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화 반기를 들다 (3)
“일단 어떻게 됐는지 알아봐야겠다. 전령을 준비해라!”
탈프가 카엘에게 사람을 보내려 상황을 알아보려고 했다.
전령이 출발하려는 순간, 마침 카엘로부터 서신이 도착했다는 게 아닌가?
“아, 연락이 오던 중이었나. 잘됐군.”
탈프는 기뻐하며 서신을 읽었다.
하지만 서신의 내용은 실망스러웠다.
현재도 리자드맨과 치열하게 싸우고는 있지만, 아직 탑을 점령 못 했다는 거였다.
탈프는 읽으면서 버럭 화를 냈다.
“아니! 전에도 쉽게 점령해 놓고서는 왜 못 한다는 거야!”
다행히 그 이유는 아래에 쓰여 있었다.
전과 달리 필사적으로 방어 중이며 다른 지역의 리저드맨들까지 모조리 모인 거 같다는 거였다.
“어떻게 생각하나?”
탈프는 인상을 쓰며 서신을 참모들에게 던졌다.
우르르 모여서 읽은 참모들이 카엘의 의견에 동조했다.
“일리는 있습니다. 저희가 공격했을 때, 리저드맨들이 너무 쉽게 포기했었으니까요.”
“전부 방어하기 힘드니 하나만이라도 지키려나 봅니다.”
그러자 탈프도 곰곰이 생각하더니 이내 납득했다.
“하긴 저번에도 탑 3개를 너무 빨리 점령한다 했지. 소드 마스터도 쉽게 리저드맨 탑을 부쉈고…….”
“어떻게 하실 겁니까?”
“어떻게 하기는. 여기서 마냥 기다릴 수도 없으니 공격하러 가야지.”
탈프가 곧바로 결정을 내리는 순간.
“잠깐!”
원정 내내 잠자코 있던 키슬링이 끼어들었다.
“왜? 무슨 일이냐.”
“아무래도 수상쩍어. 함정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군.”
“그거야 먼저 병사를 보내서 확인해 보면 될 일이다.”
“그건 그렇지.”
키슬링은 곧바로 납득했다.
거기에 곧바로 이렇게 제안했다.
“그보다 이 기회에 니제르 왕국을 치는 게 어때?”
처음 함정이니 하는 건 그냥 해 본 소리고 그게 본론이었다.
그 말에 탈프가 놀란 얼굴로 되물었다.
“니제르 왕국을 치자고?”
“그래. 이만한 제국의 대군이 여기까지 온 적이 없잖아. 니제르 왕국을 칠 절호의 기회다.”
키슬링이 이렇게 부추기고 있지만, 막대한 황금을 가진 니제르 왕국을 점령하기 쉽지 않다는 건 잘 알고 있었다.
어디까지나 탈프를 무리하게 부추겨 실패하게 만들려는 작전이었다.
그런데.
“훗.”
자신의 말을 들은 탈프가 여유롭게 웃는 게 아닌가?
키슬링이 미심쩍은 표정을 지으며 그걸 바라보니 탈프가 뜻밖의 말을 꺼냈다.
“안 그래도 그럴 작정이었다.”
“그럴 작정이었다고?”
“그래. 그러려고 일부러 대군을 끌고 온 거다.”
그 말에 키슬링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대뜸 진로를 바꿔서 니제르 왕국을 친다고 나서는 것과 처음부터 니제르 왕국을 점령하기 위해 준비하고 온 건 완전히 다른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역시 키슬링은 대단해. 비밀리에 준비했는데 혼자서 거기까지 생각하다니.”
탈프의 여유 있는 칭찬에 키슬링은 탈프가 확실히 성장했다는 걸 깨달았다.
그 와중에 납득이 안 되는 건 하나 있었다.
“그보다 니제르 왕국을 친다면, 너와 친하다는 카엘은 어쩔 생각이냐. 이미 포섭이 끝났나?”
“아니, 내 편을 들면 좋겠지만. 안 들어도 상관없다. 어차피 이번 기회에 제거할 테니까.”
