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9화 마검과 성검 사이 (2)
카엘은 신전 뒤편의 훈련장으로 향하려 하는데, 브로칸이 찾아왔다.
브로칸은 어깨를 늘어트린 채 아주 시무룩해 보였다.
왜 그런지 짐작한 카엘이 물었다.
“아직 모르타와 화해 못 했어?”
“…네.”
대답과 함께 브로칸의 어깨가 더욱 처졌다.
일전에 브로칸은 자신들의 존재 때문에 제국의 교단이 성전을 선포하며 쳐들어온다는 말에 미안함을 느껴 떠나려고 했다.
그때 엘프와 드워프도 있는데, 왜 라이칸스로프만 떠나는 거냐고 말리는 모르타에게 서로 다르다고 말해 버렸다.
그 말에 충격을 받은 모르타는 뛰쳐나가 버린 거였다.
유난히 친하게 지냈던 모르타와 브로칸이었기에, 그 말에 크게 상처를 받은 모양이었다.
그 뒤로 브로칸과 라이칸스로프들은 계속 이곳에 머무른다고 했음에도, 모르타는 여전히 화가 안 풀린 듯했다.
“여기 머물면서 천천히 화해하면 되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마.”
“…네. 알겠습니다. 근데 어디로 가시는 중이었습니까?”
“신전 훈련장에 루크가 있을 거라 해서 만나러 가려고.”
“아, 저도 같이 가도 될까요? 기분 전환이라도 될까 싶어서요.”
“그래, 괜찮으니까 그렇게 해.”
카엘은 브로칸과 함께 신전 뒤편으로 향했다.
신전 훈련장, 그곳에는 소년이 혼자 덩그러니 서 있었다.
루크였다.
루크는 가만히 검을 들고 있는 것처럼 보였는데, 자세가 어정쩡했다.
하지만 그걸 보며 아조트가 칭찬했다.
-자식, 여전히 열심히 훈련하고 있군.
“엥? 저게 훈련이에요? 이해가 안 가는데.”
브로칸이 고개를 갸웃했다.
카엘도 처음에는 이해가 안 됐지만, 잠시 관찰하고 이내 깨달았다.
“음… 아!”
루크는 지금, 가만히 있는 게 아니라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그것도 나무늘보처럼 아주 천천히 검을 휘두르다 보니 어정쩡한 자세를 취한 것처럼 보였다.
차라리 빠르게 휘두르면 모를까, 흐트러짐 없이 아주 천천히 검을 휘두르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기예가 아니었다.
‘역시 소드 마스터는 소드 마스터인가.’
카엘은 조용히 브로칸에게 말했다.
“검을 휘두르는 거니 잠자코 지켜보자.”
그 말에 브로칸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지겨움을 못 참고 속삭이며 물었다.
“이거 언제까지 기다리고 있어야 해요?”
“저 끝까지 휘두르면 끝날 거야. 괜히 집중력 흐트러지게 하지 말고 조용히 하자.”
그러고 조용히 하라며 검지를 입에 가져다 댔다.
잠시 후.
검을 끝까지 다 휘두르고 나서 길게 숨을 내쉰 루크가 카엘을 향해 고개를 꾸벅 숙였다.
“카엘 님, 기다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나야말로 고맙지. 이런 멋진 훈련을 직관할 수 있었는걸.”
그때 아조트가 끼어들어 말했다.
-어디 다시 휘둘러 봐. 저기 나무토막이 좋겠네.
“네!”
루크가 대답하고 연습을 위해 세워 둔 나무토막 앞에서 자세를 잡았다.
하지만 한참을 지나도 꼼짝도 하지 않았다.
“어떻게 된 거야? 왜 안 휘두르지?”
브로칸이 의아해하는데 카엘이 말했다.
“이미 휘두른 거야.”
“네?! 정말이요?”
“응, 저기 나무토막을 봐.”
카엘이 나무토막을 가리키는데, 갑자기 바람이 횡 하고 불더니, 똑바로 서 있었던 나무토막의 윗부분이 비스듬하게 잘려 아래로 떨어졌다.
