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가의 약 빤 막내아들-205화 (205/234)

205화 반기를 들다 (7)

카엘은 놀란 눈으로 묻는 브레프니 국왕에게 당부했다.

“네. 반드시 낫게 해 드릴 테니까, 사흘만 기다려 주십시오. 이런 병은 심리적인 영향이 강하니, 마음을 굳게 먹으셔야 합니다.”

“…알겠다. 그런 이야기를 듣고 그냥 죽을 수는 없지.”

국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레오폴드 왕자의 이야기를 들은 데다, 사흘만 버티면 된다는 희망이 생겨서인지 조금이나마 국왕의 눈에 생기가 어렸다.

카엘은 그런 국왕을 내버려 두고 당장 클리페우스성으로 내달렸다.

지치면 회복 포션을 먹고 밤새도록 달린 끝에 이틀 만에 클리페우스성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래도 시간이 빠듯했다.

돌아왔다고 인사할 겨를도 없이 필요한 것만 챙겨 바로 다시 수도 킹스콧으로 귀환했다.

국왕이 누워 있는 처소로 허겁지겁 달려온 카엘은 조금 허탈했다.

‘이거, 그렇게 급하게 올 필요는 없었나.’

국왕의 모습은 사흘 전보다 훨씬 나아 보였다.

아직 몸 상태는 그대로였지만, 기운이 생겼는지 기대 앉아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신하와 함께 국정을 논하는데 눈빛도 강했고 목소리에도 힘이 있었다.

그 와중에 국왕을 살피는 의원들의 표정은 한층 더 어두웠다.

“별다른 치료를 하지 않는데도 갑자기 상태가 나아지다니 걱정되네요.”

“이제 정말 마지막을 준비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러다 기운을 소진하면 금방 돌아가실지도 모르니까요. 주변에 미리 알려야…….”

회광반조(回光返照).

해가 지기 전에 잠깐 하늘이 밝아지는 것과 같은 상태.

중병을 앓고 있던 환자가 갑자기 의식이나 기력을 회복하다가 픽 죽어 버리는 경우로 의원들이 걱정할 만도 했다.

‘어서 그 걱정을 덜어 줘야겠네.’

카엘은 국왕에게 다가갔다.

이번에는 다들 나가라고 하지 않는 거로 봐서는 국왕은 조금 상태가 호전됐다고 더는 도채비 감투를 쓴 카엘이 온 걸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

‘이제 상관없지만.’

카엘은 도채비 감투를 벗고 모습을 드러냈다.

난데없이 카엘이 나타난 걸 보고 다들 깜짝 놀랐다.

“어, 누구?”

“갑자기 어디서 나타난 거야?”

“저자는 분명 티겔 공작가의 카엘 아닌가?”

“전하를 시해하려고 온 게 분명하다.”

“어서 전하를 구하고 저자를 붙잡아라!”

“근위대를 더 불러라. 어서!”

순식간에 국왕의 처소가 아수라장이 됐다.

그걸 정리한 건 국왕이었다.

“다들 조용하라!”

“하지만…….”

“조용하라 하지 않았느냐! 내 카엘이 올 줄 알았느니라.”

국왕이 재차 호통을 치고 나서야 호위 기사가 멈췄다.

국왕은 카엘을 돌아보며 말했다.

“그래, 내 병을 고칠 약을 가져온 거냐.”

“네. 가져왔습니다.”

카엘이 대답하며 고운 천에 싸 온 약환 하나를 내밀었다.

그걸 본 의원과 호위 기사가 기겁하며 만류했다.

“전하, 아무 약이나 함부로 드시면 위험합니다.”

“반역자가 주는 약을 어떻게 믿고 드시려 합니까.”

“조용히 하라!”

“…….”

“…….”

의원과 호위 기사를 조용히 시킨 국왕이 카엘이 내민 약을 바라봤다.

“이 약을 의심하는 건 아니나, 이미 그대가 내게 해 준 말이 약이 됐는지 기운이 돌아왔는데도 이게 필요하겠나?”

“다소 회복하시긴 했지만, 한번 꺾인 기력은 일정 이상 복구하기 힘듭니다. 이 약의 도움을 받으면 한결 정정해지실 겁니다.”

