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화 대혼란의 사막 (2)
카엘과 소피아의 번외 경기 전.
관중들은 번외 경기가 벌어진다는 말에 잔뜩 기대했다.
우승자와 그 우승 상품이 결투를 벌인다는 점부터 흥미로운 데다가, 카엘의 얼굴뿐만 아니라 그 무술도 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관중들은 자신의 부족이 결투하는 게 아닌데도 빠짐없이 앉아 있었다.
아니, 주위에 보러 몰려온 사람이 더욱 많아져 인산인해를 이뤘다.
그리고 그 결과 그들은 평생 잊지 못할 결투를 목격할 수 있게 됐다.
소피아는 마검 아조트의 도움을 받아 국왕과 부족장들마저 처음 보는 화려한 검술을 펼쳤다.
마검 아조트의 마력이 가미된 검술은 그 자체로 아주 위협적이었고.
그 와중에 소피아가 사용하는 폭발의 오러가 검술의 위력을 배가해서 돌풍을 일으켰다.
그건 한 마디로 폭풍이었다.
걸리기만 하면 무엇이든 갈기갈기 찢어 버릴 칼날의 폭풍이 사막 한가운데 강림한 거였다.
그 기세가 어찌나 험악한지 관중들은 다소 떨어져 있음에도 몸을 움츠릴 정도였다.
그 칼날의 폭풍 앞에 카엘이 나섰다.
마검 아조트를 소피아에게 건네준 후, 카엘이 손에 든 건, 타모라국의 국왕에게 친히 받은 사진참사검.
온 나라의 기운을 모아 특별한 시점에 치성을 드려 만들어진 이 검은 성물처럼 성스러운 기운을 품었다.
하지만 그거로 끝이 아니었다.
사용자의 힘을 증폭했다.
카엘의 경우에는 바로 만년설삼의 기와 빙한목의 냉기!
몹시 추운 곳에서 자라난 산삼인 만년설삼은 빙한목의 냉기와도 궁합이 잘 맞았다.
‘그 덕분에 이런 것도 가능하지.’
카엘은 연습한 대로 빙한목의 냉기와 만년설삼의 기를 사진참사검에 흘려보냈다.
그러자 관중석에서 이상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어? 오늘따라 왜 이리 서늘하지?”
“기분 탓인가? 아닌데, 금방까지만 해도 목이 말랐는데.”
“더위라도 먹었나 봐.”
그때 한 관중이 소리쳤다.
“저기 봐! 저거 얼음 아니야?!”
“무슨 소리야?”
“어, 저거 정말 뭐야?”
다들 카엘을 보고 경악했다.
사진참사검을 쥔 카엘의 오른손이 얼음으로 뒤덮여 있는 데다가, 주위에 얼음과 같은 새하얀 기운이 퍼져 나가고 있었다.
빙한목의 냉기.
만년설삼의 기.
사진참사검의 힘이 합쳐지며 사막의 뜨거운 햇볕을 넘어서는 냉기를 내뿜을 수 있게 된 거였다.
카엘이 소피아의 공격에 대항해 검을 휘두를 때마다 매서운 냉기가 흩뿌려졌다.
그렇게 폭풍과 냉기가 만나서 폭발하며 사방에 기운이 몰아치자 조금 떨어진 관중석도 위험할 정도였다.
결국, 국왕은 관중들을 최대한 멀리 떨어지게 해서 벽 너머로 보냈다.
국왕과 부족장들 그리고 그 후계자들처럼 금속기를 가진 이들 정도만이 제자리를 지키며 관전했다.
특히 카엘이나 소피아와 직접 싸워 본 적 있는 마하마네와 디오리는 그 전투를 보며 탄식했다.
“정말 차원이 다른 전투군.”
“황금 금속기가 오러를 넘어선다고 자신했지만, 지금 보니 그것도 아니군.”
“맞아. 비슷하게 싸울 수 있다고 여긴 내가 우스울 정도야.”
마하마네가 쓴웃음을 지으며 디오리의 말에 수긍했다.
