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6화 성전 (6)
한편 그토록 강했던 성전군의 선발대를 상대로 대승한 레오폴드 왕자군의 분위기는 들떠 있었다.
그중에서 가장 들뜬 것은 레오폴드였다.
카엘과 클리페우스성의 지원병이 큰 역할을 하긴 했으나, 그 후로 기세를 올린 왕자군도 기대 이상의 활약을 보여 줬기 때문이다.
그간 제국을 상대할 군대를 육성한다고 노력했지만, 아무래도 의구심이 들 수밖에 없는데 이번에 멋지게 증명한 거였다.
‘앞으로 제국의 강병을 상대로도 충분히 싸워 볼 만해.’
레오폴드는 함박웃음이 떠나지 않는 얼굴로 지시했다.
“자, 다들 수고했다! 오늘은 최소한의 경계 병력만 남기고 다들 먹고 마시고 푹 쉬도록!”
프리지가 그 말을 듣고 놀랐다.
“그래도 됩니까? 성전군의 본대도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고 하는데.”
“괜찮아. 리온이 분석한 바로는 선발대가 성전군 전력의 대부분이었다는군.”
“사실입니다. 아직 성녀가 남아 있긴 하지만, 심각한 타격을 입었으니 이대로 돌아갈지도 모르죠.”
“아. 그렇군요.”
리온까지 거들자 프리지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한 가지 사실을 지적했다.
“병력을 쉬게 하신다는 건 후퇴하는 성전군을 추격하진 않으실 모양이군요.”
프리지는 아무래도 제국에 원한이 깊은지라 볼멘소리가 안 나올 수가 없었다.
“오히려 그게 더 저들을 고생시키는 겁니다. 부상자도 많은 데다가 오는 길의 성과 마을도 초토화했으니 돌아가는 게 보통 고생길이 아닐 테니까요.”
“거기다 조만간 제국을 압박할 텐데 민심이 나빠질 일을 벌일 필요는 없지.”
리온과 레오폴드가 번갈아 설명하자 프리지도 마지못해 납득했다.
그때였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막사 안으로 들어서며 카엘이 말했다.
그를 본 레오폴드가 격렬하게 반겼다.
“카엘! 정말 덕분에 살았네. 없었다면 오늘 끝장났을 거야.”
“오랜만입니다, 카엘 님.”
“카엘 님.”
리온과 프리지는 물론, 막사 안의 여러 기사와 부관들이 카엘을 보고 반겼다.
승리의 주역이 등장했으니 당연한 거였다.
“다들 열심히 싸우신걸요.”
카엘도 화답하며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이야기를 나눴다.
그러고 잠시 후.
레오폴드는 리온과 프리지를 비롯해 일부 지휘관들을 제외하고는 모조리 내보냈다.
그런 뒤에 카엘에게 넌지시 물었다.
“그런데 드래곤이랑 무슨 면담을 했나?”
“아, 그거요.”
카엘이 도착하자마자 농담으로 타박하는 레오폴드에게 응수하느라 한 소리였는데 아무래도 신경 쓰였던 모양이었다.
실제로 드래곤 때문에 행군이 지체되진 않았지만, 도중에 카엘만 잠깐 이탈해 드래곤 라 키레아스를 만나고 오긴 했다.
정확히는 성녀가 전쟁을 일으켜 성전군과 싸운다는 말에 라 키레아스가 찾아온 거였다.
라 키레아스는 최근 여러 가지 사건들로 인해, 이 세계의 마력 수치가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고 경고하러 온 거였다.
이대로 가면 몇십 년 안에 마왕을 부활시키는 마법을 사용할 수 있을 정도라고 했다.
말이 몇십 년이지 갈수록 증가되는 속도가 빨라지는 것까지 고려하면 몇 년 안에 그 시점이 도래할지도 몰랐다.
‘그래서 이번에 싸우게 되어도 사람을 최대한 해치지 말라고 했지.’
카엘도 그걸 의식하고 있기에 소피아에게 가능한 사람을 해치는 걸 자제하라고 말해 놓은 참이었다.
“아, 말하기 곤란하면 안 해도 되네. 드래곤이 함구하라고 한 걸 캘 만큼 간이 큰 인간은 아니니까.”
“괜찮습니다. 오히려 말해 두는 게 좋겠네요.”
그렇게 운을 뗀 카엘이 말했다.
“전쟁 중에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도 우습습니다만, 사람을 해치는 걸 최대한 자제하라더군요.”
“음. 그건 무슨 소린가?”
“마왕이 부활하는 데 이용될 수도 있다고요.”
“아, 그런가…….”
카엘의 말에 레오폴드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하지만 프리지는 이해가 안 간다는 얼굴이었다.
“성전 중에 사망해도 그렇게 되나요? 성전에서 죽으면 천국에 가는 거 아니었습니까?”
“그건 모르겠지만. 사람이 살해당하면 마력이 증가하는 건 확실합니다.”
카엘의 대답에 다들 씁쓸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마왕을 소환하는 데 이용되는 성전이라…….”
