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가의 약 빤 막내아들-212화 (212/234)

212화 성전 (2)

“그래서 후퇴했다고?!”

국경을 넘어온 성전군의 선발대를 꺾기 위해 보낸 부대 지휘관에게 보고를 받은 레오폴드는 기가 찼다.

‘아무리 두렵다고 해도 그렇지, 싸워 보지도 않고 무너지다니. 이거 낭패로군.’

앞으로의 전투도 쉽지 않을 게 눈에 선했다.

하긴 레오폴드는 어디까지나 제국과 싸운다고 준비를 해 온 거지, 성녀의 군대와 전투를 벌이는 건 계획에 없었다.

그때 레오폴드군에 합류한 프리지 올렉이 나섰다.

“이번에는 저를 보내 주십시오! 저와 제 부하들은 성녀 앞이라도 절대로 투지를 잃지 않을 겁니다.”

그도 그럴 게 제국의 마법사가 푼 몬스터 아라흐네에 의해 올렉 백작가의 성이 불타고, 가문의 대부분이 사망했다.

제국에 의해 거의 멸문당한 거나 마찬가지.

프리지를 비롯해 그 와중에 살아남은 이들은 제국에 복수심이 가득한 만큼, 성녀와 싸우기를 주저할 리 없었다.

레오폴드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네 뜻은 알겠지만, 그 숫자로는 무리야.”

프리지를 비롯해 제국에 복수심을 가진 생존자 중, 싸울 수 있는 이들은 100여 명 남짓에 불과했다.

그들이 아무리 분투해 봐야 나머지 병력이 전의를 상실하면 의미가 없었다.

“그러면 어떻게 하실 작정입니까?”

“일단 카엘이 올 때까지 버텨 봐야지.”

당돌하게 물었던 프리지는 레오폴드의 대답에 얼굴이 풀렸다.

“아, 카엘 님이 오십니까? 다행입니다.”

그때 옆에서 잠자코 듣고 있던 리온 이고르가 설명했다.

“카엘 님이 오늘 전해 온 소식에 따르면 클리페우스성에서 수천에 이르는 병력을 데리고 온다니까, 훨씬 싸울 만할 겁니다.”

클리페우스성의 병력들은 회색산맥의 몬스터, 놀과 오크들과의 전투 경험이 많았다.

이들이라면 성전군이나 성녀와도 당당히 싸울 수 있을 게 분명했다.

“맞아. 클리페우스성의 병력들을 중심에 두기만 해도 이번처럼 일방적으로 무너지진 않을 거야.”

“그럼, 이대로 계속 기다리기만 합니까?”

“아니, 그러면 전선이 너무 밀려서 자칫하면 수도 킹스콧 바로 앞에서 싸우게 될지도 몰라.”

“그렇지요. 최대한 공격을 지연시킬 필요는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곳과 이곳에 증원을 보내서 수성했으면 합니다만.”

리온이 성전군의 진로 좌·우측에 떨어진 두 개의 성을 가리켰다.

“블레즈성과 팡세성인가……. 여긴 성전군의 진로와는 다소 거리가 있는데?”

의문을 갖는 프리지에게 리온이 설명했다.

“그래도 언제든 좌·우측 허리를 당할 가능성이 있으니 점령하려고 할 겁니다.”

“그렇군. 일단 두 성에 병력을 보낸다.”

레오폴드가 결정을 내렸다.

그러자 프리지가 나섰다.

“저도 보내 주십시오! 여기 블레즈성으로 가겠습니다.”

“그럼, 저는 팡세성으로 가면 되겠군요.”

리온의 말에 레오폴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각자 수고 좀 해 주게.”

* * *

“내 성에서 제국군을 맞아 싸우게 되다니…….”

블레즈성의 성주는 자신의 집무실에서 저 멀리 제국 쪽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틀린 말은 아닌 게 떠돌이 기사, 용병들, 농민들 같은 어중이떠중이가 본진에서 이탈해 공성전을 벌이려고 하진 않을 게 분명했다.

