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7화 함정 (3)
-자! 어서 술을 가져오거라. 오늘 밤은 좋은 안줏거리가 많아서 술맛이 아주 좋겠구나!
주탄동자가 신나서 소리쳤다.
안줏거리라는 건 당연히 금방 술 항아리에 숨어 있는 걸 해치운 라이코우와 그 부하를 일컫는 말이었다.
그때 부하 요괴 중 하나가 우려했다.
-술 항아리에 적이 숨어 있었는데, 술은 괜찮을까요?
그 물음에 다른 요괴들이 비웃었다.
-크흐흣, 주탄동자 님을 뭐로 보고 그런 걱정을 다 한담?
-신입인가 봐.
-주탄동자 님이 어떤 분이신데, 당연히 그 정도 대비는 해 두시지.
그 말대로 주탄동자가 씩 웃으며 말했다.
-상관없다! 내가 바로 마실 게 아니거든.
-어?
-뭣들 해? 이것들아! 가서 한 잔씩 마셔 보지 않고!
부하가 의아해하는데 주탄동자는 술 시중을 드는 여인들을 떠밀었다.
여인들은 그대로 다가갔지만, 얼굴에 공포심이 가득한 게 예전에 독주를 마시고 죽은 이를 본 적 있는 게 틀림없었다.
-역시 주탄동자 님! 대단하십니다!
그 모습을 본 부하 요괴가 감탄 감격하는데, 주탄동자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봤다.
-뭐 해? 너도 한잔 마셔야지.
-저, 저도 말입니까?
-그럼. 인간한테는 괜찮지만, 요괴가 마시면 탈이 나는 술이 있을지도 모르는 거 아니냐? 내가 마셔서 괜찮은지 시험할까?
-아, 아닙니다!
부하는 황급히 술 항아리 하나에 다가가서 술을 한 바가지 퍼 마셨다.
다른 요괴 중에서도 약한 녀석들이 떠밀려 나와 술을 마셨다.
-진작 그럴 것이지.
그 광경을 만족스럽게 보던 주탄동자는 갑자기 입상을 찌푸렸다.
-아 씨, 생각해 보니 열받네.
-왜, 왜 그러십니까? 술을 마셨는데 아무 이상 없습니다.
부하는 바가지를 머리 위에 털어 깔끔히 비운 걸 보여 줬지만.
주탄동자의 화는 풀리지 않았다.
-근데 내가 왜 인간들의 술을 이렇게 조심스럽게 마셔야 해? 기왕 바칠 거 순순히 맛있는 술을 바칠 것이지. 아우 화가 난다, 화가 나!
그러면서 주위의 물건과 인간, 요괴까지 마구잡이로 집어 던지고 부쉈다.
그러자 금방 여인의 비명과 요괴들이 괴성으로 저택이 가득 찼다.
그러고 얼마나 지났을까?
“으하함.”
“으음.”
“아흐음.”
구석에 숨어 있던 여인 중 술을 마신 여인들이 하나둘 하품하더니 그대로 잠들기 시작한 거였다.
-이크. 잠 온다.
-나도야.
-이번에 가지고 온 술이 센가 봐.
이내 시험 삼아 술을 마시게 한 요괴들도 잠들었다.
그걸 본 주탄동자가 난동을 부리는 걸 멈췄다.
그러더니 씩 웃었다.
-크크크, 이번에는 아주 독한 술을 가져왔나 보군! 술에 약한 척하니까 정말 술에 약한 줄 알고, 아주 독한 술을 가져온단 말이지!
주탄동자가 기분 좋아진 걸 눈치챈 부하들이 맞장구쳤다.
-역시 인간들은 멍청하단 말이죠.
-주탄동자 님은 독한 술을 마실수록 요력이 강해지시는데 말입니다.
-인간들이 날뛰어 봤자, 모두 주탄동자 님의 손바닥 안 아니겠습니까?
-푸하하하핫! 어쨌든 이제 기분 좋게 즐기자꾸나!
