거리를 두고 드문드문 놓여 있던 붉은 깃발 천막과 달리, 시체가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같은 시체라도 부상자와 함께 전장에 나뒹구는 것보다, 한곳에 잔뜩 모아 두니 그 숫자가 확실히 느껴졌다.
부상자보다 사망자가 더 많은 것도 당연했다.
천사의 불길에 휩싸이면 깡그리 타 버리는 데다가, 천사의 핏방울에 닿으면 황산을 뒤집어쓴 것처럼 녹아 버렸으니까.
부상자는 천사의 공격의 여파가 적은 외곽에 있거나, 온갖 사람이 다 모인 성전군이 막무가내로 후퇴하면서 다친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모두 나 때문에 죽은 거야.”
요안나는 천사에게 공격당한 이후로 내 탓이라고 늘 생각하긴 했다.
그러나 이 수많은 죽음 앞에 서고서야 그 죄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지 체감할 수 있게 된 거였다.
* * *
“휴. 이쪽도 빨리 처리하지 않으면 안 될 텐데.”
말단 사제인 파트리치는 검은 깃발 천막으로 향하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시체를 처리해야 언데드 몬스터가 생기지 않을 텐데, 아무래도 아픈 사람이 많다 보니 죽은 이는 뒷전으로 밀릴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현재 다른 사제들은 레오폴드 왕자의 특별 지시로 모두 부상자를 치료하는 데 투입됐다.
망나니 왕자라는 소문이 무색하게 적임에도 죽지 않게 치료하려는 마음씨는 아름다웠지만.
성직자로서는 시체 관리에도 신경이 안 쓰일 수가 없었다.
꼭 언데드 몬스터가 발생할까 봐 그런 건 아니었다.
성직자가 시체를 정화해 줘야 죽은 이의 영혼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믿어서였다.
이 불쌍한 영혼들을 하나라도 더 천국으로 신의 곁으로 보내고 싶었던 파트리치는 바쁜 와중에도 조금씩 시체를 정화해 나갔다.
‘그래도 언제 저 많은 걸 처리할 수 있을지 아득하기만 하군.’
이러다가 여기에 언데드 몬스터가 발생하기라도 하면, 나머지도 모조리 불태워 버려야 했다.
사악한 기운의 전염성은 강하니까.
오히려 전쟁 중에 발생한 시체를 당장 불태우지 않고 보관하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예우였다.
“어쨌든 힘내서 불태우기 전에 하나라도 더 정화하자.”
파트리치가 다짐하고 천막 문을 열어젖혔을 때였다.
파앗!
찬란한 빛이 천막 안에서 쏟아져 나오는 게 아닌가?
어찌나 강렬한지 눈이 부실 정도였다.
겨우 빛에 익숙해진 다음, 주위를 봤다가 깜짝 놀랐다.
사방의 시체들이 모두 신성력에 둘러싸여 있었기 때문이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앗!”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파트리치는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 있었다.
천막 중앙에서 성녀가 무릎 꿇고 앉아 기도하고 있었다.
어린 성녀의 작은 몸에서 신성력이 끊임없이 뿜어져 나와 사방으로 뻗어 나가고 있었다.
그걸 본 파트리치는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날개 같아.”
신성력이 뻗어 나가며 물결치는 모습이 마치 새하얀 날개가 퍼덕이는 것처럼 보인 거였다.
마치 천사의 날개 같았다.
‘이토록 아름다운 광경은 지금껏 본 적도 없었고, 앞으로도 볼 일이 없을 거야.’
감탄하던 파트리치는 그 신성력의 날개의 움직임을 보다가 깜짝 놀랐다.
시체를 에워싸고 있던 죽음의 기운들이 점점 사라지는 게 눈에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천막 안의 어두운 기운은 말끔하게 사라졌고, 대신 성령의 기운만이 충만했다.
시체들이 단번에 모두 정화된 거였다.
“아, 정말 다행이야. 성녀님도 정말 대단… 앗!”
기적을 목격한 파트리치가 감격하며 성녀를 쳐다보다가 화들짝 놀랐다.
