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3화 성전 (3)
“젠장, 왜 저렇게 많이 왔어…….”
성주 카호프만도 점점 다가오는 제국군의 병력 규모를 보고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그 수는 어림잡아도 5천가량.
전령을 보호한다고 애써 긍정적으로 생각하려 해도 도저히 말도 안 되는 숫자였다.
오히려 공성전을 펼친다고 하는 게 합리적으로 보일 정도였다.
하지만 카호프만은 일말의 희망을 놓지 않았다.
“멈춰라! 멈추시오! 부탁드리오. 제발 발걸음을 멈춰 주십시오!”
카호프만의 외침이 점점 비굴해지던 와중에 제국군이 겨우 멈췄다.
거기에 자신감을 얻은 카호프만이 말했다.
“교단에 서신을 보냈는데, 도착하지 않았소이까?”
“…….”
하지만 제국군을 이끄는 하얀 갑옷을 입은 이는 별다른 대꾸 없이 카호프만을 쳐다볼 뿐이었다.
“괜찮습니다. 지금이라도 내 뜻을 전하면 되는 일 아니겠소?”
그런데도 카호프만은 기죽지 않고, 이렇게 운을 띄운 다음 천천히 말을 이어 나갔다.
“우리 팡세성은 몬스터와 손잡은 클리페우스성과는 일절 관계가 없소이다.”
“그러니 성전군이 지나가는 동안에 성 밖으로 한 걸음도 나서지 않고 조용히 있겠소.”
“물론, 맨입으로 회군하라고 요청하는 건 아니외다. 성전군이 돌아갈 때 두둑한 사례비를 챙겨 드리겠소.”
굴욕적인 제안을 하는 카호프만을 보다 못한 리온이 불렀다.
“카호프만 님!”
“조용히 해! 지금 이것저것 따지고 앉아 있을 때가 아니니까.”
그렇게 말하는 카호프만은 잔뜩 겁을 집어먹은 듯했다.
그때 지휘관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항복하겠다는 거냐?”
굴욕적인 말이었지만. 카호프만은 그마저도 받아들였다.
“그, 그렇소. 항복하겠소.”
문제는.
“좋아. 항복을 받아 주겠다.”
“고, 고맙소.”
“그럼, 바로 자결하라.”
“그, 그게 무슨 소리요? 내가 지금 항복한다는 소리를 못 들었소?”
카호프만은 황당하다는 듯 되물었지만, 지휘관은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지금 항복하는 건 앞으로 죄를 짓지 않겠다는 의미. 그 전에 악마와 동조한 죄를 씻으려면 죽음으로 갚는 수밖에 없다.”
“그, 그런.”
결국, 카호프만이 할 수 있는 건 포기하고 그냥 죽든가 싸우다 죽는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카호프만은 후자를 택했다.
“병력을 좀 데려왔다고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리며 나를 농락하다니! 다들 전투 준비!”
혹시나 전투를 피할까 기대했던 병사들은 걱정 어린 표정으로 움직였다.
그렇다고 투항할 수도 없었다.
그랬다가는 방금 제국군의 지휘관이 말한 것처럼 가만히 앉아서 죽을 뿐이었으니까.
한편 그 모습을 본 리온은 불길함을 느꼈다.
‘항복해도 그냥 두지 않는 성전군의 방침은 알겠지만, 당장 바로 앞에서 자결하라고 할 필요까지는 없었을 텐데…….’
차라리 항복을 받아들이고 성안에 들어간 뒤에 처벌해 버려도 될 일이었다.
그게 아니라는 건 단 하나만을 의미했다.
항복하든 말든 이 성 따위는 손쉽게 무너트릴 수 있다는 거였다.
‘그래도 최대한 막아 보는 수밖에…….’
리온은 부하를 불러서 지시를 내렸다.
그러고 있는데, 카호프만이 불안한 얼굴로 물었다.
“일이 이 지경이 됐는데, 도망치지 않고 도와줄 거지? 내가 여기서 무너지면 레오폴드 왕자한테도 손해가 아닌가.”
“알고 있습니다. 함께 싸울 테니 걱정하지 마시죠.”
리온이 차갑게 대꾸해도 카호프만은 이제 불쾌해하기보다는 안도하는 마음이 더 컸다.
그러는 사이에 제국군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심지어 선두에선 지휘관이 무기를 빼 들고 달려왔다.
특이하게도 수 미터에 이르는 기다란 채찍을 무기로 썼다.
“이쪽으로 온다. 발사!”
카호프만의 지시에 따라 성벽 위에서는 화살을 날리기 시작했다.
레오폴드가 준비해 둔 화살과 궁수가 빛을 발한 공격이었다.
그때였다.
“아아아아아아아!”
제국군 측에서 찬송가 소리가 들리더니 선두에서 달려오던 지휘관의 몸속에서 찬란한 빛이 새어 나오는 게 아닌가?
그건 바로 신성력이었다.
지휘관은 기다란 채찍을 풀어 머리 위에서 돌리기 시작했다.
