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화 다섯 개의 탑 (4)
카엘은 자신을 보고 기뻐하는 탈프를 보고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네, 탈프 황자님. 제가 왔습니다.”
사실은 어지간해서는 나서기 싫었다.
원래라면 탈프와 키슬링이 이끄는 제국군이 서로 부딪쳐 전력을 최대한 소모하게 하는 게 목표였다.
그 과정에서 무능한 망나니 탈프가 패배할 거라고는 당연히 예상했다.
‘하지만 지금처럼 순식간에 위기에 처할 줄이야.’
이대로라면 탈프 황자군은 궤멸당하거나 지리멸렬하게 흩어져서 키슬링 황자군의 세력을 늘려 줄지도 몰랐다.
그것만은 막아야 해서 안 나설 수가 없었다.
“카, 카엘. 병력이나 다른 이들은?”
“혼자 인사드리러 오다가 난리가 난 거 같아 달려온 겁니다.”
“그, 그래…….”
혼자라는 말에 탈프가 노골적으로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상대하기 싫었지만 일단 키슬링에게 잡히기라도 하면 곤란했다.
“일단 도망칩시다. 키슬링한테 잡히면 모든 게 끝입니다.”
“맞다. 그렇지.”
그제야 탈프가 옷을 털고 일어섰다.
카엘은 일단 탈프를 데리고 나온 뒤, 최대한 병력을 수습해 전투를 장기전으로 끌고 갈 생각이었다.
“기사님도 함께 가실 겁니까?”
“아, 네. 가야죠.”
카엘의 등장 이후 멍하게 있던 블리오가 대답하고 쫓아왔다.
한편 키슬링은 혼란에 빠진 탈프 황자군을 제압만 하고 해치지 말라고 명령을 내렸다.
탈프 황자군이라고 해도, 대부분이 황제가 내어준 제국의 병사들.
자신이 황제가 되면 자신의 부하가 될 거라 여겼기 때문이다.
대신 탈프는 반드시 잡아야 했다.
“탈프 황자를 잡아 오너라! 잡아 오면 작위와 황금을 내려 주겠다!”
“오옷!”
“알겠습니다!”
“반드시 잡아다 대령하겠습니다!”
그 말에 꿈에 부푼 기사들이 힘차게 소리쳤다.
탈프 황자는 살이 빠진 뒤, 힘이 좀 세긴 해도 키슬링처럼 소드 엑스퍼트도 아닌 데다 검술 대신 술을 가까이하는 거로 유명했다.
그 정도면 기사들로서는 충분히 상대할 만했다.
심지어 탈프의 여러 패악질에 당한 기사도 적지 않았기에 이번 기회에 최대한 거칠게 다뤄 줄 작정이었다.
기사들은 눈에 불을 켜고 탈프 황자를 찾았다.
“앗. 저기 있다. 잡아라!”
“어, 누가 곁에 있는데?”
“당연히 호위가 있겠지. 우리 숫자가 많다, 공격해!”
열 명의 기사가 한꺼번에 탈프 황자에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하나같이 호위에게 얻어맞고 쓰러졌다. 심지어 목이 날아간 기사도 있었다.
“크윽! 강하다.”
“이럴 수가. 힘이 얼마나 센 거야?”
한 기사는 동료 기사가 호위의 주먹질에 갑옷이 뚫린 채 절명한 걸 보고 깜짝 놀랐다.
그때 한 기사가 호위의 얼굴을 알아보고 소리쳤다.
“어, 저… 저 사람은 카엘이잖아.”
그러자 기사들 사이에서 술렁임이 생겼다.
최근 카엘의 영웅담도 널리 퍼졌지만, 제국 기사들 사이에서는 파프닐부터 제국의 소드 엑스퍼트들을 여럿 꺾었던 강자로 더 유명했다.
소드 엑스퍼트를 쓰러트릴 정도로 강하다는 건?
소드 마스터가 아니면 상대가 안 된다는 소리였다.
