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화 드래곤의 부활 (1)
카엘은 앤트라이온을 모두 해치우고 리저드맨의 근거지로 내려왔다.
또다시 탑을 돌며 앤트라이온을 물리친 카엘의 활약을 들은 리저드맨 부족장들은 모두 나와서 공치사했다.
[카엘 님, 정말 애쓰셨습니다. 은인 덕분에 살았습니다.]
[다들 고생하셨죠.]
카엘이 겸손하게 말했지만, 부족장들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이번에는 앤트라이온이 도망치지도 않고 끈질기게 덤볐다면서요.]
[덕분에 많이 해치울 수 있었습니다. 그보다 저 정도로 해치웠으면 이제 한숨 돌릴 수 있겠습니까?]
[물론입니다. 애당초 앤트라이온이 저토록 많으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습니다.]
그때 다른 리저드맨 부족장이 물었다.
[참, 제국군은 어떤 상황입니까? 서로 싸우게 하신다고 들은 거 같습니다만.]
[일단은 한쪽 황자가 잡힌 상황입니다만,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을 거 같습니다.]
당장 리저드맨의 탑을 공격하라는 것도 황제가 황자들을 경쟁시키려고 한 거라고 다들 알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탈프가 키슬링을 사로잡은 데다가 리저드맨의 탑도 니제르 왕국이 점령했다고 속여 놨다.
‘별문제만 없으면 적당히 넘어갈 수 있겠지.’
그때였다.
콰르르르르르르르르릉!
마치 지진이 난 것처럼 지하가 거세게 흔들리는 게 아닌가?
그러고 곧바로 리저드맨 병사 하나가 달려와서 소리쳤다.
[탑이 무너졌습니다!]
[탑이?!]
[아니, 어떻게?! 앤트라이온이 또 공격해 온 건가?]
[아닙니다. 모래 폭풍이 몰아친 뒤에 모래 거인과 인간 둘이 쳐들어와서 탑을 무너트렸습니다.]
[뭐라고?! 그게 대체 무슨 소린가?]
생각지도 못한 일이라 리저드맨 부족장들은 모두 이해가 안 가는 기색이었다.
한편 카엘은 아차 싶었다.
‘설마 소드 마스터와 마법사가 공격한 건가.’
소드 마스터와 마법사라면 탑을 공격해서 무너트릴 힘이 있었다.
카엘도 황자가 각각 소드 마스터와 마법사를 데려왔다는 걸 알고는 있었다.
하지만 분명 황자끼리의 전투에는 관여하지 않는 게 원칙이기에 이대로 제국으로 떠날 거라고 여긴 거였다.
‘그런데 되레 사막으로 들어가 탑을 공격하다니.’
어쨌든 지금 당장은 그들이 왜 그랬는지 파악하는 것보다 어떻게 대처할지가 더 중요했다.
카엘은 리저드맨 부족장에게 물었다.
[그럼 이제 어떻게 됩니까?]
[…전설에 따르면 다섯 개의 탑 중에 하나만 무너져도 드래곤 알 쿠브라를 억누르는 봉인이 풀린다고 합니다.]
[그럼 금방 풀려나겠군요. 결국, 탑을 방어하지 못했네요. 죄송합니다.]
카엘의 사과에 리저드맨 부족장들이 무슨 소리 하냐며 오히려 카엘을 위로했다.
[사과하지 마십시오. 카엘 님은 최선을 다하셨습니다.]
[안 그래도 탑이 무너질 위기였는데, 덕분에 조금 연장이 됐습니다.]
[그사이 대피할 곳을 점검하고 물자를 비축할 수 있었습니다.]
[대피 말입니까?]
카엘이 놀라서 묻자 리저드맨 부족장이 민망해하며 변명했다.
[아, 카엘 님을 못 믿어서 그런 건 아닙니다.]
[예전부터 알 쿠브라가 봉인을 뚫고 나왔을 때를 대비한 겁니다.]
[아무래도 요즘 상황이 심상치 않아서요. 카엘 님이 돌아가시면 혹시 모르니까…….]
[아뇨. 저는 신경 안 쓰셔도 됩니다. 오히려 대책이 있어서 다행이네요.]