그 채찍에 신성력이 더해지자 채찍의 범위가 수십 미터로 길어지더니 화살을 대부분 쳐내 버린 거였다.
나머지 화살도 채찍이 휘둘러지면서 생성된 돌풍에 힘을 잃었다.
그걸 본 카호프만은 충격을 받았다.
“어, 어떻게 저럴 수가…….”
“듣던 대로 제국의 신전 기사는 정말 보통이 아니군요.”
리온도 이를 악물었다.
제국의 신전 기사, 특히 교단 직속의 신전 기사는 다른 신전 기사와 다르게 강했다.
보통 신전 기사라고 하면 출신이 비천하거나 별다른 실력이 없어 마지못해 신전에 투신한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아무나 될 수 없는 교단의 신전 기사들은 신앙심과 검술 실력이 뛰어날 뿐만 아니라.
소드 마스터는 못되더라도 소드 엑스퍼트까지 수련하고 신전 기사가 될 때도 있을 정도였다.
이들은 프레데릭이나 파나틱 신전 기사처럼 자체적으로 신성력을 발휘하진 못했지만.
신성력이 담긴 장비에 지금처럼 찬송가를 통해 신성력을 제한적으로나마 사용할 수 있었다.
그 파괴력은 소드 마스터에 비하면 부족하지만, 상성에 따라 언데드 몬스터나 악마들을 상대로는 몇 배에 달하는 위력을 발휘했다.
5천의 제국군을 신전 기사가 지휘하고 있으니 일개 왕국의 성 따위는 쉽게 함락한다고 여긴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것까지 버틸까?’
리온이 부하에게 신호를 보내자 성벽에서 벼락이 치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쾅!
하나뿐이었지만, 레오폴드가 클리페우스성의 드워프들에게 애걸복걸해서 얻어 온 드워프의 철포가 불을 뿜었다.
“이런…….”
퍽!
예상치 못한 공격에 신전 기사가 얻어맞고 말에서 추락했다.
신성력으로 신체는 보호했지만, 어마어마한 물리력에 말 위에서 버티진 못한 거였다.
그걸 본 리온이 감탄했다.
‘역시 대단한 위력이라니까.’
이런 철포는 인간들도 비슷하게 만들 수는 있지만, 비싼 유지비와 낮은 안정성 때문에 만들어도 잘 쓰이지 않았다.
무엇보다 실전에서 이토록 정확하고 강력한 위력을 발휘하는 건 드워프제밖에 없었다.
“신전 기사님을 구하라.”
“와아아아아!”
뒤늦게 제국의 병사들과 기사들이 달려오는데 리온이 또 명령을 내렸다.
“쏴라!”
성내 궁수들이 그 명령에 따라야 하는지 순간 고민했지만. 리온이 명령을 내린 건 카호프만의 궁수들이 아니었다.
자신이 데려온 부하들이 마찬가지로 드워프에게 받아 온 다연장 쇠뇌를 날렸다.
“크억! 어디서 저런 게 나온 거지?”
“이런, 방패도 뚫린다. 최대한 두꺼운 걸 가져와!”
“저렇게 쏘는데 어떻게 접근하라고.”
제국군이 혼란에 빠진 걸 보고 카호프만이 기뻐했다.
“자식들, 꼴좋다!”
그러더니 리온을 슬쩍 보고 변명했다.
“아, 오해하지 마시오. 아까는 내가 저들을 떠본 거니까. 설마 내가 이곳을 버리고 항복하겠소?”
눈에 빤히 보이는 거짓말이었지만, 지금 따지고 앉아 있을 상황은 아니었다.
“어쨌든, 병력을 지휘해 주세요. 적을 막아 내야죠.”
“알겠소! 하핫! 다들 뭐 해! 어서 계속 화살을 쏴라!”
어차피 화살도 레오폴드가 제공한 거라 사용하는데 거리낌이 없었다.
그때였다.
“아아아아아아아아아!”
한층 더 큰 찬송가가 울려 퍼지더니 제국군 곳곳에서 찬란한 빛이 터져 나왔다.
신성력을 쓸 수 있는 신전 기사가 하나가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리온은 냉정하게 현재 상황을 판단했다.
‘이대로라면 힘들겠군. 금방 무너지겠어. 그래도 여기에 이 정도 전력이 왔으면, 프리지 쪽은 조금은 수월히 막았으려나.’
기대할 것은 그 정도뿐이었다.
그리고.
리온의 예상대로 해가 떨어지기 전에 팡세성은 함락됐다.
성주인 카호프만은 진작에 비밀 통로를 통해 도망쳤다가 제국군에게 잡혀서 처형당했다고 했다.
리온은 마지막까지 남아서 분투하다가 성문이 열릴 때쯤, 모두에게 도망치라고 명령했다.
그 말에 앞서 지휘관과 카호프만의 대화를 똑똑히 들은 기사와 병사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쳤다.