“안 되겠다. 물러나! 일단 포위해 두고 키슬링 저하께 알리자!”
“그래. 이대로는 무리야.”
한 기사의 말에 다른 기사들이 동의하고 포위망을 갖췄다.
그러는 사이 한 기사가 키슬링에게 달려가서 보고했다.
“저, 저하! 키슬링 저하!”
“탈프는? 아직도 못 찾았나?”
“찾았는데, 호위가 너무 강합니다. 카엘이라는 작자인데, 다들 당했습니다.”
“뭐?! 카엘? 그자가 여기 왔단 말이냐.”
키슬링은 깜짝 놀랐다.
분명 니제르 왕국이나 리저드맨의 탑에 있으면 모를까 어떻게 알고 여기 있단 말인가.
‘때마침 탈프를 보러 온 건가?’
“네. 분명합니다. 예전에 얼굴을 본 적이 있습니다.”
“이 자식이 또 방해를…….”
키슬링은 이를 악물었지만, 당장 뾰족한 수가 떠오르진 않았다.
카엘이 싫긴 해도 얼마나 강한지는 충분히 알고 있어서였다.
자기가 나서도 질 테고, 소드 마스터가 아니라면 상대하기도 어려울 게 분명했다.
‘차라리 병사로 겹겹이 포위한 다음에 지치게 만들면? 아니야.’
키슬링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저 정도 강자라면 포위망을 뚫고 가는 것도 충분하고도 남았다.
‘역시 그 수밖에 없나.’
키슬링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기사에게 말했다.
“카엘이 있는 곳으로 안내하라. 내가 상대하겠다.”
“저, 저하께서?! 위험합니다”
“괜찮다. 잠시만 기다리도록.”
그렇게 대꾸한 키슬링은 한쪽에 놓여 있던 기다란 상자의 뚜껑을 열더니 그 안에서 검을 집어 들었다.
‘이 검이라면 카엘도 쓰러트릴 수 있겠지.’
그러자 검이 키슬링에게 말을 걸었다.
-나는 마검 리키드. 그대여, 힘을 원하는가.
마검 리키드.
황실의 보물 창고에 은밀히 봉인되어 있던 마검으로 아조트와 같은 에고 소드였다.
소드 마스터 도리초에게 주기 위해 창고를 지키던 기사를 매수해 빼놓은 거였다.
이 검을 들면 뛰어난 검술을 펼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평범한 기사가 소드 엑스퍼트가.
소드 엑스퍼트가 소드 마스터가 될 정도로 강해진다고 했다.
“그렇다. 내게 힘을 빌려 다오.”
-그럼 내게 피를 다오. 그러면 네 적을 모조리 해치워 주겠노라.
다만, 이렇게 피를 요구하는 사악한 마검이었다.
그래도 키슬링은 상관없었다.
자신의 힘을 얻는 게 중요하지. 누가 죽는 게 중요한 건 아니니까.
무엇보다 키슬링이 마음만 먹으면 수백 수천 명의 목숨을 취하더라도 뭐라고 할 사람도 없었다.
키슬링은 기사를 따라가다가 병사가 보이는 걸 보고 심장을 쿡 하고 찔렀다.
“억!”
병사는 영문도 모른 채 쓰러졌고, 안내하던 기사도 깜짝 놀랐다.
“키슬링 님?”
“마검이 피를 원한다지 않느냐. 왜? 너도 죽고 싶나?”
“아, 아닙니다. 이쪽으로 오시죠.”
키슬링의 엄포에 움찔한 기사는 다시 안내를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은근슬쩍 키슬링과 거리를 뒀다.
-크흐흐흐. 마음에 드는군.
“힘이나 제대로 빌려줘. 배가 터지도록 줄 테니.”
사악한 웃음을 흘리는 리키드에게 키슬링이 쏘아붙였다.
* * *
“이것들아, 겁먹어? 어서 덤벼 봐!”
탈프 황자는 자신을 포위한 기사들에게 큰소리쳤다.
