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화 대혼란의 사막 (5)
카엘의 활약을 본 부루루아는 은인이라는 소리가 절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
갑자기 앤트라이온이 여러 마리 나타났다는 소리에 당황했는데 그걸 인간이 물리친다는 게 아닌가?
심지어 얼떨떨해하는 사이에 위로 뛰어 올라가 버렸다.
뒤늦게 쫓아 올라가니 정말로 인간들이 앤트라이온에게 공격을 퍼부어 해치워 버린 거였다.
심지어 부아의 예상대로 앤트라이온은 여러 마리였는데, 한 마리가 쓰러지니 다른 앤트라이온들이 안 되겠다 싶었는지 도망쳤다.
‘저것들이 모두 탑을 공격했다면 버티기 힘들었을 거야.’
정말 아찔한 순간이었다.
덕분에 인간이 대화하러 찾아왔다는 소리에 분노하던 마음은 어느새 사그라들고 감사한 마음만이 가득했다.
부루루아는 공손하게 물었다.
[대화하러 오셨다고 들었습니다. 무슨 말씀을 하시든 경청하겠습니다.]
정작 카엘의 표정은 심각했다.
[지금 이야기를 할 때가 아닙니다.]
[네?!]
[지금 탑이 두 개나 공격당했으니 다른 탑도 공격당했거나 당할지도 모릅니다.]
[아!]
확실히 가능한 이야기였다.
자신의 부족이 담당하던 탑이야 다행히 여기 카엘 님이 해치워서 무사했지만, 다른 탑은 위태로울 게 분명했다.
카엘이 부아를 돌아봤다.
[여기서 가까운 탑이 어딥니까.]
[아,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부아가 앞장서서 달렸다.
카엘은 그 뒤를 쫓아가기 전에 부루루아에게 말했다.
[대화는 나중에 다시 와서 하겠습니다. 혹시 다시 앤트라이온이 공격해 오면 얼른 연락 주십시오.]
[아, 알겠습니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부루루아의 대답을 들은 카엘은 빠르게 부아를 쫓아 뛰기 시작했다.
한참을 달려가고 있으니 동굴이 흔들렸다.
[역시 벌써 공격당하고 있나 보네요.]
안 되겠다 싶었던 카엘은 부아를 제치고 뛰어갔다.
지하 입구를 지키던 리저드맨들은 웬 인간이 나타난 걸 보고 화들짝 놀랐다.
[뭐야? 여기서 왜 인간이.]
[어떻게 된 거지?]
[마, 막아라!]
다들 카엘의 돌격을 막으려고 했지만, 카엘이 검집째로 한번 휘두르자 모조리 나가떨어졌다.
닫힌 문도 카엘이 힘으로 뜯어 버렸다.
그만큼 매우 급한 순간이었다.
카엘이 뛰쳐나가니 앤트라이온 여러 마리가 탑을 포위하고, 한 마리가 탑에 달라붙어 외벽을 긁어 대고 있었다.
리저드맨들은 탑 위에서 무기뿐만 아니라 온갖 물건을 던져서 방해했지만, 제지하진 못했다.
“소피아, 가자.”
“네!”
카엘이 외치며 앤트라이온을 향해 뛰자, 그 뒤를 바짝 따라오던 소피아도 힘차게 대답하고 앤트라이온에게 덤볐다.
[어, 뭐야?]
[누가 위험하게 뛰어들었어?]
[이, 인간이다. 그것도 혼자가 아니잖아! 어디서 나타난 거지?]
웬 인간이 나타나 앤트라이온을 공격하는 모습에 한창 싸우던 리저드맨들이 당황했다.
그러는 사이 카엘은 소피아와 함께 앤트라이온을 공격해 쓰러트렸다.
그러자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앤트라이온들이 도망쳤다.
‘모두 다섯 개 탑이 있고, 여기가 세 번째 탑이라고 했지? 다른 두 곳도 위험할지도 모르니 가 봐야겠어.’
[카엘 님!]
부아가 뒤늦게 쫓아와서 카엘을 불렀다.
난데없는 상황에 놀랐던 리저드맨은 부아가 부르는 걸 보고 안심했다.
앤트라이온을 쫓아내 준 건 고마웠지만, 또 다른 적이 나타난 게 아닐까 하고 걱정했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앤트라이온을 쓰러트릴 정도의 적이니 아주 위협적이었다.
몇몇은 카엘이라는 이름까지 기억해 냈다.
[아, 그 강하다는 인간인가?]
[상상 이상으로 강하군.]
[앤트라이온이 때려잡는 걸 살아생전 보게 될 줄이야.]
그때였다.
인간이 부아에게 실례라고 하더니, 옆구리에 끼고 다시 지하로 뛰어 내려가는 게 아닌가?
[어, 어떻게 된 거지?]
[설마 납치인가?]
[도대체 무슨 상황이야?]
리저드맨들은 혼란에 빠졌다.