“그건 이미 성전이라고도 할 수 없겠네요.”
“천사를 강림시키는 데도 그렇다니 모순이 따로 없군요.”
프리지의 말에 생각이 났는지 레오폴드가 넌지시 카엘을 쳐다보며 물었다.
“맞다. 만약 성녀가 천사를 소환하면 이길 수 있겠나?”
안 그래도 카엘은 이곳에 오기 전에 먼저 보낸 소피아와 모르타, 브로칸과 대화를 나누고 왔다.
이들도 직접 보진 못했지만, 레오폴드 왕국군은 하나같이 성녀가 천사를 소환했다는 사실에 아주 겁을 먹고 있다고 했다.
그 때문에 이제 남은 전력은 별거 아니라고 해도 천사와 붙는 거만큼은 답이 안 나왔다.
그건 카엘도 마찬가지였다.
“저에게도 미지의 존재라서요. 뭐라고 말씀을 드리기 어렵겠네요.”
카엘은 회귀 전에도 천사를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 이전에 역사 속에서도 천사를 직접 목격한 이는 손에 꼽을 정도였으니까.
소환하는 데 드는 어마어마한 신성력은 성녀만이 감당할 수 있는데, 성녀가 성전군을 이끌고 이만큼 전면에 나선 것도 처음 있는 일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 그런가…….”
“그래도 나름대로 대비책은 있습니다.”
“오, 역시 카엘이로군.”
“하지만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겁니다. 특별한 일 없으면 이제 후퇴할 테니까요.”
리온이 자신 있게 말했다.
아무리 계산해도 그것 외에 성전군에게 남은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때 병사가 성전군이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소식을 전해 왔다.
“벌써 후퇴하려는 건가?”
리온이 확인차 묻자 병사가 확실히 말했다.
“아닙니다. 성전군이 모조리 이쪽으로 진군하고 있답니다.”
“뭐라고?!”
* * *
한편 요안나는 성전군 본대가 전진함에도 같이 따라 못 가고 있었다.
전군을 돌며 최후의 1인까지 싸워야 한다고 독려 중이었는데, 부상병들이 전투 참가를 거부하고 철수하려고 해서였다.
“손을 잃어서 못 싸운다고?”
“다른 한 손이 더 있잖아. 신이 왜 두 손을 줬겠어?”
“하다못해 방패라도 들어야지!”
“이 정도 시련도 못 이겨서 어떻게 천국에 가려고!”
요안나가 난리를 피우는 걸 보고 손이 잘린 떠돌이 기사와 용병, 신전 기사들까지 어이없어했다.
“제대로 치료해 주지도 않으면서 싸우라니…….”
“저런 괴물들을 상대로 또 나서란 말인가.”
“성녀가 아니라 광녀로군.”
그렇게 지체되자 본대에 있던 고위 성직자들과 신전 기사들이 달랬다.
“그냥 따라만 오게, 적이 죽이진 않는다면서.”
“그래, 나머지는 천사가 다 알아서 할 거야.”
“앞에서 천사를 소환해야 하는데, 성녀가 여기 있으면 일이 더 어그러지지 않겠나.”
그 설득에 넘어간 부상자들은 하는 수 없이 따라나서기로 했다.
하지만 이들 모두를 깜짝 놀라게 하는 일은 이다음에 벌어졌다.
웬 짐마차가 계속 선두도 이동 중인가 싶어서 살펴봤더니 자신들이 약탈해서 모아 둔 금은보화가 실린 마차가 아닌가?
놀라서 막으려고 하니까 성녀님의 특별 지시 사항이라며 멈추지 않았다.
다들 허겁지겁 요안나를 찾아가서 따졌다.
“왜 후방에 놔둔 짐 마차를 옮기시는 겁니까?”
“아, 알아보니까 저기에 값진 물건들이 잔뜩 실려 있다면서요.”
“아, 네. 이곳에서 얻은 겁니다. 가져가서 신전에 기부해서 신에게 바쳐야지요.”
성녀 앞에서 이것 외에는 딱히 다른 변명을 할 수 없었다.
그러자 요안나가 씩 웃으며 말하는 게 아닌가?
“저도 그럴 거로 생각했습니다.”
그 웃음에 다들 불안을 느꼈는데, 이어지는 요안나의 말에 그 불안은 현실이 됐다.
“신께 바친다고 힘들게 제국까지 이고 가지 않게 도와드리는 겁니다. 이제 천사를 소환할 테니 천사를 통해 바치려고요.”
한마디로 천사의 소멸시키는 안광으로 저 금은보화를 모조리 사라지게 할 거라는 이야기였다.
여기까지 고생해서 긁어모은 금은보화가 허무하게 사라질 상황이었다.
“이런 미친!”
“방금 뭐라고 했소?”
“성녀님께 아주 무례한 말을 한 것 같소만.”
기가 막혔던 주교가 저도 모르게 소리를 내자.
성녀의 주위에 있던 신전 기사들이 검을 뽑아 들고는 험악한 분위기를 조성했다.