그럴 만한 병력은 교단의 신전 기사단이나, 제국군뿐이었다.

그중에서 교단의 신전 기사단은 본대에서 중심을 잡고 성녀를 보호해야 하기에 움직이기 힘들었다.

그런 소거법으로 제국군이 올 걸 예상한 거였다.

‘그나저나 레오폴드 왕자의 예상대로 됐군.’

블레즈성은 과거 레오폴드가 만약 제국군이 쳐들어오면 이곳에서 막아 내야 한다며 그간 막대한 자금을 쏟아부어 성을 보수하고, 병사를 준비시켰다.

그것만으로도 모자란다고 판단했는지 현재 지원병까지 보내온 상황이었다.

‘성전군이 가능하면 우리를 못 본 척 지나쳤으면 좋겠지만. 이번에도 레오폴드 저하가 예상하신 것처럼 역시 점령하고 가려고 하겠지.’

그때 병사가 다급하게 찾아왔다.

“서, 성주님! 큰일 났습니다!”

“무슨 일이냐?”

“아무래도 성전군이 나타난 거 같습니다.”

“성전군이?!”

제국군이 올 줄 알았던 제네프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내 성벽으로 달려가니 저 앞에서 대규모로 몰려오는 군대가 보였다.

그 군대는 성스러운 빛에 휩싸여 있었다.

성녀가 신성력을 발휘하고 있는 성전군이 틀림없었다.

“아니, 어떻게 된 거지? 본대가 이리로 온 건가?”

“병력을 봐서는 그런 건 아닌 거 같네요.”

이곳에 지원병을 이끌고 온 프리지 올렉이 매서운 눈으로 적들을 노려보며 대답했다.

그 말대로 병력의 숫자는 그리 많지 않았다.

어림잡아 수천?

그것만으로 성벽을 공격하는 데는 충분하겠지만.

본대가 아닌, 일부만 온 게 틀림없었다.

그때 어느 정도 가까이 온 성전군이 멈추더니, 한 소녀가 걸어 나왔다.

하얀빛을 발하는 그 소녀는 성녀 요안나였다.

“저렇게 무방비로 나오다니. 활로 쏘겠습니다.”

“성녀를 저격한다고?! 아, 안 되오! 전투에 돌입하더라도 절대로 해치면 안 돼! 어디까지나 생포해야 한다.”

“알겠습니다.”

제네프의 말에 프리지가 불만스러운 얼굴로 쳐다봤지만, 이내 납득했다.

“그런데 왜 나온 거지?”

“글쎄요.”

제네프와 프리지가 어리둥절해지고 있는데, 요안나가 입을 열었다.

“전쟁하고 싶지 않았지만, 악마와 손을 잡은 인간을 내버려 둘 수 없어서 여기까지 왔다. 우리는 금화나 영토를 얻고자 함이 아니라 위대한 사명을 위해 싸운다. 우리의 신성한 대의에 저항하지 말고 항복하라.”

나직이 중얼거리는 것뿐인데 청아한 목소리가 울려 퍼지면서 귀에 쏙 박혔다.

그 말을 들은 성벽 안의 병사들은 동요가 컸다.

제네프도 당황했다.

“어떡하지?”

“어떡하기는요. 개수작에 속지 말고 싸워야지!”

프리지가 요안나를 보며 소리치더니 활을 겨눠 쐈다.

“죽어라!”

슝!

프리지의 분노에 찬 화살이 번개처럼 날아갔다.

심지어 어찌나 실력이 좋은지 아주 먼 거리임에도 정확하게 요안나의 이마를 향했다.

성전군에서도 그걸 보고 경악하며 소리쳤다.

“위, 위험해!”

“성녀님, 피하세요!”

그러나 요안나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빠르게 날아온 화살은 요안나의 바로 몇 걸음 앞에서 투명한 벽에 부딪히듯 툭 하고 떨어졌다.

