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화 황금의 비밀 (3)
“방금 내가 잘못 들은 거 같은데, 다시 한번 말해 주겠나?”
국왕이 미간을 찌푸리며 카엘에게 부탁했다.
카엘은 망설임 없이 금방 했던 말을 반복했다.
“리저드맨과 동맹을 맺자고 말씀드렸습니다.”
그 소리에 굳어 있었던 부족장들이 웅성거렸다.
국왕은 머리가 아프다는 듯 이마를 짚으며 중얼거렸다.
“레오폴드 왕자는 분명 리저드맨을 몰아내도록 도와준다고 했다만.”
“꼭 싸워서 몰아내야 하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서로 동맹을 맺고 양해를 구하면 사막의 일정 구역을 내줄 거고, 리저드맨의 도움을 받으면 사막을 오가는 게 더욱 편해질 겁니다.”
“말도 안 돼!”
“리저드맨에게 양해를 구한다고?”
“어떻게 리저드맨에게 도움을 받는단 말인가!”
흥분한 채 반발하는 부족장들을 진정시킨 국왕이 차분히 따져 물었다.
“흠. 그대가 리저드맨과 의사소통을 할 수 있다는 건 보고받았다. 그렇다고 해서 정말 우리 인간과 리저드맨이 동맹을 맺는 게 가능하다고 믿는단 말인가?”
“저에 대해서 아신다면 클리페우스성에서도 엘프와 드워프뿐만 아니라, 라이칸스로프도 함께 살고 있다는 걸 아실 텐데요.”
“물론, 알고 있다. 어인족은 물론, 거인족과도 협력 관계인 것까지 파악하고 있으니까. 하지만 그것과 경우가 다르다는 건 너도 잘 알지 않느냐.”
그렇게 말한 국왕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카엘을 쳐다보다 말을 이어 갔다.
“어디까지나 제국에게 쫓겨 주거지를 잃은 라이칸스로프들을 거둔 게 아닌가. 그게 아니었으면 라이칸스로프들이 클리페우스성까지 가지 않았겠지.”
틀린 지적은 아니었다.
그런 인연이 아니었다면, 지금처럼 성내에서 어깨를 나란히 하고 지내긴 어려웠을 테니까.
하지만 이들도 나름대로 인연이 있었다.
‘너무 오래된 인연이라 까먹었을 뿐이지만.’
“무엇보다 우리와 리저드맨은 사막이 생기기 이전부터 원수지간이었다.”
“틀린 소리는 아니지만, 여러분도 리저드맨의 보호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뭐라고, 보호?”
“그런 말도 안 되는!”
“그게 대체 무슨 말인가.”
항의하는 부족장들을 대표해 국왕이 물었다.
“설마 자네도 제국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하고 있다고 여기는 건 아니겠지?”
그런 시각은 제국은 물론, 니제르국의 학자들 사이에도 있었다.
아무리 제국이라도 드넓은 사막을 건너면서 언제 나타날지 모르는 리저드맨에게 시달리면서까지 니제르 왕국을 공격할 수는 없을 테니까.
그렇기에 리저드맨이 만약 사라지면, 제국의 위협에 노출될 거라는 거였다.
“아뇨. 전 니제르 왕국도 스스로 지킬 힘이 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그런가?”
“다만, 제국을 공격하기에는 나라의 인구가 적은 편이긴 하죠.”
니제르 왕국은 아무래도 남자를 배제하는 만큼 인구 수가 충분치 않았다.
황금 광산을 제외한 넓은 영토에는 오아시스를 중심으로 여러 개 도시가 사방에 퍼져 있는데, 거기에 사는 인구가 전부였다.
일반적인 국가의 5분의 1도 안 되는 수준.
대부분이 군인으로 생산에 종사하는 인구는 적었지만, 문제없었다.
황금 광산이 있는 만큼 부족한 생산물을 외부에서 사들일 돈이 충분하고도 남았으니까.
그래서 레오폴드가 니제르 왕국을 끌어들여서 제국 남쪽을 견제하려고 구상했을 때도, 딱히 제국 깊숙이 치고 들어갈 거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하지만 리저드맨과 협력한다면 이야기가 다르지.’
