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9화 성녀와 성녀 (2)
“넌… 레오폴드 왕자군의 성녀?!”
요안나가 아는 체하자 아네스가 피식 웃었다.
“뭘 그리 거창하게 불러. 난 아네스라고 해.”
“아네스…….”
요안나가 이름을 외우기 위해 되뇌고 있으니 아네스가 다시 말을 걸었다.
“넌 요안나라고 하지?”
“어, 응.”
“그리고 레오폴드의 왕자군의 성녀라는 것도 틀렸어. 굳이 따지자면 클리페우스성의… 그것도 아니네. 카엘 님의 성녀라고 할 수 있겠네.”
“카엘 님?! 지금 카엘 님과 만날 수 있어?”
안 그래도 만나고 싶던 참이라 앞뒤 재지 않고 물었다.
“만나고 싶어?”
“응. 물어볼 것도 있고…….”
“근데 아주 바쁘셔서 나도 얼굴 보기는 힘들어. 나도 치료하느라 바쁘고.”
자신 없는 아네스의 대답에 요안나가 실망했다.
“뭐야. 카엘 님의 성녀라면서.”
“그야 그분이 나를 구원해 주셨거든. 다른 사람들을 도울 수 있도록 지원도 해 주고.”
‘도움을 받는 성녀라고?’
가당치 않았다.
어쨌든 카엘과 딱히 만날 수 있게 해 주지 못한다는 말에 요안나는 곧바로 흥미를 잃었다.
“그럼 볼일 없으니까, 나가.”
“볼일은 내가 있어서 왔거든.”
“아… 그랬지. 무슨 용무인데.”
요안나는 평소와 달리 순순히 굴었다.
딱히 감옥에 갇혀 있는 건 아니지만, 지금 자신은 포로나 다름없는 상황.
과거엔 포로로 잡히면 온갖 흉한 일을 겪는다고 들었는데, 그거에 비하면 지금 일은 아무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대우해 줄 때 협조해야지…….’
“회복하고도 여기 가만히 있다길래. 성녀라면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라고 온 거지.”
“당연히 해야 할 일?”
“그래. 아픈 사람을 치료해 줘야 할 거 아니야?”
“아!”
요안나는 곧바로 이해했지만, 이내 볼멘 얼굴로 대꾸했다.
“굳이 내가 나설 필요가 있을까? 카엘 님의 약이면 치료 못 하는 게 없어 보이던데.”
안 그래도 직접 본 카엘의 치료 물약의 효과는 대단했다.
지금까지 신성력으로 치료한답시고 거들먹거리던 자신이 한심해 보일 정도였다.
하지만 아네스는 무슨 말을 하느냐는 듯 쏘아붙였다.
“카엘 님의 포션이 대단한 치료제긴 해도 무한정으로 있는 게 아니거든. 이번에 다친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거기다가 전부 제국 측 사람인데도 가만히 있으려고!”
“아. 하긴.”
그제야 요안나는 깨달았다.
레오폴드 왕자군은 움직이지도 않아 피해를 보진 않았지만, 성전군은 어마어마한 사상자를 낸 상황이었다.
마지막으로 주변을 둘러봤을 때도 끝도 없이 쓰러진 사람이 보였다.
도대체 얼마나 죽어 나갔는지 감을 잡을 수도 없었다.
그중에서 부상자가 얼마나 될지는 모르지만, 그 많은 인원의 약을 지어야 하는 거였다.
가능할 리가 없었다.
“그리고 시체에 축복도 해 줘야지.”
“으음. 그렇지.”
그 말에 요안나는 뒤늦게 심각성을 깨달았다.
성직자가 시체에 축복하는 건, 단순히 죽은 이가 사후 세계에서 행복하도록 기원하는 것만은 아니었다.
시체를 정화해 언데드 몬스터로 부활하는 걸 방지하는 역할이기도 했다.
‘성녀가 있는데 언데드 몬스터가 나타나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지.’
거기다가 일하고 있으면 카엘과 만날 수 있을지도 몰랐다.
“알았어. 나가서 일하면 될 거 아니야.”
“그래. 잘 생각했어. 어서 가자.”
아네스가 언제 화냈었냐는 듯 빙긋 웃으며 먼저 문밖으로 나섰다.
“가, 같이 가! 헉!”
