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가의 약 빤 막내아들-218화 (218/234)

218화 성녀와 성녀 (1)

“으음.”

요안나는 괴로움에 몸부림치다가 눈을 떴다.

몸을 꼼짝할 수는 없었지만, 아주 청명한 하늘이 눈 안을 가득 채웠다.

티끌 한 점 없는 맑은 하늘은 비현실적 것처럼 보였다.

‘설마 여긴 천국?’

이미 죽은 목숨이라 여겼던 요안나는 맑은 하늘을 보며 천국에 대한 일말의 기대를 품었지만, 이내 그 기대는 처참히 깨졌다.

사방에서 들리는 괴로워하는 신음이 머리를 흔들고, 고약한 냄새가 코를 찔러 왔기 때문이다.

“역시 여긴 지옥인가. 역시 천사에게 버림받은 내가 천국에 갈 리가 없지…….”

움직이지도 못하고 괴로워하며 중얼중얼하고 있을 때였다.

“성녀님! 성녀님! 정신을 차리셨습니까?!”

“전 이제 성녀가 아니에요……. 어?”

누군가 부르는 소리에 부정하다 보니 익숙한 목소리라는 걸 깨달았다.

바로 자신을 따르던 신전 기사의 목소리였다.

그 추종자는 요안나의 앞에 얼굴을 들이밀었는데. 여기저기 긁히고 흙먼지가 묻어 있어서 꼴이 엉망이었다.

그걸 보며 요안나가 안타까워했다.

“너도 지옥에 왔구나…….”

“지옥이라니요? 하긴 여긴 지옥 같긴 하죠.”

추종자는 그렇게 말하며 주위를 둘러봤다.

여긴 성전군이 천사의 공격을 받은 전장 한가운데.

저 멀리까지 시체가 나뒹굴고 다쳐서 괴로워하는 이들로 가득했다.

천사의 불길과 핏방울에 죽거나 다친 이도 많았지만, 그 공격을 피해 도망치다가 나온 사상자가 훨씬 많았다.

허겁지겁 도망치다가 압사당하거나 팔다리가 짓뭉개진 이들이 저 멀리까지 잔뜩 있었다.

한편 추종자의 말이 이해가 안 갔던 요안나가 불렀다.

“무슨 소리야? 좀 일으켜 줘.”

“아, 네.”

추종자가 다가와서 요안나의 몸을 일으켜 세우려는데, 움직임이 어색한 것 아닌가?

“어, 너 한쪽 팔이…….”

추종자의 오른편 팔뚝 아래가 없었다.

요안나가 자신의 오른팔을 보자 추종자가 멋쩍게 웃었다.

“죄송합니다. 이래서야 어떻게 성녀님을 제대로 모시기 힘들지요.”

“무슨 소리 하는 거야. 바보.”

요안나는 눈물을 훔치며 기도하려다가 움찔했다.

혹시라도 신성력을 정말 잃어버렸으면 어쩔까 두려웠던 거였다.

하지만 억지로 웃는 와중에도 고통스러운지 미간을 슬쩍 찌푸리는 추종자의 모습을 보니 그냥 있을 수는 없었다.

다행히 기도하자 성스러운 빛이 나오더니 추종자를 감쌌다.

“아앗. 귀한 신성력을… 감사합니다.”

추종자는 감격하며 머리를 조아렸다.

팔은 여전히 없었지만, 고통도 거의 사라지고 힘도 생긴 거였다.

“…감사는 됐고, 이제 좀 일으켜 줘.”

“네.”

추종자가 이번에는 가볍게 요안나의 상반신을 부축해서 일으켰다.

그러자 잔혹한 현실이 한눈에 들어왔다.

“아직 전장 한가운데였구나.”

“…네.”

추종자의 대답에 요안나가 몸을 부상자들 쪽으로 내밀었다.

“저, 저들을 도와줘야 해.”

“무리하시면 안 됩니다. 일단 성녀님부터 회복하셔야죠. 카엘 님이 다시 보러 온다고 했습니다.”