그걸 본 브로칸이 깜짝 놀랐다.
“헛! 정말이잖아. 휘두르는 거 보지도 못했는데요.”
“아주 느리게 휘두를 수 있는 것처럼, 아주 빠르게도 휘두를 수 있는 거지.”
“그렇군요.”
“그보다 오러를 안 쓰고 순수 검술만으로 저 정도 경지를 표현하다니. 정말 대단한데.”
괜히 소드 마스터의 재목이라고 한 게 아닌 모양이었다.
“그런데 무슨 일이십니까?”
“아, 이거 주려고.”
카엘은 허리춤에서 검집째로 @풀러 검을 루크에게 내밀었다.
“마검 리키드다. 아조트보다 약하긴 한데, 쓸모 있을 거야.”
“…네. 감사합니다.”
루크는 리키드를 내려다보더니 순순히 받는 게 아닌가?
“…괜찮겠어? 아조트와 달리 이건 정말 사악한 마검인데.”
-확실히 나랑 다르긴 하지.
카엘의 걱정에 아조트가 한마디 했다.
그걸 본 루크가 웃으며 말했다
“카엘 님이 주신 거니, 사악한 술수를 부려도 시련이라고 여기고 극복하겠습니다.”
루크의 의젓한 말에 카엘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생각했다.
‘프레데릭과 파나틱 신전 기사단 사람들이 황금 금속기를 거절했다는 말은 안 해야겠네.’
동시에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저런 말을 해도 잠자코 있는 거 보니까 리키드 이 녀석, 아무래도 자는 모양인데?’
카엘은 리키드를 건네주기 전에 마력을 슬쩍 흡수했다. 그러자 리키드가 놀라며 깨어났다.
-엇! 뭐야? 방금 뭐였어?
“너는 육신도 없는 녀석이 무슨 잠을 그렇게 많이 자?”
-뭐야? 너였나? 잠잔 게 아니라, 잠깐 명상에 잠긴 것뿐이다.
“그래? 어쨌든 인사해. 네 새 사용자다.”
그렇게 말한 카엘은 리키드를 완전히 루크에게 넘겨줬다.
물론 앞으로의 전투를 위해서 맡겨 두는 것으로, 아조트처럼 필요할 때는 가져갈 예정이었다.
‘새 사용자?’
한편 그 말에 루크가 놀란 눈으로 리키드를 내려다봤다.
“이 검, 아조트 님처럼 에고소드였군요.”
“흥! 아조트를 알아? 그보다 훨씬 더 대단한 검이지.”
“아까 케일 님은 아조트보다 약하다고 하셨는데요?”
“뭐야?!”
리키드가 놀라서 소리치는 걸, 카엘이 나서서 말했다.
“사실 아니야? 억울하면 아조트를 이겨 보든가.”
“…끙.”
그럴 자신은 없는지 리키드는 앓는 소리를 낼 뿐이었다.
그걸 본 아조트가 고소해하며 말했다.
-그래도 조심해. 저 녀석 성질머리도 더럽고, 사악함만은 나보다 더하니까.
그 말에 루크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괜찮습니다. 아무리 사악한 마검이라도 성검처럼 다루면 성검이 될 테니까요.”
“그래. 믿음직스럽네.”
카엘이 웃으며 말하는데, 리키드가 화난 듯 기운을 끌어올렸다.
-너 같은 꼬맹이가 날 다룬다고? 허튼 소리. 그보다 어때? 나를 하늘처럼 받들면 내가 소드 마스터로 키워 주겠다.
위압적이면서도 달콤한 유혹의 손길을 내민 리키드의 말에 카엘이 황당하다는 듯 대꾸했다.
“루크는 이미 소드 마스터인데? 소드 마스터를 어떻게 또 소드 마스터로 키워?”
-응? 이런 어린 녀석이 이미 소드 마스터라고?!
놀라는 리키드를 향해, 아조트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후훗. 당연하지. 내가 가르쳤거든.
-…….
아조트가 부르자 루크가 잠자코 오러를 불러일으켰다.
