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화 마석의 힘 (4)
화르르!
대지가 불타고 하늘이 붉게 물들었다.
마치 세상을 모조리 불태울 것같이 맹렬히 타오르는 이 불꽃은, 라 키레아스가 자신의 생명과 마력을 제물 삼아 펼친 일격필살의 마법.
‘이거라면 사천왕도 못 버티지.’
죽지는 못해도 빈사 상태로 만들 정도는 됐다.
그러면 영노나 카엘이 충분히 마무리해 줄 거라고 믿고 펼친 마법이었다.
저 녀석을 해치우기만 하면 마족의 음모도 수백 년은 미뤄질 수 있었다.
‘그러니 뒷일은 네게 맡긴다, 카엘!’
속으로 그렇게 말한 라 키레아스는 문득 카엘에 대해서 떠올렸다.
처음에는 그저 거추장스러운 클리페우스성의 장벽을 지키는 고지식한 공작의 자제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강함뿐만 아니라, 드래곤인 자신이 호기심을 느낄 정도의 놀라운 약제술을 가진 게 아닌가?
그보다 더 놀라운 건 믿기지 않을 정도의 포용성이었다.
인간이 엘프, 드워프와 어울려 사는 건 지금까지 전혀 없던 일은 아니다.
사이 나쁘기로 유명한 엘프와 드워프가 함께 지내는 것도 드물지만 있었다.
그래 봐야 인간은 둘 사이를 오가며 이익을 취하는 게 전부였다.
하지만 카엘은 그렇게 사이 나쁜 종족들이 클리페우스성 내에서 서로 돕고 친하게 지내는 이웃으로 만든 게 아닌가?
그뿐만이 아니었다.
어인족과 라이칸스로프는 물론, 하피들과도 우호 관계를 맺었다.
지금까지 천 년을 살면서도 한 번도 본 적 없는 광경이었다.
그렇게 깊은 인상을 남긴 덕분이었을까?
‘심지어 내 마음에 들기 시작했지.’
거대한 불꽃이 된 라 키레아스는 고개를 돌려 남모르게 카엘을 쳐다봤다.
카엘이 뭘 하려는지는 잘 알았다.
‘겁도 없이 마석의 힘을 약으로 만들어 섭취하려 하다니.’
지금까지 보여 준 조제 능력을 생각하면 그런 자신감을 보이는 게 이상하진 않았다.
온갖 약재를 다루며 별의별 약을 다 만들어 내는데, 그중에는 마석과 버금가는 전설급 소재라고 불리는 드래곤 하트나 세계수의 씨앗, 현자의 돌도 있다.
‘하지만 마석의 힘을 얕보면 곤란하지.’
세상의 온갖 사악한 기운이 모이고 모인 그 결정체인 마석에는 마왕의 의지가 깃들어 있었다.
엘릭서를 만들 듯 그 효능만 일부 쓰는 게 아니라. 마석을 중심으로 약을 만들면 그 영향에서 벗어나기가 어려웠다.
‘카엘이 어린 인간치고 지혜롭기는 해도 마왕의 유혹은 그것만으로는 떨치기 힘들어.’
정념의 집합체인 요괴나 수천 년을 사는 드래곤이어야 버틸 수 있을 정도였다.
‘그걸 쓰는 걸 막으려면 내가 나서는 수밖에.’
라 키레아스는 결심을 다잡으며 드래곤 하트를 더욱 불태워 불꽃을 강화했다.
그러는 한편 카엘을 위해서 희생한 거라는 자신의 마음을 영원히 눈치 못 챘으면 하고 빌었다.
자신을 기리며 오랫동안 기억하는 것보다, 그 착한 녀석이 미안해하며 마음 아파하는 게 싫어서였다.
‘그럼 안녕.’
그 순간 거대한 불꽃이 대왕을 덮쳤다.
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쾅!
천지를 뒤집을 정도의 맹렬한 충격파가 터져 나왔다.
영노와 카엘은 괜찮았지만, 나머지는 뒤로 날아갈 정도였다.
