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가의 약 빤 막내아들-191화 (191/234)

191화 다섯 개의 탑 (2)

탈프 황자의 진영에 서신을 전달했던 기사가 돌아와서 키슬링에게 달려가 한쪽 무릎을 꿇었다.

“키슬링 저하, 다녀왔습니다.”

“그래, 탈프 황자가 뭐라고 하든가? 중요한 일이니 솔직하게 말하거라.”

“네. 서신을 집어던지며 어떻게 이런 제안을 할 수 있냐고 화를 냈습니다.”

“그리고?”

“먼저 가서 탑을 무너트리고 깃발을 꽂는다고 부하들을 재촉했습니다. 조만간에 멈춘 부대를 다시 움직일 기세였습니다.”

“좋아! 내 의도대로 움직이는군.”

키슬링 황자는 무릎을 치며 소리쳤다.

한편 기사를 따라왔던 카엘은 숨어서 그걸 지켜보고 있었다.

‘역시 의도한 거였군.’

그때 키슬링의 부하가 맞장구쳤다.

“멍청한 짓입니다. 이 넓은 사막에서 강행군했다가는 도중에 지쳐 나가떨어질 텐데 말이죠.”

“그 간단한 걸 모르다니. 탈프 황자가 지휘관이라 다행입니다. 이제 키슬링 저하께서 승리하는 일만 남았군요.”

그 말에 키슬링이 사악하게 웃으며 손바닥을 비볐다.

“그거야 다 내가 손쓴 결과지.”

“앗! 그렇습니까?”

“그래. 황제께서 임무를 내린다는 소식을 듣고, 제라드 황자를 낳은 그 더러운 여자를 납치했거든. 아마 병을 핑계 대고 제 어미를 찾느라 난리일 테지.”

“오, 그렇군요.”

“헤이든 공작도 마찬가지다. 용병들을 고용해 영지를 들쑤셔 놓았거든.”

“이야, 정말 대단하십니다.”

극악한 짓을 저질렀지만, 다들 좋다고 맞장구쳤다.

황자들의 다툼을 떠나 귀족가에서도 권력과 이권을 노리고 온갖 더러운 암투가 벌어진다.

이 정도야 일상다반사, 오히려 그걸 못 막고 당하는 쪽이 바보 취급당했기 때문이다.

그러던 와중에 부하 하나가 걱정하며 물었다.

“근데 만약 먼저 간 탈프 황자가 탑들을 점령하는 데 성공하면 어떻게 합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

“자네도 탈프 황자에 대해서 잘 알지 않는가. 그게 가능하겠는가?”

“탈프 황자의 무능이야 저도 잘 압니다만, 소드 마스터 포를난도 님이 함께하시지 않습니까?”

그러자 다른 부하들도 걱정했다.

“하긴 포를난도 님이 있으면 무시하기 어렵지.”

“그렇지 거기다 마법사도 있고.”

그때 키슬링이 말했다.

“걱정할 거 없다!”

“앗! 무슨 수라도 있습니까?”

“만에 하나라도 탈프 황자가 탑을 점령하는 데 성공한다면 그 탈프 황자를 해치우면 된다.”

“헛. 그런 수가.”

“마지막에 황제 앞에 보고드리는 자가 승리자라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옳으신 말씀입니다.”

“하지만 포를난도 님은…….”

“괜찮다. 황자들 간의 싸움이라고 하면 물러날 테니까.”

“아. 확실히 소드 마스터는 관여 못 하게 되어 있죠.”

“과연 키슬링 저하십니다!”

그 소리에 숨어 듣던 카엘도 동의했다.

‘과연 키슬링이야. 덕분에 내 계획은 더 쉬워지겠는걸.’

* * *

카엘은 다시 사막 지하로 돌아와 리저드맨 부족장들 앞에 섰다.

[다녀오신 건 어떻게 성과가 있으셨습니까?]

[네. 아주 성과가 많습니다.]

[오옷!]

[은인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니 정말 안심이 됩니다.]

[정말 다행이군요.]

카엘의 자신 있는 대답에 리저드맨 부족장들이 안도했다.

그런 부족장들에게 카엘이 말했다.

[다만, 저를 전적으로 믿으셔야 합니다.]

[물론입니다.]

[저희가 은인을 안 믿으면 누구를 믿겠습니까.]

[뭐든 필요하면 말씀하십시오.]

부족장들의 대답에 카엘은 사양하지 않고 요구 사항을 말했다.

[탑에 깃발을 꽂을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깃발을요? 그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탈프 황자에게 제가 니제르 왕국을 움직여 탑들을 점령할 거라고 말하려고 합니다. 일단 니제르 왕국의 깃발을 꽂고 나중에 탈프 황자의 깃발로 바꿔 바치는 형식으로 할 거라고요.]

[그게 통하겠습니까…….]

[어느 정도 친분도 있는 제가 말하면 납득할 겁니다.]