주탄동자는 술 항아리를 통째로 들고 술을 꿀꺽꿀꺽 마셨다.
나머지 요괴들도 주탄동자 옆에서 술잔을 기울였다.
당연히 주탄동자가 마실 술도 부족했기에 어디까지나 물을 떠 놓고 술을 마시는 흉내를 낼 뿐이었지만.
그렇게 술판을 벌인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주탄동자의 몸이 갸우뚱했다.
-어, 오랜만에 취하는 느낌인데.
-괜찮으십니까?
-괜찮고말고. 기분도 아주 좋아.
그렇게 대꾸한 주탄동자는 털썩하고 쓰러졌다.
-어, 주탄동자 님이 술에 취해 쓰러진 거야?
-정말인 거 같은데? 와! 나는 주탄동자 님이 취해서 자는 거 처음 봐.
-덕분에 오늘 밤은 좀 조용히 보내겠구먼.
요괴들은 놀라면서도 안도했지만, 그들의 바람과 달리 밤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 * *
‘완전히 곯아떨어졌나 보군.’
카엘은 도채비 감투를 쓴 채로 주탄동자가 술을 마시고 잠들 때까지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다.
여인들이나 요괴들이 금방 잠들고, 주탄공자까지 버티지 못하고 잠든 건.
카엘이 술에다가 스피노사를 우려내 탄 덕분이었다.
타모라국이나 솔국에도 흔히 있는 주주베 열매의 씨앗을 말린 스피노사는 물이나 술에 우려내면 마음이 진정되는 한편, 잠이 오게 하는 효과를 낸다.
독은 경계한다기에 잠들게만 한 거였다.
‘주탄동자가 잠들면 기습하기 좋을 거로 생각했는데, 처음부터 함정이었다니…….’
라이코우와 그 부하들이 안타깝고, 처음부터 협력했으면 이런 불상사는 없을 거로 생각했지만, 이미 늦은 일이었다.
‘어쨌든 기절시킨 게 아니니 최대한 빨리 공격을 해야 해.’
카엘은 구석에 몸을 숨긴 채, 하늘을 향해 신호탄을 쐈다.
펑!
밤하늘에 붉은 불빛이 꽃피웠다.
-어? 저건 뭐지?
-나도 처음 봐. 뭐, 별일 아니겠지.
-그나저나 예쁘네.
요괴들은 처음 보는 불빛이라 그런지 별다른 반응 없이 멍하니 쳐다봤다.
하지만 그건 카엘이 일행에게 보내는 공격 신호였다.
슈우웅!
드래곤으로 변한 라 키레아스가 대기산으로 빠르게 날아오기 시작했다.
앞발에는 커다란 주머니가 달려 있었는데, 거기에는 다른 일행도 모두 타 있었다.
저게 끝이 아니었다.
라 키레아스가 오는 걸 확인한 카엘이 만파식적을 꺼내 불기 시작한 거였다.
그러자 먹구름이 몰려들고 벼락이 내리치더니 그 틈으로 영노가 나타났다.
단번에 최대 전력으로 주탄동자를 해치운다는 작전이었다.
-어, 뭐야?
-적인 거 같은데?
-적 맞잖아.
요괴들은 영노의 벼락을 맞고, 라 키레아스에게서 뛰어내린 카엘 일행의 공격을 받고서야 적인 걸 눈치챘다.
-주탄동자 님, 적입니다! 적! 일어나세요!
부하들이 주탄동자를 흔들어 깨웠지만, 어찌나 깊이 잠들었는지 일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때였다.
-다들 진정하라!
-우리가 있으니 두려워 말고 적과 싸우면 된다!
-다들 주탄동자 님을 지키도록.
-강한 적은 우리가 상대하겠다!
주탄동자의 심복들인 곰 요괴들이 나타나 주탄동자의 앞을 가로막은 거였다.
곰 요괴들은 모두 넷이었는데, 각각 가죽 무늬가 달랐다.