힘을 다한 성녀가 어느새 쓰러진 거였다.
“누, 누가 도와줘요!”
파트리치는 황급히 천막 바깥으로 달려 나가며 소리쳤다.
* * *
‘이번에야말로 죽은 건가.’
눈을 뜬 요안나가 그렇게 생각한 건, 전처럼 몸을 꼼짝 못 해서는 아니었다.
분명 시체가 가득한 천막 안에서 쓰러졌는데, 반투명하고 깨끗한 구름과 거대한 무지개다리가 놓여 있는 공간에서 눈을 떴기 때문이다.
심지어 저 앞에는 이마에 노란 고리가 떠 있고 날개가 달린 천사들이 오가는 모습마저 보였다.
누워서 멀뚱히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데 한 천사가 자신을 발견했는지 다가왔다.
‘그런데 저 천사 어딘가 생김새가 익숙한데? 아, 맞다. 카엘이랑 쏙 빼닮았네.’
아무래도 카엘에게 물어보고 싶은 것 때문에 계속 생각했더니 죽고 나서도 저 얼굴이 보이는 모양이었다.
카엘에게 물어보고 싶었던 건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제일 물어보고 싶었던 건 천사와 관련된 거였다.
천사와 무슨 대화를 나눴고, 어떻게 천사를 돌려보냈는지 너무 궁금했다.
하지만 지금은 필요 없는 의문이었다.
자신이 이미 죽었으니까.
‘그래도 지옥에 가진 않았네.’
신성력을 계속 쓸 수 있는 걸 보고 막연히 안 갈 거라고는 짐작했지만.
그래도 천국에 갈 자격은 잃지 않은 모양이었다.
감히 죗값을 모두 치렀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그저 마지막에 자기희생으로 시체들을 정화한 걸 보고 신께서 어여삐 여겨 자비를 베푼 게 아닐까 짐작할 뿐이었다.
그런데 카엘을 닮은 천사가 자신을 가리키면서 뭐라고 말하는 거 같더니, 예전에 봤던 물약을 자신에게 먹이려고 하는 게 아닌가?
‘죽었는데 그걸 왜 먹이지?’
눈을 뻐금거리며 의아한 눈빛을 했지만, 어차피 꼼짝도 못 하는 상황이라 저항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물약을 한 모금 삼켰을 때였다.
시야가 일렁이기 시작하더니 점점 빠르게 회전을 하는 게 아닌가?
“켁! 켁!”
어지러움에 멀미를 느낀 요안나가 괴로워하다가 시커먼 걸 토했다.
그러자 다시 시야가 돌아왔다.
하지만 눈앞에 보이던 모습이 완전히 달라진 게 아닌가?
반투명하고 깨끗한 구름과 거대한 무지개 대신, 낡은 천과 삭막한 벽돌이 가득한 공간이었다.
카엘도 노란 고리와 천사의 날개 대신, 일전에 봤던 그 복장 그대로였다.
“어, 뭐야?”
“말할 수 있게 된 거 보니, 이제 괜찮아진 거 같네요.”
요안나는 안도하는 카엘이 정황을 알 거 같아 물었다.
“어떻게 된 거지.”
“저주에 걸린 겁니다. 아마 몸도 못 움직이시고, 환각도 봤을 텐데.”
“그런 거 같긴 한데, 저주? 내가 정말 저주에 걸렸다고?!”
요안나는 이해가 안 갔다.
어떻게 성녀가 저주에 걸릴 수가 있단 말인가.
그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카엘이 설명했다.
“신성력을 한계까지 쓰셔서 약해진 틈에 저주에 노출된 듯합니다. 아무래도 시체가 많다 보니 사악한 존재가 있었나 봅니다.”
“아, 그럴 수도…….”
그 설명에 요안나는 납득했다.
수많은 시체를 보고 죄책감을 느낀 요안나는 정성껏 기도했다.
죽은 뒤에라도 평온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무아지경으로 정화를 해야 할 시체에 모두 신성력을 보내려다가 신성력이 고갈되고 기절했던 모양이었다.