어디까지나 카엘의 뒤에서 숨어서 하는 소리였지만.
카엘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탈프를 타일렀다.
“이럴 게 아니라 어서 도망쳐야 합니다.”
“맞습니다.”
블리오도 거들었지만, 탈프 황자는 되레 이해가 안 간다는 듯 반문했다.
“도망칠 필요가 뭐 있어? 덤비는 녀석들은 해치우면 될 거 같은데.”
카엘이 자신에게 덤비는 기사들을 가볍게 날려 버리자 자신감을 얻은 거였다.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카엘은 여기에 오래 있을 생각도 없었다.
기사들도 어디까지나 거리를 두고 포위하고 있을 뿐 덤빌 생각은 없어 보이는 게 언제 상황이 끝날지 몰랐다.
그때였다.
“다들 비켜라! 키슬링 저하께서 오셨다.”
키슬링을 안내하던 기사가 힘껏 외쳤다.
동료 기사들이 괜히 키슬링 앞에서 얼쩡거리다가 죽는 꼴이 보고 싶지 않아서 기도했다.
“뭐, 뭐라고?”
“키슬링 저하가 왜 여기에?”
“직접 나서려는 건가.”
키슬링의 기사들이 놀라서 술렁거리는 와중에 탈프도 깜짝 놀랐다.
“뭐야 키슬링, 네가 여기 왜 왔냐.”
그러나 정작 키슬링은 탈프 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카엘을 노려봤다.
“카엘, 내 일에 사사건건 방해하다니. 이번 기회에 반드시 해치워 주마!”
그러면서 리키드를 들어 올리는데, 키슬링의 기사가 그 앞을 막았다.
“키슬링 님, 위험합니다! 키슬링 님, 차라리 제가 나서 싸우겠습니다!”
“앗. 안 돼!”
안내해 준 기사가 말렸지만, 이미 마검 리키드는 앞을 가로막은 기사의 갑옷을 뚫고 심장을 파고들었다.
“커억! 대체 왜…….”
기사는 자신의 가슴팍으로 튀어나온 칼날을 보고 믿기지 않는다는 눈으로 키슬링을 돌아봤다.
“감히 황제가 될, 나의 앞을 막느냐.”
-좋아. 좋아. 아주 좋아. 점점 마음에 드는데?
키슬링의 외침에 검에서 섬찟한 말이 흘러나오는 게 아닌가?
그걸 들은 기사들은 저도 모르게 몇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그때 카엘의 품에서 서서히 검 하나가 떠올랐다.
카엘이 소피아에게서 돌려받아서 들고 있는 아조트였다.
-호오. 리키드 아니야? 오랜만이다.
-뭐야, 아조트인가.
아조트의 인사에 리키드가 차갑게 대꾸했다.
한편 키슬링은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어쩐지 소드 마스터도 아닌 주제에 강하다고 했더니, 너도 마검을 들고 있었구나.”
아무래도 카엘의 강함이 마검에 기인한 거로 착각한 모양이었다.
“맞습니다.”
“그렇다면 내 승리군.”
키슬링은 벌써 이긴 것같이 자신감이 넘쳤다. 그도 그럴 것이 같은 마검을 들면 소드 엑스퍼트도 아닌 카엘보다는 자신이 더 강할 게 아닌가?
안 그래도 리키드의 마력이 체내에 들어왔을 때부터 힘이 넘치는 게 도리초와 붙어도 이길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이 검은 도리초에게 줄 게 아니라, 내가 써야겠어.’
그렇게 생각하며 키슬링이 중얼거렸다.
“이번 기회에 해치워 주겠어.”
-그래. 반드시 이기자.
그런데 그동안 여유 부리던 리키드가 사뭇 진지한 목소리로 다짐했다.
그걸 보며 카엘이 아조트에게 물었다.
“저 검이랑 아는 사이인가 봐?”
-어, 나보다 뒤에 만들어진 주제에 까불다가 나한테 매번 지는 녀석이거든.