카엘은 진심으로 안도했다.
하긴 그토록 오래된 위협인데, 탑이 무너지고 알 쿠브라가 나타났을 때의 대비가 없을 리가 없었다.
[그럼 어서 대피부터 하셔야겠네요.]
[네. 이미 다들 움직이고 있을 겁니다.]
[그래도 나중에 부족장님들이 나서서 알 쿠브라와 싸우는 건 어떻습니까? 니제르 왕국과 힘을 합치면 충분히 해볼 만할 겁니다.]
[어, 그게 가능하다고 보십니까?]
놀라서 되묻는 리저드맨 부족장에게 카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불가능할 것도 없습니다.]
황금 금속기 사용자는 그 능력을 도구에 의지하기에 소드 마스터보다 조금 못하긴 해도 그 숫자가 적지 않았다.
리저드맨 측과 니제르 왕국 측의 황금 금속기를 다 합치면 공격용, 방어용 합쳐서 30짝은 될 터였다.
그 숫자가 일제히 덤비면 드래곤도 상대할 만하다고 계산이 섰다.
실제로 카엘은 리저드맨과 니제르 왕국이 동맹을 맺은 뒤, 만반의 준비를 갖춘 후 알 쿠브라를 퇴치할 작정이었다.
함께 마왕이나 마족과 싸우기는커녕 방해가 될 거 같으니 제거하는 게 나아 보였다.
[어쨌든 당장은 대피부터 하시죠.]
[네. 같이 가시겠습니까?]
리저드맨 부족장이 제안하는데, 카엘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저희는 따로 움직이겠습니다.]
[알겠습니다. 몸조심하십시오.]
리저드맨 부족장은 그렇게 말한 뒤 흩어졌다.
한편 부아가 카엘을 기다리고 있다가 앞장섰다.
[제가 지상으로 모시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카엘은 그렇게 말하고 부아를 따라 지상으로 향했다.
그 와중에 리저드맨들이 허겁지겁 도망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지하의 평화가 깨진 게 안쓰러우면서도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들이 다 도망쳐 버리면, 알 쿠브라의 분노는 어디로 가려나. 아무래도 니제르 왕국이겠지.’
카엘은 곧바로 니제르 왕국에 이 소식을 전해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 * *
사막 지하 깊은 곳에 있던 드래곤 알 쿠브라는 땅이 흔들린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을 옭아매던 봉인이 약해진 걸 깨달았다.
“크르르르. 드디어 나갈 수 있겠구나.”
아직 봉인이 완전히 풀리진 않았지만, 조금 약해진 것만으로 충분했다.
알 쿠브라가 힘을 주고 몸을 일으키자 봉인이 하나둘 파훼되기 시작했다.
이윽고 모든 족쇄가 풀린 걸 느끼는 순간, 알 쿠브라가 지면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금방 천장에 닿았지만, 날카로운 발톱을 천장에 박아 넣어 매달렸다.
그 상태로 땅을 파고 위로 올라갔다.
그러면서 중얼거렸다.
“배고프다, 배고파.”
지금에야 남아 있는 기록이 거의 없지만, 아주 오래전 알 쿠브라의 별명은 식룡이었다.
다른 드래곤과 달리 날개가 없고 뱀처럼 기다란 체형을 가진 탓에 지룡, 토룡이라고 불렸지만.
알 쿠브라가 살아 있는 걸 닥치는 대로 먹어 치우는 본성을 드러내고부터는 모두 다 식룡으로 부르는 데 이견이 없었다.
심지어 많이 먹을수록 강해지기에 항상 먹기 힘들어질 정도로 닥치는 대로 먹었다.
그중 가장 먹기 좋아하는 건 인간.
그래서 심심찮게 인간의 마을을 침략하기 일쑤였는데, 어찌나 심한지 다른 드래곤들이 뭐라고 할 정도였다.
그 때문에 각종 몬스터들이 쉽게 자생하는 열대 지역으로 내쫓겨 자리 잡고 살 수밖에 없었다.
그런 식룡이 무려 수백 년을 굶은 상황.