곧바로 자세를 잡은 브로칸이 충격파에 일어난 흙먼지 너머를 보려고 애썼다.
“해치웠나?”
“아, 아니야.”
모르타가 이를 악물고 대답했다.
이 난리 속에서 괴로워하는 정령의 비명이 아직 대왕이 건재하다는 걸 알려 주고 있었다.
흙먼지가 가라앉고 나타난 광경은 처참했다.
대왕 주위의 대지가 시커멓게 타서 재처럼 변해 있었고.
마찬가지로 드래곤 라 키레아스도 눈부신 붉은 비늘이 무색하게 새카맣게 타 버린 채 꼼짝하지 않고 있었다.
그렇게 하고도 대왕은 입가에 피를 주룩 흘렸을 뿐이었다.
“제법이다. 본좌에게 이런 타격을 입히다니.”
더는 움직이지 않는 라 키레아스를 보며 입가의 피를 닦은 대왕이 카엘 쪽을 돌아봤다.
“하지만 무한한 힘을 품은 마왕의 마석이 있는 한 이 몸을 이기지 못한다.”
‘마왕의 마석?! 어쩐지 타격을 전혀 입는 거 같지 않더라니…….’
카엘이 속으로 탄식했다.
그때 타마모가 카엘의 앞을 가로막으며 소리쳤다.
“저건 절대로 못 이겨! 지금이라도 도망쳐! 내가 어떻게든 막아 줄 테니까!”
‘왜? 내가 도망치도록 막는다는 거지?’
카엘은 타마모의 행동이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지금에 와서 도망칠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도망쳐 봤자 언제 마왕이 올까 두려워하는 불안한 시간을 버는 것뿐이다.
그런 건 성미에도 맞지 않았다.
회귀 전에도 스승과 산에 있어도 됐지만, 몬스터를 무찌르겠다며 산을 뛰쳐 내려왔다.
게다가 후퇴해서 전력을 갖추고 상대하기도 어려웠다.
드래곤과 용까지 있는 마당에 이 이상의 전력을 만들어 내는 것도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니까.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서 싸우는 수밖에. 인제 와서 이게 통할지는 모르지만.’
카엘은 품에서 포션 하나를 꺼냈다.
다른 포션병과 달리 검은색 병으로 되어 있는 이 병 안에 든 건 바로, 마석 포션이었다.
막상 대왕은 카엘의 전의가 꺾이지 않는 걸 보고 재밌다는 듯 씩 웃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는가? 기다려 주지. 본좌는 관대하니까.”
‘그러든가 말든가.’
카엘은 대꾸하지도 않고 마석 포션을 마셨다.
꿀꺽. 꿀꺽.
단숨에 비운 카엘은 눈을 감았다. 체내의 기운을 느끼기 위해서였다.
‘기다려 준다니 차분히 힘을 정리하지, 뭐.’
현재 카엘의 몸속에는 빙한목의 냉기와 만년설삼의 기.
괴력의 근원인 강화제의 기운이 맴돌고 있었다.
그 상태에서 마석 포션을 통해 체내로 들어온 미량의 마력은 순식간에 수십 배로 증폭했다.
그 직후 순식간에 전신에 퍼져서 카엘의 체내의 다른 기운에 달라붙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걸 공격하지는 않았다.
도리어 한층 더 강화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남은 기운이 이마에 몰리더니 이마를 뚫고 대왕처럼 뿔이 돋아났다.
그걸 본 대왕은 흥미롭다는 눈빛을 했다.
“너도 마석을 흡수했나? 그래 봐야 나한테 안 될 텐데?”
대왕의 여유는 당연했다.
상대가 흡수한 마석이 뭔지 알 수는 없지만, 자신이 부착한 마왕의 마석보다 강할 수는 없었으니까.
심지어 겉으로 드러나는 뿔만 해도 카엘은 작은 게 하나뿐.
대왕은 가운데 큰 뿔에 좌우로 작은 뿔이 난 게 왕관을 쓴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그럼 준비가 다 됐나?”