그 뒤를 쫓아가던 요안나는 깜짝 놀랐다.
길목에서 웬 소년이 검을 팔짱에 끼고 서 있어서였다.
게다가 그 검의 화려한 정식을 봐도 장난감 검이 아니라 진검인 듯했다.
“아, 놀라지 마. 이쪽은 루크. 나를 지켜 준다고 따라다니고 있는 거니까.”
“으응.”
일종의 호위인 모양이었다.
그를 보니 새삼 마지막 남은 추종자가 아쉬웠다.
여전히 자신에 대한 충성심은 남아 있는 듯했지만, 카엘의 부탁을 받았다면서 자리를 비운 뒤 보이지 않았다.
“루크, 이쪽은 요안나야.”
아네스가 중간에서 서로 소개를 해 주는데 루크가 퉁명스레 대꾸했다.
“알고 있어. 제국의 성녀라면서.”
“그래도 통성명은 해야지.”
루크를 달래는 아네스의 다정한 모습을 보니 추종자가 말해 줬던 게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아네스와 함께 날 지켜 준 소년이 있었댔지. 이 소년인가 보네.’
“그만 좀 쳐다보고 가자.”
“아, 미안.”
불만스러운 눈빛으로 요안나를 노려보던 루크는 아네스가 퉁명스럽게 말하자마자 곧바로 사과하고 따라가는 게 아닌가?
‘이것들 봐라?’
루크가 자신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것도 아네스가 못마땅해하면서 방해한 거였다.
심지어 루크는 거기에 쩔쩔맸다.
아무래도 아네스와 루크는 아직 어리지만 서로 좋아하는 마음이 있어 보였다.
‘앞으로 저 둘이 어떻게 이어질지 궁금한데?’
요안나는 둘의 로맨스를 기대하며 가벼운 마음으로 이곳을 나섰지만, 당장 맞닥뜨려야 할 현실에 금방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 * *
이곳은 킹스콧에서 며칠 거리에 있는 트루아성.
원래 있던 요새를 중심으로 축성한 것이기에 크기도 작았다.
그런 이곳에 수천에 달하는 성전군의 부상자와 시체를 모두 수용하는 건 불가능했다.
하는 수 없이 성 바깥에 대규모 천막을 여러 개 지어 사상자를 수용했다.
아네스는 그중 붉은 깃발을 단 천막으로 향하며 말했다.
“여기 환자들 있으니까 보이는 대로 치료해 주면 돼.”
“보이는 대로? 많이 아픈 사람부터 치료해 줘야 하는 거 아니야?”
요안나가 뒤따라가며 묻자 아네스가 어이가 없다는 듯 대꾸했다.
“그거야 당연하지. 여기 붉은 깃발을 단 천막에는 중환자만 모아 뒀어. 노란 깃발은 경증이고.”
“아, 으응.”
할 말이 없어진 요안나가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체계적이잖아.’
내심 감탄하는 사이 아네스가 천막의 문을 확 열어젖혔다.
“헉!”
놀란 요안나는 자신도 모르게 순간 몸을 움츠렸다.
내부에는 고통에 신음하는 사람들이 잔뜩 있었는데, 그들이 뿜어내는 부정적인 기운이 어마어마했기 때문이었다.
“뭐 해? 사람들을 치료해야지!”
아네스가 멍하니 있는 요안나에게 소리쳤다.
그러고는 익숙한 듯, 한 환자의 이마에 손을 넣고 기도하면서 신성력을 불어넣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요안나는 충격이었다.
자신보다 어린아이가 저렇게 익숙하게 사람을 치료하고 있다니…….
‘나도 질 수 없지.’
요안나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중환자끼리의 감염 우려 때문에 병상마다 간격이 제법 멀었는데, 그 와중에 자신이 치료할 만한 환자를 찾기 위해서였다.
그러다가 한 환자와 눈이 마주쳤다.
요안나는 그 환자가 비스듬하게 누워 자신을 애타는 눈길로 바라보는 걸 보고 다가갔다.
가까이 가자 환자가 환한 얼굴로 몸을 일으키려고 하는 게 아닌가?
“서, 성녀님.”
“아니, 아픈데 누워 있어.”
“그래도 어찌 성녀님 앞에… 큭!”
“누워 있으라니까.”