“그래? 알았다.”

국왕은 그렇게 대답하고는 냉큼 약환을 집어 입에 넣었다.

그걸 꿀꺽하고 단숨에 넘기자 모두의 시선이 국왕에게 쏠렸다.

다들 정말 카엘이 들고 온 약이 효과가 있는지 궁금한 거였다.

그런데.

“크억.”

국왕이 얼굴이 새파래지더니 괴로워하며 몸을 매우 떠는 게 아닌가.

의원들이 놀라서 달려왔다.

“저, 전하! 괜찮으십니까!”

“추, 춥다.”

“어서 창문을 닫고 불을 피우거라. 두꺼운 담요도 더 가져오고!”

“전하께 뭘 먹인 거냐!”

의원이 호들갑을 떠는 사이, 호위 기사가 검을 빼서 카엘에게 겨눴다.

우웅.

검에 오러를 두른 거로 봐서는 소드 엑스퍼트는 되는 듯했다.

하지만 카엘에게는 조금도 위협이 되지 않았다.

카엘은 대답 대신 오러를 두른 호위 기사의 검을 맨손으로 잡고 힘으로 뺏어서 구석에 내던졌다.

“헉!”

놀라는 호위 기사를 무시하고, 여전히 사시나무처럼 떨고 있는 국왕에게 말했다.

“실제로 추운 게 아니니,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추위를 두려워하면 생각만으로 얼어 죽을 겁니다. 지금 느끼는 차가운 기운이 정신을 번쩍 들게 해 준다고 생각하십시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크음. 그런가? 알겠다.”

의원이 황당하다는 듯 따지려 했지만, 국왕은 떨면서도 침착한 어투로 대답하더니 눈을 감았다.

그러다 떨림이 멎었다.

더욱 놀라운 일이 그 뒤에 일어났다.

노인처럼 쪼글쪼글해진 피부가 펴지고, 한껏 움츠러들었던 체형도 원래대로 돌아온 게 아닌가?

“아니, 이럴 수가.”

“어떻게 된 거지?”

“대체 뭘 먹었길래 저렇게 효과가 좋지?”

“만년설삼입니다.”

카엘이 대답했다.

만년설삼은 전설의 영약으로 카엘이 먹고서는 오러에 버금가는 기를 얻게 됐지만, 원래 쇠약한 자의 기력을 회복시키는 데 주로 쓰인다.

타모라국에서 돌아올 때, 백포건호에게 한 뿌리를 더 얻어온 걸 세계수 근처에 심어 뒀는데 그걸 가져온 거였다.

물론 한 뿌리를 다 먹인 건 아니고, 뿌리 끄트머리만 잘라 약환으로 만든 거였다.

‘예상대로 이 정도로 충분하네.’

“허, 단숨에 건강해진 거 같구나.”

감탄하는 국왕에게 카엘이 설명했다.

“건강이 회복됐을 뿐만 아니라, 신체 나이가 젊어졌으니 수명도 늘어났을 겁니다.”

“그런가. 그러고 보니 한층 젊어진 느낌이다. 머리카락도 다시 난 거 같고.”

그 말에 국왕의 머리를 본 이들이 모두 놀랐다.

“앗. 정말이잖아.”

“한창 젊으실 때처럼 풍성해지셨어.”

“부, 부럽다.”

그것만은 카엘도 의외였다.

‘저기에 저런 효과도 있다니.’

그때였다.

“비켜라!”

“아, 안 됩니다!”

“어서 비키지 못할까! 계속 막을 거면 힘으로라도 뚫고 가겠다!”

바깥에서 큰소리와 함께 우당탕하는 소란이 벌어진 듯하더니 누군가 들어왔다.

레오폴드 왕자였다.

국왕이 근엄한 표정으로 꾸짖었다.

“이게 웬 소란이냐!”

“…어.”

한편 국왕을 본 레오폴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니, 어떻게…….”

너무 놀라서 말을 끝맺지도 못할 정도였다.

병이 나은 정도면 이리 놀라지 않았다.