“그래.”
팟. 퍽!
카엘이 말하자마자 순식간에 가까이 접근한 대왕이 카엘의 복부를 때렸다.
“큭. 음?”
카엘은 손쓸 틈도 없이 맞았지만, 의외로 버틸 만한 게 아닌가?
“어, 뭐냐?”
“글쎄.”
당황하는 대왕에게 대꾸하며 주먹을 휘둘렀더니 펑! 하는 소리와 함께 대왕이 저 멀리 날아갔다.
벌떡 일어선 대왕이 믿기지 않는 얼굴로 카엘을 바라봤다.
“이럴 수가, 분명 나보다 마력이 적을 텐데…….”
“아무래도 마석이 내 본래 힘을 강화해 준 덕분인 거 같군.”
카엘도 자신의 손을 내려다봤다.
강해질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전에 없던 기운이 전신을 맴돌았다.
하지만 대왕은 여전히 여유로웠다.
“그렇다면 본좌가 더 많은 마력을 끌어 쓰면 될 일이다.”
그와 동시에 대왕의 뿔이 더욱 커졌다.
그 상태로 카엘을 공격했다.
쾅!
카엘이 미리 대비했음에도 이번에는 제대로 타격이 왔다.
“큭!”
카엘도 지지 않고 대왕에게 덤볐다.
하지만 대왕은 간단히 막아 냈다.
모두가 합세해서 공격했을 때보다는 싸울 만했지만, 조금씩 밀렸다.
“크흐흐. 이제 포기하거라. 그러면 본좌가 고통 없이 끝내 주겠다.”
“흥.”
거리를 벌린 카엘은 대꾸하지 않고 슬쩍 초소형 회복 포션을 먹었다.
활주박을 상대하기 전에 전투 준비를 하면서 아주 많이 챙겨 둔 덕분에 아직 잔뜩 있었다.
“우리도 도와드릴게요.”
“맞아요. 저희도 싸울 수 있어요.”
“아니야! 두고 봐.”
소피아와 브로칸을 말린 카엘은 다시 대왕에게 덤볐다.
“호. 회복이 빠른데? 본좌에게 재밌는 놀잇감이 생겼군.”
대왕은 여유를 부리며 카엘을 상대했다.
잠시 후.
카엘은 역시 상처를 입고 나가떨어졌다.
다시 회복 포션을 먹고 일어섰지만.
그렇게 몇 번을 반복했을까.
“무슨 회복력이…….”
카엘이 타격을 입은 게 확실한데도 끈질기게 덤비는 걸 본 대왕이 질린 얼굴이 됐다.
카엘은 팔다리뼈가 부서지고.
어깨가 뜯겨 나가고.
몸통이 뚫리고.
눈알이 터져 나가는데도 포션을 마시고 회복해 일어난 거였다.
곧바로 회복했다고 해도 그 전에 아주 고통스러울 게 분명했다.
그걸 지금 몇 번이나 견뎌 낸 거였다.
“괴롭지 않나?”
“그야 괴롭지.”
“그럼 왜 포기하지 않지? 순순히 포기해라. 그럼 편해진다.”
“그럴 수는 없지.”
“…고통에서 쾌락을 느끼는 부류인가.”
“아니, 내가 예전에 겪었던 고통에 비하면 이 정도는 견딜 만하거든.”
카엘은 회귀 전에 병이 낫기 전에 겪었던 고통을 떠올리며 쓴웃음을 지었다.
그때는 정말 괴롭고 기나긴 고통 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냈었다.
그 말을 들은 대왕이 경악했다.
“평소 어떤 고통을 겪었길래… 아니. 상관없다! 본좌가 그대를 이 모든 고통에서 해방해 주겠노라!”
그렇게 외친 대왕은 마석의 힘을 더욱 끌어 쓰기 시작했다.
꽈직. 꽈지직.
이번에는 대왕의 뿔이 더욱 커지다 못해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대왕의 신체가 갈라졌다.