괴로워하는 환자에게 윽박지르자 그제야 환자가 잠자코 누웠다.
그 환자는 전신에 화상을 심하게 입었는지 피부 곳곳이 짓무르고 있었다.
평소라면 징그럽다고 눈을 찌푸렸지만, 자신 때문에 저런 꼴이 됐다고 생각하니 안쓰럽기만 했다.
“죄송합니다. 성녀님, 제 꼴이 흉하지요?”
“아니야. 나 때문인걸.”
“어떻게 성녀님 때문입니까. 천사의 탈을 쓴 악마의 짓이죠.”
이 환자는 천사가 공격한 걸 그렇게 받아들이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래도 역시 신의 가호를 받으시는 성녀님이시니 무사하실 줄 알았습니다. 크윽!”
그러면서 웃다가 다시 고통스러운지 인상을 찌푸리는 데 아니라고 해명할 수도 없었다.
요안나는 잠자코 기도로 신성력을 발휘했다.
환자의 상처가 조금 아물면서 표정이 편해졌다.
그러면서 긴장이 풀렸는지 환자는 그대로 곯아떨어졌다.
“휴.”
괜히 마음이 불편해진 요안나는 이번에는 자신을 찬양하는 이를 피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다 노려보는 환자를 발견하고 그쪽으로 갔다.
“야, 이년아! 너 때문에 이렇게 됐잖아. 이거 어떻게 할 거야?!”
환자가 소리치면서 발아래를 가리키는데 두 발이 짓뭉개져서 엉망인 게 아닌가.
뼈가 완전히 박살 나고 피부가 시커멓게 변해 있었다.
왜 욕하냐고 하며 자리를 피하려던 요안나는 움찔하고는 사과했다.
“죄, 죄송합니다. 지금 고쳐 드릴게요.”
“당연히 고쳐야지! 못 고치면 내 손에 죽을 줄 알아!”
환자는 분이 안 풀리는 듯 윽박질렀다.
요안나는 대답하는 대신 정신을 집중해 신성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앞서 추종자의 팔을 재생시키는 것과는 달리 다친 부분은 그대로 있기에 회복시켜 볼 만하다고 여긴 거였다.
“으음, 아픈 것도 가시고 왠지 발끝에 감각이 돌아오는 거 같아.”
그 덕분인지 환자도 낫는 듯했다.
그러나.
“어, 어. 으윽. 으아아악!”
회복하는 거 같았던 환자가 갑자기 비명을 지르는 게 아닌가?
“어, 어. 왜 그래?”
“으그그그그르르.”
요안나가 당황해서 어찌할 줄 모르는 사이, 환자는 고통이 극심해졌는지 거품을 문 입으로 이빨을 딱딱 부딪쳤다.
요안나가 더욱 힘껏 신성력을 보냈지만, 환자는 계속 괴로워할 뿐이었다.
“어떡해. 어떡하면 좋지.”
그때였다.
“뭐야. 어서 비켜.”
유난히 시끄러워진 탓인지 어떻게 알고 아네스가 요안나를 밀치고 환자를 살폈다.
멋대로 뒤틀린 환자의 다리를 살펴본 아네스가 인상을 썼다.
“뼈를 맞추지 않고 회복시키니까 엉망이 됐잖아.”
“그, 그래?”
대부분 찾아오는 환자에게 기도로 신성력을 사용하기만 하면 됐던 요안나로서는 생각지도 못한 부분이었다.
“이대로는 안 되겠어.”
결심한 아네스가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루크, 부탁해.”
“…알았어.”
‘부탁? 뭘?’
아네스가 의아해하는 와중에 루크는 검을 꺼내더니 그대로 환자의 뒤틀린 발을 베어 버리는 게 아닌가.
“크억!”
안 그래도 고통스러워하던 환자가 자지러지려는 걸 보고 놀란 요한나가 따졌다.
“뭐, 뭐 하는 거야?”
“어쩔 수 없으니까. 말 시키지 마.”
아네스는 그렇게 쏘아붙이고는 환자의 이마에 손을 올리고 신성력을 불어넣었다.
그렇게 환자의 고통을 조금이나마 경감시키는 사이, 루크가 낯익은 포션을 꺼내서 환자에게 먹였다.
그러자 환자의 발 부분이 빛이 나면서 잘려 나간 부분부터 아예 새로 돋아나기 시작했다.