“뭐?! 매번 진다고?”
키슬링이 미심쩍은 눈으로 손에 쥔 리키드를 바라봤다.
분명 이 마검 리키드를 들면 이길 수 있을 거라고 자신만만하게 왔다.
같은 마검이라면 자신이 이길 거라 확신했지만, 검끼리의 격차가 크면 무리해서 싸울 생각은 없었다.
그 낌새를 눈치챘는지 리키드가 말했다.
-이, 이번에는 다르다. 이미 네가 이미 피를 잔뜩 먹여 줬으니까.
그러고는 아조트를 비웃었다.
-하지만 넌 어디서 마력을 얻지? 마법이 배척받는 시대에, 너는 말할 수 있는 검에 불과할 뿐이다!
-마력? 드래곤 하트나, 현자의 돌 같은 데서?
-뭐?! 거짓말하지 마라. 지금 그런 게 어딨다고.
터무니없는 대꾸에 리키드가 발끈했다.
-붙어 보면 알겠지.
아조트의 여유 있는 대답에 리키드가 움찔했다.
불길함을 느낀 리키드가 키슬링에게 말했다.
-키슬링! 확실히 이기려면 피가 더 필요하다.
“뭐? 지금?”
-어서!
“하는 수 없군.”
키슬링을 주위의 기사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들었지? 아무나 잡아 와라. 어서!”
“…….”
“아니면 너희가 죽고 싶은 거냐?”
“아, 아닙니다.”
대꾸하지 않던 기사들은 황급히 대답하며 흩어졌다.
그걸 보며 탈프가 항의했다.
“이 자식아! 지금 뭐 하는 거야. 대놓고 싸울 준비를 하다니. 불공평하잖아!”
“싫으면, 네가 나와서 싸우든가.”
“큭.”
말문이 막힌 탈프는 카엘을 재촉했다.
“뭐 하냐. 가만히 있지 말고 어서 공격해.”
“아무래도 그래야겠네요.”
평소라면 어디까지 하나 지켜봐도 되겠지만, 인신 공양 하는 걸 가만히 지켜보기 힘들었다.
카엘이 나서려고 하자 키슬링이 소리쳤다.
“자, 잠깐! 기다려라!”
“……?”
“지금 덤비면 도망치겠다.”
키슬링의 협박에 카엘은 어이가 없었다.
“저는 탈프 황자님만 구하면 되니까 도망쳐도 됩니다만.”
“안 된다! 이 기회에 잡아야지.”
정작 탈프가 정색하며 소리쳤다.
안 그래도 붙으면 번번이 지는 마당에 천재일우의 기회긴 했다.
문제는 키슬링이 도망치려고 하고, 다른 기사들이 가로막으면 카엘로서도 놓칠 가능성이 있었다.
“하는 수 없군.”
카엘은 한숨을 내쉬면서 아조트를 저 멀리 던졌다.
“마검 없이 붙으면 싸우겠습니까?”
“바보 녀석! 전장에서 검을 버리다니.”
키슬링은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는지 곧바로 달려들면서 카엘을 비웃었다.
하지만.
카엘은 키슬링의 검을 가볍게 피하고는 옆구리를 후려쳤다.
퍽!
“커억.”
키슬링은 피를 토하면서 그대로 쓰러졌다.
“…….”
“…….”
너무 쉽게 결판이 나자.
블리오는 물론, 키슬링의 기사들도 할 말을 잊었다.
그때 제일 먼저 움직인 건 탈프였다.
“하하핫! 내 승리다!”
탈프는 기절한 키슬링의 목에 검을 겨누며 소리쳤다.
그걸 본 카엘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래도 탈프 황자면 적당히 구슬려서 돌려보낼 수 있겠지.’
그때였다.
소피아가 빠르게 달려와서 카엘에게 속삭였다.
“카엘 님, 어서 돌아가시죠. 앤트라이온 무리가 탑을 공격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