한창 겨루면서도 관중들이 자리를 피한 걸 확인한, 카엘이 소피아에게 말했다.
“그럼 이제 마무리 지을까?”
“바라던 바입니다!”
소피아는 힘차게 말하며 덤벼들었고, 카엘도 온 힘을 끌어 냈다.
펑! 쾅!
두 사람이 전력을 다해 부딪치자 어마어마한 폭발음과 함께 얼음 돌풍이 일어났다.
돌풍으로 인한 흙먼지가 가라앉았을 때 서 있는 건 카엘이었다.
얼음이 폭발을 잠재운 거였다.
그걸 본 마하마네는 더욱 카엘이 대단하게 느껴졌다.
아무래도 이곳에서 싸우기에는 카엘의 힘 쪽이 불리한 조건인 게 분명해서였다.
동시에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도 그처럼 강해지고 싶어.’
‘나도 그렇게 강해질 수 있을까?’
마하마네뿐만 디오리마저 비슷한 생각을 하며 카엘을 바라봤다.
하지만 그들도 미처 못 본 게 있었다.
세이비 공주가 카엘과 소피아의 결투를 숨어서 지켜보다가 사라진 거였다
* * *
카엘과 소피아의 대결이 끝난 후에도 주스트 토너먼트는 끝나지 않았다.
시상식과 연회 등 마무리하는 과정이 남은 거였다.
하지만 카엘은 더는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카엘은 국왕에게 물었다.
“출발 준비는 해 주신다는 건 어떻게 됐습니까? 이제 출발하고 싶습니다만.”
“준비는 거의 다 끝났는데, 좀 쉬지 않아도 괜찮겠어?”
“음, 저는 괜찮습니다만…….”
카엘은 뒤에 있는 소피아를 바라봤다.
한바탕 결투 뒤의 소피아는 흙먼지를 뒤집어써서 엉망이었다.
무엇보다 카엘을 상대로 전력을 다했기에 체내의 기운도 많이 소진했을 게 분명했다.
카엘도 마찬가지였지만, 회복 포션을 하나 마시면 회복하고도 남았다. 하지만 소피아는 카엘 정도로 극적인 회복을 하긴 힘들었다.
“저도 괜찮습니다!”
하지만 소피아는 힘차게 대답했다. 말뿐만이 아닌 게 눈빛이 살아 있었다.
“그래도 일단 출발하기 전까지 쉬고 있어.”
“알겠습니다.”
소피아는 고개를 끄덕이고, 숙소로 일단 돌아갔다.
금방 다시 사막의 흙먼지를 뒤집어쓸 테지만, 당장은 씻고 싶은 마음이 컸기 때문이다.
소피아가 간 걸 확인한 카엘이 국왕을 돌아봤다.
“그럼, 준비하는 동안 현재 상황을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타우레그족이 어디를 공격할지도 듣고 싶습니다만.”
“아, 그래야지. 여봐라. 지도를 들고 와라!”
그렇게 소리친 국왕은 카엘을 데리고 천막으로 들어갔다.
거기에는 수십 명은 둘러앉을 수 있는 대형 탁자가 있었는데, 이내 부하가 들어와 탁자를 가득 채우는 크기의 지도를 펼쳤다.
사막 알 쿠브라 지도였다.
거기에는 단순 지명만 있는 게 아니라, 도시별 인구를 비롯해 주요 거점과 병력까지 다 기재되어 있었다.
온갖 기밀이 있는 거로 봐서는 국왕을 비롯해 왕국의 고위층만 보는 지도임이 틀림없었다.
그걸 놓고 국왕이 설명하기 시작했다.
“리저드맨은 니제르 왕국과 제국 사이의 북부 사막 지대에 근거지를 두고 있는데, 모두 다섯 개야.”
그 말에 리저드맨의 근거지를 살펴보니 한곳을 둘러싸고 있었다.
“아마, 여기에 드래곤 둥지가 있겠네요. 그 둥지를 둘러싸고 있는 모양입니다.”
