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화 대혼란의 사막 (4)
“됐어! 소피아, 잘했어.”
앤트라이온을 해치운 카엘이 칭찬하자 소피아가 배시시 웃었다.
하지만 카엘은 경계를 풀지 않았다.
아직 남은 앤트라이온이 많은 데다가, 앞으로 몇 마리가 더 새롭게 나타날지 몰랐다.
그런데.
“음? 도망치는 걸까요?”
소피아의 말대로 여러 모래 구덩이 중앙의 앤트라이온들이 하나둘 쏙 들어가더니 다시 나오지 않고 있었다.
“도망치는 게 맞는 거 같네.”
카엘은 다행이다 싶으면서도 앞으로도 앤트라이온 때문에 골치 아플 거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동족이 죽는 걸 보고 불리한 걸 알 정도로 음흉한 몬스터라는 소리였기 때문이다.
‘하긴 그러니까 함정을 파서 공격하지.’
카엘은 그러면서 타우레그 부족 쪽을 바라봤다.
이쪽도 후퇴하기 시작했는데, 앤트라이온이 물러간 뒤에도 멈추지 않고 일단 후퇴하기로 마음먹은 듯했다.
‘마하마네 님과 디오리 님이 잘 말한다더니 통한 모양이네.’
다행이었다.
그때 소피아가 물었다.
“저희는 이제 어쩌죠?”
“리저드맨이랑 접촉해야지.”
그렇게 말한 카엘은 아래로 내려가서 탑의 입구를 두드렸다.
그러자 곧바로 리저드맨이 나와 반겼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탑 경비대장 쿠쿠아입니다. 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혹시 당신이 카엘입니까?]
카엘은 놀라서 물었다.
[저를 아십니까?]
[아주 강하지만, 말이 통하는 인간이니 기억하고 있어야 한다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사막에 오자마자 마주쳤던 리저드맨이 빈말이 아니라, 정말로 다른 리저드맨들에게 말한 모양이었다.
게다가 뒤늦게 한 리저드맨이 쫓아와 인사하는 게 아닌가?
[대장님, 이분이 제가 말한 그분입니다. 오랜만입니다.]
문제는 카엘의 눈에는 리저드맨들이 대부분 비슷해 보여서 전에 봤던 그 리저드맨이 맞는지 알 수 없다는 거였다.
[죄송합니다. 여러분들을 구분할 수 없어서요, 혹시 전에 뵈었던 부아라는 분입니까?]
카엘이 솔직하게 말하자, 리저드맨이 웃으며 대꾸했다.
[맞습니다. 저도 인간들은 구분이 힘듭니다. 그럼, 저를 알아보고 구해 주신 게 아니셨군요. 다른 리저드맨들도 구해 주시길래 짐작은 했습니다. 어쨌든 구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제가 도움이 됐다니 다행입니다.]
[도움이다 뿐입니까. 저희를 구해 주신 은인이십니다. 이럴 게 아니라 안으로 들어가서 이야기하시죠.]
쿠쿠아가 끼어들더니 카엘을 탑 안으로 초대했다.
내부는 제법 넓었지만, 아무런 장식도 없이 삭막했다.
거기다 무기를 든 리저드맨 병사들이 삼엄하게 지키고 있었다.
그런데 병사들이 카엘에게 존경의 눈빛을 보내는 게 아닌가?
앤트라이온을 때려잡는 활약상을 본 탓이었지만, 카엘은 부담스러웠다.
심지어 위로 올라가는데 층마다 서 있는 병사들이 다 쳐다봤다.
그때 쿠쿠아가 하소연했다.
[정말 덕분에 살았습니다. 여기 사막 인간들이 공격해 올 뿐만 아니라, 앤트라이온까지 공격해 와서 아주 곤란했습니다.]
[저희도 구조하다가 앤트라이온이 탑을 공격하는 걸 보고 온 건데, 잘한 거였군요.]
[매우 잘하셨습니다! 난데없이 당했으니 음흉한 앤트라이온들이 곧바로 도망쳤지 않습니까.]
[그런데 탑에 자주 공격해 옵니까?]
[네, 아무래도 사막 지하를 놓고 다투니까요.]
[대장님!]
쿠쿠아가 리저드맨의 비밀을 털어놓자 뒤따라 오던 부아가 소리쳤다.
쿠쿠아는 뒤늦게 놀라서 입을 가리며 카엘의 눈치를 봤다.
눈치를 본다고 해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표정을 읽을 수 있는 건 아니었지만, 카엘은 웃으며 말했다.
[리저드맨들이 사막 지하로 이동하는 건 알고 있습니다. 리저드맨의 언어를 가르쳐 준 분에게 들었지요.]
[아. 네.]
쿠쿠아는 안도한 듯했다.
* * *
꼭대기까지 올라온 뒤, 쿠쿠아는 부하에게 손짓했다.
부하가 상자 하나를 가져와 내밀면서 뚜껑을 열었다. 안에는 황금이 가득했다.
‘역시 리저드맨들도 황금이 많은가 보군.’