성안의 사람들이 목숨을 걸고 도망치기 시작하자 대혼란이 벌어졌다.
‘이단을 해치운다고 기세등등했겠지만, 이건 예상 못 했겠지.’
리온은 그 혼란을 틈타 부하와 드워프들의 무기를 최대한 챙겨서 철수했다.
* * *
레오폴드의 본대로 복귀한 리온이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팡세성을 못 지켰습니다.”
“아니야. 무사히 돌아와서 다행이네. 거기다가 병력과 드워프 무기도 챙겨서 복귀했다면서. 잘했네.”
레오폴드는 리온을 위로하고는 넌지시 물었다.
“적의 전력이 예상 이상이었다면서.”
“네! 그 작은 성 하나를 공략하는데, 교단의 신전 기사들이 다수 나타날 거라고는 예상 못 했습니다.”
“그랬군.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전투에 소드 마스터가 참여하면 전세가 뒤바뀔 정도.
소드 마스터에 못 미친다고 하더라도 신전 기사단이 여럿 나타나면 그 전력으로는 버티기 힘든 게 당연했다.
그때 리온이 돌아왔다는 소식을 들은 프리지가 쫓아왔다.
“돌아왔다더니 정말이네. 리온, 너라면 좀 더 버틸 줄 알았는데.”
“너는 왜 여기 있는 거야? 여기에 전력이 집중된 만큼 블레즈성은 방어가 수월할 거라 여겼는데.”
“아, 못 들었어? 내 쪽에는 성녀가 직접 왔어.”
프리지의 말에 리온이 깜짝 놀랐다.
“성녀가?! 그렇게 과감하게 움직이다니…….”
“그뿐만이 아니라. 천사까지 소환했어.”
“천사?”
리온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차라리 드래곤이라면 모를까, 천사에 대해서는 도저히 상상이 안 됐기 때문이다.
“어찌나 끔찍하게 생겼는지 숨이 막힐 정도더라.”
프리지는 다시 떠올리기 괴롭다는 듯 잔뜩 인상을 쓰며 말했다.
“심지어 안광으로 성벽을 그냥 없애 버렸다는군.”
“안광 말입니까?”
“자세한 건 이따가 설명해 줄게.”
되묻는 리온을 향해 프리지가 말했다.
“그나저나 성벽을 없앨 수 있다니 정말 큰일이군요. 그게 사실이라면 이대로 붙으면 필패할 겁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프리지도 나서서 리온의 말을 거들었다.
그러나 레오폴드는 결연한 얼굴로 말했다.
“아무리 그래도 마냥 전선을 물릴 수는 없어. 지금 성전군은 모든 걸 잿더미로 만들고 오고 있다니까.”
“…….”
“…….”
그 말에 리온과 프리지 모두 할 말을 잃었다.
리온이 지휘관에게 들은 것처럼, 정말로 항복하는 이들까지 모조리 참수하고 중.
심지어 마을도 정화할 필요가 있다며 모조리 불태워 버리는 중이라는 거였다.
리온이 도망쳐 온 팡세성도 함락하자마자 성전군이 불을 지르는 걸 목격하기도 했다.
심지어 그런 와중에 진군 속도도 너무 빨랐다.
원래라면 국경을 통과하더라도 인근까지 오려면 한참 걸릴 거라 예상했다.
카엘이 지원군을 꾸리고 와도 충분하고도 남을 시간이었지만, 성전군이 너무 빠르게 온 거였다.
“어떻게든 여기서 시간을 끄는 수밖에 없겠군.”
“네. 카엘 님이 오면 어떻게든 될 테니까요.”
“저도 동감입니다.”
레오폴드는 리온과 프리지의 말에 동감하면서도 쓴웃음을 지었다.
‘이거 한심하군. 그렇게 십수 년을 준비하고도 카엘에게 의지를 해야 하다니…….’
그래도 하는 수 없었다.
카엘은 오크 로드를 해쳤을 뿐만 아니라 드래곤과 함께하고 동방의 용까지 부리고 있으니까.
의지만 있다면 스스로 국가를 세워도 될 정도였다.
“어쨌든 카엘이 지원군을 데려오려면 며칠만 버티면 되니까 조금만 힘내자고!”
“네!”
“알겠습니다!”
레오폴드의 말에 프리지와 리온이 마음을 다잡았을 때였다.
밖에서 기사가 달려와서 소리쳤다.
“도착했습니다! 드디어 도착했습니다!”
“뭐가?”
“카엘 님이 보낸 지원군이 도착했습니다!”
“그게 정말인가?!”
레오폴드는 깜짝 놀라서 뛰쳐나갔다.
그런데 지원군치고 보이는 거라고는 십여 명 정도가 전부 아닌가?
당황한 레오폴드를 본 소피아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카엘 님이 상황이 매우 급하게 돌아갈지도 모른다며 도우라고 저희 먼저 보냈습니다.”
그리고.
그 말대로 카엘이 보낸 십여 명의 지원군이 나타난 것만으로 상황은 완전히 반전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