“그 말을 들으니 그렇게 보이는군.”
국왕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설명을 이어 나갔다.
“리저드맨들은 사막을 여기저기 떠돌아다니지 않고, 근거지에 모여 있기에 공격하기 그리 어렵지 않아. 그래도 사막 어디선가 불쑥 튀어나오긴 하지만.”
“사막 아래서 이동하다가 올라와서 그렇습니다.”
카엘의 설명에 국왕의 눈이 커졌다.
“그게 정말인가?”
“네, 저도 들은 거지만, 가장 깊은 곳에 드래곤의 둥지가 있고 그 위에 공동이 있는데 거기서 이동한다고 합니다.”
“그렇군. 그동안 저기에 아무것도 없어 내버려 둔 것도 있는데, 그런 비밀이 있다니…….”
하긴, 단순히 몬스터를 해치우기 위해 저 넓은 사막을 오가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공동에 대해서 몰랐다면 본거지는 한두 개 뺏을 수 있을진 몰라도 절대로 리저드맨을 완전히 몰아내진 못했겠지.’
“그래도 타우레그족만은 리저드맨들이 무슨 음모를 꾸미고 있을지 모른다고 힘을 모아 몰아내야 한다고 주장했지. 다들 미지근한 반응이었지만.”
아무래도 사막에서 리저드맨과 자주 마주쳤던 타우레그족은 이상함을 느끼고 더욱 경계할 수밖에 없었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타우레그족은 포기하지 않았군요.”
“맞아. 조금씩 힘을 비축해 왔는데, 때마침 지금 공격을 할 시점이 되다니.”
국왕은 골치가 아프다는 얼굴을 했다.
“그럼 이쪽으로 가야겠네요.”
카엘은 지도에서 리저드맨 근거지 하나를 집었다.
다섯 개의 리저드맨 근거지 중에서 서북쪽에 있는 곳이었다.
이곳 수도 니아메이에서는 다소 거리가 있지만, 타우레그족과는 제일 가까운 곳이었다.
“맞아. 거기로 가야 해. 그냥 가면 사나흘은 족히 걸릴 거야.”
“밤새 달리면요?”
“그래도 이틀 정도는 걸리겠지만… 그대는 보통 사람이 아니니 그보다는 빠르겠지.”
국왕의 대답에 카엘은 정말 밤새 달려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때 시종이 들어와서 국왕에게 속삭였는데, 국왕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무슨 이야기인가 싶었는데, 국왕이 먼저 물었다.
“혹시 최근에 세이비를 본 적 있나? 아무리 찾아도 안 보인다는군.”
세이비 공주를 못 찾아서 표정이 안 좋았던 모양이었다.
“저도 못 봤습니다만. 주스트 토너먼트에 참가한 게 아니었습니까?”
“패배 이후로 안 보인다는군. 그대의 안내를 맡기려고 했거늘.”
아무래도 카엘이 어디로 가는지 극비에 부쳐야 하는 만큼, 아무한테나 맡길 수는 없기는 했다.
‘준비라는 게 그거였나?’
그때였다.
“안내할 사람이 없으면 제가 안내하죠.”
입구에서 들리는 말에 고개를 돌려 보니 마하마네가 서 있었다. 그 뒤로 디오리까지 보였다.
중요한 이야기였지만, 아무래도 부족장들의 후계자인 만큼 들어오는 걸 제지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음, 너희들…….”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아무래도 타 부족의 후계자에게 부탁하는 게 꺼려진 국왕이 주저하는 사이에 카엘이 얼른 수락했다.
‘오히려 잘됐네.’
국왕의 조력에다가 부족의 후계자 둘이 함께하면 아무래도 전투가 벌어진다고 해도 말리기 쉬울 테니까.
* * *
사막의 모래 위는 다 똑같아 보였지만, 실제로는 조금씩 다 다르다.
들어가면 지반이 약해 늪처럼 빠지는 모래 구덩이.
넘어갈 수 없도록 아주 미끄러운 모래 언덕.