뭐라도 먹고 싶지 않을 리가 없었다.
알 쿠브라는 두더지처럼 한참을 땅을 타고 올라가서야 겨우 지상으로 나올 수 있었다.
그렇게 겨우 지상으로 나가는데, 앤트라이온의 사체가 있는 게 아닌가? 그것도 여러 마리였다.
“음. 맛은 없지만 하는 수 없지.”
알 쿠브라는 투덜대면서 앤트라이온의 사체로 다가갔다.
앤트라이온은 아주 거대했지만, 알 쿠브라는 뱀처럼 입을 찢어 크게 벌리더니 그대로 앤트라이온의 절반을 집어삼켰다.
몸 안쪽에서부터 난 이빨들이 소드 마스터의 검조차 들지 않는 앤트라이온의 껍질을 와그작와그작 씹어 먹었다.
꼬르륵.
그렇게 네 마리의 앤트라이온의 사체를 집어삼켰지만, 아직 배고팠다.
아니, 위장을 자극했는지 더욱 배가 고파 왔다.
“안 되겠다. 리저드맨들이라도 잡아먹어야지. 음?”
그렇게 생각한 알 쿠브라는 주위를 둘러보다가 이상함을 깨달았다.
“다 어디 간 거지? 이것들이 다 숨었나.”
리저드맨만 생각하면 씹어 먹어도 시원찮을 정도로 화가 났지만, 당장 리저드맨을 쫓아가기에는 배가 너무 고팠다.
‘일단 배부터 채우고, 회복한 다음에 보자!’
그때였다.
-드디어 자유의 몸이 됐군.
마족 위자르샤가 나타나 알 쿠브라에게 말을 걸었다.
“역시 네가 손쓴 거냐? 고맙다.”
그 말에 위자르샤가 쓴웃음을 지었다.
-고맙다고 할 사람은 따로 있지만……. 그보다 자, 이걸 먹어라.
“오, 먹을 건가?”
알 쿠브라는 위자르샤가 던지는 걸 냉큼 받아먹었다.
그러나 앤트라이온의 껍질마저 씹어 버리는 알 쿠브라가 씹어도 도통 꼼짝도 하지 않는 게 아닌가?
알 쿠브라는 불쾌해하며 위자르샤에게 따졌다.
“내게 뭘 먹인 거냐?”
-먹기 전에 확인부터 했어야지. 네게 준 건 마석이다.
“마석?!”
-마왕님의 충실한 종이 되기로 했으니 준 거다. 그 힘으로 마왕님의 부활에 힘쓰도록.
“아, 아. 그래?”
알 쿠브라는 그 말에 즉시 삼킨 마석을 체내의 한쪽 구석으로 옮겼다.
그 낌새를 눈치챈 위자르샤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왜 마석을 쓰지 않나?
“일단 배고파서 밥부터 먹고 나중에 쓰겠다.”
-마왕님께 충성한다는 증표를 무시하는 거냐?
“아, 알았다고. 배고프니까 귀찮게 하지 마.”
알 쿠브라는 되레 짜증 내며 이동하기 시작했다.
알 쿠브라는 마왕 편에 서기로 하긴 했지만, 마석이 어떤 건지는 잘 알았다.
‘쓰지 않아도 최강인데 굳이 쓸 일이 없지.’
무엇보다 마왕의 부활에 적극적으로 협조할 생각도 없었다.
협조해서 인간들이 몰살당해 먹이가 사라지면 자신만 손해였기 때문이다.
‘그보다 이쪽으로 가면 분명 인간이 있단 말이지.’
반대편에 원수인 우스만이라는 인간의 냄새가 희미하게 나는 인간들이 있는 게 느껴졌지만, 이 방향에는 아주 많은 인간이 촘촘하게 모여 있었다.
먹기 좋게 말이다.
당장은 원수를 갚는 것보다 배를 채우는 게 중요했다.
군대인 듯했지만, 알 쿠브라에게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이동하니 이제 탈프 황자군이 된 2만에 가까운 제국군이 있었다.
‘인간들이 이렇게 많다니. 좋은데?’