“그, 그래?”
“능력도 뛰어나고 인기도 많은 녀석이긴 한데, 그 때문에 그냥 놔둘 수 없지. 세상에 떠오르는 태양이 2개일 수는 없으니까. 하나는 꺼트릴 수밖에.”
그때였다.
누군가가 막사 안으로 거침없이 들어오는 게 아닌가?
소드 마스터 조프레와 루델, 도리초였다.
“황자 저하, 무슨 일이십니까?”
“아, 부탁할 일이 있어서 불렀어.”
그러다 조프레를 비롯해 루델, 도리초까지 한마디씩 했다.
“말씀만 하십시오. 이제 몸 좀 풀겠네요.”
“사방에 보이는 건 모래뿐인데 너무 무료했습니다.”
“하긴 칼을 닦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시험 삼아 휘둘러 볼 수도 없으니 지루한 나날이었네요.”
의욕 넘치는 소드 마스터들을 보며 탈프가 씩 웃었다.
“잘됐군. 그래, 카엘이라는 이름을 들어 본 적 있나?”
“그야 알다마다요. 소드 마스터는 아니지만, 대륙에 이름을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로 유명인이죠.”
“탈프 저하의 측근 아닙니까?”
“예전에 리저드맨 탑을 점령하기도 하고, 지금도 리저드맨과 싸우고 있다고 들었습니다만.”
“맞다. 그자를 셋이 힘을 합쳐서 제거해 줘야겠다.”
그 말에 다들 깜짝 놀랐다.
“네?! 정말이요?”
“왜 그러시는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뜻밖이긴 하군요.”
“내가 황제가 되면 방해가 될 거 같아서다. 그거 말고 다른 이유가 더 필요한가?”
단호한 탈프의 모습에 소드 마스터들이 움찔했다.
저 얼굴로 위엄 있게 말하자 마치 황제 앞에 선 듯한 느낌을 받은 거였다.
그러다 조프레가 입을 열었다.
“옳으신 말씀입니다만, 소드 마스터도 아닌 자를 상대로 저희까지 나설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때 도리초가 끼어들었다.
“아닐세. 카엘이라는 자는 마검을 들고 있는데, 다른 마검을 든 키슬링 저하를 가볍게 이겼다네.”
그 말에 옆에 있던 키슬링의 안색이 굳었다.
그때의 악몽이 되살아났기 때문이다.
루델이 놀랍다는 듯 되물었다.
“정말? 그러면 소드 마스터보다도 강할 수도 있겠네.”
“그래. 그러니 방심하지 말고 싸워야 하네.”
당부하는 도리초의 눈동자는 탐욕으로 번들거렸다.
카엘을 해치우고 난 뒤, 그가 썼다는 마검을 차지하고 싶어서였다.
안 그래도 에고소드를 갖고 싶었는데, 그걸 주기로 한 키슬링이 카엘에게 패하고 탈프 황자한테 뺏겼다는 소식을 듣고 매우 안타까워하던 참이었다.
그 에고소드를 이긴 카엘의 에고소드를 얻을 절호의 기회가 찾아온 거였다.
‘반드시 얻고 말 거야.’
그때 웬 목소리가 들렸다.
-그대들은 정말 주의해야 한다.
탈프 황자의 허리춤에 매달려 있는 마검 리키드가 내는 목소리였다.
“음? 왜 그런가?”
-카엘이라는 자가 쓰는 마검의 이름은 아조트. 본래라면 아조트에게 이미 신체를 빼앗기고도 남았겠지만, 그는 필요할 때만 꺼내서 휘두르는 거 같더군. 보통 인간이 아니라는 소리다.
그 말에 탈프가 고개를 끄덕였다.
“카엘이 보통 인간이 아니긴 해. 그간에 활약한 게 한둘이 아니지만, 오크 로드와 싸워 이길 정도로 강하니까.”
정작 탈프의 말을 들은 리키드도 놀랐다.
