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4화 성전 (4)
한편 블레즈성의 성벽을 무너트리고 함락한 성녀 요안나는 다시 성전군 본대로 복귀했다.
그러자 본대에 있던 신전 기사와 성직자들이 우르르 나와서 반겼다.
“블레즈성을 단숨에 무너트렸다고 들었습니다. 요안나 님, 정말 대단하십니다.”
“다 신의 뜻대로 행한 것뿐이에요.”
“하하, 그야 그렇지요.”
“그보다 직접 나서실 필요까진 없으셨을 텐데요. 저희가 어찌나 걱정했는지 모릅니다.”
“사람들을 내세워 놓고 가만히 앉아 있는 건 성미에 안 맞아서요. 아마 신께서 바라시기에 제 마음을 움직이신 거겠죠.”
“오. 그런 뜻이었군요.”
“…….”
요안나의 대답에 다들 입을 다물었다.
요안나가 무슨 짓을 저지르든 간에.
항상 신의 뜻이다.
신께서 바라신 거다.
하고 말하니 딱히 할 말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요안나가 물었다.
“그보다 여전히 죄를 용서해 달라고 반성하는 이가 없었습니까?”
진군 중 심심했던 요안나는 브레프니 왕국의 국경을 넘어오자마자 한 가지를 지시했다.
항복한 병사와 거쳐 온 마을와 성 주민 중.
반성하는 이는 자신이 만나 보고 진정성이 느껴지면 직접 죄를 사할 테니 데려오라고 한 거였다.
하지만 지금까지 데려온 이는 하나도 없었다.
다들 악귀에게 제대로 홀렸는지 반성하는 이가 없어 모조리 불태웠다는 거였다.
이번에 블레즈성을 쳤을 때는 항복하는 이를 직접 목격해서 물어본 거였다.
그때 옆에 있던 신전 기사가 고개를 저었다.
“네. 아쉽게도 이번에도 한 명도 없었습니다.”
“쯧, 얼마나 악마에게 놀아났으면 저럴까.”
요안나를 혀를 차면서 성전을 일으키기를 잘했다고 다시 한번 생각했다.
‘제국 북쪽의 국가가 이토록 악에 물들어 있다니, 이 기회에 모조리 정화해야겠어.’
그러나 정작 요안나를 둘러싸고 있던 신전 기사와 성직자들의 속마음은 달랐다.
‘흐흐흐, 그걸 또 믿나 보네.’
‘아무도 없을 리가 있나. 성녀라서 그런지 순진하단 말이야.’
실제로 전장에서 항복하거나 성전군이 조용히 지나가길 바라면서 대접하려 들며 레오폴드와 카엘을 욕하고는 봐주길 바라는 이는 많았다.
아니, 많은 게 아니라 대부분이 그러했다.
하지만 항복과 반성을 받아들여서야 일부 조공은 받겠지만, 마음대로 약탈할 수가 없었다.
그 때문에 항복하든 말든 모조리 죽이고 부수고 불태운 뒤에 돈이 될 만한 걸 챙겼다.
하층민들이야 사후에 천국에 갈 정도로 기부금을 낼 돈이 없어 참가했지만.
기사와 신전 기사, 용병들은 명예를 드높이고 약탈할 기회를 노리고 참가한 거였다.
물론 거기에만 열중하다 보면 군기가 흐트러지기 때문에 보통이라면 지휘관들은 통제하느라 애를 쓴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황제가 성전에 참여는 하지 않되 지원을 아끼겠다고 공언한 것과 달리, 제국군을 보낸 거였다.
군율이 엄격하고 훈련이 잘된 제국군이 있으니 나머지가 이곳저곳을 약탈하고 다녀도 별 탈이 안 생겼다.
심지어 황제가 심복을 보내 모조리 약탈해도 된다고 넌지시 알려 왔다.
대신 이 일이 성녀의 귀에 들어가면 골치 아파지니 약탈한 곳은 사람 하나도 남겨 두지 않고 해치워야 한다는 조건만 달았다.
그 때문에 오는 길에 모조리 죽이고 불태운 상황이었다.
그때 요안나가 말했다.
“참, 팡세성은 어떻게 됐습니까?”
“아, 거기서 함락했다고 연락 왔습니다.”
“그럼. 좌우 측의 불안 요소는 제거했으니 다시 진군합시다!”
그 말에 신전 기사와 성직자들이 다급히 말렸다.
“안 됩니다!”
“아직 이릅니다. 조금만 천천히 움직이시지요.”
“왜 그런가요? 전 하루라도 빨리 진군하고 싶은데요? 그래서 직접 성 하나를 맡아서 함락했습니다만.”
하지만 신전 기사와 성직자들은 물러서지 않았다.
“기왕 온 김에 일대의 이단들을 정화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성녀님이 손보신 블레즈성의 주민들도 이제 반성하는지 어떤지 확인해 봐야 할 테고요.”
당연히 약탈하기 위해서 만류한 거였지만, 정화한다는 말이 마음에 들었던 요안나를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제가 너무 급했나 보군요.”
요안나는 블레즈성을 무너트리기만 했다.