하지만 카엘에게도 이유가 있었다.
[다시 한번 죄송합니다. 아무래도 이 편이 빠를 거 같아서요.]
카엘은 대뜸 낚아채서 옆구리에 낀 부아에게 사과했다.
다른 두 곳의 탑도 공격받고 있다고 생각하면 한시가 급했기 때문이다.
리저드맨이 동굴에서 움직이는 게 익숙하다고 해도 카엘이나 소피아가 뛰는 것보다는 느릴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부아도 그런 사정을 잘 알고 이해했다.
[괜찮습니다. 안 그래도 뒤늦게 따라오면서 해명하는 것도 일이었는걸요.]
그러면서 앞에 리저드맨이 보이면 급한 일이니 비키라고 소리쳤다.
그거로 해명이 되나 싶었지만, 적어도 리저드맨들이 막아서지 않고 당황하며 비켜 주니 다행이었다.
네 번째 탑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앤트라이온 한 마리가 탑의 외벽을 일부 부수는 데까지 성공했다.
다행히 탑이 아주 단단한 덕분에 탑이 무너져 내리진 않았다.
카엘은 부아를 내려놓고 소피아와 함께 앤트라이온을 퇴치했다.
이제 남은 건 하나.
‘늦었을 수도 있지만, 최선을 다해 막아 봐야지. 그런데 부아는……?!’
카엘은 자신의 옆에 기다리고 있는 부아를 보며 움찔했다.
카엘이 낚아채기 좋게 팔을 옆구리에서 떼고 몸을 숙이고 있는 거였다.
[뭐 하십니까? 다음 탑으로 가실 거 아닙니까?]
[…네.]
카엘은 떨떠름한 얼굴로 부아를 아까처럼 옆구리에 끼고는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마지막 탑에 도착했을 때는 카엘이라도 꽤 지칠 수밖에 없었다.
그대로 쉴 수는 없었다.
이번 앤트라이온들은 이미 두 마리나 탑에 들러붙어서 무너트리려고 하고 있었다.
‘큰일이다. 이대로 가면 얼마 버티지 못할 거야.’
카엘은 소피아와 함께 회복 포션을 먹고 금방 체력을 회복해 앤트라이온 두 마리를 연달아 해치웠다.
그러자 앤트라이온들이 도망쳤다.
그걸 본 부아가 안도했다.
[드디어 끝났군요.]
[혹시 모르니 다른 곳에 다시 공격해 왔는지 확인하고, 쳐들어왔다면 바로 알려 달라고 하세요.]
[아, 알겠습니다.]
부아는 카엘의 지시에 냉큼 대답하고는 움직이면서도 내심 감탄했다.
‘어쩜 저렇게 철저하실까.’
* * *
카엘의 우려와 달리 앤트라이온은 더 쳐들어오지 않았다.
하지만 카엘은 쉬지 않았다.
타우레그족과 앤트라이온에게 다친 리저드맨을 치료했다.
안 그래도 엔트라이온을 물리치는 활약을 보고 감탄한 리저드맨은 다친 동족을 기적같이 회복시키는 걸 보고는 감격했다.
덕분에 카엘은 리저드맨들 사이에서 은인이라고 불리며 존경받았다.
하루도 아니라, 반나절이라는 짧은 시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저녁 무렵.
붉은 꼬리 족장을 포함해 모든 족장이 모여서 카엘을 찾아왔다.
그러면서 모두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정말 감사합니다! 탑을 지켜 주시고 저희 동족을 구해 주신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보답을 바라고 한 게 아닙니다. 끔찍한 몬스터에게 공격당해서 도와드린 것뿐입니다.]
[사양 마십시오. 탑들에는 저희 종족의 명운이 걸려 있습니다. 그걸 지켜 내 주신 건 저희 동족을 지켜 주신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종족의 명운? 탑을 지키는 게 리저드맨들에게 아주 중요한 거 같길래 전력을 다해 막아 둔 건데 그 정도일 줄이야.’
카엘은 은근슬쩍 물었다.
[혹시 탑이 왜 그렇게 중요한 건지 알려 주실 수 있습니까?]
그 말에 족장들이 서로를 쳐다보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은인이라면 솔직히 말씀드려도 되겠지요. 이 아래 사악한 드래곤이 있는데, 탑이 그 드래곤을 봉인하는 마법진의 역할을 합니다.]
리저드맨이 어떻게 드래곤을 억제하고 있나 했더니, 저 마법진의 힘이었던 모양이었다.
[그 사악한 드래곤의 이름이 알 쿠브라가 맞습니까?]
카엘이 그렇게 묻자 리저드맨 족장들이 깜짝 놀랐다.
[아니, 그걸 어떻게 아십니까?]
[인간들은 이제 기억하는 이가 없는 거 같았는데.]
[우연히 본 책에서 읽었습니다. 그거로 여러분과 의사소통하는 방법도 배웠고요.]
[아, 그런 인연이!]