“카엘 님?”

“네, 브레프니 왕국의…….”

“누군지는 안다. 그자가 왜 나를 보러 온단 말이냐.”

요안나의 추궁에 추종자가 공손히 대답했다.

“아까도 요안나 님을 살펴보고 가셨습니다. 그분의 지시로 레오폴드 왕국의 이들이 여기 다친 이들을 돌보고 있거든요.”

그러고 보니 멀쩡히 주위를 오가는 이들은 하나같이 성전군이 아니었다.

레오폴드 왕자군일 게 분명했다.

죽은 줄 알았던 상황이라 혼란스러워서 미처 놓치고 있던 거였다.

“…천사가 폭주하고 지금까지 어떻게 된 거지?”

요안나가 물음에 추종자가 차근차근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 내용은 충격적이게도 믿기지 않는 일의 연속이었다.

자신이 천사의 불길에 공격을 받아 기절한 뒤.

추종자들이 구하려고 했으나, 힘이 부족해 오히려 대다수가 죽었다고 했다.

이어지는 천사의 공격에 죽기 직전에 상대 측 성녀와 어린 기사가 나와서 천사를 막아 줬다는 게 아닌가?

그것도 놀라운 일인데 다시 위기에 처한 이들을 카엘이 나타나서 구해 줬다는 거였다.

심지어 천사와 이야기를 나누는 듯하더니만, 천사가 순순히 물러났다는 거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 직후.

카엘이 천사의 공격과 후퇴하는 와중에 발생한 사상자를 먼저 나서서 치료에 나서고 있다는 거였다.

‘몬스터와 손잡은 악인이 아니었나? 하지만 천사도 인정한 것 같은데…….’

거짓말 같은 상황이라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그때였다.

“아, 요안나 님이 정신을 차리셨습니까? 아직 움직이기 힘드실 텐데요.”

“카, 카엘 님. 죄송합니다. 요안나 님이 몸을 일으켜 달라고 하셔서…….”

뒤에서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린다 했더니 카엘인 모양이었다.

추종자는 카엘에게 쩔쩔매며 다시 요안나를 눕혀 놓았다.

그러자 요안나는 카엘의 얼굴을 가까이 볼 수 있었다.

그가 겪은 일을 생각하면 딱히 고생한 것 같지는 않았지만, 깊은 눈동자를 바라보니 왠지 모르게 평생 종교에 몸을 바친 나이 든 성직자가 연상됐다.

그런 카엘이 빙긋 웃었다.

“성녀님, 괜찮아 보여서 다행입니다.”

“아, 감…….”

‘감사합니다.’라고 인사하려고 했는데 그동안 워낙 악마라고 생각해서였는지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정작 카엘은 그러든 말든 개의치 않고 말을 이어 나갔다.

“겉으로 보기에는 큰 이상이 없으니 편히 쉬시면 금방 회복할 겁니다.”

“그렇습니까?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오히려 추종자가 자기 일처럼 아주 기뻐했다.

그런 추종자를 향해 카엘이 웃으며 말했다.

“혹시 뇌에 이상이 있을까 봐 옮기지 않았는데, 이제 편한 곳으로 가서 쉬시죠. 제가 쉴 곳을 마련하라고 하겠습니다.”

“아. 배려에 정말 감사드립니다.”

추종자에게 인사받던 카엘은 그제야 그의 한쪽 소매가 허전한 걸 봤다.

“저기 팔…….”

“아, 괜찮습니다. 성녀님이 신성력으로 치료해 주신 덕분에 아픈 게 다 가셨으니까요. 이것도 다 신의 뜻이겠죠.”

“아…….”

그 말에 오히려 요안나가 안타까워했다.

자신은 천사에게 공격당한 뒤로 신의 뜻을 안다고 자신하던 게 다 무너졌다.

그런 와중에 추종자가 고통을 그저 신의 뜻이라고 넘기는 게 이전의 자신을 보는 것 같아서였다.