그걸 본 리키드가 화를 냈다.
-뭐야?! 일부러 나를 농락한 거냐?
-농락이라니. 아까부터 검술을 펼치고, 소드 마스터니 뭐니 이야기했었는데, 자고 있었던 네 잘못이지.
-잔 게 아니라 명상이라니까.
-그래도 네가 허술하게 군 건 사실이잖아. 어리다고 무시 안 하고, 조금만 살펴봤으면 우리 루크가 얼마나 재능 있는지 알았을 텐데 말이지.
-…….
아조트가 핀잔을 주자, 리키드가 할 말이 없는지 입을 다물었다.
카엘은 그걸 보고는 루크에게 말했다.
“그럼 쓰다가 문제가 생기면 말해.”
“알겠습니다.”
루크의 대답을 들은 카엘은 그대로 돌아갔다.
그 모습을 보며 리키드가 비웃었다.
‘훗. 아무리 소드 마스터라고 해도 이런 애송이에게 나를 맡기다니. 이 녀석을 유혹해서 반드시 몸을 차지하고 말 테다!’
* * *
리키드는 바로 유혹하지 않고, 루크가 뭘 하는지 잠자코 지켜봤다.
그런데 온종일 하는 거라고는 훈련뿐이지 않은가?
혼자 있을 때는 개인 훈련을 하다가, 신전 기사들이 나타나면 그들과 함께 훈련과 기도.
쉴 때라고는 성녀라는 소녀가 물과 간식거리를 챙겨 왔을 때, 몇 마디 하는 게 전부였다.
‘확실히 재능도 뛰어난데 저토록 성실하다니. 그러니 저 나이에 소드 마스터가 됐겠지.’
리키드는 감탄했다.
신전에 살아서인지 루크는 정말로 수도승 같은 삶을 살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리키드는 좌절하지 않았다.
‘오히려 저렇게 틀에 박힌 녀석들이야말로 유혹에 잘 빠져드니까.’
무엇보다 루크가 원하는 건 아주 단순해 보였다.
바로 강해지는 것.
‘그거면 쉽지.’
다음 날.
루크는 장벽 너머 회색산맥으로 향했다.
회색산맥에 사는 대부분의 몬스터를 해치웠지만, 드래곤의 둥지에서 나와 회색산맥에 자리를 잡은 몬스터들이 있었다.
레인저들은 전처럼 회색산맥을 드나들며 몬스터들의 흔적을 탐색했는데.
루크는 그들에게 정보를 얻어 몬스터를 사냥하기 위해 나왔다.
어린 나이라는 이유로 카엘과 함께 원정을 떠나지 못했기에 이런 식으로라도 실전 경험을 해 두려는 거였다.
게다가 카엘이 배웠다는 소리에, 레인저 기술도 따라 배워서 혼자서 산속을 드나드는 데 별다른 어려움은 없었다.
한편 리키드는 루크와 단둘이 클리페우스성에서 나오자마자 말을 걸었다.
-종일 훈련하던데, 소드 마스터가 됐는데도 더 강해지고 싶은가 봐?
“응. 세상에 소드 마스터보다 더 강한 것들이 많다니까.”
-그럼 내게 피를 주는 게 어때? 나는 피를 머금을수록 강해진다. 너만 협조해 주면 무한히 강해질 수도 있다. 그러면 최강자가 되는 거지.
“그럴 필요는 없어. 내가 강해지고 싶은 건 나와 내게 소중한 사람들을 지킬 힘이 필요해서니까.”
-그, 그래?
리키드는 당황했다.
소중한 사람을 지킬 힘이 필요하니 강해지고 싶다니.
지금껏 자신을 쥔 녀석들은 그런 소리를 한 번도 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말문이 막힌 리키드가 뭐라고 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루크가 소리쳤다.
“앗!”
-왜 그래?
“저 위에서 긴급을 알리는 신호탄을 쐈어. 아무래도 위험한 일이 벌어졌나 봐.”
루크의 말대로 회색산맥 저편에는 붉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어서 가 봐야겠어.”