[저희가 좋아하는 건, 드려도 별로 안 기뻐하실 거 같고. 이거면 보답이 되겠습니까?]
평소라면 이미 잔뜩 있어도 고맙다고 받을 테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었다.
[황금은 괜찮습니다. 대신 제 이야기를 좀 들어 주십시오.]
[앗! 정말입니까? 인간이 황금을 거절한다는 이야기는 처음 들어 봅니다.]
놀라는 쿠쿠아에게 부아가 슬쩍 다가가 말했다.
[인간들에게는 처음 권유를 사양하는 관습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런가?]
[관습이 아니라 진심입니다. 정말 중요한 이야기를 해야 해서 그렇습니다.]
카엘의 말에 두 리저드맨이 눈을 똑바로 뜨고 이쪽을 바라봤다.
그렇게나 중요한 이야기라는 게 뭔지 궁금해서였다.
카엘은 담담히 말했다.
[리저드맨들이 사막의 인간들과 동맹을 맺을 생각이 있는지 여쭤보려고 왔습니다.]
리저드맨들은 화내기보다는 하나같이 이해가 안 된다는 듯 어리둥절한 눈빛이었다.
[카엘 님이 소속된 곳의 인간들과 동맹을 맺자는 말씀입니까?]
[아니, 사막의 인간이라고 하셨습니다. 맞죠.]
[네.]
[방금 저희를 공격해 온 거 보시지 않았습니까?]
[공격해 놓고 동맹을 맺자니, 이해가 안 갑니다만.]
두 리저드맨의 반론에 카엘이 차분히 설명했다.
[사막 인간들의 왕과 부족장들은 대체로 동의하거나 대화를 나눠 보자는 의견이 많았습니다. 이에 반대하는 부족장이 대화의 여지를 없애기 위해 이렇게 공격해 온 겁니다.]
[그렇습니까. 실은 우리도 유난히 인간을 증오하는 부족이 있습니다.]
[대장.]
[앗!]
또 말실수했다고 생각한 쿠쿠아가 자신을 쳐다보는 걸 보고 카엘이 웃으며 대꾸했다.
[사실 어디나 의견이 다른 자가 있는 건 당연한 일이지 않겠습니까.]
[그렇지요. 그런데 인제 와서 저희와 대화를 하려는 데는 다른 목적이 있을 거 같습니다만.]
그렇게 말하는 쿠쿠아의 눈빛은 날카로웠다.
‘역시 맹하게 보여도 그냥 경비대장이 된 건 아니라는 건가.’
카엘은 내심 감탄하면서 솔직하게 설명했다.
[사실 사막의 두 집단이 대화했으면 하는 건 어디까지나 저희 측, 반제국 측의 바람입니다. 사막 내의 갈등을 멈추고, 저희와 함께 제국에 대항했으면 합니다.]
[제국에?!]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였는지 쿠쿠아가 되물었다.
[네. 사막 너머의 거대한 인간의 나라입니다.]
[그건 알고 있습니다만. 왜 제국에 대항해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제국은 주위 나라를 힘으로 억누르고 온갖 패악질을 부리는 중입니다. 심지어 사악한 몬스터까지 풀어서 해치지요.]
[그렇습니까…….]
[음…….]
쿠쿠아나 부아 둘 다, 별다른 감흥이 없어 보였다.
‘하긴 인간의 일이니 그럴 수밖에.’
카엘은 리저드맨이 호응할 만한 이야기를 꺼냈다.
[여기가 사막이 되기 전에 쳐들어온 것도 제국입니다. 이곳을 사막으로 만든 것도 제국이라는 의혹이 있습니다.]
[아니, 그럴 수가! 그렇게 나쁜 놈들이 있나.]
[절대로 용서 못 할 놈들입니다!]
순진하게 자신의 말을 무조건 믿고 화내는 모습이 황당하긴 했지만, 효과는 확실했다.
하지만 쿠쿠아는 이내 난처한 눈빛으로 말했다.
[화나긴 해도 우리는 여기서 이 탑을 지켜야 합니다. 우리의 사명입니다.]
[아, 나서서 싸우라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리저드맨의 영역에 인간들의 출입을 허용하고 방해만 안 해 주셔도 됩니다.]
[탑 주위에 오지만 않는다면 그거야 어렵지 않습니다만.]
[문제는 붉은 꼬리 부족입니다. 사막화 이전부터 인간에게 아주 원한이 깊다 보니 보이기만 하면 먼저 공격합니다.]
‘사막화 이전부터?’
그 말에 실마리를 얻은 카엘이 쿠쿠아에게 말했다.
[혹시 그들과 이야기할 수 있습니까?]
[그건 은인이라도 무리일 거 같습니다만…….]
[인간이라면 증오하기에 보자마자 공격할 겁니다.]
[그건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막고 나서 대화를 나누겠습니다.]
다른 이가 했다면 그게 무슨 말이냐 비웃었을 테지만, 무려 앤트라이온을 해치운 인간.
붉은 꼬리 족장을 해치면 해쳤지, 그에게 당하긴 힘들어 보이긴 했다.