-오크 로드를 이겼다고?! 그럼 소드 마스터보다 확실히 강한데? 근데 키슬링은 뭘 믿고 그런 인간에게 덤빈 건가?
그 소리에 다들 키슬링을 쳐다봤다.
그 굴욕에도 키슬링은 아무 말도 못 하고 자리를 피했다.
“…….”
“풋.”
탈프는 그 뒷모습을 비웃으며 다시 정리했다.
“어쨌든 이번 기회에 카엘을 제거하고 니제르 왕국을 친다!”
그 시각 카엘은 도채비 감투를 쓴 채 이 회의를 몰래 숨어서 지켜보고 있었다.
* * *
‘역시 왜 이리 병력이 많나 했더니 지켜보길 잘했군.’
카엘은 계속 탈프 황자 곁을 감시하고 있었다.
금방 자신이 보낸 서신도 지켜보고 있다가 자신을 찾으러 사람을 보내려고 할 때, 얼른 써서 마침 지금 도착한 것처럼 보낸 거였다.
어쨌든 오랜만에 본 탈프 황자의 변화는 카엘로서도 놀라울 정도였다.
‘마음을 먹었다고 사람이 이렇게 달라지다니.’
문제는 성실하고 똑똑해지면서 드러난 본성이 포악하다는 거였다.
이래저래 못 써먹을 인간이라는 소리나 마찬가지였다.
‘니제르 왕국까지 공격한다고 하니까, 정말 끝장을 봐야겠군.’
그렇다고 당장 나서서 탈프 황자를 해치울 수는 없었다.
카엘의 능력이라면 해치우고 안전하게 탈출할 수도 있겠지만.
그래 봐야 곧바로 키슬링이 나설 테고, 키슬링을 제거해도 다른 제국의 장군이 나서 이어받을 수 있으니 오히려 더 큰 악재였다.
‘지금이 이 수가 최선이야.’
카엘은 그렇게 생각하며 탈프 진영을 빠져 나왔다.
그러고는 기다리고 있는 부루루아에게 다가가 물었다.
[작전 준비는 어떻게 되어 가고 있습니까?]
[문제없습니다. 신호만 주면 곧바로 실행할 수 있습니다.]
부루루아의 시원한 대답에 카엘이 고개를 끄덕였다가 넌지시 물었다.
[정말 괜찮으십니까?]
[문제없습니다. 어차피 과거의 잔재일 뿐, 오히려 홀가분하게 새로 시작할 수 있을 테니까요.]
[그렇게 말씀하시니 다행입니다. 그럼 실행할 신호를 드릴 테니 기다려 주십시오.]
카엘의 말에 부루루아가 알겠다고 말하며 돌아갔다.
* * *
다음 날.
토벌대가 출발하기 전에 탈프가 한마디 했다.
“마지막 탑인 만큼 리저드맨이 극렬히 저항할 수 있으니까, 다들 방심하지 말도록.”
그러자 다들 오히려 기대했다.
“이번에는 리저드맨과 싸울 수 있는 거야?”
싸우기는커녕 힘들게 사막에서 탑만 부수며 돌아다니다 보니 기사들은 물론 병사들까지 몸이 달아 있는 거였다.
이렇게 고생해서 원정을 나왔는데 내세울 만한 전공을 세우거나, 돈 될 만한 걸 약탈을 못 해 가면 손해라고 생각해서였다
한참을 이동하는데, 정찰병이 마지막 탑을 발견했다고 보고해 왔다.
“좋다. 한창 전투 중일 테니 어서 가자!”
그런데 정찰병이 탑 근처에 니제르 왕국군은커녕 리저드맨도 하나 안 보인다는 게 아닌가?
“어떻게 된 거지? 일단 함정이 없나 샅샅이 조사하라.”
선발대가 출동해 조사했지만, 주위에 특별히 함정이 있는 거 같지는 않다고 했다.
“그래? 그럼 탑부터 무너트려라!”
탈프의 지시에 공성 병기가 탑을 순식간에 박살 내 버렸다.
그걸 본 병사들은 기뻐하면서도 웅성거렸다.