[정말 점령했는지 확인이라도 하면요?]

‘앗!’

카엘은 문득 한 가지 사실을 간과했다는 걸 깨달았다.

탈프 황자야 사람이 허술하고 게을러서 확인을 안 할 테지만, 키슬링 황자는 확인하려 들 수도 있었다.

문제는 그것까지 부족장들이 허용해 줄지 의문이라는 거였다.

만에 하나 니제르 왕국군이 배신해 탑을 점령하고 부숴 버리겠다고 협박이라도 하면 리저드맨의 운명은 끝장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키슬링 황자를 대비하기 위해서라면 허락해 달라고 요구할 수밖에 없었다.

[죄송한 말씀입니다만, 그걸 대비하려면 니제르 왕국군이나 그로 위장한 일부 인간들이 일부 주둔해야 할 수도 있겠습니다.]

[알겠습니다.]

[하는 수 없죠.]

[필요한 건 해야죠.]

카엘이 힘겹게 말을 꺼냈지만, 다들 흔쾌히 허락했다.

처음 카엘과 부딪쳤던 붉은 꼬리 족장 부루루아는 이렇게까지 말할 정도였다.

[혹시 포로나 시체 역할이 필요하면 저희 부족이 적극 돕겠습니다.]

그 말에 카엘이 웃으며 말했다.

[그렇게까지 할 필요 없을 거 같습니다. 그럼 다들 허락하셨으니 바로 탈프 황자에게 서신을 쓰겠습니다.]

* * *

잠시 후.

“탈프 저하, 서신이 도착했습니다.”

기사 블리오가 와서 서신을 내밀자 탈프 황자는 손을 내저었다.

“응? 키슬링이 또 보낸 거냐? 읽을 필요도 없으니 찢어 버리거라.”

탈프 황자의 모욕에 열받았지만, 병사들을 위해 조금이라도 출발을 지체시키기려고 탈프의 옆에 있던 소드 마스터 포를난도는 기겁했다.

‘아무리 싫어도 그렇지, 서신을 읽지도 않고 찢어 버리라고 하다니.’

블리오도 황당했지만, 최대한 표정을 관리하며 다시 서신을 내밀었다.

“그게 아니라, 브레프니 왕궁의 카엘이 보낸 겁니다.”

“오! 카엘이? 어디 한번 줘 봐라.”

탈프는 반색하면서 서신을 건네받았다.

“얼굴을 못 보던 사이 이름을 날리길래 거만해진 줄 알았더니. 이렇게 서신을 다 보내다니.”

그렇게 중얼거린 탈프는 서신을 펼쳐서 읽었다.

“존경하는 탈프 황자님, 황제 폐하께서 중임을 맡기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축하드립니다. 분명 황제 폐하께서 저하의 능력을 높게 평가하셨음이 틀림없습니다…….”

거기까지 읽은 탈프가 함박웃음을 지었다.

“인사말만 봐도 여전히 내게 존경심을 품고 있는 거 같군. 포를난도 경, 혹시 카엘에 대해 들어 보셨소?”

“모를 리가 있겠습니까. 아주 유명인인데요.”

“맞소. 소드 마스터는 아니지만 아주 대단한 영웅이라오.”

자랑하는 탈프 황자에게 포를난도는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쓴웃음을 지었다.

‘그렇게 대단한 인물이 탈프 황자와 왜 친하게 지내는 거지?’

…라고 처음에는 다들 의문을 품었지만, 납득할 만한 이유가 떠돌아 다녔다.

자국에서도 망나니라는 왕자와 어울린다고 들었는데 분명 억지로 어울린다는 이유였다.

‘아마 그 망나니 왕자가 자기랑 죽이 잘 맞는 망나니 황자에게 카엘을 소개해 준 거겠지.’

그래도 지금 상황은 이해가 안 갔다.

‘근데 억지로 어울리게 했다면 왜 굳이 서신을 보낸 거지?’

“만약 키슬링 황자가 같이 싸우자고 제안했다면 주의해야 합니다라……. 일부러 내 경쟁심을 자극해 힘을 빼는 거라는 건데? 키슬링은 더욱 느긋하게 움직일 거라고. 그런가?”

그걸 본 포를난도는 깜짝 놀랐다.

‘저 탈프 황자가 남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다니.’

한편 잘됐다 싶어 한마디 보탰다.

“실제로 천천히 유랑이라도 온 것처럼 느긋하게 오고 있답니다.”

포를난도로서도 더는 무리하게 강행군하는 걸 막고 싶어서 한 말이었다.

자신이야 소드 마스터니까 문제없지만, 병사들은 하나같이 나가떨어지기 일보 직전이었기 때문이다.

정작 그 말을 들은 탈프는 블리오에게 버럭 화냈다.

“뭐야?! 그런 일이 있으면 진작 보고해야지.”

“…죄송합니다.”

이미 몇 번이나 보고한 적이 있는 블리오는 억울했지만, 순순히 사죄했다.