알 쿠브라는 그렇게 생각하며 더욱 속도를 높여 제국군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커다란 입을 벌려 단번에 제국군 병사를 십여 명 가까이 삼켰다.
꿀꺽.
* * *
“뭐야, 저기 왜 저렇게 소란스러워?”
탈프는 후방의 병사들이 술렁거리는 걸 보고 투덜댔다.
현재는 생포한 키슬링을 앞세워 키슬링군을 접수하던 중이었기 때문이다.
키슬링의 목에 검을 들이대자 키슬링의 부하들은 모조리 항복하던 참이었다.
그들로서도 키슬링에게 목숨을 바쳐 충성하던 것도 아니고, 황제가 되면 얻어먹을 걸 고려해서 붙어 있던 것에 불과했다.
그때 후방에서 기사가 허겁지겁 달려왔다.
“탈프 저하! 괴, 괴물이 나타났습니다!”
“괴물? 혹시 앤트라이온인가 하는 몬스터가 나타난 거냐?”
“아니, 그보다 더 크고 강한 뱀처럼 보이기도 하고… 그보다 지금 병사들을 마구 잡아먹고 있습니다. 어서 도망치셔야 합니다!”
“무슨 소리냐, 우리 군이 얼마나 많은데. 다들 공격하라고 해.”
“…당연히 반격하려 했지만, 아무런 공격이 통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다들 도망치는 중입니다.”
“뭐라고?!”
그때 잠자코 있던 키슬링이 말했다.
“거대한 사막의 뱀이라. 설마 드래곤 알 쿠브라인가?”
“알 쿠브라? 그건 이 사막의 지명이 아닌가?”
“바보 녀석! 원래 이곳이 사막이 되기도 전에 살던 드래곤의 이름이다. 그게 굳어져 이곳도 알 쿠브라라고 불리는 거고.”
“아, 그래?”
“황실의 사람만이 읽을 수 있는 고서에 다 나와 있다. 설마 고서를 안 읽어 본 거냐?”
“…….”
읽어 봤을 리가 없던 탈프는 입을 다물었다.
키슬링은 그런 탈프가 한심한 듯 한숨을 내쉰 뒤 다그쳤다.
“휴, 먹을수록 강해진다고 하니 병사를 더 먹기 전에 해치워야 해!”
“드래곤을 어떻게 해치우라고.”
“못 하겠으면 이거나 풀어. 내가 지휘할 테니까.”
자신 있게 말하는 키슬링을 본 탈프는 한 가지를 떠올렸다.
“어. 그러고 보니, 너 드래곤의 가호를 받고 있다고 했지?”
아크 리치가 키슬링을 공격했을 때, 드래곤 라 키레아스가 아크 리치를 공격했던 적이 있었다.
그 때문에 키슬링이 드래곤의 가호를 받고 있다는 소문이 난 적이 있었다.
키슬링은 그 소문을 듣고 더 적극적으로 퍼트렸었다.
‘실제로는 아니지만.’
그래도 키슬링은 허세를 떨며 소리쳤다.
“맞다. 내가 드래곤을 불러서 저 드래곤을 상대하게 할 테니까, 어서 풀어 다오!”
“안 돼.”
‘역시 그런 헛소문은 안 믿는 건가.’
탈프의 단호한 부정에 키슬링이 속으로 혀를 찼다.
그러나 정작 탈프가 반대한 건 다른 이유에서였다.
“드래곤을 불러서 나한테 공격하라고 하면 어떻게 해.”
‘하필이면 머리가 그쪽으로 굴러가다니.’
키슬링이 어이없어할 때였다.
다른 기사가 달려와 소리쳤다.
“포를난도 님과 도리초 님이 오셨습니다. 트바루드 님과 링겐 님도 온다고 합니다.”
소드 마스터 둘과 마법사 둘이 온다는 거였다.
제국군이 거대한 괴물에게 습격당하는 걸 보고 쫓아온 거였다.
“잘됐다! 키슬링 네 도움은 필요 없게 됐다. 그들보고 어서 잡으라고 해!”
자신감을 되찾은 탈프가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그들도 알 쿠브라의 먹잇감이 되는 걸 피하진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