“그럼, 이제 원정은 이거로 끝인가?”
“이대로 돌아가야 한다니…….”
“이거 모래 위를 걸어 다니기만 하고 왔다고 놀림받는 거 아니야?”
그때였다.
탈프가 다들 잘 보이게 모래 언덕 위로 올라갔다. 그러자 주위에서 병사를 조용히 시키고 탈프를 주목하게 했다.
모두의 시선이 모인 걸 본 탈프가 큰 소리로 외쳤다.
“다들 여기까지 와서 고생 많다! 황제 폐하의 명을 무사히 마쳤지만, 이대로 돌아가기에는 황제 폐하의 위명이 바랠 게 분명하기에 황자로서 너무 안타까웠다.”
탈프가 무슨 소리를 하려는지 모르는 병사들은 자기들끼리 수군거리기 바빴다.
“그러면 바로 안 돌아간다는 건가?”
“도망치는 리저드맨을 잡을 때까지 사막에 있어야 한다는 건 아니겠지.”
“하, 높으신 분들 때문에 또 개고생 하겠구나.”
병사들이 우려와 불만을 토해 냈다가 탈프가 가만히 있자 이내 입을 다물고 다시 탈프를 주목했다.
그러자 탈프가 다시 목소리를 높였다.
“이 자리에서 선언한다! 감히 금남의 왕국이라고, 억지를 부리며 황제를 무시한 니제르 왕국에 뜨거운 맛을 보여 주겠다고 말이다! 우리는 니제르 왕국을 정벌해 제국의 깃발 아래 둘 것이다!”
뜻밖의 소리에 병사들의 수군거림은 아까보다 커졌다.
“니제르 왕국을 정벌?”
“그 금남의 나라를 친다고?”
“이야! 거기 온통 여자뿐이잖아. 이거 오랜만에 제대로 즐기겠는데.”
“여자뿐이겠어. 거기 황금도 잔뜩 있잖아. 이제 우리 팔자 고친 거나 마찬가지다.”
하나같이 싸우기도 전에 승리가 확정된 것처럼 장밋빛 꿈에 부풀었다.
그러다가 누군가가 벅찬 마음에 외쳤다.
“만세!”
그걸 신호로 옆의 병사들도 따라서 외치기 시작했다.
“그래 만세다! 만세! 황자 저하 만세!”
“탈프 황자님 만세!”
수만의 병사들이 목청껏 만세를 외쳤다.
탈프 황자는 말 위에 앉아서 그 달콤한 외침을 즐기고 있었다.
하지만 뭔가 아쉬웠다.
‘자식들, 앞으로 누릴 게 얼마인데 좀 더 크게 환호 못 하나? 손을 들어야 하나?’
그렇게 생각한 탈프가 손을 들자 그걸 본 병사들의 외침이 한층 더 커졌다.
그 외침이 어찌나 큰지 사막의 모래가 들썩일 정도였다.
아니, 실제로 들썩이고 있었다.
“어. 어.”
환호성을 내뱉던 병사들은 바닥이 심상치 않은 걸 느끼고 허둥지둥했다.
“음?”
환호성이 끊기자 이상함을 느낀 탈프가 아래를 내려다보는데 바닥의 모래가 조금씩 꺼지고 있는 게 아닌가?
자신이 서 있는 자리도 마찬가지였다.
‘설마 앤트라이온이?!’
그러나 앤트라이온의 짓이라고 여기기에는 너무 광범위했다.
사막 전체가 무너지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안 되겠다. 일단 여기에서 벗어나야겠어.’
그러면서 주위를 둘러봤지만, 주변에 딱히 피할 곳이 마땅치 않았다.
사막이 무너져 내리고 있는데 어디로 피한단 말인가.
“저하, 일단 몸을 피하시죠. 저희가 모시겠습니다.”
그때 심상치 않은 상황을 감지한 조프레를 비롯한 소드 마스터들이 다가왔다.
그들을 본 탈프가 안도하는 순간.
조금씩 무너져 내리던 바닥이 그대로 붕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