그러자 다들 움찔하며 눈치를 봤다.
이들은 신전 기사 중에서도 성녀에게 절대 충성하는 광신도.
성녀에 대한 충성만은 신앙심이 깊기로 유명한 파나틱 신전 기사단보다 더하다고 알려져 있었다.
평소에는 평범한 신전 기사처럼 굴었지만, 성녀에 대한 악담만 들리면 앞뒤 가리지 않고 덤비기로 소문이 자자했다.
“내, 내가 실언을 했소. 너무 절묘한 생각에 놀라다 보니…….”
“아, 그런 거였소? 하긴 우리도 성녀님의 말씀을 듣고 그동안 왜 이 생각을 못 했는지 한탄하긴 했죠.”
“우리가 오해했군요. 사죄합니다.”
주교가 식은땀을 흘리며 사과하자 신전 기사들도 언제 화냈느냐는 듯이 웃으며 검을 거뒀다.
그걸 본 이들은 속으로 똑같이 생각했다.
‘이렇게 된 이상 반드시 이겨서 브레프니 왕국 전역을 약탈하는 수밖에.’
* * *
다음 날 아침.
밤새 진군한 성전군의 본대와 진영을 펼친 채 기다리고 있던 레오폴드 왕자군이 접촉했다.
양군이 격돌하기 전에 성녀 요안나가 앞으로 나왔다.
일전에 블레즈성을 함락했을 때처럼 천사를 소환하기 위해서였다.
“나와서 신의 앞길을 가로막는 이들을 모조리 날려 버리세요.”
요안나가 기도하면서 중얼거리자 찬란한 빛의 길이 하늘에서부터 내려왔다.
그리고 그 길을 따라 전과 같은 눈부시도록 하얀 여러 개의 커다란 날개가 겹겹이 붙어 있는 천사가 내려오기 시작했다.
레오폴드 왕자군에서는 그 모습을 보고 긴장했고.
성전군 본대의 규모가 너무 크기에 성녀의 신성력이 미처 못 닿는 곳에 있던 성전군들도 그걸 보고 놀랐다.
천사가 요안나의 앞에서 날개를 펼치며 본모습을 드러내자.
일부 성전군은 발작을 일으키며 쓰러지기도 했다.
그런 인간들을 향해 천사가 친절한 어투로 말했다.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신의 뜻을 전하는 존재니.
그런 천사를 향해 요안나가 저 뒤편의 짐마차를 가리켰다.
“천사여, 신께 바치는 제물이다. 별거 아니나 가져가라!”
-신께는 필요 없으나 마음이 그렇다면 받아가야지.
‘아니! 필요 없으면 안 들고 가는 게…….’
저 짐마차들의 주인은 속으로 절규했지만, 천사의 안광이 번뜩이자마자 짐마차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다들 좌절하고 있는데 요안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천사에게 말했다.
“저들이 악마와 손을 잡은 인간들이다. 신의 대리자로서 그들을 처단코자 하니 힘을 빌려 다오!”
-그런가. 알았다.
이번에도 무심하게 대꾸한 뒤 뒤로 돌아 레오폴드 왕자군을 바라봤다.
안광을 번뜩이려던 천사는 한 소녀가 앞으로 나오는 걸 보고 멈칫했다.
-너도 신의 대리자군.
천사가 그렇게 말한 소녀는 바로 아네스였다.
아네스는 천사에게 말했다.
“신의 대리자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인간의 싸움에 끼지 말고 돌아가세요.”
“마, 말도 안 돼! 인간의 싸움이라니. 이건 어디까지나 신의 뜻을 관철하기 위한 싸움이다!”
요안나가 악다구니를 쓰며 쏘아붙이자 천사가 몸을 돌려 절반의 눈으로 요안나를 쳐다보며 단호히 말했다.
-신의 뜻이 아니다.
“뭐라고?”
-신의 의도는 일개 인간이 짐작하고 말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 그럼 난 뭐냐?”
-신의 대리자는 어디까지나 신의 힘을 세상에 공급하기 위한 그릇에 불과하다.
그렇게 말한 천사는 수많은 눈을 일제히 감고, 펼친 날개를 닫았다.
-어쩌다 다투게 됐는지는 몰라도 서로 부딪치는 이상, 내가 낄 자리는 아니군. 이만 돌아가겠다.
그 말을 끝으로 천사는 다시 하늘로 천천히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걸 본 요안나는 초조했다.
‘아, 안 돼. 저대로 가 버리면.’
자신이 신의 뜻이라고 자신 있게 말한 게 모조리 부정당하는 데다가, 저대로 가 버리면 저 사악한 자들에게 무방비로 노출되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대체 어떻게 해야… 맞다!’
요안나는 마침 황제의 심복인 위자르샤가 준 주머니를 떠올리고는 곧바로 품속에서 꺼내 풀었다.
“사악한 자들이여, 모두 죽어라!”
그러나.
정작 거기에 반응한 건 거의 하늘 끝까지 올라간 천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