부서지는 듯했지만, 그 사이로 검보라빛 피부가 나오면서 전체적인 대왕의 체격이 훨씬 커진 거였다.
덕분에 대왕은 조금 마른 청년의 모습에서 근육질의 사내로 변했다.
“크하하하학! 이번에야말로 끝내 주마!”
본인의 모습이 만족스러웠던 대왕은 앙천대소를 터트리며 카엘을 공격했다.
“젠장! 위험해.”
이미 다쳐서 쓰러져 있던 영노가 뭔가를 카엘에게 던졌다.
그건 용의 힘이 담긴 여의주였다.
여의주가 카엘의 주위를 맴돌며 힘을 더해 주기 시작했다.
-쩝, 오랜만에 마음에 드는 주인이니 도와줘야겠군.
저쪽에 내팽개쳐져 있던 마검 아조트도 스스로 날아오더니 여의주와 함께 카엘의 힘이 됐다.
“이대로 죽게 내버려 둘 수는 없지.”
“저도 돕겠어요.”
몸을 꼼짝할 수 없었던 타마모가 입속에서 구슬을 꺼내 카엘에게 던졌다.
고여도 마찬가지.
두 개의 여우 구슬이 또 카엘을 지키기 위해 나선 거였다.
그렇게 4개의 신기가 카엘의 주변을 맴돌면서 대왕의 공격을 조금이라도 약화했다.
여전히 카엘은 대왕의 맹공을 버티지 못하고 쓰러졌지만.
“더는 약을 못 먹게 하겠다.”
대왕은 어떻게든 최후의 일격을 날리려고 했지만, 신기가 막아 주는 틈에 카엘이 다시 회복 포션을 마셨다.
그러면서 4개 신기의 힘도 하나둘 나가떨어졌다.
그러자 카엘의 피해는 더욱 커졌다.
한 번은 어깨와 팔이 날아가 버릴 정도로 심한 피해에 빈사 상태 직전이 되어 엘릭서를 마시기도 했다.
‘이건 이제 없는데.’
그러나 그걸 모르는 대왕으로서는 카엘이 죽기 직전에도 어떻게든 살아 돌아오는 것처럼 보였다.
우위를 점하고 있음에도 거기에 공포를 느낀 대왕의 머릿속에 저 인간을 완전히 죽이는 한 가지 방법이 떠올랐다.
그건 바로 힘이었다.
‘압도적인 힘으로 단번에 해치우면 더 회복하고 말고도 없겠지.’
어차피 모두 받아들일 마석의 힘이었다.
대왕은 집중해서 마석의 힘을 더 흡수하기 시작했다.
그에 비례해 마왕의 신체도 더더욱 커졌다.
그러던 와중이었다.
콰직.
“어?”
뭔가가 갈라지는 불길한 소리에 무슨 일인가 확인한 대왕은 당황했다.
흡수한 마석을 받아들인 만큼 늘어난 신체를 메워 주던 검보라빛 피부가 거미줄처럼 갈라지기 시작한 거였다.
그걸 본 카엘이 뒤로 물러나면서 동료들에게 소리쳤다.
“떨어져. 최대한 멀리.”
“어, 어떻게 된 거지?”
대왕이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부서질 거 같아 꼼짝도 못 하고 있을 때였다.
어느새 나타난 마족 위자르샤가 말했다.
-별거 아닙니다. 신체에 맞지 않는 힘을 무리하게 끌어 쓰다가 탈이 난 거니까.
“신체에 맞지 않는 힘이라고?!”
놀란 대왕이 위자르샤를 추궁했다.
“마왕의 후예라면 무한한 힘을 가진 마왕의 마석을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다면서?!”
-네. 그저 꽤 괜찮은 자질을 가지긴 했으나 당신은 마왕의 후예가 아니었던 거죠.
그렇게 말한 위자르샤는 그대로 사라져 버렸다.
“그, 그럴 수가… 안 돼!”
뒤늦게 자신의 상태를 깨달은 대왕이 무릎을 꿇으며 절규했다.
동시에 솔국을 뒤흔드는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