“신성력으로요? 무리하지 않으시는 게 좋은데.”

“그렇죠? 괜히 저 따위를 고치신다고… 성녀님이시다 보니 아픈 사람을 외면하지 못하시나 봅니다.”

‘저 따위라니… 나를 따라다니다가 팔을 잃은 건데.’

속으로 괴로워하고 있는데. 카엘이 뭔가를 꺼내서 내미는 게 아닌가?

“그렇습니까? 이거 드세요. 약입니다.”

“아, 네. 그런데 이제 안 아픈 데…….”

“아픈 데 먹는 게 아니라. 팔을 재생하는 약입니다.”

“네?!”

“그런 게 가능해?”

잠자코 듣고 있던 요안나도 놀라서 소리쳤다.

물론, 자신의 신성력으로도 가능하긴 했다.

그러나 요안나가 배운 바에 따르면, 베어 낸 손과 발을 붙이는 건 신성력으로 되지만.

완전히 사라진 걸 재생하는 데는 그에 상응하는 재물을 신에게 바쳐야 했다.

그런데 저 유리병에 든 물약을 먹는 것만으로 재생할 수 있단 말이야?

추종자도 놀라는 눈치였지만, 카엘에게 받는 거니만큼 고맙다고 말하고 마셨다.

그러자 곧바로 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팔에서 빛이 나기 시작하더니 천천히 재생하기 시작하는 거였다.

“오오. 이럴 수가!”

“헉!”

추종자는 감탄하고, 요안나도 깜짝 놀랐다.

재생하는 모습이 정말 기적 같았기 때문이다.

재생하면서 나타나는 빛은 성스러워 보이기까지 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추종자는 감격해서 카엘에게 연신 고개를 숙였다.

‘대체 어떻게 한 거지? 그 전에 천사랑은 무슨 이야기를 한 거지?’

카엘에게 궁금한 게 너무 많았다.

“저기…….”

요안나가 카엘을 부르려고 할 때였다.

“카엘 님! 카엘 님! 여기 좀 봐 주세요.”

그때 저 멀리서 웬 여성이 카엘을 부르는 게 아닌가?

그러자 카엘이 곧바로 움직였다.

“저기도 제 손이 필요한가 보네요. 이만 가 보겠습니다. 몸조리 잘하세요. 성녀님을 잘 부탁합니다.”

그렇게 말한 카엘은 여성이 손짓하는 곳으로 빠르게 달려가 버린 거였다.

그 속도가 또 어찌나 빠른지 요안나가 말을 걸 틈이 없었다.

“이, 이런…….”

당황해하고 있으니 추종자가 신나서 말했다

“들으셨죠. 성녀님을 잘 부탁한다고 하신 거요! 저 귀한 약도 성녀님을 잘 돌보라고 준 모양입니다. 역시 성녀님 덕분이네요.”

그 말을 들은 요안나는 기가 찼다.

“아니야… 아니라고!”

“네? 하지만…….”

“천사에게 외면받은 나는 더 이상 성녀라고 할 수 없으니까, 그만 쫓아다녀!”

팔을 재생하기 전이라면 안쓰러워서라도 계속 데리고 다니면서 치료하는 방법을 찾았을 테지만.

바로 재생까지 했으니 더는 곁에 두고 고생시킬 생각은 없었다.

자신을 성녀라고 여기고 애쓰는 걸 모른 체하고 받아들이면 추종자를 기만하는 거라고 느껴져서였다.

정작 추종자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되물었다.

“하지만, 카엘 님도 성녀님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어, 정말. 그렇긴 했다.

“천사님께 외면받았다고 성녀가 아니라기에는, 그 천사님께 인정받은 카엘 님이 성녀님이라고 부르니까…….”

“그냥 내 이름을 몰라서 그랬을지도…….”

요안나는 애써 부정했지만, 추종자도 지지 않고 반박했다.