“치. 역시 안 통하나.”

“다, 다행이야.”

프리지가 혀를 차는 와중에도 제네프는 안도했다.

“항복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신의 대리자인 저를 공격하다니. 하는 수 없군요.”

요안나는 화를 내더니 기도를 시작했다.

그러자 눈부시도록 찬란한 빛이 하늘 위에서 쏟아지더니, 그 빛의 길을 따라 하늘에서 거대한 무언가가 내려오는 게 아닌가?

그건 눈부시도록 새하얗고 커다란 날개가 여러 겹이 붙어 있었는데, 그 기괴한 모습에 다들 압도되어 굳어 버렸다.

그러는 사이 날개들은 성벽 바로 위 높이까지 내려와서 멈추더니, 웅크린 날개를 확 하고 펼쳤다.

“헉!”

“어떻게 저럴 수가!”

“크억!”

성벽 안쪽에서 날개 안쪽을 바라본 이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그 안에 커다란 눈동자와 더불어 수도 없이 많은 작은 눈동자가 달린 모습이 너무나도 끔찍했기 때문이다.

그 수많은 눈동자는 꾸물거리면서 이리저리 사방을 쳐다봤다.

그러다 눈이 마주치기라도 하면 정신적인 충격에 고통스러워하거나, 일부는 쓰러져서 토악질하기도 했다.

성전군에서는 빛에 휘감겨 있는 덕분에 날개가 빛 덩어리로만 보여서 무사했다.

“…저건 뭐야? 몬스터 아니냐?!”

“아, 아마 신의 대리인, 천사입니다.”

옆에 있던 사제의 설명에 제네프는 속으로 불경한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천사라는 게 어쩜 저렇게 끔찍하게 생겼단 말인가.’

한편 인간들이 쓰러지는 걸 본 날개들이 말했다.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신의 뜻을 전하는 존재니.

“그렇게 괴상하게 생겨 먹었는데, 두려워하지 않게 생겼냐!”

프리지가 소리쳤다.

그녀도 천사를 보고 역한 기운이 속을 뒤집는 걸 이를 악물고 참아 내던 참이었다.

그때 요안나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천사여. 악마와 손을 잡은 인간들을 응징하러 가는데, 저들이 방해하는구나. 신의 대리자를 가로막는 저들의 성벽을 없애 다오.”

-그런가. 알았다.

천사는 무심하게 대꾸하더니 안광을 번뜩였다.

그 후 벌어진 일에 사람들이 기겁했다.

“저, 저것 좀 봐.”

“성벽이 정말로 사라지고 있어.”

“대체 어떻게 저런 일이…….”

안광이 닿은 성벽이 사라지고 있던 거였다.

그나마 다행인 건 저 빛이 없애는 건 어디까지나 무생물뿐인 듯했다.

성벽 위의 병사한테 안광이 닿자 갑옷과 무기가 사라졌지만, 생명에는 지장이 없어 보였다.

“이, 이럴 수가.”

제네프는 그 광경에 정신이 나갈 것만 같았다.

반면에 성녀의 신성력으로 보호받고 있던 성전군은 빛이 닿아도 아무런 피해가 없었다.

어쨌거나 안광이 닿은 성벽 일부가 사라진 것만으로 성벽은 버티지 못하고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으아아아아악!”

“살려 줘!”

당연히 성벽 위에 있던 이들은 비명을 지르며 추락했다.

이는 성주인 제네프도 마찬가지.

옆에 있던 프리지만 재빨리 몸을 날렸다.

여기저기 부딪혀 상처가 쌓였지만, 목숨을 건질 수는 있었다.

프리지는 곧바로 일어서며 주변을 향해 소리쳤다.

“다들 후퇴하라! 후퇴해!”

아무리 복수심에 불타고 있다고 해도, 여기서 터무니없는 적을 상대로 무리하게 목숨을 걸고 싸울 생각은 없었다.

