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화 모래 속으로 (3)
말이 대화지, 카엘과 리자드맨은 울음과 손짓으로 의사소통을 나눴다.
[안녕하십니까? 뜨거운 사막 위에서 고생이 많으십니다.]
카엘이 먼저 울음과 손짓으로 공손하게 말을 걸자 리저드맨이 깜짝 놀랐다.
[놀랍습니다. 당신은 인간이면서 어찌 우리 말을 압니까?]
[과거에 다른 이에게 배운 적이 있습니다. 많이 어색합니까?]
정확하게는 스승인 엘프 디오네에게 배운 거였다.
아주 오래전이라 리저드맨 외에는 기억하는 이가 드물었지만, 사실 알 쿠브라 사막 지하 깊은 곳에는 드래곤이 잠들어 있었다.
스승은 그 안에 잠입하기 위해서 리저드맨의 협조를 구한다고 배운 걸, 카엘에게 다시 가르쳐 준 거였다.
[아니, 아주 훌륭합니다. 배우기 싫다는 아이들에게 인간도 이 정도로 잘한다고 보여 주고 싶을 정도로요]
[저희가 이곳에는 초행이라 길을 잘못 들어와 리저드맨의 영역을 침범했나 보군요. 죄송합니다. 금방 영역 밖으로 나가겠습니다.]
[그런 사정이 있으셨군요. 부디 안전한 여정이 되시길 바랍니다.]
리저드맨은 그렇게 말하더니, 슬쩍 세이비 쪽을 보면서 입꼬리를 올리며 한마디 더 했다.
[앞으로는 제대로 된 안내원과 함께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저도 동감합니다.]
한편 뒤에서 놀란 얼굴로 카엘과 리저드맨을 바라보던 세이비는 알아듣진 못했지만, 불쾌한 기분이 들었다.
문제는 불쾌한 기분만으로 끝내지 않았다는 거였다.
스릉.
어느새 카엘에게 다가간 세이비가 니제르 특유의 긴 곡도를 목에 겨눴다.
그 곡도에는 오러, 검기와도 비슷한 힘이 맴돌았다.
카엘은 조금도 놀라지 않고 그 힘을 관찰했다.
‘이게 마기(魔氣)라는 건가? 실제로 보니 마력과도 비슷하군.’
“무슨 말을 한 거야? 설마 리저드맨과 내통이라도 한 건가? 리저드맨을 해치우기 위해 온 게 아니야?”
“질문이 많으시군요. 그 전에 검부터 치우시죠.”
어느새 세이비의 목에 검을 겨눈 소피아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노아나가 부른 땅의 정령이 세이비의 발목을 잡고 있었고, 데키마가 언제든지 날려 버리겠다는 듯 물의 창을 만들어 놓고 있었다.
“흥! 대답부터 들어야겠어.”
하지만 세이비도 물러서지 않았다.
“다들 진정해, 세이비 님도 진정하시고요.”
카엘은 그런 그들을 말리며 세이비의 곡도에 손을 갖다 댔다.
그러자 곡도에 맴돌던 마기가 사라지는 게 아닌가?
카엘이 마력을 흡수하듯 마기를 흡수한 거였다.
“어?! 이 자식이 무슨 술수를 쓴 거야? 이걸로 끝인 줄 알아?”
놀랐던 세이비는 이내 인상을 쓰며 소리쳤다.
“앗!”
“…이런.”
“윽!”
번쩍! 하며 황금빛이 치솟자 세이비의 발목을 잡고 있던 땅의 정령이 날아가고, 데키마의 물의 창도 흐트러졌다.
심지어 소피아마저 예상 밖의 기운에 대처 못 하고 주춤댔다.
그 틈을 노린 세이비는 마찬가지로 황금빛 단검을 꺼내 카엘을 찌르려고 했다.
‘이 정도면 소드 마스터급은 되겠는데?’
카엘은 그것마저 차분히 관찰하고 만년설삼의 기를 손끝에 모아서 단검을 쳤다.
쩌억.
단검은 굉음을 내며 그대로 박살이 났다.