괜히 반박하다가는 말대꾸하냐고 화를 내며 행패를 부려서였다.

그때 한 기사가 눈치도 없이 물었다.

“만약 저희도 늦게 움직이면 키슬링군은 아예 움직이지 않을 텐데, 그럼 계속 이 더운 사막에서 버텨야 하는 겁니까?”

평소의 탈프라면 근성이 없다고 욕했을 테지만, 기분도 좋고 그사이 좀 더 읽은 서신에 그 대답이 나와 있어서 웃으며 대꾸했다.

“걱정할 거 없다. 그렇게 시간을 끌면 카엘이 니제르 왕국을 움직여 탑을 점령해 내게 바치겠다는군.”

“정말입니까?”

“근데 그게 가능할지…….”

고개를 갸웃하는 포를난도에게 블리오가 설명했다.

“그러고 보니 카엘이 저기 니제르 왕국에서 아주 인기라는 소식도 들은 거 같습니다.”

“그래?”

“그를 상품으로 걸고 대회까지 열렸다고 하더군요.”

“그렇게 인기가 많다니…….”

탈프 황자도 뜻밖의 이야기였는지 놀란 얼굴이 됐다.

금방 기분이 나빠질 기세라 블리오가 얼른 입에 발린 말을 했다.

“그런 인기남에게 존경받으시다니 대단하십니다.”

“그치? 그럼 여기서 카엘이 움직이기를 기다려 볼까?”

“네.”

“그러시죠.”

블리오와 포를난도는 그 결정을 매우 반겼다.

드디어 강행군 끝에 오랜만에 병사들이 제대로 쉴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는데 탈프가 대뜸 이렇게 말하는 게 아닌가?

“싸우지도 않고 이긴다. 나 너무 천재 같지 않나?”

블리오와 포를난도는 탈프가 잘난 체하는 게 어이가 없었다.

본인은 가만히 있는데, 카엘이라는 자가 대신 싸워 준다는 것뿐이지 않은가?

하지만 지금은 탈프 황자가 또 마음을 바꾸지 않도록 잘 구슬리는 게 급선무였다.

“맞습니다. 천재십니다.”

“검을 뽑지도 않고 이기다니, 소드 마스터도 불가능한 일입니다.”

포를난도까지 한마디 하자 기분이 좋아진 탈프 황자가 크게 웃었다.

“푸하하핫. 그렇지? 자, 그럼 다가오는 승리를 기다리며 다들 푹 쉬자꾸나.”

그 소리에 포를난도는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불안했다.

‘저기에만 기대면 안 될 테니까, 다들 휴식을 취하면 다시 움직이자고 건의해야겠군.’

하지만 포를난도의 불안과 달리 이틀 만에 카엘에게서 다시 서신이 도착했다.

* * *

“뭐, 벌써 탑을 3개나 점령했다고? 거기다가 니제르 왕국의 깃발을 꽂아 뒀으나 말만 하면 내 깃발로 바꿔 준다는구나.”

탈프가 기뻐하며 소리쳤다.

그 소식을 옆에서 들은 블리오나 포를난도도 깜짝 놀랐다.

“그렇게 쉽게 공략하다니, 정말 별거 아니었나 봅니다.”

“거기에 뭐 아무것도 없다고는 들었는데, 니제르 왕국도 그냥 공격하기 귀찮아서 내버려 둔 걸지도.”

그렇다는 건, 무리해서라도 일찍 가서 공격해야 한다는 탈프 황자의 처음 결정이 옳았다는 소리였다.

“푸하핫! 내가 이겼구나, 이겼어! 키슬링 놈은 이것도 모르고 무거운 엉덩이를 뭉개고만 있지.”

탈프 황자가 기뻐하면서 소리쳤다.

두 사람은 문득 탈프 황자가 달라 보였다.

경박하고 난폭하긴 해도 능력은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 거였다.

그러다 블리오가 물었다.

“그럼 제대로 점령해 뒀는지 확인해 볼까요?”

하지만 탈프 황자는 손을 내저었다.

“됐다. 귀찮게 그럴 필요가 없지. 카엘이 내게 거짓말할 사람도 아니고.”

“…알겠습니다.”

“그나저나 목소리를 좀 낮추시죠. 너무 시끄럽게 떠들면 이 정보가 새어 나갈지도 모릅니다.”

포를란도의 우려대로 뒤편에서 귀를 기울이는 한 병사가 있었다.

그 병사는 조용히 갑옷을 벗고 가벼운 옷차림으로 탈프 황자군의 진영을 나섰다.

그가 향하는 곳은 키슬링 황자군 진영.

그리고 그런 병사의 뒤를 따라가는 발자국이 있었다.

바로 카엘이었다.

‘역시 첩자가 있었네. 잘됐어.’

카엘이 굳이 안 나서도 탈프 황자의 승리가 키슬링의 귀에 들어갈 터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