‘그 틈에 저주에 노출됐고…….’
상황을 되짚어 보는데, 아네스가 다가와 사과했다.
“미안.”
‘음? 뭐지?’
요안나가 의아해하는데, 아네스가 말했다.
“기분 전환하라고 거기 보낸 건데, 그렇게까지 할 줄은 몰랐어.”
아무래도 자기가 괴롭혔다고 여긴 모양이었다.
굳이 따지자면 틀린 건 아니었지만, 요안나는 저 열심히 하는 소녀에게도 죄책감을 더해 줄 생각은 없었다.
“아, 그건 그냥 하다 보니 그렇게 됐어.”
“역시 성녀는 성녀인가 보네.”
끼칠하게 대하던 루크도 한마디 했다.
요안나는 그 말에 왠지 가슴이 따듯해지는 걸 느꼈다.
그런 와중에 카엘이 감사를 표했다.
“그래도 덕분에 한시름 놓았습니다. 언데드 몬스터가 만들어지는 건 최대한 막고 싶었는데, 여력이 없어서 방치하다시피 하고 있었거든요.”
“방치라고 하셔도 천막에 보존의 룬을 써서 최대한 부패하지 않도록 하셨잖아요.”
루크가 얼른 나서서 변명해 줬다.
‘보존의 룬?’
요안나는 이해는 안 됐지만, 뭔가 마법의 힘으로 시체를 보존한 모양이었다.
어쩐지 그렇게 방치된 와중에도 썩은 시체가 없는 거 같더라니.
어쨌거나 지금은 그게 중요한 일은 아니었다.
“고맙다는 소리를 들을 일은 아닙니다. 다들 나 때문에 그렇게 된 거니까요.”
“…….”
그 말에 주위의 모두가 침묵을 지켰다.
어찌 됐든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성녀가 성전을 일으키고, 스스로 소환한 천사를 분노하게 만들어 이 만큼 사상자가 생긴 거였다.
‘그런 와중에 이렇게 있을 게 아니지.’
요안나가 슬그머니 일어서며 말했다.
“치료해 줘서 고마워.”
“안 쉬고 어디 가려고?”
“다른 사람 치료하러 가려고. 내 죗값을 치르려면 한 명이라도 더 고쳐야지.”
“아…….”
그 말에 아네스가 안타까운 듯 탄식을 흘렸다.
그렇게 나가려던 요안나는 문득 생각난 듯 카엘을 돌아봤다.
되살아난 데다가 보기 힘든 카엘이 같이 있으니 그동안 궁금해하던 걸 물어봤다.
“너, 그때 천사와 무슨 이야기를 나눴길래 돌아간 거야?”
“그냥 천사가 나를 시험하고, 거기에 통과해서 돌아간 거야.”
“그래? 대화했더니 돌아갔다고 하던데…….”
그 말에 카엘은 쓴웃음이 나왔다.
외부에서 봤을 때는 그랬을지도 모르지만, 실제로 싸우다 죽는 걸 수십 번을 반복했기 때문이다.
반면에 불만족스러운 대답에 요안나가 재차 물었다.
“천사가 몬스터와 손잡은 건 뭐라고 안 했어?”
“아직도 그 소리야?”
루크가 한마디 하자 요안나가 움찔했다.
소드 마스터가 살기도 감추지 않고 분노했기에 당연한 반응이었다.
“루크, 그만해.”
“…네.”
루크를 진정시킨 카엘이 말했다.
“천사는 마왕의 부활마저 딱히 신경 쓰는 거 같지 않더군.”
“마왕의 부활?”
처음 듣는 소리에 되묻자 아네스가 설명했다.
“황제가 마족과 손을 잡고, 강력한 몬스터를 소환해서 주변국을 괴롭혔거든. 분명 마왕을 부활시키려고 준비하고 있을 거야.”
“그래, 우리는 마왕을 부활시키려는 황제를 막기 위해 싸우는 중이야.”
루크까지 거들었지만, 요안나는 도통 믿기 힘든 기색인 듯했다.