그 뒤처리는 다른 사람들이 맡아서 할 테니 쉬라고 해서 돌아온 참이었다.
“그럼, 각지로 보낼 성전군은 출발하기 전에 제게 보내 주십시오. 제가 축복해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역시 성녀님이 계시니 든든하군요.”
“힘내서 약탈… 아니, 정화할 수 있겠습니다.”
다들 모두 기뻐했다.
성녀의 축복은 정말로 효험이 탁월해서 피로를 잊게 해 줄 뿐만 아니라, 평소보다 훨씬 강한 힘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해 줬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성녀의 축복을 받고 이 지역 곳곳을 정화하러 출발했던 성전군의 기사들이 얼마 못 가서 하나둘 패배했다는 소식만이 들려올 뿐이지 않은가?
자신의 축복을 받은 기사가 패배하다니, 요안나는 충격을 받았다.
“대, 대체 어떻게 된 거야?”
* * *
버리치는 제국과 브레프니의 수도 킹스콧을 오가는 여행객과 상인들로 인해 제법 번성한 마을이었다.
그런 곳이니만큼 성전군의 진로 가운데 있었는데, 성전군이 조만간 쳐들어온다는 소식에 마을 분위기가 뒤숭숭했다.
그때 촌장이 마을 주민들을 달랬다.
“겁먹을 거 없소. 우리랑 싸우는 게 아니라, 망나니 왕자와 저 외딴 북쪽 성의 공작의 막내아들을 응징하러 온 이들이니까. 오히려 만족스럽게 잘 대접하면 짭짤하게 벌 기회일지도 모르오.”
촌장의 장밋빛 전망에 주민들은 불안한 듯 물었다.
“그러면 좋겠지만, 약탈하면 어쩌죠.”
“무려 성전군이요. 설마 환영하는 이들을 약탈할까.”
그렇게 말하는 촌장도 조금은 불안했다.
다른 마을에서 소식이라도 오면 좀 안심이 될 테지만, 도통 남쪽에서 오는 이가 하나도 없었다.
그래도 마을 회의 끝에 좀 더 대처하기로 했다.
여행객들의 안전을 빌어 주는 대가로 돈을 벌어 규모를 키운 신전의 주교에게 잘 말해 달라고 거액을 기부한 거였다.
거기에 어느 정도는 상납할 걸 각오하고 주민끼리 돈을 모으기도 했다.
하지만.
버리치 마을에 들이닥친 성전군은 일말의 자비도 없었다.
맞이했던 주교는 목이 달아났으며, 그걸 보고는 겁을 먹고 준비해 둔 금화 상자를 내밀었던 촌장은 가슴을 창에 찔렸다.
그러고는 본격적인 약탈과 방화, 살인이 시작됐다.
환영하기 위해 모였던 마을 주민들은 엎드려 빌었다.
“사, 살려 주십시오.”
“제발 용서를…….”
그러다 몇 명이 무참히 살해당하는 걸 보고 비명을 지르며 도망쳤다.
촌장은 서서히 죽어 가면서 그 광경을 보고는 깨달았다.
남쪽의 다른 마을에서 소식이 없었던 건 이렇게 무자비하게 쓸어버려서였다는 것을.
‘이러면서 무슨 성전군이라고…….’
“오! 여기는 작은 마을치고는 제법 가진 게 많은데.”
“숨어 있는 녀석이 없는지부터 샅샅이 뒤져. 챙기는 건 그 뒤다.”
“그럴 필요 있나. 챙길 거 다 챙긴 뒤에 다 불태워 버리면 되잖아.”
한창 약탈하던 신전 기사들이 자기네들끼리 낄낄대며 좋아할 때였다.
“도망쳐! 어서 도망쳐!”
누가 소리치나 보니까 한 용병이 기겁한 얼굴로 지나가는 게 아닌가?
신전 기사가 집을 나와 자세히 보니 한 손으로 다른 손을 감싸는 게 피를 잔뜩 흘리고 있었다.
“뭐야? 저거 다친 거 같은데. 저기서 칼이라도 맞았나.”
“어쩌면 여기서 묵던 용병이나 떠돌이에게 당했을지도 모르겠네.”
“이래서 용병 나부랭이들은 안 된다니까. 내가 해치우고 오지. 내 보물들에 손대면 안 돼.”
자루를 내려놓은 신전 기사가 검을 집어 들고 밖으로 나왔다.
그러자 용병이 달려온 방향으로 저 멀리서 웬 여인이 다가오고 있는 게 보였다.
갑옷을 갖춰 입긴 했지만, 기다란 머리칼이나 드러난 몸의 굴곡은 영락없이 여자였다.
“뭐야? 여자한테 당한 거야?”
도망치는 용병을 한심하게 생각하며 좀 더 가까이 가 보니 아주 미인이었다.
“흐흐, 때려눕히고 재미도 좀 봐야겠는걸.”
음흉하게 웃던 신전 기사의 표정이 이내 굳었다.
우웅.
여인의 검에 오러가 씐 걸 본 거였다.
“오, 오러 사용자라고?! 안 되겠다.”