거기다가 언제 불어닥칠지 모르는 모래바람과 무서운 모래 구덩이 함정을 파고 기다리는 앤트라이온 등 위험한 곳투성이였다.
그런 곳을 피해 다닐 수 있는 길을 파악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다행히 카엘 일행은 사막을 제집처럼 드나드는 부족의 후계자 둘의 안내를 받았다.
덕분에 큰 어려움 없이 사막을 건널 수 있었다.
선두에 서 있던 마하마네가 카엘을 돌아봤다.
“이제 조금 있으면 해가 지겠네. 슬슬 잘 곳을 찾아봐야겠네.”
“한시가 급하니 계속 갔으면 합니다만.”
“밤새도록? 괜찮겠어?”
“맞아. 낮에는 30도가 넘어가지만, 밤에는 영하 밑으로도 떨어진다. 사막의 밤을 우습게 보면 안 돼.”
놀라는 마하마네에 이어 디오리가 진지하게 경고했다.
하지만 카엘은 강경했다.
“조금이라도 더 빨리 가야 합니다. 선인장이 난 쪽으로 둘러 가면 좀 낫지 않겠습니까?”
“왜 그런가요?”
궁금해하는 소피아에게 카엘이 설명했다.
“응. 물을 품고 자라는 선인장 같은 건 영하가 되면 얼어서 팽창하면 못 살아남거든.”
하지만 디오리는 여전히 부정적이었다.
“그렇긴 해도 우리가 타고 온 낙타는 지쳐서 못 버틸 거다.”
“그럼, 도중에 낙타는 맡겨 두고 우리끼리 가죠.”
하지만 카엘도 물러서지 않았다.
현재 카엘 일행은 모두 보통이 아니라 추위와 더위를 잘 견딜 수 있었다.
“알겠습니다. 낙타들은 여기서 돌려보내죠. 이 낙타들은 훈련받아서 혼자서 충분히 돌아갈 수 있으니까요.”
카엘의 말에 납득한 마하마네는 최소한의 짐만 빼놓고 낙타를 돌려보냈다.
그리고 밤새도록 목적지를 향했다.
그러니 낙타를 타고 갈 때보다 속도도 훨씬 빨랐다.
덕분에 다음 날 오후 무렵에는 목적지 근처에 도착할 수 있었다.
문제는.
“아무래도 늦었나 보군.”
마하마네가 쓴웃음을 지었다.
아직 한참 가야 했지만, 수평선 저 멀리서 어렴풋이 수많은 사람과 리저드맨이 싸우는 게 보였다.
그 와중에 카엘은 문득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왜 탑에서 싸우지 않지?’
리저드맨의 근거지에는 멀리서도 보이는 뾰족한 탑이 세워져 있는데. 아주 견고해 보였다.
심지어 포위되더라도 지하로 보급받을 수도 있으니 탑에서 농성하면 아주 유리할 텐데도 탑 밖에서 적을 맞이해 싸우고 있는 거였다.
“일단 가까이 가 봐야겠네요. 여러분은 나서기 곤란하면 여기 계셔도 됩니다. 여기까지 안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카엘은 마하마네와 디오리에게 그렇게 말했다.
전투에 끼어들 생각인데, 그러면 부족의 후계자로서 입장이 곤란할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배려해 줘서 고맙군.”
“만에 하나 그대에게 문제가 생기면 우리가 나서서 도와주겠다.”
마하마네와 디오리가 미안해하면서 그렇게 말했을 때였다.
쿠그그그그그그.
땅속에서 뒤흔들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탑 주위로 여러 개의 모래 소용돌이가 생겨나는 게 아닌가?
그걸 본 마하마네가 소리쳤다.
“저, 저건. 앤트라이온이다.”
다섯 개의 모래 구덩이가 생겨났으니 앤트라이온이 무려 다섯 마리나 나타난 거였다.
“어떡하죠?”
“가서 해치우고, 리저드맨과 사람들을 구해야지!”
그렇게 묻는 소피아에게 카엘은 망설임 없이 대답하며 뛰어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