재생 포션을 먹인 거였다.
“으음.”
그제야 고통에서 벗어난 환자는 자신의 발이 원래대로 돌아온 걸 보고 기뻐했다.
“이럴 수가! 내 발이 다시 멀쩡해지다니. 성녀님, 정말 감사합니다!”
환자는 눈물까지 글썽이며 아네스에게 감사를 표했다. 그러더니 요안나를 돌아보고는 악다구니를 썼다.
“너 때문에 이게 무슨 고생이야. 죽는 줄 알았잖아!”
“미, 미안해…….”
요안나는 그렇게 사과하고도 스스로 충격받았다.
지금까지 신성력을 쓰고 욕을 먹는 것도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애당초 신성력으로 치료해 줄지는 자신의 마음 내키는 대로였으니 자신에게 애원하기 바빴었다.
어쨌든 자신의 실수로 고통받은 건 사실이라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아네스도 미안해. 도와준다면서 사고나 치고.”
“처음이니까 하는 수 없지. 잠깐 기분 전환이라도 하고 와.”
“어. 정말?”
차가운 말투였지만, 이곳에서 잠깐이나마 벗어나게 해 주는 것만으로 아네스에게 고마웠다.
“그래, 잠깐 바람이라도 쐬면 나을 거야.”
그렇게 말하는데. 아네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기분 전환하라고 했지. 바람을 쐬러 가라고 하지 않았는데.”
“그럼……?”
불길한 예감이 들었지만, 안 물어볼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 불길한 예감은 사실이 됐다.
“저쪽으로 나가면 검은 깃발이 달린 천막이 있거든. 거기에 돌아가신 분들을 모아 두고 있으니까 축복해 드려.”
“시, 시체가 잔뜩 있는 곳에 가라고?!”
“그게 싫으면 계속 여기서 돕든가.”
“아, 아니야.”
지금 요안나는 자신을 찬양하는 것도 비난하는 것도 정신적으로 견디기 힘들었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시체를 상대하는 게 차라리 낫다고 여긴 거였다.
‘시체는 말이 없으니까.’
아네스가 알려 준 대로 밖으로 나가니 검은 깃발의 천막은 꽤 멀리 있었다.
“저기다.”
길을 잃을까 걱정돼서였는지 도망칠까 봐 감시하려는 건지 어느새 따라온 루크가 말했다.
“나도 눈이 있거든. 진작에 어딨는지 발견했어.”
“그럼 됐고.”
요안나의 말에 루크는 차갑게 대꾸하고는 다시 천막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에휴.”
그걸 보며 한숨을 내쉰 요안나는 검은 깃발이 달린 천막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런 요안나의 뒷모습을 멀리서 지나가던 카엘이 발견했다.
“제국의 성녀도 뒷수습을 도와주고 있나 보네요.”
“그래야지. 진작 내쫓아도 시원찮을 판에.”
옆에 있던 레오폴드가 차갑게 대꾸했다.
사실 이토록 많은 적군의 사상자를 수습한다고 시간과 자원을 쏟아붓는 건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너무 그러지 마시죠. 어차피 다른 왕국의 응답을 기다려야 한다면서요.”
“알아.”
마왕의 부활을 막으려면 어쩔 수가 없다는 걸 레오폴드도 잘 이해하고 있었다.
“문제는 과연 타국에서 어떻게 나올지…….”
레오폴드는 성전군을 꺾었다는 소식에 타국의 반응이 걱정되는 모양이었다.
“너무 걱정하실 건 없습니다.”
카엘이 말했을 때였다.
“레오폴드 저하! 레오폴드 저하!”
전령이 다급하게 달려오더니 서신을 내밀었다.
서신을 훑어본 레오폴드가 놀란 눈으로 중얼거렸다.
“아니, 어떻게 벌써 회신이…….”
그러다가 카엘을 쳐다봤다.
“제가 힘 좀 썼죠.”
어인족에게 부탁해서 레오폴드의 서신을 보내고 받아 온 거였다.
“그래서 결과는 어떻습니까?”
카엘의 물음에 레오폴드가 서신을 내밀며 씩 웃었다.
“잘됐어! 다른 왕국에서도 동맹을 맺고 제국에 반기를 든다고 한다.”
드디어 대제국 포위망이 완성된 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