[알겠습니다. 부아 자네가 안내 좀 해 주겠나. 난 이곳을 수습해야 하니.]
[알겠습니다. 맡겨 주십시오.]
‘정말 공격을 막고 대화하는 거로 괜찮은가?’
카엘은 의아했지만, 별소리하지 않고 부아를 따라 탑 지하로 내려갔다.
다시 내려올 것, 굳이 왜 올라갔나 할 수도 있지만, 탑의 구조를 한번 보고 싶어서였다.
혹시 리저드맨들이 감추지 않을까 했지만, 별거 없어서인지 카엘이 은인이라 그래서인지 몰라도 그대로 보여 줬다.
지하로 들어서니 서늘하고 축축한 게 리저드맨들이 좋아할 만한 기후였다.
더 안으로 들어가자 여러 방향으로 난 동굴이 있고, 입구마다 리저드맨들이 지키고 있었다.
[엇. 인간이다!]
[어떻게 된 거지?]
[인간이 왜 여기에?]
리저드맨들이 당황하고 있을 때 부아가 말했다.
[내가 전에 말했지? 사막 밖에서 온 강한 인간이 있다고. 이분이 그분이시다.]
[아, 전에 황금 금속기를 부쉈다는 인간 말인가?]
[그걸 부술 정도면 강한 인간인 건 맞지.]
[이름이 카엘이라고 했었나.]
그 와중에 한 리저드맨이 따져 물었다.
[그건 알겠는데, 왜 여기까지 데려온 건가?]
[탑이 앤트라이온들에게 공격당해서 위험했을 때, 앤트라이온을 쓰러트리고 퇴치해 주신 은인이시다.]
[아니, 정말인가?]
[앤트라이온을 해치웠다고, 정말 대단하군.]
[그렇다면 우리 은인이 맞지!]
부아의 설명에 리저드맨들은 곧바로 수긍하고 카엘을 존경 어린 눈빛으로 바라봤다.
이제는 익숙해진 카엘은 그러려니 하고 잠자코 있었다.
[그래서 이곳을 안내해 주는 건가?]
[그런 것도 있고, 붉은 꼬리족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는군.]
[붉은 꼬리족을?]
그 말에 리저드맨들은 걱정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걱정할 거 없네. 은인이 강하니 감히 해치진 못할 테니.]
[아, 그러면 걱정할 거 없겠군. 그럼 먼저 가서 알리겠네.]
리저드맨은 그렇게 말하며 동굴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지금 보니 아무래도 자신의 동족이 은인을 해칠까 봐 걱정한 거였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리저드맨들은 은인인 영웅 우스만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이곳이 사막이 되고도 남았다.
은혜 입은 걸 아주 고맙게 여기고 신의를 지키는 성격이니 그렇게까지 하는 거였다.
‘덕분에 나야 편하게 됐지만.’
반면에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그렇게 따지면 붉은 꼬리족은 은인인데도 공격하는 건가?’
* * *
동굴 속을 천천히 걸어가고 있는데, 저 앞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그러고 얼마 안 지나 한 무리의 리저드맨이 우르르 달려왔다.
그걸 본 부아가 긴장했다.
[헛! 붉은 꼬리 족장님이 직접 오셨을 줄이야.]
그 말에 보니 다른 리저드맨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크고, 이마에 붉은 문양을 그려 놓은 리저드맨이 보였다.
‘저 리저드맨이 족장인가 보네. 적어도 구분하기는 편해서 다행인가.’
카엘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바로 앞까지 달려온 붉은 꼬리 족장이 소리쳤다.
[인간이 감히 들어오다니, 용서 못 한다!]
[진정하십시오, 부루루아 님! 저 인간은 은인입니다, 은인.]
[내가 담당한 탑을 도와준 게 아니니 은인이 아니다.]
‘아, 그런 논리로 은인인 걸 부정하다니!’
너무 리저드맨을 쉽게 생각한 게 아닌가 반성하게 됐다.
‘하긴 그러니까 다른 이들도 공격당할 걸 우려했지. 그렇다면 그쪽의 은인이 되는 수밖에 없나?’
그때 굉음과 함께 지하가 흔들리는 게 아닌가?
[무, 무슨 일이냐?!]
[앤트라이온이 쳐들어온 모양입니다.]
금방 습격을 겪었던 부아가 설명했지만, 부루루아는 믿지 않았다.
[그럴 리가. 앤트라이온이 지하에 이 정도 진동을 일으킨다고?]
[아, 아직 못 들으셨나 봅니다. 저희 탑에도 여러 마리의 앤트라이온이 한꺼번에 쳐들어왔습니다.]
[그, 그럴 수가.]
심각한 눈빛이 된 부루루아에게 부아가 말했다.
[그래도 걱정하실 거 없습니다. 카엘 님께서 앤트라이온을 물리쳐 주실 테니까요.]
[뭐라고?! 그게 가능해?]
놀란 눈으로 자신을 보는 부루루아에게 카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잠시 후.
부루루아가 카엘을 보며 말했다.
[은인! 정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