훈훈한 분위기 속에서 붉은 꼬리 족장, 부루루아가 나섰다.
[아까 무례했던 건 다시 한번 사과드립니다. 인간들과 워낙 악연이 깊어서…….]
[아닙니다. 그 오해에 대해서는 익히 들었습니다.]
[오해? 어쨌든,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아주 중요한 이야기를 하실 거 같았는데, 대체 어떤 이야기입니까? 너무 궁금해서요.]
쿠쿠아나 부아가 따로 이야기를 전하지 않았을까 짐작했는데, 안 한 모양이었다.
탑을 수습하느라 정신이 없거나, 중요한 이야기라 카엘이 직접 하도록 배려한 모양이었다.
카엘이 입을 열었다.
[저는 리저드맨 부족과 니제르 왕국이 동맹을 맺었으면 해서 왔습니다.]
[동맹 말입니까?]
[사막 인간들이랑?]
뜻밖의 이야기였는지 족장들이 웅성거렸다.
다들 어떻게 할지 결론을 내리지 못하는 상황에서 부루루아가 말했다.
[은인께선 말씀을 거둬 주십시오. 사막 인간들과는 이곳이 사막이 되기 이전부터 내려오던 악연이 있습니다. 그 악연을 생각하면 도저히 동맹이 될 수 없습니다.]
카엘은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제가 아까 그 오해에 대해서 들었다고 말씀드렸죠. 그 오해를 풀면 마음이 달라지실 겁니다.]
[오해? 그건 잘못 말씀하신 줄 알았는데, 무슨 오해를 했습니까?]
[여러분이 지독하게 싸웠던 적은 니제르 왕국인들이 아니라, 제국군일 겁니다.]
[제국이?!]
[네, 제국의 황자가 리저드맨의 영역에서 죽었는데, 그 핑계로 쳐들어온 겁니다.]
카엘을 그렇게 말하면서 소피아를 가리켰다.
[오래전 일이라 잘 기억하지 못하실지는 모르지만, 니제르 왕국인들은 체형이 이렇고. 제국의 인물은 저보다 체형이 크고 두껍거나 여기 입 주위와 턱에 털이 있을 겁니다.]
그러자 리저드맨 족장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 확실히 다르지.]
[나도 배운 기억이 있어.]
[근데 그게 대체 무슨 차이입니까?]
부루루아의 물음에 카엘이 설명했다.
[리저드맨으로 치면 암컷과 수컷 차이입니다.]
[그래도 그 정도 되는 인물이 왜 우리 영역에서 죽은 겁니까.]
[니제르 왕국은 금남의 나라거든요. 아마도 황자는 호기심에 몰래 왕국에 들어오려다가 변을 당한 거겠지요.]
[정말입니까?]
[그런 바보 같은.]
[정말 어처구니없는 이유로군요.]
리저드맨 부족장들이 놀라는 와중에 부루루아가 의문을 제기했다.
[근데 니제르 왕국에서도 드물지만, 얼굴에 털이 난 인물을 본 적이 있습니다만.]
[금남의 나라라고 해도 남자가 전혀 안 돌아다니는 건 아니니까요. 저처럼 초대를 받거나 드나드는 상인이 일부 있습니다.]
[납득했습니다.]
[그럼 정말 오해였단 말인가.]
[우리는 무엇 때문에 싸운 거지…….]
리저드맨 족장들은 탄식했다.
그래도 니제르 왕국이 금남의 나라라서 다른 종족인 리저드맨이 쉽게 오해를 풀 수 있었던 거였다.
카엘은 다시 한번 물었다.
[오해가 풀렸으니 서로 힘을 합쳐 제국에 대항하시겠습니까?]
[부끄럽지만, 현재 저희에겐 제국까지 가서 싸울 여력이 없습니다.]
[괜찮습니다. 직접 나서는 것보다, 니제르 왕국에서 제국을 압박하는 걸 도와주시면 됩니다. 만약 제국이 니제르 왕국에 쳐들어올 거 같으면 견제해 주시고요.]
카엘의 말에 리저드맨 족장들이 반색했다.
[그 정도쯤이야 문제없습니다.]
[쉬운 일이네요.]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그런 족장들에게 카엘이 말했다.
[그 전에 앤트라이온에 대해서 대비해야겠지만요.]
[앤트라이온이요?]
[아무래도 대공격의 전조인 것처럼 느껴져서요.]
카엘의 말에 리저드맨 족장들이 수긍했다.
[하긴 이상한 일이죠. 원래 무리 지어 다니는 녀석이 아닌데.]
[확실히 조직적이었죠.]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지만 수상쩍긴 합니다.]
카엘은 부루루아의 말을 되뇌었다.
‘몬스터를 조직적으로 움직인다라…….’
그럴 만한 곳은 단 한 군데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설마 여기에도 제국이 개입한 건가?’
카엘의 짐작대로 그 시각 제국에서는 알 쿠브라 사막 침공을 논의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