제국에 충분한 위협이 되고도 남을 거라는 게 카엘의 계산이었다.
그때 잠깐 고민하던 국왕이 물었다.
“그럼 리저드맨이 대체 뭐로부터 우리를 지킨다는 말이냐.”
“드래곤입니다.”
“드래곤?!”
그 말에 다들 화들짝 놀랐다.
조금도 상상하지 못한 단어가 튀어나왔기 때문이다.
“지금 아는 사람은 거의 없지만, 이 알 쿠브라 사막 지하에는 드래곤이 잠들어 있습니다.”
“뭐라고?!”
“정말인가?”
“믿을 수 없는데.”
부족장들이 소란을 피웠다. 일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아래를 내려다보기도 했다.
“흠.”
국왕도 도통 믿기 어렵다는 표정이었다.
만약 카엘이 이야기한 게 아니라면 장난치지 말라고 호통을 치며 바로 내쫓았을 터였다.
하지만 카엘은 그간 대륙에서 보였던 무용도 무용이지만, 드워프나 엘프뿐만 아니라, 라이칸스로프 같은 몬스터와 친하게 지냈다.
그뿐만 아니라 리저드맨과 의사소통도 할 수 있을 정도로 몬스터에 대해 해박했기 때문이다.
“정말 드래곤이 있단 말인가? 이름을 알고 있나.”
“알 쿠브라라고 합니다.”
“알 쿠브라라면 여기를 가리키는 이름이지 않나.”
“맞습니다. 이 사막의 이름이죠.”
“하지만 사막이 되기 전에도 밀림의 이름이 알 쿠브라였다만.”
“그만큼 오래됐지요. 그리고 여러분이 채굴하고 있는 황금도 알 쿠브라의 둥지에서 흘러나온 황금이라는 걸 아셔야 합니다.”
“뭐라고?!”
“정말이야?”
“그 황금에 그런 비밀이.”
갈수록 놀랄 일에 부족장들은 정신을 못 차릴 정도였다.
“설마 마기를 품은 황금도 드래곤 때문인가?”
“네. 알 쿠브라의 영향이라고 봐야죠. 과거 마왕과 싸우고 크게 상처 입은 알 쿠브라가 이곳에서 흘린 피가 스며들어서 생긴 거라고 보시면 될 겁니다.”
“그런데 리저드맨은 무슨 상관인가? 리저드맨이 드래곤의 후손이라도 된다는 미친 소리를 하려는 건 아니겠지?”
“후손이라기보다는 노예였습니다.”
“노예?! 도통 이해가 안 가는데.”
“리저드맨들은 원래 알 쿠브라의 둥지를 지키던 몬스터였습니다. 밀림에 터를 잡고 무리를 이루며 살기에 부리기 좋았겠죠.”
“흠. 그런데 왜 드래곤으로부터 우리를 지킨다는 거지?”
“맞아. 반대가 아닌가?”
“지금 계속 이야기 중이잖아. 말 끊지 좀 마.”
부족장들이 계속 목소리를 높이자, 국왕이 기어코 짜증을 냈다.
“원래는 말씀대로 드래곤 알 쿠브라에 종속되어서 그 둥지를 지키며 살았던 게 맞습니다. 한 인간이 나타나기 전까지는요.”
“설마, 그 인간이라는 게…….”
“짐작하시는 대롭니다. 니제르 왕국의 건국왕이자 모험가인 영웅 우스만을 말하는 겁니다.”
영웅 우스만!
여자의 몸으로 세상 모든 곳을 다 가 봤다는 모험가로 신비한 보물을 가지고 이곳에 와서 여러 부족의 합의를 이끌어 니제르 왕국을 건국한 인물이었다.
“확실히 우스만 님이라면 드래곤 둥지에 갔어도 이상하지 않지.”
“우스만 님은 알 쿠브라의 둥지에 보물을 노리고 들어갔다가 리저드맨들과 마주쳤습니다. 그러나 리저드맨들이 드래곤에게 속박되어있는 걸 안타깝게 여기고 그 저주를 풀어 주셨죠.”