금방이라도 돌아가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던 사람이 정정하니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것도 회춘이라도 한 듯, 레오폴드의 오래전 기억에 있던 아버지의 젊은 시절 모습과 흡사했다.

‘어떤 의원과 사제도 회생이 불가능하다 했는데, 카엘은 정말 대단하군.’

놀라운 건, 카엘도 힘들다던 머리가 다시 난 거였다.

그런 레오폴드를 향해 국왕이 미간을 찌푸리며 나무랐다.

“머리 좀 그만 쳐다보거라.”

“죄, 죄송합니다.”

레오폴드가 얼른 고개를 숙였다.

“난 이제 괜찮으니 다들 물러가도록! 내 오랜만에 아들과 긴히 할 이야기가 있다!”

위엄 넘치는 국왕의 명령에 다들 아무 소리 못 하고 자리를 비웠다.

잠시 후.

처소에 왕과 레오폴드, 카엘만 남게 되었다. 먼저 입을 연 건 국왕이었다.

“그래, 내 카엘에게 이야기를 들었다. 그동안 참으로 고생이 많았겠구나.”

“아, 아버지.”

혼날 줄 알았던 레오폴드는 예상 밖의 말에 고개를 들었다.

동시에 창피하게도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아버지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를 들어 본 적이 언제였던가.

기억도 못 할 정도로 아득했다.

망나니 왕자로 행세하기로 마음먹고 나서 제일 힘들었던 건, 아버지로부터 경멸 어린 시선을 받는 거였다.

그렇다고 속마음을 털어놓을 수는 없었다.

아버지는 제국에 굴종하며 조용히 사는 걸 택했을 뿐만 아니라, 제국까지 속이려면 아버지까지 속여 넘길 수 있어야 했으니까.

그런데 모든 걸 알게 된 아버지가 자신을 대견하게 바라보는 것만으로 레오폴드는 그간의 고생이 헛된 게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큰 뜻을 품었음에도 이 아비가 못난 탓에 네가 그렇게 힘들게 살았다니 참으로 미안하구나.”

“아, 아닙니다.”

아버지가 미안해하라고 제국에 반기를 들려고 한 건 아니었다.

그저 아버지가 제국에 더는 굴욕을 겪지 않았으면 했을 뿐이었다.

한편 레오폴드는 아버지의 말에 카엘을 슬쩍 쳐다봤다.

카엘이 희미한 미소로 답했다.

‘카엘이 그 이야기까지는 하지 않은 모양이네, 고맙게도.’

그러는 사이 국왕이 말을 이어 갔다.

“나는 나라와 백성의 안위를 위해서는 내 한 몸 희생하는 거야 별거 아니라고 여겼다. 하나, 카엘이 알려 준 대로, 황제가 마족과 손잡았다면 그렇게 넘겨서는 안 될 일이겠지.”

‘마족이라. 그거라면 확실히 통했겠네.’

레오폴드는 그제야 카엘이 아버지를 어떻게 설득했는지 깨달았다.

마족은 마왕을 부활시키려고 했고, 마왕은 역사에 오래전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실질적인 위협이었다.

무엇보다 브레프니 왕국은 마왕이 수족으로 부리던 몬스터를 내쫓고 세워진 국가.

마왕의 부활을 획책하는 데 그냥 보고 넘길 리가 없었다.

“앞으로의 일은 전적으로 너와 카엘의 의견에 따르겠다.”

“감사합니다.”

레오폴드가 고개를 숙였다.

그런 레오폴드를 보며 국왕이 웃으며 말했다.

“원하면 지금 바로 왕위를 물려줄 수 있다만?”

“아닙니다. 그러면 제가 활동하는 데 방해가 됩니다. 왕위를 물려받고 제국을 공격하면 친정을 하게 되는 셈이니까요.”

“친정이라. 너도 참 못 말리겠구나.”

국왕은 레오폴드의 너스레에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웃었다.

왕과 왕자, 아버지와 아들의 갈등은 그렇게 훈훈하게 마무리됐다.

‘아직 서로 속마음을 완전히 드러낸 건 아니지만, 시간이 해결해 주겠지.’