첫 번째는 붉은색.
두 번째는 호랑이 무늬.
세 번째는 흑색에 곳곳에 하얀 점이 있는 게 별무늬같이 보였다.
마지막인 네 번째는 찬란한 황금색 가죽이었다.
중요한 건 네 마리 모두가 이마에 마석을 박고 있었다는 거였다.
그걸 본 카엘이 깜짝 놀랐다.
적들의 생김새나 마석 때문에 놀란 건 아니었다. 여기에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적들이 나타나서였다.
‘분명 각각 대기산의 관문을 지키고 있다고 들었는데, 벌써 나타나다니.’
아마 농땡이 치며 저택에서 놀던 모양이었다.
문제는 그 탓에 계획이 틀어지게 생겼다는 거였다.
카엘이 소리쳤다.
“우선 저 곰 요괴들부터 해치웁시다!”
마석을 박은 곰 요괴들은 하나같이 소드 마스터보다 강했지만.
라 키레아스와 영노, 카엘의 상대가 못 됐다.
나머지 하나도 소드 마스터인 소피아와 라이칸스로프 브로칸, 엘프 모르타가 합세하자 금세 쓰러트릴 수 있었다.
곰 요괴들을 해치우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지만.
위기다 싶었던 주탄동자의 부하 요괴들은 최후의 수단을 썼다.
주탄동자를 공격해 깨운 거였다.
-뭐야, 이것들이 미쳤나?
주탄동자는 생채기도 나지 않았지만, 부하들이 공격했다는 생각에 버럭 화를 냈다.
몇몇 부하들은 주탄동자가 휘두르는 손에 그대로 소멸해 버리기까지 했다.
그 와중에 하체가 날아가 상체만 남은 부하가 쓰러진 채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주탄동자 님! 적입니다! 적!
-적? 당연히 날 공격하면 부하고 뭐고 다 적이지!
-그게 아니라 적이 쳐들어왔다고요, 적이!
-응?
그제야 주변을 돌아본 주탄동자는 한창 전투 중인 걸 깨달았다.
-뭐야? 정말 적이 쳐들어왔잖아. 내 심복 곰 요괴, 웅동자들을 불러라!
-모두 적을 막다가 다 쓰러졌습니다.
-왜 벌써 쓰러져? 관문이 하나 뚫렸다고 해도 셋은 남아야 할 거 아니냐.
-그게 넷 다 저택에 계셔서…….
-저택에?
-그래도 덕분에 주탄동자 님이 깨어나시기 전까지 공격을 안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냐? 으하하하핫! 그거야말로 하늘이 이 주탄동자를 돕는다는 거 아니겠느냐?
화를 내려던 주탄동자는 부하의 설명에 폭소를 터트렸다.
어떻게 된 영문인지 모르겠지만, 대악환을 쓰러트린 적들이 쳐들어온 게 분명했다.
그래도 주탄동자는 자신이 멀쩡히 깨어 있는 이상, 그들을 모조리 해치울 자신이 있었다.
-좋아! 어디 한번 놀아 보자꾸나!
주탄동자는 여유롭게 외치면서도 적을 얕잡아 보지 않고 곧바로 전력을 끌어내기 시작했다.
두 개였던 뿔 사이로, 세 개의 뿔이 더 돋아나면서 다섯 개가 됐다.
얼굴 곳곳에 새로운 눈이 떠지며 모두 열다섯 개의 눈이 안광을 번뜩이며 사방의 적을 노려봤다.
주탄동자가 본모습을 드러내자 강렬한 요기가 사방에 뻗쳤다.
-한번 이렇게 변하면 그동안 모은 술기운이 쫙 빠져서 싫긴 해도 어쩔 수 없지.
그렇게 중얼거린 주탄동자는 카엘 일행과 싸우기 시작했다.
라 키레아스와 영노는 주탄동자의 공세에 조금 당황했다.
“이야, 제법인데?”
“치, 어디 누가 이기나 해보자고!”