“오오!”
“그런 일이.”
“우스만 님이 하실 법한 이야기야.”
실제로 우스만의 활약상은 워낙 많고 방대해 여러 권의 책으로 편찬될 정도였다.
“그런데 왜 리저드맨은 드래곤으로부터 우리를 지키고 있는 거지?”
국왕의 물음에 카엘이 길게 설명을 이어 갔다.
“여기에 황금이 많은 걸 안 우스만은 이곳에 정착하면 대대손손이 부유하게 살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만, 아무래도 드래곤이 깨어나는 걸 두려워했죠.”
“리저드맨들은 자신들의 저주를 풀어 준 보답으로 드래곤이 둥지 밖으로 못 나오도록 지키고 있겠다고 한 겁니다.”
“그 맹세를 지키기 위해 밀림이 사막이 되어도 떠나지 않고, 이 땅에 적응하면서 머무는 중이지요.”
“흠.”
“허. 그런 일이…….”
“…….”
카엘의 이야기를 들은 부족장들은 탄식하면서 생각에 잠겼다.
나라의 뿌리와도 연관되어 있는 흥미진진한 이야기일 뿐만 아니라.
카엘의 말대로라면 리저드맨들의 의리가 어지간한 인간보다 낫다는 생각도 하게 됐다.
습지에서 살던 리저드맨들이 맹세를 지키기 위해 사막에 적응한 이유를 생각하니 존경심마저 들었다.
그때 국왕이 물었다.
“근데 리저드맨들이 어떻게 드래곤을 억제하고 있는 건가?”
“그것까지는 저도 건 모릅니다.”
카엘도 어디까지나 스승인 엘프 디오네가 알려 준 이야기를 말한 것뿐이었다.
하지만 국왕도 딱히 기대는 안 한 모양이었다.
“하긴 그건 정말 일급 기밀이겠지. 어쨌든 오늘은 이쯤 해야겠어. 다음에 또 이야기하지.”
아무래도 충격적인 이야기의 연속이라 혼란스러운 모양이었다.
* * *
카엘이 국왕과 부족장들과 회의하는 사이에도 주스트 토너먼트 결승전은 계속됐다.
2회전은 쇠사슬을 쓰는 제르마족의 디오리와 베리베리족의 쿤체가 붙었다.
쿤체는 망치를 썼는데, 보통 사람보다 체격이 큰 디오리보다 머리 두 개는 더 크고, 몸이 두꺼워 디오리가 애처럼 보일 정도였다.
디오리가 쿤체를 올려다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전보다 더 커진 거 같군.”
“내 황금 금속기의 힘이지. 이 망치를 들면 계속해서 힘이 세진단 말이야. 그만큼 체격도 커지지만.”
우락부락한 근육을 자랑하는 쿤체를 보면서도 디오리는 기죽지 않고 전투태세를 취했다.
“그렇군. 어디 한번 붙어 보자고.”
“맞다. 내 덩치가 크다고 속도가 느릴 거로 생각하면 오산이야 이 망치는 보기보다 아주 가볍거든, 하지만 무게중심은 적당히 잡혀서 휘두르기는 좋지. 저번에는 내가…….”
“그 수다는 여전하군. 그 입을 막으려면 내가 먼저 나서야겠지.”
디오리가 쇠사슬 끝의 추를 냅다 던졌다.
“흠.”
쿤체는 입을 다물고 황금 망치를 앞에 내밀었다.
그러자 쇠사슬이 촤르륵 하는 소리와 함께 망치 자루를 휘감았다.
그걸 본 쿤체가 놀라는 한편 자신감에 차서 씩 웃었다.
“뭐야? 그 공격은 본래 상대의 무기를 봉쇄해 힘으로 뺏는 게 아닌가? 설마 나를 상대로도 힘겨루기 하겠다는 건가?”
“어디 한번 해보든가.”
“흐흐, 후회하지 마라!”
쿤체가 소리치면서 온 힘을 다해서 당겼다.
‘이 정도면 그대로 딸려 오겠지.’