루크는 그렇게 말하고는 전신에 오러를 두르고 뛰기 시작했다.
“앗!”
거침없이 산을 타고 올라가 순식간에 신호탄이 쏘아진 곳으로 간 루크는 깜짝 놀랐다.
레인저의 시체가 떡하니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별다른 상처가 안 보였는데도 최후가 아주 괴로웠었는지 얼굴이 일그러져 있었다.
‘젠장. 너무 늦었나? 아니야. 나머지는 아직 살아 있을 거야.’
레인저들은 서로 조를 짜 움직였다.
최소 셋 이상은 살아 있다고 봐야 했다. 문제는 셋이 모두 다른 방향으로 도망쳤다는 거였다.
‘하는 수 없지.’
루크는 몬스터를 추적하기 위해 흔적을 찾았지만, 딱히 몬스터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어디로 갔지? 왜 아무런 흔적도 없는 거야?’
루크는 당황했지만, 이내 한 가지 가능성을 떠올렸다.
‘혹시 비행형 몬스터인가?’
어쨌든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루크는 일단 왼쪽으로 쫓아가서 몬스터를 찾았지만, 보이지 않았다.
대신에 레인저 시체만 하나 더 발견했을 뿐이었다.
“이럴 수가!”
루크는 또다시 뛰어갔다가 겨우 몬스터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 몬스터의 외형을 본 루크는 깜짝 놀랐다.
짐승처럼 네 다리가 달려 있긴 한데, 일그러진 외형이 도저히 이 세상의 생명체가 아닌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한편 그 몬스터는 금방이라도 레인저를 해칠 것처럼 달려들었기에 루크는 곧바로 오러를 끌어올려 검을 휘둘렀다.
그런데.
루크의 검은 몬스터를 허무하게 통과해 버리는 게 아닌가?
“엇!”
당황한 루크가 소리쳤다.
그러나 몬스터는 레인저의 팔을 물어뜯어 버렸다.
신기하게도 레인저는 아주 괴로워하면서도 피 한 방울 안 났지만, 충격이 심한지 헐떡거리며 금방이라도 죽을 것처럼 보였다.
‘대체 어떻게 된 거지?’
그때 리키드가 아는 체했다.
-저건 틴달로스의 사냥개군. 골치 아프게 됐어.
“틴달로스의 사냥개?”
-마계와 이곳의 차원의 틈을 넘나드는 몬스터로 양쪽 세계에 존재가 걸쳐져 있기에 물리적인 것이나 인간의 힘으로는 공격이 통하지 않아.
이는 틴달로스의 사냥개도 마찬가지지만, 대신 저 몬스터는 인간의 영혼에 타격을 입혔다.
-원래라면 이렇게 쉽게 보이지 않는데, 여기에 세계의 균형이 흔들릴 만한 사건이라도 벌어진 건가?
“이곳의 몬스터들이 대규모로 퇴치된 적이 있다. 그보다 저 녀석은 어떻게 상대해? 오러도 안 통하는데.”
-인간의 힘으로는 안 되고, 신성력이나 마력으로 공격해야지.
“젠장! 신성력도 좀 깨우쳐 둘걸.”
루크는 프레데릭과 파나틱 신전 기사단들이 신성력을 쓸 수 있는 걸 떠올리고 후회했지만.
실제로 그렇게 신성력을 쓸 수 있는 건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는 사이에 틴달로스의 사냥개가 다시 덤벼들었다.
루크가 리키드를 뽑아 휘둘렀다.
탁.
틴달로스의 사냥개를 후려쳐 공격을 제지하긴 했지만, 별다른 피해를 본 거 같지 않았다.
대신 금방이라도 덤벼들 것처럼 이쪽을 무서운 눈으로 쳐다보기 시작했다.
“마검의 힘도 안 통하잖아. 마력이 없는 거야?”
-피를 못 먹어서 힘이 없어서 그래,
그렇게 말한 리키드가 유혹했다.
-저 인간을 찔러서 피를 흡수시켜 줘. 그럼 틴달로스의 사냥개를 해치울 정도의 힘은 충분히 발휘할 수 있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