‘라 키레아스 님과 영노 님이 동시에 공격하는데도 밀릴 정도라니……. 정말 대요괴는 대요괴야.’
카엘은 주탄동자의 강함에 놀라면서도 기운을 끌어올렸다.
그러고는 부하 요괴와 싸우고 있던 소피아와 고여를 불렀다.
“소피아! 우리도 가세하자. 고여 님도 함께 싸워요!”
“네!”
“알겠습니다!”
소피아와 고여도 카엘의 뒤를 따라 주탄동자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 정도 전력이 더해지면 조금은 우세해지겠지?’
그러나 카엘의 예상과 달리, 주탄동자를 서서히 압도하기 시작하는 게 아닌가?
-크윽! 뭐야. 이 공격은?!
주탄동자도 당황했다.
그건 바로 카엘과 소피아의 연합 공격이 주탄동자에게 제대로 타격을 주고 있어서였다.
카엘의 강력한 검기도 검기였지만, 소피아의 보조 덕분이었다.
‘소피아가 괜히 소드 마스터가 아니네.’
카엘은 감탄했다.
카엘이 먼저 공격하면, 소피아가 그 위치에 정확하게 추가 공격을 가하고 있었다.
십 년이 넘게 카엘을 돌본 소피아는 카엘의 사소한 습관과 움직임마저 파악하고 있었다.
그게 카엘의 검술에도 묻어나는 걸, 검의 경지에 달한 소드 마스터인 소피아가 감지하고 카엘의 공격을 정확하게 예측한 거였다.
‘손발이 너무 잘 맞잖아.’
고여는 그걸 눈앞에서 목격하고는 감탄하는 한편 이런 생각마저 들었다.
‘부, 부러워. 나도 언젠가는 카엘 님과 함께 저렇게 멋지게 싸울 수 있을까?’
황당한 주탄동자가 부하들을 찾았다.
-내 부하들은 뭐 하는 거야?
그러면서 내려다보니, 늑대 인간과 서방의 귀가 긴 요술사도 제압을 못 하고 있었다.
-이런 쓸모없는 것들!
주탄동자는 혀를 차면서도 냉정히 상황을 파악했다.
‘이대로라면 지겠군.’
당장에도 밀리는 데다가, 주탄동자 자신도 전력을 오래 발휘할 수 있지 않았다.
요력을 발휘할수록 술기운이 조금씩 빠져나가면서 약해졌다.
게다가 이번에 먹은 술이 뭐가 안 좋은지 술기운이 평소보다 빨리 빠지는 느낌이었다.
주탄동자는 몰랐지만, 카엘이 술에 탄 스피노사를 우린 물은 잠이 잘 오게도 하지만, 진정시켜서 숙취에도 좋은 편이기도 했다.
술기운이 주탄동자의 힘에 영향을 미치는지 카엘은 몰랐다.
재운 뒤에 단기간에 승부를 볼 생각이라 쓴 약재가 뜻밖의 행운을 가져온 거였다.
‘하는 수 없지. 마석을 쓰는 수밖에.’
주탄동자는 결심했지만,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술을 마시면서 마석을 건네받은 탓에 받아서 어디 뒀는지 깜빡한 거였다.
평소처럼 부하에게 물었다.
-마석, 내 마석은 어디에다 뒀느냐?
-귀중한 거라고 허리춤에 달아 놓으라고 하셨지 않습니까?
-아, 그랬지!
부하의 대답에 주탄동자는 곧바로 허리춤에 매달린 주머니에 손을 뻗었다.
‘마석만 장착하면 내 힘이 배가 된다. 그럼 바로 해치워 주마!’
그런데.
손에 아무것도 안 잡히는 게 아닌가?
-응?
분명 주머니가 있어야 할 곳에 주머니가 없는 거였다.
‘어떻게 된 거지?’
놀라는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히힛. 이건 내가 잘 쓸게.”
타마모가 마석이 든 주머니를 낚아챈 거였다.