“요안나 님이라고 정확하게 알고 계셨습니다. 지금 충격이 크셔서 부정적이신 것 같은데 조금 쉬면서 진정하시죠?”

“휴. 그래야 할까.”

요안나는 길게 한숨을 내쉬더니 문득 생각난 듯 물었다.

“그런데 어디서 쉬지?”

“…글쎄요.”

다행히 카엘이 요안나를 잊지 않고 사람을 보내 요안나와 추종자가 지낼 곳을 마련해 줬다.

하지만.

카엘이 얼마나 바쁜지 도통 얼굴을 보기가 힘들었다.

* * *

“언제 또 이야기할 수 있으려나…….”

창밖을 내다보며 그렇게 생각했던 요안나는 문득 과거 자신의 모습을 떠올렸다.

요안나는 시골 마을의 흔하디흔한 여자아이에 불과했다.

여느 시골 아이답게 늘 쉬지 않고 일하는 게 일상이었다.

밤낮 가리지 않고 낮에는 농사일을, 밤에는 바느질을 했다.

그나마 유일하게 쉴 때가 신전에 갔을 때였다.

그때도 기도하러 간 건 아니었다.

가서 주로 한 건 청소였는데, 지금처럼 2층에서 창밖으로 한참을 멍하니 바라보다 아래에서 호통을 치며 부를 때 쫓아 내려가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작스레 쓰러진 어머니를 낫게 해 달라고 난생처음 신에게 기도했다.

그러자 놀랍게도 신성력이 발휘되며 어머니가 깨어난 게 아닌가?

요안나가 신성력을 썼다는 소리에 마을이 발칵 뒤집혔다.

그 소식이 제국의 교단에까지 들어가자마자 성직자들이 우르르 와서 요안나를 데려갔다.

그곳에서의 대접은 좋았지만, 생활은 편하지만은 않았다.

일하는 대신 공부할 게 많았고, 고행해야 한다면서 생활도 엄격했으니까.

하지만 요안나는 견뎠다.

신이 어머니를 살려 준 대가라고 생각하면 이 정도쯤이야 아무것도 아니라고 여긴 거였다.

그러고 몇 달 뒤.

어머니가 덜컥 돌아가셨다는 소식이 왔다.

저번에 쓰러진 병이 재발한 거였다.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이렇게 고생하면 신이 어머니를 구해 주는 게 아니었어? 이 사기꾼! 내가 지금껏 왜 이 고생을 했는데!”

분노한 요안나가 신에게 저주하자 불경하다며 채찍으로 맞고 독방에 가둬서 굶게 했다.

그러면서 이것도 신의 시련이니 이겨 내야 한다고 했다.

그렇게 몇 개월 동안 독방에 가둬져 굶고 채찍으로 맞고 지내던 어느 날!

너무 힘들어서 죽고 싶은 마음이 들었을 때, 천사가 강림한 거였다.

자신도 모르게 공부하면서 외웠던 천사 강림의 구절을 읊었던 모양이었다.

천사는 자신을 죽여 달라는 요안나의 부탁을 거절하고 돌아가면서 자신을 가두던 철문을 소멸시켜 버렸다.

그걸 계시로 여긴 요안나는 자신이 하는 게 신의 뜻이라고 여기기 시작했다.

그렇게 생각하고 살다 보니 정말 세상을 다 가진 것만 같았다.

하지만.

이번에 다시 만난 천사의 말은 큰 충격을 줬다.

‘자신이 생각하는 신의 뜻이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니.’

마치 무엇을 하고 살든지 존재하기만 하면 그만인 것처럼 느껴졌다.

“앞으로는 어떻게 해야 하지…….”

그렇게 중얼거리고 있는데 그 말을 들었는지 누군가 말을 거는 게 아닌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면 당장 해야 할 일을 하면 어떨까.”

“응?”

놀라서 돌아보니 웬 소녀가 자신의 방 안에 들어와 있는 게 아닌가?

레오폴드 왕자군이 내세웠던 또 다른 성녀, 아네스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