산산이 조각나 모래 위에 떨어진 단검을 보며 세이비가 비명을 질렀다.
“앗! 내 금속기가!”
칼이 오가는 험악한 상황에서도 그게 더 중요하다는 듯 어떻게 든 조각을 모으려고 했다.
다시 태세를 갖추고 공격하려던 소피아나 노아나, 데키마가 황당해할 정도였다.
그때 리저드맨이 말했다.
[이크, 당신 아주 강한 전사였군요. 힘을 쓰지 않고, 대화로 해결해 줘서 고맙습니다.]
[별말씀을, 저희가 잘못한 걸요.]
[제 이름은 부아입니다. 당신의 이름을 알 수 있겠습니까? 다른 리저드맨에게 당신을 마주치면 예의 있게 대하라고 전하려고 합니다. 성미 급한 리저드맨이 무례하지 않도록 말입니다.]
[하하. 전 카엘이라고 합니다.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부아.]
카엘의 인사를 받은 리저드맨은 손을 흔들고는 사막 저편으로 사라졌다.
카엘은 산산조각이 난 금속기를 수습하지 못해 좌절한 채 주저앉아 있는 세이비에게 말했다.
“그럼, 이제 제대로 안내해 주시죠, 세이비 공주님.”
그 말에 카엘 일행은 깜짝 놀랐다.
저 과격한 안내원이 공주였다니!
“…어떻게 알았어?”
“곡도처럼 마기가 담긴 금속기는 귀족이나 쓰는 거고, 마지막에 보여 준 황금빛 금속기는 왕족만 쓸 수 있는 거니까요.”
“흥. 그걸 알면 금속기는 부수지 말아 주지.”
“저도 그렇게 쉽게 부서질 줄은 몰랐습니다만.”
“치.”
카엘의 말에 세이비가 입을 삐죽댔다.
“그보다 계속 숨어서 뒤따라오던 사람들도 슬슬 나오라고 하죠. 계속 땅속에 있느라 답답할 텐데.”
“이야, 그것까지 눈치채고 있었나? 야, 나와! 다 들켰대!”
세이비의 말에 펑 하는 소리와 함께 모래를 박차고 열두 명이 튀어나왔다.
모두 얼굴까지 가리고 있어서 누군지는 알 수 없으나, 풍기는 기운이 하나같이 고수였다.
이번에도 카엘 일행은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
소드 마스터인 소피아는 아주 미세한 기척을 느끼고 진작에 눈치챘을 뿐만 아니라.
노아나와 데키마도 정령들에게 경고를 들었기 때문이다
“세이비 공주님, 무사하십니까.”
“걱정되면 진작 나와서 도와주든가.”
“죄송합니다. 너무 갑작스레 벌어진 일이라…….”
“흥!”
그 원흉이었던 세이비 공주는 되레 콧방귀를 뀌더니 카엘을 돌아봤다.
“그나저나 얕볼 수 없는 남자로군. 정말 마음에 들었어. 어서 가자고.”
그러고 먼저 앞장서는 게 아닌가?
노아나가 드물게 투덜대며 물었다.
“저러는데 계속 저 여자를 따라가실 겁니까?”
“…재수 없어.”
데키마까지 한마디 했다.
“…….”
소피아는 카엘이 하자는 대로 전적으로 따를 생각이라 아무 말이 없었지만, 역시 불편한 기색이 역력했다.
카엘은 어깨를 으쓱했다.
건국왕의 성검을 얻는 일이니까 이 정도는 감수해야지.
“카엘 님이 괜찮다면 하는 수 없죠.”
“…맞아.”
“그래도 계속 함정을 팔 거 같은데 조심해야겠어요.”
소피아가 세비야의 뒤를 노려보며 중얼거렸다.
카엘을 지키기 위해 소드 마스터가 되었으면서도 금방 황금 금속기에 당황한 게 뼈아파서였다.
카엘은 그 말에 내심 동의했다.
‘안 그래도 함정은 계속될 거 같으니까 주의하는 게 좋겠지.’
그러다가 문득 생각난 듯 노아나에게 말했다.
“저 부서진 금속기 잔해 좀 챙겨 줄래.”