“황제가 마왕을 부활시키려 한다고……. 이해가 안 가는데. 아!”
중얼거리던 요안나는 한 가지 짚이는 걸 떠올렸다.
“왜? 뭔가 생각났어?”
“응. 황제의 심복, 위자르샤에게 받은 주머니.”
“아, 그 주머니를 보고 천사가 분명 마왕의 마석이라고 했지.”
그리고 돌변한 천사는 모두 해치워 버리겠다고 공격했지.
그 말을 종합한 카엘이 한 가지 결론을 내렸다.
“끔찍한 이야기지만 어쩌면 황제는 천사를 이용해 성녀를 제거하러 한 걸지도.”
“뭐라고요?!”
“정말인가요? 그런 끔찍한 일을…….”
루크와 아네스가 깜짝 놀랐다가 요안나의 표정이 한층 어두워진 걸 보고 걱정했다.
“괜찮아?”
“안 괜찮아.”
그렇게 말한 요안나는 꽉 쥔 주먹을 부르르 떨었다.
“황제 같은 사악한 자에게 이용당해서 이렇게 많은 사상자를 내고 나까지 죽을 뻔했는데 괜찮을 리가 없지.”
“…….”
“그래도 한 가지는 확실해. 내 죗값을 치르려면 황제를 타도하고 마왕의 부활을 막아 내야 해. 그러기 위해서는…….”
다들 성녀의 전향에 반가워하면서도 왠지 모를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
“설마.”
“아니겠지…….”
“황제를 상대로 성전을 선포하겠어.”
아네스와 루크가 부정하고 있는데 요안나가 선포하듯 말했다.
“아, 역시…….”
“또 무슨 성전이야.”
그 소리에 아네스와 루크가 볼멘소리 하는 걸 요안나가 목소리를 높이며 차단했다.
“다들 착각하지 마! 나만의 성전을 말하는 거니까!”
“그렇다면 다행이야.”
“난 또 전쟁을 일으키자는 줄 알았지.”
이제 와서 성녀가 제국을 악으로 규정하고 나서면 따르는 이가 얼마나 되겠냐마는 다시 성전이랍시고 긴장감을 높이는 건 사양이었다.
그때, 한편에서 잠자코 서류를 읽고 있던 레오폴드가 끼어들었다.
“후후. 괜찮다. 이제 북쪽의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 서, 남쪽 3개국이 동맹을 맺고, 일시에 제국에 반기를 들기로 했으니까.”
“앗. 정말?”
그 말에 요안나가 놀랐고, 옆에서 보좌하던 리온도 낭패한 얼굴이 됐다.
“레오폴드 님, 그런 기밀을…….”
“뭐, 어때서 그래? 며칠 내로 발표할 텐데.”
대수롭지 않게 대꾸한 레오폴드가 씩 웃으며 말을 이어 갔다.
“그리고 연합군이 동시에 움직여서 사방에서 제국을 친다!”
* * *
이틀 뒤.
레오폴드가 예고한 대로 제국의 동서남북에 있는 4개국이 동맹을 맺은 걸 발표했다.
동시에 그간 제국의 만행에 대해서 폭로했다.
내정 간섭은 물론, 제국의 대사들이 왕국이 크지 못하게 저지른 각종 범죄.
거기다가 마법사를 이용해 사악한 몬스터를 소환해서 주변국을 낭패에 빠트렸다는 이야기까지.
브레프니 왕국에서 벌어진 일 외에도 각국이 겪었던 모든 일을 망라해 알린 거였다.
그 소식을 들은 제국은 발칵 뒤집혔다.
사건의 사실 여부를 떠나서 강대한 제국이 위협받는 어마어마한 사건이 벌어진 거였다.
그 소식은 온 제국에 순식간에 퍼졌고, 하나같이 드디어 제국이 몰락할 거라고 우려했다.
심지어 놀기 좋아하는 제국의 대신들이 대책 마련에 고심할 정도였다.
그러나.
정작 황제만은 별거 아니라는 듯 여유로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