그리고 쿤체의 예상대로 디오리가 딸려 날아왔다. 그런데 그 속도가 예상보다 빠른 게 아닌가?
“어?!”
당황하던 쿤체는 디오리가 돌격해 오자 중심을 못 잡고 넘어졌다. 그사이 디오리는 쿤체의 팔과 다리를 꺾었다.
황금 금속기 방어구도 이런 경우에는 발동하지 않아서 무용지물이었다.
“다, 당했다.”
“포기해.”
디오리가 손발에 힘을 주자, 쿤체가 비명을 지르면서 손바닥으로 땅을 쳤다.
“으악. 악. 항복. 항복이다.”
항복 선언을 받은 손을 털며 일어난 디오리가 한마디 했다.
“불리한 상황에 부닥치더라도 포기하지 않으면 어떻게든 방법이 있더라고.”
“네 말이 맞다! 내 힘이 아무리 강하다고 해서 언제나 이길 수 있다고 자만하면 안 되는데 말이지. 이번에는 내가 방심해 버렸군. 푸하하핫!”
디오리는 카엘이 앤트라이온을 쓰러트린 걸 보고 한 소리였지만, 쿤체가 잘난 체하며 떠드는 걸 보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다음 전투는 폴라니족의 마하마네와 창을 쓰는 카누리족의 마마두였다.
마하마네 앞에 선 마마두는 자신만만하게 웃으며 말했다.
“카엘이라는 사내에게 고맙다고 해야겠군. 덕분에 너와 정식으로 결투를 할 수 있게 됐으니까 말이야.”
“언제든지 찾아오면 싸워 줄 텐데 말이지.”
“아니, 이렇게 탐스러운 상품이 걸린 경우가 아니라면 전력으로 싸우기 힘들 테니까 말이지.”
“탐스러운 상품이라… 못 들었나? 난 이미 그에게 패배했네.”
“늘 그렇듯이 황금 금속기도 안 꺼내고 싸웠다가 패배를 인정했다며? 제대로 싸운 것도 아니잖아. 제대로 싸우면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해서 나온 거 아니야?”
“아니야. 그런 생각은 앤트라이온을 해치운 걸 보고 완전히 접었지.”
“혼자서 해치운 것도 아니라면서, 어쩌면 이제 죽을 때가 다 된 앤트라이온을 해치운 걸지도 모르지.”
그때였다.
“와아아아아!”
“이변이다, 이변!”
“어떻게 이럴 수가!”
옆 결투장에서 엄청난 관중들의 환호성이 들려오는 게 아닌가?
마하마네는 마침 이쪽으로 달려온 부하에게 물었다.
“어떻게 된 거야?”
“소피아라는 이방인이 타우레그족의 포디오 님을 상대로 승리했답니다!”
“그래? 나도 가만히 있을 수 없군. 우리도 입은 그만 놀리고 어디 한번 싸워 볼까?”
마하마네가 허리춤에서 두 자루의 곡도를 꺼내 들었다.
양손에 든 곡도에서 황금빛이 뿜어져 나왔다.
“기대하던 바다!”
그렇게 소리친 마마두가 창을 겨누며 마하마네에게 달려들었다.
둘이 격돌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바닥에 창이 떨어지고 마마두가 쓰러졌다.
“크윽, 내 패배다. 여전히 강하군.”
“…좋은 승부였다.”
“한 가지만 묻자. 네 말대로라면 이미 패배를 예상했는데, 싸워서 질 상대와 왜 또 싸우려고 하나?”
“내가 전력으로 싸우면 그와 어느 정도 격차가 나는지 확인해 보고 싶었거든.”
그렇게 말한 마하마네는 소피아가 결투를 벌였던 방향을 쳐다봤다.
‘그전에 그 부하를 통해서 실력을 확인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러려면 소피아가 다음 상대인 단검을 쓰는 테다족의 하마니를 이기고 올라와야 했다.
‘그 전에 나도 디오리부터 쓰러트려야겠지만.’
그 시각.
한참을 고민하던 국왕과 부족장들은 나라의 운명을 건 결정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