카엘은 그렇게 생각하며 눈앞의 부자를 따뜻한 눈으로 바라봤다.

* * *

그 후로도 레오폴드의 유폐는 공식적으로 계속됐다.

제국을 기다리게 해서 최대한 시간을 끌기 위해서였다.

“만약 재촉하면 카엘을 확보하고 한꺼번에 보낸다고 둘러대면 된다. 우리 편을 들어 줄 귀족들한테 황금 좀 찔러주면서 말이지.”

국왕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아무래도 제국의 등쌀에 시달리면서 이런 꼼수를 부린 게 한두 번이 아니었으리라.

그러는 사이 레오폴드와 카엘은 그간 있었던 일을 국왕에게 상세히 설명했다.

국왕은 레오폴드 왕자가 그간 준비해 놓은 병력과 장비, 자금을 보고 입을 떡하니 벌렸다.

“지금 이게 모두 사실이더냐.”

“네. 사실입니다.”

“정말 대단하구나.”

국왕은 레오폴드가 제국에 반기를 든다고 해서 철이 없어 무모한 짓을 한다고만 여겼지, 이토록 많은 준비를 해 뒀을 거라고는 짐작조차 못 했다.

“제국에서 방해만 안 했다면 더 준비했을 테지만요.”

그렇게 말한 레오폴드는 그간 제국이 방해했던 것도 소상히 설명했다.

특히 제국의 마법사가 푼 몬스터 아라흐네가 이고르와 올렉 백작가를 공격했다는 소식에 국왕이 탄식했다.

“그 끔찍한 사건이 제국의 짓이었다니…….”

그 사건에 대해 보고받긴 했지만, 배후에 제국이 있다고는 생각 못 한 탓이었다.

무엇보다 그 때문에 같이 제국에 반기를 들기로 했었던 올렉 백작가는 프리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사망했다.

이고르 백작가도 타격이 상당했다.

“몬스터를 부려 사람을 해치다니, 절대로 용서해서는 안 되겠구나.”

국왕은 순수히 분노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왕자가 제국과 싸우기 위해 여러 나라와 은밀히 동맹을 준비했다는 말에 다시 한번 깜짝 놀랐다.

“장하구나. 어떻게 니제르 왕국과 동맹을 맺을 생각을 다 했느냐.”

“저는 구상만 했고, 성공시킨 건 다 카엘의 공입니다. 심지어 리저드맨의 협력까지 얻었으니까요.”

“그래. 카엘도 참으로 대단하구나.”

국왕은 카엘을 칭찬하면서도 참으로 든든하다 느꼈다.

레오폴드가 준비한 것에 더해 최전성기를 맞이한 클리페우스성의 전력까지 합치면 제국의 공격을 마냥 두려워하지 않아도 될 거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괜히 왕자와 카엘이 제국의 심기를 거스르는 바람에 국가의 존망이 걱정되어 마음의 병을 얻은 게 민망할 정도였다.

그때 레오폴드가 말했다.

“어쨌든 제국을 속이고 시간을 끄는 사이 은밀히 병력을 준비하고, 전투 물자와 식량을 빠르게 확보해 나가야 합니다.”

“그 말대로다.”

국왕이 동의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레오폴드와 카엘의 신병을 못 주겠다고 하면 제국에서 공격할 게 분명하기에 그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그 전에 제국에서 니제르 왕국과 리저드맨을 공격하면 이쪽에서 제국을 견제해야 하기에 그에 대한 준비이기도 했다.

카엘도 일단 클리페우스성으로 돌아가서 거기서 전쟁 준비에 힘쓰기로 했다.

니제르 왕국에서 얻은 무기와 장비도 나누어야 했고, 새롭게 제작해 볼 것도 적지 않았다.

거기다가 자리를 비우기 전에, 이것저것 준비해 둔 것들도 신경 쓰였다.

‘어서 돌아가서 확인해 봐야지.’

카엘은 들뜬 마음으로 다시 클리페우스성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뜻밖의 인물이 돌아와 있는 게 아닌가?

그간 독립해 몇 년 동안 자리를 비웠던 둘째 형이 돌아온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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