“아, 네.”
노아나는 땅의 정령을 이용해 순식간에 금속기의 잔해를 수습해 주머니에 담았다.
“이거 어떻게 하시려고요?”
“내가 부순 거니까 고쳐 주려고. 어디까지나 하는 거 봐서지만.”
카엘은 주머니를 건네받으며 말했다.
* * *
“오늘은 저기서 하룻밤 묵고 가자.”
사막을 빠르게 횡단하던 세이비는 해가 지려고 하자 저기서 묵자며 근처 마을로 들어갔다.
마을 안은 온통 여자들뿐이었는데, 다들 남자가 마을에 왔다는 말에 뛰쳐나와 카엘을 신기한 듯 구경했다.
“어, 남자다.”
“에이, 남자가 어떻게 여기 와? 너 남자 본 적 없잖아.”
“남자 맞는데?”
“어디 좀 봐. 어 정말이네. 어떻게 들어왔지.”
“저기 앞에 왕국의 문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봐서 특별히 허용했나 봐.”
“와, 남자라니. 신기하다.”
“근데 가슴 빼고는 우리랑 별로 다를 것도 없는데?”
“저 남자가 특이한 거야.”
“보통은 더 우락부락하게 힘이 세고, 털도 덥수룩하거든. 저쪽은 아무래도 유약해 보이네.”
“그럼, 남자로서는 별로인가?”
“아니거든요. 저희 카엘 님은 보기와 달리 얼마나 센데요.”
소피아는 주민들이 떠드는 소리에 참지 못했는지 끼어들어서 한마디 했다.
주민들은 순간 겁을 먹고 몸을 움츠렸다.
“소피아, 그만해.”
“죄송합니다.”
소피아는 고개를 숙이고 다시 카엘의 뒤에 섰다.
소피아는 평소에 조용하고, 다정다감한 만큼 한번 화를 내면 무서웠다.
‘그래도 그 말에 발끈할 것까지야 없는데 말이지.’
세이비는 공주답게 이 마을에서 최상급 여관을 빌렸다.
최상급 숙소에다가 어디에서나 모래바람이 휘날리는 사막인 만큼 개운하게 씻을 수 있도록 욕조가 있었다.
카엘이 거기서 씻고 있는데 뒤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게 아닌가.
“지금 씻고 있는 거 같은데.”
“거봐. 내가 여기서 기다리면 된다고 했지.”
“남자 몸은 대체 어떻게 생겼을까? 너무 궁금하네.”
아무래도 카엘의 알몸을 구경하려고 모여든 마을 여인들인 듯했다.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나가요, 나가!”
그리고 그 여인들이 카엘을 보기도 전에 모두 소피아가 나서서 쫓아냈다.
그렇게 카엘을 노리는 건 다음 날에도 계속됐다.
문제는 단순히 구경하려는 게 아니라는 거였다.
웬 여자가 나타나서 카엘의 앞을 가로막은 거였다.
“나는 풀라니족의 후계자 마하마네다.”
그렇게 자신의 정체를 밝힌 마하마네는 파란 머리카락을 가졌는데, 훤칠하게 생긴데다가 키도 큰 게 풍성한 가슴만 아니었다면 미소년으로 착각할 정도였다.
“꺄악! 마하마네 님이잖아. 오늘도 멋지시네.”
“정말 반할 거 같아.”
“맞아. 내가 남자라면 얼마나 좋을까.”
마하마네는 잘생긴 만큼 주민들에게도 인기가 많아 보였다.
한편 소피아는 이해가 안 되는 듯 물었다.
“풀라니족? 부족 말하는 건가요?”
“응, 왕국이라고 해도 여러 부족의 연합체에 가깝거든. 실제로는 여러 부족이 돌아가면서 통치해. 왕국이라고 하는 건 대외적으로 무시당하기 싫어서 내세우는 거고.”
“아. 그렇군요.”
카엘의 설명에 소피아가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한편 소피아에게 설명을 마친 카엘은 마하마네에게 다가가 인사했다.
“카엘 브리운이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마하마네 님.”