겁을 집어먹은 신전 기사는 곧바로 뒤돌아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때 뒤에서 펑 소리가 들리더니 여자가 곧바로 자신의 앞에 나타난 게 아닌가.
“이, 이럴 수가!”
신전 기사는 놀란 얼굴 그대로 검면에 얻어맞고 쓰러졌다.
그때 뒤에서 건장한 사내와 두건으로 머리를 싸맨 두른 마른 체형의 여인이 뒤따라왔다.
마른 체형의 여인, 모르타가 불타는 마을을 보며 안타까워하며 중얼거렸다.
“조금 일찍 올 것을, 늦었네요…….”
“어쩔 수 없죠. 지금부터라도 성전군을 빨리 몰아내고 사람들을 구해야죠.”
오러 씐 검으로 굳이 신전 기사를 기절시킨 여인, 소피아가 침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때 건장한 사내, 브로칸이 코를 킁킁대더니 신전 기사가 있던 건물 안쪽을 가리켰다.
“저기에 누군가 있어요.”
“마을 주민이 숨어 있나?”
“아뇨. 냄새로는 제국 쪽 신전 기사 같습니다.”
그렇게 말한 브로칸은 신전 기사가 숨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어, 어떻게 알았지?’
한편 숨어 있던 신전 기사는 밖에서 들리는 소리에 깜짝 놀랐다.
주민들이 숨어 있으면 찾을 필요 없이 불 질러 버리면 된다고 했던 주제에 적이 오러 사용자라는 소리를 듣자마자 숨은 거였다.
“사, 살려 주시오…….”
자신의 정체까지 들킨 걸 깨달은 신전 기사는 곧바로 손을 들고 나오면서 항복했다.
그걸 본 소피아가 말했다.
“살려는 줄 겁니다. 카엘 님이 되도록 사람을 해치지 말라고 했으니까요.”
그 말에 신전 기사가 안도했을 때였다.
갑자기 손 쪽이 불이 붙은 것처럼 뜨겁다 싶었더니 피가 치솟는 게 아닌가?
“크억!”
격렬한 고통에 괴로워하는 신전 기사에게 소피아가 차갑게 쏘아붙였다.
“싸우지 못하게 손 하나를 가져갈 테니, 어서 제국으로 돌아가십시오.”
“크아아아악!”
신전 기사는 생전 처음 겪어 보는 고통에 비명만 지를 뿐이었다.
그사이 소피아는 기절한 신전 기사의 손도 자르고는 말했다.
“그보다 어서 가서 다른 사람들을 구하죠.”
“네!”
“알겠습니다.”
그렇게 소피아와 모르타, 브로칸은 마을 안쪽으로 달려갔다.
버리치 마을을 약탈하기 위해 온 기사와 신전 기사, 용병들까지 대략 100여 명이 순식간에 전투력을 완전히 상실했다.
소피아와 모르타, 브로칸에게 손이 잘린 거였다.
겨우 구원받은 마을 주민들이 감사 인사를 하려고 했지만, 이들은 이미 마을을 떠나고 없었다.
“어, 은인들은 어디 가셨지?”
“벌써 떠나셨습니다. 다른 마을을 구해야 한다고요. 조만간에 레오폴드 저하의 군대가 올 테니 그때까지 조심하라고도 하셨어요.”
소피아와 모르타, 브로칸은 여기 오기 전에 이미 약탈당해 불탄 마을을 몇 개나 본 뒤라 한시가 급했다.
최대한 많은 마을을 구하기 위해 나머지 일행도 따로 조를 짜서 다른 마을로 간 상황이었다.
약탈하러 나온 건 주로 신전 기사와 용병들.
성전군에서 나름대로 싸울 줄 아는 쪽에 속했기에 타격이 컸다.
아니, 목숨은 붙어 있긴 했으나 손을 잃고 치료해야 했기에 전투력 손실을 넘어 크나큰 부담이 됐다.
한편 뒤늦게 여러 마을을 정화하려다가 적의 소부대에게 당한 피해가 크다는 소식을 들은 성녀 요안나는 불같이 화를 냈다.
신의 기적을 받을 자격도 없다며 손을 잃은 용병은 물론, 신전 기사의 치료마저 거절할 정도였다.
그러고는 그대로 진군해 먼저 수도 킹스콧을 공격하기로 결정했다.
한편.
그 소식을 들은 레오폴드는 소피아와 나머지 일행을 모두 불러들이고는 그간의 성과를 칭찬했다.
“다들 고생했어. 이대로라면 카엘이 없어도 성전군을 물리칠 수도 있겠는걸.”
하지만 레오폴드는 성전군의 선발대와 부딪히자마자 그 말을 철회했다.
신성력을 쓰는 신전 기사단이 예상보다 훨씬 많았기 때문이다.
여기에 성녀가 본대를 이끌고 와서 천사라도 소환하면 감당이 안 될 게 분명했다.
“카, 카엘이 어서 와야겠는걸.”
레오폴드가 중얼거린 순간, 카엘이 클리페우스성의 지원군을 이끌고 도착했다.
그리고.
선발대를 순식간에 쓸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