살아 있어야 복수라도 할 게 아닌가.

‘그나저나 복수할 수 있을까?’

이 난리통을 만든 천사와 성녀를 생각하면 도저히 불가능할 것만 보였다.

그런 와중에 한 사람이 떠올랐다.

‘카엘 님이라면 무슨 방법이 있을지도.’

별다른 근거는 없었지만, 그간 불가사의한 카엘의 활약에 믿음을 갖게 된 거였다.

‘그래도 최대한 시간을 끄는 게 좋을 텐데……. 나는 글렀지만, 리온은 해낼 수 있겠지.’

프리지는 그걸 기대하며 부하들과 함께 브레즈성을 빠져나갔다.

* * *

한편 팡세성에는 리온 이고르가 지원군을 이끌고 가 있었다.

성전군의 공세에 대비하려고 바삐 움직이는데, 성주인 카호프만이 태연한 소리를 하는 게 아닌가?

“그대 생각은 어떻소? 이대로라면 성전군이 이곳에 오지 않고 지나쳐 갈 거 같지 않소?”

“그럴 리가 없습니다.”

고개를 저은 리온이 설명했다.

“성에 방비도 잘 되어 있고 병력도 있으니 반드시 후환이 생기지 않도록 이곳을 공격해 올 겁니다.”

“그럴 수도 있지만, 세상에 반드시라는 건 없지 않겠나?”

“…….”

그 말에 리온이 미심쩍은 눈으로 성주를 바라보다가 물었다.

“설마. 성전군에 항복하겠다고 하신 건 아니겠죠?”

“허허허. 항복이라고 하면 좀 과한 표현이지.”

카호프만이 에둘러 인정하더니, 솔직히 털어놨다.

“성전군을 절대로 공격하지 않겠다고 맹세할 테니, 얌전히 지나가 달라고 서신을 보내긴 했네.”

“그런… 그러실 거면 왜 레오폴드 저하의 호의를 받아들인 겁니까?”

기가 막힌 리온이 열을 내며 따졌다.

제국의 공격에 대비해 은밀히 성벽을 강화하는 것뿐만 아니라, 훈련된 병사와 장비를 갖추게 하는 데도 레오폴드가 어마어마한 자금을 쏟았다.

그런데 그걸 싹 받아먹어 놓고서는 결정적인 순간에 싸우지 않겠다니.

“그야. 제국군과 싸운다고 했지, 교단과 싸운다고 한 건 아니지 않은가.”

“그게 그거…….”

“다르지. 게다가 원래 난 신전 기사를 꿈꿨을 정도로 신실했거든. 그런 내가 어떻게 교단의 일을 방해한단 말인가.”

“신실하다고요? 신전 기사로 갈 뻔했던 건, 어디까지나 둘째 아들이라…….”

“말이 좀 심하군! 내 불쾌하긴 하나 레오폴드 저하의 심복이라 용서할 테니 그만하게.”

“…….”

카호프만이 윽박지르자 리온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동시에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과연 카호프만의 제안을 성전군이 받아들일까? 제국이라면 안 받을 게 분명하지만. 교단이라서 모르겠군.’

카호프만은 자신 있는 것도 교단을 상대한다고 생각해서 분명했다.

어쨌든 제안을 받아들이면 이곳에 더 있을 필요는 없지만, 거절당하면 마음에 안 들어도 여기서 조금이라도 시간을 끌어야 했다.

‘적의 동향부터 살펴야겠어.’

리온이 그렇게 판단을 내렸을 때, 병사가 외쳤다.

“성주님, 저기에 성전군의 깃발이 보입니다!”

“옳지. 드디어 회신을 가져왔나 보군. 어서 성문을 올리고 성전군을 맞이할 준비를 해라!”

신나서 외치는 카호프만에게 리온이 말했다.

“단순 전령치고는 너무 병력이 많은 거 같습니다만.”

그 말대로 성전군의 전령이 온 게 아니라, 제국군이 쳐들어온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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