“그래, 그대 이름은 소문으로 많이 들었다. 대륙의 영웅이라지?”
그 말에 주민들이 웅성거렸다.
“저 사람이 영웅?! 저렇게 약해 보이는데?”
“그래도 마하마네 님이 말씀하신 거니까 틀린 말은 아닐 텐데.”
“부하들이 강한 게 아닐까? 다른 나라는 그렇다며.”
카엘은 주민들의 말을 못 들은 척 겸손하게 대답했다.
“과찬이십니다.”
“확실히 소문이 과장된 거 같아 보이기도 하는군.”
“저자가 감히…….”
“괜찮아.”
소피아가 나서려는 걸, 카엘이 말렸다.
한편 마하마네는 턱을 쓰다듬으며 카엘을 훑어보더니 이렇게 말하는 게 아닌가?
“성에 안 차지만, 이미 결정하고 왔으니 하는 수 없군. 오늘 내게 씨를 다오.”
“씨, 씨를?!”
소피아가 까무러칠 정도로 놀랐지만, 마하마네는 깔끔히 무시하고 카엘에게 한 발짝 다가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보상으로는 뭘 원하나? 원한다면 네 몸뚱어리만큼의 황금을 줄 수도 있다만.”
“괜찮습니다.”
“하긴 보상이 필요 없을 정도로 영광스러운 일이긴 하지.”
마하마네가 오해한 듯해 카엘이 다시 정확하게 말했다.
“제안을 거절한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보다 갑자기 이러시니 곤란하네요.”
마하마네가 의외라는 듯 되물었다.
“뭣이? 지금 나의 제안을 거절하겠다는 건가?”
“네.”
그러자 주민들이 술렁거렸다.
“와, 방금 들었어?”
“어이없네. 어떻게 마하마네 님 같이 멋진 여자의 구애를 거절할 수 있어?”
“약해 보이는 주제에 남자라고 비싸게 구는 것 좀 봐.”
주민들이 비난하자 소피아가 주민들을 쏘아봤다.
그 살기 어린 눈빛에 겁먹은 주민들이 입을 다물었다.
한편 마하마네는 마침 잘됐다는 듯 혀로 입술을 핥았다.
“그래, 쉽게 나오는 남자는 재미없지. 힘으로 굴복시키는 맛도 있는 법이니까.”
그러더니 곡도를 뽑아 들고 카엘을 겨눴다.
“결투다. 내게 지면 얌전히 씨를 다오.”
그 말에 놀란 소피아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구석에서 구경하고 있는 세이비를 발견했다.
“세이비 님, 거기 있지 말고 나와서 좀 말리시죠.”
“결투를 어떻게 말려. 국왕도 못 말려.”
그러면서 아주 재밌다는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런.”
세이비에게 매달리면 안 되겠다 싶었던 소피아가 앞으로 나섰다.
“그럼 제가 카엘 님을 대신해 상대하겠습니다.”
“그쪽이 영웅을 따라다닌다는 소드 마스터지?”
마하마네도 소피아에 대한 소문을 들은 모양이었다.
“그렇습니다.”
“강한 여자 치마폭에 숨는 남자라니 내 취향인걸?”
“윽!”
소피아가 마하마네의 조롱에 검에 손을 가져가려는 걸 카엘이 막았다.
“카엘 님?”
“괜찮아. 이번에는 내가 힘 좀 쓰지, 뭐.”
“…알겠습니다.”
“나름대로 용기를 낸 거 같다만, 어차피 우리는 결투 대리인을 인정 안 하니 직접 나와야 했어.”
“그렇군요. 결투는 여기서 바로 하죠.”
“창피당하는 꼴을 만인에게 보여 주고 싶다니 취향 한번 독특하구나. 그럼 바로 가겠다!”
마하마네는 호쾌하게 웃으며 카엘에게 곡도를 휘두르며 덤볐다.
잠시 후.
한바탕 바닥에 나뒹군 마하마네가 도저히 믿기 어렵다는 얼굴로 카엘을 바라봤다.
“…왜, 왜 이렇게 강해? 분명 소드 마스터는 아니라고 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